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의 나날이다. 감자를 쪄서 먹고, 감자를 볶아 먹고, 감자로 찌개를 해 먹고, 노란 카레를 해 먹는다. 찐 감자를 주스와 함께 먹고, 찐 감자를 커피와 함께 먹고, 찐 감자를 시원한 물과 함께 먹는다. 밭에서 직접 감자를 깨고 싶다, 흙을 만지고 싶다. 어린 시절에는 정말 하기 싫었던 일이 그리워지다니. 늙고 있다. ㅎ

 

 더위는 도둑처럼 일상을 훔친다. 밤마다 잠을 설친다. 깊은 잠에 빠져들지 못한다. 작년에도 이랬던가, 아닌 것 같은데. 곧 사라질 더위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밀어낼 수밖에 없는 나날이다.

 

 이런 날에 문학과지성 시인선 500『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를 곁에 두고 뒤적인다. 좋아하는 시인을 생각하고, 아끼는 시를 찾는다. 시집으로 책장을 채우고 싶었던 날도 있었지만 지금은 겨우겨우 책장 한편에 놓인 시집이 전부다. 이름도 낯선 시인과 그의 시를 읽은 일은 묘한 떨림을 몰고 온다. 집중해서 읽어야 한다. 나는 그의 시집을 소장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이런 시인의 이런 시 말이다. 최하림, 어디서 들었던 이름일까. 아니면 들었다고 착각하는 이름일지도 모른다. 다른 시인의 같은 제목의 시를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초저녁, 눈빨 뿌리는 소리가 들려

유리창으로 갔더니 비봉산 소나무들이

어둡게 손을 흔들고 강물 소리도 숨을 죽인다

나도 숨을 죽이고 본다 검은 새들이

강심에서 올라와 북쪽으로 날아가고

한두 마리는 처져 두리번거리다가

빈집을 찾아 들어간다 마을에는

빈집들이 늘어서 있다 올해도 벌써

몇 번째 사람들이 집을 버리고 떠났다

집들이 지붕이 기울고 담장이 무너져 내렸다

검은 새들은 지붕으로 곳간으로 담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검은 새들은 빈집에서

꿈을 꾸었다 검은 새들은 어떤

시간을 보았다 새들은 시간 속으로

시간의 새가 되어 들어갔다

새들은 은빛 가지 위에 앉고

가지 위로 날아 하늘을 무한 공간으로

만들며 해빙기 같은 변화의 소리로 울었다

아아 해빙기 같은 소리 들으며

나는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있다

검은 새들이 은빛 가지 위에서 날고

눈이 내리고 달도 별도 멀어져간다

밤이 숨 쉬는 소리만이 눈발처럼 크게

울린다 「빈집」, 전문

 

 

 눈발을 뿌리는 소리를 상상해본다. 나는 그 소리를 짐작할 수 없다. 그 밤을 상상할 뿐이다. 기념 시선이 좋은 건 언제나 내가 모르는 시를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잊고 있었던 시를 소리 내어 읽는 기회를 주기도 한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500은 65명의 시인들의 시를 두 편 씩 수록한 시집이다. 나는 이 시집을 넘기면서 정현종의 시와 나희덕의 시와 문태준의 시를 그렇게 읽었다. 정현종의 시는 언제나 나를 평온하게 만든다. 어떤 잘못을 해도 그 시안에서는 질책이 아닌 위로를 얻을 수 있는 따뜻한 품처럼. 문태준의 「가재미」를  <낭독의 발견>에서 처음 만났을 때 가슴을 타고 올라오던 무언가를 기억한다. 낭독의 발견 같은 프로그램이 다시 생겼으면 좋겠다. 요즘은 서점이나 북카페에서 많이 이뤄지고 있는 행사지만 나는 아쉽다.

 

 시를 읽는 건 잠시 다른 세계로의 이동은 아닐까. 여기 있는 나를 접어두고 첫눈처럼 순수한 시간, 단풍처럼 화려한 시간, 새벽처럼 고요하고 정갈한 시간으로의 초대 말이다. 우리는 시를 통해 사랑을 마주하기도 하고, 혁명의 순간을 접하기도 하고, 세상을 읽기도 한다. 도통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시를 만나기도 한다. 그럼에도 시를 잃고 싶지 않다. 시를 잊고 싶지 않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디터D 2017-07-28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집을 읽을 때는 주로 카페나 침대에서 읽는터라 감자를 먹으며 읽어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가끔 김밥이라던가 하는 작품을 읽을 때면 김밥을 먹으며 다시 읽어볼까 싶을때가 있긴하지만요^^;; 무덥다기 보다 습한 여름, 눈발을 뿌리는 소리를 상상하신다는 글귀에서 갑자기 ‘청량감‘이 느껴지는게 시가 아닌 이런 리뷰도 누군가에게는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자목련 2017-07-31 18:21   좋아요 0 | URL
더운 여름이라서 겨울의 이미지를 마주하는 시에 눈이 갖는지도 모르겠어요. 리제 님의 댓글이 제게는 큰 도움을 주네요. 남은 여름 시원하게 보내세요^^

잠자냥 2017-07-28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를 안 읽은지 꽤 오래 되었는데, 자목련 님의 이 글을 읽으니 문득 시가 읽고 싶어지는군요. 참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자목련 2017-07-31 18:22   좋아요 0 | URL
시를 향한 열망이 사그라들고는 있지만 그래도 시집을 붙잡고 있어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