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을 읽을 때면 결말을 어느 정도 예상하면서 스토리를 따라가게 된다. 줄리언 반스에 의하면 소설은 등장인물이 시간을 거쳐 형성되어가는 것이니까 진정한 문학은 주인공들의 행위와 사유를 통해 심리적이고, 정서적이고, 사회적인 진실을 드러내야 했다. 이렇게 문학에 대한 사유로 시작하는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삶과 문학과 역사에 대한 통찰을 개인의 역사와 나란히 시간의 냉엄한 역설을 통해 드러낸다.

 

반스의 말대로 우리 인생에 문학 같은 결말은 없다는 것, 이 점이 생의 슬픔이기도 기쁨이기도 하다. 많은 부분 이것은 우리 기억의 문제에 달려 있다. 기억을 조작하고 재구성하는 주체는 각자의 우리이기에 자신만의 진실이 다른 사람에게도 진실일 수는 없다. 더구나 자신만의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도 그 근거가 미약하고 사실과는 다른 경우가 허다하다. 줄리언 반스는 모호함과 애매함은 진짜 픽션의 성질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보면 우리네 삶이 논픽션이 아니라 진짜 픽션에 가까운 것 같다.

 

제목은 반어적으로 쓰였다. 결말에 대해 어떤 예상을 하였든 그 예상은 빗나가기 일쑤라는 게 참이다. 그리니 원작과 영화의 결말을 돌이켜 보면 번안제목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예감은 틀릴 것이라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뜻이 되겠다.

 

영화가 원작과 같지만 다르게 연출되어 또 다른 읽기가 되는 건 늘 즐거운 경험이다. 여기서 영화는 원작보다 훨씬 밝고 따뜻하게 인물을 그려내고 결말도 긍정적인 기대를 하게 한다. 원작의 의미심장한 글귀들이 영화적 매력으로 거듭나기에는 좀 무거우므로 인물들의 대사와 몸짓, 표정의 행간에 못다 한 이야기를 담아내며 시각적 요소가 강한 영화의 매력을 잘 살려낸 느낌이다.

 

원작은 1인칭 시점으로 주인공 토니의 학창시절을 1부에 이후 노년까지의 삶을 2부로 구성했다. 영화는 토니의 현재와 회상이 오가는 것으로 구성한다. 빈티지 필름카메라샵을 하며 노년을 그런대로 편안하게 살고 있는 토니가 어느 날 받은 편지 한 통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토니의 성격을 보여주는 대목들이 처음부터 그의 대사와 행동으로 드러나는데 정작 자신은 어떤 점이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자신의 조작된 기억퍼즐이 바로 맞춰진 후의 삶은 좀 달라질 것인가. 후반에 이혼한 전처에게 반성이 담긴 고백을 하는 장면이라든가 우체부에게 차 한 잔을 권하는 장면 같은 것은 영화가 고집불통 토니에게 가능성을 두고 우리로 하여금 낙관적인 기대를 하게 한다. 자신은 정작 잊고 있었던 젊은 시절의 저열한 과오와 천성적인 무심함, 남들은 잘 모르는 시기심과 독한 내면 같은 것들이 인생의 후반에 이르러 조금은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감이다. 반성의 기회나 면죄부를 주지 않고 지나간 것은 지나갔을 뿐, 이제 와서 바꿀 수도 만회할 수도 없고 앞으로도 달라질 것은 없다는 회한만 남겨 생의 끔찍함을 전하는 원작과는 다른 각도다.

 

기억은 현재의 삶에 좀 더 편히 복속되려고 그저 자신을 위해 편집구성 되는 이야기일 뿐, 그렇다고 우리네 삶이 의도와는 달리 흘러가지 않은 적이 한 번이라도 있는가. 반스의 말대로인생여행의 일지는 이리저리 찢기고 누더기가 된 기억을 기워서 기록되고 사고가 없으면 인생의 운행일지는 더욱더 불투명해진다.’ 기록되지 않은 사실과 조작된 기록이 현재의 기억을 장악하여 역사는 자리매김한다. 학생 토니의 말대로 역사는 승자들의 기록이자 역사선생님의 말대로 패배자들의 자기기만이다. 그리고 애이드리언의 말대로 부정확한 기억과 불충분한 기록의 접점에서 생산된다. 하지만 노년의 토니는 이를 번복한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고. 문학도 이와 비슷하지 않은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질되는 개인의 기억과 사실 사이의 일들을 통해 역사와 기억에 대한 냉철한 사유를 던진다. 역사는 집단기억이다. 영화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영화는 문학은 집단의 기억을 회생시켜 벌이는 굿판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생은 지난한 시간 축적되는 것이기에 그 책임성을 간과할 수 없다. 누구든 도의적 책임에서 벗어나기란 어렵다.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무기력함이 장악하는 회한이 들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것들 앞에서 우리는 낯이 붉어오지만 또 하루를 살아가야하고, 그 모든 걸 생의 종착점이 가까워지고 있는 결말로 가서야 어렴풋이 볼 수 있다.

 

- 우리 코 앞에서 벌어지는 역사가 가장 분명해야 함에도 그와 동시에 가장 가변적이라는 것. 우리는 시간 속에 살고, 그것은 우리를 제한하고 규정하며, 그것을 통해 우리는 역사를 측 량하게 돼 있다. 그러나 시간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속도와 진전에 깃든 수수께끼를 파악하 지 못한다면, 우리가 역사를 어찌 파악한단 말인가. 심지어 우리 자신의 소소하고 사적이고 기록되지 않은 것이 태반인 그 단편들을. -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줄리언 반스

 

우리 삶에는 모종의 맥거핀이 널려 있다. 결말에 어떤 확실한 예감을 줄 듯 말 듯 맥거핀은 우리 감정을 몰아가고 이성을 호도하는 경향이 있다. 알 수 없는 결말이지만 맥거핀에 붙들린 이상, 우리는 그것을 좇아 미스테리를 풀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그건 그것대로 두어야 하며 파헤치든 놔두든 다를 바가 없다는 건 나중에야 알게 된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애이드리언의 일기라는 맥거핀(Macguffin)이 주도하는 일종의 미스테리와 서스펜스다. 우리 생이 그렇듯. 평온하게 시작하는 하루가 어떤 놀라운 조짐으로 얼굴색을 바꿀지는 아무도 모른다. 무언가 열쇠를 쥐고 있을 듯한 것들이 알고 보면 특별할 것도 없고 안다고 해도 달라질 게 없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우리가 달려갈 결말은 예상도 예감도 무의미한 게 된다.

 

그렇다면 이 순간 우리는 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냥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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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7-10-23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은 책이기에 얼마나 공들여 쓰신 리뷰인지 더 잘 알것 같아요.
예감을 틀릴 것이라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앞의 예감과 뒤의 예감의 차이는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되네요 이미 이 책 줄거리도 가물가물해진 마당에 말입니다 ^^

프레이야 2017-10-24 08:24   좋아요 0 | URL
쉽고 간단히 위조한 기억이 어떤 파장을 일으키는지 알 수 없는 세상. 몰랐다고 해서 그렇다고 책임을 피할 수는 없는 거죠. 그리고 선하다 솔직하다 이런 평가는 더더욱 할 수 없는 거구요. 나를 포함, 삶도 사람도 참 무서운 것 같아요. 왜곡과 곡해 사이에서 자기변명에 우왕좌왕. 여전히 잘 지내시길요 나인님

2017-10-23 22: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0-24 07:4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