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우나는 JTBC 안 봐요 - 2017년 제13회 세계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박생강 지음 / 나무옆의자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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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태권은 20대 후반 한 일간지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뒤 3년간 소설을 썼다. 하지만 생계 유지가 안 되서 논술학원 강사를 전전하다 이마저도 여의치 않아 이제 막 신도시 부촌의 중심에 위치한 헬라홀 피트니스 사우나의 매니저로 취직한 터다.

회원권이 3천만원에 달하는 고급 회원제 사우나에서 태권이 해야할 일이란 하품이 날 정도로 단조로운 일이었는데, 수건과 운동복을 가지런히 개서 보충하거나, 반 남은 로션 두 개를 합해 하나로 만드는 일 따위였다.

힘든 것은 일의 내용이라기 보다 그곳에서 자신이 '갑'을 떠받드는 '병'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었다.

그곳의 회원은 부로만 따지면 대한민국 1% 내에 속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정점에 있다고 보기는 어려운 사람들이었는데, '권력'의 중심부에서 얼마쯤 밀려났기 때문이었다. 이미 퇴직을 했거나, 국회의원 뱃지가 더 이상 자신의 옷깃에 달려있지 않은 그들은, 그런 이유로 나이대도 오늘 내일 하는 지경인 경우가 많았다.

헬라홀 피트니스 사우나도 조금은 그런 느낌이었다.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최고급 시설이 아님이 드러났다. 천장은 곰팡이가 피어서 시커맸고, 운동복과 양말의 고무줄도 조금씩 늘어나 있었다.

정점을 찍고 내려오는 노령의 1%와, 이제 막 벼락부자가 되어 그들에 합류하려는 신진 1% 사이에서 태권은 한없이 무료한 세월을 보낸다.

처음엔 1%만을 위한 허위의식을 내면화하는 데 저항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무감동하게 그런 상황을 관조하게 되고, 완전히 타성에 젖어들기 직전에 그곳을 빠져나온다.

고장난 시계가 하루 두 번 시간을 맞추듯이 JTBC가 옳은 소리를 할 때가 아주 잠깐 있었는데 그 즈음 출간된 소설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몇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대학에 들어간 해에 상문고 사태가 터졌다. 선배가 사학 비리에 대한 대자보를 쓰다가 '연고대를 나와도 취직이 안 되는' 이라는 문구를 썼다. 그래서 왜 서울대는 안 넣어요, 했더니 '서울대는 왠지 취직이 될 것 같아서...'라고 말했다. 헬라홀 사우나는 작가에게 있어서 '연고대' 느낌의 사우나 같다.

작년에 집에 물이 샜다. 부족한 기술 대신 업자는 말이 많았고, 실패에 대한 완벽한 변명거리를 가지고 있었다. 소설 말미에 작가는 태권과 소설가인 자신을 대면케 한 뒤 '관찰만 한 것'에 대한 변명을 늘어 놓는다. 그래서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씨워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는 싯구가 생각났다. 소설가가 소설로 말하지 않고 후기나 인터뷰로 변명을 늘어 놓는 일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다. 하물며 소설 속에 본인 등판이라니.

박진규 이름을 쓰던 당시 발표한 <수상한 식모들>에서도 '소설에 대해 공감하려 했지 분석하려 하지 않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역사인식과 철학의 빈곤에 따른 분석과 비판의 부재를 '공감'이나 '관찰' 이라는 이름으로 윤색하는 것 아닌가 의심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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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의 토토
구로야나기 테츠코 지음, 이와사키 치히로 그림, 권남희 옮김 / 김영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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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토토가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직전 고바야시 소사쿠 선생님이 운영하던 일종의 대안학교 '도모에 학원'에 입학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토토짱은 기존 학교에서 책상 뚜껑을 하루에 100번 이상 열었다 닫았다 하는가 하면, 선생님 말씀을 듣지 않고 창가에서 지나가는 친동야(이상한 복장을 하고 악기를 울리면서 거리를 돌아다니며 선전하는 사람) 아저씨를 부르는 등, 요새라면 ADHD 판정을 받았을 법한 행동을 해서 퇴학 당한다.

