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카, 영감의 도구
박지호 지음, 박찬욱 외 사진 / arte(아르테)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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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백영옥)

 

 어떤 사진에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있다. 그것은 때로 사진을 찍은 이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와 같을 때도 있고 다를 때도 있다. 필자와 독자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글처럼 말이다. 장황하게 글로 설명하기보다는 한 장의 사진으로 현재의 자신을 표현할 수도 있다. 글과 사진, 같은 듯 다르다. 다르면서도 같다. 나는 사진에 대해 잘 모른다. 카메라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사진작가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한다. 사진을 찍는 걸 아주 좋아하는 편도 아니다. 그러나 어떤 사진들을 좋아한다. 계속 바라보게 만드는 사진, 그 안에 담긴 찰나의 감정을 흠모한다. 그러니 『라이카, 영감의 도구』에서 내가 기대했던 건 라이카에 대한 기대가 아니었다. 누군가는 그들이 사용하는 라이카에 대해 궁금할 것이다. 그들이 왜 라이카를 쓰는지 그 인연에 대해서 말이다. 박찬욱 감독은 기능적인 측면을 칭찬했고 더 콰이엇은 따뜻한 느낌이 좋다는 부분이 더 눈에 들어올 것이다.

 

 

(박찬욱)

 

 라이카를 좋아하는 이유요? 라이카는 색깔이 유난스럽거나 인위적이지 않아서 좋아요. 유명한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제품이 아니잖아요. 그냥 기능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방해되는 것들을 배제해 미니멀한데 그 어떤 스타 디자이너의 작품보다 우월하죠. (박찬욱, 31쪽)

 

 라이카는 딱 색감이라고만 얘기할 수 없는 따뜻한 느낌이 참 좋은 것​ 같아요. 뭔가 살아 있는 듯한 묘한 생명감이 사진에서 풍겨 나오거든요. (더 콰이엇, 250쪽)

 

 나는 카메라로 담고 싶은 건 무엇인가. 그 순간 무엇을 생각했을까. 그런 기대감이었다. 박찬욱, 하시시 박, 김종관, 백영옥, 김동영, 더 콰이엇, 유영규가 들려준 그 찰나의 감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저마다의 분야에서 전문가라 불리는 이들이 사진으로 간직하고 싶었던 순간, 풍경, 그리고 그 이야기들.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들고, 음악을 만들고, 사진을 찍고 디자인을 하는 이들이 들려주는 사진에 대한 추억들. 그리고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진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무엇을 보면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지 말이다. 6명이 자신의 소유한 라이카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 가운데 나는 유독 김종관 감독의 시선이 닿은 사진이 좋았다. 빛, 그림자, 사람들, 일상의 풍경들이 담긴 사진들에 자꾸만 눈이 멈추었다. 전혀 모르는 그에 대해 어떤 이미지가 생겼다고 할까. 사진이란 그런 것이구나 생각한다.

 

 

(김종관)

 

 어쨌든 카메라 자체도 레이어 인 거잖아요? 제 눈과 피사체 사이의 레이어.

사진이란 나에게 무엇일까, 사실 대답할 때마다 달라지는 것 같은데요. 요즘 드는 생각은 그냥 내 옆에 딱 달라붙어 있는 수호신 같은 느낌이에요. (하시시 박, 81쪽)

 

 어쨌든 사진은 어떤 시공간이든 사각형의 프레임 안에 넣은 거잖아요.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과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개성이 있어요. 다른 체계를 갖고 있는 거죠. (김종관, 121쪽)


