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 - 어떻게 세계의 절반을 가난으로부터 구할 것인가 
피터 싱어 지음, 함규진 옮김 / 산책자 / 200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피터 싱어는 쉬운 철학자다. 철학이란 게 뭔가? 한 쪽에선 노자니 장자니 하는 호호할배들의 구절들을 줄줄히 암기하고 있지 않으면 안될 것같은 분위기이고, 또 어디선 '에피스테메'니 '기관 없는 신체'니 하는 말 그대로 정신나간 정신분열적 얘기들을 두서없이 떠들고 하는 와중에, 쉬운 철학자란 게 있을 수나 있나? 칼빵 깨나 꼽아본 조폭이 이제부터 좀 착하게 살아보고 싶어서 그나마 유명하고 '쉬워 보이는' 칸트 정도 참고한다고 해도 뭔 의지의 준칙이 주관적인 동시에 보편적인 법칙이 어쩌구 해대는데 이게 도통 뭔 소린지 알게 뭔가. 피터 싱어는 고기를 먹지 말라 아니면 돈을 내놓고 기부를 해라 식으로 딱부러지게 말해주니 얼마나 좋은가.

하지만 쉽다고 얕보면 안 된다. 그의 쉬운 실천철학에 앤간한 내공으로는 반박할 수 없는 논리의 흐름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하늘에 계시가 내려와 간음하지 말고 네 이웃의 물건을 탐하지 말라고 하셨던 종교의 여러분들께서는 네발 달린 짐승이야 하늘에 계신 우리(니네) 아버님이 내려주신 선물이니 감사히 먹고으면 되지 뭔 채식주의같은 요상한 좌빨스러운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향해 쯧짯짯 혀나 차겠지마는, 그런 종교적 도그마 없이 던져진 현존재분들이 착하게 살고 싶다고 피터 싱어의 논리를 하나하나 접해나가다 보면 기존에 배웠던 관습적 윤리관이 그의 논리적 결론 앞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고 아연실색하게 된다. 고기를 먹으면 나쁜 놈이라고? 기부를 안 하면 나쁜 놈이라고? 낙태를 한다고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니라고? 그런데 그 논리를 반박할 수가 없잖아!

쉽게 말하자면 피터 싱어의 스타일은, 당연한 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그걸 끝까지 논리적으로 밀고 나가서 당연해 보이지 않은 것도 당연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만드는 것이다. 번역서 제목으로 쓰인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가 가장 쉬운 예이다. 아이가 물에 빠졌다. 넌 구할 거야? 물론. 이 당연한 윤리적 실천이 단어만 조금 바뀐다고 해서 가치가 달라지진 않겠지? 물론!! 그렇다면, 지금 당장 아이가 가난 때문에 죽을 것 같애. 그러므로 넌 그 아이를 살려야 해. 아니 이럴 수가!

논리라는 게 뭔가. 일관성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기독교적 도그마에 따라 살 것이라고 결심했으면, 남의 간음을 불륜이라 비판하면서 내 간음을 로맨스라 칭하면 안 되는 것이다. 내가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의 고통의 총량을 감소시킨다는 공리주의적 입장을 가진다면, '논리적으로 당연하게도' 일관적으로 인간에서부터 닭, 소, 돼지 등의 동물에까지 그 기준을 적용시켜야 한다. 아동 폭력에 눈물흘리면서 동시에 삼겹살을 구우면 안 되는 것이다. 피터 싱어는 이런 사람을 종차별주의자라 칭한다. 유신론자보다도 논리적 일관성이 떨어지는 사람이다.

윤리적으로 사는 데 논리가 무슨 상관이야! 라고 어떤 사람이 외친다. 사실, 이 사람은 지금까지 자기가 남부끄럽지 않게 선한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특별히 기부를 하거나 채식을 하거나 한 건 아니지만(사실 그는 고기를 무척 좋아한다!) 지금껏 살아온 대로 지하철에서 노인들에게 자리를 적극적으로 양보하거나,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팔소매를 걷어부치며 활발히 도와줄 정도로 훌륭한 심성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데 피터 싱어에 의해, 그는 졸지에 나쁜 사람이 되었다. 고기를 많이 먹고, 아프리카의 죽어가는 아이를 모른 체 했기 때문에. 정말로 윤리에, 도덕에 논리가 무슨 상관인가?

정말로 고민이 되는 순간은 이 때이다. 피터 싱어의 말대로 자신의 윤리관에 논리적 일관성을 추가하여 생활방식을 대대적으로 뜯어고칠 것인가, 아니면 지금껏 살아온 대로 착하게 살지만 고기도 먹고 기부도 안하는 위의 어떤 사람같은 종차별주의자로 살 것인가. 이것은 자신의 선택이다. 누가 뭐라 하지 않는다. 다만, 내 경우엔 논리적 일관성을 지켜 내 윤리관을 수정한 것이 맘 편했다. 내가 어릴 적부터 이상했던 점은, 인간들은 인간이든 식용이 아닌 동물이든간에 고통 반응을 보이면 불쌍하게 생각하고 생명을 빼앗는 행위에 대해 큰 죄책감을 가지는 반면, 소와 닭과 돼지에 관해선 '먹는 거니까 어쩔 수 없어'라고 하며 죽임에 대한 아무런 죄책감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기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이제 '남을 돕지 않는 것은 나쁜 것이다'라는 주장에 대해 반박을 할 수 없는 입장에 도달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효과적인 논박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마음 편히 먹고 기부를 하기로 했다. 현재 나는 다달이 얼마를 기관에 기부하고 있다. 특별히 아프리카의 아이들이나 점심을 굶는 결손 가정의 아이들이 불쌍하다고 느끼는 건 아니다. 그냥, 논리적 비일관성이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책을 읽는 여러분들도 무언가 반박거리를 찾아 보라. 물론 몇 가지 반박에 대한 피터 싱어의 대답이 책에 실려 있기도 하다. 그 질문을 피해서 독창적인 반박을 생각해 보라. 논리적 일관성을 갖추면서 기부하지 않아도 될 정당한 이유를 찾아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논쟁적이고 유명한 윤리철학자를 이긴 사람이 된다. 그렇게 된다면, 기부를 하지 않아도 좋다. 그게 아니라면, 웬만하면 기부할 기관을 한 번 찾아 보고 기부를 시작해라. 책에 나와 있는 웹싸이트 http://thelifeyoucansave.com에 한 번 가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뭔가를 시작할 시간이다. 겨우 논리적 일관성을 지키는 것만으로 세상이 아름다워 지는 것을 느껴 보라.

※ 이 글은 책에 나와 있는 대로 '나의 기부 사실을 널리 알리기'를 실천하기 위해 쓰여진 글이다. 일련의 심리학 연구에 의하면, 기부하는 행위를 널리 드러내면, 다른 사람들의 기부액도 같이 올라갈 수 있다. 말하자면, 기부한다는 사실을 겸양떨어 숨기지 말고, 만천하에 드러내서 자랑하라는 것이다. 나야말로 원래 인생의 모토가 겸손인 사람이지만, 이번만은 예외적으로 한 번 나의 위대함을 자랑해 본다. 나는 내 소득의 일부를 기부하는 훌륭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함께 하는 게 어때?


