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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8
페터 한트케 지음, 안장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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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한트케의 노벨상 수상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들었던 생각은 이제와서?“라는 의아함이었다. 밀로셰비치에 대한 인간적 연민을 표한 후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무수한 비판을 받아왔음을 논외로 하더라도, ‘실존’. ‘형식주의’. ‘주관적 리얼리즘같은 개념을 소환하는 한트케 문학의 가치가 여전히 유효한지 언뜻 의심스러웠던 탓이다. 서사의 실용주의에 봉사하지 않는 문학의 수요 없음이, ‘전위내지는 예술의 새로운 실험으로 충분히 상쇄되던 20세기는 지나갔다고, 일견 냉소적인 생각이 들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베케트, 한트케, 카프카를 마지막으로 읽은 지도 십여년이 지났다. 그들의 소설은, ‘소통이나 보편적 공감또는 객관적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이 구사하는 문장은 언어가 만들어내는 개연성 있는 내용(서사)’보다, 언어라는 구조 그 자체’, 무작위적이고, 때로는 아무것도 지칭하지 않거나, 의미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형식에 더욱 헌신하는 까닭이다. 내가 한때 매혹되었던 것은 세계 인식이었는데, 그들 소설 속 현실이란, 세계의 보편적 논리와 객관적인 질서로 유형화할 수 없는 어떤 것, 차라리 개인의 주관적 감정과 직관, 개별적 자의식으로만 규명될 수 있는 특수한 감각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대학에 왔지만, 조금도 자유롭지 않고, 나의 상상과 주어진 현실의 상이함은 세계와의 불화를 야기하고, 이 곳에 물리적으로 존재하되 동시에 규범적 현실에 순응하지 못하므로 실질적으로 부재할 수밖에 없는 내 존재의 정체불명성이 불모의 세계를 구축하는 문학으로 나를 이끈 것이다. 이처럼 인생에서 스스로의 불안정한 내면에 집중했던 시기, 나는 부재가 안겨주는 공포를 조망하고, 유희하고, 의미를 파헤치려 애쓰는 이야기에 애착하며 페터 한트케를 읽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인간 내면을 해부하는 언어가, 어느 순간 도취 상태에 빠진 사람의 한낱 몽상이거나, 지나치게 자기본위적인 혼잣말에 불과한 건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소설을 멀리했다. 매혹의 원인이 결별의 이유가 되었던 셈이다.


그래서인지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를 읽으면서, 줄곧 오래전 인사도 없이 헤어진 친구를 만나 작별을 고하기 위한 여행길에 오른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실제로 오랫동안 불화했던 아내 유디트와 진정한 이별을 위해 긴 여정에 오른 나의 이야기인 이 소설은, 주인공이 이질적인 세계 미국을 횡단하는 동안 끊임없이 틈입해 들어오는 과거와 맞닥뜨리면서, 헤어지길 원하면서도 동시에 원하지 않는 애증의 존재와 어떻게 하면 파멸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작별할 수 있는지 탐구한다. 이 소설은, 현실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나 주인공의 구체적 행적보다, 현재 안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과거의 기억과, (환상), 현실의 구분이 모호한 내면세계의 혼란스런 양상에 더욱 주목한다. 선형적 내러티브가 뚜렷한 소설에 익숙한 독자들은, 사건과 인물 관계의 실마리를 잡을만 하면 끼어드는 기억에 방해를 받고 혼돈에 빠질지도 모른다. 한트케는 소설 속에 자신의 사실적 정보를 반영하되(소설가로서의 정체성, 연극배우인 아내와의 이혼, 불우한 유년의 기억 등) 리얼리즘 소설의 일반적 재현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 여행기와 추리스릴러적 요소를 차용하되, 장르의 규칙을 거부함으로써, 이야기의 정합성을 추론하는 독자의 기대 역시 배반한다.


