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왜 책을 읽어야 하는지 묻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책을 사료처럼 던져주자.

 

책을 필사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문장들을 잊어버리고 싶지 않아서.

둘째, 빌려온 책이기 때문에. (내 책상 위에는 항상 리뷰 대기 중인 소유한 책만 한 백 여권 정도 있다. 빌려온 책들 때문에 계속 밀린다.)

셋째, 결정적으로 리뷰가 써지지 않아서다. (필사를 하다보면 어떻게든 쓰게 된다.)

 

참 좋은데 뭐라고 표현할 방법이막막한 책들이 있다. 게다가 이 책의 경우엔 말미에 이현우의 추천 글이 실려 있다. 깔끔하다. 이 책이 어떤 책인지 알고 싶은 독자들은 추천의 글만 읽어도 감을 잡을 수 있다. 원래 계획대로 쓰자니 추천의 글과 똑같은 글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이런 상황이니 더더욱 리뷰쓰기가 힘들었다.

 

할 수 없이 필사를 했다. 그다지 두툼한 책도 아니고, 선별한 문장들만 필사를 했건만 하루 종일 걸렸다. 필사를 끝내고 나서는 기절했다. 다음 날은 저녁 약속도 펑크 내고는 하루 종일 잤다.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책 한 권을 재독하고 필사하는데 에너지를 전부 다 소진시킨 느낌이었다.

이 책은 그런 책이다. 저자의 열광적인 문체와 주장에 호응하다보면

자신의 에너지가 바닥을 칠 정도의 책.

 

크게 보자면 책을 읽는 방법엔 다독의 길과 정독의 길이 있다.

사사키 아타루는 후자를 강조한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아이는 성경을 읽었다. 읽고, 읽고 또 읽었다.

나중에는 성경 박사가 된 루터는 물었다.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미친 것일까, 아니면 이 세계가 미친 것일까.

 

그 당시엔 누구나 교황을 따르고 추기경을 따르고 대주교가 있고 주교가 있고 수도원이 있었다. 심지어 천국행 티켓을 돈을 받고 팔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읽어도 성경에 그런 건 쓰여 있지 않았다. 루터는 결국 대 이단으로 선고 받아 보름스 국회에 소환되어 주장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가 든 성구를 계속 따르겠다.” “따라서 나에게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이 루터로부터 이른바 16세기의 종교개혁’, 혹은 독일혁명’, ‘대혁명이 시작되었다.

대혁명이란 무엇인가? 성서를 읽는 것이다.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루터에 따르면 기도이고 명상이고 시련이다.”

 

다신교를 믿던 초로의 남자가 있었다. 어느 날 목소리를 듣는다.

 

집어 들고 읽어라. 집어 들고 읽어라. 집어 들고 읽어라.”

 

그래서 그는 로마서를 읽었다. 성경을 읽은 그는 쇠망해가던 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그의 이름은 사도 바울 이래 최대의 신학자가 된 성 아우구스티누스다.

 

역시나 성경을 읽던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 앞에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난다.

예수가 그녀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너에게 마치 펼쳐진 책처럼 될 것이다.”

 

그녀가 십자가의 성 요한과 함께 개혁 운동에 나선 아빌라의 성 테레지아다.

 

문맹인 상인 앞에 대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난다. 상인은 도망친다. 그러나, 아내 하디자의 설득에 다시 가브리엘을 찾아간다. 천사가 내 이야기를 듣겠느냐?” 물어도 상인은 싫습니다.”하고 거부한다. 몇 번의 실랑이 끝에 상인이 듣겠다고 하자 천사가 말한다.

 

읽어라. 창조주이신 주의 이름으로,

아주 작은 응혈에서 사람을 만드셨다.

읽어라. 너의 주는 더없이 고마우신 분이라,

붓을 드는 법을 가르쳐주신다.

사람에게 미지의 것을 가르쳐주신다.

 

천사는 상인의 목구멍을 찢고 심장을 꺼내 씻었다. 그것을 상인의 신체에 돌려주었을 때 그의 마음은 신앙과 지혜로 가득 찼다고 한다. 그의 이름은 무함마드였다.

 

신은 무함마드에게 붓을 주고 말한다.

 

써라.”

 

그렇게 해서 쓰인 책이 책의 어머니’ <코란>이다.

무함마드와 그가 받아 적은 책 <코란>에 의해 현대 이슬람 문명이 태동했다.

 

11세기 말 피사 도서관에서 유시티니아누스 법전이 발견되었다. 무려 600년간 망각에 묻혔던 책이었다. 이후 이 책이 근대 모든 법의 원천이 된다. 중세해석자 혁명은 무엇인가? 이 책을 옮김으로써 시작되었다.

 

유스니티아누스 법전을 옮기던 당대의 법학자를 상상해보자. 이건 법전이다. 이상하게 오역하면 죽는다.

(현대 번역가들 책상 앞에 붙여 놓자) 손으로 베껴 써야 하는데 한 글자라도 틀리면 큰 소동이 벌어진다. 번역을 하고 제본, 주석, 수정, 색인을 하는데 100년이 걸린다.

 

텍스트란 곧 법이다. 그러나 텍스트는 꼭 문자를 필요치 않는다.

신체에 법과 신화를 새기면 그것 역시도 텍스트, 곧 문학이다.

르장드르, 사사키 아타루의 관점에서 춤, 음악, 연극, 노래, 회화 이 모든 것이 다 문학이다.

 

사사키 아타루는 문학의 종언, 예술의 종언, 역사의 종언, 인류의 멸망을 말한 이들을 경멸한다. 옴 진리교같은 사이비 종교. 헤겔, 코제브, 하이데거, 아감벤 같은 철학자 등등.

 

20만년 중 5천년이니 80세 수명의 인간으로 비유한다면 현 인류는 겨우 두 살에 불과하다.

문학이 끝났다고?

 

니체는 자비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40부를 찍었고 7부만 지인에게 보냈다.

세계에서 단 7.

 

19세기 문맹률은 어땠을까? 여기서 문맹률의 판단 기준은 사인을 할 수 있는가였다. 잉글랜드는 30퍼센트. 프랑스는 40~45퍼센트, 이탈리아는 70~75퍼센트, 러시아는 90~95퍼센트였다.

 

이때 러시아 작가엔 누가 있었나? 푸시킨, 고골,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등등. 당시 러시아 인구는 4000만 명이었다. 사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400만 명. 즉 당시의 러시아 작가들은 0.1%에 승부를 걸었던 셈이다.

 

읽는다는 것은 혁명이다. 루소가 그랬고, 무함마드가 그랬고, 전태일이 그랬다. 전태일은 무엇을 읽었나? 근로기준법을 읽어 버리고말았다. ‘목구멍을 찢고 심장을 꺼내 씻을 정도로읽고 읽고 또 읽었다. 아무리 읽어도 하루에 15시간 일하라는 말은 어디에도 쓰여 있지 않았다. 그는 물었으리라.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미친 것일까, 아니면 이 세계가 미친 것일까.

 

만일 세계가 맞다면, 법이 맞다면 책이 틀린거겠지.

결국 그는 자신이 읽은 책을 들고 자신의 몸을 성화처럼 태웠다.

그가 남긴 불씨는 이후 한국 현대사 혁명의 순간마다 불꽃처럼 타올랐다.

 

벤야민은 말했다. “밤중에 계속 걸을 때 도움이 되는 것은 다리도 날개도 아닌 친구의 발소리다.”라고.

