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갇힌 외딴 산장에서 히가시노 게이고 산장 3부작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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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노리쿠라 고원에 소재한 펜션 '사계'에 연극 오디션 합격자 일곱 명이 모인다.

그들은 연출가 도고 신페이가 편지로 지시한 바에 따라 모인 것인데, 편지에는 '모임 사실을 외부인은 물론, 다른 단원들이나 사무원에도 일절 발설하지 말 것', '내용에 관한 질문은 일절 받지 않음' 따위의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이 펜션에서 할 일은 간단했다. 펜션이 기록적인 폭설로 외부와 단절되었다고 가정하고 앞으로 일어나는 일에 잘 대처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행동은 작품의 일부로서 대본과 연출에 반영될 것이고, 만약 전화를 사용하거나 외부 사람과 접촉하면 오디션은 즉시 취소될 것이라 했는데, 단원들은 도고 신페이가 괴팍한 성격이었으므로 일종의 엽기적인 실험이라고 여겼다.

펜션 책꽂이에는 <그리고 아무도 없게 되었다>, <Y의 비극>, <그린 살인사건> 등 등장인물이 한 사람씩 죽어나가는 고전 미스터리가 꽂혀 있었기에 참여자들은 살인사건이 일어날 것이고, 누군가는 탐정, 누군가는 범인의 역할을 맡게 될지도 모른다고 막연히 추측했다.

그런데 예상대로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하는데 처음엔 연극이라고 여겼던 사건들이 점차 실제처럼 진행되자 일동은 혼란에 빠지고 만다.

가사하라 아쓰코 - 모범생 타입, 연출가 도고 신페이와 내연관계라는 소문

모토무라 유리에 - 연기력 보다는 미모 덕을 보는 타입, 재력가의 딸

아마미야 교스케 - 모범생 타입, 모토무라 유리에와 약혼했다는 소문

혼다 유이치 - 연극에 대한 열정이 뛰어나고 우직한 성격

다도코로 요시오 - 경박한 성격으로 모토무라 유리에에게 집적댐

나카니시 다카코 - 전형적인 백치미 스타일이지만 때로 핵심을 짚어내는 발언

구가 가즈유키 - 나머지 여섯 명과 달리 수호 극단 사람이 아님. 냉철한 성격.

처음에 가사하라 아쓰코가 살해당했고, 모토무라 유리에가 뒤를 이었다.

두 명이 사망한 뒤 또 한 명의 연극단원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아사쿠라 마사미라는 연기력 좋은 단원이었다. 그녀는 줄리엣을 연기했는데 빼어난 연기에도 불구하고 모토무라 유리에의 미모에 밀려 오디션에서 탈락했다. 그 직후 그녀는 스키를 타고 활강하다가 다쳐 하반신 마비가 되었는데 사실은 자살 시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과연 그녀와 이번 사건이 연관이 있는 것일까?

마지막으로 아마미야 교스케가 살해당한 뒤 구가 가즈유키는 사건의 비밀이 알아냈다며 일동을 레크레이션실로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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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쿠라 마사미는 오디션에서 탈락한 뒤 실의에 빠져 연극을 그만 두기로 하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가사하라 아쓰코, 모토무라 유리에, 아마미야 교스케가 그녀의 집으로 와 위로하지만 아사쿠라 마사미는 냉담하게 반응한다. 아쓰코는 도고 신페이와의 관계 덕에, 모투무라 유리에는 재력과 미모 덕에 오디션에 합격했다고 생각했기에 그들의 위로가 진심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게다가 우연히 엿들은 그들의 대화도 아사쿠라 마사미의 의구심을 뒷받침 하는 내용이었다.

화가 난 아사쿠라 마사미는 그들의 차 타이어에 구멍을 내 골탕을 먹이려 한다. 그런데 그들이 떠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쓰코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걸려온다. 차가 굴러 유리에와 교스케가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아쓰코는 후회하며 자살을 시도하고, 그 결과 하반신 불수가 되고 만다.

하지만 뒤늦게 모든 것이 아쓰코의 장난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아사쿠라 마사미는 극심한 복수심에 사로잡히고, 그녀를 남몰래 흠모하던 혼다 유이치에게 세 명을 죽여달라고 부탁한다.

