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관념과 그림자의 거울방을 깨고 나가서 실전으로 공부하는 방식을 묻는 일이다. ‘어떤 틈 속으로 스며든 우연찮은 타자성의 체험’에 자신을 넉넉히 노출시킬 수 있도록 준비하는 일이다. 자기체계의 안정화가 아니라 늘 새로운 변화에 기민하도록 탄력 있는 긴장의 상태로 스스로를 부단히 조율해 가는 일이다.

공부란 실로 돌이킬 수 없는 ‘변화’다. 이에 비하면 영리한 것은 ‘변화’가 아니거나 혹은 기껏 ‘변덕’이다. 아, 우리의 세속은 바잡*거나 반지빠른* 변덕의 세상이다! 물론 변덕은 몸이 아니라 생각이 주체일 경우에 가능한 삶의 태도인 것이다. 그러므로 공부가 변화의 비용이고 그것이 결국은 몸의 주체적 응답의 방식일 수밖에 없다면, 공부란 삶의 양식을 통한 충실성 속에 응결한 슬기와 근기일 수밖에 없다.

하루 종일 방 안에 틀어 박혀 생각만 하느니 다 쓸데없고 책 한 권이라도 제대로 읽는 게 낫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생각하되 배우지 않으면 위험하다(思而不學則殆)’는 말인데, 이 위험이란 곧 자기-생각을 ‘자연화’시키는 것을 가리킨다고 보아도 좋다. 그러나 무릇 인문학의 공부란 자기 자신의 생각들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사실을 사뭇 뼈아프게 깨치는 일련의 사건들이다. 혹은 괴델(K. G?del)을 원용해서 말하자면 그 생각의 일부로써 그 생각의 틀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사실에 부딪쳐서 자빠지는 일이다. 혹은 내 ‘생각’만으로는 영영 너의 ‘사실’에 접근할 수 없다는 사실, 그래서 내 생각의 막(膜)을 찢고 나가는 모종의 실천적 근기가 없이 들먹이는 관념적 상호소통의 이상이 종종 공소하다는 사실을 느리지만 지며리* 깨쳐 가는 과정들이다.

‘나’의 태초에 ‘너’가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인문학(人文學)은 문학(文學)을 그 바탕으로 한다. 그리고 문학은 일종의 문자학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인문학 역시 그 문자학적 기반 위에서야 그 본령의 의미와 가치를 꽃피운다. 한글로 인문학 공부를 하는 이들이 한글을 익히고 쓰는 일은 모르스 부호나 에스페란토, 혹은 고대 중동의 어느 사어(死語)를 채집하고 배우는 일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 차이가 가리키는 언어적 심연을 정직하게 겪는 일은 인문학으로서의 공부길에서 놓칠 수 없는 알짜다.

우리 사회의 대화문화에 대한 비판은 이미 수위를 넘은 지 오래다. 그중에서도 사회적 약자들의 말에 먹통인 남성 기득권자들의 체계적 반(反)대화성은 우리 사회의 농축·급속·편파의 남성적 근대화나 군사주의와 맞물리는 현상으로 이른바 심층 근대화의 과제에서 우선순위다. 각종의 통계는, 특히 남자들의 비(非)대화성과 이와 관련된 여자들의 불만을 지목한다. 나는 1990년대에 일반 대중을 상대로 인문학운동을 벌이면서 ‘여자의 말을 배우기’라는 화두를 내걸고 생활인문학적 실천의 진장(振張)에 미력을 보탠 적이 있는데, 이것 역시 대화문화의 파행을 속으로부터 고쳐 보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긴 시간의 긴장은 필연적으로 공부의 슬럼프를 가져오게 되는데, 슬럼프의 양식을 살피면 바로 그 양식 속에 자신이 지닌 재능이나 기량의 한계와 조건이 투영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로써 공부라는 활동이 단지 인식론적 재능으로 환원될 수 없고 그것은 우선, 그리고 워낙 ‘사람의 일’이라는 발견(!)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 발견에 근거해서 위기를 보다 슬금하게 넘어가는 실천적 미립*을 얻는 게 중요하다. 말하자면 우선 공부를 일종의 ‘순수 인식론주의’로 좁히는 태도를 지양하고, ‘공부도 사람의 일’이라는 지극히 평심한 이치를 명심하면서 매우 현실적으로 슬럼프의 출구를 모색하라는 제언이다. 여기에서 순수주의적 태도란, 예컨대 근기가 일천하고 공부의 이력이 짧은 상태에서 지나치게 무리한 정면승부를 고집하지 말라는 뜻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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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서방세계가 본격적으로 문화적 도약을 이룬 것은 12~13세기를 거치면서였다. 여기에는 몇 가지의 내적 추동력과 두 가지의 중요한외적 추동력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우선 이 시대에 이르러 새로운 농법(3포제 등), 다양한 건축물들의 구축(처음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그후에는 고딕 양식으로), 인구의 증가(1000년이 지나면서 인구가 비약적으로증가해, 1300년 정도가 되면 5000만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여러도시들의 성장과 대학들의 건설, 화폐 사용과 은행 설립, 수공업의 발달과 유통 증가(‘한자 동맹‘ 등) 같은 여러 현상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 P689