 
 
 
죽음의 밥상 - 농장에서 식탁까지, 그 길고 잔인한 여정에 대한 논쟁적 탐험 
피터 싱어.짐 메이슨 지음, 함규진 옮김 / 산책자 / 200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터넷엔 가끔씩 '개고기'의 찬반에 대한 이슈가 기사의 형태로 제시되고, 거기에 여러 네티즌들의 댓글이 달린다. 보통 패턴은 이렇다. 기사는 개고기를 반대하는 동물보호단체 또는 애견인들의 시위에 대한 내용이고, 댓글은 그들을 비판하는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또한 비판성 댓글의 주류는 '개만 동물이냐', '그렇다면 불쌍한 돼지나 소는 왜 먹냐' 는 식으로, 왜 그들은 다른 식용동물들의 권리는 주장하지 않으면서 유독 개의 권리만을 옹호하는지를 반문하는 글이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상추도 불쌍하다, 콩나물도 불쌍하다'는 식으로 억지춘향을 부리는 사람이 있다.)

사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선 정말로 소나 돼지를 먹지 않는 소위 '채식주의자'여야만 한다. 저녁때 쏘주 한 잔에 삼겹살을 먹고 와서 '불쌍한 돼지는 먹어도 되고, 왜 개는 먹으면 안 되냐?'라고 주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건 당연한 건데, 개고기를 먹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 열혈 네티즌 중에 진짜로 소와 돼지를 먹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하다. 돼지와 소를 먹으면서 개까지 먹고 싶은 사람들은, '돼지와 소가 불쌍하다'는 식의 발언을 삼가야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시킬 수 있다. 아니면 정말로 채식주의를 하던지.

우리가 무언가 윤리적인 문제를 주장할 때, 우리는 당연히 그 주장에 모순되지 않는 삶을 살고 있어야 한다. 무심코 내뱉은 말 한 마디의 무게는 천금이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올바른 삶은 까마득히 높은 나무 위의 열매이다. 떳떳하고 훌륭하게 말 한 마디를 하기 위해 우린 배워야 하고, 알아야 하고, 찾아다니면서 깨우쳐야 한다. 아무 생각도 없이 사는 것은 정말로 어리석은 짓이다. 우리가 아무 생각도 없이 사는 동안 우리의 밥상에서는 고통스럽게 죽어간 돼지와 소와 닭이 (어떨 때는 개가) 올려져 있을 것이다.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는 것, 긍휼히 여기는 것이 시작일지언정, 이것이 다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과 피를 나눈 가족 친지만을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같은 나라 사람만을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같은 인종만을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과 같은 종족인 '인간'만을 생각한다. 전부 다 잘못되었다. 말하자면 윤리적 명제에 대한 기준이 결여되었다. 왜 누구는 불쌍히 여기고 누구는 불쌍히 여기지 않아도 되는 지에 대한 기준이 없는 것이다. 왜 그들은 '불쌍히 여김'에서 소외되었는지에 대한 정당한 기준이 없는 것이다. 결국 이 사람들의 주장도 삼겹살을 좋아하면서 돼지를 불쌍히 여기는 네티즌의 주장과 다를 바 없다. 뜬구름에 불과하다.

'갈은 인간(혹은 가족, 나라, 민족, 인종)이니까'라는 생각은 명확한 기준이 될 수 없다. 그것보다도 더 깊은 수준의 기준이 필요하다. '고통'이라는 기준은 훌륭하다. 고통은 누구나 알고 있듯이, 정말 나쁜 것이다. '환경'이라는 기준도 매우 좋다. 환경이 나빠져 우리의 후손들이 살지 못하게 된다면, 그것은 나쁘다. 명확한 기준은 단순히 '누군가를 불쌍히 여겨, 그를 괴롭히거나 심지어 죽이는 것은 나쁘다'라는 단순한 관념에서 더 나아갈 수 있게 해 준다. 불쌍히 여기는 누군가에 대한 집합을 완성하는 것이다.

그 후로는 당연히 지킬 일만이 남았다. 고통을 느끼는 동물이 존재하지 않도록 고기를 먹지 않는 것. 누군가가 고통을 받지 않고 살 수 있도록 상품을 정당한 대가로 지불하는 것. 환경을 파괴하는 공장식 농장을 반대하여 유기농 식품을 먹는 것. 이것들을 지키기 위해선 많은 고난과 열정이 요구된다. 하지만 할 것은 해야 한다. 말 그대로 우리는 인간이 아닌가. 왜 잘못된 일에, 하면 안 되는 일들에 눈을 피하는가?

이 책은 그에 대한 지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채식주의가 너무 부담스럽다면 책에 제시한 '양심적인 잡식주의자'의 삶을 살아도 좋다. 이 방식은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보다 확실히 더 도움이 된다. '완벽한 채식주의'를 지키는 것은 어려울뿐더러 하다가 말면 그것이 더 손해다. 책의 말미에 제시된 대로, 엄격한 윤리주의자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허용하는 수준에서 적당한 선을 제시하는 것도 좋다. 중요한 것은 '윤리적 삶을 살겠다고 하는 의지' 그 자체이다. 하나의 완성된 인격체로서 말이다. 그래야만 한 줄의 양심적인 댓글을 달 자격이 생긴다. 우리는 종교적 교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미국이나 유럽에 비해 이런 것에 '아무 생각 없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나는 느끼고 있다. 책에 소개된 '프리건'이라는 신념에 대해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윤리적 신념에 따라 쓰레기에 버려진 식품들을 주워 먹는다. 그들은 식품에 잠재되어 있는 자본주의적 시스템을 반대하고, 돈을 지불하고 비윤리적인 상품을 사는 대신 아예 그런 상품을 거부하는 쪽에 선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삶을 살 수 있을까? 일단 채식주의 자체가 그것을 배우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나 혼자가 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있을 것이다. 나도 그렇다. 나 하나가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과연 몇 마리의 돼지가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인가? 이에 대해 여러 사람들의 생각이 있겠지만, 나는 좀 다른 생각을 주장하고 싶다. 역시 중요한 것은 얼마나 양심적으로 떳떳한 삶을 사는가다. 내 생활방식이 이 세상에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다. 단지 한 줄의 떳떳한 댓글을 달 수 있을 정도로 나의 삶이 양심적이라면, 그것은 내게 있어서 정말로 좋은 것이다.

 
 
 
무지개를 풀며 - 리처드 도킨스가 선사하는 세상 모든 과학의 경이로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최재천.김산하 옮김 / 바다출판사 / 200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번에 '무지개를 풀며'를 출판하면서 출판사가 제공한 소갯말의 첫머리이다.

'<이기적 유전자>(1976)를 시작으로 펴내는 책마다 전 세계의 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킨 “문제적 과학자” 리처드 도킨스.'

리처드 도킨스가 왜 '문제적 과학자'일까? 논쟁적 과학자라던가(실제로 그의 책들은 엄청난 논쟁을 불러일으키곤 했으니까), 파격적인 과학이론의 창시자라던가, 뭐 하여간 좀 좋은 말이 더 많았을 텐데.

