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정원 - 전2권 세트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0년 5월
평점 :
절판


오현우가 18년 형기를 마치고 세상으로 나온다. 영치품으로 받은 지갑을 열자 거기에는 어머니가 준 관음보살 부적과 사진 한 장이 들어 있다. 그는 사진 속 얼굴을 차마 똑바로 보지 못하고 지갑을 닫는다. 사진 속의 여자는 한윤희다.


조카가 마중을 나왔다. 누님집에 가서 맛난 음식을 먹고, 건강 검진도 받는다. 여전히 사방 좁은 벽에 막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뻥 뚫린 공간은 아직까지 어색하다. 대충 몸이 추슬러지자 현우는 광주에 간다. 

광주에서 만난 예전의 동지들은 다들 할 말이 많은 듯 보였다. 그들의 현재 삶은 '광주에 대한 태도'도 변모시킨 듯 보였다. '광주'에 기대어 한 자리 꿰어차고 싶은 자가 있었고, 꿰어차지 못해 분한 자도 있었고, 그런 자들을 보며 분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잡혀 가서 젊음을 빼앗겨 버린 현우나, 감옥에서 미쳐버리거나 자살한 동지도 있었다. 현우는 그들과 오랜 시간 같이 하지는 않는다. 그는 갈 곳이 있었다. 갈뫼였다. 그곳에서 윤희를 처음 만났다.


윤희는 현우가 도바리칠 때 소개받은 여자다. 그는 김전우라는 가명을 대었지만 윤희는 본명이 뭐냐고 물었다. 더듬더듬 자신이 사회주의자이고, 도바리 중이고, 블라블라 떠들어대었는데 윤희는 그다지 놀라지도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광주에 관한 비디오를 보았다고 했다.

그녀의 아버지도 사회주의자였다. 윤희는 오랜 세월에 걸쳐 아버지와 화해를 했다. 그래서 현우에 대해서도 선입견 없이 대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녀는 현우를 통해 아버지를 보았는지도 모른다. 둘은 몇 달간을 갈뫼에서 함께 지낸다. 아무런 약속도 없는 관계였지만 충만한 하루 하루를 보내는 사이 차츰 정이 깊어진다.

하지만 동지들이 하나 둘 잡혀가자 현우는 갈뫼를 떠난다. 고향 집에 들렀다가 여관에서 묵은 어느 날, 임검에 걸린 현우는 간첩 사건의 주동자가 되어 무기징역을 선고 받는다. 직계 가족 외에는 면회나 편지가 되지 않았다. 윤희 역시 현우의 누님을 통하지 않으면 소식도 주고 받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잡혀가 젊음을 뭉텅 잘린 현우가 사회로 나온 것이다. 다시 찾은 갈뫼의 모습은 많이 변해 있었지만 윤희와 함께 지내던 교감선생네 뒤채는 깨끗이 수리가 되어 있었다. 윤희는 그 뒤채를 사서 현우와 그녀 명의로 등기도 해놓은 터였다. 그녀가 남겨 놓은 일기와 그림들을 보면서 현우는 없어져 버린 18년의 세월을 다시 채워나간다.


윤희가 누님에게 보낸 편지는 95년 11월, 96년 2월, 96년 여름에 보낸 것이었다. 그녀는 암에 걸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일기를 읽어 나가면서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곱씹던 현우는 자신과 윤희 사이에 딸 은결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일기의 어조가 점점 변해간다. 어조가 변한 것은 그녀가 변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현우를 그리워하는 여린 여성의 어조였지만 점차 독립적인 여성으로 변모하기도 하고, 벽 안에 수인을 그리워하다 지쳐 친밀감을 갈구하는 여성으로 변하기도 한다. 그리고 마지막 편지에서는 현우를 어머니처럼 여기는 중년의 여인이 되기도 한다.


대학 다닐 때 좋아하는 선배가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을 꼭 읽어보라고 했다. 여기 저기에 소개된 글을 통해 내용은 알고 있었는데 결국 읽지 않았다. 나는 누가 추천해주는 책은 잘 읽지 않는 편이다. 청개구리 기질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추천해준 책을 읽고 실망하면 왠지 미안할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그렇게 추천해준 책이라면 '아꼈다가 읽자' 하는 마음이 들어서이기도 하다. 그래서 황석영의 다른 소설들을 먼저 읽었다. <무기의 그늘>을 처음 읽었는데 기억이 나는 대목은 자본주의 논리에 의해 미군 무기가 베트콩에게 흘러 들어가던 부분이다. 선이 굵은 소설이라고 느꼈다. <손님>은 잘 쓴 소설이라고 생각했지만 딱히 공감했던 것 같지는 않다. <장길산> 역시 후반부로 갈수록 성긴 느낌이 들어 만족스럽지 않았다.

<오래된 정원>은 한동안 꽤 오랜 기간 공백 이후 발표된 작품인데 여러 번 쉬어 가면서 읽었다. 특히 윤희의 마지막 편지를 읽고는 먹먹해져서 책을 덮기까지 했다.


그곳을 떠난 뒤에 당신의 젊은 얼굴을 그린 적이 있어요. 나중에 그림의 빈 여백에는 이만큼 늙어버린 나를 그려넣었지요. 그랬더니 당신은 내 아들 같아 보였어요.


이 부분이 마음에 와 닿아서 여러번 반복해서 읽어 보았다. 정말 애잔하고 쓸쓸하면서도 멋진 표현이다. 바로 저 표현 때문에 윤희가 독일에서 다른 사람과 사랑을 하고, 그 사람을 잃고 슬퍼할 때도 질투하지 않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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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01-21 0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기의 그늘 ㅡ손님 ㅡ장길산 ㅡ까지 그냥 다 넣고 이어 쓰시는게 더 자연스럽고 좋은데요!^^
원글이 훨씬...부드럽게 ㅡ^^
문제되지 않는데 그냥 쓰시는게...어떤가..합니다.만?^^

잘 읽고 갑니다.

황석영 작가 책 중 저는 이 책을 가장 아낍니다.
ㅎㅎㅎㅎ무기의 그늘은 오래되서 이젠 기억이 희미하고
장길산은 ..눈앞에 떡 있지만 ㅡ확실히 뒤로갈수록 아쉽고...손님은 독특하지요. 오래된 정원은 가끔씩 지금도 열어봐요..감정을 잃어버린 기분일때...막 이별
한 기분에 젖고 싶을때...울고 싶을때...그럴때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