기능적 서사를 따르지 않는 소설의 줄거리를 요약하는 건, 의미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소설이 카오스 그 자체, 파편들의 연쇄인 것만은 아니다.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속 화자는 외부적 현실과 내면을 자연스럽게 매개하지 못하고, 현실의 체험을 일반적인 언어 법칙에 따라 기능적으로 정의하는 것을 혐오하기 때문에 어떤 일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하고 소외되지만, 한편으로는 진정한 경험을 통해 분열적인 예전의 나와 달라지기를 소망한다. 이같은 모순적 태도가 기능적 서사와 파편화된 과거의 기억(자폐적 혼잣말)이 충돌하는 소설의 구조에도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우선 몽타주처럼 수시로 교차 편집되는 과거의 분열적 기억과 독백을 덜어낸 후, 대략적인 줄거리를 살펴보자. 소설은, 1인칭 주인공이 나를 찾지 말라는 짧은 편지를 남긴 후 종적을 감춘 아내를 찾기 위해 뉴욕에 도착하면서 시작된다. 유디트가 머물렀던 호텔을 추적하며 미국 동부에서 시작된 여행은 옛 연인 클레어와 동행하면서 중부를 거쳐 혼자만의 여정으로 이어지다가 캘리포니아 남부에서 끝난다. 여행 내내 는 지침서이라도 되는 듯 <녹색의 하인리히>를 읽는다. 주인공이 얼마나 외부로부터 차단되어 있느냐에 따라, 불안, 공포, 고립감 같은 부정적 감정으로 이루어진 신경증은 증폭되었다가 약화되기를 거듭한다. 클레어, 베네딕틴과 동행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세인트루이스에서 주인공은 상대적으로 평온하며, 늘 불화해왔던 외부세계의 질서와 내면적 자아의 화해 가능성마저 타진해본다.


그러나 주인공이 혼자만의 여행에 오르면, 과거의 기억과 악몽이 들이닥치면서 기능적 서사가 약화되고, 이에 반비례해 주인공의 불안과 공포는 다시금 강화된다. 이 여행의 초기 목적은 유디트를 찾는 것이었지만, 그녀로부터 역으로 추격당하며 각종 살해위협(사제감전장치, 폭행사주, 권총위협 등)에 시달린다. 이때 나의 신경증은 최고조에 달해, 분열된 정신의 증거인 도플갱어를 목격하기에 이른다. 애증이 뒤섞인 아내와의 기억을 회상하고, 재구성하며 내면적 사투를 벌인 주인공의 고뇌는 그러나, 정작 트윈 록스의 버스정류장에서 유디트와 직면하자 손쉽게 해소된다. 유디트는 나에게 권총을 겨누지만, 이내 (알수 없는 이유로) 적의를 거두고 함께 캘리포니아행 버스에 오른다. 두 사람은 그곳에서 영화감독 존 포드를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자신들의 여행 얘기를 들려주면서, 이제는 평화적인 방식으로 헤어지려한다는 유디트의 말을 끝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결말은 어이없을 정도로 갑작스럽게 맺어진다. 주인공이 내면에 침잠해 지난 삶을 돌아보고, 기억을 해체하고, 다시 짓기를 거듭하며 사유했던 시간을 떠올려 보면 더욱 그렇다. 어떤 면에서는 모든 일은 실제로 일어났다"는 유디트의 마지막 말 만큼 화해의 제스처로 마무리되는 해피엔딩은 믿기 힘든 농담처럼 느껴진다.