엄마는 이런 토토짱을 데리고 지유가오카 역 부근에 있는 도모에 학원에 데리고 가는데 교장 선생님인 고바야시 소사쿠 선생님은 그런 토토에게 '무슨 얘기든지 좋으니까, 얘기하고 싶은 것 전부' 얘기해 보라고 한다. 토토는 순서도, 말투도 뒤죽박죽이었지만 여러가지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고, 4시간이나 걸린 끝에 모든 얘기를 마칠 수 있었다. 교장선생님은 토토의 얘기를 모두 들어준 뒤 토토의 머리에 크고 따뜻한 손을 올려놓으며 "자, 이제부터 넌 이 학교 학생이다" 라고 입학을 허가해 준다.

도모에 학원은 교문이 나무 두 그루였고, 교실은 전차였다. 학교는 소아마비, 발달장애, ADHD를 가진 아이들도 아무런 장애가 없는 것처럼 생활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된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점심은 '산과 들과 바다에서 나온 것'을 싸오도록 했고, 혹시라도 모자라다면 교장선생님의 부인이 채워주었다. 오전 수업은 여러가지 과목 중 좋아하는 과목 먼저 시작해서 자율학습과 선생님의 도움을 병행했고, 오후에는 산책을 하는 등 자연에서 뛰어놀았다.

교가가 없으면 즉석에서 교가를 만들어 보는가 하면, 신체적 장애가 있는 아이들도 자신의 몸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도록 모두가 알몸으로 수영장에 뛰어들기도 했다. 여름방학엔 학교에 텐트를 치고 야영을 했고, 친구들과 다 함께 이즈로 온천여행도 갔다.

토토는 매일 매일 학교가는 것이 즐거웠다. 도모에 학원의 어린이들은 한 사람의 인격체로 대접받았기 때문에 자신이 진정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타인과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하는지 등을 자연스럽게 배워 나간다.

어린이들은 옷이 찢어지는 것을 염려하지 않고 마음껏 뛰어 놀아야 하므로 '가장 허름한 옷을 입혀서 학교에 보내'달라는 교장선생님은 학교 운동회도 신체적 결함이 있는 아이들이 좀 더 유리한 경기들로 구성했기 때문에 가장 키가 작은 다카하시가 다수의 종목에서 일등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언제까지고 평화롭고 즐거울 것만 같았던 토토의 어린 시절은 소아마비를 갖고 있는 친구 야스아키의 죽음, '조센징'이라는 욕을 하도 많이 들어 '조선인'이라는 단어 자체가 욕이라고 착각하고 만 마사오짱의 이야기, 사랑하는 개 로키와의 이별 등을 겪으며 차츰 슬픈 색채를 띠게 된다. 그러다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으로 도쿄가 공습당한 끝에 도모에 학원에 불이 나면서 끝이 난다.

작가 후기에 따르면 도모에 학원은 1937년 부터 1945년 까지 운영되었다고 한다. 교장인 고바야시 선생님은 '어떤 아이든지 갓 태어났을 땐 선하게 마련이므로 이 선한 기질을 일찌감치 찾아 그걸 키워주며 개성 있는 사람으로 자라게 해야 한다'는 것을 교육 철학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는 '어린이를 교사의 계획에 맞추지 말며 자연 속에 풀어놓아야 한다'고 했는데, '교사의 계획보다는 어린이들의 꿈이 훨씬 크기 때문' 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증오와 혐오를 반복적으로 주입당해 세대간, 성별간, 국가간, 민족간 갈라치기가 횡행하는 지금, <창가의 토토>는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가꿔 나가야 하는지, 나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어린이들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줘야 하는지 같은 근본적인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이다.

물론, 책을 읽는 동안 동심으로 돌아가 나도 도모에 학원과 같은 학교를 다녔다면 얼마나 신나게 생활했을까 하는 신나는 상상도 덤으로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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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가미 일족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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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슈(信州) 재계의 최고 우두머리이자 일본 생사(生絲)의 왕이라 불리는 이누가미 사헤(犬神左兵衛). 그는 어려서 고아가 된 뒤 17세에 나스에 흘러들었다. 거지꼴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지경의 이누가미 사헤를 노노미야 다이니라는 신관이 거두어준 덕에 그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이 때 다이니의 나이는 42세였고, 그의 처 하루요는 22살이었다.

