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앞에서
이동하 지음 / 세계사 / 1997년 10월
평점 :
품절


<지붕 위의 산책>과 <낯선 바다>는 일상과 균형에서 벗어난 사람들 이야기이다. 일상과 일탈 사이에서 묘하게 균형을 잡으며 살아오던 남자들이 어느 순간 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돌발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이동하는 그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그 이후에 어떻게 결말이 났는지는 들려주지 않는다. <지붕 위의 산책>의 남편 성문은 업무 시간 중에 바깥 출입을 한다. 아내인 '나'와 주변인물들은 성문이 바람이 났을 것이라거나, 불치병에 걸려 부쩌지를 못하는 것이라거나 따위의 추측을 한다. 어느 날 '나'는 성문의 뒤를 캐보기 위해 그가 회사에서 나온 순간부터 따라다녀보지만 그에게 일정한 목적이나 의도한 방향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뿐이다. <낯선 바다>에 나오는 남편 기주 역시 성문과 별반 다르지 않은 행태를 보인다. 잘 다니던 직장-형부가 사장인-을 때려치우겠다 했고, '나'와 이혼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내'가 어찌된 영문인지 알아보기 위해 형부의 직장엘 가보니, 남편 기주는 회사 여직원과 바람을 피운 전력이 있다. '나'는 어쩌면 기주가 정해진 틀에 갖혀 기를 펴지 못했던 자신의 생활 형태를 바꿔보려는 몸부림을 치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빈 江>과 <노크도 없이 문이 열리더니>, <그는 화가 났던가?>는 부조리한 이야기들이다. 어느 날 낮잠에서 깨어보니 나 이외에 모든 사람들이 도시에서 사라져 버리거나(빈 江), 교수실에 노크도 없이 들어온 정체 불명의 사나이가 횡포를 부리더니 자신은 자살하기 직전 유서를 써야겠다면서도 정작 한 글자도 쓰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든가(노크도 없이 문이 열리더니>, 심야고속버스 운전 기사가 가타부타 말도 없이 빗길 과속을 하여 온 승객을 공포로 몰아 넣는다(그는 화가 났던가?)

 

<성가신 죽음>과 <땀>, <젖은 옷을 말리다>, <가을볕 속 잠자리떼>, <엇길>은 죽음을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성가신 죽음>은 편리하고 쾌적한 아파트 단지가 죽음이라는 이별 의식을 치루어 내는 데에는 얼마나 불편한지 단상에 잠기는 주인공의 이야기인데, 아버지의 죽음을 인지하지 못한 채 철없이 자전거 타기에 골몰하는 아이의 모습이 애처롭다. <땀>은 개에게 유산을 물려주고 쓸쓸히 죽어간 노인의 이야기이고, <젖은 옷을 말리다>는 오랜만에 고향을 찾아 부모 묘를 이장하는 이야기이다. <가을볕 속 잠자리떼>는 <성가신 죽음>과 궤를 같이한다. <엇길>은 학창시절 재기발랄했던 동기가 거지나 다름 없이 되어 동냥으로 생계를 잇다가 객사하고 마는 안타까운 이야기이다.

 

<네 개의 배역>은 남편의 군대 동기가 운전수로 들어와 한 집에 살게 되면서 벌어진 에피소드를 그리고 있는데, 아버지가 사장이기 때문에 형사 역만 하겠다는 아이와 도둑 역할만 하는데 싫증 난 운전수의 아들이 싸우고, 어머니들이 이 싸움에 끼어든다. 각자 치부가 드러나자 어머니는 아이들만 쥐어패며 속풀이를 하고, 잠시 후 애들은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또다시 놀이에 골몰한다.

 

표제작 <문 앞에서>는 별 것 아닌 이야기를 차분히 풀어가며 잔잔한 감동을 준다. 훈장을 업으로 삼아 주말 부부를 하는 '내'가 어느 날 집으로 돌아와 보니 아파트 문은 굳게 잠겨 있고 아내나 아이들도 쉬 돌아올 눈치가 아니다. 게다가 연로한 아버지마저 상경한 참이다. '나'와 아버지는 어떻게든 집으로 들어가보려는 노력을 그만 두고 이왕 해후한 김에 이런 저런 얘기도 나누고 내처 목욕탕에도 함께 간다. 벤치에 아버지가 까무룩 잠이 들고, '나'는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긴다. 그러나 이 생각도 어느 집 창문을 통해 흘러나온 연속극 드라마 소리에 곧 깨어지고 만다.

 

<짧은 황혼>과 <물풍선 던지기>는 세대 간의 대비를 통해 쓸쓸함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늦은 나이에 연애 감정에 빠져드는 노인당 사람들의 얘기인 <짧은 황혼>은 장성한 손자가 노인을 들쳐 업고 가는 모습을 대비시켜 황혼의 쓸쓸함이 증폭되고, <물풍선 던지기>는 사람들에게 물풍선을 맞아가며 재수생인 아들 뒷바라지를 했건만 정작 재수생 아들 녀석은 공원에 놀러와 아버지에게 물풍선을 던진다는 내용이다.

 

이동하 소설의 배경이 되는 아파트 단지는 과천의 주공아파트 단지 같다. 그곳의 거리에 벌여진 시장의 모습을 신기해했던 기억이 있는데 소설 속에서 여러 번 등장한다. 소설은 전체적으로 말줄임표와 같은 느낌을 준다. 일면 카프카식의 부조리소설이 아닌가 싶어지는 소설들도 있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것은 작가가 우리에게 대답을 유보하거나, 대답을 우리에게 맡겨두는 성질의 것인지라 동일하다고 보긴 어렵다. 어휘가 적확하게 선택되어 있고, 소설의 기본에 충실한 작품들이다. 제1회 오영수 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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