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 폐허의 철학자 에밀 시오랑의 절망의 팡세
에밀 시오랑 지음, 김정숙 옮김 / 챕터하우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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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키 아타루와 더불어 읽고 싶었던 에밀 시오랑의 책을 드디어 읽었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열광하며 읽었다면 에밀 시오랑은 계속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니체를 불어로 쓰면? 에밀 시오랑이다. 이 정도면 거의 표절인데. 시오랑은 젊은 시절, 쇼펜하우어와 니체에 심취했었다고 한다. 시오랑은 이 책을 23살에 썼다. 나 역시 젊은 날, 니체와 쇼펜하우어에 열광했었다. 그때의 시오랑보다 겁나 나이를 먹은 나는 왜 아직 이런 책을 쓸 수 없는 것일까

 

절망을 넘어서자는 건가? 그런거겠지? 그게 아니라면 84살까지 끈질기게 살진 않았겠지? 읽다가 몇 번이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왜 안 죽은 거야? 올가미에 목을 매달 것이지 펜을 붙들고 자빠졌냐?’ 자신의 글대로 생각대로 살고자한다면, 시오랑은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악령>의 키릴로프처럼 자살을 감행했어야 하는 것 아닐까? 너무 잔인한 독설인가? 읽다보면 불끈 불끈 화가 치밀어 올라서. 이십대도 아닌 내가, 시오랑의 거친 사유에 마냥 공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나는 죽도록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윗 문장을 나침반으로 삼아야할까. 윗 문장과 모순되는 글을 만나더라도 계속 읽어가기 위해선? 

 

시오랑은 살기 위해선 서정성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서정성이란 자아를 분산시키는 충동이다. 고통을 느낄 때, 사랑을 느낄 때 우리는 서정적이 된다. 서정적이 될 때에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게 되고 보편성으로 나아갈 수 있다. 서정의 절정은 광기이고 정신착란이다. “서정성의 진정한 가치는 그것이 오로지 피와 진정성과 불꽃이라는 데에 있다.”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 세상의 무의미함을 증명한다....나와 같은 인간의 존재를 허용했다는 것은 태양 위를 덮고 있는 삶이라는 흑점이 너무 커서 결국 빛을 가리게 되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윗 문장에 꽂혀, 시오랑을 읽고 싶었다. 굉장히 공감할만한 문장이다. 직접 책을 읽어보니 시오랑을 오해했음을 깨달았다. 시오랑은 자기비하자기애의 수단으로 삼는다.

 

인생은 야만적으로 나를 짓밟고 억눌렀으며, 한창 날아오르는 나의 날개를 꺽어버리고, 내가 누릴 수도 있었을 기쁨을 허락해주지 않았다. 터무니없는 나의 열정, 속세에서 뛰어난 인간이 되려고 퍼부었던 미친듯한 에너지, 찬란한 미래에 느꼈었던 매력

 

시오랑의 책은 성공하지 못한 젊은이의 푸념, 세상에 대한 원망의 글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시오랑은 신자유주의 시대, 절망의 시대에 부활한 것일까. 시오랑은 나르키소스다. 자신을 느무느무 사랑한다. 이토록 사랑스런 자신을 숭배하지 않는 세상이라면 멸절되어도 좋다. 시오랑은 니체보다는 히틀러의 자식이다. 젊은 시절 시오랑은 파시스트였다. 루마니아 극우민족주의 단체 철위대에 가입했을 뿐만 아니라, “히틀러만큼 호감이 가고 존경할 만한 동시대 정치인은 없다는 망언까지 저질렀다. 이 책에서도 히틀러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모든 것이 분출되고, 붕괴되며, 떨어져 나온 땅의 파편들이 날아올라 먼지가 돼버리고, 풀들이 허공에 괴상한 무늬와 기괴한 뒤틀림과 훼손된 형상을 그리기를! 불꽃의 소용돌이가 원시적 힘으로 솟구쳐 세상을 휩쓸어버려 미물까지도 종말이 가까워 왔음을 알 수 있게 되기를! 형상이란 형상은 모두 사라지고, 세상에 있는 견고한 구조들이 혼돈 속에 모두 삼켜지기를! 모든 것이 미친 소란, 몰아쉬는 거친 숨, 공포와 폭발이 되기를! 뒤를 이어 영원한 침묵과 최후의 망각이 이어지기를! 그 마지막 순간 인간의 삶이 너무나 높은 강도에 도달한 나머지 후회, 갈망, 사랑, 증오, 그리고 절망으로 느꼈던 모든 것이 폭발하여 폐허가 되기를!

