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삐딴 리 - 개정판
전광용 지음 / 을유문화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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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매화. 1960년 8월 사상계>


여인의 검사 결과는 이상이 없었다. 여인은 충에게 미국에서 유행하는 인공수태가 가능한지 묻는다. 충은 인공수태가 실험단계이며 시설도 구비되어 있지 않아 어렵다고 답한다.

여인은 남편이 아버지뻘 된다고 했다. 7년 째 애가 들어서지 않아 남편이 밖으로 나돌아 슬슬 애가 타던 여인은 자신에게 문제가 없다면 남편에게 문제가 있나 싶어 남편을 충의 병원으로 데려와 검사를 맡는다. 검사결과 문제는 남편에게 있었지만 여인은 이 사실을 남편에게 숨긴다.

그때부터 여인은 충에게 원시적인 방법으로라도 자신에게 임신을 시켜달라고 조른다. 충은 처음엔 거절했지만 어느 순간 비뚤어진 마음이 되어 여인의 뜻대로 해준다. 자신의 정액을 관장기에 넣어 여인의 자궁에 넣는 방법이 성공할지는 의문이었다.

충은 자기가 왜 비뚤어진 마음을 먹었는지 생각한다. 유복자에 소아마비인 자신의 처지, 사귀던 여인 선희의 이별통보 등 괴로운 기억들이 떠올랐다.

얼마 뒤, 여인이 충을 찾아와 태기가 있다며 감사의 말을 전한다. 그날 밤 여인이 충을 유혹하여 호텔에 들지만 술기운 중에도 충은 여인을 뿌리친다.

다시 충을 찾아온 여인이 인공수정은 되지 않았다고, 어린애를 낳고 싶었다고 울면서 고백한다. 충은 '참 제비도 더럽게 뽑았지. 하필이면 나 같은 것의 종자를 받으려구...... 피동이 아니라 능동으로, 이 여인에게 정확한 수태를 시켜야지' 라고 결심한다.


<초혼곡, 1960년 12월 현대문학>


서해안 작은 반도 구가곡 출신의 '나'는 T교수의 소개로 부잣집에 입주과외 선생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그 집 첫째 딸 영희는 공교롭게도 등교길에 가끔 만나 흠심을 품었던 여학생이었다.

어쨌든 막내 영식을 가르치는 1년여 동안 영희와 꽤 가까워진다. 또 문학소녀인 둘째 영숙이 '나'를 사모하는 마음도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하지만 '나'는 고백하지도 못했고, 영숙의 마음을 받아주지도 못했다. 모두가 자격지심 때문이었다.

영식이 입시에 실패하자 '나'는 도망치듯 그 집을 나와 군대에 갔다가 부상을 당한 뒤 제대한다. 그리고 얼마 뒤 우연히 영숙을 만난 '나'는 영희가 미국 유학하고 돌아온 의사와 결혼했다가 불행해져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영희는 가끔 '나'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했다.

영숙도 몹쓸 병에 걸려 시한부였다. 영숙은 '선생님만 계셔 주시면 산다'고 했지만 병은 뼛속까지 파고들었기에 나을 가망은 없었다.

'나'는 죽어가는 영숙 앞에서 왈칵 울음을 쏟는다. 그것은 '나'를 위한 울음이었다. 다만 자기 자신의 줏대 없는 왜소하고도 소극적인 자기 비굴에 대한 나 스스로의 새로운 넋을 부르는 통곡이었다. 스스로의 무덤에 항거하여 새로운 의지와 행동을 마련할 흘러간 역사에 대한 최후의 호곡이었다.


<바닷가에서 - 반편들-, 1962년 1월 사상계>


주문진에 오징어가 잡히는 철이 되자 사람 사태가 일어난다. 객줏집과 음식점 마다 일할 사람들이 몰려들어 먹고 써댔으며, 장삿집 주인들은 한껏 외상을 줬다. 하지만 태풍이 몰아치고 오징어가 씨가 마르자 일순 분위기가 바뀐다. 밀린 밥값 안 내도 되니 제발 가달라는 분위기가 되버린 것이다.