중세의 철학은 그리스의 철학이 이슬람으로 전달되면서 그 기초가 마련되었다. 이슬람의 경우 철학과 신학이 매우 분명하게 구분되었는데,
이는 철학을 위해서는 다행이었고 또 과학적 작업들을 위해서도 좋은배경이 되었다. 이븐 시나와 이븐 루쉬드는 이런 과학적-철학적 탐구의절정을 이루었다. 서방세계는 이슬람에서 그리스 철학의 보고(寶庫)를발견함으로써 새로운 사유에 눈을 떴고 특히 12세기 이후 알베르투스마그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둔스 스코투스, 윌리엄 오컴 등을 비롯해 많은 거장들을 낳을 수 있었다. 전반적으로 볼 때 이런 흐름은 플로티노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로의 이행을 보여주었으며, 중세라는 시대가 지적으로 점점 정교화해간 궤적을 보여준다. - P750

르네상스 시대 도식적으로 말한다면 15세기(‘콰트로첸토‘), 16세기(‘칭쿠에첸토‘)는 탄생의 시대였다. 이 시대에 오늘날까지도 우리의(지중해세계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들까지 포함해) 삶을 주도하고 있는 여러 방식들-국민국가, 자본주의, 인본주의, 과학기술 등이 탄생했다. 이런삶의 양식들은 지중해세계에서 만들어졌지만 점차 전 세계의 주류가 되었고, 때문에 이 양식들을 반추해보는 것은 곧 우리 삶의 중요한 한 실마리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러한 탄생들을 관류하고 있는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인간적인 것의 (재)발견‘일 것이다. 국민국가의 탄생은 권력의 중심을 신과 교회로부터 왕과 국가로 이전시켰다. 자본주의의 탄생은 인간의 물질적 욕망을 긍정함으로써 새로운 생활을 도래시켰 - P753

다. 인본주의의 탄생과 인간의 자기 탐구의 시작은 이데아와 신으로 대변되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을 인간중심주의로 바꾸어놓았다. 과학기술의탄생은 인간을 자연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으로 바꾸어놓음으로써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오래도록 파급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이 모든 변화들의중심에는 인간적인 것의 (재)발견, 더 정확히 말해 근대적 주체의 탄생이놓여 있다. - P754

기계론이란 세계를 하나의 기계로서-근대 철학자들이 즐겨 든 비유로 하면 하나의 정교한 시계로서 파악하는 것을 뜻한다. 달리 말해, 우리가 기계를 설명하기 위해 동원하는 개념들연장(延長), 무게, 힘, 속도 등 -만을 동원해서 설명하는 것을 뜻한다. 데카르트는 이런 설명을 극단적으로 단순화하기 위해, 즉 세계를 기하학으로 온전히 환원하기 위해, 모든 사물들을 ‘res extensa (extended thing)‘
로 파악했다. 이른바 범기하학화(pangeometrization)의 세계관이다. 질적인 것들은 모두 이 ‘res extensa‘로 환원되어 설명된다. 이렇게 극단적인환원주의로 파악된 세계에서 두 가지만이 전혀 다른 실체들로서 이해되는데, ‘res cogitans (thinking thing)‘와 신(神)이 그 둘이다. 신은 무한실체요 영혼(사유하는 실체)과 물질(연장을 가진 실체)은 유한실체들이다. - P832

