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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오버스토리
리처드 파워스 지음, 김지원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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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논쟁도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어요오직 훌륭한 이야기만이 그럴 수 있어요.

 

훌륭한 이야기란 무엇인지 자문하게 만드는 소설이 있다. 첫째는, 이야기가 지녀야 할 최소한의 덕성조차 갖추지 못해 절로 철학적의문을 품게 하는 소설이고, 둘째는, 감정적 고양감의 실체를 구체적 언어로 규명하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소설이다. 다양한 소설이 쏟아지고 있고, 작가가 일정수준 이상의 리터러시를 갖춘 전문가집단으로 분류되기 어려워진 현대에는, 후자보다 전자를 만날 확률이 훨씬 높다. 내가 소설을 읽을 때, 고려하는 세 가지는 서사의 흥미로움, 구조(형식)의 독창성, 사회적 의미이다. 이 중 한가지만 충족해도 꽤 좋은 이야기이지만, 그조차 쉽지 않다. 리처드 파워스의 <오버스토리>가 예외적인 건, 후자의 관점에서 훌륭한 이야기가 무엇인지 숙고하게 할뿐 아니라, 좋은 소설의 세가지 미덕을 두루 갖춘 작품이기 때문이다.


읽기 전 염려했던 건, 넓은 의미에서 환경문제를 다루는 만큼 윤리적 시비판단을 직설적으로 드러내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작가가 700페이지가 넘는 볼륨의 소설을 쓰기 위해 나무에 관한 책 120여권을 읽었다는 사실을 알고, 의구심은 커졌다. 과학과 환경운동 역사를 아우르는 학구적 자료조사로 완성된 작품이 과연, 소설을 르포르타주 화하거나, 정당한 주장을 하기 위해 기획된인물로 하여금 설교하게 만드는 계몽적 충동을 억누를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던 탓이다. 그러나 의구심은 완결된 9편의 단편이라해도 손색없을 첫장 뿌리를 읽으면서 해소되었다. 리처드 파워스는 태고적부터 지구와 역사를 함께 해온 다양한 나무들의 생태를 담아내면서, 부지불식간에 나무와 애착관계를 맺고 연대하는 아홉 명을 지그소 퍼즐처럼 맞춰나간다. 그리고, 지구 전체의 역사에서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하는 인간들이 끈질기고, 독창적이고, 열심히 일하는 특질을 십분 발휘해, 나무와 숲이 수천년동안 일궈온 모든 생태계를 얼마나 짧은 시간안에 파괴하고 있는지도 다층적으로 조망한다.


소설에서 포괄하는 시간적 배경은, 남북전쟁 시기부터 현재까지 100여년이 넘는다. 100년이란, 인간에게는 드라마틱한 부침을 거듭하는 장대한 세월이지만, 나무에게는 몸통에 몇 십미터의 높이를 더하고 가지를 좀더 바깥으로 뻗는데 소요되는 시간에 불과하다. 리처드 파워스는 인간과 나무가 사는 세계의 시간의 상대성을 3대에 걸쳐 촬영한 호엘가 밤나무 타입랩스를 통해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오버스토리>에는 아홉 명 주인공들의 삶 주변에 존재했던 수십종의 나무와 숲에 얽힌 복잡한 이야기가 과학적. 신화적, 역사적 맥락 속에서 흥미롭게 진행된다. 개별적인 이야기로 뻗어나갔다가(뿌리), 어느 시점에 인물들이 서로 연결되고(몸통, 수관), 종국에는 각자의 자리로 돌아와(종자), 중요한 가치를 실천하는 과정을 담은 소설의 구조는, 그자체로 나무들이 우리가 볼 수 없는 땅속뿌리를 통해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함께 성장하며, 번식하는 숲의 은유이다. 인종, 사회, 문화적 배경이 전혀 다른 9명의 타인이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부모가 아이의 손을 잡는 것처럼 서로를 향해 가지를 뻗는 순간을 목격하는 건, 이 책이 독자에게 선사하는 가장 놀라운 선물이다.


<오버스토리>의 핵심 서사가, 1990년대 미국의 목재전쟁을 배경으로, 원시림을 보호하려했던 환경주의자들의 저항운동인 건 분명하다. 그러나 이 소설은 생태주의가 절대선이란 기치 아래, 환경운동의 정당성을 피력하고, 문명을 죄악시하는 고발형소설은 아니다. 오히려 <오버스토리>에는, 우리사회의 생각 있는 사람이라면 미쳤다고 여길만한 입장을 지지했던 이른바 급진환경론자들이 실은, 새로운 비인간의 도덕적 질서에 호소한다기 보다, 그저 예쁜 초록의 생물들에 관해 감상적으로 굴고 있는건 아닌지 사회심리학 차원의 의문을 제기한다. 또한 작가는 나무에 깊은 애정을 가졌음에도, 일부 생태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들이 모든 개발과 발전을 멈추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일이 가능하다고 믿지 않는다. 그러기엔 인간이 이룩한 문명과 테크놀로지가 너무 멀리 왔으며, 인간과 인간, 자연과 인간 사이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점이 5명의 운동가 외에 4명의 주인공이 더 필요했던 이유이다.


그 중에서도 과학자 패트리샤 웨스터퍼드는, 소설 속 모든 인물들을 연결하고, 성장을 돕는 마더트리역할을 수행한다. 이 때, 패트리샤의 저서 <비밀의 숲>은 결정적인 매개체가 된다. 이 소설에 담겨있는 과학적 지성의 풍요로움은 대부분 그녀에게서 비롯하며, 여러 면에서 패트리샤의 캐릭터는, 실제로 나무가 소통하는 법을 밝혀낸 캐나다의 생태학자 수잔 시마드를 떠올리게 한다. 나머지 3명의 캐릭터 역시 흥미롭다. 특히, 실리콘밸리의 중심부에서 AI에 둘러싸인 채, 실재보다 더 풍요롭고 진짜 같은 가상현실을 창조하는 닐리 메타의 각성은, 빠른 속도로 고도화될 인류 문명에 희망이 있는지에 대한 작가의 대답처럼 보인다. 닐리는 자신의 삶을 모두 바쳐 만든 게임에 내재된 근본적 결함을 깨닫는데, 이는 신에 의해 만들어진 대륙을 끝없이 정복, 건설, 개발하는 가상현실 <지배>의 문제인 동시에, 자본주의적 성공을 위해 내달려온 인류의 문제이기도 하다. 작가는 손닿는 모든 것이 황금으로 변하기를 소원했다가 아무것도 먹고 마실 수 없는 상황을 초래한 신화 속 왕의 이름을 따 이를 미다스문제라 일컫는다. 새롭게 각성한 닐리는, <비밀의 숲>이 알려주는 진실을 따라 VR모델에 새환경을 주입하고, 세계를 재구축하려고 한다. 데이터와 코드로 구축되는 세계의 화신과도 같은 닐리의 각성은, 소설 후반에 언급되는 후대의 학습자들의 미래를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끈다. 인공지능의 발달과 가상현실의 유혹을 막을 수 없다면, 테크놀로지의 영향력을 나무와 자연의 세계를 이해하는 방향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한다는 작가의 제언은, 생명체의 40억 년 동안에 가장 경이적인 산물인 인간에게 거는 마지막 기대인지도 모른다.