이쯤에서 플롯 전개와 등장인물의 관계가 핵심요소인 소설을 독해하듯,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첫째, 이 소설에서 상세하게 묘사되는 불특정한 사람들, 사물, 미국의 광활한 자연 경관은 어떤 메타포인가. 둘째, 유디트, 클레어와 베네딕틴, 오래전 헤어진 동생, 존 포드 등 등장인물과 주인공이 맺는 관계는 어떤 의미가 있나. 셋째, 소설에 삽입된 대화는 어떤 패턴을 가지고, 발생하는 사건은 어떤 알레고리인가. 질문이 셋이라도 대답은 하나뿐이다. 무엇도 메타포가 아니고, 어떤 패턴이나 알레고리도 존재하지도 않으며, 누구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모든 질문이 무용한데, 왜냐하면 <긴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대부분의 퍼즐이 맞춰져 있는 상태에서 몇 개의 흩어진 조각의 자리를 찾는 식으로 전개되지 않는 탓이다. 사실 한트케의 소설에서 중요한 건, ‘의 현존재와 주관적 인식 뿐이다. 그 외 모든 것은 허구이거나 부차적 문제이다. 좀 더 거칠게 말하면, 이 소설에서 나를 제외한 모든 등장인물은 나의 주관적 정신과 내면적 사유에 헌신하기 위해 동원된 일종의 사물(대상)’이거나, 내 안의 타자를 비추고 나의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 존재하는 거울상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녹색의 하인리히>의 모험담을 모델 삼아 한 사람이 점차 다른 사람으로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성장소설이라고 불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1세계/백인/남성/헤테로인 화자는, 성장소설의 보편적인 주인공이 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어쨌거나 그는 여성/퀴어/장애인 등 사회적 타자로 분류되는 이들이 넘어야할 편견과 비평적 증명과정,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많은 논의로부터 비교적 자유롭다) 문제는, 한트케 소설 속 1인칭 화자가 사회적 분류에서 태생적 오류를 지니지 않았다고 간주됨에도, ‘타자성을 지닌 인물이라는 점이다. 주인공 의 타자성은, 두 가지 차원에서 드러나는데, 첫째는, 나와 나의 외부세계(일상적현실)의 분리를 들 수 있다. 이는, 화자가 세계의 보편적 기호체계(기표와 기의가 궁극적으로 일치함을 전제함)를 수용하지 못하는데서 출발한다. 일례로, 주인공이 글자와 숫자가 존재함을 숙명으로 받아들이, 재현을 통한 복제품이 원본을 대체함을 자연스럽게 이해하는 베네딕틴을 보면서 어린 시절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무언가 기술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어, 글자 읽는 법을 터득할때도 곤란을 겪고, 일인칭 화자가 등장하지 않는 책을 접하면 끔찍한 생각이 들었던 자신의 기억과 대조하는 장면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주인공은 아이가 즉각적으로 모든 모사물과 기호를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바라본다는 사실질투심에 가까운 감정마저 느낀다.


둘째는, 나와 나의 내면의 분리. 현실세계의 구성원인 나(세상)와 나의 내면()을 온전히 통합(소유)하지 못하는데서 발생하는 타자성이다. 소설에서 주인공의 내면은 주로 무의식과 꿈이 뒤섞인 형태로 드러나는데, 꿈과 세상을 자연스럽게 분리/매개하지 못하는 나를 사회는 자기도취 상태에 빠지는 사람 혹은 몽상가로 취급한다. 그러나 보통은 명확하게 인식 할 수 없던 두 영역 꿈과 세상이 갑자기 하나가 되는 순간이 있는데, 이를 통해 주인공은 세상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게끔 해주는 순간은, 바로 자신의 내면세계를 이루는 그 꿈들이 실현됨으로써 찾아온다는 것을 깨닫는다. 화자에게 내면탐구와 정신적 사유가 중요한 것은 이런 까닭에서다.


일반적인 성장소설은 주인공이 겪는 만남과 헤어짐, 여러 선택, 여행을 통한 깨달음을 통해, 처음의 출발선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갔는지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하지만 한트케가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에서 보여주는 성장은, 자기 동일시가 불가능한 인간이 통합을 희구한다는 측면의 발전가능성이다. 실제로, 이 소설은 세계의 내러티브를 지탱하는 언어의 보편적 기호체계에 의탁해, 통합된 세계 속에서 경련이나 공포감은 전혀 없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천국 같은 삶을 느끼고 싶은 주인공의 욕망과, 그 안온하고 텅 빈 세계속에는 나 자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불쾌감이 끊임없이 대립하는 과정의 기록이다. 어떤 면에서 한트케의 소설은, 모두가 동일한 출발선에 있다는 전제하에 성숙한인간이 되는 것, ‘생산적이고 훌륭한 인생을 사는 것을 이야기하는 성장소설의 법칙이, 사회가 규정하는 정상적이고 보편적인간됨 자체와 싸워야 하는 타자들에게는 얼마나 불합리한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결국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는 멀리가는 인간이 아니라, 출발선을 찾아 헤매는 인간의 여정을 담은 성장소설인 것이다.


