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
이주혜 지음 / 창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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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삶을 써보세요. 쓰면 만나고 만나면 비로소 헤어질 수 있습니다. (16쪽)


말로 전할 수 없는 것들을 글로 써 전달하면 조금 나아진다. 그러나 상대는 다를 수 있다. 말이 더 직접적으로 다가오고 글은 오히려 이상하게 곡해할 수도 있다. 사실 어떤 심정은 말이든 글이든 전할 수 없다. 내 마음에만 깊이 박혀 스스로를 상처 주고 갉아먹기만 한다. 그럴 때 그 마음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치유하기 위해 추천하는 방법 중 하나가 글쓰기다. 이주혜의 장편소설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 속 화자도 그랬다.


남편의 잘못된 행동으로 하던 일을 접고 남편과 별거를 시작했고 딸과도 멀어졌다. 혼자의 삶은 피페해졌고 정신과 상담을 받기 시작한다. 의사의 처방대로 약을 먹었지만 우울, 불안, 불면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런 화자가 기대 없이 글쓰기, 정확하게는 일기 쓰기를 시작한다.


각자의 일기를 쓰고 나누는 모임에서 화자는 '시옷'의 시점으로 쓴 일기를 들려준다. 80년대, 열 살 여자아이의 일상을 통해 그 시대상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할머니, 아빠, 엄마와 함께 유복하고 평온했던 날들을 시작으로 조금씩 균열되고 무너지는 가정 안에서 어떻게 성장하는지 보여준다. 항상 자신을 아껴주고 사랑하던 아빠의 부재, 그 빈자리를 꿋꿋하게 채우는 할머니와 엄마. 자신은 이해할 수 없는 어른의 세계에서 인정받고 싶었던 아이의 모습은 안쓰럽다.


소설은 8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에서 알 수 있듯 사회적으로 혼란한 모습과 그것을 직접 경험한 개인적인 기록이자 역사의 기록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독자가 마주하는 건 화자인 '시옷'의 일기다. 짧은 머리와 옷차림으로 인해 남자아이로 인식해 합창단원이 된 아이. 노래 부르는 게 좋았던 아이는 자신이 여자아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상한 건 엄마와 할머니의 태도다. 그에 관해 정정하지 않는다. 시옷이 여자아이로 알려졌을 때에도 시옷을 달래주거나 하지 않는다. 합창단 촬영이 있던 날, 시옷은 자신이 노래를 잘 부르니 여자 아이든 남자 아이든 상관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지휘자는 노래 잘 하는 미성의 소년을 원했기에 여자 단복을 입고 나타난 '시옷'을 외면할 뿐이다.





아마도 엄마와 할머니는 빚에 쫓겨 집에 오지 못하는 아빠 걱정에 시옷은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다. 할머니와 엄마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시옷은 그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어른들은 아이는 몰라도 된다고, 나중에 알려준다며 무책임하게 회피한다. 시옷이 남자였다면 어땠을까? 기죽지 말라고 합창단복도 제일 먼저 준비했을 것이다. 같은 시대를 살아온 이들에게 시옷의 담담한 일기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 겹쳐서 다가온다.


소설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시옷의 마음을 들려준다. 빚을 갚기 위해 집을 팔고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가고 그곳에서 남동생 '수호'가 태어나고 '윤수'라는 아이와 보낸 시간. 뭉쳐진 기억이 하나씩 펼쳐지고 그때는 알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었던 엄마와 어른의 모습을 생각한다. 정작 어른이 되어서는 딸 해준의 마음을 읽을 수 없고 점점 멀어진다. 시옷과 엄마의 사이와 다르지 않다.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은 일기를 통해 시옷 자신을 들러싼 것들과 화해하는 소설이자 열 살 여자아이 시옷의 성장소설이다. 이주혜는 일기 쓰기가 삶을 돌아보는 것이고, 거부하고 외면하던 기억을 꺼내는 일이고, 상처와 직시하는 것이라 말한다. 일기 쓰기 교실의 강사 림자의 말처럼 말이다. 헤어지고 싶은 기억이 있다면 기록하세요. 어떤 수치심도 글로 옮기면 견딜 만해집니다. (23쪽) 온전히 이별하고 온전히 극복하는 건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조금 나아진다. 기록하는 순간, 그전의 나에게서 멀어지게 되니까. 시옷이 그랬던 것처럼.