미다스문제가 그랬듯, <오버스토리>에는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 등장하는 상징이 현대적인물의 캐릭터성과 유기적으로 결부된다. 대부분 독자의 입장과 가장 유사할 레이와 도로시 부부의 이야기는, 노부부 바우키스와 필레몬 신화와 엮인다. 나그네로 변장한 신을 받아준 보상으로 커다랗고 우아하고 서로 뒤엉킨 참나무와 린덴나무가 되어 죽은 후에도 계속 사는 부부. 그러나 평생을 인간의 지적재산권을 지키는 변호사로 일했던 레이와 소유와 속박을 무엇보다 혐오했던 아내 도로시는 참나무와 린덴나무만큼이나 기질적으로 다르다딱따구리와 다람쥐가 노니는 참나무와 린덴나무가 언제나 두사람 집의 뒤뜰을 아름답고 견고하게 지키고 있었음을 알아차리는 건, 반신불수의 처지가 된 후다인간은 밝고 다채로운 것이 코앞에서 흔들리고 있는 와중에 배경의 느린 변화를 볼 수 없는 존재이기에, 침대에 누워 창밖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이 유일한 일이 되고서야, 레이의 시간이 나무의 시간에 맞춰 느리게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막 숲과 나무의 세계를 바라보기 시작한 부부에게 길잡이가 되어주는 건 역시, 패트리샤의 책 <비밀의 숲>이다. 레이는 변호사로 일 할 때는 완벽하게 동의하지 못했던, 비인간 존재들에게도 권리를 확장해야한다는 주장을 이해하게 된다. 부부의 성찰은, 우리가 얼마나 손쉽게 인간이 만든 법체계가 최고선이라고 착각하는지 일깨운다. 지적재산권 보호법이란 것도 어쩌면, 인간보다 훨씬 더 오래 이 땅에 자리 잡고 있던나무들과 숲이 우리에게 무료로 제공한 헌신 아래서 벌이는 기만적 로빈 후드 노릇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뒤늦은 각성.


반면 이른 각성으로, 환경운동에 투신한 다섯명의 인물도 있다. 원시림 수호를 위해 모인 이들은 나무의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고, 다른 계기로 미국서부 캘리포니아의 삼나무숲에 모여든다. 방만한 삶을 살던 대학생 올리비아(메이든헤어, 은행나무)는 임사체험 후 듣게 된 나무의 목소리에 이끌려 서쪽으로 향한다. 도중에 아이오와 외딴 농장에서 무료 나무 조각품을 판매하는 미술가 니컬리스 호엘(파수꾼, 밤나무)을 만나 동행하게 된다. 한편, 아버지의 자살이후, 나무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엔지니어 미미(뽕나무), 사무실 앞 소나무숲에 애정을 품으면서 인생에서 새로운 변곡점을 맞는다. 베트남전 참전 당시 반얀나무의 도움으로 추락사고에서 목숨을 건진 더글라스(더그전나무), 벌채된 숲을 복원하겠다는 의지로 5만 그루의 나무를 심는 순진한 이상주의자이다. 운동가들의 이상심리를 연구하려고 합류했다가 무리와 동화되는 애덤(단풍나무)은 다섯인물 중 가장 회의적이다.


메이든헤어와 파수꾼은 신화속 생명의 나무 이그드라실에 비견될 만큼 거대하고, 수령높은 삼나무 미마스의 벌목을 막기 위해, 60미터 나무 위에서 몇 개월을 버틴다. 이는 1997년 삼나무 루나를 지키려고 2년을 나무 위에서 생활한 줄리아 버터플라이 힐의 저항운동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오버스토리>는 주인공들의 투쟁이 인간을 넘어서는 도덕적 권위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제도와 부딪쳐 좌절되는 과정의 기록이기도 하다. 그들은 끝내 미마스가 살해당하는 걸 막지 못하고 공권력에 의해 진압된다. 벼랑 끝에 몰린 다섯은, 사회가 테러라고 규정하는 과업(제재소 방화)을 수행하기로 결심하는데, 각각의 캐릭터가 촘촘하게 쌇아올린 서사와 납득 가능한 동기는, 그들의 선택이 광신도적인 신념의 결과로 읽힐 위험을 경감시킨다. 어쩌면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나무와 연대감을 형성한 독자들은 이들의 물리적저항운동을, 사회가 공공선을 저해할 때 이에 대항하는 것은 인간의 일반의지 실천이라는 루소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이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책의 마지막 장(종자)을 읽다보면, 인류의 미래를 낙관이나 비관 어느쪽으로도 확신하기 어려워진다. 물론 소설의 표면적 현실은 비관에 가깝다. 이야기의 구심점이자 과학적, 영적 차원에서 인물들의 연결고리였던 두 명이 죽음을 맞고, 다른 두 명은 테러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글라스는, 마지막 순간에 부차적 대사산물 공동체에 기부하는 더글라스전나무처럼 희생을 감수하면서, 동료 미미와 니컬라스를 지킨다. 인간과 비인간의 세계 가운데 언제나 영리하고 간악한 인간의 세계에 가까웠던 애덤역시 마지막 순간에는, 유한한 시스템 안에서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며 무너지고 있는 인간 세계에 방관자로 남느니 차라리 불이야하고 소리치는 광인이 되는 길을 택한다.


방화사건과 메이든헤어의 죽음을 겪으면서, 인간의 눈은 지금처럼 비굴한 방식으로, 눈을 힘들고 지치게 만든 그런 방식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지금은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 만들어졌음을 배운 미미는, 눈을 통해 인간의 마음과 소통하는 삶을 살아간다. 테러로 규정된 그들의 저항운동은, 니컬라스가 형상화한 영상작품으로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 학습자들에게 퍼져나간다. 어느덧 아버지가 남긴 그림 속, 아라한의 모습을 한 미미는, 공원 소나무 아래 앉아 이제는 나무의 목소리를 듣고 응답할 수 있게 된다. 니컬라스는 툰드라 근처 북부 숲에서 죽은 통나무로 수수께끼같은 조형물을 만들어, 비인간적 세계를 인정하지 않는 현인류는 볼 수 없지만, 수백년 수천년 후 학습자들은 알아차릴지도 모를 진실을 타전한다. 여전히.” 끝내 놓지 못한 가느다란 희망의 신호이거나, 반대로 다급한 구조 요청일지 모를 어떤 절박함을 담아, 여전히.”


나무에 대한 찬가이자 환경대서사시라 불리는 이 소설은,사람들이 어떻게 다른 것으로 변신하는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한다. 주인공 아홉명은 모두 인류가 놓인 엄청난 위기 앞에서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기 때문이다. <오버스토리>를 끝까지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더 이상 인간의 필요에 의해 잘려나가는 나무를 무심히 보아넘기는 일이 불가능하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훌륭한 이야기들은 늘 우리를 조금씩 죽이고, 우리를 우리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바꿔놓는 까닭이다. <오버스토리> 새로운 변신이 어떤 대단한 전환이 아니라, 이전에는 미처 우리가 볼 수 없었던 진짜 세계을 인식하는 섬세한 감각에서 출발한다고 말한다.


책을 읽는 동안 줄곧 유년시절 추억이 깃든 소나무 숲을 떠올렸다. 미미처럼 나 역시 예고없는 습격과도 같은 벌채작업으로 하루아침에 마을 아이들의 놀이터이기도 했던 소나무 숲을 잃은 기억이 있다. 아파트단지가 들어섰을 그 숲에 관한 많은 것을 잊었지만,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건, 소나무의 잘린 그루터기보다도 별로 크지 않은 꼬마였던 내가 수시로 올려다보곤 했던 숲과 하늘의 풍경이다. 거미줄처럼 무성하게 뻗어 나온 나뭇가지로 인해 금간 거울처럼 보였던 푸른 하늘과 맞닿아 엉킬 듯, 엉키지 않는 침엽의 기묘한 어울림. 어린시절 나를 매혹했던 아름다운 풍경은, 크라운 샤이니스(crown shyness)라 불리는 현상으로, 묘목과 주변나무의 성장을 위한 숲의 배려임을 이제는 안다.


