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열린책들 세계문학 161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한애경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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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에서 진짜인 것은 이야기뿐, 등장하는 모든 것은 가짜다.


개츠비를 읽는 내내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들과 동화되지 못하고, 계속해서 책의 겉만 맴도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일차적으로는 등장하는 인물들이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이 몰이해의 조금 더 근본적인 이유는 이 당시의 분위기와 내 시대의 분위기가 너무나도 많이 떨어져있기 때문이었다. 혼자 사는 저택이 그렇게 클 이유도 모르겠고 알아보지도 못할 사람들이 매일 와서 파티를 하는 까닭도 알쏭달쏭하고 줄곧 무의미한 말만 허공에 흩뿌려지다 사랑은 사랑대로 깨지고 사람은 사람대로 죽었고 아무도 이 큰 사건에 주목하지 않는다. 이런 이상한 상황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위화감 같은 것이 내 생각 속을 들락날락거렸다.


모든 것이 그토록 쉬운 게 도시의 특징인걸까? 이것이 이 이야기에서 창작자가 말하고 싶은 것이었다면, 나는 그것을 제대로 느낀 셈이다. 그냥 그렇다고 치고 싶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인사를 나누는 것도, 사랑을 나누는 것도, 돈을 버는 것도, 사람을 죽이는 것도, 아무도 여기에 주목하지 않고 그 죽음을 둘러싼 모든 사실이 증발해버리는 것도 너무 아무렇지 않게 진행되어서 놀랍지도 않을 지경이다. 소설에 나오듯 이 구조를 견디지 못하고, 도시가 아닌 곳에서 건너온 사람들만이 각자의 사연을 안은 채 도시를 떠나 다른 곳으로 향한다. 그들에게 그 쉬움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는 듯 말이다.


그 가운데 사랑을 쫓아서 그 곳까지 흘러든 것 같은 개츠비만이 홀로 빛나는 것도 같지만, 역시나 미심쩍기는 마찬가지다. 이 글 안에 담긴 모든 가짜와 의심스러운 것들의 중심에 바로 그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도 그가 어떻게 그 많은 돈을 벌었는지 모르겠다. 기껏 추측할 수 있는 건 위험부담이 높은 불법적인 일에 종사했다는 것 뿐인데, 그조차도 증언에 의해 밝혀진 것인데다 설령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사회에 존재하지 않아야 할 것들을 취급한 셈이니 역시 가짜이며 의심스러운 것들과 얽혀있는 셈이다. 그 활동을 하면서 그는 거의 모든 것을 속였다. 심지어 이름까지도! 그 덕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둥둥 떠다닌 관계들도 장례식장의 썰렁함으로 드러났고. 파티에 왔던 사람들은 사실 개츠비의 정체 뿐만 아니라 서로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허무하다. 화려함만 잔뜩 보여준 채 무엇 하나 제대로 맺어진 것 없이 사건은 갑작스럽게 끝나버렸다. 이 이야기 속의 시간을 파티에 비유하자면, 그렇게 할 수도 있겠다. 파티란, 감각적인 모든 것에 역량을 집중해 그 순간에만 화려하게 불꽃을 확 태워버린 다음엔 재와 흔적만 남는, 그런 시간들이니까. 무엇 하나 안타까운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무엇 하나 확실한 것도 없는, 그런 시간이니까. 어쩌면 도시의 인간들이 보내는 시간이란 그런 시간들로 가득할지도 모르고, 어쩌면 그런 화려함조차 껴안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그런 시간을 꿈꾸는 시간으로 가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상은 현실이란 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일 수 있는지 만족스럽게 보여주는 증거였고, 세상이라는 반석이 요정의 날개 위에 안전하게 잘 놓여 있다고 보증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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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와 아름다움의 이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
에드먼드 버크 지음, 김동훈 옮김 / 마티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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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이 아름답다면, 이유는 무엇일까? 버크는 여기에 대해서 시원한 답변을 주지 않는 것 같다. 길게 무언가를 써놓았지만, 그의 결론을 한 줄로 압축하자면 “원래 그래”다. 버크가 직접 애써 설명하듯, “저것은 왜 아름다운가?” 라는 질문은 “소금은 왜 짠가?”라는 질문과 똑같다. 철학사적 맥락을 끼워넣자면, 갈릴레이와 로크로부터 시작된 제1성질과 제2성질의 구별, 즉 물리적 성질과 인간의 정신과 상호작용을 일으켰을 때에만 발생하는 특성의 차이에 관한 설명이 개입해야 하는 부분이다. 소금의 분자구조를 분석한다고 쓰다는 특성이 나오지 않듯, 아름다운 대상들을 물리학적으로 분석한다고 아름답다는 특성이 나오지 않는다. 버크는 이 논리적(인간적?) 한계를 쿨하게 인정하고 “원래 그런 것들”에 대한 가능한 한도 내에서의 일반화를 시도하는 대안을 택한다.