울진노인도 일하러 왔다가 하릴 없이 고향으로 되돌아갈 처지가 되었다. 명심이를 데리고 술장사하는 원산댁이 이를 듣고 딱하게 여겨 운전수에게 울진노인을 태워달라고 부탁한다. 혈기방장한 운전수는 명심이만 원하는 대로 굴면 그러겠노라 했지만, 탄광패도 명심이를 불러대는 통에 싸움이 일어난다. 그 와중에 원산댁이 다치고 다음 날 화물차는 병원에갈 원산댁과 명심이, 그리고 울진노인을 태우고 출발한다. 4.3. 때문에 타향으로 흘러들어온 제주해녀 모녀가 바다로 향했고, 학생들은 모래사장에서 산타루치아를 부르고 있었다.


<면허장 - 1962년 5월 미사일>


대학 진학을 앞둔 현숙은 고민이 많았다. 친구 영희는 체육과에 들어가 율동이나 하구 춤이나 실컷 추다가 쓸만한 놈팽이나 얻어걸려 시집가면 그만이라며 태평하게 결정했지만, 현숙은 그러지 못했다. 문학쪽을 전공하려 했지만 소설가인 아버지가 오히려 만류했다. 여자는 결혼해서 아내로 살 때 행복하다는 논리였다. 오히려 어머니가 '면허장 하나라두 타놓으면 바쁜 목에 써먹을 수 있다'며 약학과를 권유한다.

어쨌든 현숙은 약학과를 나와 약제사 면허증을 따는 데 성공한다. 그러다 보니 결혼이 늦어졌는데, 우연희 영희 결혼식에서 재회한 김선생이 중매를 선다. 상대는 국영기업체에 다니는 남자였는데, 그는 현숙보다는 약제사 면허증에 더 관심이 많아 보였다. 마치 면허장과 결혼하려는 것처럼.

집으로 돌아온 현숙은 세파의 폭풍에 대한 공포증을 스스로 과도히 예기한 결과 이해타산과 인간거래의 매개장인 면허장을 땄다고 생각한다.

얼마 후, 존귀한 가보처럼 아담한 유리액자에 넣어 현숙의 방 뒷벽에 소중이 걸려 있던, 그의 조그만 사진이 한 귀에 붙은, 약제사 면허장은 유리가 산산조각이 난 채 뜰 구석에 내동댕이쳐 있었다.


<꺼삐딴 리 - 1962년 7월 사상계>


이인국 박사의 병원은 두 가지로 유명했다. 먼지 하나 없이 청결하다는 것과, 치료비가 여느 병원의 갑절이라는 점이었다. 초진에서 병에 앞서 우선되는 것은 환자의 병원비 부담 능력 감정이었다. 거기서 탈락하면 어떻게든 환자를 따돌렸다. 외상도 절대로 안됐다. 따라서 그의 병원 주 고객은 왜정시대에는 주로 일본인, 현재는 권력층이 아니면 재벌의 셈 속에 드는 축이었다.

그가 양복 호주머니에서 18금 회중시계를 꺼내 미국 대사 브라운과의 약속시간을 가늠한다. 시계는 제국대학 졸업 때 받은 영예로운 수상품으로 <월삼 17석> 이었다.

이인국 박사는 과거를 회상한다. 아내는 거제도 수용소에서 사망했고, 아들은 모스크바 유학을 보냈는데 지금은 생사를 모른다. 딸 나미코, 아니 이제는 '코(子)'를 떼어낸 나미는 대학 영문과를 마쳐줬는데 미국 유학을 갔다가 외인교수와 눈이 맞았다. 코쟁이 사위를 보게 생겨 심사가 복잡하다. 후처 혜숙은 과거 자신의 병원에서 일하던 간호사였다.

