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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삼촌 브루스 리 1 
천명관 지음 / 예담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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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는 텅빈 심야극장, 딱히 무슨 영화를 볼지 결정도 않은채 영화관에 들어선다. 이미 중반을 넘어 엔딩을 기다리는 상영관이 있었는가 하면, 언제나 끝을 볼지 기약할 수 없는 상영관들도 있었지만 모두 뒤로한 채 뚜벅뚜벅 지나쳐간다. 오래전의 '향수'가 그리웠던 것일까. 겨울과 겨울 사이에 걸쳐있는 시간의 경계가 추상적 시간의 넘어섬이라면, 겨울에서 봄으로 이어지는 계절의 마디는 생의 실제적 분절과 함께 삶의 나이테를 스스로의 몸에 새기며 넘어서는 또는 전진하는 경계는 아닐까. 그래서였을까, 여러 상영관 중에서 '이소룡'이라는 나의, 우리의 과거를 만나 그동안 자신 안에 새겨진 시간의 너울을 새삼스레 떠올려보고 싶었던 것은. 봄이 오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꼬박 하루하고도 반나절을 어두컴컴한 의자에 홀로 앉아 영화를 보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아무도 없는 텅 빈 어둠 속에서 '짝,짝,짝' 갈채소리가 울린다. 분명 '칸'이나 '베니스'는 고사하고 대중성 짙은 '아카데미'에도 초청받을 수 없는 'B급' 영화임에는 분명하다. 분명한데, 손은 머리보다 빨라 연신 손뼉을 마주치며 박수를 보낸다. 'A급'이 되지 못하고 'B급'이 되어버린 인생의 자조 섞인 위안이자 회한이어도 좋다. 어느덧 살다보니, "산다는 것은 그저 순전히 사는 것이지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라는 걸 이해해버리게 된 나이가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니터의 시간을 보며 '무슨 이야기를 더 풀어놓아야 할까'와 '또다시 반복될 한 주를 위해 어서 잠자리에 들어야 하지 않아' 하는 찰나의 고민 사이에서 재빠르게 후자의 손을 들어줄만큼, 딱 그만큼 세월을 지나온 생이기에 『나의 삼촌 브루스 리』는 '괜찮다고, 더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고개를 끄덕거려준다.' 고마운 소설이다.

 

 

한 가지만 첨언하지면,

"내 스타일에는 아무런 수수께끼가 없다. 내 움직임은 단순하고, 직접적이고, 비고전적이다."라는 이소룡'의 또는 '작가의 말'이 이처럼 소설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예는 없었다는 것. 그리고 천명관은 소설의 존재론과 목적론을 다른 누구보다 현실적 층위에서 정확히 집어내고 있다는 것(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또는 그것이 전부든 아니든). 적어도 그 층위에서  『나의 삼촌 브루스 리』는 온전히 제 몫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 

 

도시의 외곽에 있는 오래된 삼류극장에서 '옛날 영화'를 보고, 어둠이 깔린 도시를 홀로 걸어오는 돌아오는 길이 그닥 쓸쓸하거나 고독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내일이면 어느새 긴 그림자를 자신의 발아래 드리운 채, 그렇게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과 한바탕 왁자지컬 웃음을 주고 받으며, 아침 인사를 나누며, 하루를 시작하게 될 터이기에 

 

 

 



 
 
 

새해들어 이제, 겨우, 힘겹게, 올리는 '첫' 포스팅이다.

작년과 올해의 경계는 없다고, 더이상 지나간 시간에 대한 아쉬움이나 미련 또는 도래할 시간에 대한 기대나 환희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저 '묵묵히' 또는 '덤덤히'라는 부사만이 이즈음의 세월의 흐름에 대한 정당한 수식어가 될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무방비 했던 것일까. 1.2일, 첫 출근과 함께 화들짝 놀란다. 그 놀람은 쉬이 사라지지 않고 끊질기게 괴롭히더니 2주가 지나서야 겨우 숨통을 틔워준다. 그리고 설명절이 끝나고 조기집행과 선거, 감사로 이어지는 '봄날'이 예고돼 있다. 아마도 맞이하지도 못한채 '봄날은 간다', 라는 제목의 포스팅을 5월이 지나갈 무렵 올리게 될 것도 같다.

