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 - 2003년 제48회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조경란 외 지음 / 현대문학 / 2002년 12월
평점 :
품절



당장은 읽지 않더라도, 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사서 모아두는 것은 마음 든든한 일이다. 해당 년도의 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읽으면, 그 해로 여행을 떠날 수가 있다. 이번에 여행을 떠난 해는 2002년이다. 제목은 <2003년도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이지만, 작품이 발표된 해는 2002년이다. 


조경란의 <좁은문>은 전당포 주인, 그리고 까페의 높은 천장에서 그네를 타는 여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여자가 들고 오는 것들은 가짜 금반지 따위이다.  여러가지 질감이 소설 속에 흩뿌려져 있고, 안개처럼 뿌옇고 답답한 느낌은 계속된다. 그제서야 작가의 <식빵 굽는 시간>의 자의식 충만함도 거북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나는 봉천동에 산다>는 좀 더 사실적이다. 하성란의 <웨하스로 만든 집>이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동네'라는 곳이 해체된 뒤 우리 모두는 유목민들처럼 살고 있다.

박정규의 <타블로 비방 혹은 비너스의 내부-작품번호1>는 제목만 읽고 타블로의 학력 위조 의혹을 떠올렸는데, 전혀 관계 없는 소설이었다. 타블로 비방(Tableux Vivants)은 '살아 있는 그림' 의 의미쯤 되는 모양이다. 제목에 대한 주석이 달려 있는 소설은 또 처음이다. 내용은 아내가 쓴 소설을 읽고 아내와 옆 집 남자의 불륜을 의심하는 이야기다. 물론 소설은 소설일 뿐이었다. '현실'과 '모사된 현실' 사이의 긴장에 대한 소설.

이나미의 <봉인>은 작가가 졸업한 모스크바의 고리끼 문학대학을 배경으로 한 듯한 소설이다.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 지느라 모든 것을 희생한 주 선생이 50줄이 넘어서 러시아로 유학을 온다. 가족들의 반대를 설득하지 못해 의절까지 한 주 선생은 최소한의 생활비만으로 처절하게 공부에 몰두한다. 하지만 그는 기숙사 뒤편 호수에서 익사하고 만다. 화자는 자신의 이웃, 우체국을 명퇴하고 이혼당한 뒤 홀로 쓸쓸하게 죽어간,의 죽음에서 주 선생을 떠올린다. 소설 쓰기 좋도록 두 개의 죽음이 공교롭게 교차한다. 작위적이다.

오수연의 <마니아>는 정신병에 걸린 아파트 주민 때문에 모두의 삶이 피폐해져 가는 과정을 세밀한 필치로 묘사한다. 읽다보면 자연스레 감정 이입이 되어 정신병에 걸린 여자에 대한 증오를 품을 지경에 이른다. 그런데 소설 제목이 왜 <마니아> 일까?

윤성희의 <누군가 문을 두드리다>의 주인공은 하루키 소설에서 빌려온 듯, 심상하다. 원래는 시청 공원녹지과에서 근무했고, 수종 선택에 센스를 발휘한 덕에 인정도 받지만, 곧 웃사람들 집에 심을 나무를 부풀린 것이 들통 나 짤린다. 대신 그 웃사람들은 주인공에게 공원 한켠에서 자전거 대여점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다. 심상한 주인공은 동생들이 남기는 물건을 중고품으로 파는데, 사연이 있어야 물건을 산다고 한다. 그 외에 사건들도 그저 이미지로 남을 뿐, 소설은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의 아류작 같다.

정미경의 <나릿빛 사진의 추억>은 꽤나 흥미롭다. 어느 날 사진을 현상하니 옛 여자친구의 나체가 찍혀 있다. 별 생각 없이 여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재미있는 사진을 현상했는데 돌려주랴 물었더니, 찢어서 없애달라 한다. 시키는 대로 했더니 다시 전화가 걸려온다. 사진과 필름을 돌려달라는 것이다. 없애버린 것을 어찌 돌려주냐 하니, 이번엔 조폭들이 찾아온다. 여자친구가 결혼하기로 한 새 남자친구가 전화 내용을 들은 뒤 사진 회수에 열을 올리는 것이다. 그가 정말로 사진을 회수하는 것이 목적인지, 아니면 자신의 힘을 확인하는 것이 목적인지는 뻔하다. 이제 다시 옛 여자친구를 불러다 새로 사진을 찍어서라도 돌려줄 수밖에 없다.

정영문의 <파괴적인 충동>은 최수철의 소설을 연상시킨다. 아버지는 죽을 병에 걸렸고, 화자는 쥐를 테니스 채로 내려쳐 죽인 뒤 여자친구와 여행을 떠난다. 여행지에서 불량한 애들에게 걸려 돈을 뜯긴 뒤, 여자친구만 먼저 돌려보낸다. 되돌아온 주인공은 치과 병원에 들린 뒤, 그 좋았던 기분으로 아버지의 병실에 들러 생명연장 장치 제거에 동의한다. 그 뒤 다시 테니스코트에 간 주인공은 파괴적인 충동을 느낀다. 예전엔 이런 소설을 읽으면 각각이 의미하는 바를 억지로라도 짜맞춰 말이 되도록 하는데 시간을 할애했는데, 이제 그런 짓이 피곤하다.

박완서의 <그 남자네 집>은 <너무도 쓸쓸한 당신>에서 이야기 한 '정욕'이 거세된 사랑 이야기와 비슷한 맥락이다. 전쟁 직 후 좋아 지낸 남자에게 적극적으로 연애를 걸어보지도 않고 그저 안정된 삶을 택한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젊은이답게 앞뒤 없이 몰두해보지 못한 자신을 한탄하는 내용이다.

윤후명의 <별의 향기 - 우리들의 전설 3>은 연작소설의 일부 같은데, 어느 날 화자가 단골 술집에 들렀다가 술주정을 부리는 바람에 술집에 갖히게 되는 내용이다. 술집 이름은 '소행성' 이었고, 화자의 앞에는 '쌍절곤'과 소설 책 <분노의 강> 이 놓여 있다. 윤후명의 소설은 나와 궁합이 맞지 않는다. 작위적이, 깊이 있는 척 하지만 철학이 부족해 보인다.

김영하의 <이사>는 김영하 다운 소설이다. 폭력적이고 몰상식한 이삿짐 센터 직원들이 이삿짐을 개판으로 날라다 주고 가야시대 토기도 깨뜨려 버린다. 마치 스티븐 킹의 공포소설을 한 편 읽은 느낌이 든다.


졸다 깨다 하면서 비행기에서 읽었다. 마음에 남는 작품이 별로 없다. 정미경의 소설은 다시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장밋빛 인생>이 읽히지 않은 채로 책꽂이에 꽂혀 있다. 오수연도 나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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