1945년 8월 하순에 해방이 되자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타도하자는 문구가 곳곳에 걸렸다. 이인국 박사도 치안대로 끌려간다. 그 6개월 전 사상범 춘석이를 응급치료만 해주고 입원실이 없다는 핑계로 쫓아냈는데 앙심을 품은 춘석이까지 가세하는 바람에 꼼짝없이 감옥에 갇힌 이인국 박사는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된다. 하지만 감옥 내에 이질이 돌아 일손이 부족해진데다 소련 군의관들로 부터 솜씨를 인정받자 이인국은 슬며시 기회를 보아 소련군 장교 스탠코프에게 왼쪽 볼에 있는 혹을 떼내 줄 수 있다고 제안한다. 노어회화책을 끼고 노력한 덕에 어느정도 의사소통도 되었다. 마침내 수술이 성공하자 이인국 박사는 소련군 병사가 빼앗아간 시계도 되찾고 아들도 모스크바에 유학을 보낸다.

그러다 남북이 분단되자 남으로 내려온 이인국 박사는 이번엔 미국에 줄을 댄다. 상감진사 고려청자 화병을 들고 브라운을 만나러 가는 것도 그것의 연장선이었다.

'흥, 그 사마귀 같은 일본놈들 틈에서도 살았고, 닥싸귀 같은 로스케 속에서도 살아났는데, 양키라고 다를까...... 혁명이 일겠으면 일구, 나라가 바뀌겠으면 바뀌구, 아직 이 이인국의 살 구멍도 막히지 않았다' 라고 생각하는 이인국 박사였다.


<곽서방 - 1962년 10월 새나라>


남쪽 다도해 중 하나인 경도에 곽서방이 살았다. 벼 심는 논이라고는 권노인의 재너머 한섬지기와 곽서방의 아직 소금기가 다 빠지지 않은 간척지 닷말지기가 다였다. 가뭄이 계속되어 마을 사람들이 추렴쌀을 내어 돼지로 치성을 드렸지만 비는 아직이었다.

원래 곽서방의 간척지는 순돌네가 간척한 것이었지만 태풍으로 둑이 터져 도로아미타불이 되어버리자 싼값에 곽서방에게 넘긴 것이었다. 어쨌든 곽서방은 논을 소유했다는 기쁨이 컸다.

곽서방은 운산의 말이 떠올랐다. "결국 농사꾼은 제 힘으로 살아야 합니다. 남의 원조나 후원을 받는다는 것은 의뢰심만 늘게 되는 것이지 실지의 보탬은 안됩니다. 해방 15년에 정부가 농민에게 해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운산은 7년 전 섬으로 들어와 마을 주민들에게 개량농법을 알려주며 자조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농부였다.

그토록 소원하던 비가 내리자 곽서방은 운산이 알려준 방식으로 모내기를 한다. 얼마 뒤 서울 XX대학에서 자매부락을 맺는다면서 내려와 지원금을 내놓고 간다. 곽서방은 그런 지원이 고마우면서도 어쨌든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는데, 남을 의지하고 사느니보다 제 힘으로 기껏 살아나가야한다고 생각한다.


<남국 박사 - 의고당 실기-, 1962년 11월 대학신문>


학문으로나 인격으로나 존귀하고도 거룩한 존재인 남궁선생은 사학자였는데 일본인의 왜곡된 선입감에서 이루어진 기존 학설을 근본적으로 전복한 공이 있었다. 하지만 겨레니 나라니 하는 시류에 결부시키는 것은 꺼리는 학자풍의 교수였다. 그런 남궁 선생이 정년 퇴임이 단축되는 정부시책에 의해 갑자기 교단을 떠나게 된다. 남궁선생은 식장에서 '... 별로 한 일도 없이 세월만 보낸 이 사람에게 이런 기념품까지 주셔서...' 라는 말을 남겼을 뿐이다.

얼마 후 유학을 떠나기 전 남궁 선생을 찾아가니 남궁선생은 생계가 어려워 자신의 장서들을 밑천으로 동대문 시장에 헌책방을 열기로 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엄친의 <여유당전서> 를 나에게 건낸다.


<모르모트의 반응, 1964년 5월 사상계>


3대 독자인 허진의 아들 윤이 개에게 하필이면 거기를 물린다. 잘라진 살가죽을 수습해 병원으로 가면서 허진은 아내에게 불구가 되면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냐며 한탄한다. 다행히 치명적인 부분까지는 잘리지 않아 윤의 생식기능은 이상이 없도록 조치가 된다. 뒤늦게 허진은 '어디, 사람이 세상 살아나가는 데 성이나 생식이 전부랄 수는 없지 않은가...' 하고 생각한다.


