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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의 말 - 정치적인 것에 대한 마지막 인터뷰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한나 아렌트 지음, 윤철희 옮김 / 마음산책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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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아렌트를 잘 모른다. 50년대, 60년대 활동했고 1975년에 작고한 사상가가 오늘날 주목받는 이유가 뭘까? 인문학 계열의 책을 읽다보면 한 번 쯤은 마주치게 되는 한나 아렌트. 이 책은 그녀의 네 번의 인터뷰를 담았다. 숄렘의 비판, 토니 쥬트의 비판, 한국 정치철학자 정화열 교수의 비판 등, 아렌트 사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논쟁을 거듭하고 있다. 이 책의 독서에 한정해서 말한다면 나는 아렌트 편이다.

 

오늘날의 아렌트를 만든 건 무엇 때문일까? 여기서도 읽는다.

 

칸트를 읽었거든요. 왜 칸트를 읽었느냐고 물을지도 모르는데, 내 입장에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왠지 이런 것 같아요. 내겐 그건 철학을 공부하거나 물에 몸을 던지거나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였다고요. 그렇다고 내가 목숨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에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앞서 말했듯 나한테는 세상을 이해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어요......”

 

그녀는 10대 때, 칸트, 야스퍼스, 키르케고르를 읽었고, 그리스 시를 읽었다.

 

아렌트에 따르면 히틀러가 권력을 쥔 1933년에 유대인들은 충격을 받지 않았다. 충격적이었던 것은 친구들의 전향이었다. 아렌트는 하이데거의 이름을 언급하진 않았지만 연인 사이였던 하이데거의 전향은 그녀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으리라.

 

나치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10년이 지난 1943년이 되어서야 알려졌다. 아렌트는 말한다. “이건 절대로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이에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출간된 이후 아렌트는 특히나 숄렘을 비롯한 유대인으로부터 유대인을 비난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한나 아렌트는 오해라고 주장한다. 아렌트는 이렇게 말했다. “ 나는 내 친구들만 사랑했고, 내가 잘 알고 또 믿는 유일한 종류의 사랑은 개인을 향한 사랑입니다. 게다가 이 유대인들의 사랑, 나 자신이 유대인이기에, 나한테는 상당히 의심쩍은 것으로 보이고는 합니다.”

 

아렌트가 오늘날에도 계속 회자되는 이유는 아렌트의 63년 작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주장한 악의 평범성 the banality of evil’ 때문이 아닐까. 이 책을 읽기 전까진 나는 악의 평범성을 완전히 오해했다. 아렌트는 이렇게 말했다.

 

오해 중 하나는 이거예요. 사람들은 평범한 것은 아주 흔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내가 생각한 것은......내가 말하려던 바는 그게 아니었어요. 나는 우리 모두의 내면에 아이히만이 있고, 우리 각자는 아이히만과 같은 측면을 갖고 있다는 말을 하려던 게 절대 아니에요. 내가 하려던 말은 오히려 그 반대예요!

 

아이히만은 완벽하게 지적이었지만 이 측면에서는 멍청했어요. 너무도 터무니없이 멍청한 사람이었어요. 내가 평범성이라는 말로 뜻하려던 게 바로 그거예요. 그 사람들 행동에 심오한 의미는 하나도 없어요. 악마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고요! 남들이 무슨 일을 겪는지 상상하길 꺼리는 단순한 심리만 있을 뿐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악의 평범성은 방점을 어디에 찍느냐에 따라 다양한 의미가 파생된다. 아이히만은 공무원이었다. 자신에게 내려진 명령이 부당함을 알았지만 명령에 순응했다. 그는 행동을 멈추고 사유 하지 않았다. 그는 익명성뒤에 숨어 남들이 무슨 일을 겪는지 상상하길 꺼리는마음만 있었을 뿐이다.

 

오늘날 익명성 뒤에 숨어 남들이 무슨 일을 겪는지 상상하길 꺼리는 마음으로 우리는 일베현상을 분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부당한 명령인줄 알면서도 명령에 순응하는 공무원들을 떠올릴 수 있다. 틈만 나면 간첩 조작질, 댓글 알바짓, 민간인 사찰 짓거리를 일삼는 국정원 공무원을 잡아다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히면 어떨까.

 

또한 생각하지 않는 것이 어떻게 악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숙고해볼 수 있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정화열 교수는 3 세계는 실제reality가 아니라 하나의 이데올로기다라는 아렌트의 주장 때문에 그녀를 비판한다. 아마도 그는 제 3 세계에 대한 모독이라 생각한 듯하다. 그러나, 그녀가 말하고자 한 것은 전혀 다른 의미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와 남미는 실제로서 존재해요. 이 지역들을 유럽 그리고 미국과 비교해보면 그곳은 저개발 지역이라 말할 수 있고, 당신은 그 점 때문에 그게 이 나라들 사이의 중요한 공통분모라고 주장할 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그들이 공유하지 않는 무수히 많은 것들을 간과하고, 그들이 공유하는 게 다른 세계와 대비할 때에만 존재하는 차이점일 뿐이라는 사실을 놓치죠. 저개발이라는 아이디어를 중요한 요소로 보는 그런 관점은 유럽인과 미국인이 가진 편견이에요.......언제 한번 중국인을 붙잡고서 당신은 아프리카에 사는 반투족과 정확히 동일한 세계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말해보세요. 장담컨대 당신은 평생 본 중에 가장 경악하는 반응을 보게 될 거에요.”

 

아렌트가 3세계를 실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라 주장한 이유는 그것이 마치 오리엔탈리즘과 마찬가지로 미국인, 유럽인의 편견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3 세계슬럼과도 비슷한 단어라고 할까. 아무도 자신이 사는 곳을 슬럼이라고 말하진 않는다. 가진자들이 보기에 슬럼일뿐.

 

한나 아렌트는 말했다.

사유한다는 말은 항상 비판적으로 생각한다는 뜻이고,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것은 늘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거예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어떤 사람들이 살아남았을까? 부정적인 사람들? 당연히 거의 죽었다. 시크릿 추종자들 마냥 긍정적인 사람들은? 예상과 달리 거의 죽었다. 그들은 자신이 긍정하는 세계가 자신의 눈앞에 당장 펼쳐지지 않자 인내할 수 없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미래를 긍정하는 사람들만 살아남았다.


무턱대고 현실을 긍정하는 삶의 자세, 부정적인 삶의 자세만큼이나 위험하다. 현재가 완전하다고? 지금이 당연하다고? 사유해야만 한다. 비판적으로 사고해야 한다. 세계와 적대적이어야 한다. 적대적이라고 해서 미래를 부정적으로 보는 게 아니다. 아이를 야단치는 게 아이가 커서 거지, 비렁뱅이, 한량, 범죄자가 되길 바라는 마음 때문인가?

 

바우만을 따라서 다시 한번 반복해볼까?

 

숨 쉬는 한, 나는 희망한다. Dum spiro spero”

 

 

밑줄 친 문장들

 

 

p61. fiat veritas, et pereat mundus (세계가 멸망한다 해도 진리가 말해지도록 하라)

 

p66. 개인적 경험없이 가능한 사유과정이 존재한다고는 믿지 않아요. 모든 사유는 뒤늦은 사유예요. , 어떤 문제나 사건을 사후에 숙고하는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p70. “인간성은 혼자 힘으로는 절대 획득되지 않으며, 누군가 자신의 작업을 대중에게 바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인간성은 자신의 삶과 존재 자체를 공공 영역으로 향하는 모험에 바친 사람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p76. 내가 우선 말하고 싶은 것은, 남들에게 동조하는 것 많은 사람이 함께 행동하는 데 끼고 싶어 하는 것- 이 권력을 낳는다는 거예요.

 

그가 권력에서 특별한 쾌감을 얻었느냐고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는 전형적인 공무원이에요. 그런데 공무원은 공무원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일 때 정말이지 대단히 위험한 신사예요.

 

p81. 악은 항상 유혹의 형태를 띠고 나타나는 반면 선은 우리가 자발적으로 절대 하려고 들지 않는 일이라고들 생각하죠.....나는 이건 터무니없는 헛소리라고 생각해요. 브레히트는 선한 일을 하려는 유혹은 우리가 늘 이겨내야 하는 무엇이라는 점을 항상 보여주고 있어요.

 

p86. 내가 말하는 바는 칸트가 말했듯이, “다른 모든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무능력........이런 종류의 멍청함.....이 사람들은 당신에게 절대로 관심을 갖지 않으니까요. 그게 독일적인 거예요.

 

p95. 망설임은 있었죠. 그들은 망설임을 가진 공무원들이었어요. 하지만 그들의 망설임은 인간이라면 그저 한 사람의 공무원으로 존재하기를 멈춰야 하는 한계가 있다는 걸 스스로에게 명확히 보여줄 정도까지 나아가지는 않았어요. 그들이 자기 자리를 떠나 맙소사, 추악한 일들은 다른 누군가 하게끔 합시다!”하고 말했다면, 그랬다면 그들은 어느새 다시금 인간이 됐을 거예요. 공무원으로 존재하는 대신에 말이에요. 그렇지 않았을까요?

 

p98. 소크라테스가 내놓은 또 다른 명제가 있어요. 내가 보기에 다음 명제가 우리에게 그 이유를 제공하죠. “자기 자신과 불일치하는 것보다는 세계 전체와 불일치하는 편이 낫다. 나는 통일체니까.”

 

p99. 아이히만은 나는 내 책상에 앉아 나한테 주어진 일을 했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의 공적인 영혼은 항상 그가 한 일과 일치했지만 사적인 영혼은 항상 그걸 반대했다고 밝혔습니다.

 

아렌트 : 맞아요. 이게 이른바 살인자들 사이에서 나타난다는 내면적 이민이에요. - 이것은 내면적 이민이나 내적인 저항이라는 개념 전체가 소멸했다는 뜻이죠. 내 말은, 그런 건 없다는 거예요. 세상에는 외면적 저항만 있을 뿐이에요. 인간의 내면에는 기껏해야 심리 유보만 이써요. 맞죠? 그것들은 허깨비들이 하는 거짓말이에요. ...관료제는 대량학살을 행정적으로 자행했고, 그런 상황은 여느 관료제가 그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익명성의 느낌을 창출해냈어요. 개별적인 인간은 사라졌어요.

 

관료제가 본질적으로 익명성을 갖는다는 사실 말고도, 무자비한 행위는 무엇이건 책임이 증발되는 것을 허용해요. “멈춰서 생각해보라. Stop and think”라는 용어 관용구가 있어요. 어느 누구도 하던 일을 멈추지 않는 한 생각에 잠길 수 없어요......

