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말로 좋은 날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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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서재에는 내가 산 기억이 없는 책이 꽂혀 있을 때가 있다. 그런 경우는 둘 중 하나인데, 누가 선물했지만 관심이 없어 꽂아놓고 잊어버렸거나, '훔친 책'이다. 훔친 책이라고 해서 적극적인 의사를 가지고 '지불 과정'을 생략했다는 의미는 아니고, 어디선가 빌렸다가 돌려주지 않아 결과적으로 '훔친 책'이 된 경우이다. <참말로 좋은 날>도 그런 책이다. 원래는 회사 CEO(?)가 야심차게 꾸린 서가에 꽂혀 있던 책인데 6년 전에 빌렸다가 갑자기 발령을 받아 돌려주는 것을 잊었다.  


2006년에 출간된 <참말로 좋은 날>은 기존 성석제 소설과 달리 폭력적이고 건조하다. 해학과 유머도 다소 덜하다.


<저만치 떨어져 피어 있네>를 보자. 소설의 시작은 여느 성석제 소설 처럼 약간의 유머가 느껴진다. 아내로 부터 전화가 걸려오자 김종호는 "여보세요. 지금 오데로다 전화 건 겁니까요?"라고 응대한다. 김종호씨 핸드폰이 아니냐는 물음에 "전화는 맞는디 고 친구 시방 숨 넘어가느라 무진장 바쁩니다이." 한다. 아직은 성석제 소설이다.

그런데 아내가 이렇게 다급한 건 법원에서 통지서가 날아왔기 때문이다. 화가의 꿈을 아직 버리지 않은 김종호씨는 나름 식자연 하며 멍텅구리 같은 주변 사람들보다 약빠르게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다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같은 빌라에 사는 무식한 사람들보다 발빠르게 움직여 화를 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종호씨의 순진한 바램이었을 뿐임이 드러난다. '법대로' 종호씨는 전세보증금을 날릴 처지에 놓이고, 아내는 점점 말을 잃어간다. 귀가 들리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내에게 '말을 하라'며 다그치던 종호씨는 급기야 해서는 안 될 말을 해대고, 도움을 받던 후배에게는 쥐새끼 취급을 받는다. 집달리들이 들이닥치자 아내가 빌라 창 밖으로 뛰어내린다.

엽기적이기는 <아무것도 아니었다>가 더하다. 어느 날 이민간 여동생이 한국에 명의를 빌려 투자하고 싶다고 하자 형제가 극적으로 화해한다. 여동생이 사준 부동산을 통해 얻게 될 프리미엄 덕분이었다. 하지만 택시 기사와 다툰 원호가 휴대폰을 분실하고, 휴대폰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에서 묻어 두었던 가정사가 여지없이 드러난다. 돼지같은 자식놈은 아비 말을 듣지 않고, 아내는 바람난지 오래다. 아들의 머리통을 콜라병으로 내리쳤는데 이 돼지 같은 놈이 숨을 쉬지 않는다. 아늘돔이 라면을 끓이기 위해 켜놓은 가스불에서 불이 옮겨붙어 집안이 불탄다.

<집필자는 나오라>는 박태보에 관한 이야기이다. 박태보는 장희빈에 빠져 중전을 폐하려는 숙종에게 소를 올렸다가 친국을 당해 죽게 된다. 숙종은 집요하리만치 박태보에게 매질을 가한다.


세 편의 소설을 보면 '아비'라는 존재가 더 이상 '아비'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 특이한 점은 그들이 특정 조건 하에서 '아비'로 기능하지 못하고 파국을 맞는다는 점이다. 

<저만치 떨어져 피어 있네>의 종호씨는 미술 분야에서 상도 수상했고 재능도 있는 사람이다. 그는 얼마든지 자식과 아내의 존경을 받으며 '아비'로 기능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법' 앞에 무너져 가정을 파탄낸다. 사실 그를 무너뜨린 것은 '법'이라기 보다 '돈'이다. '돈'의 영역에서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하자 돈이 '법'의 외피를 쓰고 나타나 종호씨를 파탄낸 것이다. 과거에는 식자층이 곧 중산층이었다. 대학물을 먹었으면 최소한 밥벌이는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산층이 붕괴되며 그러한 공식은 깨진 지 오래다. 식자층의 몰락은 더욱 드라마틱하다. 그들의 손은 노동을 모르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러한 점을 상기시키기 위해 텃밭을 가꾸는 1층 할머니를 계속 대비시킨 것이 아니었을까.

<아무것도 아니었다>의 원호씨 역시 비슷한 상황이다. 돈 덕택에 형제와 화해도 하고  떵떵거리고 살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이미 약간의 돈으로 붕괴된 가정을 일으킬 시기는 지났다. 이 소설에서는 패륜 아들이 아비를 때리는 것이 아니라 아비가 아들을 콜라병으로 때린다. <집필자는 나오라>에서도 아비(임금)이 아들(신하)를 때린다. 아비는 아들을 죽이고자 한다. 친국은 집요하고 매섭다.


<악어는 말했다>는 헛웃음이 픽 새나오는 소설이다. 한 때 호형호제 하던 인물들이 모여 술을 마신다. 과거에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그들 사이에 공감대가 별로 없다. 동생뻘인 악어가 자꾸 '나'에게 술을 먹자고 한다. 사실 술을 같이 먹으며 풀어야 할 회포도 없고, 아쉬움에 붙잡는 것도 아니다. 그냥 술이 먹고 싶은 거다. 그래서 거듭 안 먹겠다는 나에게 악어는 말한다. "잘 가라, 돼지야."


이 밖에 향지라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쓴 <고욤>, 추억의 장소를 본래 지명과 사투리 이름을 대비시켜 풀어나가는 <환한 하루의 어느 한때>, 건강을 위해 일가를 이룬 인물이 한 순간의 실수로 트럭에 치여 죽고 만다는 <고귀한 신세>가 함께 수록되어 있다.

 

http://blog.naver.com/rainsky94/22058009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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