 

발소리가 들려온다. 들리고야 말았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는다. 아무것도 당연하지 않다. 이제 시작이다.

읽어라. 써라, 고쳐 읽어라. 고쳐 써라. 발표하라.

 

집어 들고 읽어라. 집어 들고 읽어라. 집어 들고 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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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잇 2016-03-11 08: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을 씹어드시는군요.넉다운될 정도로 힘을 다하여 필사까지 하시며 책을 읽고, 리뷰를 쓰시다니.. 부끄럽네요.
쓰신 글 마지막은 주문같네요. 집어들고, 읽어야죠. 배우고 갑니다.

시이소오 2016-03-11 08:56   좋아요 2 | URL
ㅋㅋ 빌린 책이라서요. 맞습니다. 마지막은 주문입니다. 친구에게, 저에게 건네는 ^^

뽈쥐의 독서일기 2016-03-11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대체 이 책은 무엇인데 이토록 뜨거운 리뷰를 양산하는지... 아무리 얇아도 필사가 진짜 쉽지 않은데 대단하십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이 책은 꼭 읽어봐야겠어요! 글 잘 읽었습니다.

시이소오 2016-03-11 20:55   좋아요 0 | URL
책이 뜨거우니까 리뷰들도 뜨겁나 봐요^^

깊이에의강요 2016-03-11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이소오님 리뷰를 읽으면
책이 막~~ 읽고 싶어져요^^

시이소오 2016-03-11 23:28   좋아요 0 | URL
저는 깊이에의 강요님의 댓글을 읽으면 리뷰를 더 잘 쓰고 싶어져요^^

깊이에의강요 2016-03-11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시이소오 2016-03-11 23:56   좋아요 0 | URL
^^

oren 2016-03-12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사키의 책 속 내용들을 쭈욱 읽어보니 <독서의 역사>를 쓴 알베르토 망겔의 주장과 겹치는 부분이 너무나 많아 좀 놀랍습니다. 물론 사사키의 책은 `책과 혁명`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내용뿐만 아니라 문체조차 좀 격렬한 데가 있다면, 망겔의 고찰은 훨씬 더 차분하게,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좀 더 일반적이면서도 드넓은 지평 위에 `독서의 역사`에 대한 폭넓은 탐색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서로는 꽤나 다르게 접근하는 책으로 볼 수도 있지 싶습니다만... 굳이 예를 들자면, 망겔의 책에선 `필사`에 대해서조차도 무려 몇십 쪽을 할애할 정도니까요... 기왕지사 말이 나왔으니 제가 베껴둔 `몇 대목`만이라도 여기에 좀 옮겨볼까 합니다.. (옮겨 붙이는 일은 참 쉬운데, 협소한 공간에 너무 길게 붙여넣는 꼴이 너무 꼴같잖아서 좀 민망하긴 합니다...)

* * *

우아한 손재능에 대한 동경

이제야 필사 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는 예측에도 불구하고 인쇄술이 필사 텍스트에 대한 취향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는 사실은 마음 속 깊이 새겨 볼 만하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구텐베르크와 그의 추종자들은 필사자들의 손재간을 흉내내려고 노력했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인큐내뷸러는 외관이 필사본을 쏙 빼닮았다. 15세기 말경에는, 비록 인쇄술이 확립된 터였지만 우아한 손재능에 대한 동경이 사그러들지 않았고, 서구 역사상 가장 기억할 만한 달필의 일부는 아직 미래의 일로 남아 있었다. 책을 대하기가 더 쉬워졌고, 따라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읽기를 배우는 한편으로 글자를 보다 우아하고 두드러지게 쓰려고 애쓰게 되었다. 그래서 16세기는 인쇄의 시대일 뿐만 아니라 훌륭한 육필 입문서의 시대이기도 했다. 기술상의 발전이-구텐베르크의 경우처럼-그 기술로 인해 뿌리째 뽑혀 버리리라고 예상되던 것들을 제거하기보다는 오히려 발전시키는 예가 얼마나 많은지 주목하는 일은 매우 흥미롭다. 자칫 간과하거나 무시해도 좋다는 식으로 지나쳐 버릴 수 있는 전통적인 미덕에도 참다운 가치가 담겨 있음을 깨닫게 하는 대목이다.

* * *

얼마나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하는지

어느 이름 모를 필사자는 8세기 어느 때인가 필사를 끝내면서 ˝얼마나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손가락 3개는 열심히 옮겨 적고, 두 눈은 끊임없이 보고, 혓바닥은 말을 하고, 온몸은 산고(産苦)를 치른다˝고 적고 있다. 필사자들은 일을 할 때 자신이 옮겨 적는 단어를 하나하나 발음함으로써 혓바닥으로 말을 했던 것이다.

* * *

˝책을 잡고 글을 읽으세˝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은 『고백록』의 어느 중요한 단락에서 두 가지 방식의 독서법-소리를 내는 방법과 소리를 내지 않는 방법-이 거의 동시에 이뤄지는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우유부단함에 화가 난 나머지, 또 자신의 과거 죄에 분노를 느끼면서,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결단을 내려야 할 시간이 왔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며 그때까지 자신의 여름 정원에서 (큰 소리로) 함께 책을 읽고 있던 친구 알리피우스 곁을 빠져 나와 무화과 나무 밑으로 몸을 던져 흐느껴 울었다. 바로 그때 근처의 어느 집에서 어린이(소년인지 소녀인지, 그는 밝히지 않았다)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는데, 그 노래의 후렴이 ˝책을 잡고 글을 읽으세˝였다. 그 노랫소리가 자신을 향한 것이라 믿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알리피우스가 아직도 꼼짝 않고 앉아 있는 곳으로 다시 달려가 미처 다 읽지 못했던 바울의 『사도행전』한 권을 집어들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나는 그 책을 집어 펼친 뒤 시선이 가장 먼저 닿은 첫 부분을 소리내지 않고 읽었다˝고 말한다. 그가 소리내지 않고 읽은 단락은 로마서 13장으로, ˝육신을 위해 양식을 준비하지 말고 그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갑옷처럼` 걸쳐라˝라는 훈계였다. 혼비백산한 그는 문장의 끝에 이른다. `믿음의 빛`이 그의 가슴에 충만하고 `회의의 어둠`은 말끔히 걷힌다.

* * *

3번이나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나는 학창 시절에 읽었던 『고백록』을, 나의 라틴어 선생이 다른 어떤 시리즈보다 좋아했던, 오렌지색 표지에 두께가 얄팍했던 로마 고전판을 지금도 가지고 왔다. 그 책을 손에 쥔 채 여기 이렇게 서 있노라니 언제나 주머니 크기만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책을 품고 다녔던 저 위대한 르네상스 시인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와 어떤 동료 의식까지 느끼게 된다. 『고백록』을 읽을 때면 아우구스티누스가 다정스레 속삭이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던 그는 인생 말년에 가까워서는 그 성인과 상상 속에서 3번이나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그의 사후에 출간된 『나의 비밀』이 그것이다.

* * *

페트라르카

아우구스티누스와 마찬가지로 페트라르카도 젊은 시절에 꽤 혼란스런 삶을 살았다. 단테의 친구였던 그의 아버지는 단테처럼 자신의 고향 피렌체에서 추방당해 페트라르카가 태어나자마자 가족들을 아비뇽에 있던 클레멘스 5세 교황의 궁정으로 옮겨야 했다. 페트라르카는 몽펠리에와 볼로냐의 대학들을 다녔으며 아버지가 죽고 스물두 살이 되었을 때는 다시 아비뇽에 정착했다. 이때 그는 이미 돈 많은 젊은이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부(富)도 젊음도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방탕한 생활 몇 년 만에 그는 아버지가 물려준 유산 대부분을 탕진하고 어느 수도원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곳에서 발견한 키케로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책들은 새로 서품을 받은 성직자의 말에 잠재해 있던 문학 취미를 일깨워 주었고, 그는 여생을 걸신들린 듯이 책을 읽어댔다.