 

102. “실제로 피해자를 살해한 사람과......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었는지는 책임 범위에 조금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오히려 책임의 정도는 자신의 두 손으로 치명적인 살해 도구를 사용한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증가한다. ”

 

p103. 흐로티위스를 인용해야겠군요. 그는 가해자가 처벌받아야 하는 이유가 피해를 당하거나 상처를 입은 사람의 명예 및 품위와 관련된다고 말했어요. 이건 피해자가 감내한 고통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요. 무엇인가 올바로 세우는 것하고도 전혀 관계가 없고요. 이건 정말로 명예와 품위의 문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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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컴맹 2016-04-03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성 많이 기울이신 포스팅, 감사하며 읽었습니다. 참 담백한 책인 것 맞네요

시이소오 2016-04-03 17:28   좋아요 0 | URL
제가 감사하죠 ^^

아무 2016-04-03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해제를 정화열 교수가 써서 이 분도 아렌트 계열의 정치철학자인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인터뷰집이라 우선순위에서 미뤄두고 있었는데 글을 보고 나니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시이소오 2016-04-03 17:29   좋아요 1 | URL
아무님, 아렌트 전작하시겠어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6-04-03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성하면 시이소오 님과 사이러스 님이죠.. ㅎㅎ

시이소오 2016-04-03 17:30   좋아요 0 | URL
ㅋㅋㅋ 감사합니다 ^^

cyrus 2016-04-03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라면 곰발님과 붉은돼지님, L.SHIN님이죠.. ㅎㅎㅎ

시이소오 2016-04-03 17:30   좋아요 0 | URL
동감입니다^^
 
생각의 시대 - 역사상 가장 혁신적인 지혜와 만나다
김용규 지음 / 살림 / 201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 김용규는 <백만장자의 질문>이란 책으로 재벌에 부역하고 혹세무민하였으므로 별점을 깍는다. 



지식의 시대는 끝났다이제는 바야흐로 생각의 시대다생각은 범주화 능력으로부터 시작된다저자는 초창기 그리스로부터 생각의 도구들을 고찰한다메타포라아르케로고스아리스모스레토리케.

 

메타포라은유. 1차적 은유는 유사성에 근거한다. 2차적 은유는 비유사성에 근거한다유사성을 통한 은유를 통해 우리가 기존의 가치를 이해할 수 있다면 비유사성을 통한 은유를 통해선 기존의 사고를 뛰어넘는 새로운 사유를 창조할 수 있다우리가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다시를 읽고낭송하고암기하는 일은 우리의 뇌 안에 은유를 창출하는 새로운 신경망을 새롭게 구축하는 일이다.

 

원리아르케를 만들기 위해선 관찰이 선행되어야만 한다관찰을 통해 패턴을 발견하는 것이 원리 창조의 출발이다뛰어난 관찰자들은 전부 드로잉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드로잉도 배워야겠다.

 

새로운 생각을 만들어내는 유일한 방식가추법이다가추법을 훈련하는 좋은 방법은 포나 크리스티코난 도일의 탐정 소설을 읽는 것이다.

 

로고스문장통사론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문법을 배우는 게 아니라 정신의 패턴을 배우는 일이다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필사를 해야 하는 이유다정신이 문장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문장이 정신을 만드는 것이다.

 

아리스모스수 역시 패턴을 인식하고 분류하고 이용하는 사고체계다예를 들면 피보나치 수열 ( 1,1,2,3,5,8,13,21,34,55,89,144,233,377....)은 숫자가 커질수록 황금비율에 수렴한다혹은 복잡한 자연 현상들을 이제는 프랙털 공식으로 수식화 할 수 있다.

 

레토리케수사포스트 모던 시대바야흐로 설득의 시대다오늘날의 광고는 전부 고대 수사학에 기초한 것이다우리가 고전문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왜 시를 제대로 이해 못하는지 깨달았다범주화 능력이 딸리기 때문이었다특히나 비유사성에 근거한 은유들 앞에선 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뇌 속에 메타포라 로드를 깔아야겠다.

 

시 읽기드로잉 연습하기탐정 소설을 포함한 소설인문학 고전들을 꾸준히 읽어야 할 이유를 찾았다.

 

밑줄 그은 문장

 

p12. 이 책에서는 일찍이 축의 시대에 호메로스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이 개발한 메타포라아르케로고스아리스모스레토리케가 바로 그것이다.

 

p32. 1972년에 생리학 및 의학 부문 노벨상을 수상한 뇌신경과학자 제럴드 모리스 에덜먼은 <신경과학과 마음의 세계>에서 인간의 의식을 ‘1차적 의식과 고차적 의식으로 구분했다각각 하위 의식과 상위 의식이라고도 한다.

 

p33. 에덜먼은 사고는 가장 높은가장 추상적인 수준에서 기호적인 능력에 의존하는 하나의 기예다라고 정의했다이 기예에는 논리학수학언어공간적 기호음악적 기호 등이 사용되며은유적인 과정환유적인 과정의 기원도 필요하다.

 

p35. 고차적 의식은 언어와 기호를 통해서 만들어지며이 의식에 의해 인간은 비로소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관념을 갖게 된다이 관념으로 수학적 계산과 논리적 추론을 하고자기 자신과 세계를 모형화한다거구로 말하자면언어적 사고에 의해 형성되는 고차적 의식이 없으면 인간도 마치 동물처럼 시간관념도수리 논리적 추론능력도역사의식도심지어는 자기의식 마저도 갖지 못한다.

 

p37. 찰스 다윈은 살아남는 것은 힘이 세거나 영리한 동물이 아니라 변화에 잘 적응하는 동물이라 했다.

 

p39. 로렌스는 울리의 옥스퍼드대학교 후배였지만 나중에 아랍의 독립 전쟁에 참가해 영웅이 된 인물이다훗날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통해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질 만큼 용기와 패기에 넘친 이 젊은이는 자전적 에세이 <지혜의 일곱 기둥머리말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누구나 꿈을 꾼다그러나 그 꿈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밤에 꿈을 꾸는 사람은 밝은 아침이 되면 잠에서 깨어나 그 꿈이 헛된 것이라는 사실을 이내 깨닫는다반면에 낮에 꿈을 꾸는 사람은 몹시 위험하다그런 사람은 눈을 활짝 뜬 채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려고 행동한다그렇다나는 낮에 꿈을 꾸었다.

 

p43. 우르 남부법의 일부를 찾아 해독해낸 사람이 나왔다펜실베니아대학교의 고고학 교수 새무얼 노아 크레이머다그의 저서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에 따르면수메르인들은 기원전 3000년경부터 이미 쐐기문자를 발명하여 사용했고상하 양원으로 구분된 의회를 구성하여 통치했다또 기원전 2500년경부터는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했고학교를 세워 자식들을 교육시키기도 했다.

 

p53. 독일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가 그의 저서 <역사의 기원과 목표>에서 제1차 지식 폭발이 일어난 기원전 8세기에서 기원전 3세기를 축의 시대라고 처음으로 이름 붙였다.

 

이때 동양에서는 중국에서 공자노자장자맹자순자묵자열자 등을 비롯한 제자백가가 나왔다인도에서 우파니샤드가 이루어졌으며 부처가 생존했고메소포타미아에서 차라투스트라가 등장했다팔레스타인에서는 엘리아이사야예레미야하박국다니엘 등의 선지자들이 나왔다.

 

그리고 서양 그리스에서는 호메로스아르킬로코스사포핀다로스아이스퀼로스소포클레스에우리페디스와 같은 시인들이 활동했고탈레스아낙시만드로스파르메니데스헬라클레이토스피타고라스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들이 등장했다.

 

p55. 축의 시대를 거치면서 (달리 말해 자연과 도덕의 보편성을 추구하면서인간은 드디어 이성과 인격을 가진 존재로 탈바꿈했다이러한 인간의 전체적 변혁을 야스퍼스는 정신화라고 이름 붙였다.

 

p57. 한마디로 보편성을 자연을 이해하여 조종하고인간을 설득하여 움직이게 하는 힘을 지녔다그것을 맨 처음으로 깨달은 인간이 축의 시대 사람들이었다.

 

이후 동양에서는 보편성을 도 또는 법이라고 불렀고, 서양에서는 로고스라고 이름 지었다.

 

p58.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 – 아르케

 

탈레스의 물아락시만드로스의 문한자아낙시메네스의 공기피타고라스의 수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파르메니데스이 존재엠페도클레스의 4원소데모크리토스의 원자.

 

소크라테스 – 아레테.

 

p83. 정리하자면그리스의 자연적역사적 환경이 폴리스라는 정치적 제도를 낳았다그것이 토론과 논쟁에 몰두하는 사회문화적 환경을 조성해생각의 도구들이 탄생했다그리고 이 도구들이 경이로운 고대 그리스의 학문과 예술그리고 민주주의를 일구어냈다.

 

p88. 서양의 유아들은 와 처럼 명사로 표현되는 대상에 집중하도록 교육받으며 자라고동양의 유아들은 소는 풀을 먹는다에서처럼 먹는다라는 동사로 표현되는 관계에 관심을 갖도록 교육받고 자라기 때문이다니스벳은 이 같은 차이를 명사를 통해 세상을 보는 서양”, “동사를 통해 세상을 보는 동양이라는 상징어를 통해 제시했다. ‘개별적 사물을 통해 세상을 인식하는 서양인과 사물들의 관계를 통해 세상을 인식하는 동양인의 차이라는 뜻이다그는 이 같은 차이가 동서양의 자연적사회적 환경의 차이에서 나왔다는 것을 역설했다.

 

p90. 해밀턴이 보기에는 이것이 동양에서는 학문이 아니라 종교가 발달한 이유인데인도에서는 현실 부정이이집트에서는 죽음이 곧 종교였다우파니샤드 철학이든불교이든인도에서는 현실은 환영이고 윤회가 진리다피라미드이든미이라이든조각상이든화화이든이집트의 모든 예술은 죽음과 연관되어 있고 내세를 위한 것이다이에 반해 그리스에서는 모든 예술과 학문이 삶과 연관되어 있고 현세를 위한 것이다.

 

p105. 수많은 실험과 관찰을 거쳐 윅스퀼이 내린 결론은 이렇다인간을 비롯한 동물들은 자기 자신이 가진 행동 능력에 따라 서로 다른 인지 능력을 갖고 있으며그것에 따라서 서로 다르게 범주화한 자신만의 세계를 구성해 그 안에서 산다윅스퀼은 이렇게 동물들이 범주화를 통해 스스로 구성한 가상의 세계를 환경세계umwelt’라고 불렀다.

