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진 이유 - 고기를 굽기 전, 우리가 꼭 생각해봐야 할 철학적 질문들
최훈 지음 / 사월의책 / 201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채식을 하는 철학자는 이중의 부담을 떠안았다. 첫째는 채식이 취향이 아닌 윤리라는 점을 논증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꼭 그래야하는 것인가 싶긴 하지만) 채식에 대한 자신의 주장과 자기 생활의 모습을 일치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고기를 먹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사회 속에서 이 두 가지를 모두 수행한다는 것은 꽤나 부담일테다. 첫째를 시도하면 인신공격이 들어오고(자기 취향을 강요하는 나쁜 사람), 둘째를 시도하려다 한 번이라도 삐끗하면 또 다시 인신공격이 들어온다(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 그래서 철학적으로 채식을 논하는 사람들을 언제나 호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내가 못하는 것을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내가 아는 한 이 저자는 학문의 영역에서 채식을 다루는 몇 안되는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또 채식의 근거로 공리주의라는, 윤리적 판단에 있어서의 대원칙을 내세우고 있기도 하다. 그 입장은 이 책에서도 잘 드러난다. 거의 모든 주장과 논증에 있어서 ‘고통’을 줄이는 문제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통을 줄이는 행위는 대체로 옳은 행위이고, 고통을 늘리는 행위는 그르다. 그른 행위는 하면 안되는데, 육식은 고통을 늘리기 때문에 하면 안된다.


육식은 다양한 방향에서 고통을 늘린다. 우선 죽음을 가져오며 고통을 늘리고, 사육환경을 동물에게 맞지 않는 방식으로 개조함으로써 고통을 늘린다. 사람에게 돌아갈 곡물을 동물에게 비효율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동료 인류의 고통을 늘리고, 상대적으로 유해한 것처럼 보이는 고기를 생산함으로써 그것을 먹는 개인의 고통을 늘린다. 저자의 주장에 대체로 동의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내가 윤리적 판단에서 어떤 대원칙을 갖느냐 하는 것인데, 안타깝게도 나는 공개적인 공리주의자이다. 이 글을 쓰기 방금 전 저녁으로 설 명절에 사용하고 남은 갖가지 전들 - 햄이 들어간 꼬치, 동그랑땡, 새우튀김, 육전 - 과 삶은 돼지고기를 먹었다. 살면서 한 번도 채식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일도 없다. 하지만 저자의 모든 논의에 동의한다. 그러니까 나는, 지속적으로 나쁜 일을 저지르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 바로 그 안타까운 지점인데, 스스로를 나쁜 사람이라고 쿨하게 인정하고 싶지만 사람은 원래(본성적으로!!!) 그렇지 못한 존재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이 책의 논의에서 구멍을 찾으려고 애썼다. 동물의 고통을 확인하는 문제에서 우리는 추정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 추정의 근거는 행동이다. 행동을 통한 추정에는 상상이 너무 많이 개입할 뿐만 아니라, 저자가 물고기에 대해서 논할 때처럼 추정된 대상이 실재하는가에 대한 그럴듯한 대답이 될 수 없다. 축산업에 대한 논의는 ‘그래서 “과학적” 생산을 포기하고 원시 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인가?’ 라는 의문이 든다. 이것 또한 인류의 진보의 결과가 아니겠는가? 오히려 가리지도 않고 남김없이 다 먹어치우는 것보다야 종이 한정적인 게 낫지 않을까? 인격동일성 논의를 우격성(동격성이라고 해야할까)에 적용해서 고통의 문제를 논의하는 것이 대체 어떤 함의가 있을까? 등등의 생각들.


하지만 생각이 꼬리의 꼬리를 물다, 어느 순간 인정해야만 했다. 그냥 나는 나쁜 사람이다. 공리주의자인 한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결국 궁극적 문제는 저자가 언급하는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제, ‘아크라시아’의 문제로 돌아가는 것 같다. 육식하는 사람은 진짜 공리주의자인가, 육식을 하면서 동물의 행복을 인정한다고 진지하게 말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 말이다.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 사이에서 어떤 입장을 편들든 간에, 결국 나는 동물의 행복을 받아들이지 않거나(못하거나) 동물의 행복을 알지 못하는 사람인 것이다. 즉,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