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권의 작법서 (시나리오, 소설 등)를 읽었지만 논픽션 작법서는 처음이었다. 책을 읽으며 기자들이 어찌나 부럽던지. 기자들은 우선 신문사의 도움으로 논픽션을 쓸 수 있다. 논픽션이 여의치 않다면 픽션을 쓸 수도 있다. 기자 출신 소설가들은 너무 많아서 헤아릴 수조차 없다.


(그렇게 좋은 직업이거만 한국 기자들은 어째서 기레기에 만족하는 것일까. 김영란 법 물고 늘어지는 기레기들이여..... 니 돈 주고 사 먹어. 거지 새끼들아!!!)

 

좋은 작법 책이 그러하듯 이 책 역시 굳이 논픽션에 한정할 필욘 없다고 본다. 픽션 작법서로도 활용 가능하다. 방송이든 신문 기사든 영화든 결국엔 스토리텔링이라는 공통점을 지니므로. 

 

 

과학 저술가 스티븐 홀은 이야기를 만드는 동안 자신의 뇌를 MRI로 찍는 실험을 진행했는데 실제로 오른쪽 전두엽에서 각설탕만 한 구역이 활성화되었다. 홀은 <뉴욕 타임스 매거진>에 발표한 글에서 하전두회(inferior frontal gyrus)에 위치한 이 부위를 스토리텔링 영역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곳은 시각피질을 비롯한 뇌의 다른 영역과도 연결돼 있다. 홀은 이 영역이 모여서




스토리 텔링 시스템을 이룬다고 설명한다. (33)

 

나는 존 프랭클린이 논픽션 스토리텔링 교본 <스토리 쓰기>에서 내린 정의를 좋아한다.

 

스토리는 공감을 일으키는 인물이 뜻하지 않게 난감한 상황에 직면하나 그에 굴하지 않고 맞서 돌파구를 찾으려 할 때 발생하는 일련의 행위로 이루어져 있다 (37)

 

 

일련의 행위

 

어떤 스토리든 주요 등장인물은 행위를 하고, 뒤이어 또 다른 행위를 한다. 이 일련의 행위를 작가가 글로 적은 것이 내러티브다.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사건을 일어난 순서대로 기술한 것이 내러티브다.

 

반면 플롯은 내러티브처럼 단순하지 않다. 스토리텔러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신중하게 재료를 고르고 배치한 것이 플롯이다. 재닛 버로웨이는 플롯을 극적 효과와 감정선, 주제 의식이 드러나도록 의도적으로 배치한 사건의 연속이라고 정의한다. 유도라 웰티는 간단히 ?”라고 정의한다. 소설가 E.M 포스터는 왕이 죽고, 왕비가 죽었다가 내러티브, “왕이 죽자 왕비가 비탄에 빠져 죽었다가 플롯이라고 했다.

 

스토리는 내러티브와 플롯이 결합한 것이다. 플롯은 원인과 결과 형태로 전개되고, 이 형태로 이야기가 펼쳐지는 동안 몇 차례 플롯 전환점을 거친다. 로버트 맥키의 정의에 따르면 플롯 전환점이란 스토리를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시키는 국면이다.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주인공

 

주인공이 누군지 알고 싶다면 자꾸 일을 만드는 사람을 찾아라

 

시련

 

재닛 버로웨이는 문학에서는 오직 문젯거리만이 흥미를 불러일으킨다.”고 말했다. 즉 주인공에게 문젯거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련을 인간의 욕망이란 측면에서 생각할 수도 있다. 무언가 원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을 얻기 위해 행동에 나선 인간은 이제 하나의 스토리를 시작할 단초를 갖고 있는 셈이다. 시련이 커질수록 스토리도 커진다. 존 프랭클린은 사랑, 증오, 고통, 죽음 등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경험하게 되는 근본적인 시련을 좋아한다.

 

레이조스 에그리 역시 캐릭터를 설정할 때 동일한 원칙을 내세운다. 불굴의 의지를 가진 주인공이 무언가를 간절히 원한다. 그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없다. 당연히 치열한 갈등이 이어지고, 이것이 묵직한 스토리를 끌고 가는 동력이 된다.

 

해결

 

해설 내러티브의 경우 주제를 다루기 위해 일련의 행위를 기술해 나가지만 반드시 해결 국면이 등장하진 않는다.

 

내러티브 에세이는 짤막한 동선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비네트 역시 해결이 등장하지 않아도 되는 장르다. 삶에 대한 짧은 통찰을 잘 포착했다면 훌륭한 비네트다.

 

나는 해결에 대한 프랭클린의 또 다른 견해에도 동감한다. 그에게 해결은 예외없이, 절대적으로 캐릭터가 스스로 일군 노력의 산물이어야만 한다.우리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운명을 만들어 가는 능동적인 캐릭터에게서 가치 있는 무언가를 얻는다. 맥키는 이런 스토리를 아크플롯이라 부른다. 반대로 주인공이 불가항력적인 상황에 처해 치이고 깨지는 희생자로 그려지는 플롯을 안티플롯이라고 한다.

 

구조.

 

소설가 다린 스트라우스는 나는 기획 단계에서 종이에 각 플롯 라인을 포물선으로 그려 본다. 한쪽 끝에 A, 반대쪽 끝에 B를 적는다. A는 질문이고, B는 그 답이다. 질문은 대개 주인공의 구체적인 바람과 연관돼야 한다고 말한다.

 

내러티브 포물선

 

짐 콜린스는 내러티브 포물선을 이해하는 작가는 거의 없다고 말한다. “시작, 중간, 끝은 물론이고 계속해서 독자를 따라오도록 만드는 사건이 연속해서 배열된다는 사실도 모를 것이다. 굴곡 없이 단조로운 글이 많다. 한 가지 사건이 일어나고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나고 다시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나는데, 사건들을 잇는 통일된 흐름이 없다.”

 

 

발단

 

독자에게 주인공이 누구고, 주인공이 직면하게 될 시련이 무엇일지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정보를 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발단을 인물을 정의하는 단계라고 말했다. 레이조스 에그리는 발단노출시키는 행위라는 웹스터 사전의 정의를 들며 그렇다면 무엇을 노출시켜야 할까? 전체? 전반적인 분위기? 인물의 배경? 플롯? 장소적 배경?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노출시키는 것이 답이라고 했다.

 

좋은 발단을 쓰는 요령은 독자가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것만 알려 주고 그 이상은 알려주지 않는 것이다.

 

배경 정보가 될 만한 수많은 사실 중 이야기에 꼭 필요한 옥석만을 가려내야 한다는 말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인 코맥 메카시가 한 모든 게 알려지는 순간 내러티브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반드시 노출되어야 할 아주 짧은 정보라 할지라도 그로 인해 시작이 지연된다면 쉽게 집어넣어선 안 된다.

 

로버트 맥키는 이것을 사건의 단초라 하고, 누군가는 플롯 전환점 A”, 또 다른 누군가는 시련의 시작이라고 부른다.

 

상승 (발전)

 

<리얼 맥코이>의 작가 다린 스트라우스는 스토리를 풀어내기에 앞서 중심 인물의 삶을 저 위 산꼭대기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는 바위라고 생각해 보라고 말한다.

 

테드 코노버는 내러티브는 문제가 생겼을 때라고 말한다.

 

각 전환점은 앞 뒤로 맞물렸다. 레이조스 에그리의 말처럼 극에서 일어나는 모든 순간은 바로 앞 순간에서 생겨난다.”

 

필립 제라드는 극적인 이야기 구조는 치밀한 순서로 짜인 미스터리의 연속이라고 말한다. ...처음에는 사소한 문제였던 것이 점점 더 큰 문제를 야기하고......가장 큰 미스터리는 최후로 미뤄둔다. “

 

좋은 내러티브는 한껏 희망을 부풀렸다 꺼뜨린다. 상승 단계를 효과적으로 전개하는 또 하나의 특징이다.

 

 

3. 위기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운명의 급전환이라는 뜻을 가진 페리페테이아에 대해 언급한다. 이것은 주인공을 갑자기 위태로운 심연으로 떨어뜨리는 3막의 반전을 말한다.

 

 

당신은 (시간순으로) 발단부터 스토리를 시작하는가? 아니면 다짜고짜 위기로 시작하는가?”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는 <시론>에서 이 같은 딜레마를 인정했다. 호메로스는 사건의 중반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가 플래시백을 사용해 다시 앞으로 돌아간다.

 

사건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 지점에서 시작하면 위기가 먼저 등장한 뒤, 처음으로 되돌아가 발단, 시련, 상승 순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나는 KISS(Keep It Simple, Stupid) 원칙을 따르라고 조언했다.

 

만약 이 플롯 전환점 b가 있다면 운이 좋은 경우다. 시발점이 되는 사건(플롯 전환점 a)과 주인공이 통찰을 얻는 지점 (플롯 전환점 b)이 모두 있다는 것은 완벽한 스토리라는 뜻이며, 문학성 있는 작품으로 탄생할 가능성을 가진 소재를 찾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심오한 심적 변화가 딱히 없을 경우, 위기가 정점을 찍었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이 통찰 지점으로 간주하면 된다. 스스로에게 위가가 해결로 접어든 계기가 무엇이었지?”라고 물어보라. 그 계기를 통찰 지점으로 삼자.

 

4. 절정 (해결)

 

5. 하강(대단원)

 

이런 의문들이 하강 단계에서 해소된다. 따라서 이 단계를 매듭 풀기라는 뜻을 가진 프랑스어 데뉴망(denouement(대단원)’이라 칭하기도 한다.