도킨스의 과학은 '문제적 과학자'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비정상적이라거나 특이하거나 하지 않다. 오히려 그는 '과학이 가야할 정도'를 제대로 지키고 있는 몇 안되는 과학자이고, 그가 과학자인 것은 그의 과학이 문제적이라던가 해서가 아니고, 과학의 역사에서 위대한 과학이론이 보여주던 전형성에 그대로 들어맞는 '전형적인 과학'이기 때문이다.

위 의 내 표현에 이상함을 느꼈는가? 잘 생각해 보자. 내가 도킨스를 '파격적인 과학이론의 창시자'라고 말하는 동시에 '전형적인 과학이론의 창시자'라고 말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일단 첫 번째, 위대한 과학이론은 그 위대함이 클수록 파격적이다. 인류의 역사에 오래도록 새겨진 과학이론들은 전부 인간의 이성과 인식의 한계를 '극단적으로' 넘어선 이야기들이었다는 것이다. 사과나 별이나 모두 같은 법칙을 공유한다는 뉴턴의 법칙과 공간과 시간의 틀을 뒤엎은 상대성이론, 양자라는 기상천외한 입자가 물질의 근원이라는 것을 밝힌 양자역학, 생명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아득한 옛날로부터 만들어지고 진화되어 왔다는 다윈의 진화론, 생명 또한 정보의 발현이라는 것을 밝힌 왓슨과 크릭의 DNA, 인간의 사고 자체도 정보처리의 구성물일 뿐이라는 인지과학까지, 모든 이론은 우리가 아무 것도 모르던 때의 인간이라면 상상조차 못할 만큼 기상천외하고 파격적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이러한 파격성이 위대한 과학 이론의 전형적인 성질이라는 것이다. 파격성을 띠고 있지 않으면 과학이론은 위대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여 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파격적인 이론이라고 꼭 위대한 이론이라는 것은 아니다(당연하다.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가 가진 이성과 인식의 한계는 세계의 진실을 표상하기에 턱없이 모자라기에, 정말로 진실성을 담고 있는 과학 이론을 우리가 이해한다면 우리는 너무나 놀랄 수밖에 없다. 반대로 말하자면 위대한 이론이 위대한 이유는 그 이론이 정말로 '진실'이기 때문이며, 그러한 진실은 때론 우리의 인식의 대혼란을 가져올 정도로 파격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리하자면, 과학이론에 따른 논쟁이 '문제적'일 수는 있지만 그 과학 이론 자체가 '문제적'일 수는 없다. 그에 따라서 과학자 자체도 '문제적'일리가 없다. 도킨스는 정말로 옳은 말만 하기 때문이다.

방 금 내가 한 말에서 또 발끈하시는 분들이 많으시리라고 생각한다. 먼 곳으로부터는 도킨스와 서로 극렬한 증오를 주고받고 있는 창조론자, 지적설계론자들로부터 비롯해, 도킨스 독설의 표적에 자주 잡히곤 하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 환원주의라는 말만 들어도 마치 나치의 망령이 되살아난것 처럼 치를 떠는 인문학자들, 같은 진화론자이면서도 이상하게 자꾸 도킨스와 투닥거리는 굴드파들, 그리고 도킨스의 비유법을 '비과학적'이라고 매도하는 안티-도킨스주의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미안하지만, 어떤 반대파들의 질문엔 대답할 가치가 없다. 특히 창조론자들의 주장이 그렇다. 창조론은 개똥이다. 또 다른 반대파들에게는 질문에 대답할 방도가 없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나 환원주의를 싫어하는 인문학자들에게 그렇다. 그들의 이론은 과학과 너무 괴리되어 있어서, 그들이 말하는 단어들을 과학적으로 반박하거나 논증할 어떤 방법도 없다. 예를 들어, 인문학자가 과학적에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나 '리비도'를 진화적 적응으로 설명할 수 있냐고 뻗댄다면, 과학자는 여기서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이 책에서, 도킨스는 굴드의 이론을 '나쁜 시상'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극렬한 비판을 가했다. 나도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굴드의 이론은 정말로 나쁜 시상을 가지고 있어서, 이것은 과학이라고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굴드의 이론은 인종의 평등함을 강조하기 위해 인간의 유전자 분포가 아주 좁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만약 도킨스가 이 과학적 사실을 먼저 발견했다면, 무리하게 인종의 평등함을 강조하는 언변을 삼갔을 것이다. 만약, 인간 유전자의 분포가 엄청나게 넓다면, 그래서 인종간의 차이도 심하게 난다면, 그 때엔 인종이 불평등하다고 주장할 셈인가?

“그렇다면 도킨스는?” 도킨스의 언어습관이 '비과학적'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의 질문이 이어진다. 도킨스의 과학은 나쁜 시상이 아닌가? '이기적 유전자'라는 이론은 우리의 인간의 정신을 이토록 황폐화시키지 않았는가? 도킨스의 말에 따르면 유전자가 이기적이기 때문에 인간이 이기적으로 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거 아닌가?

전 혀 그렇지 않다. 도킨스의 말은 그것과 정반대이기 때문에 좋은 시상이다. 사실 '이기적'이라는 단어의 뜻에 사람들이 오해할 법한 '가치적 의미'가 진하게 배어있기 때문에 도킨스 스스로도 나중엔 그 단어를 사용한 것에 대해 약간은 후회했다고 말했었다. 중요한 것은 '이기적'이라는 단어의 뜻이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는 그 단어의 뜻과 전혀 다른 단어라는 점이다. 유전자가 이기적인 것과 우리가 이기적인 것과는 어떠한 상관관계가 없으며, 도킨스의 '이기적'은 어떠한 가치적 의미도 지니고 있지 않은, 순수하게 과학적인 용어이다. 도킨스는 이러한 생각을 <이기적 유전자>에 몇쪽에 걸쳐서 분명히 밝혀놓고 있으며, 결국 도킨스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사람은 책을 읽지 않았다는 것을(또는, 읽긴 읽었는데 이해하기에는 나의 머리가 딸린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셈이다.

아직까지 미심쩍어 하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른다. 어쨌든 과학적 이론에서 '시상'이라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닌가? 과학은 완전히 엄밀한 과학적 용어로 표현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기적'이라는 말은, 그 말 자체에 중립적인 성격을 부여했다 할 지라도 결국 시적 비유이기 때문에 나쁜 것 아닌가?

그렇게 따진다면, 시상이 아닌 과학은 '물리학'밖에 남지 못한다. DNA의 본질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염기들, 그리고 염기를 이루는 분자들, 그리고 분자를 이루는 원자들이 전자기적인 성질로 서로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 아닌가? 복제와 돌연변이와 정보교환이라는 개념은 결국 시상 아닌가? 진화는 개념은? DNA의 염기 배열이 바뀌고 전자기력으로 인한 분자 생성이 어쩌구 하면서 단백질이 복제되고 하는 물리학적으로 복잡한 현상을 단순히 '진화'라는 단어 하나로, 진화적 적응으로 어쩌구 표현형이 저쩌구하는 말로 대체해 버리는 시상 아닌가?