 

나치의 궁극적 목표는 자신의 죽음의 순간과 모든 타자, 모든 세계의 죽음의 순간과 일치시키는 것이었다. 나치는 그러한 종말의 순간을 절대적 향락으로 꿈꾸었다. 나치즘은 나르시즘을 기원으로 한다. 파시즘 역시 그러하다. 시오랑은 허무주의자라기 보단 자기애에 빠진 일개 파시스트다.

 

나치가 니체를 오독했듯 시오랑 역시 그러하다. 니체를 허무주의나 염세주의로 해석하는 철학자가 있다면 거들떠볼 필요도 없다. 니체가 주장한 영겁회귀는 영원히 똑같은 삶이 반복됨을 가정으로 한다. 내가 지금 한 행위는 다음 생에 반복될 것이다. 그렇다면 낙타처럼 노예로 살아야 할까? 좆선일보나 쳐보면서, 국민을 총칼로 학살한 자들을 대통령과 국회의원으로 뽑고, 자신의 삶을 헌신하는 의인들을 조롱하며, 수억 번을 그렇게 버러지처럼 살아야 할까? 

 

시오랑은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하다. 우리의 시선이 머물러야 할 곳은 자신만의 우물이 아니라 모든 이들의 바다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죽은 사람들의 묘지 위에 세워야 한다. 예술은 거짓말이 아니고 철학은 농담이 아니다. 관심을 가져야 한다. 역사는 무가치하지 않다. 역사를 모르므로 원숭이보다 못한 것을 대통령으로 뽑는 원숭이들로 가득한 거 아닌가.

 

이 책을 좋아한다면 자기 자신만을 터무니없을 정도로 사랑한다는 증거다. 절망에, 허무에 매혹되는 것은 자기비하가 아니라 자기애때문이다. 절망에, 허무에 무릎을 꿇는 행위는 박학다식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아무런 생각 없이 멍청하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피해자 코스프레는 집어치워라!

우리가 바라봐야 할 곳은 거울속의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내 옆에 있는 사람의 얼굴이다.

 

 

 

저주받을 역사! 무엇에도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 죽음의 문제는 하잘 것 없을뿐만 아니라, 고통은 무익하고 빈약하며, 열정은 불순하고, 삶은 합리적이며, 삶의 변증법은 악마적이 아니라 논리적이고, 절망은 부분적이고 사소한 것이며, 영원이란 텅 비어 있는 단어이고, 허무의 경험은 환상이며, 운명이란 농담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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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6-05-07 0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을 다른 느낌으로 읽었어요.
지극히 개인적인 우울감의 토로가 될 수도 있었을 내용을, 이렇게 당당하고 자신있고 어쩌면 딱부러지기까지 하게 글로 정리해놓을 수도 있구나, 이런 생각에 빠져들어 다른 생각은 끼어들 여지가 없었거든요.
시이소오님의 리뷰를 읽으니 아, 이렇게 해석될 수도 있겠구나 싶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시이소오 2016-05-07 07:46   좋아요 0 | URL
다소 격렬한 리뷰였죠? 시오랑이 히틀러를 찬양했다는 사실에 격분하는 바람에 ^^;

보빠 2016-05-07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이소오님 평론가하셔도 되겠습니다. 공격할 포인트 찍고 논리 세우고 감성적으로 전달하고...직업이 글 쓰는 일인가요? 재미있는 리뷰였습니다

시이소오 2016-05-07 10:28   좋아요 0 | URL
과찬이십니다. 앎이 미천하여 부끄럽네요. 재밌게 읽어주셔 감사할 따름이네요 ^^

2016-05-09 1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5-09 10:28   좋아요 0 | URL
블로그 이웃님은 중2병 환자의 책이라고 혹평을 ㅋ

자주 찾아주셔 감사합니다 ^______^
 
미치광이, 루저, 찌질이 그러나 철학자 - 은둔형 외톨이 칸트에서 악의 꽃 미셸 푸코까지 26인의 철학자와 철학 이야기
저부제 지음, 허유영 옮김 / 시대의창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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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사랑스런 철학책이라니. <조선왕조실톡>을 읽을 때 마냥 키득키득 거리며 읽었다. 철학이라고 해서 굳이 고리타분하게 설명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철학자들의 철학만으로도 충분히 고리타분한데? ‘재미있고 통속적인 철학사 책을 쓰겠노라는 장밍밍의 농담은 현실이 되었다. 저자인 장밍밍이 85년 생이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라 그런지 중국의 고대문화 뿐만 아니라 대중 문화들을 딱딱한 철학자들 위로 잘 덧칠해놓았다. 예를 들면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관중과 포숙에 빗댄다던지. 중국의 시를 각색해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대해 헌사를 바치기도 한다.