신과 영혼을 제외한 모든 사물들은 같은 실체로서 파악된다. 이렇게 데카르트의 세계에서는 세 종류의 실체만이 인정된다. 숱한 종류의 실체들이 존재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와는 판이한 세계이다. 풍성한 질들로 가득 차 있던 아리스토텔레스적 세계는 갑자기 (신과 영혼만을 예외로한다면) 오로지 연장=외연으로만 구성된 기하학적 세계로 바뀌어버렸다. 데카르트의 기계론이야말로 자연에 대한 상(像)을, 더 나아가 세계에대한 철학적 파악 전반을, 아니 서구 문명 (뿐만 아니라 인류 문명) 전체의존립 근거 자체를 송두리째 바꾸어놓은 결정적인 지도리이다. - P833

하나의 개념이 탄생했던 조건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x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이해는 그 개념의 탄생 조건들에 대한 이해를 포함한다. 하나의 탄생은 가름/변별화이다. 거기에는 늘 어떤 대립성이 작동한다. 대립, 갈등, 부정, 모순의 장에서 무엇인가가 탄생한다.
‘philosophia‘의 탄생에도 이런 대립성들이 작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 P841

지중해세계에서 자연에 대한 상이한 이해 그리고 그것과 맞물려 나타
‘난 인간관과 가치관에서의 상이한 정향들은 결국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움직이는 사유의 운동이었다. 어떤 형태가 되었든, 지중해세계에서 등장해 숙성했던 대다수의 철학사상들은 현실과 이상,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움직이면서 초월과 자연, 인간의 운명, 도덕적/윤리적 실천을 사유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흐름에서 이상에의 지향이 때로 강박으로 흘러가곤 했다는 것은 사실이고, 근대 이래의 철학자들은 이 때문에 내재적이고 경험적인 사유의 정향을 취하게 된다. - P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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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사이보그-사이버네틱 유기체가 되었다. 그것은 혼종적기술이자 유기체적 체현과 텍스트성의 구성물이다(해러웨이,
1985). 사이보그는 텍스트, 기계, 몸 그리고 은유다. 이 모든 것들은 커뮤니케이션과 관련하여 이론화되고, 실천에 참여한다. - P384

상황적 목적은 필연적으로 유한하며, 부분성에 근거하고, 동일성과 차이, 유지관리와 분해라는 미묘한 놀이 사이에 있다. 위노그라드와 플로레스의 언어학적 체계는 ‘탈자연화된 것이며, 완전히 구성주의적인 실체다. 이런 점에서 그와 같은 체계는 유기체적·기술적·텍스트적인 것들 사이에 서로 침투 불가능한 경계를설정하지 않는 포스트모던 사이보그이다. 하지만 그들의 언어학적인 커뮤니케이션 체계는 취약성으로부터, 다시 말해 체현으로부터 궁극적인 추상화를 통해 절멸주의적 병리학과 함께하는 ‘정보사회‘의 AI 사이보그와는 분명히 대립적이다. - P388

면역성은 공유된 특수성과 관련하여 인지될 수도 있다. 즉 면여성은 타자(인간과 비인간, 내부적인 것과 외부적인 것)와 관계속으로 반쯤 스며들 수 있는 자기와 관련하여, 언제나 한정된 결과와 관련하여, 개체화와 동일시의 상황적 가능성과 불가능성과관련하여, 부분적 융합과 위험과 관련하여, 인지될 수 있다. 포스트모던한 자기의 문제적인 다수성은 면역학의 멍울진 담론에서는 강력하게 형상화되는 동시에 억압되기도 하기 때문에, 그런 다수성은 건강, 병, 개체성, 인간성, 죽음에 관해 부상 중인 다른 서구적이고 다문화적인 담론 속으로 이동해야만 한다. - P409

사이보그 체현과 상황적 지식이라는 약속과 공포로 가득 찬이런 차이의 장을 벗어나는 출구는 어디에도 없다. 가능한 자기들을 연구하는 인류학자로서 우리는 실현 가능한 미래의 기술자들이다. 과학은 문화이다. - P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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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이슬람의 과학은 그리스 과학, 헬레니즘 시대의 과학을 잇는 과학사의세 번째 중요한 단계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성과는 14세기 스콜라철학의 자연철학을 거쳐 17세기 과학 혁명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과학사저작들에서 이슬람 과학은 소략하게 다루어져 있거나 아예 빠지기까지 - P660

