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뱀과 물 배수아 컬렉션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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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과 물 속 소녀들이 가질 수 있는 한가지 위안은 불우한 어린시절을 통과한 이들은 행복을 맛본적 없기에 그것을 그리워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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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을 듣는 시간 사계절 1318 문고 114
정은 지음 / 사계절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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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모든 등장인물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썼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이들 중 분명 누군가는 독자의 마음의 사로잡으리라. 나의 경우는 ˝마르첼로의 행복을 바라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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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도의 링컨
조지 손더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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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방대한 사료를 어떻게 선별하고 변형했는지 수많은 개성적인 인물을 어떻게 창조했는지 믿기지 않지만 그들의 목소리를 따라가다보면 500페이지가 무색할정도 금세 마지막장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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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타도 써보고 사운드도 써봤지만 개인적으로 휴대성 좋고 경량인 사운드가 가장 맞는것 같아 잘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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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부터 사회에서 만나는 또래의 젊은 여성들은 서로 비슷한 말투와 표정을 하고 있다. 성인이 된 여자 친구들에게선 학창시절 다소 기괴할 정도로 수시로 폭발하던 감정의 흔적이나 각자의 논리를 웅변하던 다양한 목소리가 흐려지고, 화장한 얼굴 위로 희미한 미소와 상냥함이 스며들었다. 그런 변화에 대해 굳이 말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서로의 미소 뒤에 숨겨진 무표정과 피로를 감지하듯, 비슷하게 매끈하고 부드러운 얼굴이 실은, 각자의 특질이라기보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여성성이라는 가면을 내면화한 결과임을 안다.


혹자는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타고나기를 친절하고 상냥하며 상대를 배려할 줄 안다고 믿을지 모르지만, 이는 남성들이 타고나기를 여성들에 비해 과학적이고 논리적 사고에 능하다는 믿음만큼이나 근거 없는 편견이다. ‘의례적으로 웃지 않고, 형식적인 인사치레를 하지 않으며, 냉담하지 않으나 친절할 것도 없는 투박한 말투로 필요한 말만 하는여성이 업무능력만으로 제대로 평가 받고 아무런 차별대우 없이 직장 생활을 하는 것이 가능했다면, 누가 굳이 매일 아침 모자란 잠과 싸우며 전투복을 입듯 화장을 하고, 불편한 가면까지 쓰는 피로를 감수하겠는가. 사회가 요구하는 진정한 여성성이란 어쩌면, 여성들을 부드러움, 친절함, 아름다움의 틀에 가두어 벽에 걸린 그림처럼 정물화하려는 사물성의 가면인지도 모른다.


지금 얘기하려는 세 사람의 여성 작가가 쓴 소설에서는, 그들이 속한 사회와 시대, 인종이라는 특수성 아래 입이 없고 움직이지 않는 가면 아래 사물이 아니라, 말하고, 욕망하며, 좌절하는 살아있는 인간임을 보여준다. 첫 번째 소설 토니 모리슨의 <자비>는 아주 오래전 신대륙이 아직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기 전, 피부색이 인간들 사이의 주인과 노예를 구별 짓는 절대적 원인이 아니었던 시절, 가난하거나, 연고가 없거나, 어리거나, 남편의 보호를 잃은 여성들이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그 정체성에 대한 가장 원형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건 기적이 아니었어. 기적은 하느님이 내려주시는 거지. 그건 자비였단다. 인간이 주는 것. 다른 이를 지배할 힘을 넘겨받는 것은 힘든 일이지. 다른 이를 지배할 힘을 빼앗는 것은 잘못된 일이고. 자신을 지배할 힘을 다른 이에게 넘겨주는 것은 사악한 일이란다.


소설의 가장 유명한 문장이기도 한 이 독백은, 딸에게 닿지 못할 편지를 쓰는 미냐 망이의 목소리이다. 그녀는 어린 딸이 백인 주인의 성적 학대로부터 벗어나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기를 바라면서 선량한 농장주 제이컵에게 플로렌스를 보내지만, 제이컵은 아내(레베카)와 농장에서 일하는 세 명의 여자들(리나, 플로렌스, 소로)을 남겨둔 채 병에 걸려 죽고 만다. 소설은 남자가 없는 집에 남겨진 네 명의 여성 인물들의 입을 통해, 각자 다른 처지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이어주는 서로에 대한 연민과 우애에 관해 이야기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인물은 인디언 여인 리나인데, 그녀는 때로 작가의 목소리를 대신하듯 날카롭게 그들이 놓인 현실을 진단한다. 리나는 교회의 허위적인 면을 의심하면서 신앙을 가지기보다, 근면하게 일해 재산을 모으는 일로 스스로를 구원하려 했던 주인 제이컵의 한계를 직시하고, 자신마저 병에 걸린 채 남편 없이 남겨진 레베카의 허약한 내면을 예견한다.