그는 30대 중반에 두 개의 작품 『저명한 남자에 대하여』와 시 『아프리카』를 창작하면서 신중하게 글쓰기를 시작했다. 이들 작품에서 그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작가들에게 많은 신세를 지고 있다고 실토했으며, 이 작품으로 그는 로마의 국민과 상원으로부터 월계관을 얻는 영광을 누렸다.

* * *

책이 손을 떠나자마자 그 책에 대해 느꼈던 모든 감정도 눈 녹듯 사리지고 마는걸요

『나의 비밀』에서 페트라르카(그의 기독교 이름인 프란체스코로)와 아우쿠스티누스는 `진리 부인`이 뚫어져라 지켜보는 가운데 어느 정원에 앉아 대화를 나눈다. 프란테스코가 자신은 도시의 공허한 번잡스러움에 지쳐 있다고 고백한다. 그러자 아우구스티누스는 프란체스코의 삶에 대해, 시인인 프란체스코의 서재에 꽂혀 있는 책 가운데 한 권이긴 하지만 아직 프란체스코가 어떤 식으로 읽어야 할지 방법을 모르고 있는 책과 같다고 대답하면서 그에게 미쳐 버릴 만큼 성가시게 구는 군중을 주제로 한 텍스트를 몇 권 상기시킨다. 그 중에는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의 것도 들어 있다. ˝이런 책들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라고 아우구스티누스가 묻는다. 그 질문에 프란체스코는 책을 읽을 때는 매우 유익하지만 ˝책이 손을 떠나자마자 그 책에 대해 느꼈던 모든 감정도 눈 녹듯 사리지고 마는걸요˝ 라고 대답한다.

아우구스티누스 : 그런 식의 독서는 지금 매우 보편적이라네. 학식 있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으니까. ······ 하지만 자네가 적절한 여백에 약간의 메모를 간결하게 적어 놓으면 아마 독서의 열매를 쉽게 즐길 수 있을 걸세.

프란체스코 : 어떤 종류의 메모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우구스티누스 : 책을 읽다가 자네의 영혼을 뒤흔들거나 유쾌하게 만드는 경이로운 문장을 마주칠 때마다 자네의 지적 능력만을 믿지 말고 억지로라도 그것을 외우도록 노력해 보게나. 그리고 그것에 대해 깊이 명상하여 친숙한 것으로 만들어 보라구. 그러면 어쩌다 고통스런 일이 닥치더라도 자네는 고통을 치유할 문장이 마음 속에 새겨진 것처럼 언제든지 준비되어 있음을 깨닫게 될 걸세. 자네에게 유익할 것 같은 어떤 문장이든 접하게 되면 분명히 표시해 두게. 그렇게 하면 그 표시는 자네의 기억력에서 석회의 역할을 맡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멀리 달아나고 말 걸세.

(페트라르카의 상상력으로 보면) 아우구스티누스가 암시하는 독서법은 분명히 새로운 것이었다. 사고를 위한 버팀목으로 책을 이용하지도 않고, 또 사람들이 현인의 권위를 믿는 것처럼 책을 믿지도 않으면서, 책에서 사고와 문장과 이미지를 취한 뒤에 그것을, 오래 전부터 머리 속에 담고 있던 다른 텍스트로부터 정제해 낸 또 다른 사고나 이미지와 연결시키고, 거기다가 독서가 자신의 독특한 사상을 곁들여서 사실상 전혀 새로운 텍스트를 창조해 내는 독서 방법이었다.

* * *

다른 독서 경험을 기억해 냄으로써만

페트라르카의 말을 빌리면 이런 독서법도 그 자신이 `신성한 진실`이라 부르는 그 어떤 것을 고려하다 우연히 터득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가 말하는 `신성한 진실`이란 책장의 유혹에도 전혀 흔들임 없이 자신의 길을 선택하고 해석해 내기 위해 독서가들이 꼭 갖춰야 하는 감각이었다. 어떤 텍스트를 평가하는 데는 심지어 작가의 의도마저도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이런 작업은 독서가 자신이 다른 독서 경험을 기억해 냄으로써만 가능하며, 그런 기억을 통해 작가가 책장에 담은 기억이 자연스레 흘러 나온다고 페트라르카는 암시한다.

* * *

마치 호수의 물 위에 쓰여진 것처럼

읽혀지고 기억되는 하나의 텍스트는, 구원이라 이름할 수 있는 그런 반복 독서에서는 마치 내가 오래 전에 기억했던 그 시에 등장하는 얼어붙은 호수-대지만큼이나 단단해서 독서가의 횡단을 받쳐 줄 수 있다-같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 텍스트의 유일한 존재의 터가 마음 속이기 때문에 글자들은 마치 호수의 물 위에 쓰여진 것처럼 늘 불안정하고 유동적이다.

시이소오 2016-03-12 00:08   좋아요 2 | URL
북풀로 읽다가 아무래도 컴으로 다시 읽어야겠어요. 오렌님 사이트가서 복습도 하고 망엘 혹은 망구엘 책도 읽어봐야겠네요
밤의 도서관은 읽는 중이에요^^

머털이 2016-03-12 0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훅! 하고 강하게!! 궁금하네요...👍👍

시이소오 2016-03-12 01:54   좋아요 0 | URL
목적 달성이네요 ^^

니페딘1T 2017-10-02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을 글에 전율이 입니다. 감사합니다.

시이소오 2017-10-02 09:21   좋아요 0 | URL
이 책 자체가 전율입니다. 니페딘님 제가 고맙습니다^^
 
사피엔스 (무선본)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 김영사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다치바나 다카시는 대학시절 베르자예프의 <현대에 있어서 인간의 운명에 대하여>를 읽고서는 사고의 스케일이 완전히 변했다고 말했다. (아쉽게도 한국에선 미 번역이다.)

 

공간적으로는 일본 사회의 일상 공간을 벗어나, 세계 전체, 우주 전체까지 시야에 들어왔으며, 시간 축에서는 근미래, 근과거만이 아니라 백년 단위, 천년 단위의 과거와 미래, 심지어는 신의 운명까지 생각하게 되었으니까, 영원이라는 시간마저 고려하게 된 셈입니다. ”

 

다치바나 다카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500, 피도 살도 안 되는 100> p84

 

신의 운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책은 백년 단위, 천년 단위로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를 다룬다. 유발 노아 하라리는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에서 영감을 받아 호모 사피엔스의 빅 히스토리를 추적한다.

 

135억 년 전, 빅뱅이 일어난다. 원자, 분자가 등장한다.

20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했다.

7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는 아프리카를 벗어나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이른바 인지혁명.

45,000년 전, 사피엔스, 호주에 정착한다.

12,000년 전, 농업혁명이 시작된다.

5,000년 전, 문자가 발명된다.

500년 전, 과학학명이 일어난다.

250년 전, 산엽혁명

50년 전, 정보혁명.

