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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 창비시선 371
유병록 지음 / 창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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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이 잘 잡힌 시의 예

- 유병록,「입술」

 

 

 

 

 

​  유병록의 시집을 재차 이야기한다. 최근에 그의 시집을 다시 읽을 기회가 있었고, 읽고 나서는 할 말이 더 많아졌다. 작년 초에 유병록 시집을 처음 완독하고 났을 때에 소감을 적은 바 있다. 그 때는 시「빨강」 단 한 편을 언급하면서 해소되지 않은 아쉬움이 있었다. 이번에도 긴 시평을 쓸 자신이 없어서 시 한 편에 대한 단상을 옮겨본다.

  시「입술」​을 먼저 읽어본다.

 

 

 

입술

 

 

  하늘에서 내려온 줄을 물자 물고기의 몸이 솟구친다 비

늘에 닿는 공기의 질감, 젖은 외투를 벗는 기분

 

  육지를 가볍게 뛰어넘어 공기의 생에 닿으려던

 

  입술에서 시작한 고통이 온몸에 퍼진다 지느러미는 너무

작은 날개, 물 밖의 생을 꿈꾼 죄를 실감하고

 

  칼날이 살을 발라낸다 가시만 남은 몸으로 풀려난다

 

  물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납작하게 떠오른다 살점이 있

던 자리에 물이 또 바람이 차오른다

 

  핏물이 수면에 번지고

  한쪽 눈은 물 밖을 한쪽 눈은 물속을 응시한다 시야에서

정오의 세계와 자정의 세계가 겹친다

 

  지금은 바람으로 물의 기억을 말리고 물로 바람의 꿈을

씻어야 할 때

 

  바람의 목소리로 또 물의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입술이

떠내려간다 물의 바깥에서 바람의 외곽에서

 

 

- 시집 中

 

​  유병록 시집의 어조에는 깊은 우울과 함께 날선 비정함, 차가움이 있다. 건조한 문장들이 시가 지닌 감정선을 유지해나간다. 시가 지닌 무덤덤함에는 무게감이 실려있는데, 그것은 생과 사의 관념을 감당하고 있는 무게다. 흥미롭게도 이 무게감은 하나의 존재에 무게중심을 잡는다. 그래서 그 무게를 온전히 감당하는「두부」​같은 시는 수작이다.

  자, 이제 「입술」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이 시에는 기본적인 서사가 있다. 물고기가 미끼를 물고 지표로 올라와 죽음을 맞이하는 이야기다. 낚시의 장면을 포착하여 생생하게 그려냈다기 보다는, 그의 다른 시가 그러하듯 죽음에 다가가는 대상의 시적 묘사에 주력하고 있다.

 처음에 나타난 물고기의 생은 희망적이었다. 1연에서부터 물고기가 낚싯줄을 물고 수면 위로 떠오르는 ​모습이 제시된다. 이때만 해도 비늘에 닿는 공기의 질감은 젖은 외투를 벗는 듯하여 물고기는 가벼운 기분을 만끽했을 것이다. 바닷물에서 바로 공중으로 튀어오르는 몸짓은 공기의 생에 닿으려던 시도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3연. 입술에서부터 고통이 온몸에 퍼진다. 공기의 생을 누리기에는 지느러미가 너무 작은 날개다. 물고기는 물 밖의 생을 꿈꾼 죄를 그제서야 실감한다.

 4연. 외부의 고통이 본격적으로 물고기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모든 살을 빼앗기고서 가시만 남은 몸으로 풀려난다. 물고기의 육신은 이미 죽은 상태다. 몸이 물속에 버려졌는데, 육신이 죽어서 움직이거나 물속으로 가라앉을 수 없다. 가벼운 몸 탓에 납작하게 떠오르고 만다. 살점이 있던 자리에는 물과 바람이 채워진다(이러한 서술에는 육신이 사라지고 남은 허무함이 있다). 몸이 떠있는 상태에서 물고기의 한쪽 눈은 물 밖을, 한쪽 눈은 물속을 응시한다. 수면에 물 안과 밖의 세계가 맞닿아있는 것처럼, 시야에도 정오의 세계(빛)와 자정의 세계(어둠)가 겹친다.