그녀가 그들에게 경고했어야 했지만, 헌신적인 애정 때문에 그런 주제넘은 짓은 하지 못했다. 주인님이 살아 있을 동안에는 그들이 가족은 고사하고 서로 뜻을 같이하는 무리조차 아니라는 진실을 쉽게 가릴 수 있었다. 그들 한 명 한 명이 다 고아였다. (...)리나 자신과 소로, 갓 태어난 아기, 그리고 아마도 플로렌스는 주인을 잃은 세 여자와 아기는 여기에서 외따로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채 누구에게나 무방비 상태가 될 것이다. 그들 중 누구도 상속 받을 수 없었다. 누구도 교회에 속하거나, 교회 명부에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여자에다 법의 바깥에 있으니.


말하자면, 17세기 식민지 아메리카 대륙에서 인간이 내려주는 자비란 것은 정확히는 보호자로서의 남성이 여성에게 내려주는 것이고, 시혜자 남성의 죽음으로 자비를 잃은 여성은 부모 잃은 아이와 같이 무력한 존재에 다름 아니었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리나처럼 남자의 손에서 구원과 파괴를 모두 경험하고 물러섰다. 다른 여자들로부터 한 번도 가르침을 받아본 적이 없는 게 분명한 소로같은 여자는 남자의 놀잇감이 되었다. 레베카의 항해 동료들 같은 여자들은 남자에게 맞서 싸웠다. 다른 신심 깊은 여자들은 남자에게 복종했다. 그리고 레베카 자신과 같은 소수의 여자들은 서로 사랑하며 살다 남자가 사라지면 어린아이 신세가 되었다. 남자의 지위나 어깨가 없다면, 가족이나 도와주는 이들의 지원이 없다면, 과부는 사실상 법 바깥에 놓인 존재였다. 그러나 꼭 그래야만 할까? 아담이 먼저 있었고 이브가 나중에 왔다는 사실에, 또 최초의 무법자라는 그녀의 역할에 당혹해하는 수밖에 없을까?


사실 우리는 문학작품에서 주체인 가부장 남성에 의존함으로써만 존재 가치를 지니는 여성인물들을 너무 많이 보아왔고, 그녀들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남성중심 서사에서 평면적인 객체로 그려지고 있다. 그런 서사에서 여성은 세 부류로 단순화 되는 경향이 있는데, 첫째, 영원히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어린아이 혹은 백치로서의 여성, 둘째, 남자의 조력자로서 현명하고 아름다운 여신 혹은 전리품으로서의 여성, 셋째, 남자 주인공의 내면을 어지럽히거나, 이해할 수 없는 광적인 에너지에 사로잡혀 그의 인생을 망가뜨리는 마녀 혹은 창녀로서의 여성이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행동하지 않고, 놓여있음으로 다만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토니 모리슨의 <자비>는 생각하고, 행동하는 여자들의 이야기이다. 어린아이, 백치, 약자의 위치에 놓인 자신들의 처지를 인식한 그들은 고립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로 다른 선택을 한다. 신앙심이 없던 레베카는 남편이 죽은 후 아무도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녀가 믿지 않는 하느님의 기적, 교회 지붕아래 안전하게 보관된 실체 없는 절대성에 의존한다. 한편 플로렌스는 자유민인 대장장이의 사랑에 기대 자신을 지배할 힘을 남에게 넘기는 사악한 일을 꿈꾼다. 물론, 그들은 실패할 것이다. ‘어딘가에 귀속되는 것만이 자유로워지는 길이란 믿음을 버리지 못하는 그녀들의 인생에 더 이상의 자비도, 기적도, 구원도 없을 것임을 우리는 안다. 왜냐하면 수백 년이 흘러 그때의 모든 낡은 것이 유물이 되거나 사라져 자취를 감춘 지금까지도, 사회적 편견과 악습에 발이 묶인 여성의 삶은 놀랍도록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비>를 읽은 후,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에이미와 이저벨>을 접한다면 동시대적 관점에서 여성 인물들의 내면과 그들 간의 관계를 엿볼 수 있기에 좀 더 쉽게 공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춘기 딸 에이미와 단둘이 살고 있는 이저벨은 미혼모라는 사실을 숨긴 채 셜리폴스라는 작은 마을에 정착한다. 말수가 적고, 결벽적인 그녀는 오랜 세월 구두공장의 성실한 직원으로 일해 왔지만, 같은 사무실 여자 동료들과 그다지 친근한 사이가 아니고, 주말에 만나는 교회 여자들과도 좀처럼 가까워질 수 없는 내성적인 인물이다. 아버지 없이, 매사에 조심스럽고, 다소 융통성이 부족한 어머니와 지나치게 밀착 된 채 그녀의 보호 아래 자란 에이미 역시 수줍음이 많고, 자신감이 부족한 소녀로, 그녀의 즐거움은 학교 뒤 숲 속에서 자유분방한 친구 스테이시와 몰래 담배를 나눠 피우는 시간이 유일하다.