아니, 물리학 마저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 현대 물리학의 핵심인 양자역학은 물질의 '파동성'을 중요한 컨셉으로 취급하고 있는데, 사실 어떠한 과학자도 이 파동의 정체를 모른다. 그러니까 결국 파동이라는 것도 시상이다. 그것 뿐인가? 힘이라는 개념도 사실은 입자간의 상호작용이기 때문에 시상이다. 빛도 사실은 '가시광선'이라는 우리의 인식에서 출발한 개념이기 때문에 시상이다(그러므로 빛은 전자기파로 환원되어야 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과학의 본질이다. 과학은 정말로 시적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본질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사실 저번에 <만들어진 신>을 읽었을 때처럼 이 책에서도 도킨스가 하는 말에 완전히 동의하진 못했으나(과학을 이해 못하고 배척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난 회의적이다.) 이것 하나만은 완벽하게 동의할 수 있다. 그 표현이 진부하게 들릴 지라도 어쩔 수 없다. 이 세상에 진짜로 아름다운 비유법이 있다면 그것은 과학이다. 진짜로 감동적이지 않은가?

 
 
바다출판사 편집부 2008-05-04 00:50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위의 책을 펴낸 바다출판사의 편집부입니다.
약간의 오해가 있으신 것 같아서 간략히 해명드리고자 합니다.
"문제적 과학자"라는 표현을 부정적인 의미로만 이해하신 것 같은데....
"문제적" 이라는 표현에는 그리 부정적인 의미가 있지는 않습니다.
흔히 사회적 반향이나 논쟁을 크게 일으킨 작품이나 작가에
"문제적" 이라는 수식을 쓰는 경우는 흔합니다.
"문제적" 이라는 수식어는 '논쟁적인'의미와 '주목해야 하는'혹은 '주목할 만한' 등의 의미도 같이 같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비슷한 경우로는 "문제적 저작" 이라는 표현이나 "문제적 감독" 등의 표현도 있을 수 있는 데요...

저희가 펴낸 책을 관심있게 봐주신 점 감사드리며..혹 도움이 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비의일견식 2008-05-05 04:55   댓글달기 | URL
바다출판사 편집부님, 출판사에서 댓글이 달릴 줄은 예상도 못 했는데, 일단 사과부터 드리겠습니다. 본문에 과격한 표현은 단지 제 논지를 강조하기 위해서 쓴 사족이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글을 쓸 당시에도 표현에 많은 고민을 했었습니다만, 과격한 표현 자체는 스스로도 옳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문제적'이라는 단어 자체에는 역시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단지 관용적 표현이라 한다면 그 책임이 출판사에게 돌아가는 것은 옳지 않겠지만요.
어쨌든 부족한 글 봐 주신데, 그리고 이렇게 좋은 책을 출판해 주신 데에 큰 감사 드립니다.

바다출판사 편집부 2008-05-05 22:37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비의일견식님...
말씀하신 대로 '문제적' 이라는 단어는 나비의일견식 님처럼 독해하실 수도 있긴 합니다.
단어 자체가 '문제적'이지 않습니까? ㅎㅎ
혹 괜찮으시다면 '과격한 표현'은 수정해 주시는게 가능할지요?
그게 도킨스를 한 사람이라도 읽게 하는 데 도움이 될까 해서요....
다시 한번 저희 책을 읽어 주셔서 감사힙니다.

나비의일견식 2008-05-05 20:55   댓글달기 | URL
'과격한 표현'은 삭제하고 문맥을 맞게 수정했습니다. 심려를 끼쳐 드린 것 죄송합니다.

바다출판사 편집부 2008-05-05 22:37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감사합니다....나비의일견식님.
참...아이디가 멋지십니다. ㅎㅎ
 
실천윤리학 
피터 싱어 지음 / 철학과현실사 / 199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69년에 젠센은 '우리는 IQ의 학문적 성취를 얼마나 높일 수 있는가'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그 논문의 결론은 다음과 같이 매우 제한적이고 모호한 진술로 끝내고 있다.

“우리는 여러 갈래의 다양한 증거들을 가지고 있으나, 그 중 어느 한 갈래의 증거도 그것만으로는 결정적이지 못하다. 그것들을 한꺼번에 고려해 보면, 유럽계 미국인과 아프리카계 미국인간의 평균적인 지능 차이에는, 유전적인 요소가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가정이 불합리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내 의견으로는 엄격한 환경적 가설보다는 유전적 가설과 일치하는 증거들이 우세하다. 물론 유전적 가설들이 환경의 영향이나 유전적 요소와 환경적 요소의 상호작용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논문의 함의는 대중신문에 왜곡된 형태로 보도되었고, 젠센은 인종차별을 과학적으로 합리화시킨다는 명분으로 대중들에게 거센 비방을 받았다. 그는 비방자들의 반대로 인해 강의를 하지 못했고, 학생들은 그를 대학에서 쫒아낼 것을 요구했다. 그는 심지어 히틀러에 비유되기까지 했다.

유전학으로 인종적 차이를 밝혀내는 데 따른 정치적인 해석은 극명하게 둘로 나뉘는데, 한쪽은 이 과학적 발견이 실제로 잘못되었고 또 연구자의 정치적 의도가 분명하게 깔려 있으므로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한쪽은 과학적 사실은 분명히 진실이며 그에 따라 우리의 행위도 그에 발맞추어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내 생각엔 두 주장 모두 틀렸으며 우리는 윤리적으로 올바른 길을 가기 위해 두 주장 모두를 강력히 거부하는 입장에 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의 주장에 대한 반론은 간단하다. 그들의 결론 자체는 윤리적으로 정당하지만 그들에게 잘못된 점이 있다면 주장을 지키기 위해 과학에 대한 무리한 불신감을 표출하였다는 것이다. 과학이론은 과학자 사회 내에서 계속해서 다듬어지고 깎여져 나가며, 혹독한 반증에 대한 절차를 겪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 과학자의 개인적인 정치적 견해가 섞인 이론은 결국 폐기될 수밖에 없다. 살아남은 과학 이론은 그것이 정치적으로 그릇된 주장에 대해 힘을 실어줄 수 있다 해도, 과학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이따가 보겠지만, 사실 이런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두 번째의 주장은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상식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느끼고, 마땅이 윤리적으로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주장은 특별히 현대 사회에서만 거부되는 입장이고, 인류 역사를 돌이켜볼 때 매우 짧은 현대시대를 제외한 인류의 모든 역사에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던 주장이다. 많은 사람이 이 주장을 반대할 만한 뚜렷한 논증을 찾지 못하고, 인류의 대부분의 역사 동안 이 주장이 받아들여졌으며 현대 사회에만 유난히 거부되었다는 사실에 이상함을 느끼며, 과학이 이 주장을 뒷받침한다는 (일단 그 과학이론이 옳은가 그른가를 떠나) 사실에 배신감을 품고 허둥지둥하거나 망설이게 된다(그리고 일부는, 과학이 처음부터 잘못되었다는, 첫 번째의 주장으로 돌아서게 된다.)