 이제 마지막 두 연이 지금까지 잘 끌어온 시의 서사에다가 ​시적 사유를 붙인다. 두 세계가 겹쳐진 상태에서 화자는 지금이 바람으로 물의 기억을 말리고, 물로 바람의 꿈을 씻어야 할 때라고 말한다. 비유를 좀 더 파고들어보면, 바람으로 말리는 대상이 물의 기억이고 물로 씻겨주는 대상이 바람의 꿈이다. 말리고 씻기는 행위 혹은 현상의 대상이 관념인 것이다. 이 관념은 누구의 것인가. 5연에서 살점이 있던 자리에 물과 바람이 차오른다고 했다. 물과 바람은 새로이 화자의 육신을 이루는 것이고, 그 육신에 달린 기억과 꿈은 결국 화자인 물고기의 것이다.

 마지막 연에 등장한 것처럼, 바람과 물로 이루어진 화자는 바람의 목소리와 물의 목소리로 중얼거릴 수 있다. ​처음에 등장한 입술이 고통을 전파하는 통로였다면, 이번에 등장한 입술은 실체가 없는 입술이다. 물고기의 살은 칼이 모두 발라낸 이후니까. 이것은 바람과 물이 형성한 가상의 입술이다.

 육신의 완벽한 상실 말고도​, 이 입술은 남아있던 의식의 죽음을 상징하기 위해 쓰였다. 물의 기억이 마르고 바람의 꿈이 씻겨내려가야 할 때라는 것은 정신의 표백을 의미한다. 기억과 꿈 모두 사라져야 할 때라는 것이다. 중얼거림의 내용은 시적 주체의 유언일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행. 입술이 바람처럼, 물처럼 떠내려간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입술은 물고기의 외피에 있다. 그러므로 '물의 바깥'이나 '바람의 외곽'과 같은 경계에서 입술은 떠내려가고 존재는 정신적 죽음까지 맞이한다. 이제서야 정오의 세계와 자정의 세계가 딱 들어맞게 되었다는 듯이. 

​ 이 시는 시집에서도 친절하게 쓰인 편에 속하지만, 유병록 시의 특징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시집 전체에서 형식의 절제가 철저히 지켜지고 있다고 느꼈는데, 이 시에서도 그런 경향성이 잘 나타난다. 불필요한 어구를 찾기 힘들고 반복이나 미사어구를 활용한 과잉의 지점이 없다. 게다가 시「입술」은 흔히 유병록 시가 지닌 장점으로 언급되는 '물성'을 잘 살리고 있다. 시인은 입술이나 살과 같은 용어를 빌어서 물고기의 육신이라는 물성을 만들어놓았다. 그 다음 바람과 물이라는 추상적인 단어를 투과시키니 광활한 자연물로만 느껴졌던 단어들의 의미가 구체적이고 직관적으로 변했다.  서사도 선명하고 대비의 효과를 위해 사용된 상징들(눈이나 세계) 또한 삶과 죽음의 대비에만 한정시키지 않고 있어서 해석의 폭을 넓힌다. '떠내려간다'라는 술어(Fade out 같은 효과를 연상시키는)로 시를 마무리 짓는 것 또한 깔끔한데, 외려 이러한 깔끔함이 어떤 독자들에게는 흠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 유병록 시인은 첫 시집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로 작년에 김준성문학상도 수상하였다. 개인적으로도 2014년에 출간된 시집들 중에서 아주 좋은 인상을 남겼던 시집이었다. 꾸준히 조명하고 싶은 시인이다.

 

젊은 시인들을 자주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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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신간을 쭉 둘러보다가 나는 정아은의 <잠실동 사람들>에 눈길이 멈추었다.