 수많은 풍경이 다 사진으로 기록되는 건 아니다. 우리는 어떤 특별한 순간, 간직하고 싶은 표정을 사진으로 남긴다. 단 한 장의 사진이 소설로 태어나기도 하고 영화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그 과정에 라이카가 참여하고 그 작업을 라이카가 동행한다면 맞을까. 라이카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남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사진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사진을 찍는다는 건 무엇일까, 내가 찍은 사물과 풍경, 그리고 누군가를 떠올린다. 사진으로만 담을 수 있는 것들, 사진으로 추억할 수 있는 그리움. 사진으로만 전달할 수 있는 어떤 힘을 만난 것 같다. 그것은 일상을 기록하고 순간을 간직하며 나를 표현하는 동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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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리 지나가기를 바랐던 11월의 마지막 날이다. 한 장 남은 달력을 보면서 12월이라도 잘 살아보자고 혼잣말을 한다. 두꺼운 이불을 덮고 잠을 자면서 김장 김치로 채워진 냉장고를 보면서 중얼거리는 거다. 김장을 하지 않고도 김장 김치로 냉장고를 채우는 날들이다. 고마운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더 주고 싶어 하는 마음은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제대로 거절을 하지 못해서 그런 걸까. 냉장고는 고무줄처럼 늘어나지 않는데, 내가 하루에 한 포기씩 김치를 먹는 것도 아닌데. 물론 마음의 소리다. 어쨌거나 맛있는 김치를 먹는 겨울이 남았다.

 

 어제는 제법 긴 통화를 했다. 오랜만에 걸려온 전화였고, 그런 전화에는 어떤 상심이 스며들기 마련이다. 그 상심 때문에 자주 연락을 못했으니까. 이야기를 할 수 있으니 제법 괜찮아졌다고 말하면서 좋지 않은 이야기를 전한다고 미안해했다. 살면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고. 나는 많이 힘들었겠다는 말을 건넸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일들이 현실에서도 일어난다는 걸 우리는 안다. 현실에서 일어나니까 영화가 되고 소설이 된다.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들이 일어나는 게 세상사라는 걸 알면서도 그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 나를 피해 가기를 바란다. 그러니까 12월에는 상심의 자리에 소소한 기쁨이나 즐거움 같은 게 도착했으면 좋겠다.

 

 핸드폰 메모장에는 이런 메모가 있다. 12월에는 멀리 사는 친구에게 시집 선물하기(그녀가 좋아하는 시인의 이름도 적혀있다), 성탄 카드 보내기. 어려운 일이 아닌데 지키지 못 할 때가 더 많다. 받기만 하는 마음을 전할 수 있는 12월로 만들어야 할 텐데. 더불어 나에게 보내는 마음도 나쁘지 않겠다. 마음을 전할 책으론 필립 로스의 『아버지의 유산』, 문학동네시인선 100 기념 티저 시집 『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 정여울의 『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에서 골라도 훌륭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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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7-12-01 03: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제 12월을 맞이하는 기분이 점점 달라져 가요.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네요. 정갈한 글 잘 읽고 갑니다.

자목련 2017-12-01 07:10   좋아요 1 | URL
네, 엊그제가 1월이었나 싶은데 벌써 12월이에요. 제대로 살고 있는 건지, 사는 게 참 두렵다는 생각도 들어요. 건강하고 평온한 12월 시작하세요^^
 
세계화의 종말 - 탐욕이 부른 국가 이기주의와 불신의 시대
스티븐 D. 킹 지음, 곽동훈 옮김 / 비즈니스맵 / 2017년 10월
평점 :
절판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말이 있다. 위기 상황이 닥칠 때마다 우리는 힘을 모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혼자보다는 둘이 낫고 둘보다는 셋이 낫다고 우리는 배웠으니까. 그런데 과연 국제사회에도 여전히 통용되는 말일까.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행보를 보면 세계화의 의미는 퇴색해지는 게 현실이다. 영국 경제학자인 스티븐 D. 킹의 『세계화의 종말』은 이러한 세계정세를 자세히 분석하고 탈 세계화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설명하는 책이다. 먼 미래가 아니라 가까운 미래에 우리에게 닥칠 문제들을 점검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궁극적으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말이다.

