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현대철학연습 발제. 심혜련, 『20세기 매체철학』 4장 요약.>

   1990년대 초반 대중문화에 관해 성찰했던 이론가들에게 주요한 관심사는 사진
, 영화와 같은 것들이었다. 처음 논쟁은 이런 수단을 사용해 만들어진 작품이 예술인가 하는 문제에서부터 시작되었겠지만, 이는 점차 대중문화라는 현상 자체 그리고 그 속에서 이런 매체들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관해 분석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 보았을 때 사진이나 영화 등의 매체가 대중문화의 중심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왠지 옛스러운 측면이 있다. 이는 이들이 대중문화라는 현상을 매우 잘 분석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언적 성격 또한 가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생각이 드는 까닭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에서 대중문화의 중심에 자리잡은 미디어가 사진도 영화도 아닌 텔레비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동시대의 대중문화에 관해서 그리고 미디어에 관해서 분석하려고 한다면
, 텔레비전을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귄터 안더스는 텔레비전에 관해 철학적으로 분석하려고 한 선구적인 철학자로 간주된다. 그는 유대인으로 1902년생이다. 1923년에 후설의 지도 아래 <논리적 문장에서 상황범주의 역할Die Rolle der Situationskategorie bei den logischen Sätzen. Erster Teil einer Untersuchung über die Rolle der Situationskategorie>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 시기에 동료이자 선배인 하이데거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졌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와 1929년에 결혼했으나 37년에 이혼했고, 이후 두 번의 결혼을 했다. 나치 정권을 피해서 1933년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갔고, 2차 대전 종전 이후 귀국해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다. 대표작인 <인간의 골동품성(구식성)>1권이 1956년에, 2권은 1990년에 출판됐으며, <팬텀과 매트릭스로서의 세계>1권에 포함되어 있다.


   그가 텔레비전에 관해 문제삼은 것은 우리가 텔레비전을 통해 보는 이미지의 존재론적 위상이었다
. 그는 그 이미지가 실재와 가상이 뒤섞인, 우리가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했던 이상한 성격을 가진다고 분석한다. 또한 이 이미지들이 텔레비전을 보는 우리의 세계관 자체를 재구성하고 있으며, 이는 실재에 대한 외면이며 더 나아가서는 실재의 상실이라고 결론짓는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미디어에 관해 비관론적인 입장을 취한다고 볼 수 있다. 에코의 분류법에 따르면 그는 미디어 '종말론자'("종말론적 지식인들은 문화 상품의 소비자들을 대중이라는 획일적인 물신화된 개념으로 격하시킬 뿐 아니라, 대중들이 모든 귀중한 예술 작품들을 단순히 맹목적인 숭배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다고 비난하지만, 동시에 자기 스스로도 대중 문화 상품들을 물신화된 개념으로 격하시킨다. (...) 이에 대한 구조적인 특징만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대중문화 상품 전체를 통째로 부정한다." "<텔레비전은 세상을 환영으로 몰고 간다. 따라서 시청자의 바람직한 반응이나 모든 비판적인 대응을 가로막는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는 텔레비전이 자기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하여 여전히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프로메테우스적인 부끄러움
- 인간의 상황에 관한 유비로서의 프로메테우스

 

   프로메테우스적 상황이란 인간이 어떤 처지에 있는가에 관한 안더스의 비유다. 이 비유엔 단지 인간과 미디어의 관계 뿐만 아니라, 인간과 기술 전반에 관한 그의 통찰이 담겨있다. 인간은 기술을 쟁취하고 통제한다. 기술은 자신의 논리에 의해 독자적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지기만 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기술과 인간 사이의 전도가 일어나고, 기술지배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런 전도 이후에 기술은 인간을 자원으로 삼아 더욱 폭발적으로 팽창하고, 인간의 종속은 더욱 심화된다. 인간은 근대 이전의 도덕적, 윤리적 사고를 통해 다시 기술을 자신의 통제 아래 두고자 하지만, 이미 기술은 저 멀리 가버리고 없는 상태다. 인간과 기술 사이의 이런 차이가 바로 프로메테우스적 격차이며, 여기에서 겪는 인간 존재의 성격이 바로 프로메테우스적인 부끄러움이다. 그리고 이렇게 기술보다 뒤쳐져 있는 인간의 상태를 가리켜 '골동품성'이라고 부른다.