<제3자, 1964년 7월 문학춘추>


석구는 최근 난희로부터 시달림을 받고 있다. 난희와 원우를 중매선 게 화근이었다. 난희는 매일같이 원우와 사네 못사네 한탄을 하였고, 종내는 이혼하겠다고 했다. 게다가 한 술 더 떠 원우가 바람난 대상이 석구의 일가인 정아라며 볶아댔다. 석구도 처음엔 어떻든 간에 좋은 해결을 보려 노력했지만 종국엔 마음대로 하라며 나가떨어지고 만다. 며칠 후 원우와 난희가 나란히 포도를 걸어가는 것을 보고 석구는 속으로 '연놈들 변덕도 참...' 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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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도에 인천에서 사촌형, 사촌누나와 함께 살 때였다. 어느 날 저녁 사촌누나가 을유사에서 나온 이 책을 사들고 왔다. 읽고 독후감을 레포트로 제출해야 하는데 대신 써주면 안되겠냐고 부탁을 했는데 써줬는지 아닌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하여간 그해 여름에 나는 사촌들과 함께 살던 집을 나와 큰형과 자취를 하게 되었고, 2~3년 뒤부터 여러가지 사정이 겹쳐 연락이 끊겼다.

그러다 지난 크리스마스 이브에 사촌누나로부터 전화가 왔다. 한 25년만인 것 같다. 잘 사냐고 묻고 의례적인 안부를 주고 받은 뒤 나중에 꼭 보자고, 지킬 수 있을지 의문인 약속을 나눈 날 저녁 이 책 생각이 나서 인터넷으로 주문해 읽었따.


작가의 두번째 창작집으로 표제작 <꺼삐딴 리>를 제외하면 신변잡기에 기반한 소설이 주종을 이룬다. 작가도 후기에서 세 편은 소품 수준에 머물고 있다고 고백하는데, 작가후기에 '그래도 이제부터 참말 써야 할 텐데......' 라고 끝맺는 부분이 뜻밖에도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1457879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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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 손홍규 장편소설
손홍규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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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멀지 않은 미래, 폐허로 변한 서울. 소년과 동생이 길을 걷고 있다. 동생은 헬멧을 쓰고 있다. 

건물은 붕괴 되었고, 짖지 않는 개들이 사람을 습격했다. 

인간은 두 부류로 나뉜 것 같다. 낮에만 활동할 수 있는 기형이 된 자들이 사람들을 습격했다.  

그리고 짐승이 있다. 짐승은 집요하게 자신이 점찍은 사람들을 뒤쫓는다.

소년과 동생이 노인을 만나고, 소녀와 여자를 만난다. 

밀려난 자들이 작은 위안을 나눈다. 그들은 어딘지 모르게 가족과 같은 느낌을 주지만, 위태롭다. 

군화 신은 암살자가 습격한다. 암살자는 소년의 칼에 찔려 숨을 거둔다.

얼마 뒤 동생이 끌려가고, 소녀가 그들을 따라간다. 짐승이 동생과 소녀를 데려간 무리를 뒤쫓고, 소년과 노인이 그 뒤를 따른다. 

여자는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깨닫고 큰 절망과 작은 희망을 품는다. 

암에 걸린 노인이 짐승을 처지하려다 목숨을 잃고, 소년 역시 군화 신은 암살자의 동생에게 살해 당한다.


서울이라는 제목만 보고 구입한 두 권의 책 중 한권이다. <서울, 어느 날 소설이 되다>에서 실망감을 맛봤다면, <서울>에서는 당혹감을 느꼈다. 

소설은, 서울이지만 서울이 아닌 곳이 되어버린 공간을 이야기한다. 영화 <28일 후>와 같은 음울한 분위기가 이어진다. 폐허가 된 서울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돌연변이가 된 자들과 짐승의 공격을 받는다. 소년과 동생이 목적지로 삼은 남쪽도 서울과 마찬가지인 상황임이 밝혀지자 그들은 서울이라는 공간에 갇혀버린다. 

