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이라는 생각 창비시선 392
이현승 지음 / 창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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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간이 주는 기억은 잔혹하다. 잊고 있었다고 믿었던 기억까지 소환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신이 아닌 몸의 기억인지도 모른다. 모든 감각들이 다시 살아나 나를 증명한다고 해야 할까. 근처에 사시는 고모와 고모부가 교통사고를 당하셨다. 차는 폐차를 할 정도였는데 큰 부상은 없으셔서 긴 시간 병원 신세를 지녔다. 병원을 떠올리면 사흘에 한 번 바뀌던 주사 바늘과 함께, 끔찍했던 중환자실의 풍경이 떠오른다. 반복되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불현듯 찾아오는 공포는 막강한 힘을 지녔다. 설명할 수 있다고 자신했던 통증의 모양과 형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삶을 지배하는 통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잠으로의 도피뿐이다. 환상통과는 다른 진짜 통증, 이겼다고 여겼지만 이기지 못했나 보다. 병실 번호와 불친절하면서도 자신의 할 일을 다했던 간호사의 이름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생각이 아니라 생활이다. 멈춰지고 고여있는 생각이 아니라 나아가는 생활, 살아지고 살아내야 하는 생활이다. 

 

 

 생활이라는 생각

 

 

 꿈이 현실이 되려면 상상은 얼마나 아파야 하는가.

 상상이 현실이 되려면 정말은 얼마나 깊어야 하는가.

 

 참으로 이기지 못할 것은 생활이라는 생각이다.

 그럭저럭 살아지고 그럭저럭 살아가면서

 우리는 도피 중이고, 유배 중이고, 망명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뭘 해야 한다면

 

 이런 질문,

 한날한시에 한 친구가 결혼을 하고

 다른 친구의 혈육이 돌아가셨다면,

 나는 슬픔의 손을 먼저 잡고 나중

 사과의 말로 축하를 전하는 입이 될 것이다.

 

 회복실의 얇은 잠 사이로 들치는 통증처럼

 그렇게 잠깐 현실이 보이고

 거기서 기도까지 가려면 또

 얼마나 깊이 절망해야 하는가.

 

 고독이 수면유도제밖에 안되는 이 삶에서

 정말 필요한 건 잠이겠지만

 술도 안 마셨는데 해장국이 필요한 아침처럼 다들

 그래서 버스에서 전철에서 방에서 의자에서 자고 있지만

 참으로 모자란 것은 생활이다.  (36~37쪽)

 

 

 일상으로의 복귀는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주어진 하루를 온전히 소비하는 일로 시작된다. 잠으로의 도피가 아니라 제대로 된 생활의소비가 필요하다. 겨울을 잊고 살았던 우리에게 잔인할 정도로 가혹한 추위를 몰고 오는 날들, 아이스크림과 냉면으로 더위를 달래는 여름의 시간, 살아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먹먹하다. 쏟아지는 햇살을 부여잡고 울고 싶기도 하다. 겨울이라서 그런가 보다. 한강을 얼게 한 추위 때문에 그런가 보다. 친한 동생이 어느 시절 들려준 이런 말이 생각난다. 태어난 게 죄라는... 우리는 살면서 그 죄 값을 치루는 게 아닐까.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써 내려가는 글과 쏟아내는 말들에 대한 값도 지불해야 한다. 삶이라서 그렇다. 생활이라서 그렇다.

 

 

 인정도 사정도 없이

 

 

 누가 나를 좀 때려주었으면 좋겠다.

 누가 여기서 좀 꺼내주었으면 좋겠다.

 

 아무리 재난이 이웃사촌 회갑처럼 잦은 조국이지만

 나 치매 걸리면 조용히 죽여달라고 부탁하는 배우자처럼

 죄송의 말이 재앙보다 더 잔인하게 들린다.

 

 끔찍한 악몽을 꾸는 사람이

 꿈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빨래처럼 쥐가 나고 몸이 꼬이듯

 맞은 뺨을 어루만지면서 우리가 깨어날 때

 결국 불안을 일깨우는 것도 안도이다.

 

 왜 나빴던 기억은 영원한 걸까.

 우리는 언제라도 극복 가능하지만

 거기서 영원히 나갈 수는 없다.

 터널과 터널 사이 구간의 운전자처럼

 백일에 눈이 아프다.

 

 겉은 젖고 속은 타들어가는 이곳에서

 지금 살아 있다는 것보다 끔찍한 재앙은 없다.

 차라리 누가 나를 좀 때려주었으면 좋겠다.

 누가 용서라는 말을 없애버리면 좋겠다. (84~85쪽)

 

 

  기억해야 할 기억들이 있다. 망각을 이겨내야 할 기억들이 있다. 생활을 생활로 만들어내는 힘이 되는 기억들이 있다. 그것들이 삶을 지탱한다. 그것들이 삶을 살게 만든다. 울고 싶은 날도, 화를 내고 싶은 날도 생활의 연속이다. 내게 부족한 건 생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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