이 글은 과학이 어떠한 사실을 밝혀내더라도 그것이 정치적 주장을 위해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밝히는 글이다. 또한 인종차별이나 성차별 등을 합리화하는 차별주의자들에게, 과학적 이론을 자신들의 주장에 대한 근거로 함부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비판과, 그들을 반대할 수 있는 주장에 대한 마땅한 근거를 제시하고자 함도 목표로 한다. 우선 인종간에 유전적 차이가 정말로 존재한다는 것을 가정하자. 특별히 논란이 되는 주제를 일부러 선택하여, 유전적 차이를 '지능'이라고 가정하자. 이 가정은 말 그대로 '가정'이며, 실제로는 현대의 과학은 아직 지능과 인종간의 어떠한 명확한 과학적 결론도 내릴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자. 나의 이 당부는 과거의 젠센의 경우에서처럼 내가 불합리하게 인종주의자로 몰릴 수도 있을 가능성을 미리 막고자 함이다.

일단 첫 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점은, 유전적 차이에 대한 과학적 사실은 '평균에 대한' 사실일 뿐이라는 것이다. 백인이 흑인보다 지능이 우월하다 할 지라도 가장 뛰어난 흑인이 가장 못난 백인보다도 지능이 떨어진다는 뜻은 아니다. 백인의 평균보다도 지능이 더 뛰어난 많은 흑인들이 '지능'을 근거로 차별을 받는다면, 지능이 떨어지는 백인들은 왜 지능이 뛰어난 흑인에 비해 더 나은 대우를 받는지에 대한 근거를 주지 못한다.

또한 반대로, 백인 집단 안에서도 지능에 대한 다양한 유전적 변인이 존재하며, 인종주의자가 그들의 주장을 성실히 수행하려면 백인 집단 안의 다양한 지능 분포에 대해 일일히 차별을 적용해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에 대해서는 깨닫지 못한다. 단적인 예를 들자면, 아인슈타인은 그 엄청난 지능을 소유한 덕분에 수많은 백인을 노예로 부릴 권리를 가져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어떠한 백인도 이 주장을 정당하다고 말하지 못한다.

두 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좀 더 근본적인 이유이다. 예를 들어 어떤 집단에서 인종간에 지능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과학적 사실을 근거로 '흑인종과 백인종은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하자. 그런데 또 다른 집단에서는 이 과학적 사실을 근거로 '부족한 지능을 보충하기 위해 흑인종이 백인종보다 조금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립적인 입장에 서 있는 사람에게 두 주장의 옳고 그름을 판별하게 해 보자. 그는 어떠한 결론도 내리지 못할 것이다. 두 주장 다 언뜻 생각해 보면 옳은 것 같기도 하고, 다르게 생각해 보면 서로의 주장 때문에 틀린 것 같기도 하다.

문제는 두 주장 다 '평등'을 주장하고 있으면서(인종차별주의자는 흑인종에 대한 차별을 하면서 백인종 내의 평등을 주장한다. 인종'역'차별주의자는 백인종과 흑인종의 지능에 대한 불균형을 맞춰 평등하게 하기 위해 흑인을 역차별해야 한다고 말한다.) 평등에 대해 과학적 사실을 근거로 내세웠다는 데 있는데, 과학이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의 주장을 동시에 뒷받침할 수 있다는 위의 이상한 예시는 결국 '과학이 어떠한 윤리적 주장에도 근거로 제시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문제는 두 주장 모두 평등에 대한 어떠한 근거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평등에 대한 근거를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피터 싱어가 제시한 '이익 평등 고려의 원칙(The principle of equal consideration of interests)'이라는 원칙이 가장 현대적이고 적절한 평등의 근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다른 사람이 '고통'을 느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고통을 경감하는 행위가 그 사람에게 좋은 일이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즉, 고통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고, 고통을 경감하는 행위는 바람직한 행위이다. 바람직한 행위, 즉 윤리적 행위를 추구하기 위해선 나뿐만 아니라 고통을 느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는 모든 '의식을 가진 생명체'들의 고통의 총합이 최소한이 되도록 행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인종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흑인이 고통을 느낄 수 없거나 백인보다 덜 고통을 느끼는 생명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성의 차이, 키의 차이, 부, 권력, 정치적 지위, 지리적 위치 또한 아무런 관계도 없다.

이익 평등 고려의 원칙을 충실히 지키기 위해선 많은 '비상식적 절차'가 따른다. 우선,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모든 '사람이 아닌 동물' 또한 윤리적 대상으로 포함해야 한다. 이 말은, 우리는 윤리적으로 살기 위해 육식을 금하고 채식주의로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다(식물은 일반적으로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더 힘들고 비상식적인 일은, 낙태와 안락사와 심지어 유아살해 마저 특수한 상황에서는 허용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일이 비상식적이고 심지어 '역겨운' 일로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결국 '종차별주의(인간 집단 안에서만 평등을 행해야 하며 다른 종에 대해서는 차별을 행사해도 된다는 입장)'라는 커다란 굴레에 묶여 있다는 뜻이다. 나는 인종차별주의와 마찬가지로, 종차별주의 또한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이상한 윤리적 입장이기 때문에 결국엔 배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slgma 2009-06-30 03:07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보기 드문 훌륭한 서평이네요^^;
 
쿼런틴 행복한책읽기 SF 총서 4 
그렉 이건 지음, 김상훈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3년 10월
평점 :
품절


장르론

난 '장르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과 아집을 썩 좋이 여기지 않는다. 장르란 객관적 분류가 아니다. 장르는 주관적 감상이다. 60년대부터 락의 계보를 세세하게 따져가며 칠판에 하나가득 트리구조를 그려넣고 학생들에게 그걸 강의했었던 '스쿨 오브 락'의 잭 블랙의 모습도 나에겐 약간 껄끄러운 모습이었다(물론 영화 자체는 매우 훌륭했지만). 어떤 장르가 우월하다느니 천박하다느니 하는 골수 헤비메탈 매니아와 너바나 빠돌이의 논쟁같은 건 장르에 대한 심각하게 잘못된 이해에서 출발한다. 장르는 혼자만 이해하고 분류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며, 남에게 강요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물론 SF라는 장르도 예외는 아니다. 실제로 SF라는 장르 안에서도 무척 다양한 소분류들이 가능하며, 그것을 분류하고 설정하는 것은 엄연히 개인의 몫이지 분류학의 역할이 아니다. 나는 스타워즈식의 스페이스 판타지를 싫어하고, 최근에 읽은 '어둠의 속도'식의 가벼운 SF를 그냥저냥 재밌게 읽었으며, 쿼런틴이라는 소설에 대해서 특별히 '하드SF'라는 식의 소분류 딱지를 붙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예 SF라는 장르를 편식하고 그것의 의미를 고정시킬 필요도 없다.

'하드SF'라는 장르명도 어떻게 보면 웃기는 말이다. '읽기 어렵다'는 의미로 '하드'를 붙인 것이라면, 난해하기로 유명한 이상의 시는 '하드시'라고 부르고, 미쉘 푸코의 '감시와 처벌'과 같은 프랑스 현대철학책들은 '하드철학'이라는 말을 붙여야 마땅하다. 아니, 그렇다면 아예 양자역학에 '하드역학'이라는 말을 붙이면 어떨까?