 

p108. 같은 의미에서 마투라나는 이란 세계를 내놓는 행위이고, ‘이란 세계를 인지하는 경험이라고 부연 설명했다또 각각을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과 세계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방식이라고 다르게 표현도 했다그렇다면 무릇 함이 곧 앎이며앎이 곧 함이다라는 나투라나의 아포리즘은 우리가 그렇게’ 행위하여 세계를 범주화하면 세계가 그렇게’ 우리에게 나타나고세계가 우리에게 그렇게’ 나타나면 우리가 세계를 그렇게’ 범주화하는 행위를 한다는 뜻이 된다.

 

p.123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 이펙트>에 의하면당시 시인을 가리킬 대 사용한 용어가 가수를 뜻하는 그리스어 아오이도스.

 

p128. 호메로스는 이야기 전체에서 주제에서 끼워 맞추어지는 것만을 작품에 담고그 밖에 모든 것들은 간략하거나 아예 생략했다호메로스의 이러한 작품 스타일 덕분에 나중에 서양 문명의 본질까지 발전한 사고즉 개별적인 사실에서 보편적인 법칙을 이끌어내는 사고가 그리스에서 맨 처음으로 형성되었다.

 

p134. 프랑스 작가 레몽 크노는 모든 위대한 작품은 <일리아드>이거나 <오디세이아>.

 

p138. 그러므로 그 인간 종을 호모사피엔스 나란스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그보다 먼저 있었던 호모사피엔스의 다른 종과 호모사피엔스 나란스를 구분해 주는 것은 지성이 아니라 인류의 새로운 기본적 지혜의 원천인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인간 집단의 능력일 것이기 때문이다.

 

메타포라은유

 

p152. 은유는 첫 번째 생각의 도구이자이어서 살펴볼 다른 생각의 도구들의 근간이다은유는 생각이지만 다른 모든 생각들을 만드는 생각이다.

 

p154. 레이코프와 존슨은 <삶으로서의 은유>에서뿐 아니라 <몸의 철학>에서도 시간은 돈과 같은 역할을 하는 사회문화적 은유들을 집중적으로 분석했다두 저자는 그것들이 우리의 사고와 언어에서 원초적이고 근본적이라는 이유에서 ‘1차적 은유라고 이름 붙였다.

 

p156. 레이코프와 존슨이 은유의 본질은 한 종류의 사물을 다른 종류의 사물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경험하는 것이다.”라고 규정한 것도 그래서다.

 

p158. 은유는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의 유사성을 통해 원관념의 본질을 드러내고비유사성을 통해 의미의 변환 내지 확장을 창조해낸다유사성과 비유사성이 은유를 떠받치는 2개의 기둥이다.

  

p160. 독일의 고전문헌학자 브루노 스넬의 <정신의 발견>에 의하면고대 그리스어의 은유적 표현에는 두 가지가 있다. “은유는 그 기능성과 관련하고 있든가아니면 인상의 유사성과 관련하고 있다다시 말하여 동사를 통해 나타나는 동작이거나혹은 형용사를 통해 나타나는 속성과 관련하고 있다.

 

p169. 이것만은 남에게 배울 수 없는 것이며천재의 표상이다왜냐하면 은유에 능하다는 것은 서로 다른 사물들의 유사성을 재빨리 가나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p171. 그렇다면 우리가 시를 읽고낭송하고외운다는 것은 단순히 감성적 취향을 고양시키는 일이 아니다우리의 뇌 안에 은유를 창출하는 신경망을 새롭게 구축하는 작업이다.

 

p175. 그렇다이것이다자기가 전하려고 하는 내용을 이미지화하는 것알고보면 바로 이것이 시인뿐 아니라 동서고금의 뛰어난 사상가종교인정치가웅변가난 문장가들이 가장 즐기는 말하기와 글쓰기의 비법이다.

 

p186. 일반화와 추상화는 모두 대상들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을 찾아냄으로써 이루어지지만그 가운데 추상화가 모든 창의적 작업의 산실이라는 점에서 특히 중요하다추상화란 간단히 말해 복잡한 대상 또는 대상들에서 단 하나의 공통된 특징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제거함으로써 어떤 새로운 의미를 발견해 내는 작업이다.

 

2장 아르케원리.

 

p 198. 탈레스는 자연의 뒤에서 그것을 움직이는 것은 예측할 수 없는 변덕스러운 신이 아니라 파악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는 자연적 원리라고 믿었다그리고 관찰과 실험그리고 사고를 통해 그것을 찾으려 노력했다.

 

p205. 만물의 근원을 탈레스가 물아낙시만드로스가 무한자아낙시메네스가 공기헤라클레이토스가 불이라고 했을 때그것들은 각각 물의 생명력’, 무한자의 포괄성’, 공기의 가변성’, 불의 역동성’ 등과 같이 그것들이 가진 보편적 성질 내지 원리를 의미했다고 이해해야 한다.

 

p209. 관찰을 통해 패턴을 발견하는 것이 원리 창조의 출발이다.

 

p212. 흥미로운 사실은뛰어난 관찰자들은 단순히 글로 기록하거나 사진을 찍는 것 외에 드로잉곧 그림 기록의 중요성을 입을 모아 강조한다는 것이다이유는 간단하다대상을 직접 그리는 과정에서 더욱 세밀한 관찰과 풍부한 발견그리고 깊이 있는 이해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p227. 이 탐구방법은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분석론 전서>에서 아파고게라고 불렀고미국의 철학자 찰스 샌더스 퍼스가 가추법 또는 귀환법가설추정 등으로 경우에 따라 다르게 불렀던 추론법이다퍼스에 의하면 가추법은 우리가 새로운 생각을 만드러내는 유일한 방식이다.”

 

p232. 그래서 추천하고 싶은 것이 핸슨이 <과학적 발견의 패턴>에서 정리한 형식이다핸스에 따르면 가추법은 다음과 같은 형식으로 정리된다.

 

관찰을 통한 어떤 특정한 현상 p를 알았다.

그런데 만약 H가 참이면 P가 설명된다.

따라서 H가 참이라는 가설이 가능하다.

 

P238. 가추법의 형식화도 역시 다양한 방식으로 가능하지만그중 가장 간단한 것이

‘((pq)q) → p’이다고전논리학에서 보통 후건긍정식이라고 부르는 것인데이 형식을 위헤서 소개한 핸슨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만약 p가 참이면 q가 설명된다관찰을 통한 어떤 특정한 현상 q를 알았다따라서 p가 참이라는 가설이 가능하다가 된다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자연언어로는예컨대 비간 오면 땅이 젖는다땅이 젖었다그러므로 비가 왔다.’

와 같은 추론이 이에 해당한다그런데 후건긍정식은 잘 알려진 대로 형식적 오류에 속한다이른바 후건긍정의 오류다이 말은 모든 가추법은 논리적으로 그것의 타당성이 인정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p240. 로널드 기어리는 <학문의 논리>에서 가설연역법에 따른 사고가 과학 이론을 세우는 데뿐만 아니라 비판적 사고능력을 기르고 일반적 과학 교양을 쌓는 데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누차 강조했다그리고 가설연역법을 손쉽게 실행 및 평가할 수 있는 구체적인 틀을 제시했다. 1. 현실세계, 2 모델, 3 예측, 4, 자료, 5 부정적 증거, 6 긍정적 증거로 이어지는 이른바 ’6단계 프로그램이다.

 

p243. 예를 들어 (지구)은 어떤 것에도 떠받쳐지지 않은 채 공중에 떠 있으며모든 것들로부터 같은 거리만큼 떨어져 있기 때문에 머물러 있다라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잠언도 바로 가추법에 의해 얻어졌다.

 

20세기를 풍미한 과학철학자 칼 포퍼도 <파르메니데스의 세계>에서 아낙시만드로스의 이 같은 생각은 인간의 전 사상사 중에서 가장 대담하고가장 혁신적이며가장 놀라운 생각 중 하나다.”라고 높이 평가했다.

 

제 3로고스문장

 

p261.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문장은 이처럼 언어의 한 특별한 형태다로고스로서의 문장은 사물이나 사건에 관한 정보라는 성격뿐 아니라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있는 논증적 특성도 함께 갖고 있어야 한다.

 

p268. 그런 가운데 기원전 8세기부터 그리스인들이 페니키아인의 알파벳에서 자음을 들여오고 거기에다 모음을 위한 이런저런 기호들을 빌려다 자신들의 알파벳을 만들기 시작했다예를 들어 그리스어에서 a라는 모음으로 사용되는 문자 알파는 페니키아에서 황소를 뜻하는 알레프aleph’였다.

 

p269. 폴리스의 형성알파벳의 완성그리고 이성의 출현 등 이 세가지의 문명사적 사건이 거의 같은 시기에 상호보완적으로 일어났다.

 

p270. 아낙시만드로스가 말하는 무한자apeiron는 우선 시간적으로 형성된 것도 아니고 사라지지도 않으며”, “죽음도 쇠퇴도 모르고”, 따라서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어떤 것이다동시에 공간적으로는 광대무변하여 크기를 측정할 수 없으며, “우주 만물을 자신 안에 포괄하는” 그 어떤 것이다따라서 만물이 그 안에서 생겨나 그 안으로 돌아가는 무한자는 신적인 것으로서 만물을 포괄하고 횡단하며 보호하고 조종한다.

 

이 개념이 우선 파르메니데스의 존재플라톤의 선의 이데아그리고 신플라톤주의자 플로티노스의 일자라는 개념의 기원이 되었다.

 

p271. 아낙시만드로스가 산문으로 책을 썼다는 것은 하나의 문명사적 사건이다.

 

p281. 헤라클레이토스가 설파한 로고스가 곧 하이데거가 말하는 언어다헤라클레이토스와 하이데거두 사람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로고스를 먼저 듣고그것을 따라서 생각하고따라서 행동하고 따라서 말해야 한다그것이 진정한 사유이고행동이고언어다.

 

진리는 세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 안에서 산다언어가 진리의 집이다.

 

p284. 정관사 ‘to’가 ‘to psuchron(차가운 것), ’to noein(생각하는 것)‘ 등과 같이 추상화를 위해 쓰인 것은 헤라클레이토스에 와서부터다.

 

p286.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정관사 ‘to’를 사용하여 형용사적인 것 혹은 동사적인 것을 개념적으로 확정하는 어법이 없이는 불가능했다그리고 바로 이 어법이 헤라클레이토스 스타일이자 그의 탁월한 업적이다.