이누가미 사헤는 용모가 빼어났고 영특했기 때문에 다이니는 그를 총애했다. 그런데 그 총애의 정도가 지나쳐 남색의 정을 나누었다는 소리도 있었다. 그 이유로 한 때 하루요가 친정으로 돌아가는 등 불화도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사헤가 집을 나가자 불화는 곧 해소되고 부부 사이도 좋아진 듯 다이니와 하루요는 몇 년 후 노리코라는 아이를 얻게 되고, 그 노리코가 또 손녀를 낳으니 그녀가 바로 다마요이다. 사헤는 은인인 다이니와 하루요가 죽자 손녀인 다마요를 데려와 애지중지하며 키운다.

그 이누가미 사헤가 이제 80세의 일기로 나스 호반에서 영면에 들기 직전이다. 딸 내외와 자녀, 그리고 다마요 등이 지금 초조하게 사헤의 유언을 기다리고 있다.

이누가미 사헤에게는 마츠코, 다케코, 우메코라는 딸만 셋 있었는데, 세 사람 다 생모가 달랐고 누구도 사헤의 정처가 아니었다.

큰딸 마츠코에게는 외아들 스케키요가 있었는데 전쟁에 끌려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둘째딸 다케코는 스케타케와 사요코 남매를 두었고, 막내인 우메코는 외동아들 스케토모를 두었다.

초조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큰딸 마츠코가 사헤에게 유언을 재촉하지만, 사헤는 별다른 말 없이 변호사 후루다테를 가리키고 사망한다. 후루다테는 가족 모두가 돌아오면 그때 유언을 발표하라는 유지가 있었다고 말한다. 이제 스케키요의 귀국만 기다릴 뿐이다.

사헤 옹 사후 8개월 정도 지난 10월 후루다테 변호사 사무실의 직원 와카바야시 도요이치로가 긴다이치 코스케에게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 같다며 사건을 의뢰한다. 긴다이치 코스케는 의뢰를 수락하고 10월 18일자로 나스시에 도착해 여관에 짐을 풀고난 뒤 호젓한 마음으로 호수 풍경을 내다본다. 그런데 바로 그 때 한 여인이 보트 위에서 구조를 요청하며 소리를 질러댔다. 바로 다마요였다. 서둘러 배를 저어 다마요를 구한 뒤 그녀가 탔던 보트를 조사해 보니 밑바닥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여관으로 돌아온 긴다이치 코스케가 이번에는 종업원의 비명소리를 듣는다. 와카바야시 도요이치로가 독이 든 담배를 피워 사망한 채 발견된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뒤, 큰손자 스케키요가 드디어 귀환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마츠코가 스케키요를 데리러 도쿄로 갔다. 하지만 모자는 어쩐 일인지 금방 돌아오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고 마침내 돌아온 스케키요는 얼굴에 가면을 쓴 채였다. 사람들은 그가 스케키요가 맞는지 의심했다. 스케키요는 좌중의 독촉에 어쩔 수 없이 가면 일부를 들어 올렸는데 거기에는 무화과처럼 붉게 벌어진 살덩이가 있었다. 전쟁 중 상처를 입은 스케키요의 얼굴을 가리기 위해 생전 모습과 똑같은 고무 가면을 만드느라 시일이 지체되었다는 마츠코의 말에 좌중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유언이 발표된다. 그런데 이 유언은 실로 기묘하다 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하나, 이누가미 가문의 모든 재산, 즉 모든 사업의 상속권을 의미하는 이누가미 가문의 세 가보 요키(도끼), 고토(거문고), 기쿠(국화)는 다음 조건 하에 노노미야 다마요에게 물려준다.

하나, 단 노노미야 다마요는 그 배우자를 이누가미 사헤의 세 손자, 스케키요, 스케타케, 스케토모 중에서 골라야 한다. 다른 배우자를 고를 경우 상속권을 상실한다.

하나, 손자 중 누군가 결혼을 거부하면 상속 권리를 포기한 것이 된다. 또, 셋 모두 사망할 경우 다마요는 의무로 부터 해방되어 아무하고라도 결혼할 자유를 얻는다.

하나, 노노미야 다마요가 사망할 경우 재산은 5등분 하여 3명의 손자에게 1/5씩 주되, 2/5는 아오누마 기쿠노의 외아들 아오누마 시즈마에게 주기로 한다. 등등.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헤 옹의 은인인 다이니의 손녀라고는 하나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다마요가 유산을 모두 상속한다는 조항도 그랬지만, 다마요가 사망한 경우라도 세 손자의 몫은 아오누마 기쿠노의 외아들 아오누마 시즈마 보다 못한 것이 된다.