 

무언가를 '읽기'란 거의 불가능한 시절이다. 군대시절에도 백 여권의 책을 읽었다. 밖에선 다들 한창 일을 할 시기라고 한다. 더 열심히 해야한다고도 한다. 하지만 그런 분주함 속에 빠져들수록 스스로에 대한, 살아 있음에 대한 자각은 반비례하며 흐려져만 간다. 뛰쳐나오지도 못한다. 그게 생이라고들 하니까. 마지막 남아있는 자존, 이랄까 위안, 이랄까. 그럼에도 올해의 첫 책구매는 시작되었고 조기집행과 맞물려 집중적인 구매 시절이 도래했다. 알라딘 보관함에 있던 것들을 우선적으로 구매하게 되진 않았다. 어떤 순간에 사고 싶었던 책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우선순위가 바뀌곤한다. 오늘의 구매리스트에는 이웃님들의 입김이 작용했다. 누군가 외부를 향한 블로그 활동임에도 짐짓 그 외부에 대한 신경은 별로 써보지 않았던 듯하다. 초반엔.  하지만 한 분 한 분, 고마운 이웃들이 생기기 시작하고 그들의 글을 읽게 되기 시작했다. 거창하지만 그게 '소통'이고 '공유'가 아닌가도 싶다.(책에 대한 보증은 이웃님들이 꼭, 해주셔야 할 듯. 아니다 싶으면 반품 요청 들어갑니다. ^^)

 

오랜만에 누리는 이틀짜리 주말, 어떤 것들은 바로 손에 잡게 될 것이고, 어떤 것들은 정확한 기일을 약속할 수 없다. 그럼에도 책을 사는 건 먼 훗날을 위한 보장성 보험이자 오늘, 읽기에 대한 중지를 강요받는 시절 그 '읽기'에 대한 나만의 작은 위안이 될 것이다.

 

 

『네이션과 미학』 가라타니 고진, 도서출판 비. 고진의 책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올 해 몇 권의 책이 더 구매될 예정이기도 하다. 지젝도 그러하지만 고진은 칸트과 마르크스를 연결지어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느꼈던 도덕화된 정치에 대해 갖는 불편함도고진에게선 크게 반발되지 않는다. 그는 정치의 윤리성을 강조한다.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기 때문일 게다.

 

『먼북소리』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사상사. 이전에 한 번 읽었던 책이고, 하루키는 소장용으로서, 아직 구비되지 않은 리스트들도 언젠가 모두 위용을 갖추게 될 것이다.

 

『마음사전』 김소연, 마음산책. 진즉에 그 명성과 풍문은 익히 들어왔지만 선뜻 구매를 결정하진 못했다. 작년 말에 읽었던 신형철의 『느낌의 공동체』가 뇌관이 돼 이번 구매리스트에 당당히 오를 수 있었다. 너무너무 기대되는 책들 중 하나이다.

 

이제부터가 이웃님들의 추천 아닌 추천으로 구매하게 된 리스트들이다. 두둥~~

 

 

『핸드메이드 픽션』 박형서, 문학동네 (아, 슬프게도 또다시 '문동'이다. 문학판을 전부 빨아들일 기세다.)

 

"이야기로서 자신을 증명하는 소설가(...) 이 책에 대해 한 마디로 말한다면, 흥미롭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다양한 장르의 글을 만날 수 있다. 어떤 소설들은 정말 재미있고, 어떤 소설은 정말 애닳고, 어떤 소설은 기상천외한, 어떤 소설은 정말 놀라웠다. 그러니까 박형서란 작가는 실로 대단한 글쟁이라 할 수 있다.(http://littlegirl73.blog.me/, 강조는 소훔)

 

『새벽의 나나』를 통해 이미 만나본 작가이고, 이웃님의 포스팅을 보고 박형서의 신간이 나왔음을 알게 되었다. 책장 어느 구석에 자리하고 있던 『자정의 픽션』도 꺼내 한 두 장을 읽었다. 무엇보다 '자목련'님의 저 문장이 모든 걸 보장해주었다. 아니, 솔직하자. 박형서는, 특히 '자정의 픽션'을 조금 읽어보고 나선, 그 누군가의 보증이나 추천이 없어도 난 충분히 만족하게 되리란 것을.