한 경우를 볼 수 있다. 그리스 과학으로부터 근대 과학으로 이어지는 중간 단계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슬람 과학은 좀더 많은 주목을 받을가치가 있다. - P661

서방의 종교사상들과 마찬가지로 이슬람의 종교사상들도 플라톤, 아니 사실상 플로티노스의 그림자 아래에서 전개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플로티노스의 철학은 말 그대로 천년의 세월에 걸쳐 지중해세계를 지배했다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철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그 어떤 사상도플로티노스 자신의 『엔네아데스』를 뛰어넘는 철학적 성취를 이루지는못했다. 철학은 종교/신학을 위한 도구였지 그 자체로서 수준 높게 추구되지는 못했던 것이다. - P665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을 해석하면서 이븐 루쉬드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이탈해 파격적인 주장을 한다. 이븐 루쉬드가 볼 때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가 보다 일관적이려면 수동적 이성 역시 탈물질적이고 영원해야 한다. 이 주장에 함축되어 있는 바는 수동적 이성이 우발적이고 물질적인 개개인의 신체와 완전히 분리된 실체여야 한다는 점 - P677

이다. 그래서 능동적 이성만이 아니라 수동적 이성도 공히 개개인을 초월한 이데아적인 존재로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26) 이를 이븐 루쉬드의 ‘이성 단일론‘이라 부른다. 만일 그렇다면, 불멸하는 것은 개개인의형상이 아니라 단지 단일한 보편적 이성뿐이다. 능동적 이성은 물론 수동적 이성까지도 압둘라나 마르얌의 이성은 아닌 것이다.
이븐 루쉬드의 이런 해석은 이슬람교의 교리와 정면 충돌하는 것이었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공히 개별자의 영혼의 부활, 나아가 경우따라서는 신체의 부활까지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존재론적 보장이 있어야만 한 개인에게 귀속되는 죄, 업(業), 책임, 의무 등을 인정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 등으로 해서 이븐 루쉬드는 박해 당했고 그의 책들이 불태워지기까지 했다. - P678

유럽에서와는 달리 이슬람세계에서는 ‘철학‘과 ‘신학‘이 명확히 구분되었다. 물론 유럽에서도 철학과 신학은 구분되었으나, 대체적으로 철학이 신학에 종속되었다. 반면 이슬람의 경우 신학은 어디까지나 이슬람 신학이었고, ‘철학‘은 그리스에서 유래한 학문인 그리스 철학을 뜻했다. 이런 구도는 이슬람에서의 철학자들의 위상을 유럽에서의 그것과는다르게 만들어주었다. - P6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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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이 날이 오락가락하더니 오늘 아침까지 내리던 비가 그치고 파란 하늘을 보니 울적했던 기분이 좋아졌다. 

역시 나는 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는구나 싶었다. 


지난 주 일요일에 산책 나갔다가 아파트 근처에서 발견한 꽃나무들. 참 화사하니 이뻤다!



지지난주에 마트 근처에 갔다가 생선 구이 정식 집을 갔다.

사진에서도 느껴지겠지만 요사이 밖에서 먹은 밥 중 가격 대비 가장 만족스러웠다. 옆지기도 엄지척을 했다. 인당 14,000원인데 남는 게 있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반찬도 정갈하니 괜찮았고...

고등어랑 삼치를 하나씩 시켰는데 진짜 배부르게 잘 먹었다.


이건 지난 주말에 먹은 삼겹살 집. 원래 가려고 했던 삼겹살 집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냥 다른 곳으로 갔다. 

개인적으로 웨이팅은 못하겠더라. 아무리 맛집이더라도. 

고기를 너무 좋아하는데 이제 물가가 너무 올라서 밖에서 먹기는 어렵지 않나 싶다. 그래도 반찬들이 많아서 고기 3인분으로 끝났으니 망정이지^^;;;



낮에 산책을 하며 찍었다. 올 봄 산수유를 놓치지 않고 지나가서 다행이다.





현재 이런 책들을 읽고 있다.



세계철학사 1권은 고대, 중세 시기 지중해 세계를 중심으로 나타난 철학자들을 다룬다. 