 

 나는 한겨레문학상과 같은, 꽤나 검증된 문학상을 신뢰하는 편이다. 그래서 2013년에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한 정아은의 새 작품이라는 소개글을 신뢰하고 싶어졌다.

 

 

 <잠실동 사람들>의 간략한 줄거리를 읽고서 어쩌면 이 소설이 지금의 교육 현실을 적정한 거리에서 그리고 있지는 않을까 궁금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높아만 가는 요즘 학부모들의 교육열을 ‘비정상’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일종의 이유나 공감대를 표현해주지는 않을까하는 기대감. 이 기대감 하나 만으로 <잠실동 사람들>을 주목하는 신간으로 고르고 싶었다.

 

 잠실동 주민들은 과연 한국의 교육현실에 대한 일침을 가할 수 있을까.

 

 

 

 

  나는 소설가 김성중을 좋아한다. 그녀가 서사를 이끌어가는 방식을 좋아한다. 그녀의 첫 번째 소설집 <개그맨>울 구매하게 된 것도 작가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며, 수록된 작품들은 그 믿음을 배반하지 않았다. 김성중에게는 상상력을 개연성 있게 밀고 나갈 수 있는 힘이 있다. 그것은 서사의 빈틈을 최대한 줄여나가려는 작가의 노력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표제작 ‘국경시장’을 젊은작가상 작품집에서 이미 읽었다. 액자형 소설로 구성된 이 소설은

국경시장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실제처럼 그려낸다. 쾌감과 타락을 동시에 진행시키는 인간의 탐욕을 주제로 흡입력 있게 서사를 구성하여 무척 놀랐던 기억이 난다.

 

 며칠 전 교보문고에서 확인한 이 소설의 커버에는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한 문장이 적혀있었다. 나는 그 문장에 동의했다. 나는 김성중에게 이야기를 설계하는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확실히 이 작가가 구축한 세계관에는 독자가 들어갔다 나올 만한 가치가 있다.

 

 

 

 

단 한 권의 책을 이야기하더라도 평생 기억에 남을 책을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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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권수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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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새로운 지평으로 넘어갈 것입니다

- 파트릭 모디아노,『지평』

 

 

 

 

 모든 첫 만남은 상처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읽고 나서 나는 여느 '좋은 소설'들을 읽었을 때와 같이 숙연해졌다. 만약 모디아노의 모든 소설이 이런 주제를 담고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그의 모든 소설을 읽게 될 것만 같았다. 나 스스로가 쉽게 회상에 빠지는 사람이라서. 모디아노에게 노벨문학상을 선사한 근거는 이러했다.

 

   "기억의 예술을 통해 불가해한 인간의 운명을 소환하고 독일 점령기 프랑스의 현실을 드러냈다."

 

  프랑스의 역사적 배경을 잘 모를 대다수의 독자들에게는 '기억의 예술'을 보여준 작품이라서 수상했다는 사실에 더 공감할 것이다. 사실 '기억의 예술'은 그리 낯설지 않다. 오히려 가장 많이 다루는 소재 혹은 방법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지평』이 환기시키는 몇몇 장면들은 영화 『메멘토』나 『냉정과 열정 사이』를 떠올리게 했고, 과거의 흔적을 짚어가며 회고하는 방식은 박민규의「근처」와 같은 몇몇 다른 소설이 생각나게 했다. 그러나 그 뿐이다.『지평』에서 드러나는 주인공 보스망스와 마르가레트의 의존성이나 고독감, 새로운 '지평'이라는 것을 찾아 떠나는 자유로움은 독특하고 낯설다. 모디아노의 소설이 매력적인 것은 그가 동원한 '기억의 예술'이 '불가해한 인간의 운명'을 소환했다는 결과에 있는 것이다.

