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이기호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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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이킬수록 후회로 남는 일들이 있다. 그때 그렇게 말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때 나는 그를 만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생각하면 할수록 그때의 내가 사라졌으면 하는 마음이 가득하다. 문제는 그런 일들이 반복된다는 점이다. 그때의 나와 다른 내가 되어야 하는데 변하기는커녕 더 비열해지고 치사해진다는 거다.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를 곁에 두고서. 이기호의 소설집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를 재밌게 읽고 찜찜한 무언가에 붙잡힌 기분이다. 그 찜찜함이란 소설에서의 내용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것이다. 지인은 이 소설집에 대해 올해의 책이라 말했다. 그 정도로 좋았다는 말에 나도 동의한다. 그런데 그 소설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표제작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소설집에 수록된 단편의 제목엔 고유한 이름이 있다. 보통의 누군가가 아닌 강민호, 최미진, 나정만, 권순찬, 박창수, 김숙희, 한정희까지 7명이다. 소설을 다 읽고 그들을 만났거나 이야기를 전해 들은 화자(‘나’)가 되어 생각하게 되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주인공의 상황을 살피고 그를 이해하려고 할 때도 많지만 이번엔 좀 달랐다. 소설의 이야기가 적나라하게 현실적이어서 그랬다. 소설은 삶이고 삶은 소설이라고 말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완벽한 동의어처럼 다가왔다. 거기다 몇 편은 소설가 이기호의 마음도 읽을 수 있기에 더욱 그랬다. 이기호는 그저 소설로 읽어 달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독자가 건넨 자신의 책에 사인을 해준다거나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는 것, 소설 쓰기의 괴로움에 힘들어하며 자신만의 작업실을 갖고 있다는 점 등이 그러했다.

 

 그렇다면 이 소설집을 읽고 내가 느낀 떳떳하지 못한 마음, 불현듯 살아나는 어떤 한 장면은 소설 속 화자인 ‘나’의 그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다를 것이다. 그는 내게서 이런 마음을 불러온 소설가이지 않은가. 소설가의 의무라 할 수 있는 이런 글도 소설 속에서 말하고 있으니. 그래도 내가 가장 많이 쓰고자 했던 것은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걸 쓰지 않는다면 작가가 또 무엇을 쓴단 말인가? 나는 그렇게 배웠고, 그런 소설들을 되풀이해서 읽었으며, 주변에 널려 있는 제각각의 고통에 대해서, 그 무게에 대해서, 오랫동안 고민하고자 노력했다.” (「한정희와 나」, 264~265쪽) 물론 그 뒤에는 고통에 대해 쓴다는 게 힘들었다고 말한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조차 힘겹다는 걸 아는데 과연 가능한 것일까?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고, 남들의 시선 때문에 어떤 일에 동참하고, 온전하게 상대의 입장에 설 자신도 없으면서 위로한답시고 위로를 하는 우리들이 이 소설집에 있었다. 결국은 나를 위해 나의 마음이 편해지려고 그랬던 건 아니었을까. 내 위치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했으니 할 만큼 했다고. 그건 우리의 입장이고 상대의 입장은 다르다는 걸 매번 잊는다. 용산참사에 대해 취재를 하는 과정을 콩트로 풀어 낸 「나정만씨의 살짝 아래로 굽은 붐」에서 크레인 기사 나정만의 말처럼 그곳에 있던 사람과 만나야 하는 게 맞았다. 그들의 아픔에 동참하고 위로하려는 슬픈 마음은 충분히 안다. 현장에 있던 이들을 만날 자신도 없으면서 그것에 대해 소설을 쓰려고 했던 소설가의 비겁함, 우리 모두의 민낯은 아닐까.