 

인류는 약 250만년 전 동부 아프리카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진화했다. 유럽과 서부아시아의 인류는 호모 네안테르탈렌시스’, 흔히 말하는 네안테르탈인으로 진화했다. 아시아에서는 호모 에렉투스가 살았다. 인도네시아 자바 섬에는 호모 솔로엔시스가 살았다. 인도네시아의 또 다른 섬에는 호모 폴로레시엔시스가 살았다. 2010년 시베리아 데니소바 동굴에서 호모 데니소바인들의 화석이 발견되었다.

 

동아프리카에선 호모 루돌펜시스’, ‘호모 에르가스터인이 살았다. 그리고 호모 사피엔스

 

지난 1만 년간 호모 사피엔스만이 유일한 인간 종이었다. 왜 유독 다른 종들은 멸종하고 호모 사피엔스만 살아남았을까. 저자는 언어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여러 학자들은 약 7만 년 전 우연히 일어난 유전자 돌이변이에 의해 사피엔스의 뇌의 내부 배선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주장한다. 언어의 등장과 함께 전설, 신화, , 종교가 탄생했다. 다른 종과 달리 호모사피엔스는 언어로부터 허구를 말할 수 있고, 허구를 믿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45천년 전. 호모 사피엔스가 호주에 정착한다. 이에 호주의 대형동물이 멸종한다. 3만 년 전 네안데르탈인이 멸종한다. 16,000년 전 호모 사피엔스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하자 역시 대형 동물들이 멸종을 맞는다.

 

수렵, 채집을 하던 호모 사피엔스는 약 1만년 전부터 동물과 식물 종의 삶을 조작하는데 모든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다. 농업혁명이다.

 

그렇다면 과연 농업이 먼저 였을까? 정주가 먼저였을까? 유발 하라리는 제러드 다이아몬드를 따라 농업혁명은 역사상 최대의 사기였다고 말한다. 밀 때문이다. , , 감자가 호모 사피엔스를 길들였지, 호모 사피엔스가 이들을 길들인 게 아니다. 저자는 호모 사피엔스가 밀을 재배하면서 수렵, 채집 때보다 더 많은 식사를 제공받은 게 아니라고 강조한다.

 

저자의 말이 맞다면 농업이 정주를 일으킨 셈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정주가 농업을 발생시켰다고 주장했다.)

 

7만년 전 중동에 도착한 호모 사피엔스는 이후 5만년 동안 농업없이 번성했다. 간혹 그들은 밀을 먹었다. 점점 많이 먹게 되자 무심코 밀이 퍼졌다. 밀을 수확하게 되자 그들은 4주간 정도 캠프를 차렸을지 모른다. 그러다가 5, 6주가 되고 이내 마을이 되었다. 정착촌이 생기자 인구가 늘어났다. 인구가 늘어나자 질병이 들끓고 동물로부터 전염병에 감염되었다. 아이들은 떼죽음 당했다.

 

(아이의 사망률보다 출생율이 더 높았다. 그렇다면 DNA입장에선 수렵, 채집보다 정주의 방식이 더 이익이 되지 않았을까. 밀 때문이라기보다는 호모 사피엔스의 DNA가 농업을 발생시킨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왜 다시 수렵, 채집 사회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인구가 늘었기 때문이다. 좀 더 쉬운 삶을 추구한 결과 사는 건 더 어려워졌다. 수렵 채집인들은 미래를 중요시 생각지 않았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뿐더러 먹을거리나 소유물을 저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농업혁명 덕분에 호모 사피엔스에게는 이제 미래가 중요해졌다. 이때부터 인간의 마음속 극장에서 미래에 대한 걱정은 주연배우가 되었다.”

 

농업혁명 이래 인간 사회는 점점 더 규모가 크고 복잡해졌다. 사람들을 길들이기 위해 신화와 허구는 더욱 정교해지고 수백만 명이 협력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문화는 보편적이지 않았다. 보편적 질서 후보 세 가지가 출현한다. , 제국, 종교.

종교와 유사한 것은 공산주의다. 혹은 이데올로기다.

 

지난 500년 이후로 인류는 과학 혁명의 시기로 접어든다. 인류는 무지를 인정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한다. 이 시기 과학은 자본주의와 결합하여 유럽을 중심으로 제국이 탄생한다. 식민지 노예 무역이 성행하고 자본주의는 점점 더 탐욕스러워진다.

 

신기술은 영국의 석탄광산에서 태어났다. 석탄이 발견되었고, 증기기관차가 발명되었다. 산업혁명은 에너지 전환의 혁명이었다. 기차가 생기고 시간표가 나오자 시계가 나왔다. 산업이 발달하면서 온갖 상품들이 만들어졌고 자본주의 경제는 끊임없이 생산량을 늘려야 했다. 그러나, 만드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사 줘야 했기에 자본주의는 대중심리학(just do it!)의 도움을 받아 소비지상주의를 전파했다. 물질적 조건이 개선되었지만 가족과 공동체 문화는 붕괴되었다.

 

1945년 이후로 제국들이 식민지에서 조용히 철수했다. 이제 전쟁의 대가는 너무나 커졌고, 전쟁 비용이 치솟은 반면 이익은 작아졌다.

 

인간의 수명은 늘어나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지만 인간 스스로 점점 더 불행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호모사피엔스는 이제 자연선택의 법칙을 깨뜨리기 시작했다. 자연선택은 이제 지적설계로 대체되었고 지금도 대체되고 있다.

 

2005년 시작된 블루브레인 프로젝트는 인간의 뇌 전부를 컴퓨터 안에서 재창조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만일 성공한다면 생명은 40억년 만에 유기물을 넘어 비유기물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만일 우리 후손들의 의식이 작동하는 차원이 우리와 완전히 다르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리가 만일 윤리나 도덕이 아니라 우리의 욕망에 따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1997IBM의 컴퓨터 딥 블루가 세계 체스 챔피언 카스파로프에게 이겼다. 지난 128일 구글의 AI 알파고가 바둑에서 중국 판후이 기사에게 55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201639일 어제, 이세돌 9단이 알파고에게 첫 판 불계승으로 졌다.

(호모 사피엔스들은 대개 이세돌 9단의 승리를 예견하는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엔 한판도 이기기 어려울 것이다.)

 

이미 2014년에 AI ‘유진이 튜링테스트를 통과했다. 우리가 과연 AI를 길들일 수 있을까? AI도 언젠가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할 날이 올 것이다. 그때 호모 사피엔스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뇌에 전극을 심은 원숭이는 자신보다 스무 배 무거운 수백 킬로 떨어진 곳의 생체공학 다리를 생각으로만 들어올렸다. 호모 사피엔스의 다음 세대는 어쩌면 우리의 상상력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같은 존재일 수도 있다. 호모 사피엔스가 스스로 무엇을 원하지 못한 채 자신만의 쾌락을 원하는 이 된다면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유발 하라리는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호모 사피엔스가 어쩌면 악한 신이 될 것이라 우려한다.

사사키 아타루의 말처럼 히틀러가 자신의 죽음의 순간과 모든 타자, 모든 세계의 죽음의 순간과 일치시키는 것을 절대적 향락으로 꿈꾸었다면 자신의 쾌락만을 원하는 악한 신이 히틀러보다 도덕적일 것이라 상상할 수 있을까.

