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 소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6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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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함은 열망을 부추긴다. 그리고 우리가 열망하는 것들은 대체로 불온하다. 그것을 선택했을 경우 주변의 시선을 생각하면 그렇다. 보편적이지 않거나 상식이라 말하는 주류가 아닌 비주류의 것들. 어떤 이는 가슴속 타오르는 열망을 꾹꾹 누른 채 살아가고 어떤 이는 과감하게 저지르며 살아간다. 소심한 심장을 지닌 나 같은 보통의 사람들은 둘 사이를 오가는 상상을 하거나 소설이나 영화를 통한 대리만족으로 대신한다. 간절함과 용기가 부족해서 그럴 수도 있다. 안전하고도 안정된 궤도를 이탈하면서 느낄 속도가 두려워서, 혹은 잠시나마 불온함을 열망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그 궤도를 벗어났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열망하기를 그만둔다. 단편집인데도 연작 소설이나 장편소설을 떠올리기에, 충분한 거지 소녀를 통해 내 안의 갈증과 마주했다. 그것은 역시나 불온한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내 현재의 삶에서는 응원받을 수 없는 욕망이었고 실현될 수 없는 불가능한 삶들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앨리스 먼로의 소설 속 인물(여성)의 무모하면서 맹랑한 선택을 지지하게 된다. 나는 그렇게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살고 싶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앨리스 먼로는 여성의 내면과 심리를 다루는데 탁월하다. 마치 그녀들을 상담하며 조언하는 상담사 같다. 그런데도 소설은 지겹거나 따분하지 않다. 나라면 할 수 없는 행동과 방향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이 소설집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로즈와 그녀의 계모인 플로의 인생을 담은 성장소설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는 기대한다. 로즈의 딸 애나가 어떤 삶을 살아갈지 말이다.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애나의 삶은 그녀의 것이니 로즈와 플로의 살아온 인생을 들여다보자. 어린 로즈에게 플로는 다정한 어머니가 아니었다. 심지어 로즈의 버릇을 고치고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남편을 거들며 부추긴다. 놀라운 건 로즈는 이 모든 걸 알고 그 결과를 예측한다. 단편의 제목이기도 한 아버지의 장엄한 매질, 어디까지나 그들에게는 장엄한 매질이 끝난 후 플로가 가져다줄 달콤한 맛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사는 게 힘들어서, 시골에서 작은 상점을 하며 상점 뒤의 헛간에서 가구를 고치는 일을 하는 이들에게 다정함은 사치였다. 교양이나 품격과는 거리가 먼 그런 삶이었다.

 

플로는 로즈의 삶이 부러웠던 건 아닐까? 학교에 다니며 공부를 하는 로즈가 말이다. 자신이 지나온 삶에서는 발생할 수 없는 삶을 사는 로즈였으니까. 로즈가 학교에 가 있는 동안만큼은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고민이 무엇인지 자신이 관여할 수도 없을뿐더러, 무엇보다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 가능성이 로즈에게 생기는 거였다. 다시 말해 로즈가 학교에 가 있는 동안에는 두 여인은 다른 시간대를 사는 것이었다. 이처럼 두 여인은 결코 포개어질 수 시간을 만들어가며 서로의 삶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간다. 소설 속 그들이 사는 시대를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여자에 대한 편견과 무시는 일상이었다. 로즈처럼 가난한 집안에서 애정은커녕 제대로 된 돌봄을 받지 못했으면 더더욱. 그래서 로즈는 잔망스럽게 되바라진 소녀가 되었다. 하지만 독자로서 내가 바라보기에 그 모습은 로즈가 삶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인생은 무심히 흘러갔다. 무서운 아버지는 병들고 플로는 늙었다. 로즈도 더는 소녀가 아니다. 플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딸에게 의지하고 만다. 과거라는 이름으로 추하고 지저분하던 그 시절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기억은 어떻게 꺼냈을 때 추억이 되는 것일까. 생각해보면 기억을 소환하는 일은 말의 문제라기보다 타이밍의 문제에 가깝다. 언제 어느 때 기억을 꺼냈는가에 따라 그 기억은 추억이 되기도 하고, 잊혀야 할 불행한 과거가 되기도 한다. 불온함에 열망의 부추김을 당하는 로즈에게 새엄마의 지난 시간에 관한 이야기는 두 사람의 어긋난 과거만 재확인해줬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남자를 조심하라던 플로의 말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말은 불필요한 조언이기도 했다. 추억을 공유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진심은 공허한 말이 되어 상대에게 닿지 못한다. 플로가 기억을 꺼낼수록 로즈는 그녀로부터 더 멀리, 기억을 떨쳐내듯 멀어질 것이다. 한편으론 플로의 기억 꺼내기는 로즈의 과감성을 추동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자신의 세계에서 벗어나 다른 세상으로 달려가고 싶었던 로즈. 직접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렸던 로즈. 이런 로즈의 성향은 앨리스 먼로의 소설 속 인물의 특징이다. 위험을 감수하며 불구덩이로 뛰어든다. 불운이었을지라도 후회를 남기지 않는 과감한 여성.