   미디어와 기술에 관한 그의 분석은 하이데거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이 분명하다
. 그러므로 그의 주장을 하이데거의 기술 개념과 비교해서 알아보면 더욱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현대 문명의 기술에 관한 그의 생각은 <기술에 대한 물음>이라는 강연문에서 잘 나타난다. 여기에서 기술 개념은, 처음엔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동원되는 수단으로 정의된다. 이것은 현대 기술 또한 마찬가지여서, 지금 우리가 이 시대에 사용하는 여러 장치들 또한 특정한 목적을 위해 설계된 장치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이내 여기에 함축되어 있는 더 깊은 의미
, 즉 기술 일반의 의미를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설을 인용해 설명한다. 질료인, 형상인, 목적인, 운동인(작용인) 가운데 기술은 작용인이다. 각각 독립적일 때는 아무것도 아닌 질료, 형상, 목적을 통합하여 무언가를 우리 앞에 드러내주기 때문이다("위에 열거한 세 가지 방식들을 숙고하여 한 군데에 모은다. 숙고한다는 말은 레게인, 로고스이다. 이 낱말은 아포파이네스타이에, 즉 앞에 내보임에 근거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기술은 없던 것을 있게끔 해주는 탈은폐의 방식, 즉 우리에게 진리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고대 그리스어에서는 이런 측면에서 기술이라는 말에 제작술(포이에시스)이라는 의미를 강하게 반영하였다. 기술은 없어지기 쉬운 것들을 좀 더 강하게 붙들어매는("금방 이렇게 저렇게 모양새를 바꾸어버릴 수 있는") 제작술이다.


   그렇기 때문에 탈은폐의 방식은 한 가지로 고정되어 있을 수 없다
. 그러나 현대 사회는 특정한 방식의 탈은폐만을 강조하고, 이를 재촉한다("그러나 오늘날의 농토 경작은 자연을 닦아세우는,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경작 방법 속으로 흡수되어버렸다." "오히려 강 물줄기가 발전소에 맞추어 변조되었다. (...) 즉 수압 공급자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발전소의 본질에 맞추어 존재하고 있는 셈이다.) 이로써 그에게 닦달(닦아세움)은 현대 문명의 기술의 본질적 성격이다. 닦달이 탈은폐의 방식인 것만은 분명하기 때문에, 이는 허위가 아니다. 인간은 이 탈은폐를 목도하는 사람이기에 이것을 지배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런 탈은폐의 방식에 자기 자신조차 탈은폐당한다("이렇듯 주문 요청하는 탈은폐로서의 현대의 기술은 단순한 인간의 행위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으로 하여금 현실적인 것을 부품으로서 주문 요청하도록 인간을 닦아세우는 그 도발적 요청 역시 드러나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한 도발적 요청은 인간을 주문 요청에로 집약시킨다. 그리고 이렇게 집약시키고 있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현실적인 것을 부품으로서만 주문 요청하는 데 몰두하게 한다.") 그는 이런 현상이 기술을 수단으로 이용하기 시작한 인간이 겪어내야만 하는, 일종의 역사적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기술문명에 관한 안더스의 분석은 하이데거와 유사하다
. 그러나 하이데거는 이 강연의 말미에서 이런 비관적인 상황을 넘어서는 개념으로 시적인 탈은폐로서의 예술을 제시한다. 즉 고대의 기술 개념(테크네)과 제작술 개념(포이에시스)를 상기하고, 그런 자유가 탈은폐를 목도하는 자들의 주권임을 인지할 때, 인간은 기술을 넘어서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기술에는 이런 측면이 그 개념적 측면에서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다. 반면 안더스에게서는 이런 측면이 전혀 보이지 않는데, 이미 기술(기계)에 종속되고 기술의 일부가 된 상황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술은 전체이며, 전체는 무한이고, 인간은 이를 파악할 수 없다. 파악할 수 없다면 통제할 수도 없다. 이것이 지금 인간의 상황이다("예전의 플라톤의 대화편에서부터 하이데거의 '적소전체성' 분석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행위와 제작은 행위 속에서 실현되어야 하는 형상을 따라 해야 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이러한 만들어지는 것(또는 행위 속에서 도달되는 것)의 에이도스는 미디어적 행위에서는 '제거된다'.").

 


   팬텀이 지배하는 텔레비전
& 매트릭스가 된 세계와 그 세계 안에서의 대중

   - 텔레비전 영상에 관한 존재론적 분석, 텔레비전은 어떻게 대중을 주조하는가

 

