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에 대한 옹호 서양 철학의 논문들 6
주디스 자비스 톰슨 지음, 김혜연.신우승 옮김 / 전기가오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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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중절(이 글에선 낙태라는 표현을 썼지만 내 글에선 이 단어를 쓰려고 한다)을 둘러싼 논쟁엔 너무 많은 결이 겹쳐있다. 형이상학, 윤리학, 사회학, 정치학의 층위가 각자의 자리를 빼곡하게 차지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서로가 서로의 영역을 마구 침범하며 뒤얽혀있다. 그래서 이 주제로 논쟁이 벌어질 때마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거나, 상관없는 문제를 마치 카운터블로우인 것 마냥 너절스레 늘어놓고는 내가 이겼다고 외치는 정신승리가 벌어진다. 이런 논쟁의 장에서 주디스 자비스 톰슨의 『낙태에 대한 옹호』는 윤리학적인 결만 잘 발라내려 노력했다는 점만으로도 고전의 반열에 올라갈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임신중절을 반대하는 여러 논리에 맞설 수 있는 옹호자의 논리로 두 개의 직관과 하나의 논리를 제공한다. 우선 그의 직관은 소유라는 개념에 호소한다. 즉, 한 인격이 가장 정당하고 우선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무언가를 꼽으라면 그것은 신체에 대한 소유가 될 것이다. 또 다른 직관은 권리라는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완성된다. 권리란 권리주체가 개진하는 어떤 주장이 도덕적/정치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보증수표와 같은 기능을 하는 상징물이다. 신체에 대한 소유는 정당한 권리주장의 대상이다.


여기에 기초한 하나의 논리는 권리주장과 다른 종류의 도덕적 주장의 분리에 관한 생각이다. 즉, “b는 a에게 x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문장과 “a는 b에게 x를 해야 한다”는 문장의 의미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만큼 권리는 단순한 도덕적 개념 이상의 특수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 톰슨의 생각이고, 여기에 함축되어 있는 것은 아마도 배타적 경계설정이라는 발상인 것 같다. 만약 이 둘이 나눠지지 않는다면, 엄마가 아들에게만 준 초콜릿 10개에 대한 “권리”가 누나에게도 있으며 그 몫을 누나가 동생에게 요구할 자격이 있다는 황당한 주장에 이르게 된다. 초콜릿 10개는 증여를 통해서 그 소유주장이 아들에게 옮겨간 것이 분명한데도 말이다. 이 둘의 혼동은 논문에서도 언급되었듯 착한 사마리아 인이라는 윤리학적으로 까다로운 문제 또한 발생시킨다.


그 외에도 이 논문에서 건드리고 지나가는 윤리학적 주제는 많다. 작위와 부작위의 문제(직접 죽이는 것과 죽도록 내버려두는 것의 도덕적 차이), 도덕적 주장의 보편성 문제(“나는 싫다”는 문장과 “모두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문장의 차이, 내 결정과 다른 사람의 결정이 차이가 있을 때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는 분석적 틀의 제공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 책임 소재의 분유에 대한 사고관(“-수 있었다”는 반사실적 가정을 행위의 인과관계에 개입하는지 여부) 등등이 모두 학문으로서의 “철학”에 포함될만한 문제들이다.


이렇게 많은 문제들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현실의 문제에 대입해본다는 점에서 이 논문은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는 결론을 톰슨과 공유하는 만큼 그가 제시한 거의 모든 각론에서 그와 반대되는 의견을 가지고 살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가 기대고 있는 두 개의 직관, 즉 소유라는 개념이 어떤 방식으로 확정되고 그것이 권리가 되는지는, 적어도 철학적 의미에서는, 난 아직 모르겠다. 아주 강력한 직관이기에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어 보이고 그 이유 때문에 그도 더 이상의 설명을 부연하지 않지만, 나는 오히려 “소유”나 “권리”라는 단어를 도덕적 논증에 도입하는 것을 선결문제의 오류를 저지르는 일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그것이 대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권리주장을 다른 종류의 도덕적 주장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는 논리도, 한 번쯤은 생각해볼만하다. 이 두 종류의 주장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이 정식화할 수 있을 것 같다. “a는 b에게 x를 해야한다”는 문장이 a에게 도덕적으로 요구하는 행위와 “b는 a에게 x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문장이 a에게 도덕적으로 요구하는 행위는 같다. 그리고 이 두 문장의 의미가 어떻게 다른지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행위의 차이 밖에 없다. 왜냐면 이 둘은 행위를 요구하는 것 이외에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수행되지 않는” 권리를 우리가 생각할 수 없고, 이른바 “권리”라는 단어가 요구하는 것도 행위인데, 그것은 x로서 “해야 한다” 형식의 문장과 동일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두 문장의 의미를 다르게 이해할 수 없고, 같은 것으로 봐야할지 모른다.


톰슨의 논리를 그대로 따르는 가운데 내 주장을 일부 도입했을 때, 예상되는 결과는 당연히 파국이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에게 생명권 같은 것이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이것조차도 톰슨의 논지와 반대다!). 권리를 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변에서 끊임없이 임신중절은 나쁜 것이라는 요구가 들어오고, 그것은 임신중절은 해선 안된다는 명령과 같다. 이 명령은 (우리가 지금 사는 이 세계 속에서) 권리가 갖는 기능과 별 차이가 없기 때문에, 아마 임신중절을 고민하는 여성은 무거운 도덕적 책임이라는 엄청난 중압감에 시달릴 것이다. 이 명령은 사회적으로 작동하기에, 그를 정당하게(그리고 기술적으로 안전한 방법으로) 도와줄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난관을 뚫어내고 모종의 방법으로 중절에 성공하든, 스트레스로 유산을 하든, 아니면 중절에 실패해서 세상에 불행을 하나 더 만들어내든 그 모든 비난의 화살은 “도덕성”이라는 명목 아래 임신중절을 고민했던 여성에게 가해질 것이다.(물론 나 개인이 이런 상황을 바라고 있으며, 내 논리를 따라가면 반드시 이런 상황 또는 결론이 도출된다는 이야기는 절대로 아니다!!!)


이 논문을 읽으면서 톰슨이 당연히 고민했을 지점, 그리고 내가 이 논문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임신중절에 대해 생각해보면서 내린 잠정적 결론은, 임신중절은 어쩌면 윤리적 문제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실제로 문제인 것, 그리고 정말로 고쳐야 하는 것은 이미 만들어진 온갖 종류의 도덕적 직관이나 논리들(톰슨이 이 논문에서 반박하고자 애쓰는 그 헛된 말들)이 임신중절을 고민하는 여성 개인만 어떻게 해서든 “도덕적 압박감”에 시달리도록 만드는 현실이다. 논문 마무리 부분의 톰슨의 말처럼 우리 사회는 임신중절이라는 단 한 경우에만, 그것도 여성에게만 “착한 사마리아인”을 넘어서 “훌륭한 사마리아인”이 되라고 강요하고 그 도덕적 고민을 아무런 고민 없이 통째로 떠넘긴다. 도덕적 지형 자체가 불평등, 불공정, 부당하게 형성되어 있는 셈이다. 이것이 교정되지 않으면, 톰슨의 이 빛나는 성과도, 임신중절을 윤리적으로 옹호하려는 수많은 진보적이고 페미니즘에 우호적인 철학자들이 올린(그리고 앞으로 올릴) 성과도, 정제되지 않은 편견 앞에선 언제든지 무너져버릴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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