 

마크 라라비가 스토리텔러로 매번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결말에 의외의 사실을 심어 놓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점

 

소설가 다린 스트라우스는 시점이란 스토리를 전달하거나 경험하는 인물의 심리적 흐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문학 에이전트 피터 루비는 시점을 카메라 렌즈의 위치에 비유한다. 주로 문학성 짙은 논픽션을 쓰는 필립 제라드는 시점은 1인칭도, 3인칭도 될 수 있다. 스토리텔러가 등장인물의 심리에 얼마나 깊이 접근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시점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가치관을 뜻하는 경우가 많다.

 

시점 인물

 

3인칭 시점 내러티브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명의 등장인물을 따라가지만 그 인물은 독자에게 직접 말을 건네지 않는다. 그럼에도 독자는 이 시점인물과 함께 호흡한다. ....때로는 이 시점인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까지 훤히 알고 있다.

 

시점인물 사용은 현대 내러티브 논픽션의 훌륭한 장점 중 하나다.

 

1인칭

 

테드 코노버와 트레이시 키더가 만들어 낸 1인칭 화자는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미국의 논픽션 분야에 일대 변혁을 일으켰던 뉴저널리즘의 자아에 도취된 1인칭 시점과는 다르다. 헌터 톰프슨, 톰 울프 등의 뉴저널리즘 작가는 글에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을 드러내며, 이제까지 본 적 없는 거칠고 이색적인 스타일을 추구한다.

 

뉴 저널리즘은 스토리에서 작가의 생각, 철학, 비전, 표현 방식이 객관적 현실만큼이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작법이다. 내러티브 저널리즘은 정반대다. 작가다운 스타일도 문학적 과장도 필요하지만 그와 동시에 작가의 벌거벗은 비전은 거부한다. 작품에 드러나야 할 비전이 있다면 그것은 등장인물의 것이어야 한다.”

 

3인칭

 

트루먼 커포티가 픽션에서 보여 준 천재적 재능을 현실 속 이야기로 가져와 논픽션 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작품을 쏟아 냈을 때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3인칭 시점을 사용했다. 커포티가 <인 콜드 블러드>에서 유감없이 보여 주었듯, 3인칭은 그것이 가진 가능성과 장점으로 인해 논픽션 스토리텔러가 애용하는 기본 시점이 되었다.

 

3인칭 시점은 첫째 작가 자신이 영화를 찍는 카메라가 되어 장면과 인물의 외적 이미지를 생생하고 자세하게 포착할 수 있다. 둘째 자연의 법칙을 초월해 등장인물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시공간을 이동해 같은 시각 다른 장소에서 벌어진 일을 전할 수 있다. 심지어 과거와 미래를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특권도 누릴 수 있다.

 

필립 제라드는 3인칭 시점의 첫 번째 특징인 카메라 시선을 가리켜 극적인 시점이라고 부른다. 독립된 관찰자가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위치에 머무르기 때문에 가장 객관적이며 저널리즘 정신에 부합한다. 이 시점을 취하는 내러티브는 순수하게 장면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카메라의 위치, 스탠스

 

스탠스는 단순히 카메라를 놓는 위치, 카메라가 향하는 방향이지만 카메라를 놓는 그 사람이 사물을 어떤 식으로 바라보는지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

 

보통 스탠스는 스토리가 펼쳐지는 모습을 독자가 가장 잘 볼 수 있는 각도를 잡기 위해 선정한다.

 

하나의 스토리는 여러 가지 시점에서 풀어낼 수 있다. 그러나 독자가 주제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시점을 선택하는 것은 작가의 일이다라고 말했다.

 

 

스탠스는 시점인물의 위치인 경우가 많다.

 

스탠스를 선택할 때 무슨 대단한 과학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고른다는 게 중요하다. ...독자를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하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야기를 바라보는 위치에 서 있게끔 해애 한다. 마치 그들 자신이 그곳에 있는 것처럼 사건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핵심이다.

 

대상과의 거리

 

일단 시점인물을 선택하고, 1인칭인지 3인칭인지 결정한 뒤 스탠스까지 정했다면 이제 한 가지만 남는다. 이야기에 얼마나 가까이 접근할 것인가?

 

거리가 달라지면 내러티브도 달라지고, 언어도 달라진다. 거리가 아주 멀면 그래서 사건 현장을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면 요약 형식의 내러티브가 된다. 거리가 좁혀지면 현장 내러티브로 전환된다. 이런 구분은 어떤 매체가 됐든 내러티브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내러티브를 쓸 수 없다.

 

.....하지만 토드와 조너선은 34번의 급류를 거치는 동안 일어났던 이 많은 일을 단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과거의 일을 훤히 알고 있는 역사가처럼 시간과 공간을 건너뛴다. ....무슨 일이 있었나를 간추려 보고하는 요약 내러티브 내지는 역사 내러티브 스타일의 저널리즘 시점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맥두걸 일행이 녹색 장벽에 이르는 순간 드라마가 펼쳐진다. 작가는 지상으로 급하강해 사건이 벌어지는 현장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독자는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생생하게 액션을 지켜본다. 만약 훌륭한 스토리텔러라면 바로 이때 현장 내러비트, 일명 극적 내러티브로 전환한다.

 

요약 내러티브와 현장 내러티브는 기본적으로 추상화 사다리에서 점하는 위치가 다르다. 이 사다리는 작가들에게 유용한 개념을 제공한다. 가장 구체적인 단계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형체가 흐려지며 추상화하는 식이다.

 

사다리 맨 아래 칸은 사건 현장에 서 있는 것과 같다. 현장 내러티브라는 표현은 여기에서 온 것이다. 다 보이고 다 들린다. 때로는 냄새까지도 맡을 수 있다. 현장을 바로 앞에서 지켜보고 있으므로 등장인물과 함께 느끼고 반응한다. .....추상화 사다리의 가장 아래 칸에서는 감정이 솟아난다.

 

사다리를 오를수록 독자에게 보여 주는 시간과 공간의 폭이 넓어진다. 거추장스러운 디테일은 생략되고, 이 단계에 포함되는 모든 것은 간략하게 한두 문장으로 요약된다. 요약 내러티브라는 표현은 여기서 나왔다. 사다리를 올라가면 큰 그림을 볼 수 있지만 구체적인 형체는 볼 수 없다.

 

요약 내러티브는 구체성을 내준 대신 다른 가치를 얻는다. 시야가 넓은 위 단계에서 큰 그림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은 다양한 상황에 적용 가능한 지식을 줄 수 있다는 뜻이다.

 

언론매체의 보도기사는 대부분 사다리의 중간 칸에 자리한다.

 

대부분의 논픽션 작가는 끊임없이 현장 내러비트와 요약 내러티브를 오간다. 그때마다 거리가 가까워졌다 멀어진다. 그들은 말하지 말고 보여주라는 글쓰기 스승들의 지겨운 가르침을 무시한 채 말하기도 하고, 보여 주기도 한다. 더불어 그들은 좋은 글은 계속해서 추상화 사다리를 오르락내리락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목소리와 스타일

 

메리 로치가 누구인가. 티라노사우루스를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서 있는 폼이 패션계 명사 같다라고 표현한다든가, 도너 파티의 식인 살인마들이 세상 어느 요리책에도 나와 있지 않은 음식에 손을 댔다며 뜻밖의 순간에 재기 넘치는 익살을 던질 줄 아는 작가다.

 

말장난도, 우스갯소리도, 시각적 환기도 없다. 늘 그렇듯이 존 맥피의 글은 카펫이 펼쳐지듯 부드러운 전개를 보인다.

 

그렇다면 목소리란 정확히 무엇일까? ......내가 내놓을 수 있는 포괄적인 정의는 글에서 저절로 드러나는 글쓴이의 개성이라는 것이다.

 

보고서적 목소리

 

보고서적인 글쓰기란 목소리를 지우는 글쓰기다.

 

1인칭 시점과 목소리

 

거침없이 대담하게 글을 썼던 뉴저널리즘 작가들에게 스토리는 주제에 대한 이야기면서, 자신에 대한 이야기였다. 헌터 톰프슨의 글은 모두 헌터 톰프슨 렌즈를 통과한 것이고, 노먼 메일러의 모든 논픽션에는 노먼 메일러가 있다. 이렇게 자아가 드러나려면 현실적으로 1인칭 시점이 되어야 한다.

 

세라 데이비드슨은 처음 잡지에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릴리안 로스가 내 이상형이었다. 그녀는 라는 단어를 한 번도 쓰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구심점이 되는 자아가 확실히 존재했다고 말한다.

 

트레이시 키더는 필요에 따라 1인칭 시점을 사용하며 주인공의 특징을 부각하는 역할로 자신을 이용했다. 실제로 문화기술지학을 공부했던 테드 코노버는 <정처없이 떠돌다>를 쓰기 위해 몰래 화물열차에 올라타 이 농장 저 농장으로 날품팔이를 다녔고, <신참>을 쓸 때는 실제 교도관으로 취직했으며, <코요테>를 쓰기 위해 불법 이민자 무리에 섞여 국경으로 잠입하기도 했다.

 

페르소나와 작가의 위치

 

페르소나는 목소리의 필수 요소다. 글에 개성을 입히고 싶다면 그것이 어떤 종류의 개성인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즉 페르소나가 편해지면 절로 생겨나는 것이 목소리다. 트레이시 키더의 다음과 같은 말처럼, “아주 서서히 글을 쓰는 목소리를 찾아냈다. 지적이고 공정하며 이성적인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나의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의 것이었다.”

 

작가의 위치는 또 다른 문제다. 무대에서 펼쳐지는 상황을 내러티브라고 할 때 위치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작가가 서 있는 곳을 말한다.