 

 

 

『끝나지 않는 노래』 최진영, 한겨레출판

 

"모쪼록 최진영을 1순위로 놓아 주세요. 이 작가를 위해서라면 보탤 수 있는 힘은 죄다 보태고 싶어요 정말. 이 작가를 떠올리면 언제나 가장 먼저 '도대체 어디서 이런 작가가 나타났는가'하는 생각이 든답니다."

(http://blog.naver.com/what2read/120148821573?copen=1&focusingCommentNo=5876877).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Gore"(참고로 이건 '고래'라고 읽죠.ㅋㅋ)님이시죠. 그런 분이 저렇게 말씀하시는데 어찌 사보지 않을 도리가 있게습니까. 최진영이란 작가도 처음 알게 되었고, 한겨레출판사 책도 오랜만에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당장이라도 마구마구 읽어보고 싶은 책입니다.

 

 

『소설가로 산다는 것』 김훈 외, 문학사상

 

출간 때부터 살갈말까 고민을 했던 책입니다. 이 또한 '고래'님의 추천이 있었기에 이런 만남이 가능했던 책 중 하나이죠.

 

 

『섬』 장 그르니에, 민음사

 

"『섬』은 책을 읽는다는 신성한 기쁨과 동시에 끝까지 어떤 앎의 즐거움을 준다는 것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다. 에세이를 읽다보면 어느 순간 자기오류에 빠져 쓰는 이 못지 않게 읽는 이에게도 한풀 꺾인 한낮의 노동같은 책 읽기를 하게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반해 『섬』은 마지막 페이지까지 그 믿음에 변함이 없었다. '기대'하게 만드는 것이다."

(http://blog.naver.com/dimmu/30127688050?copen=1&focusingCommentNo=5882522

이전까지 『섬』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에겐. '까뮈'와의 연관성 없이 '그르니에'를 알지 못했기에. 이는 단독적 주체로서의 그르니에는 없었다는 말과 같다. 이미 27쇄다. 그런데도 전혀, 몰랐다. 『섬』을. 늦었지만 뒤늦게라도 『섬』에 가볼 수 있는게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꼭, 섬에 대해서만큼은 입속으로 옹알옹알 거리며 '묵독'이 아닌 '음독'을 하며 가보고 싶다.

 

 

책 몇 권 샀으면서 자랑이 너무 길어졌다.

어느새 해도 정오를 넘어서고 있다. 끼니도 거르며 먼 길을 달려온 기분이다.

하지만, 역시, 책은 사물로서의 대상이 아닌 그것을 펼치고 읽어 내려가는 순간 완전한 존재로서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그만 줄이고, 하나 둘 산파로서의 역할로 돌아가야겠다. 



 
 
 

포스팅한 달력을 보니 검게 물든 숫자가 다섯 개, 그나마 하나는 스마트폰에 대한 예행연습 차원이었으니 12월은 도무지 분발을 못한 셈이다. 무기력했던 탓인지 반대로 무력함조차 느끼지 못할만큼 분주했던 탓인지, 아마도 그 양자 사이를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하는 사이 어느덧 이렇게 멀리까지 와버리고 말았다.

 

이웃님의 말씀대로 한 해를 나름 정리해보아야 할텐데, 조급하다.

작년부터가 아니었을까. 크리스마스와 각종 연말회식들, 숱한 만남과 헤어짐들이 만들어내는 소란스러움 때문이라도 연말은 역시 '연말'의 분위기를 연출해내곤 했다. 하지만 그런 유난스러움조차 의미없는 통과제의처럼, 단지 어쩔 수 없음에 이끌려 지나쳐야만 하는 의무적 행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어버렸다. 마치 그런 '고단함'을 통과하지 않고선 새로운 한 해가 영원히 도래하지 않기라도 하듯, 모두가 술과 기억조차 하지 못할 말들을 토해내며 지나 온 시간에 대한 천도재를 올린다. 그뿐이다. 단지. 성탄절과 제야의 종소리가 울려되는 흥분과 설렘도, 시끌벅적한 여흥과 살풀이도 모두, 덤덤하게 다가온다. 서글픔이나 후회도 덩달아 줄어든다. 나이를 먹었다는 반증이겠지만 그 또한 나쁘지만 않다. 무뎌지는 세월들 너머로도 새해는 어김없이 도착하기 때문이다.