마치 유언은 다마요를 지키고, 세 손자를 반목하게 하기 위한 목적을 품고 있는 듯 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아오누마 기쿠노는 누구인가. 그녀는 사헤 옹이 50이 넘은 무렵 좋아했던 여인이다. 그녀는 사헤 옹의 공장에서 일하던 여공이었는데, 그의 총애를 받아 사내아이를 낳는다.

그런데 이 일이 세 딸의 분노를 불러 일으킨다. 자신들의 어머니를 성욕 해결의 도구로만 여겼던 사헤에 대한 원한도 깊었지만, 이제 와서 엉뚱한 여인이 낳은 아들을 후계자로 지목한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세 딸들은 기쿠노를 찾아가 행패를 부린다.

그녀들은 사헤 옹이 준 가문의 가보 요키, 고토, 기쿠를 빼았고 한겨울에 발가벗긴 기쿠노의 몸에 물을 뿌리고 구타했다. 어린 아이 시즈마의 엉덩이를 쇠로 달군 부젓가락으로 지지면서 잠적을 종용하니 기쿠노는 겁에 질려 시즈마가 사헤 옹의 아이가 아니라는 거짓 진술서 까지 써준 뒤 모습을 감춘다.

그런 그녀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저주가 반드시 요키, 고토, 기쿠와 관련하여 복수하겠다는 말이었다. (공교롭게도 '요키고토기쿠'를 연이어 읽으면 '좋은 소식을 듣다'라는 뜻이 되니 아이러니하다 아니 할 수 없다)

어쨌든 기묘한 유언이 발표된 직후부터 이누가미 가문에서는 사헤와 기쿠노의 원념이 실현되기라도 하듯 살인사건이 잇달아 일어난다.

제일 먼저 사망한 것은 스케타케였다. 다마요 역시 스케키요의 진위 여부를 의심했던지 스케키요에게 교묘한 핑계를 대어 시계에 지문을 찍게 하였는데, 이 시계를 가지고 스케타케를 찾아가 지문 비교를 부탁했던 것이다. 하지만 다마요와 헤어진 직후 스케타케는 누군가에게 살해당한다. 게다가 목은 국화인형의 목과 바꿔치기 되고, 몸통은 호수 밑바닥에 가라앉혀지니 그 행태가 사뭇 엽기적이었다.

한편, 스케타케의 사망 즈음 나스 하류의 한 여관에 야마다 산페이라는 수상쩍은 귀환병이 나타난다. 그 역시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얼굴을 감추었고, 상당히 허둥대는 모습을 보여 여관 주인에게서 의심을 산다. 게다가 얼마 뒤 이 귀환병은 다마요의 방에 침입해 어떤 물건을 찾다가 발각되기도 하는데 스케타케의 살인사건과 귀환병은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을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이런 상황이니 마츠코와 스케키요는 전날까지만 해도 본인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지문 찍기를 거부하다가 스케타케가 사망하자 의심의 눈길을 더 이상 비껴갈 수 없다고 의식해서인지 지문 찍기에 동의 한다. 지문은 스케키요 본인이 신사에 남기고 간 무운장구 헝겊에 찍힌 지문과 일치했고 이로써 사람들은 진위에 대한 의심을 거두게 된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다마요만은 이 결과에 대해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했다.

다음으로 사망한 것은 스케토모였다. 그는 다마요를 꾀여내어 겁탈을 시도하다 미수에 그친 뒤 풍전촌의 빈 집에서 사망한 채 발견된다. 특이할 만한 사항은 그의 몸에 밧줄을 풀기 위한 흔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망한 시체에 묶인 밧줄은 매우 단단하게 감겨 있었다는 점이다. 마치 한 번 풀려났다가 다시 묶인 것처럼 말이다.

또한 그의 목에 감긴 줄은 거문고 줄이었으니, 이로써 기쿠(국화)에 이어 고토(거문고)와 관련한 살인이 일어난 셈이다.

잇따른 죽음은 기쿠노의 저주를 연상 시켰고 묻어 두었던 비밀들이 하나 둘 봉인을 풀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사헤 옹과 다이니가 동성애를 나누었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려진 바이지만, 이후 사헤와 다이니의 부인인 하루요가 불륜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도 밝혀진다. 다이니는 애초에 동성에 대해서는 미약하나마 성욕을 느꼈지만 이성에 대해서는 불능이었던 듯 하다. 그래서 사헤와 하루요의 불륜을 일정 부분 방조하기 까지 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헤와 하루요가 낳은 딸이 다시 결혼해 아이를 낳으니, 그 아이가 바로 다마요이다. 그러므로 다마요는 사실 사헤의 친 손녀가 되는 셈이었던 것.