그의 답변은 이렇다. 숭고함을 자아내는 대상은 거대하고, 반복적이고, 불투명하고, 강력하고, 난해하다. 이런 대상들을 대면하는 인간은 생명의 위협에 직면하지만, 그런 대상들이 실제로 피해를 입히지 않을 경우(예를 들어 호랑이는 거대하고 강력하고 피해를 주지만 거대한 회랑 건축물은 거대하고 반복적이지만 피해를 주지 않는다) 독특한 안도감을 느낀다. 이 공포와 안도감을 오가는 상태가 숭고다. 반면 아름다운 대상은 작고, 완만하고, 부드럽고, 파악가능하며, 연약하다. 그는 수학적 비례에서 아름다움을 찾거나 아름다움은 완전성의 일부라고 주장하는 다른 학자들의 입장을 비판하며 이런 특성들을 찾아낸다. 인간은 이런 특징을 지닌 대상들을 만났을 때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그리고 이 사랑의 대상은 그 대상이 품고 있는 이런 사랑스런 특성들이다.


어찌보면 다소 싱겁고 뻔한 답변들이다. 아름다움에 관한 논의가 이렇게 간단하게 끝나고 되나? 뭔가 더 심오한 것은 없는 것일까? 게다가 아직 지금만큼 과학이 발달하지 않은 시기라 사실관계에서도 이상한 설명이 많다. 설탕 알갱이는 구형이라 달다든가 하는 이상한 발상들 같은 것 말이다. 받아들이는 게 맞을까? 잘은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는 꽤 괜찮은 태도라고 생각하는데, 겸손하고 솔직하기 때문이다. 괜히 어려운 개념이나 불투명한 용어들을 사용하면서 젠체하는 것보다는 낫다. 문제는 그 개념과 용어를 사용해서 젠체해온 것이 플라톤 이래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답변하려 애써온 철학자들 모두의 노력인지라, 버크식 접근법은 그 전통 전부에 대한 완전한 부정이나 폐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겠지만.


그럼에도 그 과정에서 버크가 내놓은 몇몇 아이디어들은 신선했다. 무엇보다도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발상은, 모든 감각이 서로에서 어느 정도씩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 아이디어를 감각들 사이의 유비논증을 사용해 입증하려고 하거나, 당연한 사실로 간주하고 활용한다. 가령, 이런 특성 때문에 우리는 “스윗하다”는 표현을 음식에도 쓸 수 있지만 사람의 특성이나 행동의 특성에도 쓰고 좋은 노래에도 쓸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가끔 “우리가 오감이라고 하지만, 이들이 정말로 어떤 분리된 감각들일까?”라는 헛된 생각을 하곤 하는데, 이런 발상을 있어보이게 표현할 좋은 참고서적을 얻은 셈이다.