 

<흐르는 강물처럼>의 저자로 알려진 시카고대학교 문학 교수 노먼 매클린은 상황에 따라 무대 안팎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서술자의 유연성, 역동성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매클린이 남긴 유일한 장편 논픽션 <젊은이들과 산불>20세기 논픽션의 고전으로 꼽힌다.

 

목소리와 스타일

 

목소리가 글에서 묻어나는 글쓴이의 성격이라면 스타일은 그 성격이 겉으로 표현된 것이다. 소설가 다린 스트라우스는 글을 피막처럼 싸고 있는 언어적 표층을 말할 때 이 구분을 상용한다. 그는 이 개념에 단어 선택, 문장 형식, 비유법 등 허구의 인물이 말하고 생각할 때 그의 욕망과 역사를 드러내는 언어적 특징이 포함된다고 설명한다.

 

논픽션의 내러티브에도 언어적 표층이 있다. 이 표층은 강력한 서술자가 내러티브를 지휘할 때 절로 떠오르는 서술자의 자아를 반영하는 동시에 언제든 무대 위 시점인물을 반영한다. 다시 말해 언어적 표층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계속 변화한다. 이런 면에서 예술은 인생의 모방이다.

 

내러티브에서 저자가 취사선택하는 단어의 수준은 그의 스타일을 나타내는 주요 표식이다.

 

비유의 기교

 

비유는 스트라우스가 꼽은 언어적 표층의 마지막 요소이자 작가 특유의 목소리를 살려 주는 주된 요소다.

 

에릭 라슨은 은유법뿐 아니라 처럼, 같이, 인 양등을 사용해 명확히 비유하는 직유법의 고수이기도 하다. ...진정으로 수사를 추구하는 사람은 유명한 인물, 사물, 사건에 빗대는 인유법, 말장난, 의인법을 사용한다.

 

폴라 라로크는 이러한 수사법을 숲길 위에 떨어져 있는 보석에 비유하며, 독자는 이 보석에 이끌려 계속 길을 걷는다고 말한다. .....세 문단에 하나씩이 적당하다.

 

자기만의 목소리 만들기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궁극의 비법은 긴장을 풀고 자기다워지는 것이다.

 

긴장이 들어가지 않았는지 체크하고 갑시다라고 말하며 목과 등, 어깨가 굳으면 좋은 글이 나오지 않는다고 이유를 설명한다. 참가자들은 몸을 풀고 다시 글을 쓰는데 그러면 키보드 두드리는 속도가 다시 빨라진다.

 

마음이 편하면 글쓰기가 빨라지고, 글 쓰는 속도가 빠르면 좀 더 자기다워진다.

 

메리 로치에게 내러티브를 만드는 모든 과정은 사실과 재미를 엮는 과정이다. 그래서 그녀는 내러티브 작가 지망생에게 마음 가는 대로 즐기면서 하라고 조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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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9-02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잘 쓰고 싶은 마음이 많으면 글에 힘이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지고, 한 문장이 지나치게 길어져버려요. 마음을 차분하게 한 뒤에 완성된 글을 다시 읽어보면 고쳐야 할 곳이 보입니다. 서평 이벤트처럼 마감 기간 내에 올려야 하는 글을 쓸 때, 미리 써두는 게 좋아요. 괜히 여유 부리다가 마감 기한 이틀 남겨두고 쓰기 시작하면 낭패입니다. 아무리 초인적인 능력이 발휘한다고 해도 제대로 써질 리가 없어요. ^^

시이소오 2016-09-02 11:34   좋아요 0 | URL
어깨에 힘 빼고 쓰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6-09-02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작법서에 대한 정의를 : 작법서를 읽고 나면 독자 모두가 소설가가 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는 책`이라고..

시이소오 2016-09-02 11:33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 저도 이 책을 읽고 `어라, 그럼 나도 논픽션을 써 볼까` 했습니다.

stella.K 2016-09-02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에 저의 잊고 있었던 수업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내용 다 듣고도 결국 내 멋대로 쓰다 웅덩이에 빠지곤 하죠.
어쨌든 허우적 거리다 빠져 나오면 좋은데
제가 여럿 빠뜨려놓고 구해 주지 못한 인물들이 한 트럭은 됩니다.
이야기 한 편 쓴다는 게 쉬운 게 아닙니다.

그런데 시이소오님은 책 읽기도 빠듯하실 텐데 이런 정리는 언제 어떻게 하십니까?
저는 이렇게 쓰려면 2박3일은 걸릴 것 같습니다.ㅠ

시이소오 2016-09-02 13:27   좋아요 0 | URL
이야기를 쓴다는 게 쉬운 게 아니죠.

저도 이야기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게 안 되니까 계속 책으로 도피중입니다.

정리하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책들이 있잖아요? ㅎㅎ

저도 2박 3일은 걸린듯 하네요 ㅋ
 


이 달의 책으론 


나오미 클라인의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

서중석 선생님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5,6 

군나르 시르베크의 <서양철학사>를 뽑겠습니다. 


나오미 클라인의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는 반납 기한에 밀려 

미쳐 독후감을 쓰지 못했네요. 다시 빌려서 독후감 꼭 쓰고 싶네요. 이 책의 유일한 단점은 다소 장황하다는 겁니다. 

조금만 얇았으면 좋았을텐데요. 전 국민이 읽었으면 좋겠고 전 세계인이 읽었으면 좋겠네요. 

기후 운동이 어떻게  돼지같은 자본주의를 끝장낼 수 있는지 그 실례를 보여줍니다.  


서중석 선생님은 강준만 쌤과 현대사 해석에서 다소 다른 견해를 보이십니다. 

강준만 쌤보다는 서중석 쌤의 관점에 더 신뢰가 가네요. 


노르웨이판 <세계철학사>라 불안했는데, 비교적 평이하면서도, 

과학, 사회학 등을 끌어안는 최신의 철학 입문서네요. 

1,000페이지가 넘어가는 방대한 분량에 비해 금방금방 읽힙니다. 

선진국 철학서라 그런지, 여성, 불평등에 많은 관심을 보이네요. 

신세기 철학서 답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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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16-09-01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매번 매월 느끼지만 어떻게 이렇게 많이 읽을 수 있으세요? 정독 속독 통독 모든 독을 다 들이대도 그저 경이롭습니다!

시이소오 2016-09-01 16:07   좋아요 1 | URL
매번 말씀드리지만 누구나 읽을수 있습니다. 한가지 팁은 일명 샌드위치 독서법인데 이거 책을 쓸까요? ㅎ

초딩 2016-09-01 16:09   좋아요 0 | URL
우어 샌드위치 읽단 맛나 보여요. 그 방법!

초딩 2016-09-01 16:09   좋아요 0 | URL
궁금하네요 :-) 책을 내시면 꼭 살거에요 ㅎㅎㅎ.

초딩 2016-09-01 16:10   좋아요 0 | URL
한달만 해보고 30권만 그렇게 읽어 보고 싶네요 ㅎㅎㅎ

2016-09-01 16: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9-01 16:17   좋아요 2 | URL
읽기 버거운 책 사이사이에 가벼운 책을 끼워 넣는 단순한 방법이죠. 속없이 빵만 두장 겹쳐먹으면 맛이 없어 못 먹듯이 읽기 어려운 책만 연달아 읽으면 누구라도 금새 질리거든요. 그러니까 사이사이에 샌드위치 속처럼 가벼운 책을 읽는거죠.
빵없이 속만 먹어도 금새 질리듯 너무 가벼운 책만 읽어도 질리거든요. 사이사이에 속을 채워넣으면 10단 샌드워치도 먹을수 있답니당 ^^

2016-09-01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란 체크는 무슨 뜻인가요? 특별히 좋았던 책을 의미하는 건가요?
저도 종종 샌드위치 독서법 시도하는데 전 머릿속에서 책내용이 섞여서 이게 어디나왔던 내용이더라 헷갈리더라구요ㅎㅎ 독서법이랑 상관없이 시이소오님이 대단하신 게 맞는 것 같아요ㅋㅋ

시이소오 2016-09-01 21:01   좋아요 0 | URL
장르를 다양화하면 안헷갈려요. ㅋ
노란색은 독후감 쓴 책 체크한거에요 ^^

고양이라디오 2016-09-01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노란체크 궁금합니다. 그리고 여기 의문의 1패 추가요ㅎㅎ

시이소오 2016-09-01 21:06   좋아요 0 | URL
독후감체크한거에요. 의문의 일패라니요?

고양이라디오님은 읽으신 책 거의 전부 리뷰쓰셨던데 제가 졌습니다 ㅋ

지그재그 2016-09-01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대단...배우고 갑니다.

시이소오 2016-09-01 23:52   좋아요 0 | URL
배우다니요?송구스럽습니다 ^^

나이니 2016-09-02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읽기도 벅찬데 리뷰에 통계까지 부럽네요^^ 북플을 이용하는 이유가 독서 통계를 제공해줘서인데 시이소오님의 월별 통계를 벤치마킹해 줬으면 좋겠네요^^

시이소오 2016-09-02 14:20   좋아요 0 | URL
저도 장르별로 분석해주는 시스템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

페크pek0501 2016-09-10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것 보고 저도 독서 계획을 다시 세워 보기로 했어요. 오늘부터~~~ ㅋ

시이소오 2016-09-10 13:40   좋아요 0 | URL
화이팅입니다 ^^
 

저자는 삶을 더 유의미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죽음을 정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완전히 유의미한 삶을 위해서는 양뿐 아니라 질이 필요하다. 진화의 개념들은 삶이 유의미하다거나 유의미해지는 중이라거나 점점 더 유의미해진다는 주장을 뒷받침 할 수 있을까? 다윈에 따르면 최근의 생물들은 과거의 생물들보다 더 고등할 수밖에 없다. 다른 종들보다 어떤 식으로든 유리했기 때문에 최근의 생물은 생존투쟁에서 살아남은 것이 아닌가.