 

높은 산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노라.

그들의 깊은 우정 천년만년 이어지리.

자본가로 세상에 나섰으나 저술에도 능하였구나.

후대 사람들이 수없이 비방하여도

그 마음은 떳떳하게 진리를 널리 떨쳤노라.

일생 포부를 깊숙이 감추었지만

그대에게 모든 걸 바쳤으니

아쉬움도 미련도 없구나.

호방하고 거칠 것 없는 그대의 말도

이제 옛일이 되어버렸으니

표주박 술 한 잔에

천 갈래 눈물이 흐르는도다.

 

하이데거에 대한 아렌트의 마음을 대변한 시는 <시경> 패풍편 <녹의>를 인용한다.

 

녹색 실이여, 그대가 다스리길 바라오. 나는 옛사람을 생각하여 허울이나 없게 하려네

고운 갈포, 거친 갈포, 쓸쓸한 바람이로구나. 나는 옛사람을 생각하니 진실로 나의 마음을 찾았다네.”

 

이외에도 홍루몽 구절, 최근 유행하는 중국 가수의 유행가 가사, 웹소설을 인용하기도 한다.

 

장밍밍은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를 강호의 대협객 커플이라 묘사하기도 한다. 소개된 여러 일화들도 재미있다. 쇼펜하우어와 하이데거의 비난 배틀도 흥미롭다. 플라톤은 한 때 인간은 깃털이 없는 두 발 달린 짐승이다라고 말했다. 다음 날 디오게네스가 플라톤에게 닭 한 마리를 던진다. 디오게네스는 그 전날 닭다리의 털을 다 뽑았다. 디오게네스가 닭을 던지며 플라톤에게 뭐라 했을까?

 

옛다, 인간.”

 

털 뽑힌 그 닭은 무슨 죄냐?

 

볼테르는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읽고 이렇게 말했다. “그 책을 읽으면 네 발로 기어다니고 싶어진다.” 오늘날로 보자면 볼테르보단 루소의 승리다. 히틀러와 비트겐슈타인이 실업학교 동창이었다니! 방향은 다르지만 두 사람 다 세상을 바꾸었구나.


그녀가 뽑은 112인의 철학자에 한나 아렌트와 사르트르의 등장은 흥미롭다. 현대 철학에서 한나 아렌트의 영향력이 그만큼 커졌다는 반증일까. 아니면 장밍밍이 여자이기에? 사르트르는 우리에겐 한물 간 철학자인데. 사르트르의 부활? 아니면 보부아르 때문에 사르트르가 덕을 입은 걸까.

 

(사르트르만 생각하면 불쌍하다. 보부아르가 카뮈를 짝사랑했다고 어찌나 카뮈를 싫어했던지. 내가 보부아르였어도 물고기 눈 마냥 껌뻑껌뻑대는 사르트르보단 바바리코트가 피부인듯한 카뮈에게 폴짝 뛰어갔을테다. 카뮈처럼 생긴 자에 대한 사르트르의 질투를 백만 번 이해한다. 그래도 그 외모로 보부아르를 만났으니 사르트르는 철학하길 천만 번 잘 한 거다. 철학 안 했으면 평생 독신으로 살다 죽지 않았을까.)

 

214인의 철학자에서 저자가 선택한 철학자들도 이례적이다.

루소, 러셀, 마키아벨리, 에리히 프롬, 베이컨 등등.

루소, 마키아벨리, 프롬은 철학자로 인정해주지 않았었는데.

 

요즘 읽는 책마다 루소가 등장해 짜증스러울 정도다. (예일대 지성사의 첫 타자도 루소다.) 루소만큼 자신이 쓴 책과 거꾸로 살았던 사람은 달리 떠올리기 힘들다. <에밀>을 쓴 사람이 자기가 낳은 - 물론 루소가 생물학적으로 낳은 건 아니다 - 다섯 아이를 고아원에 보내버리다니!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볼 수 있듯 우리 시대의 불평등이 얼마나 극에 달했으면 루소를 다시 호출하는 시대가 되었을까. 프롬 역시 마찬가지 이유일까. ‘소유의 시대에 존재에 대한 갈증 때문에.

