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떤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것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대단한 평정심을 지닌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그런 평점 심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누군가는 굴곡 없는 평탄한 인생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라고 비아냥거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 190cm 장신의 멋진 콧수염을 기른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의 인생을 듣고 나면 달라진다. 유머가 있는 삶, 그것은 고귀하고 품격 있는 우아한 삶이라는 걸 말이다.

 

 격동의 시기, 1920년대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성공 후 로스토프 백작은 호텔에 연금된다. 시대를 떠올리면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다. 문제는 종신형이라는 거다. 평생 동안 감시를 받으며 호텔에서만 살아야 하다니. 그는 무슨 죄를 지었는가. 그저 시(詩)를 썼을 뿐이다. 그 시에 대한 토론은 뒤로 미루고 로스토프의 호텔 적응기, 아니 호텔 탐험기를 들어보자. 호화로운 스위트룸이 아닌 창고로 쓰거나 하녀의 숙소였던 다락방으로 옮겨졌다. 할머니의 손때가 묻은 추억의 물건, 여동생의 초상화, 책과 최소의 것들만 로스토프와 함께한다. 호텔의 직원들은 여전히 백작을 깍듯이 대하지만 혁명의 주체이자 감시자들은 못마땅하게 여긴다.

 

 정해진 대로 하루 일과에 맞춰 식사를 하고 이발소에 가고 무심하게 흐르던 호텔에서의 생활은 소녀 니나와의 만남으로 달라진다. 니나의 만능키 덕분에 진짜 호텔을 발견한다. 우편물이 모이는 장소, 세탁실, 전화 교환실, 무도회장을 엿볼 수 있는 발코니까지, 호텔의 구석구석을 탐험하며 니나와의 우정을 쌓는다. 예상하지 않았던 일상을 경험하고 다락방의 옷장으로 이어지는 멋진 서재까지 만들었지만 로스토프에게 생은 우울하다. 여동생의 기일에 맞춰 자살을 결심할 정도로. 주인공은 쉽게 죽지 않는 법, 생을 마감하기 직전 맛본 벌꿀은 그리운 고향 사과나무 꽃이었다. 이처럼 소설 곳곳에는 우연을 가장한 아름다운 필연이 가득한데, 작가는 어떻게 이런 장치를 해냈을까. 적재적소에 러시아 문학을 끌어들인 점도 그렇다. 시대적 의미를 설명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다고 해도 반하고 만다.

 

 다양하고도 수많은 사람이 출입하는 호텔의 특수성은 로스토프에게 ​갇힌 삶이 아니라 열린 삶으로 초대한 격이다. 직원뿐 아니라 호텔을 벗어났더라면 만나지 못했을 소중한 이들과의 관계가 맺어졌으니까. 배우 안나와 사랑을 나누고, 프랑스와 영어를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당 지도부 오시프와 친구가 되고, 웨이터로 일하면서 요리사 에밀과 지배인 안드레이와 동료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로스토프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소피야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것을 직접 확인하는 소녀였던 니나가 잠시 부탁한 딸, 소피야. 그랬다, 로스토프의 삶에 혁명과 이념을 뛰어넘을 존재가 등장한 것이다. 호텔이라는 공간에서 그는 누구보다 능력이 탁월한 웨이터가 되었고 소피야의 아버지가 되었고 시대가 바뀌고 있음을 느꼈다.

 

 이쯤에서 그가 백작이라는 신분으로 누렸던 명예와 부를 생각하며 식당의 웨이터로 손님을 받고 메뉴를 정하고 의자 배치를 하며 모두에게 존중받으며 모두를 존중하는 로스토프의 얼굴을 상상해보자. 젊고 당당했던 모습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인자하고 온화한 노년의 신사를 품격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를 지탱하게 만든 힘은 무엇일까. 그가 읽은 몽테뉴의 수상록일까, 안톤 체호프와 톨스토이의 문학일까. 타인에 대한 이해와 배려, 기본적인 인간에 대한 존중이 없었다면 아무리 좋은 교육과 글도 그를 완성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개인의 고유성을 사라지고 호텔의 와인까지 화이트와 레드로만 구분되는 시대, 로스토프는 절망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자신만의 공간인 다락방에서 지난 추억에 빠져서 책만 읽고 가끔씩 찾아오는 오랜 친구 미시카만 겨우 만나는 수동적인 삶을 선택하지 않았다.
 
 “저는 상황이 달랐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하며 많은 시간을 보내진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 내몰리는 것과 상황을 잘 감수해내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려 합니다.(338쪽)
 
 로스토프 백작의 이 말은 내게 커다란 울림을 주었다. 되돌릴 수 없는 과거에 대한 미련을 갖지 말자고 다짐을 하면서도 무너지는 나를 일으켜 세우는 힘을 지녔다. 1922년부터 1954년까지 32년 동안 ​호텔에서 산 백작과 나의 생을 비교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는 걸 안다. 그러나 예고 없이 인생을 찾아오는 불행과 불운을 견디는 모두에게 이 문장을 들려주고 싶다. 누구나 한 번쯤, 혹은 반복적으로 견뎌야 하는 고통의 시간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말이다. 한 인간의 삶은 온전히 그 자신에게만 속해있고 누구도 지배할 수 없는 신성함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렇게 괜찮은 신사, 로스토프에게 행운은 언제 도착하는 걸까. 소설에 빠져 재미있게 읽으면 읽을수록 로스토프가 호텔에서 생을 마감하는 건 아닐까 조바심이 났다. 700쪽이 넘는 소설을 놓을 수 없는 이유였다. 쇼피야가 피아노 신동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으로 끝나는 건 아닐까. 소피야만 더 넓은 세계로 나가는 건 아닐까. 파리로 떠나는 쇼피야의 출국에 필요한 것들을 챙기는 과정에서도 나는 작가 에이모 토울스가 그린 유머와 그림을 발견하지 못했다. 소설은 끝까지 읽어야 하고 삶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아버지는 우리 인생은 불확실성에 의해 움직여 나가는데, 그러한 불확실성은 우리의 인생행로에 지장을 주거나 나아가 위협적인 경우도 많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가 관대한 마음을 잃지 않고 보존한다면 우리에게 극히 명료한 순간이 찾아들 거라고 했다.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이 갑자기 하나의 필수 과정이었음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순간이 찾아든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삶으로 꿈꿔온 대담하고 새로운 삶의 문턱에 서 있을 때조차도 그러하는 것이었다.’ (687쪽)

 

 에이모 토울스의 『모스크바의 신사』는 러시아 혁명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저당잡힌 백작의 생존기가 아니라 품위 있는 한 남자의 빛나는 삶의 처세술이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인간답게 사는 건 무엇일까. 살다 보면 끊임없이 묻는 질문들. 유머를 잃지 않고 살아온 로스토프의 생에서 우리는 발견할지도 모른다. 로스토프가 쓴 시 「그것은 지금 어디 있는가?」란 시에 대해 그가 한 말 ‘모든 시는 행동을 요구합니다.’처럼 삶은 행동함으로 움직이고 살아난다. 행동의 주체는 말할 것도 없이 우리 자신이다. 어디선가 시련과 고난이 닥쳐도 앞으로 나가야 한다고 말하는 백작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 않은가. 재미와 함께 묵직한 감동을 준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