작가는 서울이 폐허가 된 이유에 대해, 동생이 헬멧을 써야하는 이유에 대해, 살아있는 생명체가 죄다 기형을 낳는 이유에 대해, 함구한다. 대신 서사 중간에 노인과 소년의 짤막한 대화를 끼워 넣는다. 앞선 사람의 말을 조금씩 변주하거나 뒤틀어 묘한 울림을 내도록 고안된 대화들이다. 


소설을 끌어가는 힘은 제법 괜찮은 편이다. 독자가 궁금해 할 '이유'에 대해 일절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우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나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또, 성인남성을 배제하고 소년과 소녀, 노인과 여자로 인물을 구성한 이점도 잘 살리고 있다. 

반면, 대화가 주는 효과는 신통치 못하다. 상대편 대화를 변주하여 통찰과 인식에 이르는 효과를 원했다면 제한적으로 사용했어야 한다. 그러나 너무 자주 이런 대화들을 서사 중간에 끼워 넣는 바람에 말장난의 느낌이 강해져 피로감을 불러일으키고 만다. 

또한, 시인의 이미지를 끼워 넣는 것도 그다지 성공한 것 같지 않다. 이미지가 자연스럽에 어울리지 못하고 성기는 바람에 생뚱맞은 느낌이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145580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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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상속
키란 데사이 지음, 김석희 옮김 / 이레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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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1980년대 중반, 인도의 칼림퐁을 배경으로 시작된다. 십대 소녀 사이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소련에서 교통사고로 급사하자 얼굴도 모르는 외할아버지 댁에 맡겨진다. 

초오유라는 이름을 가진 그 저택에서 사이는 은퇴한 판사 외할아버지와 아무런 정서적 공감대도 형성하지 못한다. 하지만 요리사가 사이를 살뜰히 보살펴주었기 때문에 그럭저럭 삶을 꾸려갈 수는 있었다. 

열 여섯이 되는 해, 사이는 지안이라는 네팔인 가정교사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연애는 오래가지 못한다. 네팔 반란군들이 고르카인들의 독립국가를 세우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는데 지안이 거기에 관여하면서 지안이 변심하기 때문이다. 연애는 치졸한 양상으로 파국을 맞는다.

판사는 애정을 쏟았던 개를 도둑맞는 바람에 회복불능의 타격을 입는다. 미국에 돈 벌러간 요리사의 아들 비주는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네팔 반군들에게 털려 빈털터리가 된다. 비주는 옷까지 모두 빼앗겨 할머니들이나 입는 핑크색 파자마를 입고 초오유의 문을 두드린다. 요리사가 문을 열 때 사이는 칸첸중가의 다섯 봉우리가 황금빛으로 변하는 것을 본다. 


등장 인물들은 저마다 조금씩 일그러져 있고, 자기 지분을 주장하며 '사건의 흐름'을 만들어간다. 


사이의 외할아버지 제무바이 파텔은 옥스퍼드 대학을 나온 인텔리로 은퇴한 판사이다. 영국식 교육을 받고 서구의 우월성을 내재화한 그는 인도인을 깔봤고, 어느 날 자신의 아내도 인도인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아내가 정치적 모임에 얼굴을 드러내 자신의 입지가 불안해진 제무바이 파텔은 아내를 시시때때로 때리기 시작하다 처가로 쫓아버린다. 

사실 파텔이 영국 유학을 할 수 있었던 돈은 모두 아내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파텔은 영국에서는 인도인이라고 멸시당했고, 인도에 돌아와서는 인도인을 멸시했다. 그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길 포기한 뒤 내부망명을 하고 만다. 그가 마지막에 애정을 쏟은 것은 개와 체스였다. 


한편, 요리사의 아들 비주는 미국으로 돈 벌러 떠났다. 그는 그린카드가 없었기 때문에 제대로된 일자리를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 문화의 일부도 만끽하지 못한 채 더러운 주거지에서 벌레같이 살았다. 그가 인도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수중에는 땡전 한푼도 없었다. 