 

p287. 헤라클레이토스 스타일은 이런 방식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문장의 범위를 확정하여 삼단논법을 만드는 것을 도왔고멀리는 현대 논리학에도 기여했다.

 

p299.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문장의 기본 형식으로 규정한 ‘A는 B이다라는 형식을 네 가지로 확장했다현대 논리학에서 양화사라고 부르는 모든과 어떤이라는 한정사를 도입한 것이다그 결과 문장은 모든 A는 B이다.’ ‘모든 A는 B가 아니다.’ ‘어떤 A는 B가 아니다.’ ‘어떤 A도 B가 아니다.’라는 형식을 갖게 되었다차례로 전칭긍정판단전칭부정판단특칭긍정판단특칭부정판단이라 부른다.

 

예를 들자면, ‘모든 인간은 동물이다는 전칭긍정판단이고, ‘모든 인간은 동물이 아니다는 전칭부정판단, ‘어떤 인간은 동물이다는 특칭긍정판단, ‘어떤 인간도 동물이 아니다는 특칭부정판단이다.

 

P320. ‘누가 언제-어디서-어떻게 라는 육하원칙은 우리의 정신이 자신의 내면에 자연과 사물의 질서에 합당한 세계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말들이다.

 

4아리스모스

 

335. 우연히도대장간의 망치들은 각각 6파운드, 8파운드, 9파운드, 12파운드였다화성학에 의하면 두 망치의 무게 비율이 1:2 (6파운드와 12파운드)를 이루면 학 옥타브 차이가 있는 8도 음정을 내고, 2:3 (6파운드와 8파운드/ 9파운드와 12파운드)이면 5도 음정을, 3:4(6파운드와 8파운드, 9파운드와 12파운드)면 4도 음정을 만들어낸다때문에 만일 한 망치가 라는 음을 냈다면나머지 망치들은 ’, ‘’ 그리고 높은 도라는 음을 내고 있었던 것이다. ‘와 은 완전 5도를, ‘와 ’, 그리고 과 높은 도는 완전 4도를 이루지 않는가!

 

P348.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 문제의 답을 구하는 과정 안에는 1,1,2,3,5,8,13,21,34,55,89,144,233,377등으로 이어지는 수열이 하나 등장한다는 사실이다당신도 알다시피학자들은 이 수열을 피보나치 수열이라고 부른다.

 

제 5레토리케 수사학.

 

우리말로는 양도논법이라고 부르는데프로타고라스 딜레마의 내용을 살펴보면 왜 그렇게 부르는지를 알 수 있다.

 

어느날 프로타고라스와 그의 제자 에우아톨로스라는 젊은이 사이에 법정 소송이 벌어졌다발단은 프로타고라스가 제공했다그가 제자에게 공부를 마치고 난 다음만일 첫 번째 소송에서 지면 수업료를 받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이다공부가 다 끝나자 프로타고라스는 당연히 에우아톨로스에게 수업료를 요구했다그러나 이 영특한 제자는 수업료를 줄 수가 없다고 해서 소송이 벌어졌다이유는 이랬다.

 

“ 위대한 프로타고라스 선생님저는 이 소송에서 지든 이기든 수업료를 지불할 필요가 없습니다왜냐하면 제가 이번 소송에서 이기면 판결에 따라 수업료를 지불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고반대로 제가 지면 선생님과의 약속에 의해서 또한 수업료를 지불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

 

그러자 프로타고라스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면서 맞받았다.

 

사랑하는 제자여그대는 그동안 정말로 많은 것을 배웠도다그렇지만 그대는 이 소송에서 지든 이기든 수업료를 지불해야만 한다네왜냐하면 그대가 만일 이 소송에서 지면 판결에 의해 수업료를 지불해야만 하기 때문이고이기면 우리들의 약속에 따라 수업료를 지불해야만 하기 때문이라네. ”

 

프로타고라스는 딜레마를 물리치는 세 가지의 방법 가운데 반대 딜레마로 되받기로 에우아톨로스를 상대한 것이다그것은 주어진 딜레마와 동일한 논리로 정반대 결론을 이끌어내는 새로운 딜레마를 만들어 상대를 반박하는 방법이다.

 

P398. 그럼에도 그(고르기아스)가 <헬레네 예찬>에서 펼친 변론의 뼈대는 미사여구가 아니라 논증이었다그는 먼제 세 가지의 가정을 제시한 후 다음과 같이 하나씩 반박해나갔다.

 

만약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와 벌인 헬레네의 간통 행위가 신의 뜻에 따라 이루어졌다면인간은 신에게 저항할 수 없음으로 당연히 무죄다설령 파리스의 강압에 의해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비난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이 경우 비난받아야 할 사람은 가해자인 파리스이고 피해자인 헬레네는 오히려 동정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마지막으로 그녀가 설득의 말곧 로고스에 넘어갔다면 이 또한 무죄이다설득의 말이란 신과 같아서 우리가 저항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전제를 부당하게 설정하거나 전제에서 결론의 도출이 느슨한’ 것이 논증적 수사의 특성이다그리고 바로 이것이 고르기아스가 수사를 설득을 만들어내는 기술로 규정하고 자기가 취하는 입장에 따라 마음대로 휘두른 이유다.

 

P408. 설득의 여신 페이토는 2개의 무기를 갖고 있다하나는 꽃이고다른 하나는 칼이다하나는 문예적 수사이고다른 하나는 논증적 수사다나중의 것이 더 강하다물론 함께 쓰면 무적이다.

 

P413. 그리스어로 파라데이그마’paradeigma로 (라틴어로 ‘exemplum’으로표기되는 예증법은 예를 근거로 하여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는 수사적 논증이다.

 

p419. 예로부터 뛰어난 설교자연설가정치가 그리고 학자들은 평소에 다양한 예들을 수집정리하여 필요할 때마다 곧바로 사용할 수 있는 자료집을 준배했다그 기원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오르가논의 제5권 <토피카>에서 시작되었다고 해서 토피카’ 또는 영어로 토픽이라고 부른다.

 

p425. 오비디우스의 작품에 나오는 너를 간직할 수 있었다따라서 너를 잃을 수도 있으리라라는 시구들 들 수 있다이것은 간직할 수 있는 것은 잃을 수도 있다나는 너를 간직할 수 있었다때문에 나는 너를 잃을 수도 있다라는 삼단논법 가운데 간직할 수 있는 것은 잃을 수도 있다라는 전제를 생략하고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p432. 대증식은 다음에 설명할 연쇄식과 함께 오히려 확장된 복합삼단논법이다이 논증법은 전제 하나하나마다 그것을 증명하는 증거를 붙임으로써 설득력을 강화하자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따라서 기본구조는 전제 – 전제 증거전제 – 전제 증거결론’, 이렇게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p434. 이처럼 상당수의 대증식에서는 모범적인 예가 증거로 제시되기도 한다이런 경우 대증식은 삼단논법과 예증법을 결합한 형태의 논증이라 할 수 있다.

 

p437. 아리스토텔레스의 연쇄식또는 간단히 줄여 연쇄식이라고도 불리는 연쇄삼단논법은 둘 이상의 삼단논법을 모아 하나의 연결체로 만듦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더욱 강조하는 논증법이다방법은 앞에 전개된 삼단논법의 결론을 다음에 오는 삼단논법의 전제로 사용하여 연결하는 것이다따라서 연쇄삼단논법의 기본 구조는 전제 1 , 전제 2, 결론 1, 전제 3, 결론 2’와 같은 식으로 이루어진다이때 결론1이 결론2의 전제 가운데 하나로 사용된다.

 

자석의 코일에 전기저항이 없으면 에너지가 열로 소모되는 일이 없다초전도 자석의 코일에는 전기저항이 전혀 없다때문에 에너지가 열로 소모되는 일이 없다이것은 에너지를 적게 들이고도 강력한 자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따라서 초전도 자석의 코일은 에너지를 적게 들이고도 강력한 자장을 유지할 수 있다.

 

p443. 고대와 중세에는 수사학이 젊은이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7학문 (문법수사학논리학음악산술기하학천문학가운데 항상 들어 있었다그렇지만 수사학 교육을 정립한 사람은 로마 제정 초기의 웅변가이자 수사학자였던 퀸딜리아누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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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2-23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구야... 시이소오님 타이핑만으로도 감동입니다..

시이소오 2016-02-23 15:28   좋아요 0 | URL
스크롤 힘드셨죠? 짜증안내고 읽어주신것만으로 감사합니다 ^^
 
심리정치 - 신자유주의의 통치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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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한국은 심리정치의 시대가 도래하지 않았다. ‘투명사회는 더더욱 아니다. 한국에 대해 말하자면 <위험사회>의 울리히 벡, <쓰레기가 되는 삶>들의 지그문트 바우만, <호모 사케르>의 아감벤, <구별짓기>의 부르디에의 이론이 한병철의 이론 보다는 더 적절할 것이다.

 

어떤 국가든 한병철이 비판하는 심리정치의 단계로 나아가는 게 역사의 일반적 흐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어이없게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어야할 색누리당이라는 군사독재 잔당들이 권력을 잡는 바람에 한병철의 이론이 맞지 않는 국가가 돼버리고 말았다.

 

한국은 투명사회가 아니다. 메르스 사태에서 볼 수 있듯 국가는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는다. 국가는 정보를 독점하려 한다. 국민이 반드시 알아야할 정보자체도 공개하지 않는다. 국민이 죽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는다. 한국의 빅브라더는 눈곱만큼도 스마트하지 않을뿐더러 친절하지도 않다. 여전히 규율 권력을 작동시킨다. 정보를 공유하려는 국민들을 유언비어 유포라는 이유로 협박하고 감금한다. 국민의 알 권리를 존중한 JTBC 손석희는 소환 당했고, 정부와 박근혜가 아몰랑으로 일관하고 있을 때 메르스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던 박원순 시장은 검찰로부터 허위사실유포 혐의로 수사를 받는 중이다.

 

친절한 스마트 권력은 예속된 주체의 의지에 정면으로 반하기보다는 그들의 의지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조종한다. 그것은 안 된다고 말하기보다 그러라고 말하는 권력이며, 억압적이기보다 유혹적인 권력이다. 그것은 긍정적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을 착취하려고 애쓴다. 그것은 금지하는 대신 유혹한다. 그것은 주체와 대적하는 대신 주체의 욕구에 부응한다.

