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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이 02 - 김사과 소설집
김사과 지음 / 창비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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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야기를 듣지 않는 놈들은 다 죽여버리겠다.

왜냐하면 내가 말하고 있으니까.

 

무서워서 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작가가 말한다고 독자가 꼭 읽어야 하는 것도 아닌.....이러다 칼침 맞을라.

혹은 영이의 아빠처럼 삽으로?

 

김영찬 평론가는 김사과를 혹은 그의 소설을 앙팡 스키조(enfant schizo)’로 부르자고 제안한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미친년이다.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미친 아해’.

 

표제작, <02> 혹은 <영이>를 비롯한 모든 단편에서 폭력과 분노, 분열을 목도할 수 있다.

분열은 영혼을 넘어 육체로까지 전이된다. (개가 되는 영이의 아빠, <영이> 돼지가 되는 누나,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오늘은 참으로 신기한 날이다>)

카프카적인 변신.

혹은 육체에서 영혼으로.

한마디로 분열은 영혼을 잠식한다.

아니다. 이제는 잠식할만한 영혼조차 남지 않았다.

 

단편집을 읽으면서 이상을 떠올렸다. 이상은 미친놈문학의 원조 아니던가.

김사과는 21세기 작가답게 좀 더 더 더 더 더 미쳤다.

(리뷰 쓰는 나도 미쳐가는 듯)

 

왜들 이리 미치는 걸까?

작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미치는 거 나쁜 거에요?”

 

내가 미치게 그냥 놔둬. 내가 죽게 내버려둬. 오늘을 견디면 내일이 올 뿐인데.

또 같은 날이 올 뿐인데. 차라리 미쳐버리는 게 낫지 않겠니? <영이>

 

텔레비전에 비치는 세상은 환영이다. 아니, 개인을 둘러싼 모든 것이 환영이고 거짓이다

브랜드 아파트의 네온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환각이고 망상이라는 걸 인식하기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신자유주의 시스템하의 헬조선. 아무런 희망도 동정도 없는 세상.

미치는 게 낫지 않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김영찬의 말처럼 김사과 소설의 분열증이 구원의 제스처로 반전되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시스템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의 표출마저도 값진 현실이 아닌가.

김사과는 분노하는 와중에도 유머를 잃지 않는다.

웃으면 안 되는데 몇 번이나 웃었던지.



그녀 소설에 유머가 없었더라면 정말 미쳐버렸을지도.

특이한 재능이다.

 

 

밑줄 그은 문장

 

p25. 영이는 길고 길게 죽고 싶다고 느낀다. 그러니까,

(11pt, 명조체, 오퍼씨티 25% 정도의 비명) 제발 죽여주세요.

 

p32. 개새끼가 정말로 개가 됐네!

 

p41. 난 비누를 노려보았다. 꽤 오랫동안. 그러다 갑자기 그걸 깨물어먹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정신을 차리자 혓바닥엔 온통 비누조각이 달라붙어 구역질나는 향을 풍기고 있었고 비누는 사라졌다. 맙소사. 난 미친 게 분명하다. 난 화장실에서 나와 정수기로 달려갔다. 물을 다섯 잔 연속으로 마셨다. 이제 몸속에서 뭉게뭉게 거품이 피어오르겠지. 비누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난 온몸에서 뭉게뭉게 거품이 피어오르며 죽어버릴 거다. 그건 근사한 생각이었다.

 

 

편의점이 보였고, 난 그리로 들어갔다. 난 더 토할 것 같았다.......결국 편의점의 그 매끈한 바닥에 토하려는 찰나 고추장을 발견했다. 내 손은 그 빨간색 튜브를 멋지게 움켜잡았다. 천팔백원. 나는 거스름돈을 주머니에 넣자마자 뚜껑을 따고 그것을 입에 물었다. 아르바이트생이 놀란 눈으로 날 쳐다보았던 것 같다. 그길고 고추장이 내 목구명으로 밀려들어오는 순간, 모든 게 편안해졌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그때 나는 셰로토닌이 280배쯤 증가한 상태였다.