 

 소설 내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매우 우연적이고 기이해서 불가해하다. 운명론을 믿고 싶지 않음에도 운명을 떠올릴 수 밖에 없게 만든다. 보스망스를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금전을 요구한 '어머니', 마르가레트가 머무는 곳마다 나타나며 자신을 만나줄 것을 요구하는 '부아야발'. 보스망스와 마르가레트는 모두 그들이 두려워하는 대상을 피하느라 정착하지 못한다. 잊을 만하다 싶으면 그들 앞에 나타나는 저 인물들 떄문에 그들은 결코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악몽을 꾸고 불안에 떤다. 그런 그들은 서로에게 더 의지한다. 보스망스는 마르가레트가 자신에게 의지할 수 있도록 도와줌으로써 불행 속에서 행복을 찾아낸다. 그는 마르가레트를 사랑하게 된다.

 

 보스망스는 운명론자로 보인다. 마르가레트와의 만남은 사랑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마르가레트와의 첫 만남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보스망스는 어디에선가 사람과 사람의 첫 만남은 마치 가벼운 상처처럼 두 사람에게 남아 그들을 고독과 무감각으로부터 깨워 일으킨다는 말을 읽었다. 후일 마르가레트 르 코즈와의 첫 만남을 회상하면서 그는 그 만남은 바로 그렇게, 바로 그곳 그 지하철 입구에서, 서로 맞부딪치면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이 다른 어떤 날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인파에 섞여 바로 그 계단을 내려갔으면서도 서로를 보지 못한 채 같은 열차에 올랐을지도 모르는 일…… 하지만 정말로 그랬을까?

 

(본문 25~26쪽)

 

  모든 첫 만남이 상처, 라는 말에서 상처는 결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니다. 인용한 부분에서 나타나듯이 상처는 고독과 무감각으로부터 일깨워줄 통증을 선사한다. 그 통증 덕분에 우리는 혼자가 아닌 여럿이서 살아있음을, 눈앞에 있는 당신을 만나고 있음을, 그리고는 곧 사랑에 빠지게 될 것임을 직감한다. 상처를 이런 의미로 받아들이고서 나의 모든 첫 만남에 대해서 돌이켜 생각해본다. 나는 모디아노가 쓴 문장의 적확함에 피식 웃고 만다. 정말 우리의 만남은 그렇게 일어날 수밖에 없었나 자문하면서.

 

 

마르가레트, 알 수 없는 사람

 

 

 마르가레트는 도대체 어떤 여성인가. 보스망스는 어쩌다가 40년 동안 마르가레트를 잊고 있었다가, 다시 그녀를 찾아 나서게 된 것일까. 『지평』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보스망스가 마르가레트를 어떤 여성인지도 모르는 채로 사랑한다는 점이다. 마르가레트는 만료된 여권을 지니고서 프랑스에 머문다. 그는 그녀에 대해 차츰 알아가지만, 많은 부분은 베일에 가려져 있으며 그녀의 신분을 명확하게 보증해줄 사람 또한 없다.

 

  마르게르트는 가족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지금 현실만을 보면서 살아가는 인물이다. 보스망스는 어쩌면 그러한 점에서 마르가레트에게 매력을 느낀 지도 모른다. 둘은 많은 점에서 닮아있다. 공포의 대상을 가지고 있다는 점, 안정적인 직업이 없다는 점,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지 못했다는 점 등.  보스망스는 마르가레트를 만나던 자신의 젊은 시절을 이렇게 회고한다.

 

 그래도 그들에 관해 내게 남은 몇 안되는 기억은 퍽 생생하다. 인생의 다른 시절들에 비해 우연과 허무가 더욱 크게 작용하는 짧은 만남들. 밤기차에서 이루어지는 만남처럼 내일이 없는 만남들. 그가 젊었을 적 탄 밤기차에서는 승객들 사이에 일종의 친교가 이루어지는 일이 잦았다. 그래, 우리는, 마르가레트와 나는 끊임없이 밤기차를 탔던 것 같다. 그래서 우리의 그 시절은 가다 서다를 반복했고, 혼란스러웠고, 서로 아무런 연관 없는 무수한 짧은 장면들로 뚝뚝 끊겼다……

 

(본문 162~163쪽)

 

  과거 어느 시점을 회상할 때, 그 순간은 늘 활기차고 순수했던 것처럼 느껴진다. 결정적인 이유는 우리가 더 젊었을 때, 어렸을 때 일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젊음은 어리석지만 싱그럽고 고결한 것으로 묘사된다. 모디아노의 이번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다. 망각에 힘입어 마르가레트를 사십 년 간 잊고 살았지만, 그녀를 다시 찾으러 나서자 몇 안되는 기억이 퍽 생생하게 떠오른다. 내일이 없는, 오늘의 만남들. 가다 서다를 반복했고, 혼란스러웠지만 그럼에도 꼭 다시 만나고 싶은 날들.