 

 저자는 경제학자의 시선으로 접근한 게 아니라 세계의 역사, 지리, 정치 철학, 과학발전 등 전방위적으로 세계화의 과거, 현재, 미래를 다룬다. 산업혁명으로 절대 몰락하지 않을 것 같았던 대영제국의 처참함, 유럽의 열강이었던 스페인의 모습, 1930년대 대공황기... 때문에 한 권으로 요약한 세계사를 만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가장 중점을 두는 건 정치적 이해관계와 세계 각국의 이익을 위한 갈등의 흐름을 살피는 데 있다.

 지난 세기를 돌아보면 강대국(미국, 소련)은 서로를 경계하면서도 힘을 과시하려 했고 개발도상국 역시 국가 간 협력을 위해 뭉쳤다. 그러니까 여러 국제기구를 만들고 가입하고 그 안에서 나름 발전을 해왔다는 말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UN, OECD, IMF를 시작으로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우선은 가입했던 기구들이 많다. 마치 성장과 발전이 보장된 것처럼 국제기구의 힘은 컸고 그에 대한 의존도는 높았다. 그만큼 자본주의와 자유시장의 세계화가 힘을 발휘한 것이다. 모두가 성장한 듯 보였지만 1980년대 이후의 자유무역 원칙들로 인해 쇠퇴기를 걷고 있다. 거기다 중국을 선두로 한 신흥개발국의 힘이 커지면서 세계화를 바라보는 시선이 급격하게 변화했다. 빠르고 놀라운 기술발전도 한 축을 거들었다. 우방이라 불리는 국가나 강대국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급자족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면 불가피하게도 세계화와 이것의 하부 담론들을 바라보는 태도도 달라진다. 세계화에 대한 서구의 견해는 늘 일정했다. 세계화는 서구의 가치를 세계로 전달하는 것. 다만 각자 다른 역사와 신화를 지닌 세계의 여러 지역이 서구의 가치에 그다지 몰입하지 않았을 뿐이다. 게다가 서구가 아닌 세계의 눈으로 볼 때, 서구의 가치는 절대 일관되지 않았다. 이를테면 19세기의 제국주의적 태도는 20세기의 자결주의적 입장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161쪽)
 
 저자는 21세기의 세계화에 대한 가장 핵심적인 건 사람, 기술, 돈과 관련된 문제라고 언급한다. 사람과 관련된 문제는 국경(國境) 없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뜻도 포함된다. 노동력의 확보, 자유로운 기술의 이동으로 더불어 발전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수많은 난민과 이민자들로 인해 수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국제사회가 도움을 주고 그들과 함께 성장했던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던 일들이다. 기술을 보면, 과학기술의 발전은 세계화의 도약의 발판이 될 수도 있는 반면 세계화를 파괴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세계 발전보다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금융은 움직일 거라 말한다. 당장 떠오른 건 핵과 인공지능이다. 둘은 다른 듯 보이나 같은 맥락이다. 기술발전으로 인해 가장 먼저 피해를 보는 건 노동자와 농민이다. 일자리는 사라지고 가난을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반대로 다국적 기업을 소유한 국가의 부는 급성장한다. 이처럼 세계의 경제적 파이는 커졌지만 이를 분배하는 과정에 갈등이 발생하고 이를 해결하려는 국제기구는 없다는 것이다. 거기다 테러의 공포에 두려움을 떠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서슴없이 전쟁에 가담하는 국가가 있는 게 현실이다. 과거 세계 평화와 안전을 위해 존재했던 국제기구들이 신뢰를 잃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성공적인 세계화는 단순히 시장이 주도하는 과정이 아니다. 이제 또한 국제적으로 서로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정할 수 있는 기반이 되는 사상과 제도의 뒷받침이 필요하다. (298쪽)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세계화로 얻었던 것들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무조건 자국을 보호하려는 이기주의가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현실도 직시해야 한다. 물론 함께 몰락하는 걸 선택한 국가는 없을 것이다.‘세계화의 종말’이라는 다소 무섭고 거침없는 제목은 결국 다양한 세계화가 필요하다는 걸 알려준다. 한 권의 책을 읽고 세계화의 종말이나 비전에 대한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세계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현재 국제사회에서 우리나라의 위치와 상황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경제학을 공부하거나 국제정세에 관심이 많은 이들에게는 아주 유용한 책이다. 뉴스와 신문을 통해 정보를 얻는 나와 같은 보통의 독자에게도 훌륭하다. 세계화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은 나의 시선을 확장시키고 질문을 던졌으니까. 세계화는 반드시 필요한가, 세계화로 인해 이익을 보는 건 누구인가, 세계화의 미래를 예측해 본 적이 있는가. 그러니 이러한 시점에 저자의 훌륭한 분석과 의견은 좋은 정보가 된다. 시기적절하게 세계를 읽을 수 있도록 도와준 유익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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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곳곳에 눈이 내렸다. 폭설이 내린 곳도 있고 눈이 내리다 그치기를 반복하는 곳도 있다. 11월인데 겨울의 절정에 다다른 것처럼 세상이 하얗다. 겨울과 눈은 잘 어울리는 조합니다. 그러나 사고 소식도 들려서 걱정은 커진다. 첫눈이 내릴 때 지인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읽을 거라고 말했었다. 이 계절에 가장 적절한 선택이다. 첫 문장으로 잘 알려진 소설이지만 때로 그 소설을 추천한 작가로 기억하기도 한다. 내게는 그렇다는 말이다. 바로, 김연수. 그는 이런 글을 썼다. 사랑과 소설이라니. 사랑 같은 소설, 소설 같은 사랑을 꿈꾸게 만든다.