아름다움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예술작품 - 넓은 의미에서의 인공물 - 이야기 만큼이나(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자연물 이야기를 하는 것도 한번쯤은 곱씹어볼만하다. 아름답다는 것이 가치있는 다른 특성들(도덕적으로 착하다, 유용하다, 진실되다 등)과 분리되는지 그렇지 않은지도 철학적 논의거리이지만, 그만큼 인공물에서의 아름다움 또는 더 좁은 의미에서 예술작품에 고유한 아름다움이 있는지 묻는 문제 또한 미학의 핵심적 주제 중 하나일 것이다. 이 부분에서 버크의 입장은 단호하다. 인공물에서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왜 느끼는지 탐구하기 위해선 자연물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반드시 탐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대체로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있는 아름다움의 “자연적” 과정을 알 수 있고, 인공물의 아름다움은 그 과정의 반복일 것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정말 그럴까? 맞는 말인 것도 같다. 아름다운 사람을 보는 느낌과 아름다운 사람을 본뜬 조각을 보는 느낌은 크게 다를까? 설사 다르다고 하더라도 후자는 부차적이고 부가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고 버크는 볼 것이다.


또 내가 이 책에서 주목한 논의는 5장, 시적 언어에 관한 부분이다. 그는 의사소통으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시적 용법으로서의 언어가 오히려 언어에 더 본질적이라고 주장한다. 의사소통을 위해선 의미가 언어 사용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 이 생각은 상식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버크는 반대로 우리의 일상적 언어사용조차 시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언어를 사용해서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전달하기 때문이란다. 다른 사람의 말을 통해서 우리가 듣는 단어들에 해당하는 표상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검토하기에 우리의 대화의 속도는 너무나 빠르다. 그가 보기에 실제로 그렇게 반복적으로 표상을 떠올리며 의미를 하나하나 찾아가면서 언어생활을 하는 사람이 오히려 드물다. 이것이 예술로서의 언어, 시적 용법으로서의 언어가 가능한 근거라고 버크는 주장한다. 만약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또는 사람들이 언어를 의미로서만 사용하려 들었다면, 비트겐슈타인의 말마따나 모든 시들은 “무의미한 말들”, 가치없는 낭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름다움과 숭고는 사랑과 공포 즉 감정의 문제이기에, 우리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표현에서 독특한 미학적 경험을 갖게 되는 것이다.


여튼, 그래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온다. 대체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버크가 내놓지 못한 답변을 나라고 명쾌하게 내놓을 재주는 없다. 더군다나 앞에서 쓴 것처럼, 버크 자신도 이것이 답변불가능한 질문이라는 점을 재빠르게 인정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버크는 이 질문이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질문이라는 점 만큼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왜냐면 “명확한 관념이라는 말은 보잘것없는 관념이라는 말과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PS. 예전에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을 읽다가 포기한 적이 있어서, 어렵지 않을까 읽기 전에 많이 걱정했다. 다행히도 술술 읽힐 수 있도록 많이 배려된 번역이었다. 버크의 원문을 살린 것인지는 대조하면서 읽어봐야 알겠지만, 내겐 그럴 능력이 없다 ㅠ.ㅜ

어떤 사물을 선명하게 본다는 것은 그 경계를 인식한다는 것과 같다. 따라서 명확한 관념이라는 말은 보잘것없는 관념이라는 말과 동의어다.- P112

소유하고 있을 때는 우리에게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없을 때는 강하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습관을 통해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사물들의 특징이다.- P157

우리의 감각들 사이에는 어떤 연결고리가 존재한다. 우리의 감각들은 다양한 대상들에 의해 영향을 받도록 되어 있는 감정의 여러 가지 종류에 불과하며, 외부 사물의 영향을 받을 때는 동일한 방식으로 영향을 받도록 되어있다.- P179