나는 이 소설이 전하는 마지막 메시지가 낙관에 가깝다고 믿고 싶지만, ‘생태주의환경보호가 인간이 누리는 문명혜택 박탈의 동의어로 인식되는 사회에서 희망을 발견하기란 무척 어렵다. 우리가 어째서 이토록 편리하고 풍요로운 인간중심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비안간적 세계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지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그런 이들에게 리처드 파워스는 이렇게 말한다. 수세기 전에는 사물로 분류되었던,아이들, 여자들, 노예들, 원주민들, 아픈 사람들, 미치광이들, 장애인들이 지금에와선 인간으로 변화했고, 이처럼 권리가 없는 존재가 권리를 갖게되는 과정이 역사가 발전하고 인간이 진보한다는 자랑스러운 증거라면, 지금이야말로, 나무가 말하는 진실에, 모든 비인간으로 분류되는 사물의 권리에 주목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하고. 왜냐하면, 인간만이 다른 존재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과오를 반성하며, 잘못된 행동을 교정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각각의 개인이 아무리 작고 약할지라도, 비인간적 존재의 생존에 관여하거나 선택할 수 있는 인간사회에 소속된 이상, 우리는 사자보다 강하며, 코끼리보다 힘이 센 존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오버스토리>, ‘혼자 누릴 것인가, 함께 살 것인가의 갈림길에 설 때, 언제나 자신이 지닌 강력한 에너지를 공존을 위해 쓰는 숲과 나무의 세계를 우리 앞에 펼쳐보임으로써, 인간이 앞으로 나아가야할 방향을 가리키는 드물게 아름다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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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왕은 안녕하시다 1~2 - 전2권 - 성석제 장편소설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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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지만역사의 흐름을 바꾸었을지 모르는 무명의 존재에 관해 쓰고 싶은 오랜 바람이 <왕은 안녕하시다>의 주인공 성형을 탄생시켰다고 말한다실로 인류의 역사를 혁신적으로 바꾸어놓은 중요한 인물 중 많은 수는 동시대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존재였다그러므로 지나간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역사소설이 현대에도 여전히 의의를 가지려면차별적인 가치관아래 주류 역사의 바깥에 머물러야 했던 사람들에게 이야기의 권력을 나누어 주는 일에서 출발해야 하는지도 모른다성석제가 숙종대를 배경으로 소설을 지필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역사극에서 수차례 다뤄져 상투화된 재료로 어떤 세계를 구축할지 무척 궁금했다잇따른 자연재해와 전염병의 창궐로 수많은 백성들이 고통받았으며세차례 환국으로 정치적 견해를 달리한 관료들이 무더기로 처형 당했던 숙종 치하는 전쟁의 환란을 피했다해도 태평성대와 거리가 멀었다그러므로 제목의 왕의 안녕이란허울 좋은 무사함을 반어적으로 풍자한 게 아니겠는가여기까지가 내가 책을 읽기 전 추측한 바다.


예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이 소설이 왕의 안녕으로 상징되는 절대권력 이면에 감춰진 치열한 논쟁과 암투피비린내 나는 죽음의 그림자에 주목한다는 점은 기대에 부합한다더불어 숙종대의 혼란한 정치상황을명성왕후 김씨(서인), 인경왕후(서인), 장희빈(남인), 인현왕후(서인), 숙빈 최씨(서인)로 이어지는 내명부의 쟁투가 전부인양 묘사하던 기존의 시대극과 다른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본다실제로 작가는 악독한 요부 장옥정이나 선하고 무고한 희생자 인현왕후그 사이에서 기능적으로 이용당한 줏대 없는 왕이라는 세간에 널리 퍼진 편견에서 벗어나 사료를 바탕으로 공정하게 인물을 묘사하려고 노력한다여성인물들간의 갈등은 이 소설의 핵심이 아니기에 드라마틱하게 부각되지 않지만왕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해 왕권을 강화하는 도구로 이용되었던 왕비의 출신성분이 어떻게 나라의 정치 경제전반에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다.


예상을 빗나가는 건 상상력의 영역인 주인공 성형에 이르러서다나는 성형의 존재가 실제 벌어진 사건의 결과를 바꿀 수 없다는 역사소설의 제약으로부터 서사적 자유를 보완하고, 현대적 관점에서 이야기의 숨통을 틔어줄거라 기대했다액자식 구성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의 기본설정이 그런 기대를 부추겼는데, <왕은 안녕하시다>가 시대를 달리한 여러 작가들의 손을 거친 공동저작물이라면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무명인 성형이야말로 작가들의 비전과 가치관을 반영하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임에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성형은 한 날 한 시에 태어나지 못했으나 한 날 한 시에 죽기를’ 맹약하는 무협의형제의 관습적 문법을 되풀이하면서, ‘왕의 안녕이라는 대의에 헌신하는 조력자에 머문다성형이 1인칭 화자로 소설을 이끌긴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그가 주인공이라기보다 숙종과 정쟁의 중심에서 부침을 거듭한 신료들(허적허목윤휴유혁연송시열김석주박태보 등)의 행보를 지근거리에서 지켜본 내밀한 목격자로 기능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왕은 안녕하시다>는 세자 시절부터 숙종 즉위 후예송논쟁의 재점화경신-기사-갑술환국으로 이어진 격변을 모두 담고한편에서는 역사에서 실현하지 못한 북벌의 대의를 무협적 내공과 기백을 지닌 성형을 통해 간접적으로 투사한다.


성석제는 당대의 생활상을 담아내고 성형의 활약을 묘사할 때에는 특유의 박람강기한 재담가의 면모를 발휘하지만역사에 기록된 소문과 암중모략복잡한 정쟁의 정황을 다룰 때에는 사관에 준하는 절제된 서술방식으로 이야기를 이끈다성형과 실존인물의 경중을 따지자면단연 실존인물들이 펼치는 사건의 흥미로움과 말의 밀도가 우위를 점한다따라서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허구의 인물이 펼치는 무협활극을 기대한 독자라면지나치게 정통적인 재현방식이 자칫 고루하다고 느껴질지 모른다작가가 새로운 전망이나 전복의 서사 대신결과적으로 왕의 안녕이란 곧 조선의 안녕이고그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백성의 안녕이라는 고전적 주제의식에 동의하고 있는 까닭이다.


물론 운신의 폭이 자유로운 파락호로 지위고하에 구애받지 않고 입바른 소리를 잘하는 성형의 존재가 실제 역사의 흠결을 비판적으로 부각시키는 면도 분명 있다독자는 성형의 시선으로, 본심을 숨기고 빌미를 잡아 몰이할 말을 끌어내기 위해 계속되는 논쟁의 치사스러움이나아무렇게나 해석해도 좋을 말로 제 안위를 돌보는 벼슬아치의 기회주의적 태도를 비웃을 수도 있다재밌는 건 호오가 분명한 성형의 태도를 통해 작가가 실존인물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는 점이다성형은 대체로 고답적인 교묘한 언변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키거나(송시열), 자기안위와 사익 추구가 우선인(허적김석주삼복고관대작에 대한 혐오를 숨기지 않는다반면옳은 가치를 지키기 위해 발언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선비에게는 외경심을 느끼고(박태보), 아버지의 부재가 스승과의 유대로 대체 된 듯사제 간의 도리에 각별한 애착을(허목유혁연보이기도 한다또한 모계로 속량한 노비의 피가 흐르고부계로는 북벌의 대의를 품은 무사의 혈통을 이어받은 방외자의 입장에서, 엄격한 신분사회의 규율로부터 비교적 유연한 태도를 보이며 일반 백성들의 오욕칠정을 담은 패관소설이야말로 세계의 진실을 담을 그릇이라 믿는 김만중에게 감화되기도 한다.