 

자유분방하고 친절한 모습으로 자극하고 유혹하는 스마트 권력은 명령하고 위협하고 규제하는 권력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좋아요 버튼은 스마트 권력의 인장이다. 사람들은 소비하고 소통하면서, 즉 좋아요 버튼을 누르면서 스스로를 지배 관계 속에 빠뜨린다. 신자유주의는 좋아요-자본주의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는 강제와 금지를 통해 작동하던 19세기 자본주의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들이 한국 사회와는 들어맞지가 않는다.

우리의 대통령께서 독재자의 유전자를 물려받았기 때문일까.

 

이 책에 접근하기 위해선 국가에 대한 논의는 배제하고 신자유주의에 대한 논의로 한정하는 편이 나을 듯싶다. (후진국 국민으로서 감수해야하는 불편함)

 

신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다. 우리가 자유롭다는 생각은 착각에 불과하다. 개인은 자본의 페니스에 불과하다. 신자유주의에서 긍정성은 부정성만큼이나 폭력적이다. 오늘날 신자유주의는 빅데이터를 우상화한다. 그러나, 한병철이 보기에 빅데이터는 통계에 불과할 뿐이다. 통계를 통한 지식은 유일무이한 것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것은 절대적 무지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경험해야한다.

 

체험과 반대로 경험은 비연속성을 바탕으로 한다. 경험은 변신을 의미한다. 어느 대담에서 푸코는 니체, 블랑쇼, 바타유가 말하는 경험이란 주체를 그 자신에게서 떼어내어 주체가 더 이상 주체 자신이 아니게 되거나, 주체가 자신의 파괴 또는 해체로 내몰릴 지경에 이르게하는 어떤 것이라고 지적한다. 주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예속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험은 주체를 예속 상태에서 벗어나게 한다. 경험은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가 주체를 예속 상태 속에 더 깊이 빠뜨리기 위해 이용하는 체험 또는 기분과 정반대다.

 

푸코가 말하는 삶의 기술은 완전히 다른 삶의 형식을 낳는 자유의 실천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탈 심리화의 과정 속에서 완성된다. “삶의 기술이란 심리학을 죽이는 것, 자발적으로, 또한 다른 개체들과도 어울리며, 아무 이름도 없는 존재, 관계, 특성 들을 생성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해내지 못한다면 이 삶은 살 가치가 없다.”

우리는 주체가 아니라 바보가 돼야만 한다.


바보는 현대의 이단아다. 이단은 본래 선택을 의미한다. 즉 이단아는 자유로운 선택을 쥐고 있는 자다. 그는 정통에서 이탈할 용기가 있다. 그는 순응의 압박을 용감하게 떨쳐버린다. 이단아로서의 바보는 합의의 폭력에 맞서는 저항의 형상이다. 그는 아웃사이더의 마력을 보존한다. 순응의 압박이 점점 더 강화되어가는 오늘날, 이단적 의식의 날을 벼려야 할 필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절실하다.

 

바보짓은 신자유주의적 지배 권력과 그것이 강제하는 총체적 커뮤니케이션과 총체적 감시에 반기를 든다. 바보는 소통하지않는다. 바보는 소통 불가능한 것으로 소통한다. 그는 침묵의 장막 속으로 들어간다. 바보짓을 통해 침묵과 고요, 고독이 있는 자유로운 공간, 정말 말해질 가치가 있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진다. “

 

들뢰즈는 말했다. “철학은 언제나 바보노릇이라고. 철학사는 바보짓의 역사다. 오직 바보만이 완전히 다른 것에 접근할 수 있다. 바보만이 동일자의 지옥속으로 빠져들지 않는다.


네트워크에서 벗어나 상상을 초월하는 외부 공간에 거주해야 한다.

 

 

 

메모한 문장들

 

자유의 위기.

 

우리는 자유 자체가 강제를 생성하는 특수한 역사적 시기를 살고 있다. 할 수 있음의 자유는 심지어 명령과 금지를 만들어내는 해야 함의 규율보다 더 큰 강제를 낳는다. 해야 함에는 제한이 있지만, 할 수 있음에는 제한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할 수 있음에서 유래하는 강제는 한계가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역설적 상황에 빠진다. 자유는 본래 강제의 반대 형상이다. 자유롭다는 것은 강제가 없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처럼 강제의 반대여야 할 자유가 강제를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자유롭다고 여기는 성과주체는 실제로는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 성과주체는 주인에 묶여 있지 않으면서도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착취한다는 점에서 절대적 노예라고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적 주체는 자기 자신의 경영자로서 목적에서 자유로운 관계를 맺을 능력이 없다. 경영자 사이에서는 목적 없는 우정도 생겨날 수 없다. 하지만 자유롭다는 것은 본래 친구들 곁에 있음을 의미한다. 인도게르만어에서 자유Freiheit와 친구Freund는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이다


자유는 근본적으로 관계의 어휘다. 사람들은 좋은 관계 속에서, 타인과의 행복한 공존 속에서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느끼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초래하는 개개인의 전면적 고립 상태는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해주지 못한다.

 

개인적 자유는 스스로의 증식을 추구하는 자본에 악용된다는 점에서 노예 상태와 다름없다. 그러니까 자본은 자신의 번식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착취하는 것이다. “자유 경쟁 속에서 자유롭게 해방되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자본이다.”

 

개인의 자유를 통해 실현되는 것은 자본의 자유다. 그리하여 자유로운 개인은 자본의 성기로 전락한다. 개인의 자유는 자본에 자동적인주체성을 부여하며 이로써 자본의 능동적 번식을 추동한다. 자본은 끊임없이 살아 있는 새끼들을 친다. 오늘날 과도한 형태에 이른 개인의 자유는 결국 자본 자체의 과잉을 의미할 따름이다.

 

자본의 독재.

 

신자유주의 질서는 타자에 의한 착취를 어떤 계급도 빠져나갈 수 없는 자기 착취로 탈바꿈시킨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무계급적 자기 착취를 전혀 알지 못했다. 사회 혁명이 착취하는 자와 착취당하는 자의 구별을 전제로 한다면, 무계급적 자기 착취는 바로 사회 혁명의 불가능성을 의미한다. 자기 자신을 착취하는 성과주체는 고립화되고, 이로 인해 공동의 행위를 할수 있는 정치적 우리 자체가 형성되지 못한다.

 

신자유주의적 성과사회에서 실패하는 사람은 사회나 시스템에 의문을 제기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실패의 책임을 돌리고 부끄러움을 느낀다. 바로 여기에 신자유주의적 지배 질서의 특별한 영리함이 있다. 신자유주의 질서는 시스템에 대한 저항 자체가 일어나지 않게 만든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억압적 지배 관계를 전제한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의 자기 착취적 질서 속에서 사람들의 공격성은 오히려 자기 자신을 겨냥한다. 이러한 자기 공격성으로 인해 피착취자는 혁명가가 아니라 우울증 환자가 된다.

 

 

어쩌면 우리는 행동하지 않아도 되려고, 즉 자유롭지 않아도 되려고, 책임을지지 않으려고, 여원히 채무자로 머무는 것인지도 모른다. 거액의 부채는 우리가 자유로울 능력이 없다는 증거가 아닐까? 자본은 우리를 다시 채무자(죄인)로 만드는 새로운 신이 아닐까? 발터 벤야민은 자본주의를 종교로 파악한다. 자본주의는 죄를 씻기는커녕 오히려 빚을 지우는 제의를 벌이는 최초의 사례. 죄를 씻을 길이 없기 때문에, 부자유의 상태가 영구화된다. “죄를 씻을 길을 알지 못하는 엄청난 부채의식을 빚을 갚기 위해서가 아니라 빚을 보편화하기 위해서 제의에 의존한다.”

 

투명성의 독재 : 한국사회와 아직은.

스마트 권력 ; 왜 한국은 아직도 규율 권력인가.

 

규율 권력은 여전히 전적으로 부정성의 영향 속에 있다. 그것은 허용이 아니라 금지의 형태로 구현된다. 규율 권력은 이러한 부정성으로 인해 신자유주의 지배 질서를 기술하는 데는 전혀 적합하지 않다. 신자유주의 지배 질서는 긍정성의 빛을 발산한다. 신자유주의적 권력의 기술은 섬세하고 유연하며 스마트한 형태를 취하며, 결국 사람들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예속된 주체는 자신이 예속되어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한다. 예속된 주체에게 지배 관계는 완전히 감추어져 있다. 그래서 그는 자유롭다고 착각한다.

 

규율 권력은 비효율적이다. 사람들을 명령과 금지의 코르셋 속에 폭력적으로 욱여넣기 위해 막대한 힘을 소모하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지배 관계에 들어오도록 유도하는 권력의 기술이 훨신 더 효율적이다.

 

신자유주의적 권력 기술의 목표는 인간을 온순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의존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친철한 스마트 권력은 예속된 주체의 의지에 정면으로 반하기보다는 그들의 의지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조종한다. 그것은 안 된다고 말하기보다 그러라고 말하는 권력이며, 억압적이기보다 유혹적인 권력이다. 그것은 긍정적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을 착취하려고 애쓴다. 그것은 금지하는 대신 유혹한다. 그것은 주체와 대적하는 대신 주체의 욕구에 부응한다.

 

자유분방하고 친절한 모습으로 자극하고 유혹하는 스마트 권력은 명령하고 위협하고 규제하는 권력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좋아요 버튼은 스마트 권력의 인장이다. 사람들은 소비하고 소통하면서, 즉 좋아요 버튼을 누르면서 스스로를 지배 관계 속에 빠뜨린다. 신자유주의는 좋아요-자본주의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는 강제와 금지를 통해 작동하던 19세기 자본주의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두더지와 뱀


두더지는 개방을 견디지 못한다. 이제 두더지의 자리를 뱀이 대신한다. 뱀은 규율 사회의 뒤를 이은 신자유주의적 통제사회의 동물이다. 두더지와 달리 뱀은 닫힌 공간 속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뱀은 오히려 움직임을 통해 공간을 열어간다. 두더지는 노동자다. 반면 뱀은 경영자다. 뱀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동물이다.

 

규율 체제는 들뢰즈에 따르면 마치 처럼 조직되어 있다. 그것은 생정치의 체제다. 반면 신자유주의 체제는 마치 영혼과 같은 양상을 보인다. 따라서 심리정치가 이 체제의 통치 형식이 된다. 그것은 회피할 수 없는 경쟁을 끊임없이 확산시킨다.” 이로써 유익한 승부욕과 탁월한 행위 동기가 촉발된다는 것이다.