   텔레비전 영상이 우리에게 주는 영향은 매우 크다. 안더스는 이 영향이 선험적 영역으로까지 확장되어, 인간의 감성형식 나아가서 존재의 문제까지 결정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텔레비전은 일종의 '이미지의 압도적인 홍수'로 파악할 수 있다. 텔레비전 방송에 내보내기 위해 수없이 많은 곳에서 수없이 많은 이미지들이 생산되고, 전파를 통해 배포된다. 여기에 적응하기 위해 인간은 문자성을 포기하고 이미지성을 획득한다. 이들이 '탈문자적인 문맹자 집단', 즉 아이콘매니아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목격한 홍수같은 이미지들로 실재를 대체한다. 이런 반복적 이미지들이 소비되고, 또 실재를 대체할 수 있는 이유는 근대적 이성의 특징 때문이다("자연과학의 근대적 인식론에서는 모든 것이 실험적으로 반복될 수 있어야만 한다고 보았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상황 하에서는 유일성은 점차로 사라져 버린다. "오로지 유일무이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조지 버클리의 존재와 지각의 동일화 명제, (...) "존재한다는 것은 소유된다는 것이다"라는 강력한 명제로 대체된다. (...) 관광여행자들에게 일관되게 중요한 것은 "거기 있다"가 아니라 휴가사진을 통해 제시되는 증거, "거기에 있었다"이다.").


   텔레비전의 이미지가 이렇게 실재를 대체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된 존재론적 근거는 무엇일까
? 이에 대한 안더스의 대답이 바로 '팬텀'이다. 텔레비전의 이미지는 실재하는 세계를 촬영한 것이 분명하고, 그리고 그것을 내가 지금 여기에서 수상기를 통해 보고 있다는 것 또한 분명하지만, 사실 그것의 시공간적 실재성은 분명하지 않다. 카메라와 전파, 수상기를 통해서 매개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고 있다는 것 만큼이나 분명한 것은 내가 텔레비전이 보여주는 것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 세계에 관해 알 수 있는 방법은 이런 매개를 경유하는 것 뿐이다. 수상기가 내보내는 영상의 존재론적 지위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인데, 이 때문에 텔레비전의 이미지는 존재하는 듯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 듯 존재하는 유령에 유비된다.


   텔레비전은 인간의 생물학적 감각이 닿을 수 없는 곳의 실재를 매개한다
. 이것이 실재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텔레비전이 그것에 접하는 유일한 창구라는 점이다. 이런 이미지의 중첩들은 생물학적 감각의 방식에도 영향을 미치고, 이내 인간의 세계이해를 완전히 대체해버린다. 이미지의 홍수로 만들어진 이런 세계를 안더스는 매트릭스라고 표현한다. 수상기를 통해 발사되는 이미지의 존재론적 성격이 모호하기 때문에, 여기에 기반을 둔 매트릭스의 존재론적 성격 역시 모호하다. 그러나 이 이미지들은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실재이다. 더 나아가 실재와 가상, 실제와 텔레비전 화면 사이의 경계 자체가 붕괴된다. 이런 세계에서 무언가를 결정하는 주체는 텔레비전의 영상이 된다. 개성은 채널 선택권으로 환원된다. 우리는 텔레비전이 걸어주는 말을 듣거나 듣지 않는 소극적 선택 이상의 것을 할 수가 없다("우리가 세계롤 가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우리에게 올 때, 우리는 더 이상 세계 안에 있을 수가 없다.").

 


   안더스 이후 텔레비전에 대한 논의

 

   안더스가 텔레비전을 보았던 것은 1940년대 후반이다. 이후 프로그램의 성격이나 제작방식, 제작기술 등 방송환경은 매우 많이 바뀌었다. 이에 따라 텔레비전을 긍정적으로, 또는 최소한 중립적으로 분석하는 학자들 또한 많이 등장했다. 대중문화에 관한 부정적 시선을 '오웰주의적 환상'이나 '대중에 관한 물신화'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상당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학문적인 관심에서 비껴있는 텔레비전을 본격적인 철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그의 논의는 선구적인 측면이 있다. 설령 그가 아주 부정적이고 혹독한 평가를 내렸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안더스 이후 텔레비전에 관한 연구는 크게 두 갈래로 나눠진다. 하나는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여러가지 내용들을 분석하는 경향이다. 레이먼드 윌리엄스 등은 문화연구의 일환으로서 텔레비전과 텔레비전을 중심으로 한 대중문화 현상을 고찰한다. 또한 니클라스 루만은 대중문화 현상의 중심에 텔레비전이 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인정한다. 다른 하나는 텔레비전이라는 미디어 형식을 주목하는 경향이다. 실재와 가상 문제는 보드리야르에 의해 반복되고 있으며, 현상학적 탐구라는 방법은 플루서에 의해 이어지고 있다.

 

덧댐. 본문의 내용이 너무 개괄적이고 그 장에서 다루려는 사람이 아닌 다른 학자들에 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다른 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체이론이나 매체미학, 매체철학을 공부하려는 분들께 이 책을 권해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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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yke 2013-09-28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