 

스티븐 제이 굴드는 생물학적 진보에 대해 격렬히 비판한다. 진화는 무작위적 운동이다. 생물들이 더 복잡해진다고 더 우월해지는 것은 아니다. 리처드 도킨스는 진보에 대해 긍정적이다. 다윈의 견해는 오히려 중립적이다. 다윈에 따르면 생물들이 복잡해짐에 따라, 생물들은 자신의 복잡성을 증가시키는 새로운 수단들을 개발했다. 그러나, 단순한 동물들이 복잡해지는 필연적 경향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보적 진화에 대한 최고의 권위자는 마이클 루즈다. 루즈에 따르면 진화와 진보는 서로 얽혀있고 거의 뗄 수 없는 관계다.

 

월 듀런트 : 문화적 진보에 대한 한 역사가의 견해

 

듀런트는 문화적 진보를 옹호한다. 그는 니콜라 드 콩도르세의 예를 든다.

 

그런 상황에 처한 사람이 최후의 희망으로 버티는 지경에 몰리고, 개인적으로 귀족의 특권과 재산을 모두 허무하게 잃고, 온 유럽의 젊음이 더 나은 세계에 대한 희망을 걸었던 그 대혁명이 무차별적 의심과 공포를 양산하는 상황에서 낙담과 침울의 서사시를 쓰는 대신에 하필이면 진보의 찬가를 썼다는 사실은 나를 늘 새삼 경탄하게 한다. 사람이 인류를 그토록 믿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어쩌면 그 후로 영영 다시는 없을 것이다. ”

 

장 피아제 : 지식은 진보하는 방향으로 진화한다

 

피아제는 동화와 조절을 평형화라고 부른다. 평형화란 유기체와 물리적 인지적 환경 사이에서 최적의 평형 상태가 산출되는 과정이다. 생물학적 진화에서 평형화의 결과는 유기체가 물리적 환경에 더 잘 적응하는 것, 곧 유기체와 물리적 환경 사이의 평형화가 더 잘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지적 진화에서 평형화의 결과는 유기체가 인지적 환경에 더 잘 적응하는 것, 곧 유기체와 인지적 환경 사이의 평형화가 더 잘 이루어지는 것이다.

 

로버트 라이트 : 게임이론, 진화, 삶의 의미

 

 

라이트는 생물학적 문화적 진화를 이끌고 좌우하는 주요 원리는 넌제로섬이라고 주장한다. 넌제로섬이란 게임이론에서 양쪽 참가자가 모두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상황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개체들은 점점 더 복잡한 정보를 처리하면서 서로 더 기꺼이 협력하게 된다. 사회의 복잡성이 증가함에따라 협력을 통해 성과를 거두는 능력도 증가한다. 라이트는 샤르댕과 유사하게 지구적 의식의 출현이 임박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스티븐 핑커 : 라이트의 진보주의에 대한 비판



 

핑커는 문화적, 도덕적 진보가 일어났다는 라이트의 견해에 동의한다. 그러나 진화에 목적이나 목표, 운명을 가졌다는 의견에 반대한다. 모종의 진보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진보가 불가피한 것은 아니다.

 

대니얼 데닛 : 만능 산()으로서의 진화

 

데닛은 진화를 모든 것을 갉아먹는 만능 산에 비유했다. 세포로부터 의식과 우주까지의 만물은 진화적 관점에서 가장 잘 설명된다는 뜻이다. 형이상학, 인식론, 종교, 삶의 의미도 마찬가지다. 데닛은 위대한 우주적 피라미드라고 표현한다. 맨 위의 신에서부터 아래로 정신, 설계, 질서, 카오스를 거쳐 무에 이르는 위계. 신은 궁극의 스카이훅”(아래쪽의 구조물을 위에서 잡아당겨 유지시키는 갈고리)이다. 기적적인 설계의 원천. 반면 진화는 피라미드의 방향을 뒤집어서 설계를 상향식으로, 테닛이 크레인이라고 부르는 것들에 의해 설명한다.

 

진화는 삶의 의미를 도출하기 위해 신적인 스카이 훅따위는 필요치 않는다. 삶의 의미는 바닥에서부터 창조되어야 한다. 과거에는 생명도 없고, 정신이나 의미도 없었다. 의미는 위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정신이 발전함에 따라서 의미는 아래로부터 번져 올라온다. 의미는 완성된 의미가 아니지만, 그 의미는 정신이 발전함에 따라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

 

마이클 셔머 : 삶의 의미는 우리 안에 내장되어 있다.

 

잡지 <스켑틱>의 편집장

 

셔머는 우리는 이 삶이 유일한 삶인 것처럼 살면서 타인들과 매 순간을 가장 중요한 대상으로 대해야 한다고 단언한다.

 

스티브 스튜어트 윌리엄스 : 다윈과 삶의 의미

 

생물학에는 목적론적 대답이 없고, 역사적 대답만 있다. 진화론에 따르면,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은 우리가 진화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목적을 위해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삶에 궁극의 목적이 없더라도, 삶을 살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궁극적으로 무의미하더라도 삶은 여전히 좋을 수 있다. 삶의 의미가 외부에서 부여되는 것이 아니어도, 우리는 삶에 의미를 부여할 자유가 있다. 만일 우리가 목적들을 가진다면 우주의 일부도 목적을 가진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우주를 숙고할 때, 우주의 일부는 의식이 있다. 진화론의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우주가 점차 자기의식을 획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존 스튜어트 : 진화하는 우주 안에서 삶의 의미

 

진화는 협력을 선호한다. 또한 규모가 큰 조직일수록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이 더 뛰어나다. 방해가 없다면, 지구적 조직과 은하적 조직이 발생할 것이다. 더불어 지능도 향상되어 물질과 에너지를 자유자재로 부리는 경지에 다다를 것이다.

 

스튜어트에 따르면 진화는 대체로 자발적으로 진행해왔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우리가 지휘하거나 조정해야만 계속된다. 스튜어트는 이를 의도적 진화라고 부른다. 수동적 수용자에서 능동적 참여자로의 이 같은 이행은 진화의 지속을 위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인류가 이 위대한 진화적 이행의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면, 우리는 우리 존재의 의미와 목적을 산출하는 역할을 떠맡은 셈일 것이다.”

 

피에르 테야르 드 샤르댕 : 보편적 진보적 진화

 

샤르댕에 따르면 진화는 의식의 복잡성을 증가시키고, 의식 없는 지권을 반쯤 의식있는 생물권으로, 결국엔 의식 있는 정신권noosphere”으로 변모시킨다. 정신권이란 지구를 둘러싼 생각의 층이며 인류의 집단적 의식을 포함한다. (오늘날 몇몇 논평자들은 인터넷을 테야르가 예언한 정신권의 부분적 실현으로 간주한다.)

 

진화는 이론일까, 시스템일까, 또는 가설일까? 진화는 이것들을 훨씬 능가한다. 진화는 모든 이론, 모든 가설, 모든 시스템이 존중해야 하는 조건이며 향후 그것들이 생각 가능하고 참되려면 반드시 충족해야 하는 조건이다. 진화는 모든 사실들을 비추는 빛이며 모든 선들이 따라야 하는 궤적이다. ”

 

정신권 또는 정신세계의 힘과 영향이 계속 증가한다면 언젠가 오메가 포인트에 이를 것이다. 오메가 포인트란 지고의 의식, 곧 신을 의미한다. 오메가 포인트가 진화의 숭고할 만큼 적합한 결과이려면 반드시 사랑의 연합이어야 한다.

 

오직 사랑만이 살아있는 존재들을 완성하는 방식으로 그것들을 통일할 수 있다. 사랑만이 살아있는 존재들 속의 가장 깊은 것으로 그것들을 사로잡고 연합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일 경험하는 사실이다. 연인들이 상대방 안에서 자신을 상실했다고 말할 때가 아니라면, 연인들은 언제 서로를 가장 완벽하게 소유한 상태에 이르겠는가? 실제로 사랑은 매순간 우리 주변의 모든 곳에서, 두 사람 사이나 여러 사람 사이에서, 전체화함으로써 개인화하는 마법같은 위업을, 모순적이라고 하는 그 위업을 성취하지 않는가? 사랑이 매일 작은 규모에서 그 위업을 성취할 수 있다면, 언젠가 세계 규모에서 그 위업을 성취하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우주의 통일성의 기반은 물질이나 에너지가 아니라 영 혹은 정신이다. 영과 정신은 진화를 추진하는 힘이다. 테야르는 우주의 진화에 관한 이 같은 포괄적인 서사시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했다. 그 서사시에서 모든 진화의 종착점은 최고의 좋음이다.

 

자크 모노 : 우주적 의미를 추방하기

 

샤르댕에 대한 반론을 담은 책은 유명한 자크 모노의 <우연과 필연>이다.

 

 

진화가 이룩한 거대한 체계의 뿌리에 있는, 철저히 자유롭지만 맹목적인 순수 우연, 현대생물학의 이 핵심 개념은 더 이상 가능하거나 심지어 상상 가능한 가설들 중 하나가 아니다. 오늘날 그 개념은 관찰되고 검증된 사실에 부합하는 유일한 가설이다. 이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 언젠가 바뀔 것이라고 추측할 또는 희망할 근거는 없다. ”

 

모노가 보기에 진화 과정은 명백히 비목적적이다.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운명이 아니다. 우리는 우연한 사건이다. 앎의 윤리는 자기부과적이다. 앎의 윤리는 어쩌면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다.