 

재밌다고 해서 마냥 가볍지만은 않다. 이 책을 읽으니 학부 때 공부를 게을리 한 게 후회된다. 후회하면 무슨 소용이랴! 지금이라도 다시 공부하는 수밖에. 철학이 어렵게 느껴지는 분이 있다면 이 책으로 철학이라는 문간에 발을 들이밀어도 좋으리라.

 

밍밍치 아니하고,

호방하고 거칠 것 없는 그대의 책 한 권에

표주박 술 한 잔 바치노라.

아흐, 동동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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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생활의 즐거움
필립 길버트 해머튼 지음, 김욱 옮김 / 리수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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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이면 읽을 줄 알았다. 이런, 어떻게 이런 책이 있다는 걸 모르고 살았을까. P.G 해머튼이 누구냐? 19세기의 듣보잡 작가의 책이 해머가 되어 나를 내려칠 줄이야! 저자에 따르면 두 종류의 생활이 있다. 동물적 생활과 지적 생활. 달리 말하면 육체적 삶과 정신적 삶. ‘지적 생활을 하기 위해선 육체적 생활이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 해머튼은 산책과 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지적생활은 훈련이고 투쟁이다. 지적생활은 단순히 지식과 교양을 쌓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지적으로 만드는 힘은 배운 지식과 익힌 교양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아름다운 단면들을 스스로 발견해내려는 노력과 인간답게 살아가는 기쁨을 만끽하려는 타고난 본성일 뿐입니다. 지적생활이란 무엇인가를 이룩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순수하게 삶의 진리를 찾아나서는 아름다운 여정입니다.


 

1부의 글들은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든다.

 

밥을 어떻게 먹을까? 한 끼 먹을까? 두 끼 먹을까? 칸트는 정각 1시에 간단한 점심을 먹었다. 아침엔 차 한잔, 저녁은 먹지 않았다. 한편 저자의 친구는 아침 여덟시에 영국식 만찬을 먹어야 일이 잘 되었다고 한다. 즉 저자에 따르면 사람마다 자신에게 맞는 식습관을 찾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꼭 하루에 세끼를 먹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알리디너 곰곰생각하는 발님도 하루 한 끼 드신다. 한국식 만찬을 드시는지는 모르겠다.)

 

술은 마시는 게 좋을까? 괴테는 일생동안 5만 병의 와인을 마셨다는데 장수했다. 담배는? 저자에 따르면 지나친 두뇌노동으로 지쳤을 때 흡연은 나쁘지 않다고 한다.

 

신문을 읽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제가 신문을 비난 하는 것은 매일같이 별 의미 없는 일에 우리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는 점입니다. ....전 잘 모르겠지만, 피스칼의 <팡세>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면야.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스완네 집쪽으로, p55. 민음사.

 

해머튼에 따르면 일반인들은 상관없다. 신문의 논조에 의문을 품지 않으므로. 그러나, 조선일보 같은 편향적인 신문은 지성인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 내가 지성인은 아니지만 조선일보 같은 신문은 아주 심각한 해를 끼친다. 쓸데없는 아드레날린의 상승을 불러온다. 아침부터 조선일보를 읽었다고 상상해보라.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삶을 지옥으로 만드는 단순한 방법.

 

해머튼은 여러 분야를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여섯 개 분야를 대충 공부하는 것보다 한 분야에 정통하는 게 낫다고. 그에 따르면 외국어도 3개 국어 이상을 공부하는 건 정신 나간 짓이다. 삶의 불규칙에 적응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불규칙 동사 외우는 건 인생을 낭비하는 짓이다.

 

해머튼은 자신이 관심 있는 한 가지 분야를 결정하라고 충고한다. 거기서 보조적으로 한 두 가지 정도를 추가할 수 있다. 그 외의 분야는 단념하라고. 단념하지 않고서는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내가 무엇을 추구하느냐가 나의 삶을 결정합니다. 생존은 조건일 뿐입니다. 생존이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추구해야 할 삶의 방향은 성실과 품격이며, 생활에 대한 애정과 지적인 힘입니다. 나를 위해 열심히 살았다는 것은 내 손으로 이룩한 지적인 발달이 조화된 우주에 근접했다는 뜻입니다. 나는 그것이 이성을 갖춘 한 인간으로서 온 생애를 바쳐 도달해야 할 목표라고 확신합니다.

 

<지적 생활의 즐거움>, P210.

