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표류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박연정 옮김 / 예문 / 2005년 3월
평점 :
품절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로 우리나라에도 두터운 팬 층을 형성하고 있는 일본의 책벌레이자 저널리스트인 다치비나 다카시의 <청춘표류>를 읽었다. 언젠가 내 친구가 살고 있는 도쿄에 간다면 책으로 건물 전체를 도배했다는 그의 유명한 고양이 빌딩에 꼭 가보고 싶다.

그는 프롤로그에서 이렇게 밝혔다.

 '나는 그들에게서 깨달음에 가득한 말을 듣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오히려 망설임에 대해 듣고 싶다'.  또한 그의 말에 동감이다. 잘난 사람들의 성공기는 나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변변치 않은 사람이 고생고생하다가 이 세상에 간신히 어떻게 마음을 붙였는지 그런 것에만 관심이 간다.  책 속에 소개된 그들의 말 중 인상 깊은 몇 마디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나모토 유타가(오크 빌리지의 수공예가구 칠기 장인. 그는 수재인 형들에 비해 성적이 신통치 않아 열등감이 많았다.)   "마르쿠제의 '노동 속에서 유토피아를 찾아라'는 구절처럼 인내하면서 하는 노동은 소외된 노동이고 그 속에는 유토피아가 없어요. (...) 그 책을 보면서 가슴이 시원해졌어요.  다른 사람들처럼 싫은 일도 열심히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란 것이 콤플렉스였는데 이 책을 보고는 제가 옳다는 걸 확신했어요."

무라사키 타로(원숭이 조련사. 아버지의 권유로 원숭이 조련사가 되고 훈련시키던 원숭이가 사고로 죽자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사는 것이 고통임을 깨달은 순간 강해졌다."

모리야스 츠네요시(일류 정육 기술자. 학교 중퇴, 구구단도 못 외우던 열등생, 화려한 셔츠를 입고 노름판이나 기웃대던 양아치. 나중 이 분야에 관한 책이 없음을 알고 자비로 초호화판 정육 화보집 <쇠고기> 출간.)   "정말 칼을 잘 쓸 정도가 되면  칼을 사용하는 감각이 없어져요. 칼과 손끝이 하나가 되어야 하거든요. 칼로 자르는 게 아니라 잘라야 할 부분에 칼이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들죠."

미야자키 마나부(동물생태 사진작가. 어릴 때부터 공부는 안하고 산이나 들로 뛰어다녀 선생님이나 친구들로부터  "저 바보가 또 산을 뛰어다니네"라고 놀림 받던 열등생. 밤을 새워 부엉이 사진을 찍다가 위가 잘못되어 피를 토하는 등 죽을 고비를 두 번 넘겼다)   "죽고 싶을 때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어요. (...) 어느 날 아는 편집자가 고급 필름 스무 통을 보내주더라고요. 재기 불능일지 모르는 제게 기대를 거는 사람이 있는 걸 알고 그 필름을 다 쓸 때까지 절대로 죽지 않겠다고 결심했어요."

나가사와 요시아키(자전거 프레임 빌더는 자전거의 뼈대를 만드는 사람을 일컫는다. 고등학생일 때 지각생이라 걸핏하면 자전거를 타고 통학하다가 자전거 경주 선수가 됐고 어느 날 사고로 선수생활이 끝장나자 자전거를 만드는 사람이 되었다.얼마나 상징적인가!)  "타는 것도 좋았지만 자전거를 갖고 노는 것도 좋아했어요. 그래서 다행이었죠. 사고 후 전 자전거 기술자가 되겠다고 생각한 거예요.(...) 이탈리아에서 뭘 배워왔길래 그렇게 훌륭하게 됐냐고 물으면 참 곤란하더군요. 자전거 제작에는 따로 체계적인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도 아니거든요. 그 과정을 낱낱이 지켜보고 자기 것으로 체득하는 것밖에......"

마츠바라 히데토시(수할치는 매를 부리며 매사냥을 지휘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깊은 숲속에서 매가 잡아오는 고기를 나눠먹으며 막노동으로 최소한의 생활비를 벌며 살아간다. 자연 속에서 자급자족하는 생활은 그가 일찍부터 꿈꾸던 것이라고.)  "원래 예전부터 알지 못하는 곳에 가서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걸 좋아했거든요."