혼다 유이치는 살해 대상인 셋을 죽이는 장면을 아사쿠라 마사미에게 보여주면 그녀의 복수심도 누그러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하여 세 명에게 연극을 제안하고 무대를 펜션 '사계'로 설정한 것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은 걸작부터 망작까지 스펙트럼이 다양한데 데뷔 이후 점점 그 수준이 하락세인 것 같다. 초기 학원물과 가가 시리즈, 탐정 갈릴레오 등은 꽤 괜찮은 작품이 많은데 그 이후 과학을 가미한 작품들은 대부분 실망스럽다. 이번 작품도 평균 수준 이하이다.

미스터리 작가가 가장 공을 들여야 하는 부분은 수수께끼 풀이가 아니라 범행 동기이다. 바로 이 범행 동기가 독자에게 공감을 얻었을 때 독자는 작품에 몰입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동기가 억지스럽다. 그러다 보니 수수께끼 풀이도 조악하고 작위적이다.

'눈 덮인 산중의 펜션에 모인 젊은이들' 이라는 설정만으로도 미스터리 독자라면 두근두근할 법 한데, 그 설정 자체부터 가짜였으니 애초에 작품은 망작으로 방향을 잡고 출발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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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신도들 버티고 시리즈
오스틴 라이트 지음, 김미정 옮김 / 오픈하우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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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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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사 교수 해리 필드는 은퇴 후 문화센터에서 사이비 과학에 대해 강연하고 틈틈이 집필작업을 하며 소일하고 있다. 어느 날 손녀 헤이즐의 친부 올리버 퀸이 찾아와 '딸과 잠깐 놀이터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부탁한다. 해리는 찜찜한 마음이 들었지만 친부의 부탁을 거절할 수도 없어 허락한다.

하지만 올리버 퀸은 그 길로 헤이즐을 데리고 밀러 농장으로 향한다. 밀러는 자신을 재림한 신이라 했고, 올리버는 그 말을 믿었다. 그는 어린 딸 헤이즐을 공동농장에 데려가면 밀러도 좋아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동행한 닉 포스터는 올리버가 시키는 일이면 뭐든지 하는, 다소 지능이 떨어지는 청년이었다.

해리는 뒤늦게 손녀가 납치 당했다는 것을 깨닫고 딸 주디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경찰과 FBI에게 신고했지만 그들은 적극적인 대응을 해주지 않았기에 해리를 멘토로 생각하고 주디에게도 마음이 있는 데이비드 레오가 영웅노릇 할 기회라 생각하여 직접 밀러 농장에 찾아간다.

올리버 퀸은 데이비드 레오가 찾아오자 당황하면서도 그에 대한 증오심을 해소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는 흑인인 데이비드가 딸의 의부가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기에 닉을 시켜 원거리에서 저격하기로 한다. 폭포수를 지날 때 저격에 성공하면 데이비드의 시신이 추락할 것이고, 그러면 총상에 의한 것인지 추락과정에서 생긴 것인지 모를 상처가 만들어질 것이었다.

한편, 밀러 농장의 실무 책임자 격인 제이크 루머는 밀러가 어린 딸을 납치해 농장으로 데려온 일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납치와 관련해 연방경찰이 개입하면 골치아픈 일이 생기리라 우려했기 때문이다.

밀러는 올리버 퀸이 데이비드 레오를 저격하려는 사실을 알아채고 닉을 속여 총을 쏘지 못하게 단도리한 후 자신이 직접 올리버를 저격해버린다.

밀러 농장은 어린 헤이즐을 뒤늦게 찾아온 해리와 주디에게 돌려준다.

그런데 예상치 못했던 것은 닉의 반응이었다. 닉은 자신의 스승이 사망한 것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누구든 올리버 퀸의 사망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피를 원했다. 루머는 우둔한 닉을 속여 올리버 퀸을 죽인 것이 데이비드 레오라고 믿게 만드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데이비드 레오를 죽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재판이라는 명목으로 데이비드 레오를 외딴 섬으로 납치한 뒤 영원히 섬에 가두어 둔다는 식으로 닉을 설득하고, 실행한다.

데이비드 레오는 섬에 갇혔다가 간신히 빠져나오는 데 성공한다. 그는 자신이 왜 이토록 위험한 일에 뛰어들었었는지 다시 생각해본다. 그는 아무런 성공보수도 받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물론 주디는 그에게 섹스를 허락할 것처럼 얘기하긴 했다. 하지만 실제 잠자리를 가진 것은 아니다. 그는 점차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만난 여성들 중 한 명과 잠자리를 갖게되고, 되돌아 와서도 주디와 소원하게 지내다가 옛 연인에게 돌아가버린다.