 

그래, 조급, 하다.

몇 번의 망년회를 겪고도 잊혀지지 않을만큼 2011년의 마지막 한 주, 한 해의 하중이 한 점으로 집중된다. 부득이(?) 집으로 올라온 건 다음날 입을 옷을 챙겨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일 집을 나서면 금요일 밤, 최악의 경우엔 토요일에나 이곳에 있게 된다. 야근을 하지 않고선, 새해 첫 날을 사무실에 홀로앉아, 손을 호호 불어가며 자판을 두들기는 사태가 발생할지 모른다. 몇 장의 사진을 몰아찍고 포스팅을 시작하려는 찰나 '나꼼수 특별공지' 다운로드가 완료된다. 우선순위가 바뀌어 버린다. 또한 내일은 사무실 대청소로 다소 이른 출근을 해야만 하고...후~~~

 

 

하루종일 끊이지 않고 쏟아져 나오는 업무에 요상스런 퇴근길.

싱크대에 쌓여있는 그릇들과 베란다에 널려있는 세탁물들을 처치하고 동시다발적으로 쌀을 씻고, 샤워를 하고. 빛(아마 달빛이었나보다)의 속도로 하나들 눈앞에 닥친 일들을 하나하나 해결했음에도 밥을 먹고 모니터 앞에 앉으니 벌써, 열시가 가깝다. 트윗에도 올린 것처럼 적어도 이런 날만큼은 '각시'는 고사하고 '우렁이'라도 한 마리 있었으면 싶다. 아무래도 봄이 오고 날이 풀리면 어디 논두렁에라도 나가 보아야겠다. 우렁이 몇 녀석을 납치해 집으로 데려오려면. 아니, 아니다. 우렁이가 밥과 청소는 해주겠지만 그러고나면 분명, 자기와 놀아달라며 때를 쓸지도 모른다. 돈도 더 벌어오고 그럴러면 야근도 더 해야할지 모른다. 아! 도무지 헤갈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이 딜레마.

 

 

 

 

백가흠의 『귀뚜라미가 온다』

시차가 느껴졌다. 오히려 『조대리의 트렁크』와 동시에 읽고 있던 『가나』에 눌리는 형국이다. 2005년 7월, 그 시절이라면 인도의 어디메쯤 있었을 때이지만 만약 당시 『귀뚜라미가 온다』를 만났더라면 지금과는 역시, 다르게 느껴졌을 게 틀림없다. '배꽃이 지고'가 기억에 오래 남는다. 독자의 무자비한 폭력성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게 만든다. 소설 속으로 뛰어들어 가서라도 '과수원집 주인'을 멍석말이를 하고 싶을정도였으니. 하지만 이례적으로(?) 이 책의 압권은 평론가 김형중의 해설이다. 욕망과 폭력이라는 그물로 얽혀있는 소설집이지만 해설을 읽고나서야 그 그물들이 얼마나 촘촘하고 단단히 얽혀 있는지를 새삼스레 알게 되었다.

 

 

 

 

 

여직원들에게 요사이, '한강'을 읽으라 자주 권한다. 난, '김연수와 하루키' 못잖게 '한강'을 좋아할 수 있는 여자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을 자신이 있다. 문제가 없진 않다. 주변의 사람들은 대부분 '한강'이라 말할 때, '漢江'을 먼저 떠올리고, '한강'을 권하는 이들이라곤 유부녀와 곧 유부녀가 될 분들 뿐이다. 치명적, 사랑은 그녀의 소설로 이미 충분하다.