 

 사랑이란 두 사람이 어떤 나라를 함께 여행하는 일과 비슷해요. 두 사람만이 가본 이상한 나라. 그러다가 헤어진다면 그 나라에 사랑하는 사람을 남겨두고 혼자서 국경선을 넘는 일. 출국심사를 받기 전, 그가 동고동락했던 현지인과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는 것처럼, 헤어질 때가 되어 “당신은 좋은 여자”라고 말하는 건 남자들의 상투적인 수법이지요. 그건 예의상 하는 말에 불과해요. 왜,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유명한 별사도 있었잖아요. 하지만 이제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하며 허둥지둥 출국 심사장을 빠져나와 그 나라의 국경을 넘어가자마자, 그들은 알게 되죠. 이제 자신이 다시는 그 나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걸. 자신은 영원한 입국거부자의 신세가 되었다는 걸. 모든 게 끝나고 나면 사랑했던 기억은 상투적으로 회고됩니다. 모든 여행의 기억이 낭만적으로 떠오르듯이. 그때가 되면 다들 알게 될 거예요. 상투적으로 회고되는 그 모든 기억 속에서 가장 낯선 말이 그 말이었다는 걸. 당신은 좋은 여자야.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가 왜 헤어진 것인지. 모두지 이해되지 않는 그 말. 당신은 좋은 여자야.

 

 김연수가 읽고 선택한 문장을 이야기하려는 건 아니다. 어쩌다 보니 그가 읽은 소설과 시를 계속 말하고 있다. 소설가가 선택한 시라면 어떨까. 그의 소설과 그의 산문집은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책이다. 뭐랄까, 김연수만의 고요하고도 활동적인 무언가가 있다고 해야 할까. 김연수가 고른 시, 그리고 시에 따른 그의 느낌. 『우리가 보낸 순간- 시』는 날마다 시를 읽는 마음을 상상하게 만든다. 이렇게 눈으로 시작된 하루는 더욱 그렇다.

 

 어떤 시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불러오고 어떤 시는 첫사랑의 아픈 기억을 꺼내온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리게 만들고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싶을 정도로 어려운 시도 있다. 내가 읽은 시와 그가 읽은 시의 접점을 찾는 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읽고 이야기하는 시. 하나의 시를 통해 우리는 어디서나 만날 수 있다. 아무 때나 꺼내 읽어도 좋은 아름다운 시. 아름답다는 게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문장들. 시가 있어 시를 통해 새롭게 만나는 세상, 그리고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문장. 그리고 11월이 아니었더라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르는 이런 글들. 안현미의 시 「시간들」에 대한 김연수의 글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안현미의 시보다 김연수의 글이 좋아서 계속 이 글만 읽고 싶어진다. 매년 십일월이 되면 펼치고 싶다.