그즈음 닉은 루머에게서 버림 받고 스승도 없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복수에 골몰하고 있었다. 문제는 누구에게 왜 복수해야 하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는 점이었다. 그는 해리 교수를 찾아가 그를 살해하려 한다. 하지만 해리에게 설득당해 그를 죽이는 것을 포기한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어쩌면 죽어야 될 사람은 루머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닉은 해리에게 반복해서 루머를 죽이겠다고 말을 하고, 해리는 오지랖을 발휘해 닉을 설득하려 한다. 끝내 밀러 농장으로 가겠다는 닉을 가면서 설득하기로 한 해리는 그러나 밤 사이 사라진 닉이 루머 뿐만 아니라 밀러까지 살해했다는 사실에 경악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도망쳐 나온 여성은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점성술에 경도된 예전 애인 레나였다.

사건이 수습되고 일상으로 돌아온 해리는 다시 대학원생들을 데리고 과학적 글쓰기 세미나를 개최한다. 거기에 모인 사람은 12명이었고, 다들 명석한 사람들이었다. 12명의 제자는 해리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다들 헌신과 믿음을 맹세하는 표정으로 해리의 정신세계로 떠나는 난해한 여행에 동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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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다소 엽기적인 납치 사건으로 시작된다. 독자는 손녀의 납치라는 이 사건이 어떤 식으로 해결될 지 궁금해하며 줄거리를 따라가게 된다. 그런데 의외로 손녀 납치 문제는 올리버 퀸의 사망과 함께 싱겁게 끝나 버린다. 그러면서 새로운 의문이 제기된다. 과연 광신자들은 누구인가?

처음에 떠오르는 광신자는 당연히 올리버 퀸이다. 그는 밀러를 재림한 신이라고 생각했으며, 딸을 납치해다 공동체에 바친다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을 실행에 옮긴 자다.

그런데 닉은 어떠한가? 그는 모자란 지능을 가진 청년으로 올리버 퀸이 하는 말은 무엇이든 믿고, 따라서 사람을 죽이라는 명령도 여과 없이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닉도 광신자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데이비드 레오는 또 어떤가? 데이비드는 해리를 멘토로 생각하고 주디라는 백인 여성과 섹스하기 위해 무모한 모험에 뛰어들어 영웅노릇을 하고 있다. 그 역시 일종의 광신적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밀러가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와, 해리가 제자들을 대하는 태도에 극적인 차이점이 있을까?

해리는 자신이 죽음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고, 신이 없다는 것도 이해했으며, 타인을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죽음과 적극적으로 화해하지도, 밀러의 사기를 입증해 옛 애인을 구원하지도, 닉의 살인 행위도, 그 어느것도 막아내지 못한다. 책 말미에 해리가 12명의 제자를 모아놓고 세미나를 하는 장면은 예수와 12명의 제자를 연상시킨다.

"예전에는 저 위 왕좌에 오른 신이 있다고 했다. 만약 저 위에 신이 없다면, 내가 왕좌에 올랐다고 주장해도 누가 막을까?"

아이러니하게도 광신적인 행동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인물은 밀러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신이 없으므로 신을 사칭해도 아무런 벌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그의 행동이야 말로 선악을 떠나 가장 이성적인 행동이었는지도 모른다.

카노사의 굴욕을 떠올려 보라. 교황이 스스로 신의 대리인임을 내세워 왕을 파문하면, 신으로 부터 버림 받은 왕은 백성들에게 공격받게 된다. 누가 교황에게 파문의 권한을 주었을까? 그 권한이 권능을 갖을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일까? 가장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무신론자에게 광신도들이 권한과 권능을 부여하면 이와 같은 멋진 연극이 상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림 예수를 자처하는 수많은 자칭 신과, 과학을 신봉하며 절대 진리를 설파하는 지식인들의 행동 양태는 종국에 구별하기 어려운 양태를 띠게 되는 것이다.

