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초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8
한수산 지음 / 민음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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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바람이 찬 이월 하순, 잠시 단체를 떠났던 윤재가 돌아온다. 그는 일월곡예단 초창기 시절부터 마술을 해왔는데, 돈을 보고 약장수를 따라 나서는 다른 마술사들과 달리 자기 재주를 높이 사는 곳에서만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다시 돌아온 노쇠한 윤재를 하명 등은 반갑게 맞아주면서도 노년에 이으러서까지 단체를 떠나지 못하는 그의 모습에서 자신들의 미래를 보는 것만 같았다. 공중그네를 타는 하명은 윤재를 아버지처럼 생각하였고, 하명은 어느덧 청년이 된 윤재의 모습에 놀란다.

겨울 동안 써커스는 남쪽 지방을 도는데 농사를 짓는 관객들이 봄부터 가을까지는 농사일로 바쁘기 때문이기도 했고, 아무래도 추운 동안은 좀 따뜻한 지방을 도는게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단원들은 공연을 하는 재주꾼과 장비를 맡는 후견으로 구분되는데, 일정 수준 이상의 손님이 들면 일당을 받지만 어느 수준 이하일 때는 반일당, 혹은 담뱃값밖에 받지 못할 때도 있었다.

줄을 타는 지혜와 하명이 좋아 지내면서 둘은 단원들의 눈을 피해 남몰래 만난다. 하지만  자신들이 앞으로 어떻게 될 지 몰라 괴로워한다. 배운 재주로 써커스를 하여 돈은 번다지만 결혼을 한다 해도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아다닐 일이 걱정이었고, 단체 내에서 가정을 이룬 선배들의 모습을 볼 때 자신들도 그와 같이 될 것이 걱정되었다. 그렇다고 사회로 나가자니 기술도, 기반도 없는 상태에서 영 자신이 없었다.

남자쪽 집안에서 '써커스하는 여자는 창녀만도 못하다'는 반대에 어쩔 수 없이 헤어져 혼자서 석이를 키우는 석이엄마에게 일 년에 두 번 남자가 찾아온다. 그들은 석이라는 끈을 매개로 여름과 겨울 두 번을 만난다.

석이 엄마가 남자를 만나기 위해 방을 비운 사이 수상한 그림자가 지혜의 방을 침입하고 그녀의 몸을 버려 놓는다. 지혜는 아무에게도 말을 못하고 혼자서 끙끙 앓으며 하명을 피하기 시작한다. 그날부터 지혜는 칼을 품고 다시 침입할 남자를 기다리는데, 어느날 밤 윤재가 여자 숙소에서 뛰어나오는 남자와 부딪힌다. 윤재의 손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다음 날 지혜가 타던 줄이 끊어져 크게 다치고, 윤재는 줄에 장난질을 친 자는 바로 규오라고 지목한다. 규오의 손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단원들은 규오에게 몰매를 주고, 얼마 후 병원에 입원해있던 지혜가 홀연히 사라진다. 하명은 술과 여자로 한동안 세월을 죽인다.

단체를 잠시 떠났던 난쟁이 칠룡이가 돌아오고, 써커스는 잠시 활기를 되찾는듯 했다. 하지만 텔레비전과 쇼에 밀려 인기는 예전과 같지 못했고 단장인 준표가 풍을 맞아 쓰러지기까지 한다. 준표의 동생 광표가 단장직을 떠맡는데, 그는 단체의 생리를 잘 몰랐고 전에 노가다판에서 사람 다루듯이 단체 사람을 다루려 했다. 욕심이 많은 그는 사사건건 총무인 명수와 대립했는데, 표를 판 돈을 속여 일당을 온전히 주지 않거나 돈이 궁한 단원에게 이자놀이를 하여 종속시키려 한다. 그만 두는 단원 대신 자기에게 충성할 단원을 모집하여 결국 단체는 둘로 갈리고 만다.

윤재가 쓰러진 준표를 찾아가 좋안던 시절을 이야기하고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지혜를 만난다. 지혜는 술집에서 손님들 앞에서 재주를 보여주며 돈을 벌고 있었다. 윤재의 꾸짖음에 지혜는 '고무신이 잘 팔렸다고 고무신만 팔아야 된다는 법이 어디 있느냐. 사람들이 구두를 신으니 구두를 팔아야 한다'고 항변하고, 윤재는 적당한 답변을 못한 채 단체로 돌아온다. 얼마 후 쇠약해진 몸을 추스리지 못하고 윤재가 사망한다. 명수는 총무직을 그만두고, 하명 등은 광표에 대항해 들고 일어났다가 새로운 단원들에 밀려 단체를 떠난다. 석이를 아버지에게 넘겨주고 술로 세월하던 석이엄마가 어느 날 술에 취해 붙인 성냥불이 의상에 옮겨 붙어 써커스 천막이 모두 불에 타버린다. 하명과 연희, 칠룡은 버스정류장에서 이야기를 나눈 후 각자의 길을 떠난다.

 

 한수산은 <부초>를 쓰기 위해 곡예단을 2년간 쫓아다니며 소재를 분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초>가 시작될 무렵 텔레비전의 보급이 확산되자 사람들이 볼거리를 어렵지 않게 취할 수 있게 되었고, 이와 함께 써커스의 호시절은 끝나고 있었다.

"돈이 있으면 강아지도 멍사장"이 된 시절에 배운 것은 재주밖에 없고, 뒤늦게 사회에 뛰어들 깜냥도 되지 못하는 단체 사람들은 좋았던 옛날을 되풀이해 이야기하며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외면한다. 하지만 시대의 조류는 단체를 비껴가지 않는다. 과거를 대표하는 인물인 단장 준표는 풍을 맞고 윤재는 쓸쓸한 죽음을 맞는다. 지혜는 단체를 나가 '더 잘팔리는 상품'으로 자신을 개조하고, 돈으로 사람을 다루는 광표는 끝내 하명 등을 몰아낸다.

 

"난 우리가 무대 위에 있고 남들은 다 구경꾼이라고 생각했었지......그건 잘못이야......사람들이란 저마다 있는 힘을 다해서 살아간다는 거야. 못난 놈도 제딴에는 자기가 가진 거 남김없이 다 털어서 살고 있다는 걸 이제야 알겠어. 그래......이 세상 바닥도 써커스 바닥이나 똑같아......어디엘 가 있는 내가 디디고 있는 땅이 무대가 아니겠어......(256-25p)

 

단체를 나와 어디로 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내뱉는 하명의 이 말은 <고리오 영감>에서 라스티냐크가 "자, 이제 파리와 나, 우리 둘의 대결이다"하고 외치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소재에 대한 기초적으로 정확해 보이는 연구를 바탕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이 저마다 안에서 솟아나오는 인간적 필연성을 어김없이 현실의 큰 상황속에 뚜렷이 자리잡게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풍속의 한 제시이자, 자기 삶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바르게 풀어나가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감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낸 성과가 뚜렷하다"

 

오늘의 작가상 수상 이유에서 발췌한 이 글을 읽으며, 35년의 세월 저쪽에서 소설이 갖는 의미는 무엇이었던가 생각해본다. 소설을 쓰기 위해 그 삶을 직접 경험해보던 장인적인 과정이 근래에는 말재간으로 대치되어 가는 듯 하다. 1977년 제1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인 <부초>와 2011년 제35회 수상작 <철수사용설명서>가 같은 문학상 수상작이라는 사실은, 일월곡예단의 쇠망사를 보는 듯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http://blog.naver.com/rainsky94/80161893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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