이처럼 성형이 맺는 교분은 반상의 법도나 당파성에 얽매이지 않는다그를 움직이는 것은 실존인물의 성품인간적 면모에 대한 솔직한 호감이며이러한 정서적 연결은 성형이 후대 작가들이 현대성을 이입한 존재임을 반영한다국가의 문제는 내가 책임질 일이 아니니 되도록 나는 책임을 지지 말자는 신조로 살아온 태생적 반골 성형이, 복종해야할 절대권력 숙종과 맺는 관계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작가는 군신간 충의나 대의를 향한 신념이 아니라정체를 몰랐던 시절 한 아이에게 가졌던 애정이 성형의 인생을 결정했다고 말한다열네살에 보위에 올라 아직 어리고 약한 어깨에 국가의 명운을 짊어져야 하는 아이를 향한 연민이천하제일의 무예 고수가 되고도 지옥같이 되풀이되는 현실을 떨치지 못하고 권력에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했던 이유라고성형은 왕의 정치적 의도가 바뀔 때마다 당색에 구애받지 않고 교류했던 동지를 잃으면서더 이상 왕이 자신이 최초에 애정을 주었던 존재가 아님을 깨닫고권력의 추악함에도 질려버리지만끝내 왕을 마음 속에서 완전히 저버리지 못한다.


"글씨는 형만 못하고 독서는 아버지만 못하며 식견과 학문은 족숙인 박체채를 따를 수 없고 학문은 양외숙 윤증에정사와 시무는 친외숙 남구만에 못 미치지만 그 모두를 능가하는 아름다움을 지닌 사람은 박태보였다대전 황촉대의 대초처럼 은은한 향을 내며 고요히 타오르는 촛불과 같은 박태보를 보고 있노라면 배가 고프지도 않았고 마음이 평온했다."


<왕은 안녕하시다>에서 성형이 숙종장옥정박태보 등에게 매료되는 지점은 멜로드라마적 감수성을 내포하고 있다특히 박태보를 아끼고 귀애하는 마음은 장옥정에 대한 연심과도 결이 다르지 않으며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변치 않는 진심이라는 점에서 더욱 높은 위치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숙종과의 우애에 치명적 균열이 생기는 까닭도기사환국 당시 박태보를 국문하는 왕의 광기어린 면모를 목격했기 때문이다박태보가 모진 고문을 당하고 유배 가던 중 숨진 노량진에서 모든 이야기가 출발한다 점 역시 의미심장하다이 책은 주류 역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박태보의 강직한 성품과아름다운 용모비극적 죽음까지 이례적으로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시쳇말로 실존인물 중 작가의 최애가 누구인지 짐작가능한 지점이 아닐 수 없다.)


박태보의 친국장면에서 숙종과 박태보가 주고받는 언변은상소와 비답으로 이어진 말의 향연을 지켜봐온 독자에게 흥미로운 대조로 다가온다우리는 정쟁을 유도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손에 넣은 숙종의 격앙되고 파열된 언어에서예송을 논할때 학문이 뛰어난 신하들을 논리로 제압하던 어린 왕의 지혜로움이 흐려지고견제 받지 않은 통치자의 광기만이 남았음을 알게된다반면 박태보의 언어에는 제정신을 잃고 괴물로 변한 권력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왕을 설득하기 위해서라기 보다 어떤 면에서는논쟁의 기록을 지켜보고 시비를 판단할 후대의 사람들을 향해 굴종하지 않는 진실을 발화한다는 느낌을 받는다현대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시대의 형벌을 고증한 것임을 고려하더라도지나치게 길고 상세하며 잔인한 고문 묘사를 읽고 나면주인공이 헌신해온 왕의 안녕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기만적이며 동시에 공허한 명분이었는지 깨닫게된다.

 

임금에게 신하란 장기판의 말과 같은 것이거늘때에 따라 총애하고 중요하기도 하지만 소용을 다하면 결국 버릴 수밖에혈육이든 친자든 백성이든 나라든 내고 있고서 있는 법. (...) 왕은 잘못하는 법이 없다왕은 언제나 옳다그러므로 왕은 과거의 잘못을 후회하거나 사죄를 해서는 안 된다.”

 

이 소설은 역사교과서에서 다루지 않은 조선 후기 정치경제사를 인물 중심으로 촘촘하게 들여다본 교양서라고 볼 수도 있다교양서의 지루함을 틈틈이 가미된 멍텅구리검법을 위시한 무협액션으로 날려버리는 흥미로운 역사소설이정도로 방대한 사료를 적절하게 취사선택하여 끝까지 균형을 잃지 않는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작가가 드물다는 것을 안다그럼에도 불구하고책을 덮은 후 지금 시점에 이 소설이 갖는 의미에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가문주의의 허위와 축첩제도의 갈등이 절정에 이르렀던 조선후기정치구도가 손바닥 뒤집듯 급변하는 환국의 중심에도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가부장사회의 희생양이었던 여성들이 있었다. <왕은 안녕하시다>는 통치자의 어리석음의 원흉을 야망어린 후궁에게 미루는 비겁한 서사는 피하는 대신포커스를 숙종에게 맞춤으로써 정치성을 가진 여성들의 투쟁이 아무리 치열해도결국 조선의 운명은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권력이 승계되는 과정을 따르며결과적으로 역사를 만드는 것도 남자들의 몫임을 공고히 한다조정의 관리나 왕이 민심을 살피고국사를 논하는 거점지로 삼는 곳은 기생방이며그들 사이에는 사대부의 첩으로 살다가 관기로 되돌려보내질 운명에 처한 기생이 목숨을 끊었다거나정조를 위협당한 여자가 바늘로 얼굴을 상하게 만들어 정절을 지켰다는 이야기가 미담처럼 오간다.


물론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은 현대의 우리와는 다른 윤리의식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그래서 역사소설의 독자에게는 한발 물러서 과거의 생활양식을 이해하려는 관대한 태도가 요구된다는 것도 안다그러나 나도 내 시대의 도덕과 여성이란 정체성으로 세상을 바라보기에정쟁이 계속되는 혼란의 시기에 조상들이 얼마나 지적이고 높은 기개로 글을 짓고자신의 말에 책임을 졌는지에 감탄하기 이전에바로 그 선비라는 자들이 각 계층의 여성에게 저지른 야만스러운 일들이 함께 일어나고 있었음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그리하여 작가가 박태보에게 애정을 느낄 때나는 치욕을 당한 피해자임에도 진실을 밝히지 못하고 필요할 때 불려나와 정치적으로 이용당해야 했던 평범한 부녀자 이차옥에 대해 더욱 오래 생각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누군가의 자식이며 자손이다그 누군가는 자신도 모르는 새 라는 미래를 만들었다. (...) 당신이 그곳에 있어 지금 여기에 내가 있어요그러니까 당신이당신이 나예요나는 당신일 수 없지만, 생명에는 언제나 과거보다 미래가 중요하니까요. 고마워요당신이 거기 있어주어서.”

 

멀고 먼 과거의 조상과 내가 가느다란 혈류든 유전자로든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에는 낭만적인 구석이 있다그러나 나는 과거를 아름다운 것우리가 언제든 준거로 삼아야 할 어떤 가치 있는 것으로 상정하고당신이 써내려간 삶이 곧 나의 삶으로 이어질 것이라 자부하는 문장에서 역사가 내편임을 결코 의심해보지 않은 자의 순진한 특권의식을 읽는다그리고 이것이, 지나간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짓밟아 꺼야할 나쁜 불씨로 인식하는 내가 <왕은 안녕하시다>를 재미있게 읽었음에도아주 좋아할 수 없었던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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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린
오테사 모시페그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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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X빌을 떠날거란 말을 수차례 반복하고, 실제로 어떤 중대한 사건으로 고향을 등졌다고 또 수차례 언급하는데, 200페이지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중대한 사건은 어느정도 예측가능하지만, 어쨌거나 끝까지 읽게 만드는 힘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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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소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6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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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털어놓지 않았던 얘기는, 때로 그것이 동정이나 탐욕이나 비겁함이나 허영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는 점이었다. 행복에 대한 환상 같은 것. (...) 때로는 이유도 조짐도 없이 행복이, 행복의 가능성이 나타나 그들을 놀라게 하곤 했다는 의미다.”