플라톤의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질료', '로고스(이성)'에 대한 개념은 서양 철학의 원형을 담고 있다. 두 사람의 사상은 다른 듯 보이지만 결국 그 기반은 같다고 봐야 한다. 개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학문 분류는 오늘날에도 그 기반이 그대로 이어지는 것이라 놀라울 따름이었다. 반면 생물학적인 성과 가부장제에 기반한 역할 정의는 역시 읽다 보면 갑갑해질 수밖에 없다.


자연철학자들은 오랜만에 읽어도 재밌었는데 '데모크리토스' 이외에 다른 철학자들의 사상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일원론이 아닌 다원론으로 세상을 바라보려고 했던 것이 아무래도 내게 공명을 주는 것 같다. 

플라톤 철학 전체를 관류하는 문제의식은 ‘가짜‘에 대한 경계심과 그 반면으로서 진짜를 가려내려는 열정이었다. 그의 사유는 가짜가 판을 치는 그리고 오히려 진짜는 핍박받는 현실에 대한 의구심과 환멸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사유는 가짜와 진짜를 구별하려는, 사물들에 상이한 존재론적 위상을 부여함으로써, 달리 말해 사물들을 존재론적 위계(ontological hierarchy)에 따라 분류함으로써 진품을 가려내려는 열망에 의해 지배되었다. 그의 사유 전체는 모방(‘미메시스‘) 개념에 의해 추동되고 있으며, 모든 구별, 평가의 기준으로서 제시된 것이 바로 이데아 개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데아를 얼마나 잘 모방하고 있는가가 그 사물의 존재론적 위상을 판별할 수 있게해주는 기준이었다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이 보기에 사람들이 사물들의 실재, 진상(眞相)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들이 감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 P341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은 질료 및 시간과 떼어서는 의미를 상실하는, 플라톤의 형상과 성격을 달리하는 실체이다. 그러나 현실태로서의 형상이 잠재태로서의 질료를 이끌어가는 목적론적 구도는 그가 결국 플라톤을 잇고 있다는 점을 다시한 번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고 있는 세계는 형상과 질료가 오로지 형식적으로만 구분되는 이원적 일원의 세계이며, 질료의 잠재성을 형상이 이끌어가는 목적론적 세계이다. 그리고 이런 존재론은 무엇보다 생명체들의 세계에서 두드러지게 확인된다. 그의 존재론은 근본적으로는 플라톤을 잇고 있지만, 보다 경험주의적이고 유기체주의적인 색채를 통해서 새롭게 재구성된 플라톤주의인 것이다. - P440


자연철학들의 기본 논리는 다음과 같다.

1. 세계를 이루고 있는 실재는 영원하고 자기동일적이고 순수한 존재‘들‘이다.

2. 이 존재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관계 맺음‘으로써 무/부정 및 타자성을 매개해 운동함으로써 우리가 보고 있는 이 현상세계가 성립한다. - P148


엠페도클레스는 다원론을 시도한다. 영원한 것이 단지 하나(일자)가 아니라 넷이 된다. 다른 모든 것들은 이 넷으로부터 나오고 넷으로 돌아가지만, 이 넷은 영원한 동일성이다. - P150


아낙사고라스의 생각은 정신이라는 것이 따로 설정되고 그것이 이 우주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 P173

데모크리토스는 아르케로서 원자들(atomata)을 제시한다. 각각의 원자는 파르메니데스의 일자와 같지만, 원자들‘은 다자를 형성하며 또 운동한다. 데모크리토스의 사유 또한 포스트-파르메니데스적 사유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데모크리토스는 원자들을 "어떤 것(to den)", "꽉 찬 것(to naston)", "있는 것(toon)" 등으로 부른다. 그리고 일자와 마찬가지로 이 원자들도 우리의 감각을 벗어나는 존재들이다. - P177


<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1~2부는 많이 어려워서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었는데 그나마 3부는 기존에 읽었던 내용들이 많아서 역시 이해하기가 더 쉬웠던 것 같다. 페미니즘의 역사, 사이보그에 대한 이야기, 맥락적으로 세계를 보는 방법에 대해서까지 읽었다. 이제 어느덧 마지막 장을 남겨두고 있다.