 

지적 생활을 하기 위해 우리가 쓰러뜨려야 할 것은 나 자신이다. 지적 생활은 타인의 생각이 아니라 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다. 나 자신을 저울에 올려놓고 나 자신의 눈금을 재는 것이다. 나의 마음속에 우주가 깃들어 있다. 내가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고, 진실을 추앙하고, 거짓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보다 넓은, 우주를 닮은 마음을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우주의 완성, 그것은 나의 완성이다.

 

지적 생활을 말하는 책인데 마치 영성 책을 읽는 듯한 착각.

위로가 되고 힘이 된다.

 

책 전체가 거의 잠언집이다.

질문을 유발하는,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밑줄 칠 문장들이 수두룩하다.

또 다시 드는 의문. 어떻게 이런 책을 몰랐을까.

 

매일 매일 지적 생활을 실천 중이신 이웃님들에게 적극 추천한다.


(한 가지 분야를 공부해야 한다면 이웃님들은 뭘 택하실런지요?

저는 뭐가 좋을까요??^^)

 

민중이든, 노예든, 정복자든,

그들은 늘 이렇게 고백했다.

지상에 태어난 아들들의 궁극적인 행복은

오직 인격을 완성하는 것뿐이다.

 

사람이 자기를 상실하지 않는다면

생활은 그를 넘어뜨리지 않는다.

타고난 나를 잃지만 않는다면,

나의 전부를 잃어도 좋으리라.


-괴테, <서동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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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니 2016-04-16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재밌어요^^ 잘 읽고갑니당

시이소오 2016-04-16 10:41   좋아요 0 | URL
재밌게 읽으셨다니 제가 감사할 일이네요 ^^

모래별 2016-04-16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참 좋게 읽었습니다.

시이소오 2016-04-16 19:24   좋아요 0 | URL
그쳐? 의외의 발견이네요 ^^

cyrus 2016-04-16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용문을 구분해서 입력하니까 글 읽기가 편하네요. ^^

시이소오 2016-04-16 19:25   좋아요 0 | URL
읽기 불편하다는 분이 계셨어요. 글 상자 하는 방법을 최근에 알았답니다. ㅋㅋ

인다라의구슬 2016-05-13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몸을 부리면 사유가 반짝인다` 는 말이 떠오르네요^^ `19세기 듣보잡 작가`의 책 읽어보고 싶어요^^ 잘~ 읽고 갑니다!

시이소오 2016-05-13 18:43   좋아요 0 | URL
근사한 문구네요. 홍서님, 즐독되시길^___^
 
도덕적 불감증 - 유동적 세계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너무나도 소중한 감수성에 관하여
지그문트 바우만.레오니다스 돈스키스 지음, 최호영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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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 중 하나는 이거예요. 사람들은 평범한 것은 아주 흔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내가 생각한 것은......내가 말하려던 바는 그게 아니었어요. 나는 우리 모두의 내면에 아이히만이 있고, 우리 각자는 아이히만과 같은 측면을 갖고 있다는 말을 하려던 게 절대 아니에요. 내가 하려던 말은 오히려 그 반대예요!


아이히만은 완벽하게 지적이었지만 이 측면에서는 멍청했어요. 너무도 터무니없이 멍청한 사람이었어요. 내가 평범성이라는 말로 뜻하려던 게 바로 그거예요. 그 사람들 행동에 심오한 의미는 하나도 없어요. 악마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고요! 남들이 무슨 일을 겪는지 상상하길 꺼리는 단순한 심리만 있을 뿐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한나 아렌트, <한나 아렌트의 말>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을 말할 땐 우리 모두의 내면에 아이히만이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지그문트 바우만에 따르면 유동하는 근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내면에 아이히만이 있다.

 

오늘날 악은 누군가의 고통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할 때, 타인에 대한 이해를 거부할 때, 말 없는 윤리적 시선을 외면하는 눈길과 무감각 속에서 더 자주 모습을 드러낸다. 탈도덕화의 구원으로 등장하는 것은 소비주의 문화다. 이제 인간은 타인을 상품처럼 대한다.

 

우리는 점차 둔감해져간다. 요제프 로트는 우리의 습관적인 둔감함의 메커니즘을 이렇게 설명했다.