내가 그때의 엄마보다 더 나이가 들어보니 알겠다. 처음부터 완성된 사람은 없다고. 할머니도 엄마도 아빠도 갈팡질팡 우왕좌왕하다가 그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택을 했을 뿐이라고. 겉보기와 달리 속은 무척 시끄러웠을 거라고. 여러 번 무너지고 또 무너졌을 거라고. 그래도 매 순간 끊임없이 선택하면서 그렇게 한발 한발 앞으로 걸어갔을 거라고. 사는 게 원래 그렇다고. 이제야 겨우 알겠다. (324쪽)


올해의 겨울은 폭설과 한파로 기록하고 기억될 것이다. 시간이 지나 올겨울을 떠올리고 내가 쓴 글을 검색한다면 이주혜의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을 읽던 날들도 따라올 것이다. '시옷'이었던 여자아이와 '수윤'이란 어른 여자와 함께. 그때의 내가 쓰고 있기를 소망한다. 그게 무엇이든 진심을 다해 계속 쓰는 사람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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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마지막 주문으로 구매한 책은 이렇다. 그러니까 정녕 마지막이다. 나를 위한 선물이라고, 크리스마스라고, 이런저런 이유를 붙이다 결국, 그냥 사고 싶어서, 읽고 싶어서, 궁금해서 산 책이다. 아무튼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오랜만인 것 같다. 주문한 책이 하루키의 소설을 직접 보니 묵직하다. 한 손에 꽉 들어찬 소설의 내용도 묵직할 것 같다. 어제부터 읽고 있는데 기시감이라고 할까. 우선 든 느낌은 그렇다. 끝까지 읽어봐야 알겠지만 말이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마냥 좋아하는 편은 아니라서 소설을 많이 읽지 않았지만 그의 고유성에 대해서는 조금 알 것 같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으면서도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사춘기적 느낌, 풋풋하고 미완의 것들, 상징적 이미지들.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것이 곧 하루키를 대하는 나의 태도니까. 누군가 거대한 새로운 세계를 말할지도 모르지만, 나의 독서는 그렇다. 독서는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니까.


나를 위한 선물 목록에 하루키의 소설만 있는 건 아니다. 살까, 말까 고민하다 결국 사게 된 엘리자베스 하드윅의 소설 『잠 못 드는 밤』은 왠지 올해의 마지막 소설로 좋을 것 같다. 분량도 많지 않으니까 적당하지 않을까. 아, 올해가 가기 전에 크리스티앙 보뱅의 책을 읽기로 했는데. 올해의 마지막에 내가 어떤 책을 읽게 될지, 아무것도 읽지 않을지 마지막이 되어야 알 수 있겠다. 이 소설은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란 노래가 생각나는 제목이다.


마지막 한 권은 로베르트 발저의 에세이 『연필로 쓴 작은 글씨』다. 양장본으로 책 만듦새도 고급스럽고 예쁘다. '희미해져가는 사람, 발저의 마지막 나날'이란 부제까지. 이런 책은 그냥 지날 칠 수 없지 않은가. 마지막은 언제나 아련함을 불러오고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하게 만든다. 그러니 2023년의 마지막 주문으로 완벽하지 않은가. 다가올 크리스마스에 다 먹지도 못하는 케이크 대신, 미리 산 책들. 나를 위한 선물로 충분하다.