‘우리‘는 픽션 읽기라고 일컬어지는 고도로 정치적인 실천을 통해 생산된 포함과 배제, 동일시와 분리에 대해 설명할 수 있다. 우리가 누구에게 설명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읽기 자체 속에서 생산된다. 모든 읽기는 잘못된 읽기이자, 다시 읽기이며, 편파적인 읽기이자 강제적 읽기이며 상상된 텍스트의 읽기이기도 하다. 텍스트는 원래부터 궁극적으로 그냥 그곳에 존재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세계가 원래부터 무너져 있었던 것처럼, 텍스트는 이미 언제나 서로 경합하는 실천과 희망으로 뒤엉켜 있다. - P224


인종, 젠더, 자본은 전체와 부분에 대한 사이보그 이론을 요청한다. 사이보그에게는 총체적 이론을 생산해 내려는 충동이 없지만, 경계 및 경계의 구성과 해체에 대한 개인적 경험은 있다. 파급력 있는 행위를 위해, 과학기술에 대한 하나의 관점과 지배의 정보과학에 도전하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할 정치적 언어가 되기를 기다리는 신화 체계가 있는 것이다! - P327


상황적 지식은 지식의 대상이 텅빈 스크린, 토대, 자원이 아니라 행위자이자 행동가로서 형상화되어야 한다고 요구하며, ‘객관적인‘ 지식에 실린 고유한 행위자성과 저자성으로부터 변증법을 차단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 형상화해서는 결코 안 된다고 요구한다. - P359


페미니즘의 역사를 읽을 때마다 마주하게 되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은 이제 좀 읽을 때가 된 것 같다. 특히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엥겔스는 계급과 국가 사이의 매개적인 구성체로서 가족을 최우선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성별의 구분을 분리하여 고려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적대적인 구분에 포함시켰다[카워드(Coward), 1983]‘ 가족 형태의역사적 다양성과 여성의 종속이라는 문제의 중요성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연스러운 이성애를 토대로했기 때문에 섹스와 젠더를 역사화할 수 없었다. - P238

 



그리고 읽고 있는 원서들.



도스토옙스키 전집도 이어서 읽어야 하는데... NOON 세트를 더 빨리 읽을 것 같았지만 역시나 동시다발적으로 읽는 책들이 많다보니 쉽지가 않구나. NOON 세트는 도스토옙스키의 백야와 추리소설들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눈 깜짝할 새 3월 말이 다 되어 간다. 주말에 책을 몰아 읽기는 하는데 쑥쑥 읽히지는 않아서 간혹 졸기도 하고 안되겠다 싶으면 눈도 붙이고, 드라마도 보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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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3-27 03: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제 밖에 나갔는데 하늘이 맑더군요 구름도 떠다니고... 오랜만에 맑은 하늘 본 것 같기도 했습니다 매화 산수유는 핀 건 보고 목련은 조금 핀 것과 활짝 핀 거 다 봤어요 꽃이 피니 조금 밝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삼월 마지막 주네요 이번주가 가면 사월이라니... 거리의화가 님 삼월 남은 날 동안 읽고 싶은 책 자주 만나시기 바랍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4-03-27 16:29   좋아요 0 | URL
오늘도 다행히 날이 맑네요^^ 여기는 이제 막 목련과 개나리가 올라오고 있는 상태입니다. 매화는 만개를 지나서 꺾였고 산수유는 만개더군요^^ 말씀처럼 꽃이 피니 봄 느낌이 나는 것 같아요.
희선님 일교차가 큰데 건강 관리 잘하시고 독서 생활도 즐겁게 하시길요!

새파랑 2024-03-27 13: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읽기를 응원합니다~!! 요새 물가가 비싸서 밥 한번 먹는데 최소 만원이더라구요. 쫌만 보태면 책이 한권인디... 한끼를 굶으면 책 한권을 살 수 있다~!!

요새 꽃들 피는걸 보니 봄이 온게 실감이 납니다 ㅋ

거리의화가 2024-03-27 16:31   좋아요 1 | URL
ㅎㅎ 네^^ 아무래도 상반기에 다 읽기는 힘들 것 같지만 어쨌든 전집은 꼭 올해 안에 읽으려고 합니다. 너무 미루면 전집에게 미안해서라도?ㅋㅋ
어쩌면 책 값이 그나마 가장 합리적인 소비인 것 같습니다. 요즘은 뭐든 집기가 무서워요ㅠㅠ 마트 한 번 가면 30만원은 우습습니다.
일교차는 크지만 따뜻한 봄 햇살과 꽃들을 보니 봄 기운이 느껴지죠? 이 봄 만끽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