 

p90.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텔레비전을 켜면 긴 생머리에 커다란 눈에 뾰족한 턱의 여자애가 부자와 연애를 해요. 여자애는 내 맘에 쏙 드는 옷을 입고 내 맘에 쏙 드는 신발을 신고 내 맘에 쏙 드는 화장을 하고 내 맘에 쏙 드는 머리를 하고 있어요. 나는 화가 나요. 도대체 저런 구두는 어디서 파는 건가. 아아, 나는 어제 백화점에서 진짜로 내 마음에 쏙 드는 원피스를 봤어요. 사실팔만 육천원인데 쎄일기간이라 삼십 퍼쎈트 디스카운트를 해준대요. 다음주에 월급을 받으면 나는 그 원피스를 살 거예요. 이번에 시급이 올랐어요. 옷을 사야 해요. 언제나 옷이 부족해요. 어젯밤에는 근사한 꿈을 꿨어요. 꿈에서 나는 보이지 않는 남자와 새벽의 텅 빈 학교 캠퍼스를 뛰어다녔어요. 새벽의 캠퍼스는 텅 빈 채로 옅은 안개에 싸혀 있었어요. 아무도 없고 우리 둘뿐이었어요. 나는 한 손에는 테이크아웃한 커피를, 한 손에는 도장이 여덟 개 찍힌 쿠폰을 들고 있었어요(그러니까 두 번만 더 마시면 돼요).

 

- 머지않아 흉한 씨멘트 덩어리는 값비싼 브랜드의 아파트로 완성이 되겠죠. 그러나 내 삶은 여전히 뿌옇게 모호한 채로 남아 있겠죠.

 

p92. 나는 왜 이렇게 늙어가지 왜 이렇게 늙었지 나에게도 빛나는 브랜드의 시절을 가질 권리가 있다 있다 있다 있다.......더 가지고 싶다 더, ....

 

p103. 너는 정말 구제가 불가능한 인간이야 아니 니가 인간이기는 하냐 이 그래프를 좀 봐 사회성이 팔이라고 도대체 평균이 오십사고 가장 낮은 녀석도 십구야 그런데 그 십구인 녀석이 누군지 아니? 정은호! 정은호라고 그 약간 모자란 정은호 아이큐가 칠십칠인 정은호도 사회성이 십구가 나왔는데

 

한문선생님이 그러시더라 너 오엠알 카드 마킹 삼번으로 통일했다며

 

p123. 공원 입구 벤치에 앉아 있으면 할아버지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할아버지와의 대화는 언제나 지루했다. 할아버지가 말했다. 내 아들은 서울대 법대를 나왔다. 너는 어느 대학에 다느느냐. 내가 대답했다. 나는 대학에 다니지 않습니다. 내 딸은 연대 경영학과에 다니고 씨티은행에서 인턴을 한다. 너는 뭘 하느냐.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내 손자는 하바드와 스탠퍼드에 동시에 합격하는 것이 꿈이다. 너는 꿈이 뭐냐. 나는 아무런 꿈도 없습니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실망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나는 조금 쓸쓸해졌다. 쓸쓸해진 나느 할아버지 그 개새끼가 미웠다. 언젠가 그 개새끼한테 복수할 거라고 굳게 결심했다.

 

p125. 일곱 시 반에 젊은 여자가 와서 소주 세 병을 마시고 갔다. 여자는 말했다. 나는 스무살입니다. 나는 여자입니다. 나는 재수생입니다. 나는 오늘 학원에 갔습니다. 나는 대학에 가고 싶습니다. 나는 죽고 싶습니다.

 

여덟시 반에 젊은 남자가 와서 소주 세 병을 마시고 갔다. 남자는 말했다. 나는 스물세살입니다. 나는 남자입니다. 나는 대학생입니다. 나는 오늘 학교에 갔습니다. 나는 친구가 하나도 없습니다. 나는 학교에 다니기 싫습니다. 나는 죽고 싶습니다. 나는 학교에 다니고 싶습니다. 나는 죽고 싶습니다.

 

아홉시 반에 젊은 여자와 젊은 남자가 와서 소주와 맥주를 열 병 마시고 갔다. 여자와 남자는 말했다. 우리는 노래방에서 만났습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합니다. 우리는 결혼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돈이 없습니다. 우리는 죽고 싶습니다.

 

열한시 반에 나이 든 남자가 와서 소주 한 병을 마시고 갔다. 남자는 말했다. 나는 회사에 다닙니다. 나는 딸이 있습니다. 나는 돈을 벌어야 합니다. 내 딸을 미국 대학에 보내야 합니다. 나는 빚이 많습니다. 나는 오늘 회사에 갔습니다. 나는 죽고 싶습니다.