 

주인공 로즈의 유년기부터 중년까지 삶의 중요한 사건을 시간 순에 따라 담은 <거지 소녀>는 일종의 성장소설이다. 단편 연작에 가까웠던 <소녀와 여자들의 삶>과 비교하면, <거지 소녀>는 로즈의 인생이라는 메인 플롯 아래 동일 화자가 집중도와 응집력 높은 이야기를 전달한다는 측면에서 좀 더 장편의 특성을 수용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순차적으로 읽지 않아도 제각각 독립된 완결성을 지닌 단편의 매력을 느낄 수 있으며, 이는 앨리스 먼로의 소설을 읽는 독자의 특권이다.


대단한 스펙터클 없는 평범한 여성의 삶을 주로 다루는 앨리스 먼로의 소설이 특별한 이유는, 스토리 자체의 매력보다 이를 보여주는 방식에서 작가가 발휘하는 직관과 통찰력 덕분이다. 인간의 행동에 깃든 내밀한 심리를 묘사하는 앨리스 먼로의 소설가적 탁월성은 대가라는 상투적 수식어의 우직한 진정성을 빌리지 않고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앨리스 먼로의 소설을 읽고 나면 인간의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쓰인 정밀한 문장에 고양감을 느끼면서, 때론 삶의 어두운 진실을 해부하는 예리한 태도에 내면을 베인 채 망연해지기도 한다.


촘촘하면서 날카로운 묘사는 <거지 소녀>에서도 여전하다. 이 소설집에는, 인생의 행로를 바꿔놓을 선택 앞에 놓인 인간의 불안정한 심리와 구체적 실체를 알 수 없는 내밀한 감정의 풍경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욕망과 금기의 강렬함 뒤에 숨겨진 공허한 이면 등이 한 여성의 인생을 통해 깊이 있게 담겨있다처음에 수록된 3<장엄한 매질>, <특권>, <자몽 반 개>가 로즈의 유년과 청소년기를 담았다면, <거지 소녀>를 기점으로 나머지 5편은 성인이 된 이후 삶의 향방을 그린다. <야생 백조>는 두 시기의 경계에 위치한 문제적 단편이다. 이 소설은, 분량도 짧고, 나머지 작품들이 갖는 유기적 맥락에서도 다소 비껴나 있기에 얼핏 소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단편이 인상적인 까닭은, 이제 막 어른의 세계에 들어선 여성의 운명을 비정할 정도로 환상을 걷어내고 직시하기 때문이다. 앨리스 먼로는, 미성숙한 여성의 내적 욕망이 남성 중심적 사회의 정교한 억압과 비정상적 욕구에 노출되면서 어떤 식으로 굴절되는지를 보여준다.


낯선 남자의 성폭력 앞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하는 로즈는 이중의 억압 아래 놓인다. 첫째는, 아버지가 살아 있다면 그보다도 연배가 위일 남자, 존경받는 데 익숙한 남자, 자연을 감상하고 야생 백조를 보고 기뻐하는 남자에게 감히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가부장 사회의 규율을 내재화한 여성의 행동 규제이다. 둘째는, 가해 남성의 잘못을 추궁하거나 징벌할 수 없기 때문에, 상상 속에서 누군가의 대상이 되고픈 갈망에 사로잡히곤 했으며, 지금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기 위한 호기심에 거부의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하는 자신에게서 책임 소재를 찾는 자기멸시이다. 이는 아무도 모르게 로즈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비가시적 일이지만, 강압적인 성경험이 남기는 가장 나쁜 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폭발하듯 하늘로 솟구치는 야생 백조 떼의 비상과도 같았던 그 날의 폭력적 관능의 기억은,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에 불쑥 끼어 들 것처럼 마음 한구석에 오래도록 남아, 로즈가 맺는 자기파괴적인 관계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남부 고딕소설의 정취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캐나다 온타리오 주 웨스트핸래티를 배경으로 진행되는 전반부 3편을 읽는 게 흥미로울 것이다. 먼로는 겉보기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범하고 조용한 시골 마을 이면에 도사린 지저분하고, 음습한 진실을 보여준다. 로즈에게 웨스트핸래티에서 보낸 유년시절은, 들짐승 같은 시골 아이들의 야만성을 견디며, 끊이지 않는 뒷소문에 연루되지 않기 위해, 소문의 유포자라는 우월한 위치를 점해야만 했던 시기였다


앨리스 먼로가 묘사하는, 고립된 시골공동체 웨스트핸래티는, 훈육 명목으로 가부장의 폭력이 당연시되고(<장엄한 매질>), 폭력을 폭력으로 응징하는 왈패들의 자경행위가 정의와 혼동되며(베키 타이드 아버지의 죽음), 무엇보다 고립된 시골공동체 내 최약층-장애를 가졌거나(프래니 맥길, 베키 타이드), 부모의 보호로부터 소외된(루비 캐루서스)-에 해당하는 여성이 늘 손쉬운 타깃이 되는 곳이다. 게다가 그녀들에게 행해지는 폭력은, 뭔가가 잘못되어 바람직한 종류의 여자가 되지 못한 숙명인 양, 암묵적으로 용인된다. 플로와 로즈의 아버지가 경계하는 것도 바로 그 점이다. 핸래티 내에서 물리적 조건으로는 문제적으로 분류될 위험이 없지만, 로즈에게는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지적 수준을 넘어선 영리함이 문제가 된다. 더욱이 그녀는 이를 억누르기는커녕 자부심을 품고 뽐내기를 좋아한다는 측면에서 프래니, 베키, 루비와는 다른 종류의 바람직하지 못한” 여자의 전형이 된다.


앨리스 먼로의 소설이 여성주의적으로 읽히는 이유는, 주인공이 주체적으로 저항적인 행동을 해서가 아니다. 실제로 로즈는 지성을 갖춘 가난한 여성이 흔히 그러듯 지역커뮤니티를 벗어나 넓은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 대학에 진학하지만, 패트릭과 결혼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남성의 그늘과 경제력에 종속되는, 동시대 여성의 미덕에 순응하고 만다. 그러나 사회적 규율을 따른 선택에도, 로즈의 내부에 존재하는 열망은 꺼지지 않는다. 앨리스 먼로는, 독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로즈의 실책(클리퍼드, 톰과 맺는 불륜과 사이먼과의 불확실한 관계)의 근원에 가라앉은 복잡한 탈주 열망을 파헤친다


패트릭과 함께할 때 로즈는 안정적이지만 숨 막히는 결혼생활과 풍요롭지만 규격화된 삶, 부르주아의 편협한 정치성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어한다. 또한 이혼 후 여러도시를 떠돌며 지낼 때는, 불안정한 미래와 이룬 것 없이 나이들어 버린 스스로의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경멸하면서도 때론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남성적인 자기 중심성에 매달리는 것이다. 애초에 이런 소모적인 관계에는 진실성이 결여 되어 있음을 알면서도. 앨리스 먼로는 이 모든 인간 심리의 복잡성을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요약한다.

 

그녀가 달아나며 벗어나려 하는 것은 실망, 상실, 파경만이 아니며 그와 정반대되는 것, 즉 사랑의 축복과 충격, 그 눈부신 변화이기도 한 것 같았다. 그런 것들이 안전하다 해도 그녀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둘 중 어떤 경우라도 결국엔 뭔가를 자신만의 균형추이건 진실성의 작고 메마른 알맹이건, 빼앗기게 된다. 그렇게 그녀는 생각했다.”