교회 목사들이 진정 신을 믿고 두려워한다면 저렇게 높은 첨탑을 세우고, 헌금을 거둬들이고, 자식을 그 돈으로 유학보내고, 끝내 편법으로 세습까지 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들은 신이 없다는 것을 백퍼센트 확신하기에 그런 짓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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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에서 온 편지 범우 사르비아 총서 646
펄 벅 지음, 김성렬 옮김 / 범우사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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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1950년 9월 25일, 버몬트의 산악 지방 한 마을에 사는 리즈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그녀는 북경에 있는 남편으로부터 올 편지를 기다린다.

리즈는 레드클리프 대학교 4학년이던 때에 남편 제럴드 맥레오드를 처음 만났다. 첫눈에 그에게 반한 그녀는 적극적인 태도로 구애했지만, 제럴드는 자신이 중국인 혼혈이라는 이유로 부담스러워했다. 리즈의 어머니도 제럴드를 편견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그 모든 시련을 극복하고 리즈는 제럴드와 결혼했고, 북경으로 가서 행복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에 공산주의 물결이 밀려 들었다. 미국인인 제럴드와 리즈는 공산당원들에게 백안시 되었다. 상황이 점차 안 좋아지자 제럴드는 리즈와 아들 레니를 미국으로 보내고, 자신은 대학 총장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학생들과 남는 쪽을 선택했다. 상황이 호전되면 다시 함께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별은 세계정세가 냉전으로 치달으면서 항구적인 것으로 변해간다. 맥레오드의 편지는 몇 달에 한 번 띄엄띄엄 왔고, 그나마도 검열되어 내용이 삭제되어 있었다.

고통의 시간동안 리즈의 아들 레니가 성장하여 연애를 하게 된다. 하지만 레니 역시 1/4은 중국인의 피가 흐른다는 이유로 첫사랑에서 실패를 경험한다. 한편, 리즈는 남편과의 추억을 조금이나마 떠올리기 위해 시아버지 맥레오드 노인을 집으로 모시고 와 극진히 보살피지만 그마저 치매에 걸리고 만다.

아들이 집을 떠나고, 시아버지가 치매에 걸려 리즈의 외로움이 한층 더해갈 무렵 북경에서 매란이라는 여자로부터 편지가 온다. 그녀는 남편 제럴드가 공산당의 의심스런 눈초리를 피하기 위해 현지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불가피하게 되었다며 허락을 요구했다. 리즈는 어쩔 수 없이 다른 여자와 남편이 결혼하는 것에 대해 동의해 줄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흘러 크리스마스가 다가왔다. 떠나갔던 아들이 진정한 사랑을 찾아 결혼을 하게 되었고, 리즈에게도 구애하는 남자들이 생겨났다. 시아버지는 치매에 뇌졸중이 겹쳐 끝내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북경으로부터 온 마지막 편지에 제럴드가 북경을 탈출하려다가 발각되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남편의 죽음으로 인해 리즈는 슬펐고, 자신을 찾아오기 위해 탈출을 감행했다는 사실로 인해 안타까움이 뒤섞인 기쁨도 느꼈다.

그리고 시아버지가 중국인 여인과 결혼하고, 그 여인을 진실로 사랑하지 않아 그녀가 혁명가가 되고, 그 아들과 사랑에 빠진 자신이 또 혼혈인 아들을 낳은 것, 그리고 지금 그 아들이 죽어버린 일들에 대해 리즈는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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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렸을 때 삼성출판사 판으로 <대지>를 읽었다. 세계명작이니, 노벨상이니 하는 타이틀을 단 책은 당연히 어렵고 지루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인생의 드라마에 푹 빠져 밤을 세운 책은 그 뒤로 딱 한 권이 더 있는데 미우라 아야꼬의 <빙점>이다.

<북경에서 온 편지>는 작가의 개인적 체험과 세계정세를 적당히 직조해 만든 자전적이고 고백적인 글인데 딱히 드라마로서 성공적이지도, 관점에 공감도 가지 않는다.

펄 벅은 다분히 오리엔탈리즘에 경도된 시각을 곳곳에서 드러내고, 천품에 따른 인간의 품격 차이를 강조하는 등 요즈음 주장했다간 큰일 날 소리들을 해댄다.

리즈는 레니의 첫사랑인 알레그라에 대해 그녀는 '별로 바라는 것도 없는 평범한 남자, 책을 읽지 않고 경음악이나 들으며 서부 활극에 열광하는 남자나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여성'이며, '그 사람들의 마음은 컵 하나 정도의 크기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이와 반대로 자신과 남편, 아들은 하버드에 다녔거나 진학할 예정이고, 책을 읽는 사람들로 속물들과 다른 계급에 속해 있다고 이해한다.