 

 

 구성 면에서 재밌는 점은 소설 중간에 마르가레트를 위한 묘사, 배경을 할애한 점이다. 여기에서는 마르가레트가 어머니와의 연을 끊게 된 사연, 바게리안이라는 남자의 보모로 일하면서 경험했던 일들(그녀는 바게리안에게 호감이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처음 부아야발을 만나게 된 과정과 그를 두려워하게 된 이유가 제시된다. 나는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과연 보스망스도 이런 마르가레트의 배경을 알고 있을까. 왠지 모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르가레트는 갑작스럽게 보스망스를 떠난다. 새로 보모 일을 맡은 곳에서 문제가 생기며 주인들이 경찰에 붙잡히고, 마르가레트 또한 참고인 신분으로 소환될 위기에 처한다. 그녀는 자신의 신분이 불확실하여 경찰이 자신을 붙잡고서 놓아주지 않을 거라 믿는다. 상황이 안정되면 보스망스에게 다시 연락할 거라는 약속과 함께 그녀는 기차를 타고 떠난다. 그렇게 마르가레트의 얼굴은 '지평 너머'로 사라졌다. 연거푸 손을 흔들던 그날 밤 그녀의 모습처럼. 보스망스가 얼마나 마르가레트의 연락을 애타게 기다려왔는가에 대해서는 자세히 서술되어 있지 않다. 여러 해가 지나도록 편지 한 통 오지 않았고 전화벨도 울리지 않았다, 는 묘사만으로도 충분히 연상되기 때문이다.

 

 

 

새로운 지평

 

 

  지평(L'horizon). 제목으로 붙이기에 참 괜찮은 단어라고 생각했다. 보스망스와 마르가레트는 '지평'이라 부르는 시공간을 갈망한다. 그래서 소설에는 지평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타난다. 보스망스는 지평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는 생의 한 교차로에, 보다 정확하게는 미래를 향해 도약할 수 있는 한 경계에 도달한 느낌이었다. 처음으로 그의 머릿속에 그 단어가 떠올랐다. 미래. 그리고 또 하나의 단어, 지평. 그 시절의 저녁, 그 구역의 조용하고 텅 빈 거리들은 모두 미래와 지평으로 통하는 탈주로였다."

 

(본문 91쪽) 

 

  모디아노 본인은 지평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포개져 혼재하는 시공간'이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은 소설 속에서 확장되는 것 같다. 보스망스에게 지평은 단순히 혼재하는 시공간이 아니다. 여기에는 일탈의 욕구가 있고 미지의 시공간을 향한 강렬한 열망이 있다. 그 욕구의 근원에는 현실에 대한 저항이 존재하고 안식처의 필요가 작용한다. 위에도 언급했지만 젊은 보스망스와 마르가레트를 견디지 못하게 한 것은 그들을 괴롭히는 대상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보스망스의 지평을 유토피아와 같은 이상향으로 치부하기에는 부족하다. 이것은 지평선(horizon)이 대양과 하늘이 맞닿아 있는 것처럼 과거, 현재, 미래가 맞닿아 있는 기묘한 시공간이다. 과거의 젊은 보스망스에게는 모든 불안을 떨쳐버릴 수 있는 미래와 같은 층위로 지평이라는 단어가 쓰였다. 유년기, 청소년기가 부여한 짐에서 해방되어 단번에 미래의 삶으로 뛰어오르는 영역이다. 현재의 보스망스에게 지평이란 과거의 마르가레트가 현존했던 시공간이다. '망각의 기세'를 한 꺼풀씩 벗겨내고 젊은 두 남녀가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온 시기로 돌아가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세계이다.