주말부터 내린 눈은 아직 녹지 않았다. 곳곳에 보이는 빙판이 몸을 움츠러들게 만든다. 조심조심 걷는 마음으로 이 연말을 보내고 싶다. 올해 연락을 전하지 못한 이들에게 짧은 안부를 전할 수 있다면 좋겠다. 건강하게 지내라는 연말 인사를 보내고 새해의 복을 기원하는 마음을 전할 수 있었으면 한다. 가까운 이들에게 그런 마음을 보낼 수 있기를. 하루키의 소설 속 '너'처럼 아무 연락 없이 사라지지 말고. (아직 다 읽지 못해서 너의 재등장 여부를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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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12-19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리스마스인데 셀프 선물은 당근 아닙니까! ㅎ
알라딘 서재 분들은 늘 책 선물 셀프로 준다는 게 문제지만; ㅋㅋ
책들이 다 예쁩니다.
하루키 저도 어제부터인가 읽고 있는데... ˝기시감˝에 격하게 공감합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 (자꾸 삐딱한 시선으로 보지 말자고 채찍질 중ㅋㅋㅋㅋㅋ)

자목련 2023-12-19 16:17   좋아요 1 | URL
자고로, 책 선물은 셀프!
요즘은 책들이 다 예쁜 것 같아요. 특히 이번 세 권은 더욱 예쁘고요!
잠자냥 님의 삐딱함, 알 것 같아요 ㅋㅋㅋㅋ

망고 2023-12-19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나에게 선물 했어요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양장본이요ㅋㅋㅋㅋㅋ근데 결제하고 나서 너무 과했나 하고 약간 후회중 입니다ㅜㅜ

자목련 2023-12-19 16:15   좋아요 1 | URL
절대 과하지 않아요! 망고 님은 소중하니까요^^

새파랑 2023-12-19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시감 ㅋ 하루키 후기 작품들에는 기시감이 확실히 있긴 한데

그런 기시감이 저는 절대 싫지는 않더라구요~!!

자목련 2023-12-19 16:15   좋아요 1 | URL
새파랑 님은 하루키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아주 많이!!

레삭매냐 2023-12-19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춘수샘 팬은 아니지만 그래도 책이
나오면 꾸역꾸역 읽는답니다. 그것 참.

책이 생각보다 댑따 두꺼워 보이네요 ㅠ

눈이 다 녹지도 않았는데 오늘밤에 눈이
많이 내린다고 합니다. 언능 집에 가야 하
는데...

자목련 2023-12-20 09:08   좋아요 1 | URL
네, 분량에 제법 많아요.
이곳은 계속 눈이 내립니다. 안전한 출퇴근을 기원합니다^^

은오 2023-12-20 10: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시 크리스마스에도 케잌보단 책입니다 >.< ❤️ 케잌은 먹어봐야 똥된다...
오늘도 자목련님 향기가 물씬 나는 픽들! <연필로 쓴 작은 글씨>는 제게도 오고 있습니다 히히

자목련 2023-12-22 17:59   좋아요 1 | URL
은오 님, 방학이에요?
넘 추워요. 누워서 신나는 책 읽어요!!
 
단 한 사람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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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나는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우주의 먼지에 불과하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그런 순간이 있지 않은가. 지금의 현실이 마치 꿈처럼 느껴질 때 말이다. 오래전 침잠하던 시절 모든 게 아득했다. 잠이 들고 아침을 맞는 반복된 일상이 무의미했고 진짜는 달아난 가짜의 내가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무기력한 숨어들기 위한 변명이었던 것 같다. 최진영의 장편소설 『단 한 사람』을 읽으면서 문득 그 시절이 떠올랐다. 이유는 모르겠다. 작은 섬의 두 그루 나무로부터 시작되는 신비로운 설화 같은 이 소설은 좀 묘하다.


묘하다는 느낌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인간의 존재 이전 태초의 나무가 서로를 바라보며 성장하여 숲을 이루는지, 나무가 인간과 어떻게 이어져 인간의 죽음과 생명에 개입하는 과정을 들려준다고 할까. 아니, 그 모든 걸 상상하게 만든다고 하는 게 맞을까. 어쩌면 인간의 생과 사를 지켜보는 한 나무(신이자 자연)를 통해 전하는 계시인지도 모른다.