모든 해악의 최선의 치유책은 운동을 하거나 노동을 하는 것이다.- P194

하지만 - 이상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 우리도 종종 자신이 어떤 관념을 가지고 있는지 혹은 어떤 주제에 대해 도대체 관념 자체를 가지고 있기나 한지조차 모를 때가 있다.-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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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와인에 빠져들다
로저 스크루턴 지음, 류점석 옮김 / 아우라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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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집어든 단 하나의 이유는, 철학자가 와인에 관해서 썼기 때문이었다. 와인은 먹는 것이다. 먹는 것은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대체로 그런 것 같다. 어느 미디어를 둘러봐도 이른바 ‘먹방’은 가장 흔한 컨텐츠가 되었다. 먹방에선 품평이 빠지지 않는다(대체로 좋게 포장하는 쪽으로 거짓말을 하는 경향이 문제일 뿐이다). 이른바 음식에 대해 평가한다는 사람들은 넘쳐나고, 이들 중 몇몇은 전국적 유명인사가 되기도 했다. 모든 사람들이 맛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분명히 먹는 것을 비평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이런 비평들이 과연 철학적 정당성을 얻을 수 있을까? 맛에 관한 철학적 담론은 가능한 것일까? 이는 당연히 제기되는 질문이다. 좋은 그림에 대한 철학적 기준은 대체로 어느 정도 표준이 잡혀있다. 이 표준들, 또는 이런 표준에 대한 연구를 우리는 대체로 미학이라고 부른다. 미학에 관한 철학자들의 글은 넘쳐난다. 그림에 비해 적은 편이긴 하지만 좋은 음악의 기준에 대한 철학적 연구도 그럭저럭 찾아볼 수 있다. 나는 한때 아도르노라는 철학자를 좋아했는데, 그는 근대성의 파괴와 합리성의 전복 그리고 상품화할 수 없는 난해함을 표현하는 노래가 최고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재즈를 매우 싫어했다, 같은 입장들. 하지만 맛에 관한 철학책은 정말 찾기 어렵다. 심지어 맛이라는 영어단어(taste)조차도 미학적 태도 전체를 아우르는 ‘취향(taste)’이라는 의미로 쓰이면서, 맛의 철학은 그 자리를 잃어간 것만 같다.


스크루턴의 글에서 나는 이 잃어버린 ‘맛의 철학’을 어렴풋하게 넘볼 수 있었다. 맛은 와인이라는 대상의 파생물이 아니라 맛 자체가 독립된 대상이다. 하지만 맛은 그 자체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 다른 관념들과의(특히 다른 맛들과의) 연관성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다른 미학적 대상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취급되어야 한다.


그래서 직접 철학적인 개념들을 동원하는 부분보다는 오히려 각 지역의 와인에 관해 짤막하게 설명하는 2장의 내용이 무척 흥미롭다. ‘맛’을 다루는 철학적 방식의 한 사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가 직접 쓴 단어는 아니지만) 와인을 철학적으로 다루는 방식은 ‘총체성’이라는 개념으로 집약될 수 있을 것 같다. 그 독특한(즉 고유한) 맛을 만들어내는 데 동원되는 자원은 객관적 방식으로 계측이 불가능한 요소들로 가득하다. 토질이 그렇고, 포도의 품종이 그렇고, 그 포도가 그곳에 흘러들어오기까지의 역사가 그렇고, 와인을 만들어내는 방식 - 오크통 나무의 재질이라든가, 숙성의 기간이라든가, 대충 넘어가는 화학적 변화라든가 등등 - 이 그렇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능숙하게 지적으로 다룰 줄 아는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이야말로 와인의 총체성을 제대로 ‘느낄’ 줄 아는, 이 세계 속에서 매우 독특한 지위를 지닌 개체들이다.


그럼에도 총체성이라는 말처럼 애매한 말이 또 없다. 이 글 전체에서 ‘와인’이라는 자리에 다른 것을 넣는다면, 예를 들어 탁주(혹은 청주나 소주)라든가, 맥주라든가, 위스키라든가, 코냑이라든가, 하는 대체어를 넣는다면 와인과 완전히 다른 담론이 탄생할 수 있을까? 설사 달라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총체성에서 다른 것이 아니라 제작과정이라든가 탄생설화와 같은 부분적인 어떤 것에서 달라질 뿐일 것만 같은 불안함이 엄습한다. 결국 그래서 ‘그건 맛있어요?’라는 질문에 ‘네, 맛있어요’라거나 ‘아몬드 향에 태운 오크 통의 향이 살짝 덧입혀져서 구수한 부르고뉴 와이너리의 전통이 영국 신사의 깔끔함과 섞인 절묘한 블렌딩이로군요!’ 따위의 알듯말듯한 말들만 늘어놓게 되지 않을까. 스크루턴 또한 이것을 알고 있는 것인지 ‘경계의 존재론’ 같은 표현을 사용하다가도, 짐짓 모르는 척 허세가 섞인 (것 같아 보이는) 말들을 풀어놓곤 한다.


