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페미니스트 - 불편하고 두려워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지 못하는 당신에게
록산 게이 지음, 노지양 옮김 / 사이행성 / 201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눈오는 새벽,
금새 눈이 쌓인다.
이 새벽에도 바쁘게 하루를 시작하는 이들이 있다.
남편도 그중 한 사람, 남편 데려다주고 돌아오는데 바쁘게 길을 내려오는 아주머니는 어딜 가시는지 눈길을 종종거리며 내려오고 있었다.

록산 게이는 페미니스트가 아예 아닌 것보다는 나쁜 페미니스트가 되는 편이 훨씬 낫다고 믿는다고 했다.

페미니스트의 요건에 부합되지 않는 나같은 경우 (경제적 독립을 못하는 나, 가사노동이 주업이고, 남편은 함께한다기보다 돕는 형태이고, 주기적으로 제모를 하고, 화장품구입에 관심이 많고, 군살이 빠졌으면 싶다) 어디가서 페미니스트라고 밝히지도 못할뿐더러 조용히 침묵하는 경우가 많다.

어린시절부터 여자다움에 대한 강압적 교육을 받았었다. 기집애가, 여자가 어디 감히, 뭐 이런 얘기는 정말 많이 들어왔다. 그래서 늘 소심하고 있는듯 없는듯 존재감도 없었다. 아들로 태어나지 않았다고, 뭐하나 달고 나왔어야 했다는 소리를 끊임없이 들으며 자랐다. 누구 앞에 나서서 말하는 일이 가장 어렵고 힘들었다. 아마도 자존감도 제로였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런 얘기를 하면 다들 안그래 보인다며 믿을 수 없다고 한다. 믿든 안 믿는 사실이다.

그래서 내 아이들에겐 특정한 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심어주지 않으려고 하는데, 아들에게 늘 여자는 보호해야해, 남자보다 약하잖아, 여동생에겐 특히 친절해야해. 하고 말한다. 나란 여자는 양성평등이 이루어져야한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보호받고 싶어하는 어쩔 수 없는 여자인 것 같다. 난 애초에 페미니스트와는 거리가 먼 것 같다.

결혼전까지 친정 오빠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늘 오빠는 우선권이 주어졌고, 심지어 독재자처럼 굴기까지 했다. 물론 내 위의 언니 둘은 오빠가 요구하는대로 다 들어주었고 그런 상황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고 당연히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예를들면 이런 거다. 오빠가 배가 고프다고 말하며 라면을 끓여 오라고 하면 언니들은 그냥 끓여준다. 하지만 나는 싫어하고 거절한다. 그러면 오빠는 내게 온갖 기분 나쁜 말을 쏟아낸다. 내가 배가 고파 라면이 먹고 싶을때 나에게 라면을 끓여준적이 한번도 없고 내가 직접 끓여 먹으니 오빠도 직접하라고 한다. 몇번의 다툼 끝에 나와 단둘이 있을때는 직접 끓여 먹으며 내내 궁시렁거렸다. 나는 못되게도 못들은척 했다. 하지만 내가 볼때 오빠는 정말 못됐었다. 못되게 키운 부모님 탓이 가장 크다. 그래서 지금 새언니가 제일 고생이다.
새언니와 연애할때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지극 정성을 다하더니 결혼이후에는 대접만 받으려고 굴어서 새언니가 많이 힘들어 했다. 그래도 그것 다 받아주고 참고 사는 언니가 정말 대단하다.

남자이기때문에, 여자이기때문에, 뭐 이런 얘기 듣는 것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결혼해서 애 낳고 살다보니 남자와 여자 서로가 존중하며 사는 게 최고인 것 같다. 둘의 생리적인 관계가 다르므로 다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서로 배려하고 양보하고 챙겨주며 살았으면 좋겠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은 상대도 싫고, 내가 받은만큼 갚아야 할 것이다. 복수말고 은혜에 대한 보답.
아이든 여자든 남자든 노인이든 모두가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서로 존중하며 사는 것부터가 시작인 것 같다.
어쨌든 나쁜 페미니스트라도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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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7-01-20 07: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사노동을 ( 그 끊이지않는 돌봄의 일을 ) 참 보잘것 없이 만들어요 . 사람들이 말이죠 ..어디선가 돈을 벌어와야만 대접을 하니 .. 그것을.잘 지키는것도 일인데 .. 그 이상한 죄책감 때문에 주눅들고 상처받아요 . 아..누군들 꿈 섬님 말에 동의 안할까 ..싶어져요 . 이시대를 산다면 다들 , 동감하지 싶고요 . ^^ 잘 읽고 가요!