 

새벽 두 시에 술집이 문을 닫을 때까지 죽고 싶은 사람 아홉 명과 살고 싶은 사람 아홉 명 다 합쳐서 아홉 명이 샤넬에 왔다 갔다.

 

p129. 우리는 중국산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중국산 플라스틱 젓가락으로 중국산 쏘시지가 들어간 김밥을 중국산 단무지와 중국산 김치와 함께 먹었다. 천국에 김밥천국이 있다고 생각해봐. b가 말했다. 아니면 김밥천국이 진짜 천국이라고 생각해봐. 그것은 중국식 대화였다.

 

p146. 처음에 그건 씨발, 오빠, 제발, 이 개 같은 년, 잘못했어, 용서해줘, 이게 어디서, 꺼져, 와 같은 짤막한 단어들이었다. 그 위로 엄숙한 목소리의 내레이션이 드리워졌다. 김씨는 갑자기 옷을 벗기 시작했습니다. 재킷을 벗고 허리띠를 풀더니 벗어든 신발로 바닥을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최씨의 새로운 남자친구는 당황한 표정으로 전봇대 아래 서 있었습니다.

 

김씨는 신발을 집어던지더니 최씨의 팔을 잡고 어디론가 끌고 가기 시작했습니다. (신음소리, 비명, 빠른 발소리) 그것을 보고 최씨의 새로운 남자친구가 뛰어오기 시작했습니다. (, 흐느낌, 주먹질) 저희 취재진이 끼어들어 만류해 보려고 하였으나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괴성, , 흐느낌, 괴성, 욕 다시 욕, 주먹질)

 

p157. 한에게는 그의 인생이, 새벽부터 밤까지 야구게임기 앞에 서서 날아오는 공을 끊임없이 쳐내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물론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갚아야 할 돈이 많았다.

 

p231. 구성주의적 관점에서 봤을 때 서울은 강남구 신사동 사백칠십삼다시칠번지에 있었다. 해체주의적 관점에서 봤을 때 서울은 용산구 이태원동 오십칠다시십이번지에 있었다. 하지만 지정학적 측면에서 봤을 때 서울은 평양에 있었으며, 심리학적 측면에서는 은평구 뉴타운에 있었고, 낭만주의적 관점에서 봤을 때 그것은 롯데월드에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종합해볼 때 서울은 뉴욕 주 뉴욕 시 파크 에버뉴와 렉싱턴 애버뉴 사이에 있는 이스트 씩스티 쎄컨드 스트리트에 있었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하여 우리는 서울의 지도를 그려보았다. 완성된 지도는 미국식 아침식사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p234. 우리가 그동안 만들어온 월간 <예쁜 기계>와 주간 <기계>, 격주간 <기계인간>은 모두 실패했다.

 

p235. 우리는 결국 정신적/물질적 빈곤을 벗어날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다. 결국 세계를 바꿀 수 없으므로 우리는 이제 그만 세계를 끝내려고 한다.

 

p243. 결국 이곳에서 사람들은 단 한순간도 자신을 위한 삶을 살지 못했다. 매순간 삶은 타인들에게 증명되기 위해 갱신된다.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 지금 쓰이는 이 글과, 저 책, 그리고 무엇보다 끊임없이 지어지는 아파트를 위해서, 부서지고, 다시 생겨나는 서울은 이미 혁명의 땅이다. 사람들의 눈은 모두 미래에 고정되었고 그래서 천천히 시력을 잃어가면서도 아무도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한다.

 

터질 듯 부풀어 오른 꿈과 환상이 도시를 지탱한다. 꿈의 장면은 디즈니랜드, 밤마다 잠들지 못하게 하는 악몽, 새벽의 버스와 지하철, 광고판에 붙은 청사진, 구호, 그리고 깃발들, 네온라이트로 이루어져 있다. 그 꿈은 벽에 걸린 스크린 속에서 반복해서 재생된다. 돌아서면 탁자 위에 미국식 아침식사가 놓여 있다. 깨끗한 창 너머로 보이는 것은 아파트다. 그것은 살아 있다. 새하얗게, 태어나는 중이다, 영원히.