 

 

 

 

 

 

좀더 나이를 먹는다면 달라질까. 스티븐스의 그 꼿꼿한 명예와 자존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남아 있는 나날'들이 있음에도 나에겐 그 나날들 속에서 스티븐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과거의 시간을 길어올려 화려하게 각색하고 자위하는 일밖엔 없을거라 생각이 든다 . 하지만 『남아 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딱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소위 고전이라는 것들을 읽었을 때 느꼈던 분위기를 이 책에서도 받았다. 역시나 스토리는 소설을 구성하는 한 요소일 뿐, 전부가 될 순 없다.

(하루키는 동시대 일본 작가의 책들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잡문집'을 읽으면서 알았다. 하지만 동시대 일본인 작가인 '이시구로'는 예외란 사실을. 하루키의 만들어내는 자장은 자연스레 '이시구로'에게까지 인력을 작용시킨다.)

 

 

 

 

문학이 아닌 문학 너머의 사회에 대한 시선들조차 그는 다감하다. 동시에 날카롭다. 논술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교재가 있을까 싶을정도다. 신형철은 예리하면서 따듯하다. 정신분석과 철학적, 문학적 이론들로 무장했음에도 평로가이자 한 명의 '독자'로서 느끼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 들지 않는다. 김현선생이 그렇듯 '평론'이 '문학'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이가 '신형철'이 아닐까. 다만, 그의 능력과 글쓰기의 場이, 그의 학벌과 맞물리면서 곱게만 보이지 않는다. '문동'이라는 '메이져'를 벗어나도 그라면, 자립할 수 있을 것이다. '문동'이 '악'은 아니지만 적어도 '선'은 아니기에.

 

 

정치의 바람이 거세진다. 정봉주 의원의 구속과 선관위 디도스 공격은 태풍의 눈이 되어 바람을 한층 요동치게 만들 것이다.. 『느낌의 공동체』에서 가장 먼저 읽은 글이고 가장 먼저 옅은 밑줄을 그어 본 문장이다. '태풍의 눈' 속에서 그는 좀더 선명한 모습으로 보일 것도 같다.

 

"그는 어느 순간 자신이 살아야 할 삶이 무엇인지 알게 되어 그렇게 살았고,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죽어야 하는지를 스스로 결단해 그렇게 죽었다. 나는 늘 문학은 천박한 '성공'을 찬미하는 세계에 맞서 숭고한 '몰락'의 의미를 사유하는 작업이라고 믿어왔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인간 노무현의 몰락이 내게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문학적이다." (느낌의 공동체 p185~186)

 

 

자기말한 불쑥 뱉어내고 끝낸다.

이웃님들 관리도 들어가야하는데...

아직, 2011년, '남아 있는 나날'들이 있으니까요.

 

                                                (http://redneck96.blog.me/에서 옮겨온 페이퍼입니다.)



 
 
 
가나 
정용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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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에서야 서정적·낭만적 언어의 세계(소설) 또한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용한 방편이자, 인간적 존재로서 숙명처럼 떠안아야만 하는 고독과 결핍, 욕망 그로인한 관계의 부조리와 폭력 등을, 일상이라는 수면아래 감추어져 쉽게 드러나지 않는 인간의 근원적 속성들을 인식할 수 있는 길'way'로 받아들일 수 있다. 반면 20대엔 오로지 이성적·과학적 언어만이 세상을 바꾸고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적 세계라 '오해'했다. 둘은 선후의 관계도 아니요, 가치의 고저로 비교할 수 있는 이분법적 세계도 아닌 동일한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는 병렬적, 상보적 요소일 뿐이다.

 

 

서론이 거창했던 건, 그럼에도 내가 읽는 소설이란 대부분 일차적 검증이 끝난 작품들이었기 때문이다. 평단과 대중이 갖고 있는 일정한 체를 투과한 책들을 손에 잡았고 나 또한 그 체의 크기만큼의 공감과 감동을 받아왔다. 변명이 없는 건 아니다. 주어진 시간과 자본은 무한하지 않았고 그에 반비례해 읽어야 할 책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현실은 비단 나만의 문제는 아닐테다. 문학잡지와 계간지를 읽으며 신예작가들의 작품을, 또는 '기하급수적',으로까지는 아니어도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는 각종 '문학상' 수상작들을 동시간적으로 읽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한국인 모두가 김윤식 선생이 될 수는 없다.(그런 세상이 온다면 문학은 더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김훈과 박민규, 김연수와 김애란, 한강과 백가흠, 오스터와 매카시 등등. 모두가 중간 어느지점에서 만나게 된 연緣들이었고 그 지점으로부터 과거와 현재의 양방향으로 확장된 작가들이다. 그만큼 더디게 시작한, 그리고 소설에 대한 다소의 불신과 주저가 낳은 결과이다.

