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2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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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처음 만나는 건 모두 외부다. 그게 무엇이든 말이다. 내부를 보려면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보고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한다. 내부의 내부까지 알 수 있는 시간은 꽤 오래 걸린다. 그러니까 첫눈에 반하는 건 거짓일 수도 있다. 나빴던 첫 느낌이 반전의 결과로 이어지기도 하니까. 새로 이사 온 동네가 점점 좋아지거나 불편했던 신발에 길들여지고 낡고 오래된 집을 떠나기 싫은 것도 내부의 내부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마쓰이에 마사시의 소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에서 그런 사랑을 보았다. 그것은 뜨겁게 타올라 식어버리는 게 아니라 천천히 끓어올라 오래도록 온기를 남기는 온돌 같은 사랑이었다.

 

 소설은 화자인‘나’가 1982년 무라이 선생님과 보낸 일 년 남짓 시간에 대한 애틋한 기억이다. 노년의 건축가가 여름마다 사무소 사람들과 함께 머물며 일하는 여름 별장은 소설의 중심이라 할 수 있다. 스물세 살 건축학도 ‘나’는 1982년 존경하는 건축가 ‘무라이 건축 설계사무소’에 신입 사원이 되었고 여름 별장은 처음이다. 칠십 중반의 무라이 슌스케를 비롯한 오랜 시간 함께 사무소에서 일하는 직원들에게는 익숙한 일이다. 1950년대에 지어진 여름 별장은 자연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무라이의 건축 철학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여름 별장에서 직원들은 국립현대도서관 설계 경합을 준비한다. 도쿄 사무실을 떠나 도서관 설계에만 집중을 한다. 검색하게 만든다. 막내인 ‘나’는 식사 준비를 돕고 선생님이 지시하신 도서관 내 스태킹 체어 업무를 맡았다.

 

 설계도면과 건축 모형만을 떠올리면 지루하고 재미없을 것 같지만 소설은 다르다. 여름 별장에서 생활하는 직원들의 모습과 하루하루 달라지는 그곳의 풍경에 대한 세밀한 묘사는 아름답다. 특히 무라이 선생님의 조카 마리코와 ‘나’ 사이의 감정 변화가 흥미롭다. 건축에 대한 저마다의 의견을 들을 수 있다는 점도 색다른 즐거움이지만 건축을 이용하는 사람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특별하게 다가온다. 건축물 자체의 실질적인 아름다움과 편리한 사용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건축에 대한 대단한 고집과 열정에 감탄하고 만다. ‘나’ 가 스승이 만든 교회에 대한 설명을 듣는 부분에서는 귀를 기울이면 그 작은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건축가가 만든 것에는 크고 윤기 있는 목소리로 노래 부르는 듯한 느낌이 많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선생님의 건축은 들리지 않아도 상관없어, 라고 할 정도의 소리랄까. 작은 소리를 감싸는 작은 것이라고 할까.” (81쪽)

 

 소설 곳곳에서 무라이 슌스케가 추구하는 건축이 어떤 것인지 상상하며 소설에 등장하는 건축물을 검색하게 만든다. 모든 건축은 사람과 함께 공존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는 집, 사람이 머무는 공간에 대한 건축가의 세심한 계획은 건축물 외부뿐 아니라 내부에도 스며들어야 한다는 철학을 ‘나’는 스승에게 배운다. 사람의 손이 닿는 곳의 느낌도 놓치지 않고 건축가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깨닫게 한다. 건축가의 역할과 존재에 대해 말이다. 그것은 비단 건축가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기에 독자에게도 큰 울림을 전한다.

 

 “간단하고 간결하다는 것은 사람을 가리지 않지.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가 설명하지 않아도 어떻게 사용하는지 저절로 알 수 있으니까 말이야. 건축에서 사소한 장치를 생각할 때도 사는 사람과 쓰는 사람이 그 장치를 스스로 발견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이상적인 거야. 취급 설명서 따위 붙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 훨씬 더 우위라고.” (114쪽)

 

 젊은 건축가의 일상을 담담하게 그려냈지만 절대 지루하지 않다. 그것은 간결하면서도 탄탄한 문장으로 건축에 대한 철학과 여름 별장이라는 공간을 아름답게 묘사했기 때문이다. 마치 1년 동안 여름 별장에 그들의 곁에서 지낸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여름 별장의 외부가 아닌 내부까지 사랑하게 된 것이다. 어쩌면 건축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거나 공부하는 이들은 내부의 내부까지 만났을지도 모른다.

 

 ‘여름 별장을 철수한 9월 중순에는 울창한 숲이 하나의 커다란 덩어리 같았는데, 지금은 노랑, 빨강, 초록으로 나뉘어, 한 그루 한 그루의 형태와 크기가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이미 거의 모든 잎을 떨어뜨리고 겨울에 대비한 나무도 있었다. 숲속은 멀리까지 전망이 트이고, 색채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줄기랑 가지는 상량식을 올린 가옥의 뼈대 같았다.’ (327쪽)

 

 모든 건축물은 사라진다. 무너지고 부서진 곳을 고치고 수리해도 결국엔 사라지고 만다. 외부는 그러할지라도 내부 깊숙이 닿았던 손길과 온기, 그리고 추억은 영원할 것이다. 여름 별장에 남은 그 해의 여름처럼 오래도록 깊이 각인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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