꿈꾸는섬 2017-01-20 16:08   좋아요 1 | URL
일도 하면서 가정도 잘 꾸려가시는 많은 여성분들에겐 한없이 부끄러워요.
공평한 것, 평등한 것을 생각하며 지내게 되네요.

새벽에 예뻤던 눈의 흔적이 사라졌어요.ㅜㅜ

[그장소] 2017-01-20 20:56   좋아요 0 | URL
그 부끄러워하는 것 , 안하시면 좋겠어요 . 저도 잘 못하지만 ..ㅎㅎㅎ
당당한 일로 , 그러자고..^^
생색을 넘 안내서 그런지, 당연한줄 알잖아요 .
집에만 매여사는것도 많은 포기가 있는건데 ..

마립간 2017-01-20 08: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가사 노동 중, 부엌 일의 상당 부분은 안해가 담당하지만, 육아의 상당 부분은 제가 담당합니다. 저는 나름 보람을 느끼는데, 제 주위의 상당수의 남자들은 이해를 못하더군요.

꿈꾸는섬 2017-01-20 16:10   좋아요 1 | URL
마립간님처럼 가사와 육아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남성분들이 얼마나 될진 모르지만 여튼 가정은 함께 꾸려가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자발적으로~^^

갱지 2017-01-20 10: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심한 듯 하지만 할 말을 잘 알고 하는 분 :-) 전 이 시대에 페미니스트 라고 쓰고 써먹는 자체에 좀 문제가 있지않나라고 생각하는 쪽이지만, 어쨌거나 당신의 글을 지지해요-.

꿈꾸는섬 2017-01-20 16:11   좋아요 1 | URL
갱지님 반갑습니다. 제 글을 지지해주신다니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종종 뵈어요.^^

순오기 2017-01-20 11: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아선호와 남존여비가 투철하던 때를 거친 세대는 알게 모르게 그런 부당함에 길들여졌지요~나도 울오빠 밥차려주면서 꼭 한 숟갈 남긴 밥을 먹은 기억 때문에...애들이 남긴 밥도 안 먹는데 시할머니가 꼭 당신 밥 남겨 먹으라고 주는 게 고역이었어요.ㅠ 시할머니 마음은 알지만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남편과 시누이에게 말하고 도움을 청해서 그 후엔 안 먹어도 됐어요. 아~ 댓글 쓰면서도 그때 일이 생각나 눈물나네...ㅠㅠ

꿈꾸는섬 2017-01-20 16:15   좋아요 1 | URL
순오기님 정말 힘드셨겠어요.ㅜㅜ
그래도 남편과 시누이의 도움으로 고역에서 벗어났으니 다행이죠.
저도 옛날 생각하면 특히 할머니 살아계셨을때 생각하면 울컥울컥해요. 그땐 정말 그렇게 사는게 너무 싫었거든요. 집 떠나는 게 소원이였어요.ㅜㅜ
그래도 지금은 잘 살고 있으니 다행이다 싶어요.

서니데이 2017-01-21 10: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분홍색 페미니스트 다이어리에 이렇게 써있어요.
˝ Good girl go to heaven
Bad girl go to everywhere˝

한 세대에 남은 선입견이 세대가 바뀐다고 금방 없어질 것 같지는 않아요. 부당한 처사에 대해 처음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비난을 받을수도 있어요. 나중에 누군가 그러한 부당함을 겪지 않게 된다면, 그건 그보다 먼저 불이익을 감수했던 누군가가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꿈꾸는 섬님, 오늘 날씨가 추워요. 따뜻하게 입으시고 감기조심하세요.

꿈꾸는섬 2017-01-21 10:27   좋아요 1 | URL
ㅎㅎ토요 아침부터 멋진 댓글 감사해요.^^
춥지만 몸도 마음도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단발머리 2017-01-23 10: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 앞부분만 읽었는데 꿈섬님 리뷰 읽다보니 다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페미니즘에 대해 말하고 생각하면서 경제력이 없는 스스로에 대해 많이 위축되기는 해요. 어느 정도 어쩔수 없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조금 억울하기도 하고.. 조금 슬프기도 하고요...
생각할 수 있도록 해주는 좋은 글 감사해요.
참, 그 구박 속에서도 오빠 라면을 끓여주지 않으셨다니...
꿈섬님은 진정한 페미니스트!!

꿈꾸는섬 2017-01-24 07:59   좋아요 0 | URL
아, 제가 참 많이 못 됐어요.
결혼 전까지 친정에서 유별나고 못됐다고 엄청 욕 먹었어요. 어차피 먹은 욕 꿋꿋하게 견딘거죠.ㅎㅎ


이 책의 뒷부분은 영화 얘기였는데, 인종관련한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되었어요. 록산게이에게 폭넓은 사고를 배운 느낌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