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달나라로 간 소신
이낙진 지음 / 지식과감성# / 2018년 9월
평점 :
서문을 읽긴 했지만 첫 장부터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기대됐다. 목차가 템포로 되어 있다. 첫 장은 Moderato이니 보통 빠르기로 시작하면 될 것 같았다. 개인적으로 느긋한 걸 좋아해서
Ritardando 장이 맘에 든다. 책의 중간 챕터가 '점점 느리게'라니 매력적이다. 더 빠르게가 아니라 점점 느리게라니. 내용이 지루해서가
아니라 나도 모르게 느긋하게 중간 장을 읽은 것 같다. 마지막 장은 본디 빠르기로 a tempo다. 책에는 2018년까지의 이야기가 담겨
있지만, 앞으로의 삶은 어떤 템포일까 생각도 해본다.
여름 휴가 이야기가 있다. 글에서 해수욕장의 짠내가
느껴지고, 호통치며 길안내를 하는 개그맨 박명수 네비게이션의 음성도 돋는다. 저자의 운전과정을 읽자니 내가 그 차에 동승해 있는 기분이 들었다.
휴게소에서 라면을 먹었다는 대목은 정말 짧게 지나갔는데, 그 짧은 문장에서 나는 그 라면의 맛과 냄새, 양 등 오만 가지가 떠올랐다. 지칠 줄
모르고 수영놀이를 하는 저자의 두 딸의 활기참이 느껴졌다. 처가와 함께 휴가를 보내는 온가족의 모습이 생생했다.
첫 장에서 저자는 《남한산성》이 아주 재밌어 아껴
읽었다고 말한다. 나는 최근 JTBC의 드라마 <궁중잔혹사: 꽃들의 전쟁>을 시청중인데 시대적 배경이 바로 조선왕 인조시대다. 김훈
저 《남한산성》도 그렇다. 신기했다. 내가 딱 인조시대 드라마를 보고 있는데 마침 이 책에서도 인조시대 책을 이야기하다니! 별 것 아니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나에겐 이런 우연이 참 신기하게 다가온다. 드라마를 다 보고 나면 《남한산성》도 꼭 읽어야겠단 생각이
든다.
각 장 앞부분은 2007년 가을, 뒷부분은 2018년
봄에 쓴 글이라고 한다. 뭔가 스페셜 에피소드같아서 풍족하게 음미한 기분이다. 그 예로, 앞서 《남한산성》 책을 읽어봐야겠다 생각했는데 뒷부분을
보니 영화 <남한산성>도 있다는 걸 알게 돼서 뜻밖의 정보에 신났다! 그런데 또 신기한 건, 내가 바로 어제 스케일링을 받았는데 바로
뒷페이지에 스케일링 이야기가 나왔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ㅋㅋ 뒷부분엔 강원대학교 후문이 나오는데, 이 또한 내가 살던 고장이니 반갑다.
내가 인생책으로 여기는 한동일 저 《라틴어 수업》을 윤이가 감명 깊게 읽고 엄마께 선물을 드렸다니! 저자의 둘째 따님과 같은 책에 감동 받았다는
사실이 반갑다. 이 책은 반가움 투성이다.
어떤 한 카테고리에 국한되지 않고 의식의 흐름처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이야기가 읽기 편했다. 처음엔 너무 어려운 책이 아닐까 생각했다. 표지가 참 예쁘니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지방대를 나와 졸업 후 10년동안 자기계발이라곤 한 적이 없는 사람인데 반해, 저자의 가족과 지인들은 모두 반듯하고 오래도록 학식을 갖춘 분들인
것 같아 이 책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편안한 분위기로 흘러가 다행이었다.
저자의 두 딸, 은이와 윤이의 출생부터 커가는 과정을
읽노라니 부모님이 생각났다. 우리 엄빠(엄마, 아빠를 줄여 부르는 요즘 말), 나, 그리고 내 동생들. 우리 가족. 저자는 첫째 딸을 살림
밑천이 아닌 ‘삶의 밑천’이라 여겼다. 우리 아빤 나에게 편지를 써주는 일은 없었지만, 첫째 딸인 나를 보며 우리 엄빠도 그리 여겨주셨겠지!
둘째가 첫째에게 느끼는 시샘은 분명 내 동생들에게도 있었겠지! 즐겁고 따뜻한 이야기가 계속 되는데 왜 눈물이 핑 도는지 모르겠다. 화목했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가족을 참 보고 싶게 하는 책이다.
한자가 많이 나오는 편인데 문장이 참 맛깔나다.