나무에 이어 소설은 장미수가 신복일과 낳은 다섯 남매로 시작한다. 세 딸 일화, 월화, 금화와 쌍둥이 목화와 목수는 자란다. 아들인 막내 목수는 누나가 아닌 언니라 부르며 지낸다. 금화는 쌍둥이를 데리고 숲으로 간다. 그리고 무서운 일이 일어났다. 커다란 나무가 금화를 덮쳤다. 목화가 어른들을 부르러 간 사이 금화는 사라졌고 목수는 겨우 목숨을 건졌다. 목수는 그날의 기억을 잃었고 금화는 찾을 수 없었다.


목화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열여섯 봄 목화는 꿈을 꾸었다. 사람들이 죽고 있었고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을 받으라고 했다. 단 한 사람만. 누구를 구할 수 있단 말인가. 왜 단 한 사람이어야 하는가. 그 한 사람도 목화가 정할 수 없었다. 꿈이었지만 그건 꿈이 아니었다. 엄마 장미수, 할머니 임천자로 이어지는 믿을 수 없는 숙명이었다. 엄마 장미수가 늘 피곤했던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할머니 임천자는 그냥 받아들였다. 누군가를 구하는 것 그것만으로 족했다. 하지만 엄마 장미수는 달랐다. 거부하고 경멸했다. 목화는 의미를 찾으려 했다. 대를 이어 내려오는 능력이라고 할까. 하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임천자는 묵묵히 장미수의 아이들을 돌보고 장미수는 자신이 끝이기를 바랐다.





둘이었다가 하나가 된 나무. 부활한 나무. 시간을 초월한 생명. 무성한 생에서 나뭇잎 한 장만큼의 시간을 떼어 죽어가는 인간을 되살리는 존재. 그 모든 것을 목화는 첫 소환에서 깨달았다. (92쪽)


목화가 단 한 사람을 구하는 과정은 당연하게도 무자비한 죽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죽음을 떠올리게 만든다. 안타까운 사고에서 가해자를 살려야 할 때 따르고 싶지 않았다. 비관했던 목화는 점차 알고 싶었다. 왜 자신인지. 꿈이라 여겼지만 자신이 누군가 구한 일은 현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기사를 검색하면 알 수 있었다. 목하는 자신이 구한 그 사람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자신이 구한 단 한 사람. 그들은 목화의 존재를 모르지만. 그리고 목하는 그 일을 중개라고 부르고 단 한 사람을 구하는 일을 받아들인다. 다행인 건 목화 곁을 지키는 목수가 있었다. 소환되어 사람을 구하는 동안 목수는 목화 곁을 지킨다.


중개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뭔지 알아? 목수는 짐작하여 대답했다. 글쎄, 살려달라는 말? 목화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사랑한다는 말. 그날 목수는 그 말을 기록했다. (104쪽)


영원한 건 오늘뿐이야. 세상은 언제나 지금으로 가득해. (148쪽)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는 모두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누군가. 예외 없이 그를 향해 하는 말, 사랑한다는 말. 작가가 나무를 통해 전하고 싶었건 바로 그것인지도 모른다. 수많은 죽음 가운데 단 한 사람만 구할 수 있는 능력, 대를 이어진 숙명. 목화 같은 사람이 어딘가 존재하는 건 아닐까. 어쩌면 우리 모두 목화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각자가 단 한 사람만 구할 수 있다면, 서로가 서로를 구할 수 있으니까. 놓치는 일은 절대도 없을 테니까.