 

<거지 소녀>에서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다양한 계층의 여성들이 우정을 나누고, 불화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는 점이다. 고아로 자라 갖은 고생을 했지만, 탈선하지 않고 안정적인 결혼을 유지하고 있다는 도덕적 우월감이 삶의 긍지인 플로, 직업적, 경제적 안정을 이룬 독신 여성으로서 가난한 여학생의 학업을 지원하는 선의를 베풀지만, 패트릭으로부터 경멸의 대상이 되는 헨쇼박사, 고등교육을 받았고 정치적으로도 깨어있는 지식인이지만, 위대한 예술가의 재능을 타고나는 건 남성의 몫이라 믿는 조슬린, 실재하는 물질과 사실관계 외에 추상적인 가치를 혐오하는 패트릭의 어머니, 일찍 성숙한 소녀로서 선망이 대상이 되지만 곧 권위를 잃고 마는 코라까지.


작가가 다양한 여성인물들을 통해 보여주는 진실은, 그녀들이 한시적으로나마 누린다고 믿었던 권위, 나름의 특권이 전혀 특권이 아니라는 점이다. 부자인 패트릭과의 결혼으로 경제적 안정과 계급상승을 이룬 로즈의 선택이,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여자의 특권이 아니라, 오히려 여성에게 하나의 이상적인 삶을 강제하고, 그들의 성취는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는 사회적 억압의 결과물인 것처럼. 앨리스 먼로는, 로즈의 계급적 특질에 대한 자기만의 편견이나 감상으로 코페투아왕과 거지소녀라는 환상을 직조하고, 그녀 자신도 보지 못하는 순종적인 이미지를 사랑하며, 심지어, 저속한 습성까지 뜯어고칠 수 있다고 믿는 기득권 남성 패트릭의 오만함이야말로 진정한 특권이라고 말한다.


플로와 로즈, 로즈와 조슬린이 서로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으면서도 갈등하는 이유는, 그들이 여성에게 주어진 작은 권위를 놓고 경쟁하는 사이이기 때문이다. 반면, 아버지와 로즈, 로즈와 패트릭, 플로와 로즈의 아버지가 함께일 때는 미묘한 경쟁심과 불안함 피로감이 완화되는데, 왜냐하면 그들과 있으면 남성의 권위에 복속되는 여성의 지위를 편안하게 수용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주로 20세기 초중반을 사는 먼로의 여성인물들에게서 간혹 이런 체념적 태도를 발견할 수 있다. 로즈가 실패를 거듭하는 연애와 사랑을 끝낼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지 모른다.


그런 관점에서, 로즈와 랠프 길레스피의 유대관계는 독특한 구석이 있다. 그들의 우정은 전형적인 남녀의 계급적 역학관계에서 비껴나 있는 까닭이다. 아이들이 성별을 인식하기도 전에 서로에게서 비슷한 특질을 발견하고 애정을 품듯, 로즈도 자신과 닮은 내성적인 랠프의 내면에 숨겨진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고 싶은 욕구에 공감한다. 그리고 학교를 떠난 그가 해군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비로소, 자신이 우애를 품었던, 온순하고 무능한 소년도 결국은 언제나 로즈보다 한 계단 높은 위치에서, 자신들이 갖춘 것보다 훨씬 큰 재능과 권위가 필요할 것 같은 일들을 하도록 허가 받을남자임을 깨닫고 허탈해진다. 하지만 그들의 우정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편지를 반쯤 읽었을 때 그녀는 멈춰야 했다. 이런 식으로 플로를 드러내고 비웃는 것이 구차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전에도 자주 그런 적이 있었고, 그것이 구차한 일이라는 사실 또한 처음 떠오른 생각도 아니었다. 사실 그녀를 멈추게 한 것은 그 간극이었다. 그녀는 극 간극을 새삼스럽게 깨닫고 아찔해졌다. 그것은 비웃을 일이 아니었다. 플로의 이런 나무람은 우산을 폈다고 항의한다거나 건포도를 먹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만큼이나 일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진심어린 말이었고, 고된 삶에서 나올 수 있는 교훈은 그런 것뿐이었다.”

 

이 소설집에는 인상적인 두 장면이 있다. 첫째는, 플로가 한껏 꾸민 복장에 기괴한 가발까지 쓰고 로즈의 시상식에 참석하는 부분이고, 둘째는, 고향에 돌아온 로즈가 재향군인회에서 랠프 길레스피를 마지막으로 만나는 부분이다. 두 장면에는 평생 어느 장소, 어떤 역할에도 완벽히 소속되지 못한 채 떠돌아다닌 로즈의 삶을 향한 진심어린 이해가 담겨 있다. 플로의 이해는, 역설적이게도, 로즈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완고한 확신에서 비롯한다. 절대로 이해할 용의가 없는 딸의 인생을 위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이 아닌 가상의 고상한 어머니를 연기하는 것, 플로의 진심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그에 비하면, 랠프 길레스피의 이해는, 추상적이고 고요한 공감에 가깝다. 그의 말없음은 무수한 소문과 꾸며낸 이야기에 둘러싸인 채 살아온 로즈의 인생을 위로한다.

 

뭔가가 부족한 듯했던 이 대화를 나중에 떠올렸을 때, 로즈는 두 사람 사이에 우애가, 공감과 용서가 흘렀다고, 비록 분명 누구도 그런 말을 입에 올리지는 않았지만 그런 감정이 물결이 되어 흘렀다고 회상했다.그녀가 늘 떨쳐내지 못했던 이상한 수치심이 누그러진 것 같았다.”

 

나는 서두에 앨리스 먼로의 소설에는 인간과 삶에 대한 놀라운 통찰이 담겨있다고 썼다. 그러나 재밌는 건 정작 먼로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스스로의 인생에서 자신이 허튼 것에만 주목하고 우스꽝스러운 장난만 전달했던 건 아니었을까, 항상 그 이상의 어떤 것, 섬세한 결이나 깊이나 빛 등이 있는데 자신은 그것을 포착하지 못했고 그러려고 하지도 않은 건 아니었을까 생각하며 수치심을 느낀다는 점이다.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의 한 대목인 이 문장은, 삶의 근본적 아이러니를 담은 이 소설집의 주제를 내포하면서, 제목에 대한 완곡한 대답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인생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나 깨달음도 실은, 모든 것이 끝난 이후에 지나간 시간을 복기할 때 발견 할 수 있는 어떤 가치에 가까운 것이며, 정작 그 안에서 살아가는 당사자들은 마음 속의 모호한 예감만을 품은 채 그저 자기 앞에 놓인 길을 걸어갈 뿐이라는 사실이다. 때문에 로즈의 전 생애가,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의 올바른 답을 찾는 과정이었지만, 결혼과 이혼을 거쳐 다시 오랜 혼자만의 시간 끝에 처음 질문을 받았던 장소로 돌아와서도, 정답을 알 수 없어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다그렇다면, 인생의 알 수 없는 진실과 맞닥뜨린 순간, 그녀는 어떤 대답을 해야할까. 로즈는 다만, 배우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위엄어린 선택을 할 뿐이다. 소란스런 말들과 연극이 주는 공허함을 멈추고, 잠시 침묵하는 것. 모든 말들이 그친 후에만 들을 수 있는 침묵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 그것이 우리의 어리석은 선택에도 계속되는 삶과 소중한 인연에 경의를 표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로즈는 이에 대해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이야기하지 않음으로써 고이 간직하는 것이 단 하나라도 있어서 기뻤다. (...)그녀는 랠프 길레스피와 자신에 대해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의 삶을 가까이에서 여태 사랑했던 남자들보다도 더 가까이에서 느꼈다는 것, 자신의 자리 바로 옆 칸에 존재한다고 느꼈다는 것 말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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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 불확실한 삶을 돌파하는 50가지 생각 도구
야마구치 슈 지음, 김윤경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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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을 위한 실용 교양서를 표방했다지만, 국내 출판시장에서 철학서적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건 이례적이다. ‘삶의 무기’, ‘불확실한 삶을 돌파’, ‘50가지 생각 도구’ 같은 홍보 문구는, 이 책이 인문학의 표피를 쓰고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실용자기계발서로도 기능할 수 있음을 겨냥한다. 인문학 독자뿐만 아니라, 라이프 멘토로부터 특정한 해법을 배움으로써 삶의 문제 상황을 극복할 수 있기를 바라는 사람의 기대 심리까지 자극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실용’과 ‘철학’은 동일선상에 놓이지 않기 때문에, 이 책은 대중의 호기심을 유발한다. 동시에 모름지기 철학과 같은 인문학의 진정성은 학자들의 탐구와 노력이 현실의 쓸모와 무관한 목표를 지향할 때 가장 빛나는 것이라 여기는 순수인문학주의자들과, 실용적이지 않는 책을 읽음으로써 남들과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과시형 “차이적 소비자”(장 보드리야르)의 반감을 사기도 쉽다. 그러나 호기심과 반감 모두 독서의 계기가 된다. 나는 어느 쪽이냐 하면, 책을 구매하는 행위에는 호기심이 작용했지만, 끝까지 읽게 만든 건, 인문학적 실용서의 오류를 짚어내고 싶은 기저 심리였다. 한마디로 둘 다라는 말이다.