 

과연 대안이라는 게 있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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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가 2016-03-10 08: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가장 신선했던 점은 저자 하라리가 펼친 인지혁명 논리였습니다. 좀 보충하자면 저자는 사피엔스의 사회적 특징이 사피엔스의 생존과 발전에 기여했다고 보았습니다. 같은 선상에서 인지혁명을 설명했던 걸로 생각됩니다. 종교,정치, 문화, 과학기술의 발전은 그러한 인지혁명을 통해 이루어 졌다고 본것같습니다. 또한 사피엔스 종은 수렵채집인이래 생물학적 진화가 전혀 없다고 보았습니다. 시이소오 님 덕분에 복습하는 기회가 됐습니다. 감사🤗

시이소오 2016-03-10 08:22   좋아요 2 | URL
유발 하라리 주장 중 저한테 가장 와닿은 부분은 호모 사피엔스의 허구를 믿는 능력이었습니다. 긍정적으론 예술, 민주주의 등이 발생했지만 한편으론 종교 전쟁, 나치가 태동하기도 한거죠.
토론 하기에 좋은 책인거 같아요^^

징가 2016-03-10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간단히 말해 사기치는 기술과 다구리(?)하는 능력?!

시이소오 2016-03-10 08:45   좋아요 0 | URL
ㅋㅋㅋ 이 허구를 믿는 능력이 우리를 어디로 끌고갈지가 관건이네요^^

cyrus 2016-03-10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농업혁명의 신화를 깨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는데, 과학혁명을 설명하는 내용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제국의 엘리트들이 과학혁명을 주도한 역할을 인정하지만, 이러한 논리에서 유럽중심주의 역사관과 유사한 느낌이 들었거든요.

시이소오 2016-03-10 21:58   좋아요 0 | URL
아마 그건 아닐거에요. 전반적으로 에드워드 사이드처럼 오리엔탈리즘울 비판하는 입장이니까요^^
 
어쩌다 한국인 - 대한민국 사춘기 심리학
허태균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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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이런 책을 읽고 말았을까. 어쩌다 한국인이어서.

매몰비용의 오류를 저지르지 않겠다고 그렇게 다짐했건만.

시종일관 이해할 수 없는 논리, 맥락에 맞지 않는 사례, 부정확한 용어의 남발, 심리학적 오류, ‘가끔만 제정신이다.

 

저자는 지금의 한국 사회가 사춘기와 유사하다고 해석한다. 그 특징으로 주체성, 가족확장성, 심정중심주의, 관계성, 복합유연성, 불확실성 회피라는 6가지 개념을 제시한다.

 

주체성? 주체성이라고? 사춘기에 주체성이란 게 있나? 한국인이 주체성이 강하다고? 플로베르가 말한 ‘le juste mot정확한 단어는 문학에서 만큼이나 비문학에서 중요하다. 맥락을 보아하니 저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자기중심성이다.

 

저자는 주체성의 예를 들기 위해 국민 모두가 판사인 척 한다고 비판한다. 그리고는 원칙을 지키는 사법부는 국민들로부터 미움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원칙? 원칙이라고 했나. 대한민국 사법부가 원칙을 지킨다고? <주진우의 사법 활극>을 표창처럼 던지고 싶다.

 

가족확장성? 지금이 무슨 쌍팔년도인가? 가족이 해체되어 1인 가구가 늘어나는 판에 무슨 가족확장성? ‘가족확장성을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군대를 예로 든다. 가족에서 왜 군대로 뻗어나가는지 나는 당최 이유를 모르겠다. 한 술 더떠 세월호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한국인들에게 대통령은 어버이같은 존재로 여겨진다고 말한다. 그래서 어버이의 사과가 필요하다고? 군사부일체의 의미가 남아 있어서?

 

더 심각한 건 저자의 세월호 사건에 대한 인식이다.

 

대통령은 개인으로서 세월호 사고를 일어나게 했거나 설사 대처를 잘못한 것에 원인을 제공했다거나 책임을 져야 하는 부분이 있어도 별로 크지 않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계산은 아무 의미가 없다. 만약 그런 주장을 내세운다면 그런 사람은 한국인과 한국 문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저자는 대통령은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한국인의 특성상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명색이 심리학자거늘 가족에서 군대, 국가로 이어지는 일반인들이 저지르는 심리학적 오류의 맹점을 지적하진 않고 엉뚱한 주장만 펼친다.

 

관계주의, 이건 동의할 만한데, 또 뜯어보면 그렇지도 않다. ‘관계주의라는 용어가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저자가 주장하고 싶은 건 사적인 일대일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뜻일 것이다. 저자는 관계주의를 설명하기 위해 광우병 사태를 예로 들었다.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미국산 소고기에 대한 광우병 사태는 여러 비합리적인 측면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실제로 미국산 소고기를 먹어서 광우병에 걸릴 객관적인 확률, 유럽과 일본 등의 나라들보다 광우병 발병 빈도가 더 낮은 미국산 소고기에 대해서만 유달리 반응이 격했던 사실, 이미 오래전부터 소에게 광우병을 일으키는 동물성 사료 먹이기를 금지시켜서 광우병은 거의 통제가 가능하고 실제로 발병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었던 사실들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더구나 지금은 미국산 소고기가 실제로 별 문제없이 유통되고 있다. 하지만 그 당시 많은 국민들이 보인 미국산 소고기에 대한 부정적 태도, 정부에 대한 반감의 원인을 그 비합리성에서만 찾기에는 뭔가 이상하다.

 

왜냐하면 정부가 합리적인 정보를 계속 제공할 때마다 사태가 진정되기는커녕 오히려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정부가 합리적인 정보를 계속 제공했다구!!

, 뒷골 땡겨. 명색이 대학교수라는 작자의 생각이 저렇다. 조선일보 좀 그만 쳐봐라.

 

심정중심주의는 무슨 뜻일까? 저자에 따르면 행동보다는 마음을 중시하고, ‘심정을 알아주길 바라는 것이다. 여기서 왜 대한민국 교육 문제를 사례로 드는지 어리둥절하다. 게다가 갑자기 재벌은 아무나 하나라고 하면서 사려 깊게도 재벌 2세들의 외로움을 챙기신다. 지식인들이 재벌 앞에서 아부하기 바쁜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니 그냥 넘어가자. 그렇지만 아래의 문장을 그냥 넘기자니 부글부글 속이 끓는다.

 

어차피 부와 경영권의 세습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불법만 아니라면 그것을 막을 방법도 명분도 사실 없다. 따라서 이제는 경영권 승계를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보지 말고 어떻게 하면 그것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더 건설적이고 도움이 될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대기업 후계자의 성공과 실패는 사회 전체와 많은 사람의 삶에 직간접적 영향을 미친다. ”

 

그러니까. 재벌의 상속권을 인정하자? 지금 수 백 명의 경제학자들이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불평등에 대해 성토하고 있는 마당에 상속을 정당화하자?

멍청한 걸까? 비열한 걸까? 둘 다 인가.

 

복합유연성은 또 무슨 말일까. ‘상황에 맞추거나 상대에 맞추는 등 여러 요인을 동시에 고려해서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을 더 가치 있게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선택을 싫어하는 경향을 뜻한다. 또한 저자는 복합유연성이 생각이나 행동, 감정들이 서로 모순되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것들을 동시에 추구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저런 특성을 유연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래서 한국 사회는 지난 60년간 잘 살아왔고, 앞으로도 잘살 것 같다. 최소한 물질적으로는.....”

 

윗 문장은 허태균 교수가 한국 사회에 대해 전혀 모르고 이 책을 썼다는 걸 증명한다. 저성장, 저금리 시대 너도 나도 비정규직으로 몰려 아사직전이거늘. 금수저로 태어난 것일까.