중국 현대사에 대해서도 꽤나 편향된 시각을 갖고 있다.

이를테면 리즈는 제럴드의 어머니가 혁명가가 된 이유를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해 방황하다가 그렇게 되었다'고 평가하는가 하면, 그녀의 오빠 한유렌이 친일행위를 한 것을 두고 '...반역자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그 분은 자신의 신념을 최선을 다하여 행동으로 옮긴 것으로 믿고 계셨단다. 아마 그분이 그러지 않았더라면 북경도 쑥대밭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야...' 라는 해괴한 논리를 늘어 놓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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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심판 1
도나토 카리시 지음, 이승재 옮김 / 검은숲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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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남성이 외딴 집에서 쓰러진다. 예레미아 스미트라는 이름의 이 남자는 의식을 잃기 직전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응급실 당직의 모니카가 남성의 집에 도착한 뒤 심폐소생술을 위해 그의 윗옷을 풀어 헤쳤는데, 그의 가슴에 "나를 죽여라" 라는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던 모니카는 '금색 가죽 끈이 달린 빨간색 롤러스케이트'를 발견한다. 그 스케이트는 살해된 쌍둥이 동생 테레자의 것이었다. 모니카는 연쇄살인마의 생사여탈권을 쥐게 된 상황이다.

소설은 여러가지 사건이 연이어 나오고,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는 구성으로 목차에 유의해서 읽지 않으면 길을 잃기 십상이다.

일단 산드라 라는 여형사와 그의 남편 다비드의 이야기가 있다. 다비드는 르포 사진작가였는데 6개월 전 사고로 사망한다. 하지만 인터폴 형사 샬버라는 사람이 산드라에게 남편의 사망은 단순 사고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함에 따라 산드라가 다비드의 죽음을 추적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관자놀이에 흉터가 있는 사람(마르쿠스, 사면관)과의 접점이 생긴다.

다음으로, 과거의 미해결 사건들이 등장한다. 미해결 사건의 피해자에게 누군가가 진범을 알려주는데, 사면관의 소행으로 보인다. 일단 사건은 다음과 같다.

첫번째 사건은 소설 초입에 등장하는 응급실 당직의 모니카가 복수 기회를 맞게 되는 사건이다. 모니카는 그 순간에는 복수를 선택하지 않고 그를 살려낸다.

두번째 사건은 여성이 불륜남과 함게 침실에서 살해된 사건이다. 문제는 여성이 살해된 뒤 어린 아들이 한 집에서 이틀 간 시체와 함께 생활했다는 점이다. 아들은 장성한 뒤 범인을 찾기 위해 애를 썼지만 쉽지 않았다. 현장에 남겨진 EVIL이라는 글자와, 삼각형 모양의 표식 때문에 더욱 그랬다. 하지만 최근 그에게 누군가 접근해서 범인은 아버지 귀도 알티에리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아들은 아버지를 쏘아 죽이고 복수를 한다.

세번째 사건은 가위로 여성들을 살해해서 <세빌리아의 이발사> 주인공 피가로의 이름을 부여받은 사건이다. 범인은 하반신 마비를 가장한 피해자의 오빠였다. 이 사건은 허위자백자가 범인이 되어 복역중이었는데, 뒤늦게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 피에트로 치니에게 누군가 진범을 알려주면서 수면 위로 다시 떠오른다. 이제는 장님이 된 피에트로 치니는 피가로를 집으로 유인한 뒤 전기를 끊어 어둠 속에서 그를 살해한다.

네번째 사건은 외과의사와 조직폭력배가 아이를 납치해 살해한 뒤 심장을 자신의 손자에게 이식한 사건이다. 역시 누군가가 아이의 어머니에게 범인을 제보하고 어머니는 복수를 위해 나서지만 사면관 마르쿠스의 설득으로 복수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면관이란 어떤 존재인가. 그들은 교황청 내사원 소속으로 12세기경 조직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고해를 통해 알게된 죄들 중 Culpa Gravis(대죄)에 해당하는 건에 대해 개입하는 것이다.