그 외 세계적인 소믈리에 다사키 신야, 일류 프랑스 요리사 사이스 마사오, 염직가 도미타 준, 레코딩 엔지니어 요시노 긴지 등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거의 대부분 학교에서 사회에서 못 말리는 말썽꾸러기에 열등생이었다는 사실이다. 보통사람들의 인생궤도에서 스스로를 슬그머니 놓아버린 사람들이다. 재미가 없어서......그리고 미친 듯이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매진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생에서 무언가를 이루었다.

중요한 건 '어떤 일의 대가(大家)가 되려면 먼저 도구의 대가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부나 명예 등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성공에는 관심이 없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만 열심히 파고들다 보니 어느 날 무엇인가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열등생이었다가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고  일가를 이룬  11인의 청년 시절  이야기를 듣다보면 힘을 얻는 동시에 슬그머니 낭패감을 맛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무엇을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인간인가?'

이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청춘은 오래 전에 종쳤고 이제 시들새들 늙어가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는 나같은 인간이 <청춘표류>라는 제목에 사정없이  이끌렸다는 사실이 어쩌면 하나의 단서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강력한 의문 하나, 여성들은 왜 단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는지? 왜? 왜? 왜? 일본에는 그렇게도 잘난 여자가 없나? 아니면 다치바나 다카시가 마초형의 인간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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깍두기 2005-03-21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말이죠, 이런 책을 읽다 보면요, 뭐를 미친듯이 좋아하는 것도 재능이니 함부로 따라하려고 하면 안된다는 생각이 든단 말입니다. 사실은 그게 가장 갖기 어려운 재능일지도.....

로드무비 2005-03-22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깍두기님은 뭘 미친듯이 좋아하는 게 없수?
있을 것 같은데요!
(사실은 나도 님의 말씀에 동감.^^)

깍두기 2005-03-21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요, 잠이 들락말락하는 그 노곤하고 아른아른한 시간을 가장 좋아해요.
(제가 어떤 인간인지 이제는 아시겠죠?ㅎㅎ)

로드무비 2005-03-21 1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친구와 마주앉은, 막 음식접시와 술병이 쟁반에 담겨 테이블로
옮겨지는 술집에서의 시간을 가장 좋아합니다.
(아셨어요? 제가 어떤 인간인지?ㅎㅎ)

하루(春) 2005-03-21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사람 저번에 KBS의 책 프로그램에 나왔을 때 엄청 보고 싶었는데, 아직 VOD로도 못 보고 있다는... 흑~ 책장이 미로처럼 천장까지 꽉 차있더군요.

Phantomlady 2005-03-21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이런 노력형 인간들을 보면 대충대충 사는 제 자신이 부끄럽고 절망이 미친듯이 표류하는군요. 자신의 세계를 가진다는 건 정말 멋진 일 같아요. 서재라도 열씨미 꾸려나가야지 에구구.......

니르바나 2005-03-21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치바나 다카시를 검색해보니 책을 읽는 즐거움이란 글과 함께 이런 이미지가 나오네요.

책을 읽는 자세가 편해 보이기는 하지요.

 


로드무비 2005-03-21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르바나님, 그림 좋습니다.
책은 편한 자세로 읽는 게 제일이지요. 그럼요.
(그런데 깜짝 놀랐잖아요.^^)
스노드롭님, 그들은 그들대로 살라고 하고 우리는 우리 식대로 살자고요.
알라딘 서재활동에나 매진하면서...ㅎㅎ
하루님, 책으로 가득 차서 부러웠다기보다 건물이 독특하고 예쁘더라고요.
건물 외벽을 장식한 고양이 캐릭터가 얼마나 근사한지...^^

플레져 2005-03-26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춘은 표류해야 멋진거 아닌감요? ^^
도구의 대가가 되란 말이 가슴에 콕 남아요.
싹싹 잘 비벼먹은 리뷰도...

로드무비 2005-03-26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도구의 대가 어쩌고는 제 가슴에도 콕 박힌 말이에요.
('겨울장미"라는 스릴러 영화에 나온 구절.^^)

DJ뽀스 2005-06-30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신이 노쇠한 청년 중 하나로서 11인이 너무 부럽네요. 추천 날리며 퍼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