오직 사람만이 다른 생명을 위해 기도한다. 신을 필요로 한다. 기적을 바란다. 먼저 떠난 존재가 너무 그리워 죽음 이후를 상상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208쪽)


아름다운 소설이 전쟁 같은 삶을 살아가는 우리를 위로한다. 상처, 비관, 슬픔, 상실, 죽음의 소용돌이에서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가는 우리를 가만히 지켜보며 전부를 내어주는 나무처럼. 어쩌면 나는 목화 같은 존재가 살려낸 단 한 사람일지도 모르니까. 살아있음에 대해 감사하고 소중한 오늘을 사랑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나의 몫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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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3-12-15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과 커피잔이 무척 잘 어울립니다. 이 책 칭찬이 자자하여 기대되네요^^

자목련 2023-12-17 15:25   좋아요 1 | URL
꼬마요정 님의 첫 문장이 저를 기쁘게 합니다. ㅎㅎ
이 소설, 괜찮았어요^^

공쟝쟝 2023-12-15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얼마전에 본 영화 <너와 나>도 비슷한 맘을 먹게했는 데… 지금을 사는 뛰어난 작가와 연출가들은 그런 질문을 던지나봅니다.. 🥲

자목련 2023-12-17 15:25   좋아요 0 | URL
조현철 배우가 감독한 영화죠? 저도 한 번 보고 싶네요^^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7
알랭 로브그리예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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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이건 뭐지? 하는 소설을 만난다. 놀람과 감탄의 연속이라고 할까. 알랭 로브그리예의 소설 『진』을 읽으면서도 그랬다. 도대체 나는 소설을 제대로 읽고 있는 건가 의문이 드는 거다. 읽다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하나, 고민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그게 소설의 흥미를 떨어뜨린다는 건 아니다. 다만,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정도라고 할까. 아무튼 『진』은 매우 독특한 소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소설은 알랭 로브그리예가 미국 대학생들을 위한 교재로, 그러니까 프랑스어 문법을 위한 교재로 쓴 텍스트로 시작한다. 아, 물론 프랑스어를 공부하지도 않고, 원서로 읽을 일이 없는 나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니 이야기에만 집중해도 상관없다. 그런데 그 이야기라는 것이 갈피를 잡기가 어렵다는 거다. 소설 중간에 시점도 알라지고 시제도 달라져서(아, 교재라서 그랬던 걸까?) 혼란스럽다. 그럼에도 뭔가 비밀스러운 장면이 계속 이어져 독자를 그 비밀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게 만든다.


이제 소설을 이야기해 보자면 젊은 남자 '시몽'이 구인 광고를 보고 면접을 보러 어느 장소에 도착했다. 면접을 보기 위한 공간이라고 하기엔 적절하지 않은 곳에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 없는 사람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자신을 '진'이란 이름의 여자로 자신의 지시에 따르라고 한다. 그 지시도 모호하다. 파리 북부역으로 가라는 것뿐. 역으로 향하던 시몽은 어느 건물에서 나온 소년이 쓰러진 장면을 목격한다. 소년이 죽은 줄 알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시몽 앞에 ‘마리’란 이름의 소녀가 등장한다. 그리고 소년이 죽지 않았다고 알려준다. 소녀의 말대로 깨어난 소년의 아름은 ‘장’이다. 마리와 장은 시몽을 인도하는데, 이상한 건 시몽이 그대로 따른다는 것이다. 독자인 나도 뭔가에 홀린듯하다.


정신을 추스르려고 무진 애를 쓴다. 내가 아직 처박혀 있는 어둠은 잠에서 깨어나기를 더욱 힘겹게 할 뿐 아니라, 잠에서 깼다는 사실 자체를 불확실하게 만든다. 내가 잠에서 깨는 꿈을 꾸는 동안은 그 잠이 연장되는 느낌이랄까. 아무튼 시간에 대한 최소한의 관념조차 지금은 가지고 있지 않다. (60쪽)


계속해서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장이 이끄는 대로 눈을 가리고 택시 비슷한 걸 타고 낯선 장소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기억을 잃는다. 그리고 같은 장소에서 깨어나고 그곳에서 마리를 만나는데, 그녀는 이미 죽었다고 자신을 설명한다. 아니, 이건 도대체 뭐지? 1981년에 쓴 소설이 SF 소설이었나? 과거의 기억 한 장면, 같은 장소 다른 인물, 환상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들이 발생한다.


