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맹 - 자전적 이야기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백수린 옮김 / 한겨레출판 / 201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글을 쓸 때 가장 큰 위로를 받기도 한다. 나는 그렇다는 말이다. 글을 쓰는 동안 오롯이 글(나)과 하나가 될 수 있어서다. 책을 읽을 때도 그렇지 않냐고 물을 수도 있다. 책을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딴 생각이 자리를 잡아 집중이 어려울 때도 있으니까. 하지만 읽는 것과 쓰는 건 같은 듯하면서도 완전히 다르다. 읽기는 정해진 끝을 향해 나가는 것이고 쓰기는 내가 그 끝을 정해야 한다. 이 글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 아는 건 나밖에 없다.

 

 쓴다는 건 무엇일까. 일기를 쓰고, 편지를 쓰고,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쓰는 일. 단순히 기록하기 위해 쓰고 나를 표현하기 위해 쓴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로 알려진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자전적 에세이 『문맹』은 쓴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어떤 기대도 없이 『문맹』을 처음 읽었을 때 쉽게 읽혔다. 읽고 나서 지인에게 이 책에 대해 어린아이의 글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그 나이를 생각하면 대단한 글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리고 쓰고 싶을 때 쓸 수 있다는 환경에 감사하며 다시 읽었다.

 

 

 

 

 네 살 아이가 읽은 것들, 글자를 읽는다는 기쁨, 전쟁이 막 시작된 상황, 억지로 가르치고 배우는 언어, 어쩔 수 없이 가족과 헤어져 기숙사에서 거주하며 서로를 그리워하는 시간, 난민 시설을 거쳐 스위스에서의 생활을 차례차례 짚어보며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아고타 크리스토프가 마주했다. 그녀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무엇을 쓰고 싶은지, 내가 쓰는 건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자꾸만 내게 묻게 된다. 아니다. 어떤 목적도 없이 아무런 의미도 없이 글을 쓸 때도 많다. 그냥 쓰고 싶은 것이다.

 

 아버지의 교실에서는 분필, 잉크, 종이, 고요함, 침묵, 눈雪의 냄새가, 여름에도 풍긴다. 어머니의 넓은 부엌에서는 도살된 짐승, 삶은 고기, 우유, 잼, 빵, 젖은 빨래, 아기의 오줌, 부산함, 시끄러움, 여름 열기의 냄새가, 겨울에도 난다. (10쪽)

 

 뭔가 읽을 것이 있을 때면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나는 계속 읽고, 그러고 나면 울면서 잠든 밤 사이에 문장들이 태어난다. 문장들은 내 곁을 맴돌다, 속삭이고 리듬과 운율을 갖추고, 노래를 부르며 시가 된다. (34쪽)

 

 아름다우면서도 솔직하고 순수하고 순진한 『문맹』의 글은 아고타 크리스토프를 증명한다. 곱게 정제된 글이 아니다. 그럼에도 충분히 유려하다. 오직 그녀만의 쓸 수 있는 글이다. 100여 쪽의 글로 이렇게 확고하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니. 그녀의 모든 감각은 쓰기 위해 존재하고 열려 있다. 어린아이의 감정, 소녀의 마음, 젊은 엄마의 불안, 작가의 고통을 전부 보여준다. 그래서 어떤 글에서는 통증을 느끼고 어떤 글에서는 같이 아파하고 어떤 글에서는 공포로 숨을 죽인다. 안개보다 더 짙게 깔려 알 수 없는 내일의 상황을 고스란히 안고 살아가면서도 글을 향한 열정을 놓지 않는다. 자신이 말하고 쓰는 언어를 떠나 겨우 들리기만 하는 언어로의 이동. 모어를 잃어버린 게 아니라 간직한 채 스물여섯 살, 다시 학교에 다닌다. 프랑스어를 배우고 글을 쓴다. 자신이 쓴 글을 당당하게 사랑하고 확신을 갖는다. 그것만이 그녀를 계속 쓸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무엇보다, 당연하게도, 가장 먼저 할 일은 쓰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쓰는 것을 계속해나가야 한다. 그것이 누구의 흥미를 끌지 못할 때조차. 그것이 영원토록 그 누구의 흥미로 끌지 못할 것이라는 기분이 들 때조차. 원고가 서랍 안에 쌓이고, 우리 가 다른 것들을 쓰다 그 쌓인 원고들을 잊어버리게 될 때조차. (97쪽)

 

 어떻게 작가가 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런 것이다. 우리는 작가가 된다. 우리가 쓰는 것에 대한 믿음을 결코 잃지 않은 채, 끈질기고 고집스럽게 쓰면서. (103쪽)

 

 글을 쓸 때 무섭고 두렵다. 제대로 쓰고 있는지 알 수 없어서다. 완벽한 글을 쓰기를 바라지만 ‘완벽’에 대해 모른다. 모르기에 쓸 수 있고 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글을 붙잡고 계속 쓰다 보면 나아지겠지 생각한다. 그래도 쓸 수 있어서 다행이다. 모어(母語)로 말하고 쓸 수 있어 다행이다. 내가 하는 말과 쓰는 글을 들을 수 있고 읽을 수 있는 이들이 있어 감사하다. 쓴다는 것에 두려워하지 않기로 한다. 무엇을 쓰든, 무엇 때문에 쓰든, 얼마나 쓰든 상관하지 않기로 한다. 그저 나를 위해 쓰고 쓰는 일을 지속한다. 쓰는 동안 나는 살아 있고 존재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18-06-19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용하신 구절들이 저도 무척 마음에 들었더 구절이라 더 공감이 가네요.

자목련 2018-06-21 10:11   좋아요 1 | URL
아름답고도 매혹적인 구절이 참 많았어요, 놀라운 책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