 

대체적으로 저자는 한국 교육 문제에 대해선 동의할만한 관점을 내비치는데, 아마도 저자가 아이들 교육비의 부담을 체험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자기 돈이 줄어드니 아까웠을 것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복합유연성에서도 한국의 교육 문제를 언급하면서 이런 주장을 내뱉는다.

자사고의 잘못인가?” 혹 저자는 자신의 아이들을 자사고에 보냈던 것은 아닐까. 교육 불평등과 과도한 사교육비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자사고를 유지하자는 게 논리적으로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6번째 한국 사회의 특성은 불확실성 회피.

 

우리는 오히려 옛것을 싹 밀어버리고 새로운 건물과 아파트를 짓는 데만 몰두했다. 그결과 우리의 삶에는 과거의 모습이 없다. 이런 한국 문화의 특성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손에 잡히는 않는 무형의 무엇인가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불확실성 회피라고 할 수 있다.

 

옛것을 없애는 게 불확실성 회피인가. 확실한가?

 

이 책은 확증 편향, 이기적 편향, 기본적 귀인 오류, 가용성 편향, 인지 부조화, 권위자 편향 등등 온갖 심리적 편향의 사례집으로 활용할 만하다.

 

저자는 작금의 인문학을 비판하기 이전에 자신을 먼저 되돌아보는 게 어떨지. 오랜 유학 생활 때문인지 저자는 한국어의 뜻을 정확히 모르신다. 책을 쓰기 이전에 한국어 공부를 다시 해야 한다. 그리고 조선일보와 조선뉴스는 그만 쳐다보고 제발 공부 좀 하자. 살다 살다 이렇게 무식한 심리학자는 처음 봤다.

 

이 책에 대한 추천사로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자. 개가 딸랑거렸으면 한 번쯤은 쓰다듬어 줘야겠지. 김정운은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은 교묘히 회피하고 광대 짓으로 시선을 돌릴 정도로 영악한 사람이니 그러려니 하자.

 

근데 황석영 작가는 이따위 책에 추천사는 왜 썼을까. 제대로 읽긴 읽은 걸까. 이명박 때부터 헛발질 하시더니 영원히 루비콘 강을 건너가신건가.

 

간만에 분노를 태워가며 글을 쓴다.

세네카의 가르침을 떠올리고 화를 가라앉혀야겠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오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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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륀 2016-03-08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지 보고 궁금했던 책인데 안읽어도 되겠네요. 감사합니다.

시이소오 2016-03-08 09:45   좋아요 0 | URL
저도 궁금해서 읽었다가 시간만 날렸네여^^;

해피클라라 2016-03-08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곤소곤) 속이 시원합니다..>_<

시이소오 2016-03-08 10:17   좋아요 1 | URL
(소곤 소곤) 많이 참았는걸요^^;

sb 2016-03-08 1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망작은 좋은 책을 만나기 위한 과정이죠. ㅎㅎ 힘내세요^^

시이소오 2016-03-08 10:37   좋아요 0 | URL
양서를 읽는 것만큼이나 악서를 피해가는 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 ^^

cyrus 2016-03-08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리학자가 사회를 분석하거나 전망하는 내용이 있는 책은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시이소오 2016-03-08 11:27   좋아요 0 | URL
현명한 지적이십니다. 애초에 심리학을 내세워 사회를 말한다는게 가당치도 않지요^^

아타락시아 2016-03-08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가 일베인가요? 피해야 할 책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이소오 2016-03-08 11:54   좋아요 0 | URL
일베인지는 아리까리합니다만 피해야 할 책인것만은 분명합니다^^

2016-03-08 1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3-08 12:27   좋아요 0 | URL
이런 댓글을 읽으면 뿌듯하네요^^ `그래 다른분들의 귀한 시간과 돈을 절약시킨것만으로 쓰레기 책을 읽은 보람이 있구나`하고 말이죠 ^^

깊이에의강요 2016-03-08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 하나를 주시다니요.
너무 후하십니다~^^

시이소오 2016-03-08 12:49   좋아요 0 | URL
이토록 사랑스런 댓글이라니요.
너무 감사합니다~ ^^

곰곰생각하는발 2016-03-08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동태탕처럼 시원하네요.. 시이소오 님의 칼날 서평을 읽으니 갑자기 이 책 무지 읽고 싶네요...ㅎㅎㅎㅎㅎㅎ

시이소오 2016-03-08 13:03   좋아요 0 | URL
제가 이러실까봐 고민했다니까요. `읽지마세요`하면 읽고 싶어지실텐데. 어쩌지하고.
읽으시더라도 되도록이면 빌려서 읽으시길. ㅋㅋ

2016-03-08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덟 문단까지만 읽고 (똥을 미리 밟아주셔서)감사하고 (차마 다 읽지 않아)죄송하다고 덧글 달기 위해 스크롤을 내렸습니다. ^^

2016-03-08 14:18   좋아요 0 | URL
아... 황석영...

시이소오 2016-03-08 14:20   좋아요 1 | URL
잘하셨어요. 굳이 읽을 필요없습니다. 이 책을 안 읽게 하는게 제 목적이니까요^^

samadhi(眞我) 2016-03-08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자(?)가 정부 고위 관료 제의라도 받았을까요? 어차피 읽을 생각도 안 했지만, 성질이 끓어오르는 걸 참아내고 끝까지 읽어낸 시이소오님의 인내에 경의를 표합니다. ㅋㅋ

시이소오 2016-03-08 19:42   좋아요 0 | URL
인내보다 분노가 더 강했습니다. 원래는 100자평만 쓰고 말려고 했는데 읽다보면 계속 열받아서 ㅋ^^;

쿠자누스 2018-06-05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황석영~2

시이소오 2018-06-05 12:43   좋아요 0 | URL
ㅋ 덕분에 오랜만에 다시 읽어봤네요. ㅋ 잼있네요. 감사합니다~

ㅎㅎ 2019-06-10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야말로 최악의 서평이네요. 주진우 후빨러 + 광우뻥 신봉자 + (병적인)삼성혐오자가 싫어하는 책이니 읽어볼만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판단에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회학의 쓸모 -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화
지그문트 바우만.미켈 H. 야콥슨.키스 테스터 지음, 노명우 옮김 / 서해문집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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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밀레니엄 시기를 전후로 친구가 민예총 간사로 있어, 민예총에서 반값 할인으로 여러 강좌를 수강했던 적이 있었다. 강사가 누구였는지, 무슨 강의를 들었는지 지금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은 누구나 알만한 진중권 쌤으로부터 베냐민 강의를 듣기도 했었고, 박준상 쌤으로부터 레비나스를 듣기도 했었고, 김상봉 쌤으로부터 칸트를 듣기도 했었고, 아무튼 잡다하게 이것저것 듣기는 많이 들었다.

(슬프게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 도대체 왜 들은 것일까.)

 

가끔씩 수강생들과 뒷풀이를 하기도 했었다. 한 남자 수강생이 참 아니꼬왔다. (지금은 이유가 기억나지 않는데 아마 잘난 체 한다고 여겼나보다.) 전공을 물었더니 사회학이라고 했다. 그래서 아니, 어따 써먹겠다고 사회학 따위를 하냐, 공부할라면 철학을 해야지!”하고 호통(?)을 쳤던 기억이 난다.

 (내 전공은 철학이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 얍실해.)

 

술 깬 다음날도 쪽팔렸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정말 지지리도 못났다. 지금은 거꾸로 아닌가.

철학을 공부해서 어따 써먹을까.