 

큰 재해가 발생하면 근처에 있는 사람들은 충격 속에서도 발 벗고 나선다. 급성 재해들은 확실히 이런 효과를 낳는다. 사람들은 재해가 곧 지나갈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만성 재해들은 이웃들에게도 너무 께름칙한 나머지 그들은 재해나 재해의 피해자들에게 점차 무관심해지며 심지어 노골적으로 짜증을 내기까지 한다. ...위급 사태가 질질 끌게되면 도움의 손길은 다시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고 동정의 불길은 차갑게 식는다.

 

지그문트 바우만, 레오니다스 돈스키스, <도덕적 불감증> p.80

 

<세월호 학살>은 국가가 국민들의 습관적인 둔감함을 인식시키기 위해 기획된 것일까? 우리는 점점 더 시들해지고 무감각해진다. 이런 태도는 결국 또 다른 재난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다음 재난의 피해자는 누가 될까? ‘는 아닐 거라고? 과연 그럴까? 혹은 만 아니면 재난은 일어나도 되는 건가?

 

재해가 오래 지속되면 초기의 충격과 격분이 망각 속에 빠지고 피해자들을 향한 인간적 연대가 메마르고 쇠약해짐에 따라 재해 자체가 지속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그리고 미래의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여러 힘이 결합할 가능성은 서서히 약화된다.

 

지그문트 바우만, 레오니다스 돈스키스, <도덕적 불감증> p 81

 

 

바우만에 따르면 오늘날 99%프레카리아트’(신자유주의 시대 불안정한 무산계급, 좀비 용어가 된 프롤레타리아를 대체하는 용어). 프레카리아트는 불안정하고 불확실하다. 쥐꼬리만한 임금을 받더라도 언제 해고될지 모른다. 프레카리아트는 해고되었거나 앞으로 해고될 것이다.

 

오늘날 99%는 공포 속에 살아갈 뿐이다. 공포는 세 가지로 이루어져있다.

 

첫째 무지이다. 이것은 미래에 무슨 일이 닥칠지, 어떤 종류의 불행이 어디에서 닥칠지,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입힐지 등에 대한 무지이다.

 

둘째는 무기력이다. 이것은 불행이 닥쳤을 때 그것을 피하거나 막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없는 것과 다름없다는 의구심이다.

 

셋째는 앞의 두 이유에서 파생하는 굴욕감이다.

 

99%는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자유를 국가에 헌납한다. 공항에서 우리는 기꺼이 우리의 알몸을 국가에 바친다. 이제 국가는 국민을 길들이기 위해 더 나은 공포를 창조한다.

 

아동 강간범은 네 이웃이다.”,

 

외국인은 연쇄살인범이다.”

 

국가가 모든 걸 감시하지 않으면 테러가 일어날 것이다. 테러방지법을 통과시키자.

테러방지법을 반대하는 자는 빨갱이다.”

 

공포를 이겨내고 싶으면, 남들과 다르고 싶으면, 소비하라! 소비하라! 소비하라!

소비하지 않는 자는 죄인이다. 소비하는 자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자는 빨갱이다. 규제 철폐, 구조 조정, 민영화만이 살 길이다.”

 

경쟁만이 살 길이다. 네 이웃이, 외국인이 네 일자리를 빼앗아 갈 것이다.”

 

언론, 신문, 방송, 지식인들은 서로가 앞 다투어 힘 있는 자들의 눈에 들기 위해 오늘도 매일 매일 구호를 떠들어 대고 있다. 양심을 팔아먹은 것들에 힘입어 오늘날 프레카리아트는 연대가 불가능할 뿐더러 오히려 서로에게 적대적이다.

 

기득권들은 이승만이 국부라고 떠들어댄다. 국부가 도대체 무슨 뜻일까? 전쟁이 터져서 우리의 국부께서 도망가실 수도 있다. 선조도 그러지 않았나? 그런데 우리의 국부는 가만히 있으라고 라디오 방송 틀어놓고 왜 한강 다리는 끊고 도망가서 국민들 피난도 못 가게 하셨을까? 한강 다리 아래로 얼마나 씨벌건 강물이 흘러야 우리 1%들은 만족하실려나. 1%눈에 들기 위해 지식인들께선 또 얼마나 많은 역사와 기억을 조작해야 만족하실려나. 언젠가는 이승만이 나뭇잎을 타고 한강을 건너셨다 주장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악이 도처에 만연해 있는 오늘날 어떻게 하면 우리는 도덕적 감수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

체코 공화국 초대 대통령이었던 바츨라프 하벨에서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다른 진정한 정치 지도자들과 달리 하벨은 가시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어떤 장비도 갖추고 있지 않았다. 그의 뒤에는 잘 조직되고 견고한 정치 기구에 기초한 대규모 정치운동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풍성하게 쓸 수 있는 공금도 없었다. 그에게는 그의 말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군대도 미사일 발사기도 비밀경찰이나 정복경찰도 없었다. 그에게는 그를 유명 인사로 만들고 그의 메시지를 수백만에게 전달해 그의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따르도록 만들어줄 대중매체도 없었다.

