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아닌
황정은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평점 :
품절


 한때는 한국소설을 읽으면서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생각하곤 했다. 문장 안에 담긴 뜻, 주인공 이름에도 뭔가 특별한 게 숨겨졌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그것은 조금이라고 작가(문학)와 닿고 싶었던 욕망이었던 것 같다. 내 생각대로 읽은 게 아니라 작가의 생각을 읽어야 제대로 된 읽기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소설을 읽은 순간 그것은 오로지 내 것이 될 수 있다고 바뀌었다. 여전히 작가의 목소리를 찾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지만 내가 느끼는 대로 읽은 게 중요하다고 믿는다. 황정은의 소설집 『아무도 아닌』은 어쩌다 보니 여러 번 읽게 되었다. 처음엔 쉽게 읽히지 않았다. 사실 황정은의 소설은 무섭게 재밌다거나 빨리 읽히는 소설은 아니다. 첫 소설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는 무척 흥미로운 소설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문이 있거나 아버지가 수시로 모자로 변해버리는 일. 『아무도 아닌』을 읽으면서 이상하게 자꾸 그 소설집이 생각났다. 슬픔과 고통을 환상으로 견딘 소설 속 인물들이 지금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궁금해졌다고 할까.

 

 8년이 지난 『아무도 아닌』에 살아가는 이들은 여전하다. 황정은의 인물은 다른 듯하면서도 동일하다. 늙은 노인, 약자, 보통의 소시민. 황정은은 그들의 삶을 관찰하고 기록한다. 작고 소박한 일상을 이어가고 지켜내려는 모습은 때때로 지겹고 안쓰럽다. 하여 어떤 소설을 지루하고 어떤 소설은 바쁜 세상 밖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 안에서 삶은 쉼 없이 움직이고 변화한다. 무심한 듯 바라보는 시선이 닿는 곳에 내가 아는 누군가가 있음을 발견한다. 우리가 놓치는 작은 것들을 담아낸다.

 

 시골로 고추를 따러 가는 이야기로 시작하는上行」은 각박하고 고단한 도시를 떠나 전원생활에 대한 동경 같은 걸 기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팍팍한 현실과 맞닿는다. 깊게 쌓인 궁핍과 외로움만 가득하다. 세상 어디에도 도피처(안식처)는 없다는 명징한 울림처럼 마음이 쓸쓸하다. 과거 헤어진 연인 제희의 부모와 함께 수목원 나들이의 풍경을 그린 「상류엔 맹금류」은 불편함을 숨길 수 없다. 최선을 다해 생계를 꾸리고 서로를 아끼며 살아가는 제희의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같은 장소 같은 공간에서 서로 다른 것을 보고 느낀다는 건은 얼마나 중요한 것일까. 맹금류 축사에서 흐르는 물을 곁에 두고 도시락을 펼치는 제희의 부모, 그 물이 똥물이라고 말해버리는 나. 왜 그들은 더 가깝고 더 편안한 곳으로 나들이를 가지 못했을까.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나는 왜 제희가 아닌 다른 이를 선택했을까. 제희의 부모에게서 미래를 보았기 때문은 아닐까.

 

 『아무도 아닌』 속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건 최소의 것들이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살기를 원한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편안하게 쉴 공간, 긍지를 갖고 자신의 일에 열중할 수 있는 환경 같은 것 말이다. 서비스업 종사자의 고충을 상세하게 묘사하는 「복경」과 카드 대금이나 이자 연체금을 알려주고 독촉하는 업무를 하는 「누가」의 여자나 가난하고 병든 부모을 돕느라 중학생 때 아르바이트를 하다 지하 서점에서 일을 하는 「양의 미래」의 나에게는 그런 대상과 그런 공간이 없다. 부당한 대우를 스스로 증명해야만 하고 정체를 확인할 수 없는 소음에 시달리고 가난하기에 어떤 미래도 꿈꿀 수 없다. 지독하게 현실적인 그들의 일상을 황정은은 이렇게 표현하기도 한다. 너무나 적나라해서 서럽고 너무나 차분해서 슬프다.