네 건의 살인의 진범을 알려준 사람은 바로 예레미아 스미트이며, 그 역시 사면관 중 한 명이었다. 응급실 당직의에게 진범(자신)을 제공하는 것 역시 예레미아 스미트 자신이다. 석시닐콜린을 스스로 주사하고, 가슴에는 '날 죽여라' 라는 문신을 세겨 피해자인 응급의에게 복수 기회를 제공했는데 예상과 달리 응급의는 그를 살려낸 것.

이상 네 가지 사건은 액자 속 이야기이고(현재) 마르쿠스라는 사면관과 카멜레온 살인자의 이야기(지난 1년간)가 액자 바깥 이야기이다. 산드라와 다비드, 샬버의 이야기는 추적자와 액자 바깥 이야기를 이어주기 위한 사이드 에피소드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추적자 역시 사면관인데 카멜레온 살인자를 추적한다. 카멜레온 살인자는 우크라이나에서 디마라는 소년을 최초로 죽이면서 살인에 빠져든다. 그는 살해한 사람을 완벽하게 카피해 신분을 탈취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살해하고 신분을 탈취한 사람이 마르쿠스이다. 그런데 공교롭게 관자놀이에 총상을 입으면서 카멜레온 복제 이전의 삶을 모두 잊고 자신을 마르쿠스라는 현재 모습만 기억하면서 살게 된 것이다.

한편 인터폴의 샬버형사의 정체가 추적자이며 그 역시 카멜레온 능력을 가진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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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가톨릭은 신부에게 죄를 고백하고(고해) 이를 통해 죄사함을 받는 구조이다. 이 소설은 바로 이 시스템에 착안하여 쓰여진 소설이다.

소설을 읽다보면 역사상 가장 많은 범죄기록을 보유한 곳이 어디인지 묻는 대목이 나온다. 만약 고해성사를 통해 알게된 범죄사실을 기록으로 남겨두었다면 아마도 바티칸일 것이다.

그런데 고해를 한다고 모든 죄를 사해주는 권능이 신부에게 주어진 것이 맞을까? 여기서 내사원이라는 조직이 등장하고, Culpa Gravis(대죄)에 대해서는 개입하여 해결을 한다는 설정이 나온다.

문제는 사면관들이 악을 접하고, 악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자신들도 경계선 너머로 끌려가는 일이 빈번히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모순적인 상황 때문에 소설에서는 현재 공식적으로 내사원이 해체되었다는 설정이다.

한편 고해 시스템에는 한 가지 딜레마가 있다. 죄를 지은 후 기억을 상실한다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이다. 고해를 하려해도 죄 지은 기억이 사라져버려 그게 불가능하다면 '죄 지은 후 기억상실'은 곧 지옥행 100% 당첨이다.

어쨌든 소설은 지나치게 많은 사건과 잔기교의 남발, 복잡한 구성으로 난잡한 느낌이 들 정도이다. 사건 해결 과정도 너무 작위적이어서 '이렇게 까지 꼬아야 하나'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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램프속의 여자 - 포켓북 한국소설 베스트
이순원 지음 / 일송포켓북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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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겨울, 화자 은수는 강릉에 살았다. 아버지가 한량처럼 밖으로 떠돌았으므로 어머니가 집안 단속을 했다. 그래도 집안에 돈은 좀 있어서 밥 먹고 사는 것은 큰 어려움이 없었다.

은수 집 일을 도와주는 기숙이네 언니가 시집가기 전날이었다. 가마꾼으로 나선 동네 총각들이 은수 집에서 하룻밤 자게 되었다. 그네들은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고, 화투를 쳐가며 밤을 세웠다. 그러다 트럭 운전 하는 운래가 노은집이라는 처녀를 데려왔다. 운래는 그녀를 구슬러 욕구만 채운 뒤 집으로 돌아가버리고, 나머지 사내들도 그녀를 윤간했다. 은수는 이 모든 것을 옆방에서 소리죽여 보게 되었다.

1978년 겨울, 은수는 '특자'로 전방 배치 되었다. 시위에 참여한 탓에 강제징집 당한 것이다.

동계훈련 중 대대장이 시찰을 나왔는데 황중사가 다방 여자를 섭외해 대대장 텐트에 집어 넣어 주었다. 은수는 보르헤르트의 <맑고도 맑은 눈> 때문인지, 아니면 다방여자의 존재가 드러나길 바랐는지, 보초를 서다 공중에 대고 총을 쏘았다.