2010년 늦가을, '달'님을 통해 '최제훈'이란 작가의 '첫'소설집을(『퀴르발 남작의 성』) 읽었다. 우연치 않은 계기가 아니었었도 결국은 한번쯤 손에 잡았을 것만 같은 상상이 들지만 결국 확신 없는 사후적 추측일 뿐이다. 한 작가의 '첫' 작품을(고인이 된 작가의 작품을 제외하면) 읽었던 기억이 거의 없다. '처음'이 주는 신선함과 호기심은 자칫 시간을 허비하는 지름길이 되기도 하며 이는 '처음'이 아니어도 '낯선' 작품과 작가를 멀리하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최제훈'작가는 '최동훈'감독과 친인척이 아닐까 싶을만큼 뛰어난 상상력과 치밀한 구성력으로 단번에 나의 전작주의 작가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는 메리트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단 한번의 '우연'을 '운명'으로서 받아들이기엔 세월의 흔적이 너무 깊게 아로새겨져 있다. 소설작품에 대한 읽기는 역시 '선택과 집중'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했고 '새로운' 작가들이란 이미 검증을 거쳐 당대 한국문학의 한 축을 견인하고 있는 작품들 뿐이었다.

 

 

2011년 초겨울, 난 또 한 번의 '첫' 작품집을 낸 작가를 만난다.

정용준의『가나』

'웹진문지문학상' '젋은작가상'이란 명성(!)도, '알라딘' 메인페이지에 올랐을 때도 '정용준'이란 작가는 적어도 나에겐 여전히 등단하지 못한 이름모를 작가일 뿐이었다. "가장 기대되는 젊은 작가"란 진부한 띠지는 그 진부함만큼 편견을 만들었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죽음의 문장들"이란 상찬도 81년생이란 작가의 나이를 본 순간, 과도한 상업적 카피정도로만 느껴졌다. 책의 첫 날개에 실린 작가의 이력인 "'텍스트 실험집단 루' 동인으로 활동 중"조차 '아니 벌써 그룹과 파벌을 형성하려 드네, 이건 겐지가 그토록 혐오했던 문단의 병폐아냐. 적어도 '죽음'을 노래한다면 절대 고독 속에 자신을 투기하여야 하는 거 아닐까'하는 오해로 작동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역시 작가는 오로지 '작품'으로 말한다고 했던가. 더우기 "글의 힘을 의심하지 않"는 작가라면.

 

 

 

 

 

 

 

「떠떠떠, 떠」,「가나」는 유치한 표현이지만 '슬픈 사랑의 노래'라 부를 수 있을만큼, 비록 각자의 상처로부터 모든 관계가 절단된 세상에서 또는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절대지의 세계로 들어가버렸음에도 '사랑'이라는 울림을 아름다운 노래로, 비록 더듬거리며 분절된 언어일지라도 "떠, 떠떠, 떠떠, 떠떠떠, 떠, 떠, 아아, 아아아하아아, 아아아, 아, 사, 사, 사아, 아, 아아, 아아아, 라라, 라라라라, 라, 라라라, 아, 아야앙, 해"라며 들려주고 있다.

 

 

'정용준'에 대한 확신은「벽」을 만나고 나서부터였다. 일명 '폭력의 역사'

폭력적 법과 사회가 먼저였을까, 아님 인간의 폭력적 본성이 그런 사회를 잉태했을까,란 형이상학적 물음 이전에 적어도 폭력은 인간을 아무런 의지도 희망도 없는 '벽'으로 만들어버리는 동시에 인간을 왜곡된 형태일지언정 하나의 주체로 존립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반장21'은 무차별적 폭력과 수탈을 감내하며 '벽'이 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희망이란 결국, 또다른 누군가를 '벽'으로 만들지 않고선, 폭력의 중지나 정지가 아닌 폭력의 연쇄와 유전을 통하지 않고선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다.'9'의 죽음이 인간적 존엄을 상징하지만 결국 그의 존엄이 섬과 사회의 폭력을 중지시키지는 못한다.

