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내린 곳
박혜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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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과 자신을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는 사람 중 행복한 사람은 누구일까? 언제 올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기다리는 사람보다는 언제라도 돌아갈 사람을 둔 이가 조금은 더 행복하지 않을까. 기다린다는 건 혼자 하는 일처럼 보이지만 상대가 있으므로 혼자가 아닌 함께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돌아간다는 건 이곳이 아닌 그곳으로 방향을 바꾼다는 말이다. 삶의 방향을 바꾸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확신이 없는 이상 누군가는 기다리는 일도 기다리는 이에게 돌아가는 일도 어려운 일이다. 박혜상의 소설집『그가 내린 곳』에서 마주한 삶이 그러했다. 안을 떠나 밖으로 간 사람들, 밖에서 다시 안으로 가는 사람들. 안과 밖을 헤매는 사람들. 의지와 상관없이 안을 떠날 수밖에 없는 사람들, 떠남을 선택했지만 길을 잃고 만 이들, 결국 안에 있는 이도 밖에 있는 이도 부유한 생을 이어가는 것이다.

 

 「Y의 바깥」에서 시인은 무명 소설가 Y의 집에서 그를 기다린다. 곧 철거될 집에서 불안과 외로움을 견디며 단체에서 지원하는 창작 지원금을 받고 외국에 간 Y가 보낸 메일을 읽는다. 하루하루 무너지는 일상이 아닌 평온한 삶을 사는 듯 보이는 Y는 과연 돌아올까? 시인처럼 집 주인을 기다리는 이는「사랑의 생활」에도 등장한다. 광고를 보고 찾아온 케이의 집에 살기로 한 나는 일주일에 두 번 과외를 하는 외출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케이의 집에서 그를 기다린다. 머무는 자가 지키는 자가 되었다. 정원을 가꾸고 연애가 끝나고 돌아오는 케이를 맞이한다. Y와 시인처럼, 케이와 나는 가까운 사이지만 감정을 교류하지 못한다. 그저 맴돌 뿐이다.

 

 케이는 나와 비슷한 감수성을 지녔다. 뛰어난 감수성이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케이는 인정하기 싫을 테지만, 케이와 나는 마음의 주파수, 즉 마음이 동하는 지점이 비슷하다. 선수를 빼앗긴 심정은 달리 말하면 사랑일 것이다. 케이를 향한 감정의 표현은 처음부터 차단되었다. 제대로 외톨이로 성장한 사람은 이 말을 이해할 것이다. 사랑하기 위하여, 외톨이는 사랑하지 않으려 기를 쓰고 산다. 내가 할 일은 케이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 나라는 존재는 케이의 반대말이 된다. 케이는 표출하고 나는 은폐한다. 케이는 떠나고 나는 남는다. 케이는 돌아오고 나는 돌아가지 않는다. (「사랑의 생활」, 79쪽)

 

 표제작 「그가 내린 곳」은 제목부터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떠나는 삶을 암시한다. ​주인공 윤은 아무 연락 없이 부산의 지인을 찾았다. 군대에서 사랑을 확인했던 사람이지만 이제는 그저 한 여자의 남편이자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그러니까 윤을 떠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주인공 윤이 「Y의 바깥」의 Y란 점이다. 시인에게 거짓말을 하고 그곳을 떠나 떠도는 것이다. 현실에 적응하고 살아가는 타인의 삶을 보면서 윤은 자신이 인생을 생각한다. 윤의 목소리를 빌려 박혜상은 작가인 자신의 고민을 토로하는 듯 보인다.

 

 인생이란 결국 누군가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윤은 생각했다. 그것이 ‘나’일 때는 오로지 이야기로 누군가의 삶을 지독하게 말해줄 때였다. 작가란 그런 것이라고 윤은 믿었다. 그러나 ‘나’의 삶을 살아주는 누군가는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그가 내린 곳」, 124쪽)

 

 떠나는 자의 뒷모습 따위야말로 낭만적인 환상에 불과했다. 아마도 남은 사람들은 편안한 마음으로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가 사라지고 나서야 무엇이 그들을 불편하게 했는지 명확하게 깨달았을 테니까. 삶의 주인공은 떠돌이가 아니라 제 땅 제 집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가 내린 곳」, 132쪽)

 

 Y와 케이가 자발적으로 삶을 회피하고 도피한 경우라면 정리해고로 어쩔 수 없이 회사와 동료, 그리고 가족에게서 멀어져 밖으로 밀려난 「그 사람의 죽음과 무관한 알리바이」의 그와 미국에서 사기를 당하고 돌아온 후 산책으로 무기력한 삶을 이어가는 「낮달과 낙타」 의 남편은 권력과 돈의 피해자였다. 때문에 그들에게 집은 돌아갈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같은 곳을 걷고 또 걷는 것이다.

 

 떠나는 삶의 상징인 Y는 「그 사람의 죽음과 무관한 알리바이」에도 등장해 그와 만나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 소설집은 Y가 길에서 만난 다양한 삶을 통해 다시 바깥에서 안으로 돌아가는 여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죽은 어머니가 남긴 집과 형이 있는 고향 바닷가의 마을로 돌아온 「봄눈」의 주인공은 Y인 것이다. 성공하지 못하고 사회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돌아가고 싶은 그곳, 돌아갈 그곳은 어디일까. 누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까. 그가 내린 곳, 그곳에...

 

 뒤를 돌아보면 언제나 바다가, 있다. 그렇다고 마을 앞에 놓인 바다를 출구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또 나를 좌절하게 만드는 거대한 무엇도 아니었다. 그저, 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말 그대로 배후처럼, 밟을 수 없는 그림자처럼, 발목이 묻혀 있는 그림자처럼, 바다가 있다.(「봄눈」, 2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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