여전히 맛의 철학이 흥미로운 이유는, 미지의 영역인데다가 어디에선가 표준적인 모형을 배울 방법도 경로도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이 책조차도, 뭔가 본격적인 것 같지만 예비적 시도 이상으로 더 나아가지 않는다. 이 책에 인용된, 같은 주제를 다룬 다른 책들이 무척 보고싶어졌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분명히 있다. 이 책의 저자인 스크루턴이 다른 술에 대해서 얕잡아볼 정도로 와인을 무척이나 사랑한다는 사실 하나가 있다. 맥주가 취향인 나로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언사들을 마구 남발하는데, 예를 들어 쇼펜하우어가 이상한 저서를 쓴 이유가 와인이 아닌 맥주를 좋아했기 때문이라든가 하는 것들. 또 다른 분명한 사실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멋드러진 묘사 속에서 살아숨쉬는 와인들을 한 번쯤은 맛보고 싶어졌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소개된 와인들 대부분은 한 병 가격이 10만원을 넘어가는 비싼 물건들이라 나는 그저 침만 흘릴 뿐이다…)

와인은 위스키의 해독제다. - 토머스 제퍼슨-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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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론 한길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43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지음, 성염 옮김 / 한길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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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케로가 『법률론』에서 보여주는 가장 재미있는 사고방식은 법(ius)과 법률(lex)의 구별일 것이다. 법률은 사회에서 실제로 제정돼 집행되는 중인 규칙을 의미하고, 법은 자연으로부터 부여받은 이성이 가리키는 해야할 일 또는 해선 안될 일에 관한 법칙을 의미한다. 법은 법률을 구속하지만 동시에 법률은 법의 구현이기도 하다. 그래서 대체로 옳다. 때로는 법에 어긋난 법률이 제정되기도 하는 것이 인간의 일이기 때문에, 이런 법률은 얼른 폐지되어야 한다고 키케로는 생각하는 것 같다.


또한 법은 인간이 지닌 이성이 가리키는 일이면서 인간의 본질인 이성이 가장 잘 구현된 대상으로 간주되기에, 법(률)과 법(률)을 따르는 행위는 그 자체로서 가치있는 일이다. 즉, 법은 다른 목적에 봉사하지 않는다. 어떤 종류의 유용함 때문에 법(률)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그 유용함에 법이 방해될 경우 법(률)을 폐지하겠다는 선언이 되는데, 키케로는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을 기껏해야 ‘약삭빠른(?)’ 사람들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법률론』의 총 3부 중 1부의 논의는 이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2부에서는 1부의 논의를 한 번 더 반복함과 동시에 제사를 지내는 것에 대해서 길고 지루한 설명을 시도한다. 이 부분은 내가 정말 이해를 했나 싶을 정도로 복잡하고, 그래서 대충 읽고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은 이런 것이다. 제사에 대해서 이토록 복잡한 논의를 하는 까닭은 이 절차가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중요했기 때문일텐데, 이 사실은 21세기의 한국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도 설이나 추석 때가 되면 허례허식이니 하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가? 이젠 ‘허례허식’ 담론 자체는 조금 덜한 대신 그 “예의”를 위한 노동의 편중 쪽으로 논란의 지형도가 바뀐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아마 제삿상이나 차례상 차리는 법에 관해서 시시콜콜하게 이야기를 하게 된다면, 우리도 이 정도의 이야기는 쓸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재산을 가장 많이 물려받은 사람이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이 때도 똑같았구나 싶은 것도 소소한 웃음포인트였다.