소재의 신선함과 폭력적 묘사는 해설자의 말대로 그를 백민석, 백가흠, 편혜영의 계보에 넣기에 모자람이 없는 작품이다.

 

 

소외와 사회적 냉대로 인한 가학적 망상이 낳았던「먹이」또한 충격적이었다. 그럼에도「구름동 수족관」「사랑해서 그랬습니다」등에서 보여주는, 이 가열찬 세상에 '사랑'이라는 것이 아직도 어떻게 작동할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이 글이라는 매개를 통해 인류적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지를 '정용준'은 '의심하지 않고, 믿는다'

 

 

벌써 장편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또, "소설을 칠백 편 정도 쓰고 싶다'고도 한다.

그리고 난, 정용준을 기억하려 한다.

설마, '칠백 편'은 쓰지 못하겠지만, 읽고 쓰기에 주저함과 회의가 들지 않는 그는 쓰고, 나는 읽을 것이다.

 



 
 
 
소설가의 각오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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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보단 영상적 이미지에 더 매혹되었고 때문에 소설을 포함한 문학보다는 영화에 더 관심이 많았던, 반항적이고 외골수의 소년이 있었다. 어느날 아버지의 서가에 꽂혀있던『백경』읽고 일찌감치 항해사의 꿈을 키운다. 청소년 시절의 막연한 이상이나 바람이 아니었다. 소년은 항해사란 꿈을 위해 '국립 전파 고등학교'에 입학해 통신시가 되어 머나먼 대양으로 나갈 준비를 한다. 입학과 동시에 학교는 취미가 되어버리고 성적은 늘 바닥을 전전한다. 세월은 바다로부터 점차 그를 멀어지게 했고 어찌어찌 졸업과 동시에 '텔렉스 오퍼레이터'라는 셀러리맨으로서의 자리로 그를 데려다 놓았다. 이십 대 전후의 그에게, 누구와도 쉽게 협조할 줄 몰랐던 일본의 또다른 '홀든'에게, 조직에서의 봉급쟁이 생활이란 그야말로 악전고투일 뿐이었다.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입사한 지 삼 년이 못돼 회사는 기울기 시작했고 샐러리맨으로서의 회의도 동시에 찾아온다. 그러다 '문득' 소설이란 걸 쓰려한다. 단지 연필과 노트, 사전이면 족할 뿐 더이상의 자본은 들지않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틈틈히 소설을 썼고 문예지에 출품을 했다. 그리고 그는 1967년『여름의 흐름』으로 아쿠타가와 상 최연소 수상자라는 영예를 얻는다.  '마루야마 겐지'다.
 

 

 

아버지의 영향과 외동아들이라는 가정적 환경 때문인지 소년은 일찌감치 문학에 매료되었다. 다만 당시의 일본문학이 아닌 스탕달과 도스토옙스키 등 미국과 유럽의 고전을 주로 읽었고 음악의 세계에도 좀더 깊숙이 빠져든다. 학교에 대한 불만은 있었겠지만 내성적인 성격에 표출적인 저항이나 반항보다는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며 그 속에서 보내는 시간을 즐기던 아이였다. 대학을 졸업하지도 않은 채 결혼과 동시에 '피터 캣'이란 재즈바를 운영하며 하루종일 재즈를 듣고 칵테일과 음식을 만든다. 그러던 맑게 갠 화창한 오후, 야구장 외야석에서 맥주를 마시며 플레이를 보다 갑자기 '소설을 쓰자'고 결심한다. 가게를 운영하고 틈틈히 소설을 써나갔고 그것으로 그의 인생은 서른이 되기 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새로운 길로 들어서게 된다. '무라카미 하루키'다. 