 

생정치

 

규율 권력은 표준화하는 권력이다. 그것은 주체를 규범, 명령, 금지의 체계에 예속시키고, 일탈적이거나 비정상적인 요소를 제거한다. 바로 이러한 조련의 부정적 성격이 규율 권력의 본질적 요소다.

 

푸코의 딜레마

 

신자유주의 체제의 권력 기술은 푸코의 권력 분석에서 맹점으로 남아 있다. 푸코는 신자유주의적 지배 체제가 자아의 기술을 완전히 포섭했다는 것, 신자유주의적 자아 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 자아의 부단한 최적화가 지배와 착취의 효율적 형식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권력 기술은 섬세한 형식을 취한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개인을 예속시키지 않는다. 개인이 자발적인 자기 제어를 통해 지배 관계를 자신의 내면에 전사하도록 유도한다. 개개인은 이렇게 내면에 전사된 지배 관계를 자유로 해석하게 된다. 여기서 자아의 최적화화 복종, 자유와 착취는 하나가 된다. 자기 착취라는 형식으로 자유와 착취를 결합시키는 이러한 권력 기술은 푸코의 시야 너머에 있다.

 

힐링 혹은 킬링

 

사람의 인격을 긍정성의 강제 속에 완전히 묶어두는 것은 불가능하다. 부정성이 없다면 삶은 죽은 존재로 쭈그러들 것이다. 부정성은 삶을 생동하게 한다. 고통은 경험의 본질적 부분을 이룬다. 삶이 순전히 긍정적 감정과 플로우 경험만으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인간적 삶이 아닐 것이다. 인간의 영혼에 깊은 긴장을 선사하는 것은 바로 부정성이다.

 

끝없는 최적화의 명령은 고통마저 착취한다. 미국의 유명한 모티베이션 트레이너인 앤서니 로빈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CANI 원칙을 꼭 지켜라! Constant Never Ending Improvement. 부단히, 끝없이 개선할 것! 부단히 끝없이 더 나아지고 싶다는 소망, 모든 인간이 느끼는 소망을 솔직히 인정하라. 불만족, 긴장으로 인한 일시적인 컨디션 난조에서 생겨나는 스트레스가 다시 힘을 만들어 낸다. 이것은 당신이 삶 속에서 필요로 하는 종류의 고통이다.” 그러니까 오직 최적화라는 목적의 관점에서 이용 가능한 고통만이 용인되는 것이다.


긍정성의 폭력은 부정성의 폭력만큼이나 파괴적이다.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는 의식 산업을 활성화하며 이로써 결코 긍정 기계일 수 없는 인간의 영혼을 파괴한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주체는 자아 최적화의 명령, 즉 더 큰 성과를 위해 끝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강제 속에서 몰락해간다. 힐링은 킬링으로 귀결된다.

 

친절한 빅브라더

 

신자유주의 체제의 권력 기술은 금지하고 방지하고 억압하기 보다, 내다보고 허용하고 기획한다. 소비는 억제되지 않고 극대화된다. 결핍이 아니라 괴잉, 즉 과도한 긍정성이 생성된다. 우리는 커뮤니케이션하고 소비하도록 독려받는다.

 

우리는 고문과 협박으로 자백을 강요받는 대신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다 털어놓는다. 스마트폰이 고문실을 대신한다. 빅브라더는 이제 친절한 표정으로 다가온다.

 

감성 자본주의

 

게임화

 

마르크스의 가정과는 달리 생산력과 생산 관계의 변증법은 자유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를 새로운 착취 관계 속에 얽어맨다. 이제 우리는 마르크스와 함께 마르크스를 넘어서 사유해야 할 것이다. 자유를, 자유로운 시간을 정말 우리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말이다. 자유로운 시간은 오직 노동의 타자만이, 생산력이 아닌 다른 힘, 어떤 노동력으로도 전화되지 않을 어떤 힘만이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이다. 즉 생산 형식이 아닌 어떤 삶의 형식, 완전히 비생산적인 어떤 것.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생산의 피안에서 쓸모 없는 것의 쓸모를 찾아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빅데이터

 

오늘날 수치와 데이터는 절대화되는 데 그치지 않고 섹슈얼하고 물신적인 성격까지 지니게 되었다. 예컨대 양화된 자아는 그야말로 리비도적 에너지로 작동한다. 다타이즘은 전반적으로 리비도적인, 심지어 포르노적이기까지 한 특성을 나아낸다. 다타이스트들은 데이터와 성교한다. 그래서 요즘에는 데이터 성애자에 대한 얘기도 종종 들을 수 있다. 데이터 성애자들은 철두철미하게 디지털하다고 한다. 그들은 데이터를 섹시한다고 느낀다. 디기투스(손가락)는 팔루스(남근)에 가까워진다.

 

빅데이터는 벤야민이 말하는 영화 카메라에 비유할 수 있다. 데이터 마이닝은 디지털 돋보기로서 인간의 행동을 확대하여 의식이 작용하는 행동 공간 뒤에서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또 하나의 행동 공간을 조명해준다. 빅데이터의 미시물리학은 액톰, 즉 의식에서 벗어나 있는 미시행동을 가시화할 것이다. 빅데이터는 또한 개개인이 의식하지 못하는 집단적 행동 패턴도 드러낼 것이다. 이로써 집단 무의식에의 접근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미시물리학적 또는 미시심리학적 관계망을 시각적 무의식이라는 벤야민의 개념을 변형하여 디지털 무의식이라고 명명할 수도 있으리라.

 

데이터 회사인 액시엄은 약 3억 명에 이르는 미국인의 개인 정보를 가지고 장사를 한다. 그러니 사실상 거의 모든 미국인의 개인 정보가 액시엄의 소유 아래 있는 것이다. 액시엄은 이제 미국인에 대해 FBI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 액시엄은 인간을 70개의 범주로 나눈다


액시엄의 카탈로그에 인간은 70개 종류의 상품으로 제시되어 있다. 필요에 따라 무엇이든 구할 수 있다. 여기서 경제적 가치가 낮은 사람은 웨이스트쓰레기로 지칭된다. 시장 가치가 비교적 높은 소비자는 슈팅 스타그룹에 들어 있다. 나이는 36세에서 45세로 활동적이고, 아침 일찍 일어나 조깅을 하며, 아이는 없으나 기혼이고, 여행을 즐기며 시트콤 사인필드를 시청한다.

 

빅데이터는 새로운 디지털 계급사회를 만들어낸다. “쓰레기로 분류되는 사람은 최하층 계급에 속한다. 점수가 낮은 사람은 신용대출을 받지 못한다. 그리하여 파놉티콘과 나란힌 바놉티콘이 수립된다. 파놉티콘이 시스템에 갇힌 수감자를 감시한다면, 바놉티콘은 시스템에서 떨어져있거나 시스템에 대해 적대적인 자들을 불청객으로 낙인 찍고 배제하는 기구다. 고전적인 파놉티콘이 훈육의 기능을 수행한다면, 바놉티콘은 시스템의 안전과 효율을 보장한다.

 

빅데이터는 정신을 완전히 불구로 만든다. 순수하게 데이터의 힘으로 추진되는 인문과학은 더 이상 인문 과학이 아니다. 총체적인 데이터 지식은 정신의 원점에 놓여 있는 절대적 무지에 지나지 않는다.

 

니체에게 통계 수치는 그저 인간이 무리 짓는 짐승이라는 것, “점점 더 인간이 똑같아진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이러한 획일화는 오늘의 투명사회, 정보사회의 특징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즉시 드러난다면, 일탈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투명성으로부터 타자, 낯선 것, 불일치를 제거하는 순응의 압력이 발생한다. 빅테이터는 무엇보다도 집단적 행동 패턴을 가시화한다.

 

다타이즘 자체가 동일화의 증대 경향을 강화한다. 데이터 마이닝은 기본적으로 통계학과 다르지 않다. 데이터 마이닝이 드러내는 상관관계는 통계적 개연성의 표현이다. 그것은 통계적 평균치를 계산해낸다. 따라서 빅데이터는 유일무이한 것에 접근하지 못한다. 빅데이터는 사건을 보지 못한다. 역사를, 인류의 미래를 규정하는 것은 통계적 개연성이 아니라 개연적이지 않은 것, 유일한 것, 사건이다. 따라서 빅데이터는 미래도 보지 못한다.

 

체험과 반대로 경험은 비연속성을 바탕으로 한다. 경험은 변신을 의미한다. 어느 대담에서 푸코는 니체, 블랑쇼, 바타유가 말하는 경험이란 주체를 그 자신에게서 떼어내어 주체가 더 이상 주체 자신이 아니게 되거나, 주체가 자신의 파괴 또는 해체로 내몰릴 지경에 이르게하는 어떤 것이라고 지적한다. 주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예속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험은 주체를 예속 상태에서 벗어나게 한다. 경험은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가 주체를 예속 상태 속에 더 깊이 빠뜨리기 위해 이용하는 체험 또는 기분과 정반대다.

 

푸코가 말하는 삶의 기술은 완전히 다른 삶의 형식을 낳는 자유의 실천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탈 심리화의 과정 속에서 완성된다. “삶의 기술이란 심리학을 죽이는 것, 자발적으로, 또한 다른 개체들과도 어울리며, 아무 이름도 없는 존재, 관계, 특성 들을 생성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해내지 못한다면 이 삶은 살 가치가 없다.”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는 심리학적 프로그래밍과 제어를 통해 지배 시스템을 안정적으로 지속시키는 통치술이다. 따라서 자유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는 삶의 기술은 탈심리학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삶의 기술은 예속화의 매체인 심리정치를 무장해제시킨다. 주체는 탈심리화되고, 비워진다. 이로써 아직 이름이 없는 삶의 형식을 위한 자유가 생겨난다.

 

바보

 

바보는 현대의 이단아다. 이단은 본래 선택을 의미한다. 즉 이단아는 자유로운 선택을 쥐고 있는 자다. 그는 정통에서 이탈할 용기가 있다. 그는 순응의 압박을 용감하게 떨쳐버린다. 이단아로서의 바보는 합의의 폭력에 맞서는 저항의 형상이다. 그는 아웃사이더의 마력을 보존한다. 순응의 압박이 점점 더 강화되어가는 오늘날, 이단적 의식의 날을 벼려야 할 필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절실하다.

 

바보짓은 신자유주의적 지배 권력과 그것이 강제하는 총체적 커뮤니케이션과 총체적 감시에 반기를 든다. 바보는 소통하지않는다. 바보는 소통 불가능한 것으로 소통한다. 그는 침묵의 장막 속으로 들어간다. 바보짓을 통해 침묵과 고요, 고독이 있는 자유로운 공간, 정말 말해질 가치가 있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진다.