어렵다는 것으로 장르를 규정지으려 해선 안된다. '쿼런틴'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그 소설이 '하드SF'이기 때무에 읽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다. 이건 틀렸다. 같은 장르로 분류될 소설 중에도 읽기 쉬운 것과 읽기 어려운 것이 있고, 역시 SF 안에서도 읽기 쉬운 것과 읽기 어려운 것이 공존한다. 하드SF이기 때문에 읽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하드SF라는 장르의 소설 중에서도 특별히 쿼런틴이 난해하기 때문에 읽기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나에겐 쿼런틴은 전혀 읽기 어려운 책이 아니었다. 무슨 잘난 척이 아니고, 그냥 그 전공을 했기 때문이다. 4년동안 몇천만원 갖다 바쳐놓고 소설나부랭이 하나 이해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부끄러운 일일 것이다. 때문에 나에겐 쿼런틴은 애초에 '읽기 어려운 하드SF'의 범주로는 분류될 수 없는 소설이었다.

다만 내게 있어서 안타까운 점은, SF의 전 역사뿐만 아니라 가상의 세계관을 그린 픽션의 전 역사를 통틀어 가장 독특하고 기발한 아이디어라고도 할 만큼 혁명적인 사고의 전환을 그리고 있는 이 소설의 핵심이 바로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바로 그 부분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소설과 소설가에게 너무나 큰 불행이며, 또한 나에게도 나로 하여금 좀이 쑤셔서 견딜 수 없게 해 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 기가막히고 머리를 뒤흔드는 강력한 한방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니 내가 다 안타깝다.

쿼런틴의 이 핵심적인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쿼런틴의 1/100도 읽지 못한 것이다. 차라리 스타워즈나 한 번 더 보는 게 낫겠다. 그래서 말인데, 나는 지금부터 쿼런틴이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소설이 되도록 알차고 재미있는 양자역학의 그렉 이건 해석(Greg Egan Interpretation of Quantum Mechanics)을 설명하고자 한다. 이 글은 쿼런틴의 해설문이며, 감상문은 아니다.

양자역학과 그 해석(Interpretation)

물리학의 역사는 누적적이고, 확장적이고, 변증법적이다. 그 시초는 확실히 뉴턴부터였으며(이는, 뉴턴 이전 시대의 물리학은 모두 폐기되었다는 뜻이다.), 뉴턴의 역학은 아직까지도 유효하다. 거기에 덧붙여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이 고전역학의 위에 쌓였다. 양자역학이 고전역학을 대체했다 할지라도 고전역학은 양자역학의 부분집합으로서 여전히 세계를 설명하는 훌륭한 이론으로 기능한다.

다만 우리가 '특수한 경우의 물리학'인 고전역학을 훨씬 잘 다루는 이유는 우리의 인식의 틀이 고전역학에 잘 맞도록 진화해 왔기 때문이다. 너무 우주적이지도 너무 미시적이지도 않은 우리의 몸과 뇌와 눈은 0.01아보가드로수의 원자와 100아보가드로수의 원자 집합의 언저리 쯤에서 세상을 가장 인식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되어 있으며, 여기를 지배하는 양자역학의 법칙은 근사적으로 고전역학의 법칙들로 수렴하기 때문에, 우리의 인식체계는 양자역학보다 고전역학을 이해하기 수월한 구조로 되어 있다.

양자역학은 너무 미시적이며,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인식은 큰 불편함을 느낀다. 때문에 양자역학은 '관점'보다 '이론'이 먼저 발전했다. 현재 양자역학의 이론은 수학적으로 매우 깔끔하고 아름답게 다듬어져 있으며, 또 실험적으로 관측된 데이터도 이론과 훌륭하게 들어맞는다. 하지만 현재 그 수학공식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은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그 본질과 인식 사이의 끝없는 괴리를 잇기 위해 양자역학에서는 '양자역학의 무슨무슨 해석(blah blah interpretation of quantum mechanics)'이라는, 고전역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기묘한 다리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많은 양자역학 책이 이 해석들에 대해서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는 않는다. 내가 본 양자역학 책에도 가장 유명한 해석인 코펜하겐 해석(Copenhagen Interpretation of Quantum Mechanics: CIQM)이 단지 한 페이지로만 나와 있을 뿐이다. 물리학자들은 해석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수학공식이며, 수학공식은 틀림없이 확실한 내용을 말해주기 때문에 중요하게 여겨진다. 물리는 해석이 없어도 확실하게 기능할 정도로 '수학적'인 학문이 되었다. 그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코펜하겐 해석은 양자역학의 유년기에 탄생한 것이면서도 여전히 가장 확실하다고 평가받는다. 물리학자들은 확실히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 같다. 코펜하겐 해석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반-인식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는데도 말이다.

양자역학은 물질을 파동으로 기술한다(수학적으로 말이다.). 우리가 물질을 '한 공간의 일정한 부분만을 점유'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양자역학은 물질이 가능한 공간 전체에서 넓게 퍼져 있다고 말한다. 파동은 중첩(superposition)이라는 성질이 있으며, 이 성질이 다시 한 번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거시세계에서는 우리의 몸과 당신의 몸이 '중첩'되어있는 상황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양자역학에서는 가능하며, 왜냐하면 물질은 기본적으로 파동이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물질은 파동이기 때문에 회절(diffraction)이나 간섭(interference) 등의, 파동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파동 특유의 현상이 관측된다.

하지만 더 놀라운 점은, 확실히 우리가 보는 물질은 파동이 아니라는 점이다. 어느 순간에 파동은 '한 점'으로 오그라들며, 우리는 그것을 보고 어느 특정한 위치에서 파동이 아닌 무언가가 거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현상은 공식적으로 '파동함수의 오그라듦(Collapse of wave function)'이란 용어로 불리며, 쿼런틴에서 툭하면 말하는 '수축되었다'는 건 이 오그라듦 현상을 말한다.

문제는 이 오그라듦 현상이 '언제' 그리고 '왜' 일어나는가 하는가다. 코펜하겐 해석과 여타 다른 많은 해석들에서는 오그라듦 현상이 '관측'시에 일어난다고 보고 있다. 이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왜 존재에 있어서 관측이 중요한 역할을 맡는가?

' 관측'이라는 행위가 이론으로 난입함에 따라 양자역학은 극도로 혼란스러워진다. 그 혼란스러움을 과장되게 표현한 가상실험이 바로 슈뢰딩거의 고양이 실험이다. 고양이는 상자 안에서 파동의 상태로 존재한다. 그것도 '살아 있는 고양이의 육체와 정신을 이루고 있는 물질의 파동'과 '죽은 고양이의 육체를 이루고 있는 물질의 파동'이 중첩(superposition)된 상태로 말이다. 우리의 관측은 파동을 오그라뜨리고, 두 파동 중의 하나만을 결정하며, 고양이를 삶/죽음 상태 중 어느 하나로 만들어 놓는다.