 

 

 

하루키의『잡문집』을 읽는 틈틈히 겐지의『소설가의 각오』를 읽었다. 스무 권이 넘는 하루키의 작품을 읽어왔고, 단 한 권의 겐지 작품도 읽지 않았다. 하지만 기묘할만큼 일본을 대표하는(?) 두 작가의 등단은 너무도 급작스럽고 일반인의 시각에선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어릴적부터 쌓였던 문학적 토양을 고려한다 해도 본격적인 문학적 수업이나 사사도 받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 어느날 문득 '소설을 써볼까'하는 결심과 함께 당대를 대표하는 소설가의 반열에 올라있다는 것이. 아마도 60~70년대에나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하지만 겐지와 하루키의 문학적 그리고 일상적 세계는 극단적이라 할만큼 대척점을 향해 갈라진건 아닐까란 생각이다. 어찌보면 문학적 場으로 들어가지 않고 '변방'에서 꾸준히 작품활동을 하는 작가들이지만 아마도 겐지에겐 하루키의 포지션조차 지극히 세속적이고 혐오감을 불러오진 않을까. 그만큼 '마루야마 겐지'라는 작가는 예외적이고 외골수이며 극단적이기까지 하다.

 

『소설가의 각오』를 읽는 건 심히 불편하다. 어쩌면 불쾌하기까지 하다. 서른이 넘어『호밀밭의 파수꾼』을 다시 읽으며 느꼈던 '홀든 콜필드'에 대한 불편함과는 농도가 다른 불편함이다. 여성에 대한 비하는 물론 자신을 찾아오는 독자들과 편집자들에 대한 편집광적인 비난들, 자신의 문학 외부에 놓여 있는 대부분의 동시대적 문학에 대한 비판들은 일정부분 동의할 수 있으면서도 한편으론 지나친 나르시시즘에 빠진 작가의 외퉁수적 시선이 공감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작품으로서만 말한다'라곤 하지만 에세이 또한 작가가 잉태한 자신의 작품임을 감안하면 『소설가의 각오』는 겐지의 순수 문학적 작품을 오히려 멀리하게끔 만들 정도였다.

 

어제 배달된 책중엔『달에 울다』가 포함되어 있다. 역시 그럼에도였다. 겐지의 일반인에 대한 성토는 그렇다쳐도 일본 문학계 전반에서 펼쳐지고 있는(비단 당시의 일본만의 풍경은 아닐터이다), 점점 세속화·상품화 되어가는 작가와 문단에 대한 일침은 분명 타당한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북알프스의 산속에 들어가 작품을 쓸수 있는 최소한의 생계비만으로, 마치 수도승이나 '니어링부부'를 연상시키는 탈세속적 삶과 그 속에서 겐지가 추구하는("내게 유일한 관심사는 소설 언어라는 가장 인간적인 도구를 마음껏 구사한 소설을 통하여,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이란 생물의 핵심에 얼마만큼 욕바할 수 있는") 문학이란 도대체 어떤 모습의 문학일까(책을 읽는 내내 그와 가장 근접한 작가가 떠올랐으니, '김훈'이다) 궁금했고, 세상과 인간적 관계를 져버린 채 오로지 홀로됨을 자처하며 끊임없이 문학의 광맥을 찾고자 하는 겐지, "모든 예술이 그렇지만 문학 또한 얼마만큼 개인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에 따라 성패가 결정난다. 불안이나 고독에서 슬픔과 분노가 태어난다. 그 벽을 돌파한 곳에 나 자신의 혼이 있다. 거기에 표현할 가치가 있는 무엇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니까 불안과 고독이야 말로 창조하는 자들의 보물이다."라고 말하는 작가가 쓴 작품은 과연 어떤 것일까 하는 호기심을 떨쳐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막의 바람 같이 습기 없는, 쨍쨍한 태양빛 아래서 이글이글 작열하는 소설이란 생각이든다.『달에 울다』의 표지에 실린 '겐지'의 얼굴은 '30 days of night'에 나오는 뱀파이어를 연상시킬만큼 섬뜩하다. 지구의 적도와 극지방을, 자연 앞에 무릎꿇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외소함, 을 뚫고 뿜어져 나오는 작가의 글쓰기와의 치열한 사투를 본격적으로 바라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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