사실 객관적 수치와 경제논리로 돌아가는 경영과 비즈니스 분야에, 철학적 사유를 이식해서 혁신을 일궈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책들이 실패하기 쉬운 이유는, 전제부터가 자기 반박을 내포한 까닭이다. 이 책의 저자 역시 돈벌이와 가시적 숫자만을 중시하는 기업가의 실용 우선주의를 비판하면서,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철학의 ‘실용주의적 소용’과 ‘돈이 되는 수단’을 무기화하는 모순을 피하지 못한다. 인간의 행복한 삶에서 ‘돈이 전부는 아니다’를 주장하면서 ‘돈줄’을 챙겨야 하는 아이러니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건, 이 책이 근본적 자기모순을 품고도 대중을 설득시키는데 성공한다는 점이다. 전통적으로 서로 경시하거나 불화하는 경향이 있는 실용서와 철학서의 독자 중, 어느 한쪽을 택일하는 안전한 전략에 안주하지 않고, 상반된 두 집단의 합의점을 찾아내 “트레이드오프를 양립”시키는 성취를 이뤄낸 셈이다. 더하여, ‘예측 불가능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프래질(취약한)’ 심리를 자극하는 것이 소비 효과로 이어졌다고 추정할 수도 있다. 이 책의 읽으면, ‘불확실한 삶’에 불안감을 느끼는 우리의 인생이 조금이나마 나아질 것이라 믿게 만드는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내구력이나 강건함”을 키우고, 나아가 “충격을 원동력” 삼는 ‘안티프래질(반취약성)’을 획득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해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는 이 같은 독자의 관심과 기대에 값하는 책일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이 책은, 모두에게 철학이 필요한 이유가,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는 능력이 곧 철학적 사고에 기반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특히 저자가 강조하는 핵심은 ‘비판적 사고’ 기술이다.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때, 문제점을 인식하고, 개선과 혁신을 위한 어젠다를 설정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지난 시대의 과오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는다는 요지이다. ‘철학의 역사’에 주목한 것이 아니라 철학을 익힘으로써 얻을 수 있는 ‘삶의 행복’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철학사 개괄과 같은 요식 없이 곧바로 본론에 진입한다. 저자는 철학, 사회학, 심리학, 언어학 등의 다양한 개념들을 지표 삼아, 스스로 분류한 4개의 콘셉트, 즉, 인간이 속한 공동체를 규모에 따라 크게 '조직'(2장)과 '사회'(3장)로 나눌 때, 그 속에서 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인간'(1장)은 어떻게 '사고'(4장) 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한다.


“이제 공정한 세상 가설의 다른 문제점을 지적해 보겠다. 이 가설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주 반대의 추정을 한다. 즉 성공한 사람은 성공할 만큼 노력을 해왔다고 생각하므로 반대로 무언가 불행한 상황에 처한 사람을 보면 그런 일을 당할 만한 원인이 당사자에게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소위 ‘피해자 비난’이라고 부르는 편견이다. 실제로 세상에는 ‘자업자득’. ‘인과응보’, ‘남을 저주하면 자신에게도 재앙이 돌아온다’, ‘뿌린 대로 거둔다’ 등 약자를 비난하는 말들이 있다. 나치 독일에 의한 로마인과 유대인 학살, 또는 세계 많은 국가에서 자행되는 약자 박해가 세상이 공정한 이상, 곤경에 처한 사람은 뭔가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라는 세계관을 토대로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사실 이 책이 가진 미덕은, 실용성을 강조하며 돈 냄새를 풍기던 첫인상과 달리, 현혹되기 쉬운 레토릭으로 철학을 마치 삶의 비법노트인 양 취급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철학을 대하는 저자의 태도는 사뭇 진지한데, 특히 그가 전달하는 메시지가, 현대사회의 개인, 조직, 사회가 공히 회복해야 할 ‘인간성’에 주목한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야마구치 슈는 철학적 사유의 결과(아웃풋) 못지않게, 거기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프로세스)과 동기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결과만으로 판단하지 않고, 동기와 의도를 추정하고 규명하는 방식은, 사실 실용성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저자는 끊임없이, 세계의 고정된 원리를 의심하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듯, 우리 내면을 구축하는 경직된 사고와 가치관도 의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에드문트 후설, 에포케) 왜냐하면, 그것이 수많은 타자/약자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며(레비나스, 타자의 얼굴),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다면적 세계에 다가서는 길이기 때문이다(탈구축, 자크 데리다). 내가 이 책에 담긴 메시지를 신뢰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 있다.


이 책의 기본 스탠스는, 통상적으로 우리가 믿는 개념이 실은 ‘과학적 근거가 없다’고 설명하면서 진행된다. 똑같은 내용이라도 어떤 방식으로 말해지냐에 따라 사람들을 매료시키기도 하고, 실망시키기도 하는데, 야마구치 슈가 선택한 방식은 과학처럼 떠도는 대중의 통념과, 편견을 반박함으로써 흥미를 끌고 가는 방식이다. 이때 인간의 ‘도덕성’과, 세계를 이루는 법칙으로서의 ‘인과율’이 대표적으로 시험대에 오른다. 저자는 지금껏 우리가 참이라고 여기며 학습해온 이성, 합리성, 공정성, 안정성, 대가에 따른 생산(창작)보다 직관, 인지부조화, 불공정성, 반취약성, 자율적 생산의 중요성을 이해하는 것이 삶을 헤쳐나가는 데 좀 더 필요하다고 말한다.