이 실험의 두 가지 이해할 수 없는 문제가 드러난다. 하나는 관측의 문제이고, 하나는 거시세계의 문제이다. 관측의 문제는 아까 말한 대로, 왜 관측이 필요한가이다. 누가 관측하면 그렇게 되는가? 인간이 아닌 기계가 관측해도 될까? 상자 밖의 다른 고양이는? 의식이 없는 환자는? 신은 어떤가? 관측의 어떠한 특성이 관측 전과 관측 후의 우주를 바꾸어 놓는가?

거시세계의 문제는 어떠한가? 입자 단 하나가 스핀 1/2와 스핀 -1/2의 상태로 중첩되어 있음을 우리는 그냥 수학을 통해 안다. 그런데 어째서 고양이가 중첩되어 있을 수 있는가? 우리는 우리의 세계에서 그러한 상태에 있는 고양이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못 볼 수밖에 없는게, 보는 행위는 당연하게도 오그라듦 현상을 일으키는 '관측'이라는 행위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수학적으로 사실이다. 그런데 수학적으로 사실이라면 실제로도 사실인가? 또 실제로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믿을 수밖에 없는가?

코펜하겐 해석은 실재와 인식의 커다란 골짜기를 해결하지 않고 남겨놓은 채 우리에게 이것을 그냥 믿으라고 강요한다. 이에 반해 다세계해석(Many-World Interpretation: MWI)은 좀 더 인식에 부담가지 않는, 알기 쉬운 해석을 제시한다. 우주는 단일역사가 아니고 계속해서 분기하는 다중역사이다. 고양이가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순간 우주는 둘로 나뉘며, 산 고양이와 죽은 고양이는 각자 다른 우주에서 각자의 역사를 만들어간다. 관측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아도 된다. 이 해석의 단점은, 왜 '나'는 저쪽 우주로 가지 않고 이쪽 우주에 존재하는가를 물으면 대답할 수 없다는 점이다. 또한 이 이론은 실험적으로 증명해 낼 수가 없기 때문에 많은 물리학자들이 미심쩍어 하는 상태이다.

다세계해석을 부정한다면 여전히 관측이 문제다. 이를 위해 '의식'을 관측의 대상으로 끌어들인 소수파의 해석도 있다. 의식적 존재가 관측을 해야 파동함수가 오그라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의식인가가 문제가 된다. 개미가 관측을 한다면? 인공의식이 관측한다면? 문제는 이 의식의 유무가 칼로 두부를 썰듯 정확하게 썰리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있다. 의식적 존재의 관측 해석은 그래서 문제점이 많은 이론이다. (하지만, 쿼런틴에서는 이 의식 해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여기까지는 쿼런틴의 해석이 아니라 그냥 물리학에 대한 내용이다. 100년 전부터 ㄸㅏㅀ고 ㄸㅏㅀ은 내용이니 이 부족한 텍스트를 굳이 읽지 않고 다른 문헌을 참고하시는 게 더 좋을 지도 모르겠다. 쿼런틴에서 만들어낸 양자역학의 해석은 다음 글에서 해설할 것이며, 때문에 쿼런틴을 아직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음을 미리 말해 두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결정론, 양자적 우연, 자유의지

현재 많은 사람들이 윤리적인 이유로 꺼리고 있는 입장인 '결정론'은, 이 세상의 어떠한 사건이든지 그 일어나는 때와 장소, 양상 등이 정해져 있다고 하는 입장이다. 뉴턴 이전에는 종교적 믿음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던 결정론이, 뉴턴역학의 도움을 받아 '과학적 결정론'으로 급부상하게 된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이른바 '기계론적 결정론'이라고 알려진 과학적 결정론은 라플라스의 생각으로 절정에 달했다. 라플라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세상의 모든 입자의 초기위치와 초기속도를 알기만 한다면, 미래를 전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뉴턴역학 내에서는 무작위성을 발생시키는 어떠한 메커니즘도 발견되지 않았다. 뉴턴역학을 마스터한다면, 누구나 라플라스의 결론을 내릴 것이다. 나도 뉴턴역학의 체계 내에서는 당연히 기계적 결정론이 결론으로 도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연적 사건은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은 인과적 법칙에 따라서 일어난다. A의 뒤에 B가 일어난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A의 뒤에는 B가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결정론적 세계관 내에서, 인간 자체도 필연적 운명에 따르게 된다. 미래가 고정되어 있는 그런 운명 말이다.

현재까지의 과학에서 완전히 순수한 무작위성을 발생시키는 메커니즘이 완벽하게 알려져 있는 분야는 양자역학이 유일하다. 컴퓨터도 난수를 발생시킬 때 초기값을 입력해 줘야 한다. 하지만 양자가 관측될 때(파동함수가 수축될 때) 그 양자가 발견되는 위치는 순수하게 무작위적이다. 미래는 정해져 있지 않으며, 우리는 파동함수를 수축시키며 미래의 예측력을 완벽하게 무효화시키는 양자의 불확정적인 위치를 관측하거나(코펜하겐 해석) 계속해서 갈라지는 복수 역사의 갈림길 중에서 단 하나을 무작위적으로 골라서 그 속의 역사 속에서 입자를 관측하게(다세계 해석) 된다.

어려운 것은 인간이다. 우리의 의식은, 우리의 자유의지는 고전적인 결정론의 법칙을 따르고 있는가, 아니면 양자적인 우연론의 법칙을 따르고 있는가? 우리가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노래를 부르고 싶어서 노래를 부르게 될 때, 우리는 양자의 불확정적인 파동함수의 수축이 도화선이 되어서 그러한 일을 하는가? 우리가 배가 고파져서 밥을 먹게 될 때, 우리는 고전적인 인과론의 법칙을 따르기 때문에 그러한 일을 하는가?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가? 그 무엇이 자유의지를 우연적이지도 필연적이지도 않게 하는가?

현재까지 알려진 자유의지에 관한 과학적 지식은 전무에 가깝다. 사람들은 왠만하면 자유의지를 우연론에도 필연론에도 지배받지 않은 그 무언가로 남겨두고 싶어한다. 만약 자유의지가 우연론 또는 필연론 가운데의 하나로 설명될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자유의지를 자유의지라고 부르지 않게 될 것이다. 과연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가?

세계관

사실 쿼런틴의 양자역학 해석의 아이디어가 완전히 최초인 것은 아니다. 더글러스 애덤스의 기상천외한 SF인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도 쿼런틴의 아이디어와 거의 흡사한 방식으로 움직이는 우주선의 이야기가 나온다. '무한불가능 확률 추진기'라는 이름의 우주선 추진기는 양자역학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확률만 '의도적으로 골라서' 우주선의 위치를 이동시키는 방식으로 우주를 여행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이다. 고래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우주공간에서 주인공들이 극적으로 조우하는 장면들이 전부 이러한 '거의 불가능한' 확률을 의도적으로 선택하였기 때문에 일어나는 부수적인 현상이다. 더글러스 애덤스는 사실 소설 내에서는 추진기의 원리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으므로, 과학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쉽게 지나쳤을 만한 부분이다.

