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해리 세트 - 전2권
공지영 지음 / 해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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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한국문학의 무진은 두 개다. 김승옥의 무진, 그리고 <도가니>와 <해리>의 배경인 공지영의 무진이다. 두 소설에서 모두, 안개는 사람들의 눈을 가려버린다. 시각은 사람이 가장 많이 의존하는 감각이며 그래서 사물을 분별하는 능력을 상징한다. 때문에 무진의 끈적한 안개는 사람들이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만든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혼돈 속에서 벌어지는 욕망의 노력은, 깊지만 더러운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몸부림이 될 수 밖에 없다. <해리>는 그 미끌거리는 안개 속에서 정신없이 몰락하는 사람들의 아귀다툼에 관한 이야기로 내게 다가왔다.


<해리>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은, 욕망에 충실하다 못해 그걸 너무 빤한 방식으로 전시한다. 피해자로 등장하는 또는 자신을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등장하는 몇몇 또한 욕망의 문제에 너무 강하게 얽혀있어서, 그들의 피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고민해야 했다. 나는 단지 관찰자 시점이기에 이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서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만약 누군가 내 삶을 3인칭의 시점으로 관찰하고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 내보이기 싫은 나의 행동들 또한 욕망의 결과물로 바라볼 것이 아니겠는가. 


어떤 이들은 욕망 앞에선 선과 악이 없다는 하나마나한 말을 인생의 정답이랍시고 내밀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욕망을 편취하는 의도와 방식은 여전히 문제삼을 수 있고, 그에 따라 선과 악의 스펙트럼 위에 어떤 개인을 올려놓을 수 있다. 이것은 욕망 자체에 대한 판단과는 별개의 문제다.


이런 의미에서, 제목과 달리 이 소설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진짜 대상은 주인공인 해리가 아니라 <해리>를 둘러싼 남자들이다.


그들은 해리가 “꼬셨고” 자기들은 그 “남자라면 누구라도 거절할 수 없는 치명적인” 유혹에 “넘어갔”으며 그래서 해리를 “나쁜 년”이라고 평가한다. 그 모습이 해리의 일부분인 것도 분명한 탓에, 그리고 피해자들의 증언을 수집하는 이 소설의 서사 구조 때문에, <해리>의 대부분은 해리에 대한 비난으로 채워져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구성은 트릭이다. 가만히 뜯어보면, 이 소설 속 남자들은 해리와 육체적 관계를 맺을 거라는 근거없는 망상에 ‘자발적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 관계에 동반되는 모종의 시술을 단 한 번만 받고 손을 뗀 사람도 이 소설엔 없다. 즉, 그들은 욕망을 달성하려는 의도와 방식이라는 측면에서 언제나 적극적이었고, 그렇기에 책임도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해리더러 나쁜 년이라는 말만 반복한다. 내 관점에선, 이것이 “해리성 인격 장애”의 좋은 사례인 것만 같다.


더군다나 해리는 혼자인 반면 남자는 다수다. 다수는 구조를 형성한다. <해리>에서 해리성 인격 장애는 몇몇 개인의 특성에서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 징후가 된다. 정치적 진보와 보수, 나이의 많고 적음, 지위의 높고 낮음이 모두 사회의 산물이라면, 사회에 속하는 모든 사람들이 이 징후를 나눠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할당된 징후는 다수의 실천 속에서 권력이 되고, 사회의 바깥을 “모럴”의 이름으로 응징한다.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 것은 누구인가, 과연 “모럴”이 아닌 하느님의 공의에 따른 합당한 처분을 받은 자가 이 이야기 안에 있었던가? 해리의 행적을 옹호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한 쪽은 구조적 피해와 그에 대한 복수라는 수동적-반응적 동기로 인한 행위였다면, 다른 한 쪽은 그 구조를 체화하고 그 권력을 능동적으로 휘두른 행위였다는 점을 잊어선 안된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눈은 안개에 가려져있고, 권력은 우리를 짓누른다. 어떻게 단순히 허우적거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있을까? 서유경 센터장은 “지루함”이라는, 흥미로운 키워드를 제시한다. 선은 창조하고, 악은 반복한다. 그래서 선은 신선하고, 악은 지루하다. 머리가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권력은 기존의 것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기에 필연적으로 반복을 명령한다. 우리는 여기에 저항할 수 있다. 이나처럼, 내면의 트라우마를 덜 복기하는 방식으로, 계산하는 머리가 아닌 하느님의 숨결이 스며든 몸의 반응으로, 성욕의 충족이 아닌 사랑의 충만이 존재하는 관계로.


이나는 그렇게 한 발짝 선의 세계로 다가가고, 해는 우리의 눈을 가려왔던 안개를 걷어 새 것과 헌 것을 나눌 수 있게 만든다. 그리고 아마, <해리>를 읽는 우리도 때로는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 책의 결말을 혁명적인 변화가 없는 질척한 현실이 반영된 결과물이라고만 해석할 수는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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