결국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에서 다루는 내용을 거칠게 요약하면 이런 것이다. 인류의 진보는 자유를 향한 투쟁의 역사와 함께 했지만, 막상 ‘자유’를 획득하자 인간은 그에 따르는 불안과 책임을 감당하지 못한다.(에리히 프롬) 그 결과 인류는 전체주의와 같은 체제에 스스로를 종속시키는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인 선택을 한다. (한나 아렌트. 밀그램.) 이에 역사가 주는 교훈은 인간의 이성과 논리를 맹신하는 태도를 폐기하고 태생적 결함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이성과 합리 못지않게 직관과 감성에 주목하고(아리스토텔레스), 현실참여를 통한 주체성 회복 노력하는 등 불완전성을 보완해 나가야 한다. (사르트르) (1장) 조직의 측면에서는, 전문가나 엘리트 집단의 결정을 최고선으로 상정하는 경직성을 타파해야 한다. 다양한 분야의 다양한 의견을 수용하고, 무엇보다 개인이 조직 내에서 자유롭게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관용적인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이 시급하다. (스튜어트 밀, 호프스테더) 또한 이미 시효가 다했다면, 조직의 혁신을 위해 낡은 시스템에 종지부를 찍는 결단이야말로 혁신의 첫걸음이다.(쿠르트 레빈) (2장)


그러나 신자유주의 시대를 사는 우리가 직면한 현실은 어떤가? 성실하고 올바르게 살면 보상받는다는 믿음은 허구에 불과하며(멜빈 러너), 가족, 마을, 회사가 담당하던 공동체의 결속력이 약화되면서 자유는 풍부해졌지만, 단자회된 인간관계 속에 개인들이 느끼는 불안감과 소외는 강화되고 있다. (마르크스, 퇴니에스) 때문에 우리 앞에 놓인 현명한 선택이란, 가망 없는 회사와, 사회로부터 달아나 각자도생하는 일뿐일 때가 많다.(들뢰즈) (3장) 그러나 무슨 선택을 하고, 어떤 삶을 살든 결국은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고, 투철하게 사고하는 일로 회귀할 수밖에 없다.(데카르트) 자신의 무지와 앎을 성찰하고(소크라테스),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으며(베이컨), 사고의 폭을 좁히는 이항대립에서 벗어나(데리다), 진리라고 믿어지는 가치의 반증 가능성을 늘 열어두는 철학적 사유의 습관화(카를 포퍼). 이것이 불확실한 복잡계를 살아가는 우리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해도, 적어도 퇴보하지 않는 길이다. (4장)


나는 앞서 이 책이, 어떤 면에서는 기대에 부응하지만, 다른 면에선 그렇지 않다고 썼다. 이유는 내가 이 책이 전하는 커다란 철학적 맥락에 동의한다 해도, 과학적 자료를 철학적 개념과 연결하는 과정에는 의문을 품을만한 부분들이 다소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빈익빈 부익부와 머튼의 ‘마태효과’를 설명하기 위해서 4월생이 학업성취도와 운동신경이 뛰어나다는 통계자료를 활용하는 것은 억지스럽다. 통계를 이용해서 사회현상과 요인을 분석하려는 양적연구가 위험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저자가, 환경요소를 달리하면 전혀 다른 결과가 도출되는 탄생 월 통계와 같은 것을 대단한 실증인 양 나열하면서, 4월생의 높은 성취에 대해 ‘뭔가가 있다’라고 진지하게 서술하면 문득, 이 책에서 시도되는 전반적인 과학조사의 신뢰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학업성취도와 운동능력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아도 탄생 월보다는, 교육조건이나 유전요인에 더 큰 영향을 받을 텐데 굳이 탄생 월 통계를 불러와 4월생 우생론을 펼치다니, 저자 본인이 4월생인가, 싶어지는 지점이다. (심지어, 이 책에서 ‘연습량과 노력이 반드시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실험 결과를 제시하면서 비판하고 있는, 1만 시간의 법칙 맬컴 글래드웰은 <아웃라이어>에서 1월생이 운동신경이 두드러진다고 쓴다!) 그리고, “마태효과에 대한 옳고 그름의 논의는 제쳐두고”같은 문장도 문제의 소지가 있다. 교육지원이 뛰어난 학생에게만 집중되는 현상을 비판하는 자신의 견해만 옳으면, 연결되는 철학적 개념의 시비야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무책임한 논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터넷이 광범위하게 보급되고 능력과 니즈를 연결하는 사회적 비용이 극적으로 낮아진 시대에 이 일대일의 관계성은 정말 유지해 나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만약 자신의 능력이나 감성에 대해 희소성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가격표도 붙이지 않은 채 증여하고 답례로 약간의 선물을 받으며 살아가는 방법을 생각할 수는 없을까?”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새로운 관계망을 이례적으로 낙관하는 부분도 살펴보자. SNS로 형성된 관계가 게마인샤프트의 응집력을 상실한 현대인에게 희망이 될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고, 팬으로부터 기부금을 받아 창작활동을 하는 예술가의 탄생을 “가슴 설레”게 예감하기도 한다. 사실 이것은 예측이 아니라, 1인 미디어가 성장하면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문제는 이런 새로운 관계에 대한 저자의 판단이 본인 표현대로 다소 “순진하고 낙천적”이라는 점이다. 일단, 위 인용에서 언급된 마르셀 모스의 증여는 반드시 ‘답례’를 전제하는 관계다. 따라서 쌍방에게 필연적으로 부여되는 우위를 세심하게 고려한다면, ‘증여’의 핵심이, 주는 사람의 “건전한 만족감”“자기 효력감”같은 낭만적인 감정보다는, 받는 사람의 ‘부채감’에 있음을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일단 ‘증여’ 받으면, 저자가 언급하는 “약간의 선물”이 무엇이든 무형의 의무감이 발생하고, 종속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21세기형 ‘패트론’과도 유사할 이 같은 관계는,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으로 소통하고,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상호 간의 감정적 교환이 훨씬 직접적으로 이루어지기에, 장점 못지않게 단점도 뚜렷하다. 실제로 별풍선, 구독, 좋아요와 같은 형태로 지급되는 물리적 투자를 근거로 상대의 삶마저 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러므로 저자는, 여러 차례 언급된 인간의 무결하지 못한 도덕성을 성찰할 수 있다면, 소셜미디어의 장점을 살려 형성되는 새로운 관계의 함정 역시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이 다루는 큰 맥락에서 이런 흠결은 사소한 부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이제 남은 것은, 철학이 진실로 ‘삶의 무기’가 될 수 있느냐는 물음에 대한 대답뿐이다. 우리 사회에서의 효용성을 묻는다면, 내 생각은 꽤 회의적이다. 이 책에서 강조하는 철학적 개념과 사유가 유효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과연 타자와 약자를 이해하는 휴머니티를 수용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한지 의구심이 들어서다. 차별과 혐오가 만연하고, 세계의 다면성을 이해하려는 노력은커녕, 상대적 진실조차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 철학이 우리의 심연에 가닿을 수 있을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이 책이 전하는 철학적 지침을 마음에 새긴다면, 우리의 삶이 물리적으로 한층 고단해질 거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거운 책임이 따르고 내 이익과 멀어도 자유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인간 됨을 완성해야 하고, 올바르게 살아도 보상받을 수 없는 불공정한 사회를 원망하거나 좌절해서도 안되기 때문이다. 더불어, 정체된 조직에 순응하지 않고, “악마의 대변인”을 자처하며 옳다고 생각하는 주장을 굽히지 말아야 하며, 각성 없는 회사는 지체 없이 등질 줄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이런 주체적인 삶을 위해 개인이 “사회적 자본”“인적 자본”을 두루 쌓는 일은 어디 쉬운가. 예고된 보상이나, 성과급이 아니라, 불확정성과 자율성이 창조성을 향상시키는 게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이라도, 이 같은 저자의 제안이 경영자의 권리가 비대하고 노동환경이 선진화되지 못한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된 보상 없는 ‘자율적 노동’ 혹은 ‘열정 페이’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악용될 소지는 없을까.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를 읽는 건, 이러한 질문과 의구심을 지속적으로 던지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어쩌면 이 책에서 말하는 철학이 삶의 무기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흔히 아는 총이나, 검을 소지함으로써 능란하게 싸울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닌지도 모른다. 우리 손에 주어진 것은 차라리 부채나 피리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무기로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는 희귀한 가치를 발휘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에는 대체로 무용한 어떤 것. 이것이 철학의 현실적인 소용이리라. 그러나 최소한의 구복적 보상도 없는 세상에서, 희망을 꿈꾸는 무모하고, 불가능한 일을, 철학이 아니라면, 달리 누가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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