 

 보스망스가 꿈에서 마르가레트와의 대화를 떠올리고, 그녀가 사는 곳으로 추정되는 베를린을 찾아가는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지평으로 다가서려는 그의 열망이 만들어낸 운명이 아닌가. 그는 마르가레트가 일하고 있을 서점에 다다르자 평온한 느낌을 받는다. 이런 표현을 쓰면서 말이다.

 

 "어느 날 떠나온 그 장소 그 지점으로 같은 시간 같은 계절에 돌아왔다는 확신(184쪽)".

 

 어쩌면 보스망스에게 지평은 마르가레트라는 존재,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마르가레트를 통해 그는 그녀를 사랑한 젊었던 날의 자기 자신을 보고 싶은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40년이라는 긴 시간이 흐른 지금, 마르가레트와의 만남은 새로운 만남과도 같은 것이며 새로운 지평으로 도달하는 것과 동일하다. 모든 첫 만남이 상처를 남기듯이, 60대의 보스망스는 자신의 삶에 상처가 나게 될 것이다. 젊었을 때와 똑같은 아픔의 크기로, 깊고 아련한 기억의 통증을 받게 될 것이다.

 

 정리하면,  이 책은 어느 60대 소설가가 사십 년 전, 20대에 사랑했던 여자와의 기억을 더듬어가는 소설이다. 두 청춘이 불가해하게 만나고서 불가해하게 헤어졌고, 그러다가 사십 년 만에 불가해하게 재회하게 될 운명을 이야기하는 소설이다.『지평』은 어떤 인연의 시작과 끝을 보여주었다. 그리고는 새로운 만남의 시작을 암시만 해놓고 마무리지었다. 이 새로운 만남이 어떠할 지는 '새로운 지평' 너머의 영역이다. 미래의 영역이다. 작가는 우리의 상상으로 그 영역을 채울 것을 부탁하고 있다. 나는 그렇게 읽었다. 그래서 빠져들었다.

 

 나에게 있었던 모든 첫 만남이 떠올랐다. 그리고 나 역시 새로운 지평으로 넘어가고 있는 중임을 깨달았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http://blog.naver.com/purify0406 에서 더 많은 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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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4일 거리
요시다 슈이치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05년 9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내가 2011년 6월, 오사카에서 부산으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 읽은 책이다.

책을 읽고 난 소감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적었다.

 

한동안 가슴이 먹먹해져 눈을 감고 계속 노래를 들은 게 생각난다.

많은 생각을 했다. 정확히 말하면, 오랫동안 회상에 잠겼다.

법정 스님은 "좋은 책이란 단숨에 읽히는 책이 아니라 단 하나의 문장으로도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책"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7월 24일 거리'는 좋은 책임에 틀림없다.

지금보니 책 표지에 써있는 하나의 문장이 의미심장하다.

 

 

"실수라도 상관없으니 이 사랑을 선택하겠다.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나요?"

 

 

# Main

 

『7월 24일 거리』에는 일본 문학 (드라마를 포함한) 특유의 발랄함과 씩씩함이 있다.
소설 화자인 여주인공 혼다 사유리는 자신이 사는 거리를 책에서 읽은 리스본 거리와 동일시하면서 사는 인물이다. '오래 전부터 가고 싶었던' 리스본의 풍경을 상상하면서 자신의 동네 지명을 리스본의 지명으로 바꿔부르며 즐거워한다.

 

상상력만큼은 누구보다도 풍부한 사유리는 사실 사랑에 있어서는 소극적이고 겁이 많은 사람이다. 어느 날 그녀는 오래도록 짝사랑한 남자 사토시의 연락을 덜컥 받는데, 사유리와 친한 선배와 결혼했다가 이혼한 경력이 있는 그 사람과 가까워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일상의 지루함을 이겨내고자 리스본의 이국적인 모습을 몽상하면서 살던 사유리에게 '사랑'이라는 현실적인 주제는 너무 낯설고 직접적이며 복잡하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얽혀있을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강한 믿음과 이해하려는 마음을 필요로 한다.