 

p245. 더 이상 나는 이해하지 않는다, 영혼이 없으므로, 그리고 그 점에서 나와 도시는 평등하다. 우리는 같은 고통으로 고통 받으며, 영혼이 없다. 필요한 것은 더 많은 환상과 고통, 그리고 그걸 위로해줄 마취제이다. 다시 거울이 거울을, 도시가 도시를 비춘다. 모두가 모두를 반사한다. 더 이상의 언어는 필요 없다. 우리에겐 거울이 있다. 도시는 이제 지도 밖에 존재한다. 내 곁에, 공간 밖에 존재한다. 꿈과 테러로 둘러싸인 채, 거울 속에서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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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이야기 - 2015년 제39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숨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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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도 이상문학상 대상을 김영하의 <옥수수와 나>가 받았을 때, 김숨의 <국수>가 받았어야 한다고 생각한 이는 비단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편혜영, 김애란의 뒤를 이어 드디어 김숨의 차례가 온 것일까. 김숨도 받았으니 2016년도 이상문학상은 황정은?

 

수록 작품 중에 세 편이 눈에 띤다. 김숨의 <뿌리 이야기>, 윤성희의 <휴가>, 이장욱의 <크리스마스캐럴>

 

모나리자의 표정이 신비한 것이 9퍼센의 혐오감과 6퍼센트의 두려움과 2퍼센의 분노 때문이라고 했나? 저 복숭아나무 뿌리가 짓는 표정을 풍부하고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공포와 슬픔일거야. 33퍼센트의 공포와 19퍼센의 슬픔......

 

원뿌리에서 여러 가닥의 곁뿌리가 갈라져 나오듯, 슬픔이라는 감정에서 여러 결의 감정이 갈라져 나오는 것은 아닐까. 그 곁뿌리들에서 실뿌리가 돋듯, 애초의 감정에서 갈라져 나온 여러 결의 감정들에서 아주 미미하고 섬세한 감정들이 돋는 것은 아닌가 하는...... 나머지 22퍼센트를 채우고 있던 것은 어쩌면 실뿌리처럼 자잘하게 돋은 감정들이 아니었을까.

 

- 김숨, <뿌리이야기>중에서

 

인용한 문장만 보아도 올해 이상문학상 선정에 대해선 그 누구도 토를 달지 못할 것이다. 해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상문학상 작품들은 대부분 진지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우울하다. 올해엔 윤성희의 <휴가>가 구원투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별다른 이야기도 없는데 왜 이리 웃기는건가. 이장욱의 <크리스마스 캐럴>은 단편 소설이 갖는 장점을 극대화시킨다. 다 읽고 나서 도로 처음부터 읽어야 하는. 무슨 일인가 벌어졌는데 정확히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상황말이다.

 

도로 김숨의 <뿌리 이야기>로 돌아가면

 

뿌리는 뿌리의 확산 방향에 따라 천근성과 심근성으로 구분된다. 천근성은 말 그대로 뿌리 뻗음이 얕아 땅 표면에 달라붙어 뿌리가 수평으로 확장하는 유형히고, 반대로 심근성은 뿌리를 깊이 단순하게 수직으로 내리는 유형이다.......중요한 것은 천근성과 심근성의 공존 가능성이다. ‘수평을 지향하는 천근성 식물과 수직을 지향하는 심근성 식물을 밀식하면 뿌리의 모양과 성장 특성이 달라 공존이 가능하다.’

 

앎에도 천근성과 심근성 구분을 적용할 수 있을 듯 보인다. 채사장의 지대넓얕은 다분히 천근성 방식의 앎이다. 천근성 지식이 유효하려면 심근성 지식 역시 필요하지 않을까.

 

김숨의 <뿌리이야기>는 천근성적인 소설이라기 보단 심근성적인 소설이긴 하나 근래에 보기드문 독창적인 작품임은 두말하면 잔소리!

 

 

  -2015. 4. 28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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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서
김사과 지음 / 창비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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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최근에 읽은 세 권의 한국 소설들, 김사과의 <천국에서>, 임솔아의 <최선의 삶>,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의 주인공들은 여자다. <최선의 삶>의 강이는 10, <천국에서>의 케이는 20대 초반, <한국이 싫어서>의 계나는 20대 후반이다.

 

<최선의 삶> 뒷 표지엔 내가 좋아하는 작가인 박성원과 내가 좋아하는 평론가인 신형철의 추천사가 적혀있다. 특히나 신형철은 나는 이 소설이 서술하고 있는 이 모든 슬프고 아픈 일들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믿는다. 나는 이 작가를 만나고 싶지 않다라고 추천사에 적었다. 읽지 않고 배길 수 있겠는가.