사실, 나는 이 소설이 궁극적으로, 주인공의 주관적 감정(감각)’글쓰기(예술)’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외부세계(현실)를 합리적 이성, 인과율에 따라 인식하지 못하는 주인공에게 감정은 현실과 연결된 유일하고 특수한 다리이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의 이질적이면서 압도적인 자연경관이 주인공에게 선사하는 강렬한 감각은, 그토록 원하던 균열없이 합일된 동일자의 가능성을 펼쳐 보인다. 실측백나무가 점점 다가와 마침내 내 가슴속에 파고들고,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몰려드는 쾌감과 함께 나무의 움직임에 동화되는 체험이 단적인 예이다


감각이 외부세계와의 연결을 돕는다면, 소설가인 그에게 글쓰기는 나와 나의 내면을 잇는 다리이다. 실제로, 주인공은 여행에서 만나는 미국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개인주의적이고 내면 탐구에 집중하는 자신의 글쓰기 방식을 성찰한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주인공이 본 그림은 상상화는 한 점도 없고, 모두가 모사화이며 대부분이 미국 역사에 대한 그림이었다는 점을 살펴보자. 클레어의 화가 친구는, 미국인이 모든 것을 역사화를 통해서만본다고 고백한다. 자연조차 풍경 그 자체로는 그림이 될 수 없고,그 경관에 대한 소유권을 쟁취했던 자들의 업적이 담겨있을 때만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그림에 대한 이 같은 설명은, 세계를 담아내는 예술의 재현방식을 역사가 있는 스토리(내러티브)로만 개념화하는 미국식 실용주의의 극단을 보여준다. 상징과 기호체계를 동력으로 굴러가는 실용주의는, 스토리 진행에 주안점을 두기 때문에, 객관성과 보편성을 획득한다는 명목으로 기능적 전개에 방해가 되는 행위 주체의 주관적 자유를 최대한 소거한다. 어떤 중요한 역할보다 플롯을 우선하는 미국식 예술관은 한트케의 글쓰기와 대척점에 놓인다. 실제로,자신들이 보는 모든 것, 심지어 가장 놀라운 일조차 그 즉시 하나의 개념으로 환원시켜 세계를 단순화하고, 개별적 특수성을 체험하기를 단념하는 실용주의를 주인공은 혐오하면서, 경계한다.


소설 속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우리라는 1칭 복수대명사를 사용한다는 특이점은 미국에서는 아무도 자기만의 세계로 침잠해 들어가지 않고/외로워지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자아중심적인 보다 우리를 사용한다는 존 포드와의 대화로 구체화된다. 물론, 이 역시 실제 미국인의 현실이라기보다, 외부인의 시각으로 도상화된 미국인을 설명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면이 있다. (게다가 존 포드는 가장 미국적인 것의 대표격인 서부영화의 전설적 감독이 아닌가!) 어쨌거나 꿈도 꾸지않는 미국인과 대화 하면서, 주인공은 자기만의 독특함을 중시하고, 꿈을 꾸고”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누며 수시로 토라지고 모욕감을 느끼면서, 일인칭 화자 시점의 책을 읽고, ‘에 관한 소설만 쓸 수 있는 스스로의 글쓰기를 비판적으로 돌아보는 것이다.