 

사실상 하벨에게는 역사를 바꾸려는 그의 노력에 사용할 수 있는 세 가지 무기만이 있었다. 그것은 희망과 용기와 불굴의 의지였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많은 적든 가지고 있는 무기이기도 하다.

 

- 지그문트 바우만, 레오니다스 돈스카스, <도덕적 불감증>

 

머릿속에 박힐 정도로 나는 반복하고 반복할 것이다.

 

숨 쉬는 한, 나는 희망한다. Dum spiro spero”

 

(전공자가 아닌 자가 번역하면 이꼴 난다. 불굴의 의지로 읽어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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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위한삼계탕 2016-04-13 0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잡했던 실타래가 풀리는
느낌이 드네요

시이소오 2016-04-13 07:34   좋아요 1 | URL
`영혼을 위한 삼계탕`을 드신 느낌이시겠네요. ^^

영혼을위한삼계탕 2016-04-13 07: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

꼬마요정 2016-04-13 0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사려다가 번역 때문에 망설이고 있는데요.. 읽을 수 있을까요? ㅠㅠ

시이소오 2016-04-13 08:11   좋아요 0 | URL
짜증스럽긴 합니다만 불굴의 의지를 불태우신다면 읽을 수 있습니다 ㅋ^^

초란공 2016-04-13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은 내용의 책인데 읽기는 짜증이 나긴합니다. 하지만 전공의 여부와는 무관한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시이소오 2016-04-13 09:32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오자, 탈자, 비문, 오문들도 많지만 용어번역도 의아스럽드라구요. 바우만의 다른책에서 사회학자 노명우 씨 번역은 자연스러웠거든요 ^^

samadhi(眞我) 2016-04-13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서를 읽을 능력도 없으면서 번역에 무지 민감한 더러운(?) 성격의 소유자인 것이 한탄스럽네요.

시이소오 2016-04-13 21:27   좋아요 0 | URL
ㅋㅋㅋ 저도 그런걸요. 이 기회에 저도 영어 공부나 할까봐요. 가끔 참 답답합니다. ^^;
 
새벽에 혼자 읽는 주역인문학 - 세상에서 가장 쉬운 주역 공부 새벽에 혼자 읽는 주역인문학
김승호 지음 / 다산북스 / 2015년 10월
평점 :
절판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케케묵은 주역을 공부할 필요가 있을까? 공자가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주역을 공부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50살부터 죽기 전 까지 주역을 공부했다. 주역을 연구한 라이프니츠는 이진법을 발견했다. 이진법이 컴퓨터를 만들었으므로 결국 주역이 오늘날의 디지털 문명을 만든 셈이다.

 

김용규의 <생각의 시대>를 읽다, 지성과 무지를 가르는 기준은 범주화가 아닐까하고 생각해 보았다. 어떤 학문이건 범주화를 토대로 한다. (범주화의 대가들은 철학자나 과학자가 아니라 시인이다. 시인들은 예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범주화를 창조하니까. )

 

그렇게 본다면 주역을 내 것으로 만든다는 건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범주화 도구를 갖추는 셈이다. 주역을 어떻게 하면 머릿속에 집어넣을 수 있을까. 음양이 사상을 낳고 사상이 팔괘를 낳고 팔괘가 64괘를 낳는다. 우선은 8개만 제대로 알면 된다. 이른 바 팔괘다. 그런데 두 괘(건과 곤)는 시간과 공간, 하늘과 땅이다. 따라서 6개만 알면 된다. 사상을 두고 밑에 것은 기존의 것, 위의 것은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다 - 가운데 음양을 끼어 넣으면 8괘가 된다. 일반적인 순서와는 다른데 건과 리, 태와 진, 손과 간, 감과 곤이다.






태괘를 살펴보자. 태괘는 고양이, 호랑이다. 연못이다. 연못은 물을 담고 있다. 따라서 담는 성질을 지닌 것은 다 태괘에 속한다. 가방, 지갑, 주머니 다 태괘다. , 고향, 단골집, 조국, 여자, 태괘다. 연못, 고양이는 침착하고 평정을 유지한다. 침착함, 혹은 평정의 성질에 해당하는 것도 태괘다. 침착한 사람, 절제력이 있는 사람, 태괘다. 호수같은 것, 태괘다.