점진적으로 기억이 희미해지고…… 가까이 다가가려 할수록, 기억은 내게서 점점 더 멀어져…… 마지막 불빛, 조금만 더…… 그러나 아무거도 없다. 결국 짧은 환생에 불과할 터. 많은 이들처럼 내게도 빈번한, 덧없이 생생한 그 느낌을 나는 잘 안다. 이른바 미래의 기억이라 부르는 현상. (91쪽)


시몽은 그대로인데, 마리와 장은 같은 듯하면서도 다른 존재로 등장한다. 어쩌면 나는 소설을 잘못 읽고 있거나 잘 못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소설을 계속 읽고 멈추지 않는 이유는 시몽이 맡은 임무가 무엇이며 진이 누구인지, 진의 실체가 궁금해서다. 면접 장소에서 진과 함께 등장한 마네킹, 눈을 가리고 도착한 곳에서 자신과 같은 모습(선글라스를 끼고 지팡이를 든)을 한 수많은 남자, 그들에게 조직에 대해 설명하는 목소리.


그나마 안도하는 건 8장(그렇다. 이 소설은 모두 8장으로 구성되었다.)에 등장하는 ‘나’다. 나의 이름은 '진'으로 '시몽'이 면접을 보러 온 장소에서 시몽과 만난다. 맞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 장소, 소설의 처음이다. 프롤로그부터 7장까지 실재가 아닌 환상 같았다면 8장은 그 모든 것에 대한 설명이라 할 수 있는 진짜 소설이라고 할까. 하지만 의심을 거둘 수 없다. 마지막에 등장한 진은 진짜 진일까. 그녀는 소설 초반에 등장한 마네킹일지도 모르고 어린 마리의 다른 버전일지 누가 알겠는가. 중절모를 쓰고 선글라스를 끼고 트렌치코트를 입은 표지의 인물이 분명 진이라고 생각하다가 진짜 그럴까 의심한다.


실험적인 소설이다. 내게는 그렇다. 짧은 분량에 물음표(?)와 느낌표(?)가 가득하다. 미스터리, 타임슬립, 추리소설, 딱히 규정할 수 없는 소설이니까. 같은 듯 다른 이미지로 변모하는 인물, 하나의 공간을 다채롭게 활용하는 능력으로 미로 같은 소설 속에 독자를 꼼짝 못 하게 만든다. 이상한 건 그게 불쾌하지 않다. 오히려 더 복잡한 미로를 경험하고 싶은 매력에 빠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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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12-14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가 모호하군요 ㅋ 자목련님 리뷰 읽어보니 어라? 읽어볼만 할거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듭니다 ㅋ

자목련 2023-12-15 12:11   좋아요 1 | URL
모호하지만 지루한 모호함은 아닌.
새파랑 님, 즐겁게 만나시길~~
 

최대한 자제해야 한다는 결심을 지키려고 노력한 결과물이다. 궁금한 책은 많고 읽고 싶은 책도 많지만 12월의 책 구매는 이 소설들로 끝을 내려고 한다. 현재는 그렇다. 사실, 사진의 맨 아래 류드밀라 울리츠카야의 『소네치카·스페이드의 여왕』은 책장을 정리하다 발견했다.


알라딘에 들어가 구매내역을 살펴보니 11월의 첫날이었다. 잠자냥 님의 리뷰를 보고 산 책이었다. 무려 40일을 방치(?) 하고 있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니 올해가 가기 전에 꼭 읽어야 한다. 아, 올해가 가기 전에 읽으려고 다짐한 책들은 왜 이리 많은가. 이제 겨우 20일 밖에 남지 않았는데.