 

호기심 그 어떤 욕망보다 더 줄기차고 긴급한 것. 그 자체로 욕망인 것. 단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기 위해 물러나 지나치게 오래 기다리면서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게 이끄는 것.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기 위해. (야생 백조, 118~119)

 

이런 행동은 로즈의 연애와 결혼으로 이어지는 거지 소녀장난질에서도 만날 수 있다. 가난한 대학생인 로즈와 부유한 집안의 아들 패트릭의 만남은 결말을 예상하게 했다. 로즈가 가난해서 좋다는 어이없는 패트릭의 고백. 극명하게 다른 환경은 서로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로즈도 패트릭을 선택하면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주변의 부러운 시선을 맘껏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어떤 순간에는 충만함을 느끼기도 했다. 우리는 이제 알 수 있다. 로즈에게 결혼은 완성이 아니었다는 걸. 로즈에겐 다양한 삶의 경험이 필요했다. 로즈에게 결혼이란, 고요한 호수에 던져진 돌멩이 같은 것이었다. 로즈는 그런 강렬하면서도 뜨거운 것을 경험하고 싶었을 뿐이다.

 

행복에 대한 환상 같은 것. 그녀가 그간 남들에게 해왔던 다른 모든 얘기들을 생각하면 그런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이상한 것 같은데, 그녀는 정당화를 할 수가 없다. 이는 그들의 결혼생활에 벽지를 바르고 휴가를 떠나고 식사를 함께하고 쇼핑을 하고 아픈 아이를 걱정하는 길고 분주한 기간처럼 완벽하게 평범하고 견딜 만한 시간도 있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때로는 이유도 조짐도 없이 행복이, 행복의 가능성이 나타나 그들을 놀라게 하고 했다는 의미다. (거지 소녀, 177)

 

친구의 남편과의 연애를 다룬 장난질의 제목이 암시하듯 애틋하고 간절한 사랑이 아니라 어떤 탈출구 같은 걸 원했던 것이다. 그 후의 삶에 대해 두려움 따윈 없었다.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한 책임을 로즈는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그 감정이 불러올 어떤 파국에 대해서도 로즈는 다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아니다, 파국이란 말은 적절하지 않다. 이혼이라는 결말이 온전히 비극적인 건 아니므로. 패트릭과의 사랑과 결혼은 누군가에게는 완벽함 그 자체였겠지만 로즈에게는 아니었다는 게 중요하다. 패트릭을 사랑한 건 맞다. 둘 사이엔 애나도 있으므로 관계를 회복하려는 시도조차 없었던 건 아니었다. 중요한 건 로즈에겐 로즈만의 공간, 로즈만의 삶을 선택할 권리가 있었다는 거다. 같은 시간 속에서 살았지만 포개지지 않는 새엄마와의 삶이, 그녀에게 가르쳐준 게 있다면 바로 이거 하나였다. 애나를 데리고 로즈가 길을 떠나는 과정의 이 장면은 분명 다른 장면인데도 어떤 기시감이 느껴졌던 건 이 때문이었다. 로즈가 만든 로즈의 세계로 나가는 시작이었으므로.

 

밤에 애나가 잠든 사이 로즈는 창문을 통해 충격적일 정도로 높이 쌓여 반짝이는 눈을 바라보았다. 기차는 눈사태가 무서운 듯 천천히 기어갔다. 로즈는 겁나지 않았다. 그녀는 이 어두운 칸막이 안에 갇힌 채로 거친 객차용 담요를 덮고 그런 무자비한 풍경을 지나 어디론가 실려 간다는 생각이 마음에 들었다. 제아무리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기차의 진행은 항상 안전하고 적절하게 느껴졌다. 반면 비행기는 언제라도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깨닫고 질겁하여 외마디 저항도 못하고 바로 떨어져 버릴 것만 같았다. (섭리, 251)

 

애나가 엄마인 로즈를 선택하지 않을 거라는 건 당연하다. 패트릭은 괜찮은 아빠였고 부모님의 이혼은 애나에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플로는 늙었고 양로원에서 사라지는 기억을 붙잡으며 살아간다. 로즈는 누군가가 알아보는 배우로 학교에서 연기를 가르치는 선생으로 살면서 사랑을 꿈꾸고 열망을 버리지 않는다. 그렇게 플로, 로즈, 애나는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무엇이 되기를 바랐던 소녀는 결국 자신의 원하는 삶을 선택하며 살았지만, 고등학교 시절 교사였던 미스 해티가 했던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 질문이 그녀를 붙잡는다. 그 순간에도 불온함은 그녀를 열망하게 만든다. 무엇으로부터? 삶으로부터 말이다.

 

우리는 로즈의 인생을 판단할 수 없다. 로즈의 인생뿐 아니라 그 누구의 인생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할 자격이 없다. 로즈가 살아온 인생이 꽃길이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이는 오직 로즈밖에 없다. 로즈이거나 로즈가 아닌 나는 그것에 대비(對比)하며 내 안의 로즈와 책 속 로즈를 가만 들여다볼 뿐이다. 저마다의 삶은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이므로. 앨리스 먼로는 우리에게 말한다. 산다는 건 고역이고, 때로는 도망치고 싶고 살아가는 동안 삶에 대한 확신을 1%도 찾을 수 없는 순간이 지속되더라도 기꺼이 삶을 껴안을 수 있어야 한다고. 불온한 갈망의 싹을 품어도 괜찮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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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7 20: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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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8 09: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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