 

 사채업자에게 돈을 돌려받기 위해 아파트 단지 앞에서 농성을 하는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속 권순찬 씨도 잘못이 없다. 그를 도우려는 아파트 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사채 빚 700만 원을 이중으로 받은 사채업자가 나쁜 사람이다. 권순찬 씨는 그 돈을 돌려받아야 하는 게 마땅했다. 십시일반 700만 원을 마련해 전하지만 권순찬 씨는 받지 않고 추운 날씨에도 농성을 이어간다. 시간이 지날수록 권순찬 씨가 신경 쓰이고 빨리 떠나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누군가의 신고로 그는 노숙자 쉼터로 갔다. 아파트 주민과 ‘나’는 왜 권순찬 씨를 참지 못했을까. 그가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 우리 사회의 수많은 ‘권순찬’의 고통을 우리는 진심으로 헤아릴 수 있을까.

 

 친절 혹은 진심이라는 단어에 감춘 진짜 친절과 진심은 어떤 걸까. 우리는 그 진심을 마주할 용기가 있는 걸까.「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에선 여기저기 내비친 친절을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가 등장한다. 제목을 통해 짐작하듯 강민호는 누구에게나 친절했다. 중학교 후배인 윤희와 아내에게 똑같은 분홍색 스프라이트 비키니 수영복을 사 준 남자. 윤희의 입장에서 그건 단순한 친절이 아니었을 텐데. 고교 후배의 여자친구로 다시 만난 윤희 앞에 강민호는 부끄러움도 모르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무심히 던진 말이나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된다는 걸 확인하게 만든다.

 

 강민호처럼 부끄러움을 몰랐다면 「나를 혐오하게 될 박창수에게」, 「오래전 김숙희는」속 김숙희는 남편을 죽이지 않았을까? 자신에게 모든 걸 주기만 했던 남편을 두고 다른 남자를 만난 김숙희. 남자는 영업상 필요에 의해 유치원 교사였던 김숙희를 만났고 그녀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김숙희는 남편의 무조건적 환대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왜 그런 걸까. 다른 소설에 비해 이 두 편의 소설은 기묘하다.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을 소설은 「한정희와 나」, 그리고 「이기호의 말」이다. 「한정희와 나」속 한정희는 다른 인물과 다르게 초등학생이다. 작가인 ‘나’와 아내는 한정희를 잠시 맡게 된다. 정희는 아내가 어린 시절 돌봄을 받았던 이들의 손녀다. 아내가 그들에게 받은 사랑에 보답하는 정도로 데리고 있는 동안 부족함이 없도록 애를 쓴다. 그런데 정희가 학교폭력에 가해자가 되면서 갈등이 생긴 것이다. 친구를 따돌리고 언어폭력을 일삼으며 그것이 얼마나 무섭고 나쁜 일인지 정희는 인지하지 못한다. ‘나’는 그런 정희를 참아내려 노력하지만 끝내 폭발해버린다. 하지 말아야 한 말들을 해버렸고 정희는 조부모에게 돌아간다. ‘나’를 통해 보통의 어른을 본다. 만약 나라면 나는 정희에게 어떻게 대했을까.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윤리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을까. 자신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 불편함의 울림을 ‘이기호의 말’에서 다시 마주한다.

 

  “자네, 윤리를 책으로, 소설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나? 책으로, 소설로, 함께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나? 내가 보기엔 그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네.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 그것이 우리가 소설이나 책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이라네. 이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왔다네. 진실이 눈앞에 도착했을 때, 자네는 얼마나 뻔하지 않게 행동할 수 있는가? 나는 아직 멀었다네.” (「이기호의 말」, 313~314쪽)

 

 소설 읽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소설을 통해 무엇을 얻으려 하는가. 잘 모르겠다. 소설 속 인물처럼 살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 아니면 주변에 그런 이들이 없기를 바라는 부끄러운 소망. 어쩌면 무언가 생각나게 하는 게 소설을 통해 얻는 것인지도 모른다. 함께 산다는 것, 타인의 고통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 생각이 행동으로 변화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읽어야 한다는 것, 그 정도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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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07-11 22: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기호 이기호 하던데 역시더군요!

자목련 2018-07-13 16:39   좋아요 1 | URL
네, 이기호 정말 대단해요. 이번 소설집은 특히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