 

이 소설은 주인공 사유리가 자신의 사랑을 확신하고 표현하기 위한 용기를 배우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내가 일본 소설 속 인물들의 발랄함과 씩씩함을 문화적 특성으로 보는 것은 한국 문학에서는 이러한 기질을 극히 보기 드물다는 생각 때문이다. 여성 화자들은 몹시 여리면서도 사려깊은 사람들이어서 그녀들의 내면을 묘사하는 표현들은 때로는 낯간지럽기까지하다(그래서 내 주변에는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꽤 많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설정이 결코 독자의 웃음을 유발하기 위해 쓰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유리는 분명 독특한 인물이다. 사유리가 리스본의 거리를 자신이 사는 세계에 덮어씌우는 것은 그녀가 그런 낭만성을 지닌 사람이라서 그렇다. 나는 이 낭만성을 우리는 '오글거린다'거나 '중2병'이라는 수식어로 폄하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사람들이 혹은 대중이 언제부턴가 미숙한 것, 소심한 것, 순수한 것을 세상물정 모르는 것으로 비약시켜서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한 태도 또한 일종의 편견이고 이기적인 모습이지 않은가.

 

나는 사유리처럼 삶에서 오는 지루함을 이렇게 발랄하고 유쾌한 상상으로 지우는 인물을 국내 소설에서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아홉살 인생』의 골방철학자가 떠오르지만 그의 결말은 비참했다. 박민규 소설 속 화자에게도(혹은 작품 자체에) 분명 유쾌한 상상력이 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의 삶은 어딘가 삐걱거린다. 병적인 내면을 안고 있거나 그렇게 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사유리의 상상은 건강하다. 그래서 힘들고 병적인 상상력으로 고통받는 인물들이 넘치는 지금의 소설들 사이에서 이 작품은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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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김숨이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이미 몇 차례 우수작으로 선정되었기에 김숨이 올해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랍지 않았다. 

 

 책 소개로 실린 심사평에 인상깊은 부분이 있어 옮겨본다.

 

"자칫 진부할 수 있는 소재를 가지고, 이 정도 시의적절하게 깊이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작가적 역량을 높이 평가했다.

 

 소설가로서의 김숨은 2010년대의 한국 현실에 가장 밀착한 형태로 글쓰기를 하고 있다. 나는 그렇게 본다. 그녀가 보여주는 현실이 어떠했는가. 차별없이 자신을 길러준 계모에게 국수를 정성스럽게 만들어내는 따스함이 남아있는 현실(「국수」). 엄마의 장례를 위해 고향인 옥천으로 가는 길에 자매가 나누는 슬프고 안타까운 사연들(「옥천 가는 날」).

 

2015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에서는 어떤 인물들이 나타나 독자를 흔들 것인가. 그녀는 깊이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뛰어난 역량을 지닌 소설가다. 동시에 문단에서 가장 활발한 소설가 중 한명이다.

 

김숨 「국수」서평: http://blog.naver.com/purify0406/100173490990

 

 

 

 

  문학동네는 단단히 결심한 모양이다. 파트릭 모디아노의 책을 낼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신속하게 내겠다고.

 

  마치 파트릭 모디아노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것을 이미 예감한 것 같은 기세다. 12월에 「지평」이 나왔는데 한달 만에 소설 두 권이 추가로 발간되었다. 하나가 「팔월의 일요일들」이고 다른 하나가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다. 두권 모두 문학평론가로 유명한 불문학자 김화영 교수가 번역을 맡았다.

 

  모디아노의 소설을 연달아 읽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신간평가단에서 이 책도 읽으면 좋겠어서 추천해본다.

 

 

 

 

 

 

책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는 리뷰에 남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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