날씨 참 좋지요

 

 

일주일 넘어 몸살감기로 칩거 중이다. 그사이 연분홍 벚꽃잎들 몰골이 말이 아니다. 꽃잔치도 하기 전인데 연일 오락가락하는 비바람 탓이다. 호된 비바람을 감내하며 떨어진 것은 떨어진 대로 날아간 것은 날아간 대로 제자리에서 버티고 있는 것들은 또 그렇게, 제 몫의 시간을 살아내고 있는 꽃잎들을 망연히 바라보다 들어왔다

 

미열에 들뜬 몸으로 따끈한 국화차 한 잔을 들고 앉았다. 낯선 땅에서 동숙한 선생님 얼굴이 노란 찻물 위로 떠오른다. 열다섯 살 연상의 그분은 최상의 배려심으로 나를 대해주셨다. 긴장하고 있는 맹물이란 걸 간파하신 듯 먼저 말문을 열고 다가와 좀 편하게 자신을 풀어놓고 살라고 무언의 말씀을 하셨다. 송구하고 감사했다. 마음을 열면 또 한없이 풀어놓고 싶은 나는 큰언니처럼 기대고픈 마음에 내 이야기도 하고 남의 흉도 같이 보고 손수 까서 입에 넣어주시는 오렌지도 넙죽넙죽 받아먹었다.

 

소중한 날들의 이국풍경이 파노라마를 그린다. 비에 젖은 티타늄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 빌바오의 구겐하임미술관, 시간을 거슬러간 중세도시 똘레도의 빗방울 구르던 골목골목, 매혹적인 메스키타 사원을 나와 우산을 같이 쓰고 걸은 유대인 거리. 열이틀 중 하루를 빼놓고선 종일은 아니어도 날마다 얄궂은 봄비가 내려 나그네의 마음을 적셔 주었다.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의 기술>에서 '이국적인 것'에 대하여 이렇게 쓴다.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 사이에는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1821-1880)라는 이름의 우울해 보이는 열두 살 난 소년이 있었다. 그의 가장 큰 꿈은 루앙을 떠나 이집트로 가서 낙타를 모는 사람이 되어, 하렘에서 코밑에 솜털 자국이 있는 올리브빛 피부의 여자에게 동정을 잃는 것이었다.” 우리가 외국에서 이국적이라고 여기는 것은 고향에서 갈망했으나 얻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앙코르에서도 나는 이곳에서 갈망하나 얻지 못하는 어떤 것을 저곳에서 찾고 있었다. 낡고 허물어져가는, 영락의 기품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크고 작은 사원들! 해를 등지고 선 높은 사원 한 귀퉁이, 한 뼘 그늘에 앉아 땀을 식히며 한줄기 미풍에 가슴이 뻥 뚫렸던 순간도, 카메라를 들이대면 해맑게 웃어주던 커다란 눈망울, 그 안에 비치던 내 얼굴도 시간과 함께 서서히 희미해져간다. 어느 것 하나 붙잡아둘 수는 없는 법. 갈망하나 얻지 못하는 어떤 것이란 세상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바로 그 이 아닐까.

 

앓던 중, 노 수필가 한 분의 부고를 들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이었다. 비바람 맞은 벚꽃잎처럼 초췌한 행색 그대로 택시를 타고 갔다. 만우절 거짓말처럼 4월의 첫 새벽에 숨을 놓으셨다 한다. 국화 한 송이를 올리고 재를 피우고 고개를 숙였다. 살아서 최선을 다해 대해 드리지 못한 게 또 후회로 남았다. 미루어서는 안 될 일들이 늘어간다. 글로 남아 있는 그분은 먼 길 가셨고, 온몸에 열이 돋고 코를 훌쩍이며 연신 쿨럭거리는 나는 여기 있구나. 이 확실한 증거만 안고 황망하게 깊은 밤 비바람 속을 후두둑 돌아왔다.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리곤 다시 끙끙 앓았다.

 

플로베르는 인간의 지식체계와 편견들을 풍자적으로 분류해놓은 <통상관념사전>에서 날씨를 대화의 영원한 주제, 질병의 보편적인 원인'이라고 정의했다. 꽃이 제대로 피려면, 봄이 제대로 오려면 아직 멀었다. 왔다 싶으면 어느새 가고 없을 테니 잘 보아야할 것이다.

 

날씨 탓이라 할 봄앓이도 이제는 좋아지는 것밖에 남지 않았다. 날씨 참 좋지요, 하며 너스레를 떨 날이 꽃잎처럼 수두룩하다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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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썼던 글인데 오늘따라 생각이 나 포스팅해둔다.

지금 나의 심정, 나의 상황이랑 비슷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4월은 어김없이 또 올 것이기에.

분 단위로 쏟아지는 뉴스에 거듭 가슴 조이는 날들, 모두가 너무 아프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어서 제자리를 찾아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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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18-03-09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째 서재 동무님들은 이리 글을 잘 쓰신다요?

프레이야 2018-03-10 21:5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