그런 조용한 모녀에게도 남모르는 욕망이 존재하는데, 이저벨은 가정이 있는 직장 상사를 욕망하고, 에이미는 새로 부임한 수학 교사 로버트슨 선생으로 인해 부적절한 관계의 희생자가 된다. 그러나 작가는 인간 내면의 비윤리적인 욕망이나 성적인 스캔들로 비칠 수 있는 사건을 이야기할 때, 그것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며 때문에 사건 그 자체에 집중하기보다 인물들이 이를 어떻게 극복하고 성장하는지에 대해 좀 더 주목한다. 그 과정에서 처음에는 단순한 직장 동료에 불과했던 베브와 도티의 우정은, 불륜을 저지른 미혼모라는 죄의식을 품고 움츠러든 채로 살던 이저벨이, 무거운 굴레를 벗고 자신과 화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에이미와 스테이시 역시 남자와의 관계로 인해 평생 지울 수 없는 경험을 하지만, 두 친구는 상처 입은 십대가 끝나가는 매 순간을 함께한다. 특히, 아기를 낳은 스테이시를 보러 병원에 들른 에이미가, 곧 다른 가정으로 입양될, 친구를 꼭 닮은 아기에게 마음속으로 전하는 이야기는 남다른 감동을 준다.


아기를 봤어요.” 그녀가 이저벨에게 말했다 그러면 안 되는 거라던데, 스테이시가 어디 있는지 말해줘서 나오는 길에 잠시 봤어요.” 하지만 병원 복도에 서서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기도를 중얼거린 것은, 잠든 빨간 머리 아기에게 아기는 평생 알지도 못할 축복을 해주면서 점심시간마다 숲 속에서 네가 엄마의 뱃속에서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고 말한 것은, 앞으로 너를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맹세한 것은 엄마에게 말하지 않았다.



최은영의 <쇼코의 미소>는 여성들 간의 우정을 이야기하고, 부조리한 상황에서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할 때 앞선 두 소설에 비해 더 적극적이고, 한편으론 직설적이다. 이는 삶의 한 단면을 포착하는 단편과 긴 호흡으로 삶의 변화 과정을 묘사하는 장편의 특성에서 오는 근본적 차이일 수도 있지만, 나는 어느 정도 작가의 의도가 반영되었다고 보는데, 실제로 최은영의 작품집은 거의 모든 단편에 걸쳐 관계를 맺는 여성 인물들이, 역사적 현실로 인한 불화와 개인적 아픔으로 멀어지거나 떨어져 지내는 동안에도 늘 서로의 어깨를 따뜻하게 감싸 안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아직도 TV를 틀면 매일같이 남자를 두고 한 여자가 다른 여자를 비방하고 저주하는 드라마가 이름과 얼굴만 바꾼 채 방영되고, 여자들 둘 이상이 모이면 그 자리에 없는 친구 흉을 본다는 여성 혐오적 낭설이 진실처럼 떠도는 사회문화적 환경에서, 최은영의 <쇼코의 미소>의 등장은 반가운 일이다. 우리는 영웅과 악당, 여신과 창녀가 등장하는 수많은 자극적이고 화려한 이야기의 판본을 알고 있지만, 실제로 현실에서 그와 같은 존재를 만나는 일은 얼마나 드문가. 그런 점에서 평범하고 기본적으로 선량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최은영의 소설은, 독자에게 쓸데없는 피로를 유발하지 않는다. 쇼코를, 순애 언니를, 미진 선배를, 응웬 아줌마를 좋아했노라 스스럼없이 고백하는 소설 속 화자들은, 불합리한 현실과 차별에 맞서서도 순진할 정도로 우직하게 그러나 떨리는 목소리로진심을 쏟아낸다.