 

 “맑은 날도 흐른 날도 우리 너머에 있었다. 햇빛은 하루중 가장 강할 때에만 계단을 다 내려왔다. 유리를 경계로 바깥은 양지, 실내는 어디까지나 음지였다. 수많은 형광등 불빛으로 서점은 좀 지나치다 할 정도로 밝았으니 조도가 질적으로 달랐다. 나는 뭐랄까, 창백하게 눈을 쏘는 빛 속에서 햇빛을 바라보는 일이 많았다. 어느 날의 일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오후에, 유리를 통해 노랗게 달아오르고 있는 계단을 바라보다가 저 햇빛을 내 피부로 받을 수 있는 시간이 하루중에 채 삼십분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햇빛이 가장 좋은 순간에도 나는 여기 머물고 시간은 그런 방식으로 다 갈 것이다.” (「양의 미래」, 48쪽)

 막연하게 더 좋은 날이 올 거라고 서로를 격려하듯 다그치며 살다가 불현듯 그런 날이 오긴 할까 두려운 게 사실이다. 그러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 난 후에는 모든 게 부질없다는 걸 깨닫는다. 뭔가를 이루려 살아온 지난날도 보잘 것 없는 삶으로 전락해버린다. 아이를 잃고 충분한 애도 없이 사는 일에만 몰두한 부부의 해외여행기 「누구도 가 본 적 없는」, 연인 실리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기억마저 놓치고 마는 「명실」, 함께여서 모든 게 소중했던 여자친구 디디의 죽음을 눈앞에서 지켜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의 상실과 분노를  다룬 「웃는 남자」의 인물이 그러하다. 스스로를 유배시킨 이들의 이야기. 남겨진 이들의 삶엔 더 이상 빛이 없다. 과거에 갇혀 살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실리의 책을 지키며 온전히 그만을 생각하는「명실」은 정말 아름답고 오랫동안 디디의 죽음에 대해 그 순간에 대해 그 일에 대해 묻고 또 묻는 「웃는 남자」는 고통스럽다. 디디와 살면서 느꼈던 감정은 살아날 수 없다. 살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디디는 잘 먹고 잘 지내다가도 이따금 엉뚱한 것을 골똘하게 생각할 때가 있었고 그러면 그 생각에서 한참 동안 헤어 나오질 못했다. 맛있는 것을 솔직하게 기뻐하며 먹었고 시간을 들여 책을 곰곰이 읽은 뒤 거기서 발견한 내용을 내게 말해주었다. 색실을 사용해 티셔츠 따위의 구멍난 자리에 무당벌레 같은 것을 소박하게 만들어두곤 했다. 여름에 넓은 나뭇잎을 줍게 되면 잎맥을 절묘하게 잘라내 숲을 만든 뒤 내게 보여주었다. 작은 것 속에 큰 것이 있어. 나는 그런 것이 다 좋았다. 디디가 그런 것을 할 줄 알고 그런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게 좋았다. 디디는 부드러웠지. 껴안고 있으면 한없이 부드러워서 나도 모르게 힘껏 안아버릴 때도 있었어. 이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고 나는 생각했다. 처음으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고, 그 행복으로 나 역시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웃는 남자」, 172쪽)


 나는 이 문장을 반복해서 읽었고 오래 바라보았다. 작은 것 속에 큰 것이 있어. 작고 부드럽게 말하는 그 목소리에서 어떤 경건함을 느꼈다. 그것은 딱딱하다 못해 날카로운 것들로 채워지는 세상, 폭력으로 얼룩진 사회를 살아낼 수 있는 원동력이 아주 작고 연약한 믿음과 사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자신만의 고유한 문장으로 숭고한 노동과 생의 가치를 놓치지 않고 붙잡아 기록하는 황정은이 믿음직스러운 것이다.

 때때로 추악한 분노를 감추고 때때로 무표정으로 일관하면서 묵묵히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들. 아무도 아닌 이들처럼 보이지만 아무도 아닌 이는 없다는 걸 기억한다. 그들의 몸짓과 목소리가 겹겹이 쌓여 세상을 어루만지기를 기대하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