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죽지 않는다
공지영 지음 / 해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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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은 대체로 나쁜 것일 확률이 높다. 좋은 기억은 언제나 꺼내볼 수 있게 잘 정리해 둔 사진첩의 사진 같다. 그러나 나쁜 기억은 정리하지 않는다. 그저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기를 바랄 뿐이다. 힘들었던 시절, 상처로 채워진 날들, 원하지 않았던 이별 같은 것들. 하지만 쉽게 지워지지 않기에 우리는 그것과 함께 살기도 한다. 분리되었다고 믿으면서, 이제는 괜찮아졌다고 스스로 다짐하면서 말이다. 공지영의 소설은 내게 그런 다짐이기도 했다. 아니, 격려였을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출간된 공지영의 소설집은『할머니는 죽지 않는다』를 읽으면서 어떤 다짐을 하는 나는 발견한다. 공지영은 소설집을 통해 자신이 살아온 생을 들려준다. 유명 작가로 살아가면서 감당해야 할 삶의 몫, 엄마와 작가 사이에서의 내적 갈등, 과거의 상처에서 온전히 떨어져 그것과 거리를 두려는 노력 같은 것들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러니까 이 소설집은 공지영의 픽션이자 논픽션인 것이다. 오롯이 혼자 책임져야 하는 가족과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글을 쓰는 삶에 대한 사유가 곳곳에 놓여 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생각이라는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를 잡아 하는 수 없이 핀으로 고정시키고 상자에 넣는 일, 죽어 핀으로 고정된 채 상자 속에 넣어진 나바에게 다시 숨을 불어넣는 것은 그 글을 읽는 사람들의 숨결 없이는 불가능하다. (「맨발로 글목을 돌다」, 185쪽)

 

 도전적인 열아홉 화자의 목소리로 묘사하는 시한부 판정을 받았지만 꿋꿋하게 삶의 의지를 불태우는 할머니와 그녀가 죽기를 바라는 가족들의 소리 없는 전쟁 같은 날들을 담은 표제작「할머니는 죽지 않는다」는 다른 색채를 지녔다. 피할 수 없는 가난과 절망의 현실에서 작고 희미한 생의 빛을 놓치 않는 「부활 무렵」은 공지영의 이전 소설을 떠올리게 한다. 나머지 3편의 단편에서 화자인 ‘나’는 작가 공지영이다. 「월춘 장구(越春裝具)」는 글을 쓰기 위해 시골집으로 온 ‘나’는 막내가 아프다는 말을 듣고 다시 서울로 돌아간다. 왜 하필 이때 아픈 건지, 화를 내면서도 엄마로의 안타까움을 감추지 않는다. 나를 위한 시간은 없는 삶, 그러나 그것이 나를 존재하게 만든다는 걸 알고 다시 글을 쓰는 모습은 우리의 일상과 다르지 않다. 하여 산다는 건 결국 누구에게나 같은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분명 작가로의 삶은 나의 그것과 다를 것이다.

 

 공지영은 담담하게 힘들었던 지난 삶을 글로 녹아낸다. 행복하지 않았던 결혼 생활, 폭언과 폭행, 책 속으로 도피할 수밖에 없던 상처로 얼룩진 시간을 말한다. 그것을 글로 쓰는 것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소설의 형식을 빌린 일기 같다고 할까. 혼자만을 위한 기록이 세상을 향한 목소리가 되기까지의 통증을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글이 주는 치유의 힘을 믿는다고 말할 뿐이다. 내가 공지영의 글을 읽고 위안을 얻었든 그녀 역시 고통의 시간을 견디고 견딘 이들의 글을 통해 위로를 받았다고 고백한다. 프리모 레비와 빅터 플랭클의 생을 언급하고 그들의 글을 소설에 인용한 것이다. 어떤 잘못도 없이 갇힌 고통의 시간을 살고 생존자가 되어 그것을 기록하는 일, 공지영의 상처가 그것과 같을 수 없지만 타인의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는 힘이 된다는 건 확실하다. 그러므로 공지영의 소설에서 화자인 ‘공지영’은 아픔과 고통을 공감하려 글을 쓰는 것이다.

 

 독자의 전화 한 통으로 시작해 ‘나’가 막냇동생 일지도 모른다는 여자와의 기묘한 인연을 들려주는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는 공지영의 정체성과 삶 전반을 흔들 수 있는 그 무엇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여자가 들이대는 증거는 얼핏 자신이 그녀의 막냇동생 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형제들과 닮지 않은 외모, 어머니와의 관계, 유년 시절의 추억까지. 그러나 ‘나’는 유전자 검사를 확인하지 않으므로 지금의 삶을 유지하기로 한다. 제목 그대로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 순간을 살아가는 건 아닐까.

 

 어느 날 갑자기 납북되어 이십 사 년 동안 북에서 산 일본인 번역가 H와의 만남을 들려주는 「맨발로 글목을 돌다」는 특별하게 다가오는 단편이다. H의 책 출판으로 모인 자리에서 사람들은 ‘나’에게 책이 아닌 H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러한 과정에서 ‘나’는 위안부 할머니를 생각한다. 원하지 않은 삶을 살아온 삶에 대해, 그리고 그들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들. 지난 과거가 인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말이다.

 

 풍랑을 만난 배가 물결을 헤치고 그저 앞으로 갈 수밖에 없듯이 온몸으로, 온몸으로 물결을 받아들이는 수밖에는 아무 방법이 없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그리하여 그것을 받아들일 때까지, 그것이 운명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때까지, 쓰나미처럼 우리를 덮치는 불행이라는 것이 생의 한 속성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때까지, 우리는 늪 같은 운명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맨발로 글목을 돌다」, 200쪽) 

 

 작가의 말을 대신하는「후기, 혹은 구름 저 너머」에서 잔잔하게 퍼지는 공지영의 따뜻한 목소리를 듣는다. 혼자 글을 쓰는 삶에 대해, 책과 하나가 되어야 하는 독서에 대해,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 혼자가 아닌 함께 앞으로 나아가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공지영의 소설을 읽는 시간은 아팠지만 아프지 않았고 상처가 떠올랐지만 어루만질 수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괜찮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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