 

순수한 내재성은 심리화되지도, 예속화되지도 않는 공허다. 내재적 삶은 비어 있는 만큼 더 가볍고, 더 풍부하고, 더 자유롭다. 개별성이나 주체성이 아니라 독특함, 특이성이 바보의 본질이다. 그래서 바보는 아직 개인도, 인격도 아닌 아기들과 근본적으로 닮았다. 개인적 속성이 아니라 비인격적 사건이 아기들의 존재를 이루는 핵심이다.

 

바보는 그 누구와도 혼동되지 않지만 더 이상 이름이 없는” “호모 탄툼, 특성 없는 인간을 닮았다. 바보가 들어갈 수 있는 내재성의 층위는 탈예속화와 탈심리화의 매트릭스다. 그것은 주체를 그 자신에게서 해방시켜 저 측량할 수 없는 텅 빈 시간 속으로보내는 부정성이다. 바보는 주체가 아니다. “차라리 꽃의 실존. 빛을 향한 단순한 트임

 

 

-2015. 6. 16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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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의변증법 2016-02-20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예전부터 읽어보고 싶은 책이었는데 다시 보니 더 의지가 솟아오르네요ㅎㅎ
잘 읽고 갑니다.

시이소오 2016-02-20 21:01   좋아요 0 | URL
얇아요, 빨리 읽히진 않지만 은근히 재밌어요^^

북다이제스터 2016-02-20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사람 한병철이 썼는데 굳이 매번 한국사람이 번역하여 옮긴 이유가 궁금합니다.

시이소오 2016-02-20 21:33   좋아요 0 | URL
독일에서 독일어로 낸 책이라서요.저자는 한국보다 독일에서 더 유명하시죠 ~~

시이소오 2016-02-20 21:36   좋아요 0 | URL
한병철 책은 한국보다는 독일사회를 염두해두고 쓰인거겠죠. 선진국을 비판하기에는 이론적으로 맞아떨어지는데 한국같은 후진국하곤 좀 안들어맞아요 ^^;

북다이제스터 2016-02-20 21:37   좋아요 0 | URL
저자가 유학 간 사람이라 독일어 보다 한글에 더 능통한 사람이라서요. 번역은 반역인데 매번 국내에 굳이 직접 한글로 출판하지 않은 이유가 궁금해서요.

시이소오 2016-02-20 22:32   좋아요 0 | URL
정확힌 모르겠지만 한병철씨 입장에서야 독일사회에 대해 쓴 책을 다시 한국어로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건 아닐까요? 정확히는 모르겠네요^^;

비로그인 2016-02-20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 빅브라더의 감시사회, 신자유주의 정글사회, 모든 것이 가난한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체제군요. 부유한 사람들은 피할 언덕도 있고 도망갈 여력도 있는데 반해 힘 없는 사람들은 암울합니다.

시이소오 2016-02-20 22:30   좋아요 1 | URL
그러게나 말입니다. 최근에 가라타니 고진의 인터뷰집을 읽고 희망을 느꼈어요. 슬슬 세상이 뒤바뀔 때가 된 것 같아요^^

짜라투스트라 2016-02-20 23: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에 좋아요를 누르면 저도 심리정치에 이용당하는 건가요??^^;; 그런 게 아니기를 바랄뿐입니다

시이소오 2016-02-20 23:40   좋아요 0 | URL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했네요. ㅋ 그런게 아닙니다 ^^

cyrus 2016-02-21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체제도 잘 보면 심리정치의 원리가 있습니다. ^^

시이소오 2016-02-21 13:42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바보가 돼야겠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2-21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는 정말 뛰어났습니다. 항상 제 손가락 안에 뽑는 책..

시이소오 2016-02-21 15:14   좋아요 0 | URL
우와, 역쉬 ^^

2016-02-22 08: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2-22 11:42   좋아요 0 | URL
공부라고하기엔, 그냥 독서수준이죠. 감사합니다 ^^
 
생각하는 인문학 - 5000년 역사를 만든 동서양 천재들의 사색공부법
이지성 지음 / 차이 / 201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대체적으로 수긍할만 하다. 그러나, 믿을 수가 없다. ?

 

젊은이들을 일본 군대의 총알받이로 내몰던 친일파 작가들이 해방이후 대한 독립만세라고 아무리 목청껏 부르짖는다 한들 당신이라면 그 사람 말을 믿겠는가? 비슷한 이유다.

 

이지성, 황광우의 <고전 혁명>을 읽고서 나는 이지성 작가를 대단히 존경할 만한 사람이라 생각했었다. 책을 읽자마자 다음 폴레폴레에도 가입했었으니까. 그런데 그가 <27살 이건희처럼>이란 책을 썼다는 걸 몰랐었다. 동명이인이겠지 싶었는데 아니었다. 그 사람이었다. 그때의 배신감이라니!! 선호하던 작가들, 예를 들면 김동인, 모윤숙, 채만식, 서정주 등이 친일파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만큼의 충격이었다.

 

이 책에서도 이지성은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고, ‘타락한 지배계층의 아이를 가르치는 것 보다는 저소등측 아이들을 위해 교육 봉사를 했었음을 자랑하고 있다. <27살 이건희처럼>을 쓴 사람이?? 스스로 생각해도 역겹지 않은가.

 

이지성과 같은 지배계급에 기생하는 작가들 김난도, 공병호, 안상헌, 김병완 기타등등의 공통점이 있다면 모든 책임을 개인으로 환원한다는 것이다. 한국은 알려져있다시피 OECD 국가 중 자살율 1위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가 시스템적으로 어딘가 문제가 있지 않을까 의심해 봐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이들은 사회의 문제는 외면한다. ? 밥벌이가 안되기 때문이다. 방송, 언론사가 재벌들 나팔수로 전락하는 이유와 비슷하다. 아마 이들은 일제 강점기였다면 언제든지 일본 제국주의 나팔수가 됐을 것이다. 오늘날 기득권층의 나팔수이듯.

 

이지성은 지엽적으론 돈을 벌기위한 인문학을 비판한다. 그러나, 끊임없이 인문학을 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라고 떠들어댄다. 모순임을 깨닫지 못하는가. 심지어 거부가 된 사람들은 모두 사물의 이치를 깨달은 자들이다라고 주장한다. 이지성의 논리에 따르면 오늘날의 대기업 총수들은 전부 사물의 이치를 깨달은 자들이다. (기업 총수들 입이 쫙쫙 찢어지는 게 눈에 그려진다. 얼마나 좋을까? 비서에게 당장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이번 강연에 몇천만원이 들어도 좋으니까 이지성 작가를 불러들여”)

 

그리고는 삼성 이건희와 LG 구자경의 사례를 든다. 그들이 격물치지를 통해 세계적인 기업이 되었다고. 그들이 말하는 격물치지사물의 이치를 깨달아라는 원래의 의미라고는 볼 수 없다. ‘팔리는 상품을 만들어라로 봐야하지 않을까. ‘노조같은 거 만들생각하지 말고 물건이나 만들어라의 뜻이다.

 

책의 초반부에서 이지성은 금융공학의 기초가 되는 수학, 과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키코 사태를 예로 든다. 파생금융상품인 키코로 인해 한국은 약 10조원의 피해를 입었다. 그래서 일반인들도 파생금융상품을 공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파생금융 상품의 거래 규모는 한 해 3경이라고 한다. 거래 규모는 세계1위라고 한다. 월스트리트의 퀀트들은 수학의 편미분 방정식과 물리학의 열전도 방정식을 활용해 파생금융상품을 설계해 우리의 호주머니를 털어가고 있음으로 우리 역시 수학과 과학을 공부해야 한다는 게 이지성의 주장이다.

곧장 의문이 떠오른다. “파생 금융상품은 도박과 같은 건데, 안 하면 되잖아요?”

이지성은 이렇게 말했다.

 

물론 투자니 재테크니 도박이니 하는 것들은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한다. 이것들은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투자니 재테크니 도박이니 하는 것들은 엄연히 인간사회의

커다란 축을 형성하고 있다. 나는 이같은 현실을 인정하고 조금이나마 변화시키고 싶다. 인문학을 핑계로 현실을 부정하고 자기 세계에 갇혀 사는 바보는 되고 싶지 않다.“

 

즉 그의 말을 정리해보자면 강원랜드에 가서 빠찡코를 하지 않거나, 인터넷 포커를 하지 않거나 파생금융상품에 투자하지 않는 사람들은 현실을 부정하고 자기 세계에 갇혀 사는 바보에 불과하다.

 

나는 투자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어서......” 같은 식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감히 말하고 싶다. 다름 아닌 이런 태도 탓에 인생을 망치게 될 것이라고.

 

다시 정리하자면 이지성에 따르면 강원랜드에 가서 빠찡코를 하지 않거나, 인터넷 포커를 하지 않거나 파생금융상품에 투자하지 않는 사람들은 바보이자 인생을 망치는사람이다.

 

파생금융상품에 투자하기 위해 그가 제시하는 일반인들이 알아야할 최소한의 수학과 과학을 나열해보자.

 

물론 일반인들이 이런 것들을 구체적으로 알 필요까지는 없다. 하지만 이것들의 기초가 되는 수학적, 과학적 발견을 한 제논, 아폴로니오스, 슈피텔, 네이피어, 데카르트, 페르마, 파스칼, 뉴턴, 라이프니츠, 가우스, 해밀턴, 드모르간, 실베스터, 바이어슈트라스, 케일리, 리만, 칸토어, 소피야 코발렙스카야, 칼 피어슨, 화이트헤드, 러셀, 힐베르트, 바일, 괴델, 토머스 영, 맥스웰, 볼츠만, 아인슈타인, 닐스 보어, 슈뢰딩거, 하이젠베르크 등의 삶과 사상과 업적 정도는 알아야 한다. ”

 

도대체 왜 저러는 걸까. 그는 아마도 최근에 금융 공학을 공부했던 것 같다. ? 파생금융상품에 투자해 돈을 벌려고 했을 것이다. 돈을 잃기위해 투자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이제 한번 거들떠 볼까. 첫 번째로 일반 서민은 투자하고 싶어도 투자할 돈이 없다. 두 번째로 일반인들은 그 정도로 수학과 과학에 공부할 시간도 없다. 세 번째로 파생금융상품이 고스톱이 아닌 이상 일반인들이 공부한다고 해서 알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만든 사람들도 모르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왜 이지성은 파생금융상품에 투자를 종용하는 걸까. 파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아닐까. 혼자만 투자하면 무슨 수로 돈을 버나? 혹시 이지성의 다음 책은 파생 금융 상품에 관한 책이 될까? 혹은 조만간 파생금융상품강연을 하려할까.