오히려 한자가 있기 때문에 그 뜻이 더 잘 전달된 걸지도 모른다. 글만 읽었을 뿐인데 마치 내가 겪은 일처럼 느껴지니 말이다. 그래서 한자가
많이 나오는 게 좋았다. 아무래도 이야기가 담백하고 솔직하기 때문인 것 같다. 모르는 한자가 더 많은데도 문맥상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거의
없었다.
강원대학교 후문은 술집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다.
근처에 부모님과 살던 나도 참 술을 많이 마셨다. 지금은 잘 가지 않지만 어쩌다 한 번 가도 여전히 술을 5차까진 거뜬하게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근데 또 이렇게 술집이 많아도 캠퍼스 아무 곳이나 앉아 소주 몇 병과 과자 한 봉지면 넉넉했다. 그땐 젊어서 그랬다. 이런 자잘하고
평소 까먹었던 추억들을 새록새록 돋게 하는 책이다.
말로만 듣고 영화로나 접하던 데모가 춘천 시내에서도
이루어졌다니 놀랍다. 내가 대학생활을 졸업하고 나서 몇 년이 지나서야 서울과 이어지는 경춘선 전철이 생기고 나름 수도권인 양 사람이 많이 오가는
곳이 되었는데, 지역이 발전하기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놀랍다. 역시 그런 일은 시골이나 도시인 것이 관계없는 것일까. 내가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배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오래 전엔 읽으면 죄가 되는 글이라니... 저자는 이것저것 경험했으나 깊이 있게
파고들지 못한 대학생활이라 말하고 있다. 나는 경험 부족, 깊이 부족이라 더 아쉬운 마음이 든다.
매 챕터마다 언급되는 모든 것들에 나도 막 떠오르는
것들이 많은 걸 보니 ‘인생 선배’의 삶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 이 책은 참 진솔하다. 가감없이 정보와 사실과 진심을 전하고 있다. 다양한
생각이 들게 한다.
아내에게 쓴 연애 편지를 이렇게 공개할 수 있음이
부럽다(?). 가장 맘에 드는 대목이다. 왜그런진 모르겠는데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읽는 기분이 들었다. 연애편지에서조차 글쓰기 장인의
노련함이 느껴졌다. 저자의 필력, 생각, 마인드가 부럽다. 곧지만 뻗대지 않는 그런 느낌이다. 한 사람의 마음이 온전히 담겨 있는 그런 편지를
나도 받아보고 싶다. 그것이 연애편지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편지 안에서 느낄 수 있는 많은 감정들을 읽는 게 즐겁기 때문이다.
‘가난하지만 추하지 않고, 공부가 크지 않지만 천하지
않고, 너그럽지는 못하더라도 협량치 않은 삶이 나의 바람이다.’는 저자의 소신이 와닿았다. 아주 맘에 드는
문장이다.
박인기 경인교육대학교 명예교수가 발문에서 ‘경험과
기억을 여러 중층으로 글 속에 구축해 놓은 것만큼이나 그것을 음미하는 느낌과 해석과 의식도 다채로울 것을 요청하는 것이 이낙진의 글’이라는
대목에서 소름 돋았다. 독자로서의 나를 되돌아보게 한다. 과연 나는 이 책을 ‘소신있게’ 흡수했을까.
발문을 마지막으로 책을 덮고 나니 머리가 띵해오며
존경심마저 든다. 나는 생각은 많지만 좀 짧은 경향이 있어 스스로 자주 혼란스러워 한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어떻게 표현해내질
못한다. 책을 읽고 쓰는 리뷰도 자꾸만 고치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또 의외로 많이 고치진 않는다. 어떤 말로 고쳐도 다 표현이 안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주된 이야기는 뒷 표지에 적혀있듯 ‘가족 가치에 대한 깊고 든든한 인식’이다. 각 챕터마다 많은 것이 떠올랐고, 그것들을
되돌아보기도 했다. 나는 추가로 생각을 정리하는 법을 조금 배운 것 같다. 유익한 책이다! 은이와 윤이는 이 책을 어떻게 읽었을까? 아내분은
어떤 기분일까? 나는 이렇게 많은 생각에 잠길 수 있는 책이 좋다.
초반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책을 소파로
불렀다'. 내 기준에선 아주 신박한 표현으로 다가왔다. 여러분도 마음이 단단해지는 <달나라에 간 소신>을 어디서든 불러보시길
바란다!
그린글씨 Grin
Calligraphy
blog:: http://blog.naver.com/lovethey102
facebook:: www.facebook.com/seedglyph
instagram:: www.instagram.com/grin.zi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