 

내 관점으로 특히나 포스트모던 철학은 쓸모가 없다. 최근에 읽은 윌리엄 B 어빈의 <직언>을 읽으며 감동을 받았다. ‘, 그래 스토아철학자들처럼 살아야겠다. 이거야말로 철학이지.’ 현대 철학은 현학적인 자아도취에 빠져 목적을 상실한 유목민 아닌가. 따지고 보면 뭐 대단한 걸 주장한 것도 아니다. 단지 누가 더 어렵게 쓰나 배틀을 벌인 것일 뿐. 철학을 그렇게 어렵게 써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들이야말로 대중과 '경계'를 그은 것 아닌가. 특히나 들뢰즈와 데리다. 할 수만 있다면 데려와 취조를 하고 싶다.

 

그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철학에 비하면 사회학은 쓸모 있다.

현대의 가장 핫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인터뷰집이다. 한국의 신뢰할만한 사회학자 노명우가 옮겼다.

 

프리먼 다이슨은 아인슈타인이 말년에 궁극의 이론만을 찾다 맛이 갔다고 말했다. 다이슨이 과학에서 가장 경계하는 것이 그러한 환원주의. 바우만 역시 과학의 자리를 주장하는 사회학을 경계한다. 인간의 삶이 단순히 데이터로 격하될 때, 개별적인 개인들의 경험과 체험들은 무시되기 십상이다.

 

바우만은 라이트 밀즈가 말한 사회학적 상상력을 받아들여 사회학적 해석학을 주장한다. 바우만에게 사회학이란 밀란 쿤데라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커튼을 찢어버리는 세르반테스와 같은 용기. 지금의 세상이 현재 어떠한 모습이든 꼭 그렇게 되어야만 할 그 어떤 필연성도 없다.

 

마거릿 대처의 신념인 TINA(There Is No Aternative)는 거짓이다. 진리가 도그마가 되는 순간 그 어떤 것도 진리일 수 없다. 모든 것을 다시 바라봐야 하고 다시 생각해야 하며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블랑쇼에 따르면 의문이 없다는 건 자유 없음이다.


바우만에게 사회학이란 병속에 든 메시지. 동시대인이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더라도 메시지는 언젠가는 들을 준비가 된 누군가에게 전달 될 것이다.

블랑쇼는 말했다. “인류는 멸망한다. 하지만 인류는 멸망하지 않는다.”.

실패는 일시적이지만 희망은 지속적이다.

 

나는 20대 때 니체의 광팬이었지만 니체가 오늘날까지 이렇게 대중적으로 읽힐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사사키 아타루에 따르면 니체 생전에 니체의 책은 고작 40부를 찍었고, 지인들에게 7부만 전달되었다.

 

오늘날의 세계, 오늘날의 한국은 절대로 완전하지않다. 바우만은 좋은 사회란 자신이 속한 사회가 결코 현재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라고 말했다. ‘지금의 사회가 가능한 최선의 사회라고 말하는 것들에게 퍽 유.

 

나는 이상하게도 바우만의 책을 읽으면 힘을 얻는다.

내게는 바우만이 자기계발이다.

 

우리는 반드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이 작은 책은 해결책을 제시해주지는 않는다. 이 책은 경계경보이자 여론에 대한 호소, 양심에 대한 간청이자, 세계의 처지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고 수동성으로부터 벗어나자는 요청이다. ”

 

- <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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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07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바우만의 《액체근대》를 읽고 힘이 난 경험이... 있긴 있었던가 싶네요. ^^;

시이소오 2016-03-07 20:52   좋아요 1 | URL
그러시면 이 책을 읽으시면 ^^;

cyrus 2016-03-08 11:52   좋아요 2 | URL
To. 쥰님 / 바우만의 문장이 어려워서 힘이 나지 않을 수 있어요. 바우만이 쓴 어떤 책은 번역이 좀 이상해요.. ^^;;

2016-03-08 14: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to cyrus님/ 아, 외부로 발산되기는 어렵지만 내부로 응축되는 힘을 받기는 했는데... 제가 글을 저리 써놨으니... ^^;
 

 

경제의 세계화와 도시의 위기. 사스키아 사센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제국>의 주된 논쟁점은 지구화 시대 국가의 역할이다. 저자들은 회의적이었지만, 나를 포함해 애국자가 많은 한국 사회는 우왕좌왕, 좌충우돌했다. 국가가 세계 자본의 침투로부터 우리를 지켜주길 바라면서도 한류와 민주화 운동 경험의 수출, 대기업의 해외 진출에는 자부심을 느낀다. 이 역시 우리가 미성숙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경제의 세계화와 도시의 위기>는 이런 상황에 대한 안내이자 자본주의의 특정 단계에 대한 빼어난 문제 제기다 부제는 내용을 압축한다. ‘초국적 시장 공간으로서 세계 도시의 성장과 새로운 공간적 사회적 불평등

 

국적과 관계없이 부자는 글로벌 시티즌, 빈자는 난민인 시대다. 일국의 행정부와 정당의 무능력은, 부패와 낡은 인식과 겹쳐 불기피한 현상이 되었다.

 

이상문학전집 1.4. 이상

 

<오감도>에 대한 해석들, 초현실, 절망, 환상, 난해, 공포, 아방가르드, 심지어 민족 독립을 위한 병법까지..... 나는 공포 외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오감도>는 현실적이며 직설적이다.

 

건축학도였던 이상의 공간 감각은 내용과 형식, 모든 면에서 3차원적 사유를 가능하게 했다. 조감도는 근대적 인식론, 원근법의 대표적 방식이다. 원근법은 한 사람의 시선만 허용한다. 그러므로 조감도는 온 세상을 볼 수 있다(고 간주되는)는 신의 의자다.

 

이상에게 피사체와 인식 주체의 관계를 달리 설정하는 탈식민주의적 상상력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누구도 전경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오감도>는 가능했다. 비정상 사회에서의 정신 분열과 예술가의 윤리가 낳은 걸작이다.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피에르 클라스트르

 

<폭력의 고고학>으로 먼저 소개된 정치인류학자 피에르 클라스트르의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는 남아메리카의 53개 부족이 무대다. 저자는 권력, 국가,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빼어난, 사유 방식의 모범을 보여주는 학자다. 생각으로 현실을 판단하지 않고, 현실에서 생각을 만들어낸다.

 

책의 요지는 인간이 만든 가장 진화한 형태의 사회 조직은 국가일까라는 질문이다. 국가 있는 사회(문명 사회)와 국가 없는 사회(원시 사회)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주권이나 관료 체계가 아니다. 권력이 사회에서 의해 통제되는가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독점되는가이다.

 

내부가 동질적인 국가는 없다. ‘하나로서 국가가 모든 비극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조선/한국의 내서널리즘과 소국 의식, 기무라 간


 

이 책에 대한 독자의 반응은 다음 셋 중 하나일 것이다. 웃는 사람(사실, 웃기다), 절박하게 동의하는 사람, 나처럼 이 희비극 앞에 한숨 쉬는 사람, 더불어 이 책의 제목과 대구를 이루는 와다 하루키의 <북조선 유격대 국가에서 정규군 국가로>가 생각났다. 나는 분단 조국의 국민으로서씁쓸했다.