마지막으로 발견된 시체는 스케키요였다. 스케키요는 얼음에 거꾸로 쳐박혀 있었는데 하반신만 드러난 상태였다. 스케키요가 거꾸로 박혔으니 '요키케스'이고 반만 박혀 있으니 '요키(도끼)'가 되는 셈.

그러나 감식 결과 시체는 스케키요가 아닌 것으로 밝혀진다. 손도장이 달랐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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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월부터 1951년 잡지 <킹>에 연재된 <이누가미 일족>은 <팔묘촌>과 더불어 영화와 드라마로 끊임없이 재생산 되며 인기를 구가하는 작품이다.

소설은 이누가미 사헤라는 재계의 거물이 사망하면서 기묘한 유언장을 남기는데, 이 유언장을 둘러싸고 엽기적이 살인이 벌어지는 내용이다.

작품의 주조는 공포와 미스터리인데 그 이면에는 제2차세계대전이라는 세계사적 비극이 자리하고 있다. 전쟁에 끌려간 일본 젊은이들은 명분도 모르는 채 죽음을 강요 당하는가 하면, 패전이 자신의 무능력에서 기인했다고 생각하며 괴로워하기도 한다.

이러한 절망적인 전쟁 속에서 이누가미 사헤의 친아들 아오누마 시즈마와 손자 스케키요가 만나게 된다. 둘은 극심한 고통과 공포 속에서 헤묵은 집안간 원한을 잊고 친하게 지내며 서로를 의지한다. 하지만 시즈마는 전쟁 중 얼굴에 심한 상처를 입게 되고, 스케키요는 분대가 전멸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스케키요는 살아남지만 분대를 전멸시킨 책임이 본인에게 있다고 생각하여 귀국이 늦어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이누가미 가문의 기묘한 유언이 발표되자 얼굴이 상한 시즈마는 스케키요가 이미 사망했다고 판단하여 스케키요 행세를 하게 된다. 같은 핏줄이라 그런지 얼굴과 체격도 많이 닮았던 것이다.

뒤늦게 귀국한 스케키요는 이 사실을 알고 자연스럽게 교체를 하려 했지만 시즈마가 얼굴이 망가진 상태라 바꾸는 것이 불가능했다. 게다가 스케키요의 어머니 마츠코가 스케타케를 살해하는 장면을 목격한 시즈마가 스케키요를 협박하며 자신이 이누가미 가문의 모든 유산을 차지하겠다고 선언하자 스케키요는 이에 따를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결국 진범인 마츠코는 별 생각 없이 살인을 저질렀지만, 진범도 모르는 사후 공범 시즈마와 스케키요가 요키, 고토, 기쿠와 관련된 살인이라는 식으로 뒷처리를 하는 탓에 사건이 꼬이고 복잡해진 것이다.

소설은 1976년 이치가와 곤에 의해 영화화 되어 또 다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는데 영화는 2023년 현재에 봐도 꽤나 연출이 섬세하고 구성이 치밀하여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영화에서는 이누가미 사헤가 제약왕이라는 설정으로 등장해 마약을 취급한 것으로 바뀌어 있는데, 전쟁 중에 군부에 납품하였다는 내용을 곁들여 전쟁에 내몰리는 젊은이들이 히로뽕을 지급받고 자살특공대 임무 등을 수행했다는 암시를 준다.

또한 거문고 스승이 시즈마의 어머니 기쿠노라는 설정은 없애고 용의자를 압축하는가 하면 마츠코가 죽기 전 사요코에게 유산을 좀 나누어주라고 부탁하는 장면 등은 과감히 생략하는 등 영화적 설정에 충실하다.

긴다이치 코스케 역의 이시자카 코지가 머리를 벅벅 긁는 모습이나 과도한 리액션은 이후 여러 영화나 드라마에서 트레이드 마크처럼 사용된다. 긴다이치 코스케라는 인물을 꽤 잘 살려냈다.