한 마디로 <최선의 삶>은 영화 <파수꾼>의 여학생 버전이다.

 

올해 한국 작가 중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한 작가를 뽑자면 단연 장강명이 아닐까. 이상하게도 나는 장강명의 작품이 싫다. 초기작인 <표백>도 그렇지만 그의 캐릭터들은 참으로 재수가 없다. (아직 댓글부대는 읽지 못했다.) 한국 사회를 까는 듯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캐릭터들이 내뱉은 하소연이 내겐 불편하게 들린다. 내가 꼰대여서일까. 아니면 천민이어서?

 

이명박이 대통령 되었을 때 나도 이민을 알아봤다. 갈 방법이 없더라. 어떡하나. 참고 살아야지.

박근혜가 대통령 되었을 때 진짜 진짜 이민 갈려고 알아봤다. 여전히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오죽하면 병아리 감별사를 할 생각을 했을까. (프랑스 이민)

평생동안 닭똥 냄새를 맡으며 하루 종일 병아리만 만지며 살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한국이 싫어서>의 계나는 한국이 싫다는 이유로 보란 듯이 호주로 유학, 시민권을 획득한다.

누군 뭐 한국이 좋아서 이러고 사는 줄 아나.’

한국이 싫어도 참고 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태반인데

계나는 헬조선을 벗어난 것만으로도 성공한 삶이 아닐까.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에 대해선 많은 이웃 분들이 리뷰를 썼기에

김사과의 <천국에서>를 소개하고자 한다. (세 편의 소설 중 가장 재밌게 읽었다)

 

김사과 작가는 사과처럼 상큼하게 생기셨을까 짐작했건만 앞 날개의 사진보고 깜짝 놀랐다.

혹시 구미호?? (혹시 작가님이 보신다면 죄송합니다. 농담이에요. 부러워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코가 참 크시네요.)

 

플로베르의 <감정교육>이 줄거리가 없다면 김사과의 <천국에서>도 줄거리가 없다.

그럼에도 두 소설 다 잘 읽힌다. 남녀간의 만남이 주된 내러티브를 이루기 때문일까.

 

케이도 계나만큼이나 재수없다. 뉴욕 맨해튼의 유학생이라니. (영어도 졸라 잘한다.)

그나마 일찌감찌 한국으로 귀국해서 봐줄만 했다.

 

케이는 홍대 모임에서 재현을 만나 곧 연인이 된다. 재현과의 다툼 이후 케이는 우연히 만난 초등학교 동창인 지원과 사귄다. 지원은 케이가 좋지만 한편으로 그녀와의 차이를 감당할 수가 없다. 케이는 자신과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너무나 다르다.

 

지원의 누나 캐릭터도 재밌지만 광주 치킨집 아저씨는 근래에 본 가장 재밌는 캐릭터다. 베를린 유학생, 문화운동가, 지인의 자살, 결국엔 치킨집 사장. 똑똑하고 진솔돼 보이기도 하면서도 나중에 찾아온 케이를 성추행할 정도로 막장이기도 하다. 하긴 아저씨가 오해할 만도 하다. 치킨 먹으러한 번 온 아가씨가 인생 상담을 하러 찾아왔다니, 그것도 서울에서 광주까지.

 

케이는 생각했다. 그래서 악몽을 꾼 거고, 꿈은 꿈일 뿐이지. 하지만 그것은 별로 위안이 되지 않았다. 그 꿈은 케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건드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하찮고 시시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것. 다른 평범한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리고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들키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

 

이 문장이 난 따끔했다. 나는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시시해지는 느낌이다. 원래 시시했는데 더 시시해지는지도. 인간의 삶은 몰락의 과정이라고 말한 건 피츠제럴드였던가?

결국 삶이란 시시함과의 대결인가?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내미는 기표란 얼마나 허망한것인가.

 

 

이렇게 살아가면 난 뭐가 되지? 아니,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는 거 그게 어떻게 살아가는 거야? 이해가 안돼. 모르겠어. 살아간다는 건, 좀 다른 거 아니야?......

수족관 속에 있는 물고기가 수족관을 부수면 어떻게 돼? 죽겠지. 뻔하지. 하지만 수족관 속에 있는 건 살아 있는 거야?.....