 

 십일월은 온몸으로 귀를 기울이는 법을 배우는 달이랄까요. 어느 밤, 무심결에 창문을 열고 집 앞 골목을 바라보노라니 작은 정원의 나무에서 숨을 쉴 때마다 한 장씩 나뭇잎이 떨어지고 있더군요. 멀리서 아이가 달려가는 듯한 그 소리. 떨어지는 잎들을 보며 도루왕보다 더 빨리 가을이 지나가고 있다는 걸 느끼지 못했더라면 그 희미한 소리, 하지만 마치 온 세상이 떨어져 내리는 듯 내 마음을 장중하게 울리던 그 소리를 듣지 못했겠죠. 그리고 몇 개의 낮과 몇 개의 밤이 다시 지나가고 난 뒤, 나뭇잎들은 모두 떨어져 내렸어요. 청소부는 나무의 발치에 떨어진 잎들을 한데 모아 자루에 넣었죠. 그 자루에 나무의 한 해가 있다는 건 알겠는데, 그렇다면 그 소리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요? 잎이 떨어지는 소리들이 어딘가에 있다면, 그 목소리들, 당신이 내게 들려준 수많은 말들도 거기에 있는 걸까요? 지나간 날의 소리들은 어떤 귀로 들어야만 하는 걸까요?

 

 11월은 유독 길고 지루하게 느껴진다. 올해도 그렇게 지나간다. 짧은 것보다 긴 게 낫다고 할 수도 있지만 나는 좀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렇다고 대단한 12월에 대한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올해는 11월을 견디기 힘들 뿐이다. 그래서 황현산의 산문집 속 이런 문장을 찾아 읽었다. 오직 11월을 위한 문장처럼 다가온다. 차갑고 선명한 공기를 건넨다고 할까. 11월을 향한 애정이 기지개를 펼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같다.  

 

 11월은 아름다운 계절이다. 마른 잎사귀들이 떨어지고 나면 감춰져 있던 나무들의 깨끗한 등허리가 드러난다. 꽃 피고 녹음 우거졌던 지난 계절이 오히려 혼란스러웠다고, 어쩌면 음란하게 보이기까지 했다고 말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한 시절의 영화는 사라졌어도 세상을 지탱하는 곧은 형식들은 차가운 바람 속에 남아 있다. 마른 석류보다 더 작은 새들이 주목의 붉은 열매를 쪼다가 돌배나무의 앙상한 가지로 날아올라간다. 높은 가지에서 관목 숲으로 미끄러지듯 떨어져내릴 때는 바람에 날리는 낙엽과 구분하기조차 어렵다. 이제 겨울이 오면 저것들은 어디에 몸 붙이고 살아갈까. 그러나 새들은 욕망도 불안도 떨어져 쌓인 나뭇잎들 속에서 벗어두고 한 알의 맑은 생명으로만 남은 듯하다. (240, 241쪽)

 

 한 계절을 산다는 것, 한 계절을 보낸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자꾸만 생각하는 11월이다. 어제 수능을 마친 아이를 둔 지인에게 고생했다는 문자를 보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였다. 그들에게 11월은 얼마나 힘들고 버거웠을까. 우리는 모두 11월을 산다. 아니다. 우리는 11월을 사는 게 아니라 오늘을 사는 것이다. 11월이 아니라 그저 오늘을 견디는 것. 나는 내 감정에 취해 11월이라는 달에 너무 많은 것을 주렁주렁 달아놓으려 하고 있다. 아직 11월은 끝나지 않았다. 11월의 문장도 계속되겠지만 김상혁의 시로 마무리해도 괜찮겠지. 모두의 11월을 위해, 11월의 안녕을 바라며.