사이의 가정교사 지안은 초반엔 긍지 높은 인물인 것처럼 보이지만 후반부에 가면 심지가 굳지 못하고 새된 목소리로 짜증섞인 주장이나 내뱉다가 슬그머니 뒤돌아서고 마는 인물로 판명된다. 


그런데 이렇듯 어딘가 부족한 인물들이 칼림퐁과 뉴욕을 배경으로 불연속적인 흐름과 코미디를 만들어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사건들이 희화화되고 만다.

경찰에게 억울하게 고문 당해 눈이 먼 사람의 가족들이 파텔의 개를 보고 '돈이 되니 훔치자' 라고 결심한다거나, 반란군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를 정확히 모른다거나, 시위 중 경찰의 총격에 사람이 죽었는데도 도망가는 장면을 코믹하게 처리한다든가 하는 부분들이 그렇다. 그러고 보니 사이와 지안의 연애 역시 애틋함이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 같다. 

무거운 주제를 회피하여 기교로 얼버무리는 솜씨와 입담은 좋은데, 묵직한 맛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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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꽃다발을 흙탕물에 던져 버렸다
윌라 캐더 / 도서출판 오상 / 199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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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서부의 스위트 워터 마을 외각에 포레스터 대위 부부의 저택이 있었다. 대위는 철도 부설공사 이권을 가지고 있었고 은행의 대주주이기도 했다. 부인은 대위보다 나이가 어렸는데 기품이 넘치면서도 요염한 여인이었다.

주인공 니일 허버어트는 외삼촌 포머로이 씨 댁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 포머로이씨는 판사이자 포레스터 대위의 법률 대리인이었기 때문에 니일은 포레스터 부인을 볼 기회가 많았다.

어느 날, 니일이 동네 소년들과 포레스터 대위의 저택 주변에서 놀고 있을 때였다. 마을 개들을 독살한다고 소문 난 불량배 아이비가 소년들에게 다가와 거들먹거리더니 주머니에서 새총을 꺼내 딱따구리를 쏘아 맞혔다. 아이비는 주머니칼을 꺼내 바닥에 떨어진 딱따구리의 눈을 도려낸 뒤 다시 날려 보냈다. 가련한 딱다구리는 겨우겨우 나무 위쪽 둥지로 날아갔다. 니일은 딱다구리가 너무 불쌍했다. 차라리 딱다구리를 죽이는 것이 자비를 베푸는 것이라 생각한 니일이 나무에 오르다 발을 헛디뎌 떨어지고 만다. 심하게 다친 니일을 포레스터 부인이 간호해준다. 니일은 흥분과 긴장 속에서 자신을 간호하는 포레스터 부인의 손길과 체취를 느낀다. 아마도 니일이 느낀 최초의 여자였을 것이다.


니일은 요염하면서도 성숙한 포레스터 부인을 동경했고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을 긴장 속에서 보내곤 한다. 하지만 니일의 이런 두근거림은 곧 깨어지고 만다. 좋지 않은 소문을 달고 다니는 엘린저라는 정력적인 남성과 포레스터 부인이 부정한 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니일은 애써 신경쓰지 않으려 했지만, 가슴 속에 세겨진 진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시간이 흘러 니일은 건축기사가 되기 위해 대학에 진학한다. 방학을 맞아 고향인 스위트 워터에 돌아온 니일이 꽃다발을 만들어 포레스터 부인의 저택으로 갔을 때, 니일은 또 다시 엘린저와 포레스터 부인의 부적절한 대화를 엿듣는다. 니일은 부인을 위해 만든 꽃다발을 흙탕물에 던져 버린다.


경제공황이 찾아오고, 포레스터 대위의 은행이 파산한다. 대위는 자신의 재산을 챙길 수 있는 권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은행에 돈을 맡긴 불쌍한 고객들을 위해 재산을 헐어 보상 해준다. 대위는 스위트 워터에 있는 저택만 겨우 건진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뇌일혈까지 찾아와 대위는 굴신하기 조차 어려운 처지가 되고 만다. 포레스터 부인의 정염을 덮을 돈도, 남성의 육체도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사기꾼 같은 엘린저 마저 돈 많은 처녀와 결혼하며 부인을 떠난다.