 

고대의 약속은 산산조각났다. 마침내 인간은 우주의 으스스한 광활함 속에서 자신이 외톨이임을 안다. 자신이 그저 우연히 발생했음을 안다. 인간의 운명은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다. 인간의 의무도 마찬가지다. 위쪽의 왕국, 또는 아래쪽의 어둠. 선택은 인간의 몫이다.”

 

줄리언 헉슬리 : 진화를 지휘하는 것에서 삶의 의미를 얻는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헉슬리 가의 일원. 올더스 헉슬리가 형이다.

 

헉슬리에 따르면 현대 세계에서 의미를 깨닫는 최선의 길을 제공하는 것은 과학이다. 과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미래가 과거보다 더 좋을 것이라고 희망할 근거가 있다. 진화생물학은 인간의 운명에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우리는 새로운 가능성들을 실현하는 쪽으로 진화를 이끌 수 있는 행위자다. 이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다.

 

진화과정은 무기적/우주적 진화에서 출발하여 유기적/생물학적 진화를 거쳐 이제 심리사회적/문화적 진화에 이르렀다. 진화론적 인본주의는 헉슬리의 삶에 의미를 제공했다.

 

진화론적 인본주의 덕분에 나는 우리가 태어난 이 낯선 우주를 외경심과 궁금증을 동반한 살아있는 대상이자 지적 호기심의 대상으로 볼 수 있었다. 또한 나의 경이감과 궁금증이 이 우주에서 중요하고 가치 있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내가 경험하는 세속적 기쁨과 만족, 공포와 비참을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실현의 개념과 연결할 수 있었다. 가능성들의 점진적인 실현이라는 진화론적 인본주의의 개념은 개인적 윤리의 발전으로부터 대규모 진화까지 모든 유형의 지향성 과정들을 평가하는 공통의 잣대이며, 긍정적 태도와 신념을 유지하고 음흉한 적과 같은 부정과 절망의 정신에 맞서기 위한 탄탄한 기반을 제공한다. 진화론적 인본주의는 노력과 창조적 활동과 즐거움의 긍정적 의미를 승인한다.

 

어떤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인데, 진화론적 인본주의는, 한때 내가 보기에 추상적이며 고립된 구역들에 머물렀던 지적인 사변과 영적인 열망을 구체적 현실 속의 유의미한 자리로 복귀시켰다. 또한 그럼으로써 내가 자연과 하나라는 느낌을 회복시켰다.“

 

 

에드워드 윌슨 : 종교로서의 진화

 

 

윌슨은 종교적 신화와 관행을 해부한 끝에 종교적 믿음을 품는 성향은 인간 정신 속의 가장 복잡하고 강력한 힘이며 십중팔구 인간 본성의 근절할 수 없는 한 부분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종교는 과학과 결합할 것이다. 진화는 새롭고 더 나은 종교적 신화의 토대일 수 있다.

 

저자는 테야르, 헉슬리, 윌슨등의 관점을 받아들여 삶은 진화하기 때문에 유의미하며, 우리는 이 의미의 진화에서 핵심역할을 하기 때문에 유의미한 삶을 산다는 결론짓는다. 그러나 진화가 야기한 세상의 온갖 고통과 참상 앞에서 마냥 미래를 긍정할 수 있을까.

 

저자는 자신이 낙관론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미국영어 유산사전>은 낙관론을 가능한 최선의 결과를 예상하거나 한 상황의 가장 희망적인 측면들에 시선을 고정하는 경향이라고 정의한다. 그렇다면 희망은? <미국영어 유산사전>희망하다를 이렇게 정의한다. “실현을 기대하면서 무언가를 바라다. 확신 혹은 기대를 품고 미래를 내다보다.” 저자는 희망도 거부한다.

 

낙관론도 아니고 희망도 아니라면? 삶이 유의미하기를 바라는 것은 삶이 유의미하다고 희망하는 것이 아니다. 바람과 열망은 기대를 함축하지 않는다.

 

알프레드 테니슨 : 오디세우스의 몸부림

 

어쩌면 이것은 몸부림일까.

 

나는 내가 만난 모든 것의 한 부분

그러나 모든 경험은 아치이며

여행해보지 못한 세계가 그 아치를 통해 번득이네.

내가 움직이면, 그 세계의 변방은 영원히 영원히 멀어지지

멈춘다는 것은 얼마나 따분한가, 종결한다는 것,

불타오르지 못하고 녹슨다는 것, 쓸모 있게 빛나지 못한다는 것!

삶이란 단지 숨쉬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

한결같던 영웅적 심성들은

시간과 운명에 의해 약해졌지만, 우리는 강하다네.

힘쓰고, 추구하고, 발견하고, 포기하지 않을 의지가 있으므로. “

 

저자에 따르면, 율리시스에게 의미란 몸부림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 희망을 거부함


 

 

카잔차키스는 니체와 베르그손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카잔차키스는 보편적인 엔트로피에 맞서 싸움으로써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고 선언하고 이 생각을 신과 연결했다. 그에게 신이란 기본 물질을 시스템으로 조직하여 점점 더 미묘하고 발전된 형태의 존재들과 의식들을 표출할 수 있게 해주는 반엔트로피적 생명력을 의미했다.

 

언제가 목표에 도달하거나 닻을 내리거나 집에 도착하리라는 기대나 희망없이 정직하고 용감하게 분투하기. 율리시스와 마찬가지로 카잔차키스의 유일한 안식처는 추구 그 자체에 있었다. 삶의 의미는 추구와 몸부림에서 발견된다.

 

우리는 희망과 절망을 모두 넘어설 필요가 있다. 낙원에 대한 기대와 지옥에 대한 공포는 모두 우리가 마주한 것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한다. 우리 마음의 참된 고향은 의미 추구 그 자체다. 우리는 어떤 보상도 기대하지 않고 의미를 창조하기 위해 용감히 싸우는 전사가 되어야 한다. 심연을 두려워하지 말고 용감히 응시하면서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삶을 온전히 책임지는 것에서 기쁨을 발견한다. 비극앞에서도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삶은 본질적으로 몸부림치는 싸움이다. ”

 

 

앙드레 모루아 : 삶 안에서 의미를 발견하기

 

모루아는 삶의 의미란 우리의 생동하는 싸움에서, 삶의 경험과 활동에서 발견된다고 말한다.

모루아의 통찰은 카뮈의 원조격이다. 카뮈는 추상적 관념들이 우리를 세계로부터 멀리 떼어놓는다고 본다. 의미를 얻기 위해서는 평범한 장소로, 우리 주변으로, 과거에 우리가 일상이라고 불렀던 특별한 곳으로 돌아와야 한다.

 

이 하늘과 하늘을 향한 이 얼굴들 사이에는, 신화, 문학, 윤리, 종교를 매달 고리가 없다. 다만 돌들과 살과 별들, 그리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진실들만 있다.”

 

윌 듀런트 : 모든 것에서 의미를 발견하기


 

듀런트는 우리가 더 큰 삶을 위해 죽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묻는다. 만일 우리가 개인들이 아니라 생명체 속 세포들이라면, 생명체를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죽는다. 죽음은 쓰레기를 제거하고, 새로운 생명이 창조됨으로써 죽음을 극복한다. 이 같은 생명의 유구화는 삶에 의미를 제공한다. 개체는 죽어도 삶은 끝없이 계속된다.

 

요컨대 삶의 가장 단순한 의미는 즐거움이다. 경험 그 자체의 유쾌함, 건강의 유쾌함, 근육과 감각, 혀와 귀와 눈의 순수한 만족이다. 만일 아이가 어른보다 더 행복하다면, 그것은 아이가 몸을 더 많이 가지고 영혼은 더 적게 가졌으며 철학보다 자연이 더 먼저임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팔다리를 풍부하게 놀릴 뿐, 팔다리의 의미를 묻지 않는다. ....설령 아름다운 순간들 외에는 삶에 의미가 없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렇게 빗속을 터벅터벅 걷거나, 바람에 맞서거나, 순백의 설원에 발자국을 남기거나, 노을이 밤으로 바뀌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은 삶을 사랑할 이유로 너무나 충분하다.”

 

사랑은 개인을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와 연결한다.

 

나는 전체의 한 부분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낙담하지 않는 것을 본다. 많은 동료들과 공놀이를 하는 천한 무지렁이가 삶의 놀이에서 물러나 격리된 채 시들어가는 이 고립된 사상가들보다 더 행복하다.....우리가 자신을 살아있는 집단의 부분으로 여기면, 우리는 삶을 조금 더 충만하게 느낄 것이다.....삶에 의미를 부여하려면 당사자 자신보다 더 크고 영속적인 목적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사물이 더 큰 전체의 부분으로서의 관계를 통해서만 중요성을 가진다면, 비록 모든 삶 일반에 형이상학적이고 보편적인 의미를 제공하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어떤 특수한 삶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 삶의 의미는 그것이 더 큰 무언가와 맺은 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들 딸을 둔 아버지에게 삶의 의미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보라. “우리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이라는 아주 간단한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

 

듀런트도 사랑, 관계, 활동에서 의미를 발견한다.

 

최후의 국면에 나의 보물은 어디에 있을까? - 모든 것에.”

 

듀런트의 글은 감동적이다. 조르바처럼 웃고, 놀고, 사랑한다면 삶의 의미에 대해 물을 필요가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웃고 놀고 사랑하고 나면 또 다시 생각은 돌아온다. (조르바는 안 돌아오겠지. 끊임없이 웃고 놀고 사랑하다 죽겠지. 모든 사람이 조르바처럼 살면 어떻게 될까? 천국일까? 아마 지옥이 되지 않을까. 모두가 조르바처럼 자신의 욕망만을 추구한다면 인간들 사이에서 갈등은 커질 수밖에 없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환타지 소설이다. , 순진한 카잔차키스!)