여기는 천국이고 나는 울고 있어. 근데 써머 여기가 진짜 천국이야? 써머 넌 그렇게 생각해? 정말? 진짜? 어떻게 여기가 천국이야? 내가 진짜 원하는 단 한가지가 빠졌는데, 아아, 나 이제 진짜 알겠어. 여기가 왜 이렇게 좋은지. 그건 제일 중요한 한 가지가 빠져 있으니까. 내가 원하는 거, 내가 진짜 원하는 거, 그게 없으니까. 그래서 이렇게 평화로운 거야. 이 평화는 내가 원하는 그 딱 한 가지를 버리고 얻은 거야. 그러니까, 여기는 천국이 아니야. 여기는 지옥이야.

 

윗 문장을 읽다보면 사토리세대라는 용어가 떠오른다. 통계에 따르면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일본의 젊은이는 75%에 달한다. 수족관 속의 물고기나 우물 안의 개구리나 그것이 자신의 세계라 미리 한정짓는다면 천국일 수도 있다.

거짓된 천국.

 

문득 그녀는 수족관 따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기억의 푸른 물은 나를 익사시키지 못할 것이다. 헤엄쳐 그 강을 건널 거니까. 그렇다. 헤엄쳐, 저 너머에 닿을 거다. 거기에 한번도 본 적 없는 풍경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그것이 좋을지 나쁠지 모르겠다. 거기가 천국일지 지옥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가겠다. 아니, 지금 간다.

 

개인적인 해석이지만 김사과의 <천국에서>는 장강명의 <표백>에 대한 반박처럼 들린다. 완벽한 세상?

 

완벽한데, 여기는 너무나도 완벽한데....어떻게 뭐가 빠져 있을 수가 있지?

 

그러니까 김사과의 <천국에서>는 장강명의 <표백>이 실패한 지점을 넘어서려 시도하는 셈이다.

애초에 수족관 따위는 없다. 완벽한 세상이란 환상이거나 거짓된 믿음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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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 그림자 - 2010년 제43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민음 경장편 4
황정은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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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가 굳이 무언가를 덧붙일 필요가 있을까? 작품해설에 신형철이 이 책에 대한 다섯 개의 주석을 붙여 놓은 마당에?

황정은의 첫 번째 장편소설 <백의 그림자>를 읽고 나는 이 소설에 대해 뭔가를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다급한 의무감을 느꼈다. 행여나 있을 오독으로부터 이 소설을 지켜 내야 한다고 생각했고,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을 읽을 수 있도록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신형철의 윗 문장이야말로 비평가의 존재이유가 아닐까? 좋은 비평가, 평론가들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작가를 발굴해 그들의 책을 슬그머니 우리 앞에 내민다.

평론가란 독자와 책, 독자와 저자 사이에 중매쟁이, 혹은 소개팅 주선자 같은 게 아닐까? 평론가란 이 글은, 이 사람은 이러이러한 점이 좋아요라고 말하면서 독자와 책 사이에서, 독자와 저자 사이에 새로운 인연을 맺어주려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작품보다, 작가보다 앞서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작가의 등을 우리 앞으로 떠밀고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앉는다. 그들 덕분에 우리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작품과 첫 만남의 설레임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만남은 주선자가 없었다면 전혀 기대할 수 없었던 뜻밖의 선물과도 같은 것이다. 좋은 소설, 좋은 작품만큼이나 좋은 비평가가 우리 곁에 필요한 이유일 것이고, 우리에게 신형철은 그야말로 벼락같은 축복이다.

      

이 소설을 몇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도심 한복판에 사십 년 된 전자상가가 있다. 상가가 철거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곳을 터전 삼아 살아온 사람들의 삶의 내력이 하나씩 소개된다. 그 와중에 이 소설은 시스템의 비정함과 등장인물들의 선량함을 대조하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과연 살 만한 곳인지를 묻는다. 이 소설을 두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이 소설은 우선 은교와 무재의 사랑 이야기로 읽힌다. 그러나 이 사랑의 선량한 사람들의 그 선량함이 낳은 사랑이고 이제는 그 선량함을 지켜 나갈 희망이 될 사랑이기 때문에 이 소설은 윤리적인 사랑의 서사가 되었다.