좋은 소설을 발견하는 일은 기쁜 일이다. 이미 좋은 소설을 쓴 작가가 쓴 다음 소설을 만나는 일도 그렇다. 그래서 『맡겨진 소녀』로 만난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읽기 전에 기쁨이 한가득이다. 알랭 로브그리예의 『진』도 기대하는 소설이다. 물론 겨울이니 『소설 보다 : 겨울 2023』도 읽어야지. 가을 2023을 다 읽지 못했지만 말이다. ㅎ




누군가 연말에 많은 송년회를 하겠지만 나는 책을 읽고 싶다. 아니, 읽어야 한다. 지금의 게으름에서 일어나 읽어야 한다. 12월의 소설을 읽고 미처 읽지 못한(아, 너무 많구나) 책들도 차곡차곡 읽어야 한다. 도대체 뭐 하느라 책도 안 읽는지. 이러다 책들의 미움을 한가득 받을 것 같아 무섭구나.





12월의 소설은 하나같이 얇다. 열심을 내야지. 얇다고 나중으로 미루면 또 책장에서 찾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런 문장을 한 번 소리 내어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어느 소설인지는 나만 아는 것도 좋겠다. 먼저 읽은 사람은 바로 알겠지만 말이다.






나는 정해진 시각에 정확히 도착했다. 여섯시 반. 벌써 거의 어두컴컴하다. 창고는 닫혀 있지 않다. 나는 자물쇠가 없는 문을 밀면서 들어선다. 내부는 온통 조용하다. 좀더 바짝 귀를 기울이자, 꽤 가까운 곳에서 맑은 소음 하나가 규칙적으로 탐지된다. 제대로 잠그지 않은 수도꼭지 물이 새면서 통이나 대야 또는 고인 웅덩이에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다.


읽지 않은 소설을 생각하는 일, 제목만 보고 소설을 상상하는 일, 즐거움이다. 체득하는 즐거움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걸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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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12-11 11: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12월 책 네권이 딱 아담하고 읽고싶어지는 두께네요~!!
제목에서부터 좋아보입니다~!!

자목련 2023-12-11 11:50   좋아요 2 | URL
네, 얇아서 빨리 읽을 것 같기도 한데..
모두 기대하는 소설이에요!

잠자냥 2023-12-11 11: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40일이나 방치하다가 발견! ㅋㅋㅋ
올해가 가기 전에 읽으세요.
그리고 <진>은... 이미 사셨네요. 제 리뷰 읽고 사신다고 했는데 리뷰가 오늘 올라옴;;;

자목련 2023-12-11 11:50   좋아요 1 | URL
<소네치카>, <진> 모두 자냥 님 리뷰 덕분에 탱투하고 샀어요. <진>리뷰도 좋을 거라 여기고!!

거리의화가 2023-12-11 13: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40일 방치에 저는 몇 년간 묵힌 책도 많은데 중얼거리며 자괴감에 빠져듭니다^^;;; 얇은 책들이 오히려 더 내용이 더 압축적인 경우가 많아 읽기 어렵더라구요. 자목련님 남은 12월 즐거운 독서 생활 이어가시길!

자목련 2023-12-12 17:12   좋아요 0 | URL
몇 년간 묵힌 책은 당연 무지 많지요. 다만, 그 책은 책장에 보이거든요. ㅋㅋ
화가 님 말씀처럼 얇은 책이 읽기 어려운 경우도 많더라고요!

그레이스 2023-12-14 07: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제 미안한 맘도 못느끼는 그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 ㅎㅎ

자목련 2023-12-14 14:28   좋아요 0 | URL
아마도 서재 대부분의 이웃이 그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ㅎㅎ

희선 2023-12-15 0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 님 십이월이 가기 전에 읽고 싶은 소설 만나시기 바랍니다 책을 사두면 언젠가 보겠지 하는 생각을 가지기도 하는군요 출판시장은 줄어든다고 하는데 여전히 책이 많이 나오네요


희선

자목련 2023-12-15 12:28   좋아요 0 | URL
읽고 싶은 소설, 책들이 계속 나와서 걱정입니다.
희선 님, 비 오는 금요일 따뜻하게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