여자인게 그렇게 부끄럽고 괴로운 일이었어요? 여자들은 감정적이고, 분란 일으키고, 이기적이어서 조직 배반하기 쉽고, 여자의 적은 여자고. 그런 자기부정이 김연숙씨가 말하는 건강함이었습니까? 여자 후배들 앞에서 부끄러운 줄 아세요.” 그렇게 말하는 선배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 진심을 말할 때, 선배의 목소리는 언제나 조금씩 덜렸다. 선배는 말할 때 감정이 배어나오는 나약한 습관을 고치고 싶다고 말했다. 마음이 약해질 때 목소리가 떨리는 버릇, 사람들과 잘 섞이지 못하는 성격, 느리게 걷고 느리게 먹고 느리게 읽는 기질, 둔한 운동신경,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서 백 가지 의미를 찾아내 되새김질하는 예민함 같은 것들을 선배는 부끄러워했다. 그런 약점들을 이겨내고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선배가 생각했던 자신의 장점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선배가 스스로 약점이라고 여겼던 것들을 사랑했고, 무엇보다도 그것들 덕분에 자주 웃었다.


작가는 여성 인물들이 서로의 손을 잡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독려하는 한편, 우리 안에 나도 모르게 도사리고 있었을지 모를 혐오를 들여다보는 일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여자로 태어나 사회적 편견을 무의식적으로 학습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사회의 차별적 구조와 폭력적 현실을 탓하는 대신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실비아 플라스 조차 그랬다. “여자로 태어난 게 나의 끔찍스러운 비극이다. 잉태되던 그 순간, 나는 페니스와 음낭이 아니라 가슴과 난소의 싹을 틔울 운명을 타고난 것이다. 행동과 사과와 감정의 총체적 원이 탈피할 수 없는 여성성이라는 엄격한 한계 속에 갇혀버리도록 말이다. 공격당하고 포격당할 위험이 상존하는 여성이기 때문에.”(실비아 플라스의 일기) 차라리 남자로 태어나기를 바랐노라 말했던 플라스는 죽고 없지만, 이제 우리는 그녀가 괴롭게 토로했던 여자들을 가두는 여성성이라는 가면이 태생적 한계가 아니라, 사회가 부여한 족쇄라는 것을 알만큼, 그것을 거부할 만큼은 성장했다.


최은영의 <쇼코의 미소>에서는 우리가 소설에서 익숙하게 보아왔던 주체로서의 남성, 즉 가부장의 존재가 지워져있는데, 누군가는 이를 현실의 보편성을 확보하는 데 실패한 증거로 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의도적인 거부이며, 배제가 아닐까 추측한다. 여성들은 현실에서 뿐만 아니라 허구의 세계에서 조차 출발선을 찾아 헤매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해왔다. 여성이 화자로 등장하는 이야기들이 그동안 받아온 무수한 혹평을 떠올려보자. 지나치게 자기 고백적이다, 상투적이다, 극단적이다, 여자들만 좋아할 이야기이다, 개인의 내면에 침잠해 보편적이지 않다 등등


그러나 주변을 한 번 둘러보라. 책을 사고 영화를 보고 리뷰를 쓰는 것도 여자들이고, 맛집 블로그와 인터넷 쇼핑몰을 운영하는 것도 여자들이며, 길고양이 밥을 챙겨주는 것도 여자들이고, 사학 비리에 맞서 시위하다가 비선 실세의 존재를 밝혀낸 것도 여자들이며, 끝없이 남자들을 사랑하는 것도 여자들이고, 바로 그 여자라는 이유로 백주대낮에 폭행을 당하고, 화장실에서 괴한의 칼에 맞아 죽는 것도 여자들이다. 이런 여자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더 보편적이어야 한단 말인가. 나는 이제 남은 것은 단지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여성 화자가 중심이 된 문학작품은 지금보다 더 많이 창작되고, 더 많이 읽힐 필요가 있다. 이는 비단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남자 주인공이 멍청한 짓을 반복할 때 여자인 우리는 언제나 현명했다는 이야기를 원해서도 물론 아니다. 다만 안드로이드 같은 여성성이라는 가면 아래, 실재하는 복잡다단한 인간으로서의 여성의 이야기를 아직 충분히 접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지금이야말로 거추장스러운 가면을 벗어 던질 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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