 

손괘를 살펴보자. 손괘는 바람이다. 날아가는 것은 다 손괘다. 참새, 비행기, 손괘다. 냇물도 손괘다. 흐르기 때문이다. 소식, 새로움, 유행, , , 열려 있는 것, 쏟아진 물, 어린아이의 걸음걸이 다 손괘다. 여인의 부드러운 손길, 시원하게 달리고 있는 것, 손괘다. 바람같은 것, 손괘다.

 

운명이 제자리에 있는 사람은 손의 기운이 부족하다. 여행을 떠나 손의 기운을 흠뻑 얻으면 운명이 바뀔 수 있다. 오늘은 태괘고 내일은 손괘다.

 

무언가를 막는 것, 다 간괘다. , 우산, 담벼락, , 어린아이에게 아버지, 신용이 좋은 사람 간괘다. 관우, 춘향이, 간괘다. 군대, 남자의 배짱, 여자의 마음이 태괘라면 남자의 마음은 간괘다. 침묵, 위축, 긴장 간괘다.

 

우레와 같은 것, 진괘다. 손괘가 부드러운 움직임이라면 진괘는 육중한 덩어리가 움직이는 형상이다. 여인의 걸음걸이가 손괘라면 군인의 걸음은 진괘다.

 

물은 감이다. 와글거리는 것, 흐물흐물 한 것, 덩어리가 아닌 가루, 인간의 감정은 감이다. 어린아이, 군중. 그릇이 태괘라면 그 안에 담겨야 할 것은 감괘다. 돌보는 것이 태괘면 돌봄을 받은 것은 감괘다. 어두운 심정, 근심, 구름, 혼돈, 감이다. 쉽게 부서지는 비스킷, 모래 같은 것, 감이다. 육체적인 사랑, 나쁜 운명, 잠들었을 때, 감이다. 캄캄한 우주, 미궁에 빠진 사건, 미래, 감이다. 미지의 세계, 험난한 세계, 딱히 답이 안 나올 때, 무서울 때, 슬플 때, 지쳐있을 때, 감이다.

 

질서, 리괘다. 혼돈이 감괘라면 질서는 리괘다. , 평화, 희망 리괘다. 감성적인 것이 감이라면 이성적인 것은 리다. 덩어리는 리, 가루는 감이다. 불은 리고 물은 감이다.

 

8괘로 대성괘가 만들어진다. 팔괘가 단어라면 대성괘는 문장이다. 괘상은 2개의 파트, 상하로 나뉘어 있다. 아래에 있는 것은 현재고 위에 있는 것은 미래를 의미한다.


 

지뢰복부터 곤위지까지를 십이소식괘 혹은 군주괘라고 한다. 12개의 괘를 이어보면 양이 증가하다가 음으로 변하는 형상이다. 저자의 연구에 따르면 처음 괘상의 맨 위층이 이어지는 괘상의 맨 아래의 반대가 되고, 나머지 효들은 한층 씩 밀려 올라가는 형태다.



이런 패턴으로 저자는 64괘를 정렬한다. 12개 괘 다섯 묶음과 4괘 한 묶음.



과연 저 방법으로 주역 64괘를 공부하는 게 나을까? 주역 초보라 잘 모르겠다.

64괘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만한 다른 방식이 있을 것도 같은데.

 

저자는 주역 괘상의 이름을 이해하지 못하면 주역 공부를 백날 해도 소용없다고 한다.

64괘의 이름을 언제 다 외우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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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adhi(眞我) 2016-04-12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역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우리 옛문화를 이해하려해도 주역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걸 최근에야 알게 됐습니다. 미뤄두는 공부만 자꾸 늘어납니다.

시이소오 2016-04-12 10:29   좋아요 0 | URL
주역 한권 들고 산에 들어가도 몇 년은 심심하지 않겠어요 ㅋ ^^

samadhi(眞我) 2016-04-12 10:47   좋아요 0 | URL
그랬다가 산에서 광년이모드에 빠져들면 어찌합니까. 영영 속세로 돌아가지 못 할지도 모르는데 ㅋㅋ

시이소오 2016-04-12 10:50   좋아요 0 | URL
ㅋ 돌아오셔야죠. 깨달음을 얻으신 분들은 산 속이 아니라 속세에 있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