쿼런틴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도 이와 동일하다. 우연적 확률을 전혀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벗어나 의도하는 바로 파동함수의 수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쿼런틴의 양자역학 해석은 앞서 설명한 세 가지의 해석(코펜하겐 해석, 다세계 해석, 의식 해석)이 섞여 있다. 기본적으로는 코펜하겐 해석에 따라 '파동 함수의 오그라듦(Collapse of wave function)'이 누군가의 관찰에 의해 일어난다고 보고 있으며, 그 오그라듦을 일으키는 관찰 주체가 '의식을 가진 개체'라는 관점을 취하고 있다. 다세계 해석은 이에 비하면 해석될 여지가 적지만, 관찰로 인한 오그라듦이 사라진 마지막 장면의 세계관은 분명 다세계 관점을 연상케 한다.

의식 해석은 쿼런틴에서 가장 강조되는 개념이다. 의식적인 존재만이 파동함수의 오그라듦을 일으킨다고 하는 개념은 새로울 바 없지만, 그로부터 과거의 의식이 있는 존재가 살지 않았던 우주의 모습은 의식의 탄생으로 인해 완전히 뒤바뀌어 버린다. 의식은 개체의 머릿속에서만 작동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주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우주의 모든 비결정적인 파동함수를 수축하는 '파괴자'가 되어 버린다.

우리의 우주는 본래 양자적 확률파동이 온 공간을 감싸고 있는 '파동의 바다'였던 셈이다. 모든 가능성이 존재했고, 거기에서 어떠한 행성은 파동함수를 수축시키지 않는 의식을 진화시키기도 했다. 그들은 파동함수의 불확정성을 구조적으로 담고 있는,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신비로운 세계 안에서 살아왔다. 지구도 마찬가지였으며, 의식을 담지 않은 그릇을 지니고 있는 모든 동식물들이 지구 위에서 파동함수의 전(全)가능성을 유지하며 살아왔다.

어느 날 파동함수를 수축시키는 능력을 지닌 의식을 진화시킨 생물이 출현했다. 이것이 인간부터인지, 아니면 훨씬 전의 유인원이나, 포유류부터인지는 소설에서 명확히 나오지 않는다. 하여간 이 생물체는 태어나자마자 '세계와 나'와의 관찰과 상호작용을 통해 다양하고 풍성한 가능성을 담고 있는 우주의 파동함수를 무차별적으로 수축시키는 무자비한 짓을 저질렀다. 그들은 우주의 본모습을 제대로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그들이 직접 파괴한 우주의 폐허에서 아름다움을 느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소설에서 나오는 쿼런틴, 즉 버블이라고 불리는 우주의 막은 이 지구인들의 우주에 대한 무차별적인 '사막화'를 막기 위한 특단의 대책이었다.

앙상블

파동함수를 수축시키는 능력은 인간의 신경 세포, 즉 인간 뉴런의 고유한 능력이고 진화를 통해 완성된 우주적으로 특이한 능력이다. '특이'하다는 말은 일반적으로는 아무도 그러한 능력을 가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앙상블'은 인간 뉴런의 이 특이하고 파괴적인 능력을 죽이고 인간이 파동함수의 온전한 모습을 보전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맡는다.

사실상 앙상블을 켜도 인간의 지각은 아무런 변화를 감지해 낼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지각은 파동함수의 수축만 감지할 수 있도록 특별히 만들어진 기관이기 때문이다. (외계인은 아마 파동함수의 우주를 관찰할 수 있도록 특별히 만들어진 지각 능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앙상블 켜는 순간 그는 '또 다른 가능성의 그'와 중첩(superposition)된, 혼재된 상태가 된다. 관찰이 더 이상 파동함수를 수축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공간에는 미래에 A를 할 가능성의 나와, B를 할 가능성의 나와, C를 할 가능성의 내가 혼재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 모든 가능성 중에 하나의 가능성만을 골라서 그 파동함수를 수축시킨다. 이것이 앙상블의 기본 원리이다.

이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선 두 가지의 자아를 설정해야 할 지도 모른다. 이제부터 그 자아를 '제 1자아', '제 2자아'라고 칭하자. 제 1자아는 우리가 가진 보통의 자아이다. 이 자아는 '자유의지'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상 그 자유의지는 양자역학의 우연론이 완전히 지배하고 있다. 자아는 양자역학의 파동함수에 따라 '모든 가능성'을 다 지니고 있다. 이 가능성의 총체인 자아들의 집합은 각각 독자적으로 미래의 어느 순간에 목표 자물쇠의 0000번부터 9999번 까지의 모든 숫자를 눌러보게 된다. 이 가능성들은 아까 말한 것처럼 같은 공간에 '중첩'되어 있으며, 같은 공간이기 때문에 다세계 해석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제 2자아는 양자역학의 우연론의 지배를 받지 않으며, 완벽하게 작동하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제 2자아는 수억·수조의 가능성들 가운데에서 자물쇠가 열리는 미래의 가능성을 미리 흘끔 보고, 그 가능성만을 '자유의지로 정한 후' 수축시킨다. 이로서 제 1자아는 현실이 되고 선택되지 못한 모든 제 1자아는 '죽어버린다'.

모든 가능성이 공간에서 파동함수로 존재하게 되면, 그 함수들은 파동의 특성상 중첩되어 간섭 현상을 일으키게 된다. 닉의 파동함수와 포콰이의 파동함수가 간섭되면 서로 각자 파동함수를 일으키는 것과는 또 다른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데, 소설의 중간중간에 <나 더하기 포콰이>라는 식의 표현이 종종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파동함수의 컨트롤을 통해 가능한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가장 기초적인 현상으로, 나 자체를 공간이동 시킬 수 있다. 심지어 막혀 있는 벽 사이도 통과할 수 있다(양자역학의 유명한 현상인 '터널 효과'라는 것이다). 무한불가능 확률 추진기도 이 원리로 작동하는 것이며, 소설 속의 로라도 사실은 자물쇠를 따기보다는 터널 효과를 통해 병실을 탈출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원자 하나하나를 따로따로 재배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다면, 그것을 통해서 소설의 말미에 등장하는 기상천외한 효과도 일으킬 수 있다.

소설의 끝에서, 모든 사람들이 파동함수를 수축시키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아니, 어떤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 기상천외하고 세기말적인 광경의 마지막에, 특수한 해석으로서의 다세계적 관점이 펼쳐진다. 모든 세계는 수축되거나 선택될 가능성이 없으며, 그에 따라서 수축에서 제외되거나 세계가 통째로 죽임을 당하는 일도 없다. 모든 가능성이 같은 공간 안에서 중첩되어 있긴 하지만, 인간의 지각으로 중첩된 파동을 볼 수는 없기 때문에, 인간에게 열린 그 세계는 진정으로 다세계적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대부분의 '세계'에서는 그렇게 끔찍할 정도까지 세계가 일그러지는 현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작가는 그 천문학적으로 다양한 세계 중에서도 특별하게 끔찍한 세계를 골라서 묘사했다. 가능성은 확률일 뿐이며, 가장 높은 확률은 우리가 그냥 살던 대로 사는 것이다. 작가의 마지막 말이 이 뜻을 함축한다. '모든 것은 결국 평범한 일상으로 귀속되는 법이다.' 대부분의 가능성은 가장 평범하고 일상적인 세계를 택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확률적으로 가장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