 

 십일월은 내년을 기대하기에도 한 해를 돌아보기에도 좀 이르다. 자동차 정비를 핑계로 부모에게 꾼 돈으로 아이를 지우거나 그런 일을 겪고 내가 개종을 해도 지인들은, 십일월은 참 조용한 달이야, 하고 낮게 중얼거리고는 차를 따뜻하게 끓이기 시작할 만큼 날씨가 제법 쌀쌀해지는 것이다. 할아버지가 죽었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애인과 모텔 전기장판 위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아버지를 잃게 된 어머니의 나이를 생각하면서. 십일월 우기에 태어났다는 신에 대해 생각하면서. (「십일월」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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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엔 오늘 첫눈이 내렸지만 이곳엔 어제 첫눈이 내렸다. 첫눈이라는 것 외에는 큰 감흥이 없다. 다만 여느 해와 다르게 첫눈이 내리는 광경을 다른 이들과 함께 보았다는 점이다. 예배를 드리러 가는 차 안에서 우리는 첫눈을 보았다. 확인할 수 없는 크기의 첫눈이 아니라 제법 눈송이가 큰 눈이었다. 우리는 저마다 첫눈이 온다고 말했다. 교회에 도착하기 전까지 첫눈에 대해 추위와 김장에 대해 말하였다. 말을 하는 이는 노부부였고 나머지는 추임새를 거들기도 했고 웃음으로 답하기도 했다. 언제 김장을 해야 하는지, 배추 값은 어떤지, 추워서 큰일이라는 둥 소소한 일상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 일상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에 감사까지는 아니었지만 우리는 다시 겨울을 맞고 첫눈을 보는 것에 안도감을 느꼈다. 교회에 들어서면서 나누는 인사는 역시 첫눈이 온다는 것이었다. 예배를 드리는 도중에도 첫눈은 계속 내렸다. 작은 창문으로 보이는 눈발이 참 고왔다. 쌓일 정도는 아니라 곧 그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눈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 가을은 없다.

 

 겨울이 온 것이다. 첫눈이 내렸고 따뜻한 내의를 입을까 고민하는 날들이 되었다. 장갑은 꺼냈고 덧신을 챙겼다. 더위보다는 추위를 덜 타는 편이지만 추운 겨울은 싫다. 더운 여름은 쓸쓸하지 않지만 추운 겨울은 왜 쓸쓸한 것일까. 사람과 사람의 온도가 더해져야 겨울을 어렵지 않게 통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주 지진 소식은 너무도 가슴이 아팠다. 포항에 지인이 살고 있기에 남다르게 다가왔다. 그리고 안전지역이라는 건 없다는 생각,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사는 게 뭔지. 마음이 계속 어지럽다.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한 것이다. 행동할 수 있는 동력과 함께 그곳이야말로 사람의 온도가 필요하겠다 싶다. 얇지 않은 겨울이 지속되길. 적당히 두툼한 옷과 적당히 두툼한 마음, 적당히 두툼한 하루가 쌓이기를.

 

 내게도 적당히 두툼한 마음이 필요하다. 그런 마음이 책에서 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두툼함을 기대한다. 조남주, 최은영, 김이설, 최정화, 손보미, 구병모, 김성중이 참여한 페미니즘 소설 『현남 오빠에게』와 최근에 배수아의 『밀레나, 밀레나, 황홀한』을 읽은 탓일까. 신간 소설집 『뱀과 물』도 도전할 수 있을 것 같다. 배수아는 여전히 도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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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7-11-20 2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긴 오늘 비처럼 날리는 눈이 내렸어요. 처음에는 비가 오는 줄 알았어요.
자목련님이 계신 곳에서는 어제 눈이 내렸네요. 어제는 추수감사절이었다고 하는데, 좋은 시간 보내셨는지요.
저도 얼마전에 배수아 신작 소식 들었어요.
자목련님, 따뜻한 밤 되세요.^^

자목련 2017-11-22 12:37   좋아요 2 | URL
오늘은, 아침에 비가 조금 내렸어요. 완연한 겨울로 들어가는 것 같아요.
서니데이 님, 감기 조심하시고 따듯한 오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