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을 몇 번이나 재독할 수 있을까. 어리석은 질문이다. 누군가에게 운명의 책이라면 항상 그의 곁에서 그를 지켜줄 테니까. 장석주에게는
노자의『도덕경』이 그런 책이라 한다. 인생의 바닥보다 깊은 바닥에 주저앉았을 때 깊은 울림을 안겨주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준 책 말이다.
『태양은 아침에 뜨는 별이다』엔 그런 책들을 쓴 이들이 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이 책은 책이 아닌 책의 저자에 대한 이야기라는 말이다. 작가,
성자, 혁명가, 사상가, 정치가, 화가 등 장석주가 선택한 15명이 인생을 압축해서 만날 수 있다. 내 책장에서도 만날 수 있는 인물(알베르
카뮈, 프란츠 카프카, 허먼 멜빌, 헨리 데이비드 소로 프리다 칼로)이 있어 반가웠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은
차례대로 읽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나는 프란츠 카프카와 프리다 칼로를 먼저 읽었다. 사랑했던 이와 결혼에 이르지 못하고 약혼과 파혼을 반복한
카프카와 단 한 사람의 연인인 디에고와 이혼했지만 다시 재결합한 프리다의 마음은 무엇일까 잠깐 헤아려보기도 했다. 그리고 시몬 드 보부아르(이
책에 등장한다)에 대해서도. 그리고 한 사람이 생에 있어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 가치이며 무엇이 가장 고통스러운 것일까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들의 책을 읽고 그들과 만났던 시점의 장석주는 어떤 시절을 견디고 있었을까.
그 답은 노자와
공자에 대한 글에서 찾을 수 있었다. 거대한 풍랑에서도 흔들림 없이 잔잔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 복잡한 욕망의 내면에서 벗어나 고요하고
향기로운 모습으로 살 수 있는 힘을 말이다. 장석주는 여러 차례 다른 글에서 사업에 실패하고 모든 걸 포기하는 심경으로 시골로 내려와 집을 짓고
책을 읽고 산책을 하면서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다고 고백한다. 이 책에서도 자연스럽게 그 시기가 등장한다. 사업에 실패하기 전 불안과 방랑의
20대,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자신감의 30대. 그는 하얀 고래를 찾아가는 여정을 다룬 하멘 멜빌의 『모비딕』을 사십 대에 만났는데
20대에 읽었더라면 좋았을 거라 말한다. 20대를 저 멀리 두고 온 나는 아직 읽지 못한 채 책장에만 고이 모셔둔 책이다. 그는『모비딕』과 하멘
멜빌에 대해 쓴 글에서 시간에 대해 언급한다.
인간은
시간을 사는 존재가 아니라 시간의 일부이며 시간 그 자체다. 시간이 없다면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은 우리 존재의 중심을 꿰뚫고 지나간다.
우리는 시간과 싸우고 타협함 그것을 인생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어쩌면 우리의 운명은 시간에 조금의 행운과 우연을 더 보태서 반죽하고 발효시킨
것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272쪽)
점점 나이를 먹고
시간이 정말 빨리 흐른다고 느낀다. 그것은 지나간 일에 대한 후회와 미련이 남아 그럴 것이다. 내 나이로 살고 있는지, 어른이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산다는 건 그만큼 어렵고 힘들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는 어느 순가에 사상가의 글에 매료되었는지도 모른다.
장석주가 들려주는 공자의 가르침처럼 군자는 될 수 없지만 그래도 어른스러운 어른으로 성장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바람을 갖는다.
어른은 가난하면서도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면서도 교만하지 않다. 더 나아가서 가난하면서도
즐거워하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한다. 어른 되기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으로 산다는 뜻이다. 앎과 생활이 어긋난 것은 어른답지 못하다.
그러므로 어른-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돌아보고 어제보다 오늘이 더 미더운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이다.(74쪽)
누구에게나 불행과 불운이 한꺼번에 달려들 때가 있다. 그럴 때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분노를 쏟아낸다. 형언할 수 없는 절망의 늪에서 무엇을 붙잡고 빠져나가야 할지 알지 못한다. 과연 우리는 프리다처럼 살아낼 수
있을까. 알고 있었지만 다시 한 번 활자를 통해 그녀의 인생을 읽어가는 일은 힘들었다. 그럼에도 그녀를 통해 우리는 인간의 의지를 배운다.
장석주가 이 책에서 언급한 뇌성마비 철학자 알렉상드르 졸리앵의 그것에서도 말이다. 실존은 투쟁에서 나온다는 졸리앵의 말은 프리다 칼로의 의지와
통한다. 때로 산다는 건 세상의 모든 것이 적이라고 느껴질 순간에도 앞으로 나가야만 하는 것이므로.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투쟁, 곧 타자들의 지평이라는 전장에 내던져진 자들이 치르는
전부다.(105쪽)
프리다는 “비극은 사람이 가진 가장 우스꽝스러운 것이다”라고 말하며, 파도처럼 연이어
닥쳐오는 불운과 불행에 맞서 아마존의 여전사같이 싸운다. 그녀는 쇠막대가 뼈들을 으깨고 자궁을 뚫고 지나가도 불행의 바다에서 거꾸러진 제 삶을
기어코 일으켜 세웠다. (145쪽)
책과의 인연에도
타이밍이 있다고 믿는다. 장석주가 그랬듯 어떤 책은 이미 읽었지만 깊은 울림이 나중에 다시 펼쳤을 때 밀려오기도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지금
내게 필요한 책이 무엇인가 가늠해본다. 우리는 책과의 만남에
있어 짧은 리뷰를 쓰거나 기억하고 싶은 구절을 메모하는 것으로 책 읽기를 마친다. 좋아하는 작가에 대해서는 다음 책을 기다리기도 하고 그에 대한
기사나 SNS를 종종 둘러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 작가의 삶에 대해 전반적으로 알아가는 일은 드물다. 장석주의 책을 읽으면서 내게 영향력을
미친 이들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느꼈던 내밀한 기쁨에 대해서. 좀 더 그들에 대해 알고 싶다는 욕심과 함께 나만의 리스트에 대해서 구상하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