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자의 회고록 환상문학전집 24
도리스 레싱 지음, 이선주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문명이 파괴된 영국의 한 도시에서 살아가는 '화자' 는 우연히 자신의 집 벽 너머에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벽 너머에는 방들이 있었고, 누군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한 남자가 열 두살 난 에밀리라는 소녀를 화자에게 맡기고 떠난다. 소녀는 휴고라는, 개의 몸에 고양이의 얼굴을 한 동물과 함께였다. 에밀리는 한동안은 휴고와 집 안에서 정서적 유대감을 느끼며 바깥 출입을 하지 않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인도쪽으로 나가기 시작한다. 그곳에는 폐허가 된 도시를 떠나 이주하는 사람들이 잠시 머물기도 했고, 무리를 지어 생존하려는 그룹들도 있었다. 

처음에 에밀리는 인도에 머무는 사람들이 휴고를 그저 먹잇감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그룹에 전적으로 속하지 못하고 집과 인도를 오갔지만 점차 그룹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이상주의자인 그룹의 리더 제럴드의 여자가 되기 위해 애를 쓴다. 그와 육체적 관계를 맺으면서 에밀리는 소녀에서 성숙한 여성으로 변모해간다. 문제는 제럴드가 에밀리만이 아니라 그룹의 모든 여자아이들과 육체적 관계를 맺는다는데 있었다. 그중에는 에밀리를 각별히 따르는 준이라는 소녀도 있었다. 

준은 에밀리를 좋아하면서도 제럴드의 여자가 되고 싶어했다. 준은 경박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화자'의 물건을 훔치기도 한다. 후에 준은 몸이 아파 화자의 집에서 에밀리의 간호를 받게 되는데 그 시기에 에밀리와 준은 동성애적 체험을 하게 된다. 준은 그 일이 있은 후에 도시를 떠난다.

화자는 그 사이에도 벽 너머의 방에서 에밀리의 어린 시절을 보게 된다. 에밀리는 어머니와 아버지로부터 정서적 억압을 받으며 자란듯 보였고, 욕망을 건강하게 표출하는 법도 배우지 못한 것 같았다.

제럴드가 문명을 경험하지 못한 어린 그룹들을 교화시켜보려 하지만 실패로 돌아가고 그룹은 흩어지고 만다. 제럴드와 에밀리가 어린 아이들에게 린치를 당하고 돌아온 날, 화자는 벽을 열게 되고 그들은 벽 너머의 세계로 이주한다. 


작품 자체도 난해한데, 번역도 한 몫 거든다. 이런 저런 해설들을 읽어 봤지만 역시 명쾌하게 이해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다. 

해설에 의하면 이렇다. 세상의 종말이라는 인위적인 상황 하에 벽 이쪽은 현실이자 종말, 벽 너머는 새로운 세상이다. 따라서 화자가 벽 너머의 방들을 치우는 것은 영구적인 거주를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정신적으로 준비하는 것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새로운 가족을 구성하여 벽 너머로 넘어간 화자는 어떤 초월적인 존재(the One)를 느끼는데(이선주 번역에서는 '한 사람'으로 번역되어 있다) 주인공의 완성된 자기를 나타내는 인물로 볼 수 있다. 


사실 화자가 남성인지 여성인지, 몇 살인지는 전혀 나와있지 않다.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이겠으나, '초월적 존재'나 '영구적 이주' 측면의 해설 보다는 에밀리의 성장 과정과 가족의 구성에 관한 작가의 시각에 좀 더 관심이 쏠렸다. 사실 에밀리의 성장 과정과 가족의 구성에 관한 작가의 관점에 그다지 공감은 가지 않았다. 에밀리가 소녀에서 여성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제럴드라는 이상적인 그룹 리더와의 육체 관계가 중요한 기점인데 난교(제럴드의 관점에서 봤을 때)와 동성애를 자연스럽게 배치하고 있다. 본능적 혐오를 갖고 있진 않지만 도리스 레싱이 왜 에밀리의 성장 과정에 이런 과정을 배치했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또한 문명을 경험하지 못한 어린아이들을 교화시키는데 실패한 직후 이들은 벽 너머로 이주해가는 대목도 뭔가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물론 해설이 맞다는 가정 하에서지만, 도리스 레싱이 이상적인 새로운 질서로 그리고 있는 것은 좀 진부하지 않은가? 벽 이쪽에서 그룹의 여러 여자와 자던 제럴드가 피치 못할 사유로 이제 벽 너머에서는 에밀리와의 일부일처제를 강제당할 것이고, 문명을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야만)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벽 너머로 건너가는 것은 뭔가 도피를 연상시킨다. 데이빗 글래드웰 감독으로 1981년도에 영화로도 발표되었는데 어떻게 연출되었는지 사뭇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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