 

이 소설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이 소설은 사려깊은 상징들과 잊을 수 없는 문장들이 만들어 낸, 일곱 개의 절로 된 장시다. 이 소설을 한 단어로 정리하면 이렇다. 고맙다. 이 소설이 나온 것이 그냥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것들을 소설가의 눈을 통해서 본다. 우리 주변에 그것들은 존재했었지만 그들이 들여다보기 전에는 - 상징적인 의미로서가 아니라 -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에서 전자상가, 그리고 특히 오무사가 그런 곳이 아닐까?

 

무재와 은교가 일하는 전자상가, 그리고 오무사와 같은 곳.

이런 곳을 언론에선 슬럼이라 불렀다.

 

무재에게 그곳은 아주 어릴적 부터 가족들과의 아련한 추억이 깃든 곳이다.

 

나는 이 부근을 그런 심정과는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가 없는데 슬럼이라느니, 라는 말을 들으니 뭔가 억울해지는 거예요. 차라리 그냥 가난하다면 모를까, 슬럼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치 않은 듯해서 생각을 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언제고 밀어 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 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 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

그런 걸까요

슬럼,하고

슬럼.

슬럼.

슬럼.

이상하죠.

이상하기도 하고.

조금 무섭기도 하고, 라고 말해 두고서 한동안 말하지 않았다.


1970년 대 부터 지금까지 전구만을 전문적으로 파는 가게. 그곳에 가면 다른 곳에선 구할 수 없는 손톱만한 전구를 구할 수 있다. 주문한 전구의 개수에 상관없이 전구를 파는 노인은 제비 새끼 주둥이에 뻥 과자 주듯봉투에 한 번에 한 개씩 전구를 떨어뜨린다.

 

은교는 전화 통화중 무재에게 오무사 이야기를 한다.

 

오무사라고, 할아버지가 전구를 파는 가게인데요. 전구라고 해서 흔히 사용되는 알전구 같은 것이 아니고, 한 개에 이십 원, 오십 원, 백 원가량 하는, 전자 제품에 들어가는 조그만 전구들이거든요. 오무사에서 이런 전구를 사고 보면 반드시 한 개가 더 들어있어요.

 

그래서 은교는 어느날 할아버지에게 그 이유를 물어본다.

 

가지고 가는 길에 깨질 수도 있고, 불량품도 있을 수 있는데, 오무사 위치가 멀어서 손님더러 왔다 갔다 하지 말라고 한 개를 더 넣어 준다는 것이었어요. 나는 그것을 듣고 뭐랄까? 순정하게 마음이 흔들렸다고나 할까, 왜냐하면 무재 씨, 원 플러스 원이라는 것도 있잖아요. 대형 마트 같은 곳에서.....하나를 사면 똑같은 것을 하나 더 준다는 그것을 사고 보면 이득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그게 배려라거나 고려라는 생각은 어째선지 들지 않고요.

 

.....오무사의 경우엔 조그맣고 값싼 하나일 뿐이지만, 귀한 덤을 받는 듯해서,

나는 좋았어요.

 

나는 윗 문장이 이 소설에서 가장 좋았다.

 

작품 속의 공간에서 그림자들은 곧잘 일어서곤 한다. 그림자를 따라 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도 있고, 그림자에 사로잡힌 사람들도 있다. 그림자들이 일어설 때 마다, 그림자들이 슬그머니 밥상에 앉을 때마다 섬찟하다. ‘의 그림자가 있지만 작가는 무재와 은교를 통해 의 그림자를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차가 고장 나 무재와 은교만이 남은 낯선 시골에서의 밤. 그림자를 무서워하던 은교는 이렇게 말한다.

 

 

따라오는 구나, 하고 생각했다. 따라오는 그림자 같은 것은 전혀 무섭지 않았다.

 

신형철은 근래의 한국 소설이 도달한 가장 윤리적인 절망과 희망 앞에서 나는 울지도 웃지도 못 한다라고 자신의 글을 끝맺지만,

 

작가의 말을 따르자면 우리는 절망에 빠지는 대신 잠시나마 희망을 가져도 좋으리라.

 

여전히 난폭한 이 세계에

좋아할 수 있는 ()들이 아직 몇 있으므로

세계가 그들에게 좀

덜 폭력적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왔는데 이 세계는

진작부터

별로 거칠 것도 없다는 듯

이러고 있어

다만

곁에 있는 것으로 위로가 되길

바란다거나 하는 초

자기애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고

다만

따뜻한 것을 조금 동원하고 싶었다

밤길에

간 두 사람이 누군가 만나기를 소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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