 

작가는 아래와 같은 삶의 방식을 제시한다. 삶이 제공하는 제한된 즐거움과 의미를 누리면서 인간의 한계들을 제거하기 위해 애쓰고 부정적인 생각들을 최선을 다해 억눌러야 한다. 러셀은 95세의 나이에 제목이 없는 한 장 짜리 원고를 남겼다. 러셀의 마지막 원고였다.

 

내 삶 전체를 돌아보면서 그 삶이 어떤 유용한 목적에 기여했는지 혹은 온통 부질없는 짓에 매달렸는지 물을 때가 왔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미래를 모르는 사람은 대답할 수 없다

 

답할 수 없다고 했음에도 러셀은 펜을 계속 놀렸다.

 

우리의 행성이 무엇이고 무엇일 수 있을지 한번 생각해보라. 현재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고통과 굶주림, 지속적인 위험, 사랑보다 더 많은 증오가 있다. 행복한 세상이 존재할 수 있다. 경쟁보다 협동이 더 많이 눈에 띄는 곳, 지루한 일은 기계들이 하는 곳, 하는 일이라고는 죽이는 것밖에 없는 흉측한 기계들이 들어설 자리를 위해 사랑스러운 자연을 파괴하지 않는 곳, 시체들의 산더미를 생산하는 것보다 즐거움을 촉진하는 것이 더 존중받는 곳. 불가능하다고 말하지 마라. 불가능하지 않다. 다만 그런 세상은 고문을 가하기를 바라기보다 그런 세상을 더 많이 바라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우리 각자 안에 갇힌 예술가가 있다. 그를 풀어주어 만방에 즐거움을 퍼뜨리게 하자. “

 

 

이 글을 쓰고 하늘을 봤다.

이토록 푸르를 수가.

그 순간 나는 삶의 의미를 감각했다.

 

삶은 고통의 바다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 있음을 망각하지 않고,

일상에서 소소한 기쁨들을 발견할 때

삶은 무의미하지 않다.

 

아모르 파티!

내 운명을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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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9-01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팔공산에 있는 예비군 훈련장 하늘이 푸른 게 좋았습니다. 바람이 많이 불고, 훈련이 귀찮은 것만 빼면 괜찮은 오후를 보냈습니다. ^^

스티븐 제이 굴드이 언급되는 글 위에 사진은 누구입니까? 수염이 없어서 스티븐 제이 굴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시이소오 2016-09-01 13:44   좋아요 0 | URL
아, 스티븐 제이굴드와 앙숙인 리처드 도킨스죠 ^^

cyrus 2016-09-01 13:57   좋아요 0 | URL
다시 보니까 그렇네요. ㅎㅎㅎ

시이소오 2016-09-01 14:06   좋아요 0 | URL
이제 좀 늙으셨죠. 스티븐 제이 굴드는 이미 죽었으니 그래도 진화하신 건 아닐지 ㅋㅋ

초란공 2016-10-04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크 모노를 읽은 기억이 있는데 제목 외에는 기억이 안나네요. 이해가 좀 간다면 상당히 인상적인 책일 것 같다`라는 생각만 했던 것 같군요. ㅋㅋ

시이소오 2016-10-04 22:50   좋아요 0 | URL
우연과 필연이겠죠 ? ㅎㅎ
 

키르케고르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을 성찰할 때 슬픈 점은, 많은 이들이 고요히 길을 잃은 상태로 삶을 일관한다는 것이다.....그들은 말하자면 자신을 멀리 떠나서 살고 그림자처럼 사라진다. 그들의 비도덕적 영혼은 바람에 날려가고, 그들은 영혼의 불멸에 관한 질문들에 동요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죽기도 전에 이미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

 

빈센트 배리 : 죽음이 삶의 의미를 증가시키거나 감소시킬까?

 

톨스토이와 쇼펜하우어는 죽음이 삶을 무의미하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반대자들은 오히려 죽음이 삶을 유의미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죽음이 삶을 유의미하게 만든다는 논증들

 

삶을 위해 죽음이 필요하다 ; 죽음이 없으면 삶 속에서 발전이 없다.

죽음은 삶의 주기의 한 부분이다 ; 죽음은 삶이라는 연속체의 일부다.

죽음은 궁극적 긍정이다 ; 죽음과 마주할 때 우리는 삶의 궁극적 가치를 깨닫는다.

죽음은 헌신과 참여의 동기다 : 삶의 유한성이 없다면, 우리가 가치있는 일을 할 동기는 약해질 것이다. 게다가 불멸은 지루할 수도 있다.

죽음은 창조성을 북돋는 자극이다 :

죽음은 사회적으로 유용하다

 

배리에 따르면 죽음이 좋은지 나쁜지는 불확실하다. 오직 삶이 죽음과 죽어감에 관한 철학적 생각을 포함할 때만, 삶은 가치 있을 수 있다.

 

스티븐 로젠바움 : 죽음은 나쁘지 않다 에피쿠로스를 위한 변론

 

우리는 죽어있음을 경험할 수 없다. 살아 있을 때는 죽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고로 죽어있음은 죽은 사람에게 나쁘지 않다.

 

오스왈드 핸플링 : 삶의 의미와 죽음에 대한 불가지론

 

죽음은 전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좋은 것도 아니다.

 

조지 피처 : 죽어 있음은 불행이다.

 

피처에 따르면 죽은 사람은 죽은 뒤에도 부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 우리는 죽음에 의해 해를 입는다.

 

스티븐 루퍼 : 소멸은 끔찍한 불행이다

 

죽음은 우리의 욕망을 좌절시키므로 불행이다. 죽음을 충격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열정적으로 살고 현실적 목표들을 성취하는 편이 낫다.

 

데이비드 베네타 : 아예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나은 이유

 

베네타에 따르면 출생은 항상 해악이다. 따라서 태어나지 않는 편이 더 낫다.

 

내 견해의 함의 하나는 우리 종에게는 멸종이 더 선호할 만하다는 것이다.”

 

존 레슬리 : 우리는 삶의 소멸을 방치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인류의 멸종은 슬프거나 가여운 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1) 슬퍼할 사람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또는 2) 삶이 워낙 나빠서 소멸을 더 선호할 만하기 때문이다.

 

레슬리는 멈춰서 숙고하라고 말한다. 삶은 본래 좋기 때문에 인류 멸종의 논증은 배척해도 된다.

 

제임스 렌먼 : 불멸은 유쾌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불멸하게 되면 불멸이 우리를 다른 유형의 존재로 바꿔놓아 인간성을 잠식할 수도 있다. 또한 불멸의 삶은 지루할 가능성이 있다.

 

닉 보스트롬 : 폭군의 우화

 

 

보스트롬은 <폭군의 우화>를 통해 용에 의해 황폐화된 행성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성직자들은 사후의 또 다른 삶, 용의 괴롭힘이 없는 삶을 약속함으로써 용에게 잡아먹히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려 애썼다. 다른 연설가들은 용이 자연 질서 속에서 고유한 자리와 먹이를 얻을 도덕적 권리를 가졌다고 주장했다. 용의 뱃속에서 종말을 맞는 것은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의 한 부분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심지어 용은 인구를 소수로 유지하기 때문에 인간 종에게 좋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주장들이 근심에 찬 영혼들에게 얼마나 설득력을 발휘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대다수 사람들은 다가오는 참혹한 종말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방식으로 대응하려 했다. ”

 

용이 끊임없이 공물을 먹어치우는 동안, 대다수 사람들은 싸우지 않고 불가피한 운명을 받아들였다. 용에게 잡아먹히는 과정을 연구하고 지연시키는 작업이 어엿한 산업으로 성장했고, 사회의 부의 큰 부분이 그 산업에 쓰였다.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일부 사람들은 언젠가는 비행 기계를 제작하고 원거리 무선 통신을 하고 심지어 용을 죽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다수는 이 주장을 무시했다. .....마침내 12년의 연구 끝에 왕은 용 살해용 미사일을 성공적으로 발사했다. 사람들은 행복해했지만, 왕은 그 연구를 더 일찍 시작하지 못한 것 때문에 우울했다. 수백만 명이 헛되이 죽었기 때문이었다. 문명의 미래와 관련해서 왕은 이렇게 선포했다.

 

오늘 우리는 다시 아이와 같아졌다. 미래는 우리 앞에 열려 있다. 우리는 미래로 나아갈 것이며 과거보다 더 잘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이제 때가 되었다. 세상을 바르게 하고 우리가 성장하고 우리의 실수에서 교훈을 얻을 때가, 더 나은 세상을 천천히 건설할 때가 되었다. ”

 

우리는 기술을 통해 죽음의 폭정을 극복하려 애써야 한다.

 

마이클리스 마이클, 피터 콜드웰 : 낙관론이 합리적이다

 

마이클리스 마이클과 피터 콜드웰은 낙관론을 지지하며 스토아철학을 예로 든다. 스토아주의는 바꿀 수 없는 것에 맞서 싸우기보다 그것을 끌어 안으라고 조언한다. 스토아죽의 적 태도는 불쾌한 것들에 무관심하거나 마음을 쓰지 않음을 뜻하지 않는다. 다만, 스토아주의자는 자신의 마음 씀에 한탄을 덧붙이지 않을 뿐이다. 스토아주의자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으므로 아픔과 고통이 존재함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런 악들을 분개하지 않고 수용한다. 낙관론은 긍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치명적인 병에 걸린 이후 흄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늘 사물의 나쁜 면보다 좋은 면을 보는 편이었다. 이런 정신적 성향을 소유한 사람은 연간 1만 파운드의 소작료를 받는 농장주의 자식으로 태어난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지금의 나 보다 더 많이 삶으로부터 초연하기는 어렵다. ”

 

나는 죽음에 맞서지 않는다. 그러나, 저자는 죽음을 물리쳐야 할 용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죽음을 정복할 수 있을까.