부인은 술에 의존했고, 과거 소년이었던 니일의 친구들과 야비한 아이비에게 몸을 허락하며 타락해간다. 니일은 자신의 마돈나가 타락하는 모습을 속절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긍지높은 포레스터 대위가 허망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지켜본 뒤 대학으로 돌아간다.

고향에서는 포레스터 부인과 야비한 아이비에 관한 더러운 소문이 날아든다. 하지만 그런 더러운 소문도 외삼촌 포머로이가 사망하면서 끝이 난다.


시간이 오래 흐른 뒤, 젊은 시절을 스위트 워터 마을에서 지냈다는 낮선 남자가 니일에게 다가와 자기 소개를 한다. 그는 에드 엘리어트란라는 사람이라면서 옛 친구 포레스터 부인의 소식을 전한다. 남미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부호와 결혼해 부유한 삶을 살고 있던 그녀가 스위트 워터의 주민들 안부를 자세히 물은 뒤 부탁을 남겼다고 했다. "니일 허버어트를 만나게 되면 그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고 잊지 말고 전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이 말을 들은 니일은 먹먹한 감정을 느끼며 그녀를 꼭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하지만, 사내는 그녀가 삼 년 전 이미 숨을 거두었다고 말한다.  

그날 밤, 니일은 거리에서 산 장미꽃 송이에 비밀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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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불편하다. 불편하니까 현실적이겠지만, 현실적인 것을 굳이 소설에서까지 반복해서 확인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의미의 불편함이다.  


포레스터 대위는 스캔들에 휘말린 메리언 옴스비(훗날 포레스터 부인)의 생명을 구해줄 뿐만 아니라, 결혼한 뒤에는 일체 과거를 묻지 않는다. 대공황 시기에는 은행이 파산하자 다른 대주주들과 달리 자신의 채권과 주식을 처분하여 고객 지분으로 돌려놓는다. 

이토록 긍지높은 인물을 작가는 뇌일혈에 걸리도록 하여 성적, 신체적 기능을 박탈시킨다. 그런 뒤 그의 아내 포레스터 부인을 건달, 양아치, 얼치기들과 어울리도록 하여 타락하도록 만들고, 주인공의 시선으로 이를 낱낱히 지켜보도록 한다.

긍지높은 인물과 주인공은 요염한 포레스터 부인의 신체에 근접하지 못하도록 한 뒤, 온갖 시정잡배들이 기품있는 부인을 유린토록 하는 이 구성이 어떤 효과를 위함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사디스트적인 구성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873년 버지니아 윈체스터 태생인 윌라 캐더는 서부 개척시대에 관한 소설을 주로 썼다. 본 작품은 원제 <A Lost Lady>로 오상출판사가 펴낸 책 표지에 퓰리처상 수상작이라고 씌여 있으나 이는 출판사의 농간이고, 실제 수상작은 1922년에 발표한 <One of Ours>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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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속 소녀
도나토 카리시 지음, 이승재 옮김 / 검은숲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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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쇄적인 산악 마을에서 애나 루 라는 10대 소녀가 크리스마스 이브 날 실종된다. 소녀의 부모는 지역 종교 공동체 내에서 제한적인 교우관계만 맺어 왔기 때문에 특별한 원한 관계가 없었고, 애나 루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흐르고, 애나 루의 부모와 시골마을 주민들은 이 사건이 단순실종 사건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다. 

스타형사 포겔은 사건에 투입되자 마자 매스컴을 불러 인터뷰를 자청한다. 단순실종이 아니라 납치사건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매스컴을 통해 주장함으로써 대대적인 예산 증액을 가져오기 위함이었다. 최신장비와 인력을 확보한 포겔은 능숙한 솜씨로 소녀 주변을 훑기 시작하고, 그 결과 소녀를 스토킹하던 마티아의 존재를 알게된다. 조사 결과 마티아는 용의선상에서 제외되지만, 마티아가 스토킹하면서 찍어댄 동영상은 전혀 다른 용의자를 지목하고 있었다. 낡은 흰색SUV를 타고 다니는 교사 마티니였다.