 

후반부에서 이지성은 인문고전을 원어로 읽을 것을 주장한다. 일면 수긍한다. 그런데 과연 생계에 내몰린 서민들이 원어로 책을 읽을 수 있을까.

이 책의 주장은 일반 서민들이 실천하기에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지성도 생각이라는 걸 한다면 모르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왜 이런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는걸까. 첫 번째로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고 싶은 자기과시의 욕망 때문이다. 두 번째로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심어주고 사회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은폐하기 위해서다.

 

네가 불행한 것은 사회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라 네가 드모르간, 실베스터, 바이어슈트라스, 케일리를 읽지 않았을뿐더러 파생금융상품에 투자하지도 않았고 성경을 히브리어로 읽지도 않았기 때문이야!’

 

셋째로 여기저기서 짜깁기한 책을 써놓고는 자신의 지식을 과대포장하여 강연료를 높이기 위해서다. 한마디로 돈 벌려고 저런 개수작을 하는 거다.

 

이 책은 허섭한 자기계발서와 마찬가지로 벌거벗은 생명인 우리에게 자유를 주기위해 씌여진 것이 아니다. 사랑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우리를 노예화하기 위해 씌여졌다. 신자유주의의 노예, 지배계급의 노예, 삼성의 노예, 금융자본주의의 노예. 이지성의 노예.

 

우리는 자유 자체가 강제를 생성하는 특수한 역사적 시기를 살고 있다. 할 수 있음의 자유는 심지어 명령과 금지를 만들어내는 해야 함의 규율보다 더 큰 강제를 낳는다. 해야 함에는 제한이 있지만, 할 수 있음에는 제한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할 수 있음에서 유래하는 강제는 한계가 없다......스스로 자유롭다고 여기는 성과주체는 실제로는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 성과주체는 주인에 묶여 있지 않으면서도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착취한다는 점에서 절대적 노예라고 할 수 있다. ”

 

한병철, <심리 정치>

 

그는 성공한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가 20억의 빚을 졌었다는 것, 교사 시절에도 하루 세 권의 책을 읽었다는 것, 포토그래픽 메모리 능력을 지니고 있어 책을 많이 읽었다는 것 등등은 거짓말일 공산이 크다. 이 책에서 언급한 책들을 과연 읽었는지도 의심스럽다. 왜 저러는 걸까. 드라미틱한 성공담으로 비춰지길 원하기 때문이다. 만일 <27살 이건희처럼>처럼 교언영색으로 기득권에 꼬리를 살랑거리는 책을 쓰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그의 말을 무턱대고 신뢰했을 지도 모른다.

 

이지성은 시도 때도 없이 인문학은 사랑이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파생금융상품에 투자하는게 사랑인가.

 

이지성씨는 인문학 운운하기 이전에 위선과 기만과 거짓된 삶에서 벗어나

먼저 사람이 되야 할 것이다.

 

인간되자고 인문학하는 거다.

만권의 책을 읽으면 뭐하나.

배부른 돼지에 불과하다면.

 

 

 - 2015. 6. 11 작성


인문학 사기꾼들 공유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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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ummii 2016-02-13 15: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보고 짜집기 했다는 생각이 들어 리뷰 썼던 기억이나네요

시이소오 2016-02-13 15:54   좋아요 0 | URL
그러셨군요. 이지성씨는 돈도 많이버셨으면서 다음에서 기부받으시드라구요. 댓글들이 다 비난일색이던데, 얼마후에 보니 댓글 다 막아놓으시고.
참 왜 저러는건지,
거기 기부하시는분들 말려야할텐데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6-02-13 15: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이소오 님 블로그를 발견한 후 계속 역주행 중입니다..

시이소오 2016-02-13 15:57   좋아요 0 | URL
저 네이버 망해서 이사왔잖아요 ㅋ 감사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2-13 16: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열정을 착취하죠. 사회를 건들기엔 부담이 많이 가고, 전적으로 대중적 취향은 사디즘보다는 매조흐`이니, 자신을 향한 채찍질을 해야 잘 팔리는 거 아니겠습니까. 내가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고 말하지만, 내가 바뀐다고 세상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사회가 바뀌면 개인의 삶의 질이 바뀌죠...

시이소오 2016-02-13 16:10   좋아요 0 | URL
동감이에요. 사회적으로 영향력있는 지식인들이
입바른 소리를 해줘야되는데
오히려 침묵하거나 왜곡하기 바쁘니, 반대로 제대로 된 인문학자들 책은 어찌된건지 잘 안팔려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6-02-13 16: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문학은 말 그대로 인간을 탐구하는 학문이잖습니까 ?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정의는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인문학은 수문학으로 정정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짐승 수(獸)자를 써서 말이죠. 인문학은 인간이 상황에 따라서 짐승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경고합니다. 인간의 이성은 그닥 신뢰할 수 없으니깐 말이죠. 인간을 탐구하다 보면 니체가 말하는 심연 속 악마를 만나게 되죠. 그것을 경계하는 학문이 인문학이 아닐까 싶습니다. 종종 인문학을 자기계발서와 혼동하는 사람이 있씁니다. 대표적 인물이 이지성이 아닐까 싶습니다.

시이소오 2016-02-13 16:46   좋아요 0 | URL
수문학 ㅋ 한자를 응용한 언어유희의 달인이신듯. 이지성씨는 심연을 너무 오래보신거죠. 괴물이 되셨으니

책한엄마 2016-02-13 16: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꿈꾸는 다락방 저자죠.

시이소오 2016-02-13 16:47   좋아요 1 | URL
제가 감사하죠. 꾸벅^^

cyrus 2016-02-13 19: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지성이 강조한 `일반인들이 알아야 할 수학자들` 명단을 보면서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제가 수학에 무식해서 이지성의 주장을 비판할 수준은 아니지만, 인간적으로 우리에게 생소한 수학자들을 알아야 되는 게 말이 안 됩니다.

시이소오 2016-02-13 19:06   좋아요 0 | URL
목적이 더 황당합니다. 파생금융상품 투자하기위해 알아야한다니 ^^;;

cyrus 2016-02-13 19:13   좋아요 1 | URL
제 지인이 금융공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입니다. 지인이 공부한 흔적들을 확인한 적이 있었어요. 수학 기호 같은 것들이 많았어요. 지인이 열심히 공부하는 이론을 만든 학자들을 보면 최근에 활동하고 있어요. 이지성 씨가 언급한 수학자들은 대단한 사람들인 건 분명해요. 그러나 과거의 지식을 공부하지 않습니다. 꼭 알아야 할 이유도 없고요. 이지성 씨가 금융공학을 뭘 몰라도 너무 모릅니다.

시이소오 2016-02-13 19:17   좋아요 0 | URL

이 책을 읽고 파생금융상품 투자하기위해 위의 책을 공부하신분들은 없겠죠? ㅋ 말려야할텐데.....

짜라투스트라 2016-02-13 19: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파생상품을 일반인들이 공부해야 한다고ㅎㅎㅎ 너무 웃기네요..

시이소오 2016-02-13 19:49   좋아요 0 | URL
편미분방정식과 열전도 방정식도 공부해야 됩니다. 제 머리로 공부하려면 백살이 돼도 투자는 못하고 방정식 풀고 있을것 같아요^^;

짜라투스트라 2016-02-13 19:51   좋아요 1 | URL
이러다 열역학 동역학 같은 4대 역학도 공부하라고 할까 두렵군요^^;;

시이소오 2016-02-13 20:35   좋아요 0 | URL
혹시 일반인들을 공부시키려는 깊은 뜻을 제가 곡해한건 아닐까요? ^^;;

2016-02-14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그 프로 보듯 유쾌하게 읽었습니다. 덕분에 인간 파생상품 하나 피해가겠네요. 감사합니다. ^^

시이소오 2016-02-14 06:19   좋아요 0 | URL
인간 파생상품 이라 ㅋ. 제가 더 감사하죠 ^^

오쌩 2016-02-14 20: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지성뿐만 아니라 김병완 같은 작가도 문제에요.
3년동안 만권의 책을 읽었다고 하는데 물리적으로 그게 가능한지.
만권읽고도 그정도 수준인지....


시이소오 2016-02-14 20:07   좋아요 0 | URL
아, 김병맛 동감입니다
수십권의 책이 내용이 거의똑같아요. 인문학사기꾼들 널리 알리자구요^^

커피소년 2016-02-15 23: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많이 배우고 갑니다. ^^

시이소오 2016-02-16 07:38   좋아요 1 | URL
앗, 댓글이 늦었네요. 죄송해요^^;;
이렇게 찾아주시니 제가 감사하죠 ^^

커피소년 2016-02-16 08:22   좋아요 0 | URL
아닙니다.ㅎㅎ 댓글이 실시간 채팅이 아니니까요. ^^

제가 느끼기에는 굉장히 댓글이 빠르신 것 같습니다.

시이소오님 서재는 추천 책도 글도 괜찮아서 자주 들어오게 되네요.

감사합니다.


시이소오 2016-02-16 08:24   좋아요 1 | URL
아, 그 시간에 잤어요 ^^;;

edreamer 2016-02-20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지성 작가의 독서천재가된 홍대리를 읽고 많이 동기 부여가 되었던 적이 있었죠

이지성작가도 성장을 하는 게 아닐까요? 사람은 조금씩 달라지잖아요, 본인도 모르는 새,,

어쨋든 저는 이 책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시이소오님 생각에 동의를 하게 되네요,,

시이소오 2016-02-20 12:03   좋아요 0 | URL
어느분 말씀처럼 책을 읽고 동기부여를 받았다면 나쁘다고 말할순 없을것 같아요. 단지 종교처럼 그 책의 저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는건 경계해야 할것 같아요^^

계몽의변증법 2016-02-20 2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는데, 이 글을 보니 더 명확해 지는군요!
제 블로그에 공유하겠습니다~

시이소오 2016-02-20 20:4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옆구리왕짜 2016-05-27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가지만 취사 선택하려고요, 허언증의 냄새는 좀 나네요. 그래도 배울거 몇 개는 있는 것 같아요~

시이소오 2016-05-27 15:12   좋아요 0 | URL
배울거는 배워야죠^^

니페딘1T 2016-07-02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시이소오 2016-07-02 17:30   좋아요 0 | URL
폭풍 댓글을 남겨주시면
감사하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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