 

과학

 

닉 보스트룸에 따르면, 발전한 문명들이 인공지능을 가진 개체들을 포함한 시뮬레이션을 창조했을 가능성이 있고, 만일 창조했다면, 그 시뮬레이션 속의 개체들이 바로 우리일지도 모른다.

 

만일 인류가 시뮬레이션 기술을 개발하고 사용할 수 있다면, 인류의 과거를 연구하기 위해 조상 시뮬레이션들을 가동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그 시뮬레이션 속의 조상들이 발전하여 다시 그들 나름의 시뮬레이션을 제작하여 가동할테고, 따라서 하위 시뮬레이션들이 무한정 생겨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원본 우주에 사는지, 아니면 무수한 시뮬레이션들 중 하나에서 사는지 알 길이 없으므로, 확률을 따졌을 때 우리는 시뮬레이션 속에 살고 있을 확률이 더 높다.

 

레이 커즈와일 : 우리의 정신을 컴퓨터에 업로드하기



 

커즈와일의 분석에서 중요한 것은 이른바 시간과 카오스의 법칙이다. 왜 일부 과정들은 빠르게 시작해 느려지는 반면, 다른 사건들은 느리게 시작한 다음에 빨라질까. 시스템 안에 카오스, 곧 무질서가 많으면, 두드러진 사건들 사이의 시간이 길다. 카오스가 감소하고 질서가 증가하면, 두드러진 사건들 사이의 시간이 짧아진다. “수확 가속의 법칙은 두 번째 현상을 서술하며 커즈와일의 논증에서 핵심적인 구실을 한다.

 

커즈와일은 나노기술을 써서 세계를 원자 수준에서 재구성할 것을 제안한다. 나노 기술의 최대 목표는 지능과 자기복제능력과 나노 규모의 대상들을 조작하는 능력들을 갖춘 나노 기계들일 것이다. 오늘날 주요 이론가들은 자기복제 능력을 지닌 나노봇의 실현 가능성을 증명했다.

 

커즈와일은 수확 가속의 법칙이 우주 전체에도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우주의 다른 곳들에도 다양한 단계까지 진화한 생명이 존재한다고 추측한다.

 

존 설 : 커즈와일에 대한 비판

 

설 에 따르면 딥 블루는 체스를 이해하지 못한다. 설은 커즈와일이 의식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컴퓨터와 실제로 의식이 있는 컴퓨터를 혼동했다고 비판한다. 의식을 모방한 컴퓨터에는 의식이 없다. 의식이 없는 컴퓨터에 우리 자신을 다운로드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대니얼 데닛 : 로봇 의식을 위한 변론

 

데닛은 설에 반대하여 로봇이 의식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스 모라벡 : 로봇이 되기

 

모라벡에 따르면, 로봇은 의식을 가질뿐더러 감정을 가질 수도 있다. 로봇 시대가 도래하겠지만, 모라벡은 로봇의 노동이 인간의 삶을 더 쾌적하게 만들것이라 낙관한다. 우리의 로봇 후손들은 상상을 초월한 세계들에서 살 것이다.

 

찰스 루빈 : 기술적 멸종론에 대한 반론

 

루빈은 멸종론자들이 미래학자들에 반대하여 기계들을 파괴하자고 주장한다. 커즈와일과 모라벡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의 정신을 기술적 장치 속에 업로드한다는 건 인간의 진화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루빈은 컴퓨터에 우리 정신을 업로든 한 이후 우리 자신이 존속하는지 묻는다. 탈인간적 삶이 악몽일 수도 있지 않을까. 루빈은 기술적 발전을 제한하는 것이 비현실적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진화는 우리의 멸종을 재촉할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우리의 멸종을 추구할 이유는 없다.

 

마셜 브레인 : 우리는 몸을 버리게 될 것이다.

 

비교적 멀지 않은 미래에 우리는 몸을 버리고 훨씬 더 나은 가상현실 속에서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가상현실 속에서 우리는 비행기를 타지 않고 여행할 수 있고, 2천 년 전의 로마나 그리스를 방문할 수도 있고, 찰스 다윈과 대화하고 슈퍼맨의 삶을 사는 것도 가능하다. 어떤 시대, 어떤 장소라도 갈 수 있고, 황홀한 섹스도 가능하다.

 

미치오 카쿠 : 미래의 전반적인 비전



 

원자, 유전자, 컴퓨터에 대한 지식은 물질, 생명, 정신에 대한 통제력의 획득으로 이어질 것이다. 커즈와일, 모라벡과 마찬가지로 카쿠는 우리의 기술이 우리의 뇌를 대체하게 될 때, 새로운 기술적 뇌가 로봇 신체나 가상현실 속에서 존속하게 될 때, 우리는 일종의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변화는 인류가 다른 종으로 대체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재런 래니어 : 사이버네틱스 전체주의에 반대함

 

사이버네틱스 전체주의는 인간들에게 해를 끼치는 데 이용될 수 있다. 왜냐하면 부유한 극소수가 거의 신에 가깝게 되고, 나머지 우리는 상대적으로 과거와 똑같이 머무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프트웨어가 훨씬 더 발전하지 않는 한, 영생을 얻기 위해 지불해야 할 금액이 매우 클 것이다. 견제없는 사이버네틱 전체주의는 다수의 인류에게 고통을 불러올 가능성이 있다.

 

그레고리 폴, 얼 콕스 : 인간성을 넘어서기

 

사람들은 과학기술이 삶을 향상시키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과학기술은 수백만 명의 죽음에 기여해왔다. 뇌속에 나노컴퓨터를 이식하게 된다면 우리는 영생하게 될 것이다. 사이버 몸과 사이버 뇌를 제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결국 인간은 신이 된다. 과학이 죽음을 정복한다면 종교는 사멸할 것이다.

 

빌 조이 : 우리는 이 기술들을 포기해야 한다

 

기계들이 모든 일을 하게 되는 미래가 오면 우리는 1) 기계들에게 모든 결정을 맡기거나 2) 기계들에 대한 인간의 통제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카진스키는 주장했다. 우리가 첫 번째를 선택한다면 우리는 머지않아 기계들의 명령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게 될 가능성이 있다. 2두번째를 선택한다면, 엘리트가 통제권을 쥐게 되고, 대중은 불필요하게 된다. 엘리트들은 대중을 몰살하거나 멸종시키거나 노예로 만들 것이다.

 

조이 역시 우리 자신을 로봇에 다운로드 후에도 인간일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또한 나노 기술은 그레이 구문제에 직면한다. 자기 복제 나노봇들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날 것이다. 결국 우리는 자멸의 문턱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유전학, 나노기술, 로봇공학은 너무 위험하다. 이 기술들을 포기해야 한다.

 

저자는 초인간주의 철학을 지지한다. 죽음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저자는 왜 사상가들이 인간의 본성을 신성시하는 지 묻는다. 그것은 오만일 수 있다고. 그렇다고 로봇을 신성시해야 한다는 결론은 도출되지 않는다. 인간이 로봇이 되는 게 진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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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주의 : 객관적 의미

 

 

조지프 엘린: 도덕이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엘린에 따르면 삶의 의미는 지식이 아니며 행복도 아니고 죽음에 의해 제거되지도 않는다. 반복적인 부질없음, 궁극적인 하찮음, 부조리에 바탕을 둔 논증들도 설득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의미의 출처가 될 큰 그림이 존재한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엘린은 삶 전체는 의미가 없더라도 개인들의 삶은 유의미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주는 우리에게 의미를 줄 수 없다. 우리가 삶에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세계에 유용하게 기여하지 않는 삶 역시 무의미하다. 아동 학대자나 박정희와 이승만과 같은 범죄자들은 살지 않는 편이 더 나았다. 비도덕적인 삶은 무의미하다.

 

참으로 가치 있는 삶이란 그 삶이 있었음을 기뻐할 이유를 과반수의 사람들이 발견하는 그런 삶이다. ”

 

도덕은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사랑, 우정, 성실, 신뢰성이라는 객관적 가치들에 이르는 수단이다.

 

개럿 톰슨 : 삶의 의미는 초월적 가치들에서 발견된다.

 

삶의 의미를 생각할 때 범하는 아홉가지 오류

 

삶의 의미가 신의 존재, 신과 우리의 관계에 달려있다고 전제하는 것. 톰슨의 반론에 따르면 신이 인간의 삶의 목적을 설정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목적을 존중하지 않을 수 있다.

삶의 의미가 일종의 목표나 목적이라는 생각. 목적은 신이나 진화가 우리 안에 주입한 것일 수도 있다.

삶의 의미가 쾌락이나 욕망과 같다는 것.

삶의 의미가 발명되어야 한다거나 주관적이라 것

유물론을 전제하면 삶의 의미가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

가치 판단은 행동의 이유를 제시하는 문장일 뿐이라는 것.