3부에서도 여러 가지 주제가 등장하지만, 눈에 띄는 토론은 두 가지다. 첫째는 호민관의 지위에 관한 것이다. 민중 전체가 정치에 직접 관여하는 것 자체를 방지하기 위해 통령이라든가 원로원 등의 여러 의사결정구조를 설계했음에도 왜 다시 호민관을 통해서 민중 전체의 의지를 제도화해야 하는가? 키케로의 반대편에 서있는 퀸투스는 악행을 저지른 호민관의 이름을 나열하며 이런 현상이 이 제도의 필연적 결과임을 역설한다. 반대로 키케로는 몇몇 나쁜 결과들만을 놓고 제도의 선악을 논할 수 없음을 우선 강조하며, 호민관을 통해서 얻는 긍정적 효과가 훨씬 더 크다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 민중의 대표를 세움으로써 오히려 민중의 무질서한 정치적 열기를 잠재울 수 있고, 이들이 정제된 상태로 공동체의 의사결정과정에 반영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제도의 이름은 다르지만, 이런 기능은 현대에는 대체로 정당이 담당하는 기능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여전히 정당이 무엇을 해야하는지에 관해서 키케로가 지적하는(그리고 숙고했던) 갈등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점에서, 신기하면서도 지금 우리에게조차 여전히 의미있는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눈에 띄는 다른 토론은 3부의 말미에 등장하는 투표에 관한 것이다.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것일까 자신은 없지만, 키케로는 대체로 의사결정과정에서 책임자들에 한해 공개투표를 지향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 우리의 언어로 말하면, 국회의원들이 (또는 행정부와 사법부도 포함해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그 결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어떤 입장을 지니고 있었는지 공개해야 된다는 뜻일거다. 선거에 관해서 우리 사회의 상식에는 두 가지 직관이 충돌한다. 비밀투표를 해야 자신의 솔직한 입장을 반영할 수 있다는 직관과, 자신이 견지하는 입장이 떳떳하다면 자신의 입장을 굳이 가릴 필요가 없으니 투표는 공개적으로 해야한다는 직관이다. 우리 사회 또한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나름의 절충점을 찾은 것 같긴 하다. 그럼에도 절충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기에, 우리와 전혀 다른 사회를 살았던 사람들의 논의를 지켜보면서 우리의 타협점이 지닌 의의와 한계를 키케로를 읽으며 다시 돌아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선을 흉내내는 쾌락이 모든 감관에 깊이 스며들어 우리를 기만하기도 한다네. 그것이 모든 악의 모체가 되지. 그것의 유혹으로 부패한 연후에는 사람들은 무엇이 자연본성상 선한 것인지 제대로 분간하지 못한다네. 자연본성상 선한 것들에는 이런 달콤한 맛과 매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지.- P93

무릇 사물을 비판함에 선한 점들은 제외하고 악한 점들만 열거하고 폐단들만 선정하는 것은 불공정하네.-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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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은 아버지를 찾아가는 아들의 이야기다. 아버지는 카다피와 같은 군부 출신이긴 하지만 카다피의 정치적 행보에 찬성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체포되었다. 그 와중에 카다피 치하의 몇몇 수용소에선 “정치범”에 대한 대량학살이 자행되었다. 어떤 기록을 뒤져봐도 아버지의 생사는 확인되지 않는다. 아들이 이 생사를 확실하게 만들려고 추적하는 과정에서, 카다피가 어떻게 집권하고 정권을 유지했는지, 리비아 사람들의 삶은 어떤 식으로 바뀌었는지, 그를 대하는 이른바 선진국들의 태도가 얼마나 기만적이었는지 드러난다.






반면 나의 페르시아어 수업은 좌파운동가 부모를 둔 딸의 이야기다. 부모는 마르크스주의자이기에 팔레비 왕정에도 아마 우호적이지 않았을 것 같지만, 호메이니의 종교혁명 이후 모든 종류의 사상의 자유를 탄압하는 정권에 더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러다 견딜 수 없어 프랑스로 이주해 삶을 꾸려가는데, 남아있는 사람들의 삶이 딸의 시선으로 다뤄진다. 복장 제한과 일부다처제를 비롯한 온갖 종류의 여성차별, 표현의 자유에 대한 탄압은 리비아에서보다 더 극적으로 드러난다. 그럼에도 딸은 부모의 행보에 대해 덮어놓고 우호적이지만은 않은데, 두 사람이 자신들의 신념을 딸인 자신보다 더 우선시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두 책을 읽는 가장 첫 감상은, 나름 소설 또는 이야기라는 이 두 책의 원래 형식과 걸맞지 않게 “공부했다”는 느낌이다. 리비아 카다피 정권에 대한 저항과 민주화운동은 뉴스를 통해서만 접하던 내용이었는데, 이 책을 통해서 그 독재정치의 한가운데에서 일어났던 일과 그에 저항한 사람들의 행적을 간접적으로나마 알게 되었다. 마지디의 글도 마찬가지였다. 호메이니가 일으킨 이슬람 혁명이 이란 사회 전체에 어떤 여파를 미쳤는지, 그 가운데 살아가던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었는지 상상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