한편, 영화의 히로인 시마다 요코(다마요 역)는 이후 쇼군, 하얀거탑 등 굵직한 작품에 출연하고 아시아인으로서는 최초로 골든글러브 여우주연상을 시상하는 등 승승장구 하지만 말년에 빚에 쫓겨 AV 촬영을 하는 등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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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의 팬더
타쿠미 츠카사 지음, 신유희 옮김 / 끌림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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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트로 스타일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시바야마 코타가 아내 아야카와 결혼식에 참석한다. 식장은 하버처치였는데, 코타가 이 결혼식에 참석한 이유는 교회에 딸린 식당 때문이었다. Cuisine de Dieu, 신의 요리라는 뜻의 이 식당은 2007년 자가트 서베이(zagat survey) 간사이판에서 당당하게 1위에 오른 식당이다. 제공된 요리는 과연 코타가 감탄할 만큼 맛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의 경영자가 전설적인 요리평론가 나카지마 히로미치이고, 쉐프는 그가 직접 발굴한 이시구니 츠토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데 결혼식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마츠노 쇼지라는 사람이 살해된 채 발견된다. 마츠노 쇼지는 기노시타 운수의 사업부장이었고, 기노시타 운수는 나카지마 히로미치의 사위인 기노시타 요시아키가 운영하는 통관업체였다.

사건 직후 기노시타 요시아키 역시 행방이 묘연했기 때문에 용의자는 즉시 기노시타 요시아키로 좁혀진다.

아오야마 형사는 용의자의 행적을 조사하다가 신코 물산이라는 거래처가 떠오르자 기노시타 운수가 이 회사를 통해 밀수를 한 것이 아닌지 의심한다.

하지만 나카지마 히로미치의 딸 나카지마 유리도 행방불명되자 경찰 주류는 유산상속 다툼설로 기울게 되어 수사는 두 방향으로 진행된다.

얼마 뒤 결혼식을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은 새신부 아야카 마저 실종되고, 아오야마 형사는 미식에 빠진 나카지마 히로미치와 뱅상 신부, 요리사 이시구니 츠토무 등이 워싱턴 조약으로 보호되고 있는 동식물을 밀수해 요리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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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타쿠미 츠카사가 실제 조리사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근무하는 등 십 년 넘게 다양한 요식업에 종사한 경험이 소설에 잘 녹아들어 있다. 그래서 요리에 관한 묘사와 설명히 상당히 디테일 하고, 이런 세밀함이 미스터리와 결합된 점이 높게 평가 되어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대상을 수상했다.

금지된 식재료의 마지막 단계는 인육이기에 미미극식회 회원들이 무엇을 먹었을지 독자가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미미극식회 회원들은 미식 외 어떠한 욕망도 없는 자들로, 뱅상 신부는 경찰으로부터 극구 도망가려한 이유가 인육을 맛보고 싶다는 욕구였고, 나카지마 히로미치는 자신의 딸과 며느리를 요리의 대상으로 볼 뿐이다.

이들은 북극곰과 같이 멸종 위기의 동물들을 요리해 먹다 급기야 '인간의 맛은 어떨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되고, 나카지마 요시아키에게 인간 식재료를 조달해오라는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나카지마 요시아키는 인간 식재료인 마츠노 쇼지를 살아있는 채 데려오는 데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죽은 재료도 가져오지 못했다.

이에 이시구니 츠토무는 나카지마 요시아키를 식재료로 삼아 요리를 한다. 하지만 인간 식재료에 대한 정보가 충분치 않아 냄새를 잡고, 맛을 내는 데 실패한다.

그래서 제2 제3의 실험체로서 나카지마 유리, 기노시타 마키 등을 사용한 결과 나이가 어릴 수록 육질이 연하고 냄새가 적다는 사실을 깨닫고 태아야 말로 최고의 식재료라 판단하는, 인간 말종이나 할 법한 생각을 하게 된다.

<금단의 팬더>라는 제목은 팬더가 대나무를 먹는 초식 동물임에도 불구하고 초식에는 필요 없는 날카로운 이빨을 갖고 있는데다가 고기를 주면 기뻐하며 먹는다는 사실에서, 사실은 팬더가 동족을 잡아먹은 데 대한 벌로 초식을 하게 된 게 아닌가 하는 발상을 담은 제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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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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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엄청난 열로 인해 녹아내린 후, 식물과 동물은 멸종 상태에 이른다. 태양은 빛을 잃어 대기는 식어갔고, 공기중엔 재들이 날아다녔다. 살아남은 인간들은 생존하기 위해 서로를 죽였고, 끝내 식인까지 서슴치 않는 단계에 이른다.