삶의 의미가 우리의 경험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언어적 항목들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전제하는 것

스스로 정한 계획에 따라 사는 것이 곧 삶의 의미라는 것

 

이 모든 오류를 반면교사 삼아 톰슨은 삶의 의미가 일상에서 발견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유의미한 삶은 일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유의미한 행동들로 이루어진다. 또한 우리는 세계와 우리의 삶을 개선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욕망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익에 부합하게 행동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

 

삶의 의미는, 바깥에서 부과한 신적인 계획이나 목적에 부합하거나 개인적으로 발명한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근본적인 이익에 부합하는 발전 과정에 있어야 한다. 우리의 관심과 행동으로 우리 자신을 넘어선 가치들에 도달하는 과정을 삶의 의미의 일부로 간주해야 한다. ”

 

칼 브리튼 : 삶이 유의미하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참이다

 

 

개인의 삶이 그 자신과 타인들 모두에게 중요하다는 것을 세계의 사실들에서 확인할 수 있으므로, 삶은 유의미하다.

 

삶은 의미가 있으며, 그 의미는 모든 현실에 깃든 가능성에서 나온다. 내 말은 일부 사람들의 삶이 유의미하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의 삶이라도 유의미하다는 것이다.”

 

테리 이글턴 ; 아가페적 사랑이 답이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은 축구에서 삶의 의미를 얻는다고 인정하기를 꺼리겠지만, 수백년 동안 사람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지키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고귀한 대의들 종교적 신앙, 국가의 주권, 개인의 명예, 민족의 정체성 을 스포츠가 대신한다. 오늘날 민중의 아편은 종교가 아니라 스포츠다.”

 

이글턴에 따르면 삶의 의미는 어떤 문제의 해답이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와 관련이 있다. 삶의 의미는 형이상학적이지 않고 윤리적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열쇠는 행복을 이기심에서 떼어내어 인류에 대한 사랑과 연결하는 것이다. 유의미한 삶의 핵심 요소는 아가페적 사랑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마따라 행복이 우리 능력들의 자유로운 번창이라면, 행복과 사랑 사이에 최종적인 갈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불평등이 심한 사회는 궁극적으로 누구에게도 이익이 되지 않는다.

 

모리츠 슐리크 : 삶의 의미는 놀이에서 발견된다

 

삶의 의미는 즐거운 놀이에서, 자신이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에서 발견된다.

 

수전 울프 : 객관적 가치들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기

 

울프에 따르면 유의미한 삶이란 가치 있는 기획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삶이다.

 

스티브 칸 : 울프의 견해에 대한 주관주의자의 대응

 

유의미한 삶이란 타인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행복을 발견하는 삶이다.

 

수전 울프 : 객관적 가치들의 중요성

 

울프는 만족 견해와 자신보다 더 큰 것 견해를 구분한다. 만족 견해란 무엇이든지 만족을 얻는 것에서 삶의 의미가 발견된다는 견해를 뜻한다. 자신보다 더 큰 것 견해는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에 헌신하는 것에 삶의 의미가 있다는 견해다.

 

울프는 비록 객관적 가치가 구체적으로 정의되어 있지 않더라도 주관적 가치에 의존하지 않는 가치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제임스 레이철스 : 좋은 것들이 삶을 가치 있게 만든다

 

제임스 레이철스에 따르면, 삶이 무의미하더라도 특정한 삶들은 유의미할 수 있다. 개인마다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삶의 목표로 삼을 가치가 있다고 동의하는 것들이 많이 있다. 좋은 개인적 관계, 성취, 지식, 즐거운 활동, 미적 향유, 신체적 쾌락, 타인들을 돕기 등이 그런 것들이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것이 결국 헛되고 삶은 무의미할 수 있지 않을까? 유일한 해답은 우리가 작성한 좋은 것들의 목록이 왜 실제로 좋은지 설명하는 것뿐이다.


오언 플래너건 : 자기 표현이 삶에 의미를 준다

 

한 개인의 의미는 타인들과의 관계나 일, 또는 자연 이 삶에서 우리와 관계 맺을 수 있는 것들 에서 나올 것이다.

 

빅토르 프랑클 : 의미 탐구



 

프랑클의 철학적 논의는 니체를 인용하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살아야 할 이유를 가진 사람은 거의 모든 것을 견뎌낸다.” 프랑클이 의미를 향한 의지라고 부르는 이 살려는 욕망은 인간적인 삶의 일차적인 동기다. 이 생각들을 종합하면, 살아남고, 존재하고 의미를 발견하려는 욕망이 우리를 이끈다.

 

의미의 객관적 원천은 세 가지다.

 

1. 좋음이나 아름다움의 경험, 또는 타인들에 대한 사랑

2. 창조적인 행동이나 일

3. 불가피한 고통을 대하는 태도.

 

우리가 사랑하는 타인들이 우리에게 의존하면, 또는 우리에게 완성해야 할 고귀한 일이 있다면, 우리는 삶의 의미를 갖게 된다. 프랑클은 불가피한 고통을 대하는 태도에서 우리의 내면적 자유가 드러난다고 말한다.

 

크리스토퍼 벨쇼 : 관계들과 기획들

 

벨쇼에 따르면 주관적 접근법은 유효하지 않다. 마약중독자로서 행복하다고 해서 그 삶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중요한 것들은 관계, 기획, 도덕적으로 좋은 삶이다. 우리가 타인들을 정말로 사랑하면, 타인들의 기쁨과 고통, 희망과 열정을 공유하면, 우리의 삶이 중요하지 않다고 믿기 어려워진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유의미한 기획들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의 삶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품기 어려워진다. 또한 우리가 타인들을 돕고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고 애쓴다면, 우리의 삶은 무의미하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일하고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고 작은 재미를 즐기는 평범한 개인의 삶을 살펴보면, 그 삶은 특별히 유의미하지 않지만 무의미하지도 않다. 그런 개인은 그다지 도덕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또는 만족스러운 관계나 일을 가지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삶을 살 가치가 있다고 느낀다면, 거기에서 논의를 종결해야 마땅하다.

 

레이먼드 벨리오티 : 유산 남기기

 

우주적 관점을 채택하면, 우주와 우리의 삶에 의미가 결여되어 있으며 우리는 유한하고 중요하지 않으며 일시적인 존재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에 대응하는 여러 전략이 있다. 하나는 단지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의 중요성만 요구한다는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또 다른 전략은 우주적 관점을 활용하여 시야를 넓히고 우리 자신을 덜 진지하게 대하고 우리의 고통을 덜 심각하게 보는 것이다. 우주로 사다리를 걸쳐 관점들 사이를 오르락 내리락 한다면 우리는 행복을 극대화하고 고통을 극소화 할 수 있다.

 

삶이 가치를 지니려면 도덕적, 지적, 미적 또는 종교적 가치를 산출해야 한다. 피카소는 우리에게 미술적 유산을 남겼기에 가치 있다.

 

우리는 이 세계의 사람들 및 객관적 가치들과 관계 맺고 가능할 경우 유산을 남기는 것에서 의미를 발견한다.

 

폴 새가드 : 뇌 과학과 삶의 의미

 

신경생리학에 따르면, 우리의 뇌는 긍정적 감정들과 연결하는 대상들에 가치를 부여한다. 사랑, 일 놀이. 스포츠, 독서, 유머, 운동, 음악은 모두 뇌를 긍정적인 방식으로 자극하고 삶의 의미를 제공한다. 사랑, , 놀이는 우리의 뇌가 유능함, 자율, 관계를 향한 기본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방편이다. 우리는 이런 활동을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

 

새디어스 메츠 : 좋음, 참됨, 아름다움

 

메츠에 따르면 특정한 성취들로 이어지는 윤리적, 지적, 미적 활동들은 내재적 가치를 지닌다. 왜냐하면 그런 활동들은 개인이 자기 자신을 초월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실패하는 자기 초월 이론 일곱 가지

 

자기 초월을 대상에 사로잡히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 비디오 게임에 아무리 몰입하더라도 도덕적 성취는 나오지 않는다.

현실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배꼽에 몰두한다고 삶의 의미를 얻을 수 없다.

유기적 통일체와 연결되는 것. 참됨에는 잘 적용되지 않는다. 쿼크에 관한 이론이 개발되었다고 삶에 의미가 제공되는 것은 아니다.

가치 있고 끝없는 목표들을 향해 나아가는 것, 그 목표들이 왜 유의미한지 설명할 수 없다.

이성을 사용하여 탁월함의 기준들을 충족시키는 것. 이성을 악한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도 있다.

창조적인 방식으로 이성을 사용하기. 창조적 범죄자도 있을 수 있다.

보편적인 관점에 따라서 이성을 사용하는 것. 발톱 깍는 도구를 나눠주는 것도 위대할 수 있을까.

 

좋음, 참됨, 아름다움은, 우리가 이성적 본성을 긍정적이며 중요한 방식으로 사용하여 인류의 처지를 크게 좌우하는 조건들을 지향함으로써 동물적 본성을 초월하는 한에서, 삶에 위대한 의미를 제공한다. ”

 

싸구려 소설 읽기는 삶에 의미를 줄 수 있을까메츠에 따르면 자신의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선 상당한 노력이 필수적인데 싸구려 소설 읽기는 그런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삶의 의미를 얻으려면 단지 기존의 것을 하거나 알거나 제작하는 것을 넘어서 새로움을 산출해야 한다.

 

객관적 의미에 대한 논평

 

우리는 칸의 견해와 울프의 견해을 종합하여, 유의미한 삶이란 해를 끼치지 않는 기획들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울프는 해를 끼치지 않음을 최소한의 조건으로 승인하면서, 타인들에게 도움이 되는 가치 있는 기획에 참여하는 삶이 더 유의미하다고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좋음, 참됨, 아름다움에 관여하고 참여하고 연결됨으로써 삶 속에서 의미를 발견한다. 그렇다면 이게 전부일까? 항상 우리를 따라다니는 유령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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