포겔은 쾌재를 불렀다. 매스컴을 통해 사건을 굉장히 자극적으로 각색하는데 성공한데다, 확실한 용의자 마티니까지 확보했으니 과거 '손가락 테러리스트 사건'에서 범한 과오를 덮고도 남을 것이었다.

사실 포겔은 과거 '손가락 테러리스트 사건' 때 증거를 조작했었다. 과자 제조일자가 피의자가 수감된 이후라는 점이 들통나 조작이 걸렸을 때 부하직원을 희생시켜 빠져나오긴 했지만 의심의 눈초리는 계속 따라다녔다. 문제는 그때 사건을 알고 있는 시골 마을의 고지식한 검사가 영장발부를 거부한다는데 있었다. 포겔은 또 다시 증거조작 유혹에 빠져든다.

애나 루의 가방에서 발견된 마티니의 혈흔이 결정적 증거가 되어 체포영장이 발부된다. 매스컴은 이미 언론재판을 통해 마티니를 범인으로 확정짓고 있었고, 마티니의 가족조차 그를 떠난 상태였다. 그로기상태에 몰린 마티니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때, 은퇴한 기자가 마티니가 범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결정적 증거를 공개한다. 빨간머리에 주근깨를 가진 소녀가 주기적으로 실종되던 사건과, 그 사건을 다룬 홈페이지. 그리고 동영상.

매스컴이 쳐 놓은 덫에 포겔이 걸려들고, 마티니는 누명을 벗는다.


사건이 벌어진 지 62일 째 되던 날, 62세의 정신과 전문의 플로레스가 한밤중에 병원으로 불려나가 포겔 형사와 면담하게 된다. 포겔 형사는 교통사고를 일으켰고, 차에 혼자 타고 있었으며, 다친 곳도 없다고 주장하며 공허한 눈빛으로 의사를 쳐다본다. 그렇다면, 그의 옷에 묻은 피는 누구의 것인가?


도나토 카리시는 1973년생으로 이탈리아 남부 마르티나프랑카 출신이다. 범죄학과 행동과학의 전문가이고 '폴리뇨의 살인마'라 불리는 연쇄살인범 루이지 키아티에 대한 논문을 썼다고 한다. 1999년부터 10년간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다가, 2009년 자신이 실제 참여한 사건을 소재로 집필한 <속삭이는 자>로 데뷔, 이탈리아에서만 250만부를 팔아치웠다. 프레미오 반카렐라 상 등을 수상한 이 작품은 이후 세계적으로 600만부 이상 팔렸고, 후속작들도 속속 영화화되는 등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스릴러 작가이다.


<안개 속 소녀>는 자극적인 것만 쫓는 추악한 매스컴과 부패한 경찰이 만나 한 사람의 시민을 파괴해가는 과정을 그린 내용이다. 서술을 쫓아가는 독자의 긴장을 끊임없이 유지시키는 작가의 능력은 꽤나 능수능란하다. 또한 반전도 그럴싸하다.

그런데도 이 작품에 마냥 후한 점수를 주기가 망설여지는 이유는, 독자를 대상화시키기 때문이다. 독자는 어떤 식으로든 작품에 참여하고 싶어하고, 특정 인물과 공감하고 싶어한다. 물론, 작품과 독자의 거리를 일부러 멀리 떨어뜨려 놓는 작가도 있지만, 그 경우에도 독자는 작품 속 누군가와 시선을 공유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안개 속 소녀>는 이 모든 것을 뒤죽박죽으로 섞어 놓았다.

희생자 애나 루는 처음부터 희미해서 동정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주인공 격인 포겔의 행위는 시간이 지날수록 역겨움을 불러일으킨다. 마티니 역시 촉이 좋은 독자라면 그를 전적으로 지지하지 못할 것이며, 매스컴과 종교공동체와 정신과 의사, 그리고 이웃들 모두가 악당이거나 그에 준한다.

결국 독자는 긴장감을 갖고 책을 읽긴 하지만, 관찰자도 몰입자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로 작가가 마련한 결론까지 함께 가게 된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1446763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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