은수가 오발사고를 일으킨 벌로 헌병대 영창을 다녀오니 '애인이 면회를 왔다 갔다'고 했다.

일주일 뒤에 다시 찾아온 '애인'은 어렸을 적 옆집 살던 기숙이었다. 기숙이는 서울에서 시다 살이를 하며 고단한 하루하루를 보내다 아버지 병원비 등을 감당하기 어려워 나이 든 남자의 후처로 일본에 팔려가는 길이었다.

기숙은 어렸을 적 동경했던 은수를 마지막으로 보고 들어가면 일본에서의 삶을 좀 더 잘 견뎌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1988년 겨울, 은수는 은행 사보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다. 권위주의 국가의 검열이 사보에까지 미쳐 일은 재미 없었다. 올림픽이 끝나고 바야흐로 남한 땅은 감추어져 왔던 성적 쾌락과 부도덕이 공개적으로 허용된 '로코코의 시대'로 접어든 것 같았다.

바로 그 시기에 서른 넷의 기숙이 돌아온다. 남편이 죽고, 꽤 많은 유산을 받은 기숙은 서울에 엠파이어 클럽이라는 술집을 냈는데 개업식 전날 나를 초대한 것이다.

기숙은 담담하게 일본에서의 생활, 아버지 병수발한 일, 동생 사고친 문제 들을 이야기했다. 기숙이는 그러다 어렸을 적 은수가 공장으로 가는 기숙이를 바래다 주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은수는 그때 기숙이에게 공장에 심을 고향 잔디를 떠 주었고, 기숙이는 500원을 나에게 주면서 엄마에게는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다. 큰돈이라면 큰돈이었는데 기숙이는 은수가 그 돈으로 책도 사보고 했으면 싶었던 것 같다.

기숙이는 고단한 생활을 견디기 위해 은수를 생각하곤 했다는 말을 그렇게 돌려 돌려 이야기했다.

1998년 겨울, IMF가 몰아친 남한 땅에서 은수는 전업 작가가 되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기숙이는 기숙이대로 시집을 가서 강릉집이라는 식당을 차렸는데 장사가 그럭저럭 잘 되었다.

그 집에서 고교 동창회를 하던 중 아르바이트생이 은수의 명함을 받아가더니 얼마 뒤 작업실로 찾아왔다.

여자애는 노골적으로 성을 팔 눈치를 비췄지만 안될 말이었다. 여자애는 운래형의 딸이었다. 여자애를 혼내고 작업실에 하룻밤을 재운 뒤 돈을 주어 보내려니 그제서야 여자애가 술에 취해 저간의 사정을 털어놓는다. 가출한 뒤 주유소에서 일한 일, 주유소에서 남자애들 세 명한테 윤간 당한 일, 그 뒤로 되는 대로 몸을 주면서 돈을 얻어쓴 일 들을.

은수는 1968년 겨울 노은집이라는 이름의 여자를 떠올린다. 램프 불빛 아래에서 상처입은 몸을 닦고 방에 들어올 때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 떠나가던 여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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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에 <순수>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작품을 손을 보아 <램프 속의 여자>로 다시 내놓은 작품이다. 작가는 1968년 부터 1998년 까지 10년 단위로, 눈 내리는 어느 겨울 저녁 눈 속의 외롭고 슬픈 한 여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는 이를 통해 우리가 살아온 각 시대의 성의 사회사를 탐구하여 시대의 이면을 살펴보고 성 의식 변화를 추적하려는 목적으로 썼다고 한다.

노은집, 기숙, 운래의 딸은 모두 비슷비슷한 길을 걷는다. 남자들에게 윤간당하거나, 성을 팔아 아버지와 남동생 뒤치닥거리를 하거나. 그들은 한여름 햇빛 아래의 사람들이 아니라 한겨울 램프 불빛 속의 희부윰한 존재이다.

그런 여성들을 위로하고 함께하는 것은 은수같은 인텔리겐차가 아니라, '정기옥', '금초' 따위의 글자밖에 쓰지 못하는 우직한 욱태 아저씨거나, 은수가 말을 걸면 부끄러워 자리를 피해주는 현재의 기숙 남편과 같은 사람이다.

이런저런 클리셰의 남발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진지함과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역량 덕분에 소설은 몰입도 있게 읽힌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3232707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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