정리하면,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의 주관적 감정과 글쓰기를 통해 타자성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인간에 관한 소설인 셈이다. 남은 건, 결말에 대한 질문뿐이다. 그래서 결국 주인공은 타자성을 극복하는가. (결말의 화해의 제스쳐는 해피엔딩의 완료형인가.) 대답은 알 수 없다이다. 물론, 솔직한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에 가깝다. 우선, 존 포드를 만난 이후 대화를 이어가는 건, 전적으로 유디트이다.모든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단정하는 것도, 평화적인 방식으로 헤어지려한다는 가능성에 대해 말하는 주체도 가 아니라 그녀이다. 세상에 대한 온갖 정보활자화된 것을 보면, 그것을 자신을 위한 보편타당한 최고의 명제로 받아들이는 유디트는 미국식 실용주의와 우리개념을 수용하고 합일된 세계에 수렴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주사위가 순간적으로 사라지면서 다른 시간속으로 이행하는 경험, 실측백나무와의 물아일체체험을 통과하면서 주인공이 깨달은 사실은, ‘를 지운 천국처럼 안온한 텅빈 세계 속에서 우리를 끌어안느니, 차라리 영원한 타자성의 심연 속에서 공포와 불안에 떨겠다는 의지이다. 물론,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의 주인공은 인과율에 귀속되지 않으므로 단지 캘리포니아의 자연 앞에서 느낀 강력한 환희 때문에, 타자성을 벗어던졌을 수도 있지만 가능성은 희박해보인다.


솔직히 나는 한트케를 다시 읽을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지 못했다. 쓰면서도 이미 오래전에 시효가 지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기분에 자주 사로잡혔다. 어쩌면 전위니 아방가르드 문학이니 가능했던 때로부터 너무 멀리와버린 지금, 끝난 잔치에 뒤늦게 찾아온 손님처럼 주어진 큰 상에 작가 자신도 민망해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이제 나는 1세계 백인 남성인 한트케가 말하는 타자성과 나르시시즘을 이해는 해도, 공감할 수는 없다고 느낀다. 그럼에도, 그의 소설이 지향하는 가치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트케의 소설은, 20대의 혼돈에서는 벗어났지만, 여전히 스스로를 균열없는존재로 인식하지 못하는 나 자신의 현재를 돌아보게 한다. 어떤 면에서,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속 주인공은, 보편을 대표하는 우리를 낯설게 여기며, ‘의 확장으로만 우리를 이해하는 내 분신같기도 하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 온전히 수렴되지 못하는 스스로의 어떤 면을 안고도, 이를 자각하지 못하거나, 외면한 채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타자되기는 세계로부터의 고립, 배제를 뜻하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내 안의 타자가 아니라면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나와는 다른 누군가가 될 수있는 가능성의 땅을 누가 발견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소설의 가치는, 육체에 갇힌 우리의 정신을 해방하는 타자성의 자유를 증명한다는데 있다. 그러니, 앞선 문장은 고치도록 하자.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는 인간이 얼마나 멀리 가는지에 관한 소설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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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크레마 사운드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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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속도감있게 자료를 검색해야한다든지 하는 게 아니라 단순히 눈피로 손목피로도를 줄이면서 누워서 책보는 용도로만 사용한다면 가볍고 물리키가 있는 크레마사운드업은 적절한 제품인것 같습니다. 배터리도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고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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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린
오테사 모시페그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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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X빌을 떠날거란 말을 수차례 반복하고, 실제로 어떤 중대한 사건으로 고향을 등졌다고 또 수차례 언급하는데, 200페이지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중대한 사건은 어느정도 예측가능하지만, 어쨌거나 끝까지 읽게 만드는 힘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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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윌리엄 트레버 - 그 시절의 연인들 외 2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5
윌리엄 트레버 지음, 이선혜 옮김 / 현대문학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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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트레버의 단편은 편차가 크지 않고 고르게 읽는 즐거움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책이 한겨레출판에서 출판되고 있는 트레버의 소설들만큼 편집이나 검수에 공을 들였는지는 의문이라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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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의 선
앨런 홀링허스트 지음, 전승희 옮김 / 창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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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홀링허스트의 문장은 시적으로 아름다워서 아니라 소설적으로 섬세해서 읽는 재미가 있다. 기능적 문장은 적고 대부분의 문장이 이야기를 실어나르는 동시에 등장인물의 정서와 심리를 날카롭게 부연한다. 놀라운 것은 그 섬세한 감각이 600페이지 분량의 소설 내내 이어진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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