두 책 모두의 배경이 우리가 아랍이라고 묶어서 부르기 좋아하는 어떤 사회라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세속주의적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확실히 한 쪽은 아니었다), 사람들의 자유를 억압했다는 점만은 분명한 공통점이었다. 정치적인 의사표현, 자유로운 학술활동, 모든 것이 정부의 검열대상이었다. 남자였던 마타르에게선 드러나지 않았던 성차별적 억압이 마지디의 글에서 전면에 드러나는 것 또한, 책을 단순히 읽는 사람의 입장에선 일종의 “깨알” 포인트이기도 했다.


문화로 보나 거리로 보나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과 서쪽의 거의 끝에 자리잡았다는 엄청난 간극이 있지만, 한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이런 경험에 공감하는 것이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각각 그 이유는 석유와 지정학적 지위로 서로 달랐지만, 2차 대전 이후 펼쳐진 냉전과 연장된 식민주의의 여파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는 우리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민주적으로 집권한 정부도 독재를 일삼았는데,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정권도 독재를 했다는 것은 굳이 말해봐야 입이 아픈 사실이다. 그에 대항하던 수많은 정치적 반대자들이 불구가 되어 살아가거나 남산의 핏빛 이슬이 되어 사라졌다. 반대자들의 아내와 아들딸들은 한편으로는 정부의 행각에 대해 분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편하게 마음을 둘 공동체를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에 어찌할바를 모르기도 했을 것이다. 그 억압의 무게는 모두에게 똑같이 무거웠지만 여성에겐 훨씬 더 무거웠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두 책이 모두 재미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마지디보다 마티르의 책이 더 흥미로웠다. 모르던 이야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미리 알았던 내용이 있다면 영국의 (노동당 간부들을 비롯한) 고위층이 카다피의 독재를 못본 척했을 뿐만 아니라 노동당 정치인들의 산실인 명문대학 런던정경대에서 카다피 정부의 비자금으로 학술활동을 했다는 것 정도였다. 그 때도 미친 놈들이라는 생각을 했었지만, 아부살람 학살 사건을 비롯해 독재정부가 해야할 것은 빼놓지 않고 다 했었던 카다피 정권의 맥락을 고려하니 정말 상종못할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정치적으로 좌파라고 자부하고 다니는 사람의 입장에선, 좌파가 저러고 다녔다는 게 너무 슬프고 짜증난다…)

















반면 이란에 관해선 예전에 비슷한 만화를 본 적이 있었다. 마르잔 사트라피의 <페르세폴리스>라는 만화다. 사트라피가 이란의 전통과 문화에 좀 더 우호적인 것 같긴 하지만(더 정확하게는 1세계 백인 페미니즘의 잣대로 이란을 보지 말라...는 정도였다), 어느 작가의 관점으로 보든 이란의 체제에 문제가 많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마지디의 글은 내게 이란에 관한 어떤 대체불가능한 경전이 될 것 같다. 아이에서 어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선을 동원해 이란 사람들의 삶을 사트라피에 비해 좀 더 내밀하게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은 상투적인 말로 글을 마무리해볼까 한다. 소설이나 소설적 요소가 섞인 논픽션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찾아읽을 생각도 잘 하지 않는 입장에서, 이 두 권을 그야말로 따로 나가는 독서모임이 아니었다면 출간이 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을 종류의 책이었다. 게다가 읽었더니 (여러가지 의미에서) 재미있기까지 했다. 오랜만에 독서모임하는 재미 중 중요한 어떤 요소를 다시 깨닫게 된 계기랄까? 그래서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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