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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묻힌 거인 -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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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 저녁부터 시작된 비는 중간에 잠시 멎긴 했지만 오전까지 내렸다. 비 내리는 금요일 저녁 K를 만나 곱창에 소주를 마셨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가 시작했다. 본방은 못 보고 늦은 밤 재방송으로 봤다. 1988년 K를 만났다. 그러니깐 우린 꽤 오랜 시간을 함께 해온 셈이다. 어떤 기억은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랬었나, 할 뿐 자신의 기억이 맞다고 주장하진 않는다. 문득 J가 그리웠다. 비와 곱창과 소주 때문이다. 그러다 생각했다. J는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내일은 J의 회사가 있던 시청역에서 약속이 있다. 은행나무 사이를 걸어 뛰어왔던 J가 떠오른다.

 

안개로 뒤덮인 영국의 어느 마을에는 ‘고립된 삶’을 사는 액슬과 비어트리스라는 노부부가 있었다. 노부부와 마을 사람들은 과거를 기억하지 못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파묻힌 거인』의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 왜 헤어져야 했는지도 기억 안 나는 아들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났다. 그들은 안개가 걷히는 방법을 알아 기억을 되찾고 싶었고 아들을 만나길 원했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남아 있는 나날』로 만났다. 기억이 희미해 작성했던 리뷰를 읽어보니 두 소설은 공통점이 있었다. 두 소설 모두 인생의 저녁을 사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길을 떠났고 기억을 만났다.

 

“난 그 애 얼굴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아요.” 액슬이 말했다. “분명 모든 게 이 안개 때문일 거예요, 사라져서 좋은 것도 많지만 이렇게 소중한 걸 기억 못하는 건 잔인한 일이오.”(49쪽)

 

기억은 언젠가 소멸한다. 그렇다 해도 내 의지와 무관하게 어떤 상황들이 기억을 지운다면,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나는 아주 많이 슬플 것 같다. 다행인 것은 액슬에게 비어트리스가, 비어트리스에겐 액슬이 있었다.

 

두 사람은 바싹 붙어서 걸었고 액슬이 비어트리스의 바로 뒤에 있었다. 그런데도 평원을 지나는 동안 비어트리스는 대여섯 걸음마다 한 번씩 위령 기도를 올리듯 “지금도 거기 있나요. 액슬?”이라고 물었고, 이에 액슬은 “지금도 여기 있어요, 공주.”라고 대답하곤 했다.(52쪽) 

 

그들은 길을 가면서도 끊임없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이후에도 자주 등장한다. 안갯속 갇혔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것은 공포였다. 공포를 견디게 하는 것은 다정한 목소리, 손을 잡아주는 누군가이다.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가 있으면 어때? 그들은 지금 함께 있는데. 그들이 인정하듯 그들의 사랑은 강한데. 이렇게 생각하며 읽는데 이 질문을 만났다.

 

‘함께 나눈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당신과 당신 남편은 서로를 향한 사랑을 어떻게 증명해 보일 거예요?’(71쪽) 

 

보이지 않는 안갯속에서 옆 사람이 목소리가 다정한 것은, 그의 손이 위로가 되는 것은 내가 그를 알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보낸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인, 당신은 이 안개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고 확신하나요? 우리가 알지 못하게 감춰져 있는 편이 더 좋은 것도 있지 않을까요?”

“어떤 이들에겐 그럴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아요. 신부님. 액슬과 저는 함께했던 행복했던 순간들을 되찾고 싶어요. 그런 순간들을 빼앗긴다는 건 밤중에 도둑이 들어와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간 것과 같아요.”

“하지만 안개는 좋은 기억뿐만 아니라 나쁜 기억까지 모두 덮고 있어요. 그렇지 않겠어요, 부인?”

“우리에게 나쁜 기억도 되살아나겠지요. 그 기억 때문에 눈물을 흘리거나 몸을 떨기도 할 거고요. 그래도 그건 우리가 함께했던 삶 때문에 그런 거 잖아요?”

“그럼, 나쁜 기억은 두렵지 않은가요, 부인?”

“뭐가 두려워요, 신부님? 오늘 액슬과 제가 각자 마음속으로 서로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들여다보면 아무리 이 안개가 위험을 숨기고 있더라도 기억을 되찾는 길이 우리에게는 어떤 위험도 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이건 해피엔드로 끝나는 이야기예요. 그러니 이전까지 아무리 우여곡절이 많았더라도 두려워할 게 없다는 건, 어린아이라 해도 알 거예요, 액슬과 전 우리의 삶이 어떤 모습이었더라도 함께 기억할 거예요. 그건 우리에게 소중한 거니까요.”(234-235쪽)

 

나와 K 사이에, 나와 J 사이에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그럼에도 K를 만나는 건, 그럼에도 J를 그리워하는 건 27년 그리고 12년의 쌓인 시간 때문이다. <응답하라 1988>에서 동일 아빠는 설움 많은 둘째 딸 덕선에게 “아빠가 미안하다. 잘 몰라서 그런다. 아빠도 태어날 때부터 아빠가 아니잖아.”라고 말했다. 지금의 나는 나쁜 기억에 대해 그들이, 그리고 내가 처음 겪는 일이라 서툴러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시간은 때로 아량을 선물한다.    

 

길을 떠난 사람들은 노부부뿐이 아니었다. 위스턴과 에드윈, 말 호레이스와 길을 떠난 아서왕의 조카 가웨인이 있었다. 그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기억을 찾기 위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복수하기 위해 암용을 없애고자 했다. 그래서 그들은 암용이 있는 거인의 돌무덤으로 가야 했다.

 

암용을 죽이느냐 마느냐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암용이 악이라면 지금 죽여도 필요한 이들이 존재하는 한 언제고 다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기억을 지울 능력이 있어도 그는 그저 한낮 짐승일 뿐이다. 비극의 상징인 거인의 돌무덤에 갇힌 암용의 삶도 비극이었다. 암용은 악한 존재이지만 아니기도 하다. 가웨인의 말처럼 그는 사람들이 서로 싸웠던 기억을 잃게 함으로써 평화를 주었다. 무서운 존재는 평화를 원치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아무도 믿지 말라고, 싸우지 않으면 삶을 지킬 수 없다고, 싸우지 않는 것은 용기가 없기 때문이라고 세뇌한다.

 

몸의 변화로 잊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해도 누군가의 의도에 의해 잊거나 잘못 기억하게 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비어트리스의 말처럼 삶은 어떤 모습이든 소중하기에. 비극의 기억은 떠올랐고 아들을 만날 수 있을지 확실하진 않지만, 남아 있는 나날이 해피엔드로 끝날지 알 수 없지만,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길을 가는 노부부의 사랑은 아름다웠다. 내게 『파묻힌 거인』은 아름다움과 쓸쓸함이 공존하는 11월을 닮은 소설이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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