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론 한길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43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지음, 성염 옮김 / 한길사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키케로가 『법률론』에서 보여주는 가장 재미있는 사고방식은 법(ius)과 법률(lex)의 구별일 것이다. 법률은 사회에서 실제로 제정돼 집행되는 중인 규칙을 의미하고, 법은 자연으로부터 부여받은 이성이 가리키는 해야할 일 또는 해선 안될 일에 관한 법칙을 의미한다. 법은 법률을 구속하지만 동시에 법률은 법의 구현이기도 하다. 그래서 대체로 옳다. 때로는 법에 어긋난 법률이 제정되기도 하는 것이 인간의 일이기 때문에, 이런 법률은 얼른 폐지되어야 한다고 키케로는 생각하는 것 같다.


또한 법은 인간이 지닌 이성이 가리키는 일이면서 인간의 본질인 이성이 가장 잘 구현된 대상으로 간주되기에, 법(률)과 법(률)을 따르는 행위는 그 자체로서 가치있는 일이다. 즉, 법은 다른 목적에 봉사하지 않는다. 어떤 종류의 유용함 때문에 법(률)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그 유용함에 법이 방해될 경우 법(률)을 폐지하겠다는 선언이 되는데, 키케로는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을 기껏해야 ‘약삭빠른(?)’ 사람들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법률론』의 총 3부 중 1부의 논의는 이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2부에서는 1부의 논의를 한 번 더 반복함과 동시에 제사를 지내는 것에 대해서 길고 지루한 설명을 시도한다. 이 부분은 내가 정말 이해를 했나 싶을 정도로 복잡하고, 그래서 대충 읽고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은 이런 것이다. 제사에 대해서 이토록 복잡한 논의를 하는 까닭은 이 절차가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중요했기 때문일텐데, 이 사실은 21세기의 한국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도 설이나 추석 때가 되면 허례허식이니 하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가? 이젠 ‘허례허식’ 담론 자체는 조금 덜한 대신 그 “예의”를 위한 노동의 편중 쪽으로 논란의 지형도가 바뀐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아마 제삿상이나 차례상 차리는 법에 관해서 시시콜콜하게 이야기를 하게 된다면, 우리도 이 정도의 이야기는 쓸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재산을 가장 많이 물려받은 사람이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이 때도 똑같았구나 싶은 것도 소소한 웃음포인트였다.


3부에서도 여러 가지 주제가 등장하지만, 눈에 띄는 토론은 두 가지다. 첫째는 호민관의 지위에 관한 것이다. 민중 전체가 정치에 직접 관여하는 것 자체를 방지하기 위해 통령이라든가 원로원 등의 여러 의사결정구조를 설계했음에도 왜 다시 호민관을 통해서 민중 전체의 의지를 제도화해야 하는가? 키케로의 반대편에 서있는 퀸투스는 악행을 저지른 호민관의 이름을 나열하며 이런 현상이 이 제도의 필연적 결과임을 역설한다. 반대로 키케로는 몇몇 나쁜 결과들만을 놓고 제도의 선악을 논할 수 없음을 우선 강조하며, 호민관을 통해서 얻는 긍정적 효과가 훨씬 더 크다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 민중의 대표를 세움으로써 오히려 민중의 무질서한 정치적 열기를 잠재울 수 있고, 이들이 정제된 상태로 공동체의 의사결정과정에 반영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제도의 이름은 다르지만, 이런 기능은 현대에는 대체로 정당이 담당하는 기능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여전히 정당이 무엇을 해야하는지에 관해서 키케로가 지적하는(그리고 숙고했던) 갈등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점에서, 신기하면서도 지금 우리에게조차 여전히 의미있는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눈에 띄는 다른 토론은 3부의 말미에 등장하는 투표에 관한 것이다.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것일까 자신은 없지만, 키케로는 대체로 의사결정과정에서 책임자들에 한해 공개투표를 지향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 우리의 언어로 말하면, 국회의원들이 (또는 행정부와 사법부도 포함해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그 결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어떤 입장을 지니고 있었는지 공개해야 된다는 뜻일거다. 선거에 관해서 우리 사회의 상식에는 두 가지 직관이 충돌한다. 비밀투표를 해야 자신의 솔직한 입장을 반영할 수 있다는 직관과, 자신이 견지하는 입장이 떳떳하다면 자신의 입장을 굳이 가릴 필요가 없으니 투표는 공개적으로 해야한다는 직관이다. 우리 사회 또한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나름의 절충점을 찾은 것 같긴 하다. 그럼에도 절충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기에, 우리와 전혀 다른 사회를 살았던 사람들의 논의를 지켜보면서 우리의 타협점이 지닌 의의와 한계를 키케로를 읽으며 다시 돌아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선을 흉내내는 쾌락이 모든 감관에 깊이 스며들어 우리를 기만하기도 한다네. 그것이 모든 악의 모체가 되지. 그것의 유혹으로 부패한 연후에는 사람들은 무엇이 자연본성상 선한 것인지 제대로 분간하지 못한다네. 자연본성상 선한 것들에는 이런 달콤한 맛과 매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지. - P93

무릇 사물을 비판함에 선한 점들은 제외하고 악한 점들만 열거하고 폐단들만 선정하는 것은 불공정하네.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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