이런 절망의 세상에서, 한 사내와 그의 아들이 남쪽으로 방향을 잡고 카트에 생필품을 담은 채 걷고 있다. 아내는 '날이 원자 두께 밖에 안'되는 흑요석으로 자살했다.

길을 걷던 처음엔 카트에 소년의 책과 장난감도 몇 개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생존을 위한 물품 외엔 소지하지 않게 된다.

길 위에서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사내는 그들에게 희망을 걸지 않았다. 선의를 믿고 내민 손을 거절 당하는 끝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내는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데 아주 인색했다. 소년은 그때마다 울었다.

때로 사람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대량의 통조림이나, 안온한 안식처를 발견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 곳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자신들이 느끼는 평온함과, 풍족한 식량이 그들의 목숨을 재촉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인가 사내는 외딴 집에서 지하실을 발견한다. 숨겨진 식량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문을 연 사내와 소년은 그곳에서 끔찍한 광경을 목도한다. 벌거벗은 사람들이 가축처럼 감금되어 있었고, 그 가운데에는 허벅지까지 다 잘린 남자가 누워 있었다. 누군가가 고기를 얻기 위해 그들을 가축처럼 가둬둔 것이다.

그리고 어느 곳에서인가 사내와 소년을 피해 급히 길을 떠난 자들이 남겨둔 화톳불에서 꼬챙이에 꿰어진 어린아이를 발견하기도 한다.

마침내 목적한 바닷가에 이르렀을 때 사내는 세상의 끝에 왔다고 느낀다. 그곳에는 기대했던 것과 달리 난파된 배와, 잿빛 바닷물 밖에 없었다. 사내는 앓기 시작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죽고, 소년은 사흘을 머문 뒤 한 남자를 만난다. 소년은 남자를 따라 한 그룹에 속하게 된다. 여자가 소년을 두 팔로 끌어안으며 반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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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폐허가 된 세계를 보여준다. 남자는 남쪽, 바닷가 등 막연한 희망을 상정하고 소년을 데려가지만 그곳에서 좌초한 스페인 선박을 발견하고 절망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그래야 한다고 믿는 세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사내는 죽는다.

사내는 자신이 죽게 된다면 이 절망의 땅에 소년만 남겨두고 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죽음을 목전에 둔 사내는 그렇게 할 수 었었다. 그리고 소년은 사내가 죽은 뒤에도 살아간다. 또 다른 사람을 만나고, 또 다른 희망을 품은 채.

어쩌면 남자는 그 자신이 소년에게는 외계인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이해한 것인지도 몰랐다. 이제는 사라진 행성 출신의 존재. 그 행성에 관한 이야기는 수상쩍었다. 아이를 기쁘게 해주려고 자신이 잃어버린 세계를 구축할 때마다 그것을 잃어버렸다는 사실도 함께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를 낳고 키워보면 세상이 얼마나 절망적인지, 얼마나 불안정한 토대 위에 서 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아버지는 자신이 가진 모든 지식과 힘을 동원해 아이를 세상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발버둥 친다. 때로 내가 없다면 아이는 어떻게 될까 생각하면 불안함에 잠을 이룰 수 없을 지경이다.

코맥 매카시가 그리는 폐허와,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바라보는 지금 이 세상은 그다지 다를 것이 없다. 살기 위해 타인의 살을 잘라 고기를 취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매일같이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거나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타인을 밟고 올라서려 한다. 그리고 그런 경쟁에 익숙한 자들은 좀 더 자신들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그룹을 만들고, 권력을 독점하고, 계급을 구분하며, 타인을 착취한다.

부모는 이러한 절망적인 세상에 아이만 남겨 놓고 떠나지 않기 위해 희망을 찾아 끊임없이 방황한다. 그러나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부모가 그리는 희망이 아이에게는 '이제는 사라진 행성'의 먼 옛날 얘기처럼 들릴 뿐이다.

하지만 결국 아이는 아이의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아이가 태어난 지금 이 폐허가 아이의 전 세계다. 부모가 없더라도 아이는 세상에 부딪히고 구성원으로 편입된다. 아이가 식인을 하는 살인자를 만날지, 아니면 소설에서처럼 선한 그룹을 만날지는 모르지만, 살아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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