 

비단과 여성을 바쳤던 고려 시대부터 이라크 파병과 고철(무기), 옥수수와 쇠고기 강매까지 사대는 결국 조공, 자발적 종속이다. 이 책은 친미뿐 아니라 한국의 남성성을 이해하는 데 유효하다. 평등보다 사대자소(한미동맹)가 더 현실적이라는 사고방식의 결과는? 일상에서 강자는 미국이 아니라 남성이다. 한국 사회는 사대할뿐 자소에는 무능하고, 사대의 스트레스를 약자에게서 해소한다. 아닌가?

 

세계화 시대의 국가 안보, 베리 부잔


 

나는 이제까지 한국 현대사의 최대 사건을 한국 전쟁과 황우석 사태라고 생각해왔다. 당시 황우석 씨 연구실 근처에서 자연과학을 전공하는 친구가 있어서 사건의 전말을 상세히 들었는데, 처음에는 너무 웃다가 나중엔 우리(사회)는 미쳤구나’. 싶어 비애가 들었다.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의 내란 음모 사건도 마찬가지다. 당원 중에 아니‘RO’ 중에 예비 음모를 구체화할, 레이더에 안 걸리는 스텔스 기술자라도 있는지, 최소 오토매틱 자주포라도 구비했는가?

 

<세계화 시대의 국가 안보>는 여성학이나 평화학 계열의 책이 아니다. 정통 국제정치학 논의다. 저자 배리 부잔은 안보 연구를 안보에서 안보 개념으로 전환시킨 코펜하겐 학파를 대표하는 이론가다.

 

너 빨갱이지?” 이러면 끝이다. 말 한마디가 정치 행위가 되는 것이다. 이 질문을 받은 사람은 사실 여부에 상관없이 사회적, 법적 형을 지게 된다. 물론 나는 이렇게 대응하겠다. “당신이 빨간 안경을 썼으니 세상이 모두 그렇게 보이겠죠.”

 

한국 사회에서 안보는 단지 자신의 공포, 악심, 더러움을 타인에게 뒤집어씌우는 만능 무기로 쓰일 분이다. 분노해야 할 것은 국정원의 만행이 아니라 이토록 간단한 무기에 한없이 취약한 한국 사회다.

 

거짓의 사람들, M 스콧 펙

 

효율성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 국방 전문가들은 현행 징병제 대신 미국처럼 100퍼센트 지원병제를 실시하자고 주장한다. 이들과 이유는 다르지만 일부 진보적 지식인들중에서도 같은 논리를 제시하는 이들이 있다. 위험한 발상이다. 누가 지원하겠는가. 부유한 고학력 집안의 자녀가? 자기 자녀가? 지원병제는 계급 분업이다.

 

M 스콧 펙의 <거짓의 사람들><끝나지 않은 길>과 함께 상담 서적으로 널리 읽히는 책이다. 이 책은 평화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담고 있다. 그는 군대의 존재가 불가피하다면 모든 국민이 복하는 국민 개병, 징병제가 차악이라고 주장한다.

 

지원병 제도는 전쟁과 군대로 인한 제반 논의가 특정 소수 집단의 문제로 축소되는 체제다. 이에 반해 보편적 의무로 운영되는 징병제는 어쩔 수 없이 전 사회적인 관심사가 된다. 아들을 군대에 보낸 가족들은 이들의 안전을 걱정하고 군사가 자신의 문제가 된다. ‘바람직하지 않지만 불가피한 일은 모두가 경험하는 것이 좋다는 역설이다.

 

팍스 코리아나, 설용수

 

나는 평화’, ‘우아’, ‘화해같은 안정 계열의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내 경험에 의하면, 이런 말을 자주 사용하는 이들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남을 열 받게 함. 간혹 타인의 정신을 붕괴시킴. 권력자, 불성실과 무식을 쿨함으로 가장함.

 

팍스 코리아나는 셋 중 하나다. 팍스의 의미를 모르거나 망상이거나 강한 한국의 수사학. 이 책에 의하면 팍스 코리아나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성경과 불경에 그렇게 쓰여 있으며 <정감록><격암유록>에 한반도에 정도령이 나타나 세계 만민을 살린다고 했고, 오바마 미 대통령이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아프리카 비하도 당황스럽지만 팍스 코리아나의 근거가 겨우 자연 주기상 한국 차례라는 것이다. 이런 논리에 설득되기보다는 이런 책을 쓰는 사람의 정체가 궁금한 독자가 더 많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이런 애국저술가들이 상당히 많다. 실은 내가 이런 방면의 책을 매우 좋아한다. 일 주일에 하루는 종일 헌책방에 앉아 있다. , 이 책들은 의자에서 읽으면 위험하다. (웃다가 넘어진다.)

 

드레퓌스, 니콜라스 할라즈

 

어릴 적부터 집에 굴러다니던 책인데 이렇게 의미 있는 책인지 몰랐다. 책날개에는 송건호와 김동길의 추천사가 있다. ‘비교가능한 인물은 아니지만, 여기서는 김동길의 글이 조금 더 울림이 있다. “진실만이 역사를 창조, 발전시킨다.”(송건호), “졸라 같은 양심적인 역할에서 우리 자신에 대한 절박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김동길) 이 의견들은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인식일 것이다.

 

내가 읽은 <드레퓌스>의 교훈은 진실의 승리라기보다는, 간첩이 만들어지는 조건과 방식에 대한 고찰이다. 간첩은 국가 단위의 적을 전제한다. 당시 프랑스는 1870년 프로이센과 전쟁에서 패한 뒤 독일에 알자스로렌 지방을 빼앗긴 직후였다. 복수와 국가 안보 이데올로기가 극에 달한 시기에 간첩 만들기는 너무 쉽다.

 

조작 간첩으로 몰린 피해 당사자의 고통을 차치하고 말한다면, 진짜 간첩과 조작 간첩의 차이는 크지 않다’. 오히려 조작이다 아니다가 주된 논쟁이 되면, 조작은 더 쉬워진다. “간첩은 있다가 강조되기 때문이다. 간첩은 국내 정치의 필요이자 산물이다. 중요한 것은 진짜 간첩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간첩의 정치적 효과다.

 

행복하려면, 녹색 , 서형원, 하승수

 

책은 환경 연구 입문서에 가깝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부(OECD) 회원국 중 빈부 격자 2위국이다.(1위는 멕시코) 덴마크의 2011년 국회의원 선거 투표율은 81.83 퍼센트였는데 2012년 한국은 54.3퍼센트였다. 우리나라는 원전 밀지도 세계 1위 국가다! 아직도 성장=고용논리를 믿는 사람이 있을까. 수출이 10억 원 늘어서 창출되는 고용은 200510.8명에서 2011년에는 7.3명으로 줄었다.

 

며칠 전 투표하지 않겠다는 친구와 언쟁을 벌였는데 내가 이겼다(?). 그녀의 논리는 보이콧도 존중해달라. 그것도 선택이고 실천이다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반박했다. “동의한다. 그렇다면 가만 있지 말고 보이콧 운동을 조직하라. 선거 자체를 무효로 만드는 현실 정치를 하라.” 기권은 선택이 아니다. 개인이 기본적 권리마저 두려워하게 만든 권력의 승리다.

 

나도 좌절을 거듭하다 보니 희망이라는 말에 냉소를 넘어 분노하는 인간이 되었다. 시대의 반영이라고 변명해보지만 이 책을 읽고 부끄러웠다. 저자들이 부럽기도 했다. 나는 오랜만에 스스로 신나 하면서 공동체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이념이 보편의 탈을 쓰고 이데올로기가 될 때 인간을 소외시키지만, 꿈과 고뇌는 우리를 연결시킨다. 녹색당의 당비는 월, 3000원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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