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에서 사오고 손도 안 댄 책 세 박스. 책장에도 안 읽은 책을 꽂아둔 칸이 있었으나 그 칸이 넘쳐 읽은 책들과 섞여있는 건 당연지사.
새해 첫 날이니 그 책들 중 하나를 골라볼까 해서 제일 얇은 책을 꺼내들었다. ‘문맹‘ 서재에서도 많이 이야기 되었던 책이니 당연 좋겠지 하며 책을 딱 펼친 순간. 와 이사람들 장난하나. 진짜 너무 하네가 절로 나왔다. 얇은 책을 양장본으로 만든 것도 그렇지만 한 페이지에 글자수 좀 보소. 페이지마다 장식은 쓸데없이 왜 넣었는지!

일단 인상을 구기고 시작했는데 첫 문장에 꽂혀버렸다. ‘나는 읽는다. 이것은 질병과도 같다.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눈에 띄는 대로 모든 것을 읽는다‘ 아니 이거 내 이야기인데 이러면 인상을 계속 구기고 있을 수 없잖아.

난민으로 남의 나라에 정착한 저자와 나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그 외로움과 갈등이 나의 이야기 같아서 이 짧은 책을 읽는 동안 몇번이나 잠깐씩 멈춰야했다. 공감되는 부분이 너무 많아서 좋기도 했지만 한편 깊이 공감할 수 있다는 게 슬프기도 했다. 작지만 큰 울림이 있던 책. 새해 첫 책으로 적격이었던 듯 하다. 하지만 책을 저런 식으로 만든 것은 여전히 괘씸하다.

미국에 사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나의 한국어 실력은 점점 퇴화되고 있다. 아이들 때문에 한국말에 영어단어를 섞어 쓰는 버릇이 고착화 되어 고급단어는 고사하고 아주 간단한 단어들도 떠오르지 않기가 일쑤이며 글을 쓸 때면 비문투성이다. 그렇다고 내가 영어를 잘하냐하면 또 그렇지도 않아서 이메일이나 문자도 제대로 못써 아이들을 불러 대필 시키니 한심하기가 이를데가 없다. (말하기 듣기는 말할 필요도 없고 ㅜㅜ) 결국 나는 한국어 영어 다 제대로 못하는 삐꾸가 되어가고 있는 것. 저자는 젊었기 때문에 불어로 책을 쓸 수 있는 수준이 된 거라고 애써 핑계를 대보지만 노력이라는 놈이 하나도 없었던 게 그 이유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올해는 그 노력이라는 걸 좀 해보려고. 영어도 한글도.

뒤를 돌아보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그래도 자꾸 드는 생각은 어쩔 수 없다. ‘내가 내 나라를 떠나지 않았다면 나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읽는다. 이것은 질병과도 같다.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눈에 띄는 대로 모든 것을 읽는다.
신문, 교재, 벽보, 길에서 주운 종이 쪼가리, 요리조리법, 어린이책. 인쇄된 모든 것들을,

여전히 지금도, 매일 아침, 집이 비고, 모든 이웃들이 일하러 나가면 나는 다른 것을, 그러니까 청소를 하거나 어제 저녁 식사의 설거지를 하거나,
장을 보거나, 빨래를 하고 세탁물을 다리거나, 잼이나 케이크를 만드는 대신 식탁에 앉아 몇 시간동안 신문을 읽는 것에 가책을 조금 느낀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프랑스어 또한 적의 언어라고 부른다. 내가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하나 더 있는데, 이것이 가장 심각한 이유다. 이 언어가 나의모국어를 죽이고 있기 때문이다.

내 나라를 떠나지 않았다면 나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더 어렵고, 더 가난했겠지만, 내 생각에는 또 덜 외롭고, 덜 고통스러웠을 것 같다. 어쩌면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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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9-01-05 10: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꾸준히 한글책과 영어책을 읽고 계신데 삐꾸라니요.
이 책이 뭔가 psyche님의 마음을 깊게 건든 것 같네요.
얇고 편집이 엉성해서 꽤심하여 밀쳐둔 책인데 덕분에 읽어보고 싶어 졌습니다. ^^

psyche 2019-01-05 12:14   좋아요 0 | URL
단어도 좀 찾아보고 하면서 읽어야 실력이 좀 늘텐데 그냥 읽으니 찍기 실력만 늘어요 ㅜㅜ
저도 처음에 책 펼쳤을때 정말 황당하더라고요. 너무 했어요. 책의 가치를 오히려 떨어뜨린 거 같아요.

단발머리 2019-01-05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나왔을 때, ‘너무하다~~!‘의 울림이 얼마나 심했던지요.
책을 직접 만져본 사람들은 다 한 마디씩 했던 것 같아요.
첫번째, 두번째 문장이 그 모든 원망을 진정시켰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도 너무너무 좋아하는 문장이에요^^

psyche 2019-01-05 12:16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다들 화내면서도 이 책을 좋아하는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그래도 진짜 너무 했죠. 페이지에 글자수는 정말....ㅜㅜ

stella.K 2019-01-05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한국에서 사시는 게 더 싼가요?

psyche 2019-01-05 12:17   좋아요 1 | URL
한글책은 한국에서 사는게 훨~~~~씬 싸요. ㅎㅎ 거기에 굿즈도 주고요. 굿즈는 해외배송을 안해주더라고요.

서니데이 2019-01-10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여백이 많다는 이야기 들었지만, 그래도 내용이 좋은 모양이예요.
어쩐지 이웃분들의 페이퍼나 리뷰를 읽다보면 그런 느낌이 조금 들어요.
psyche님,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psyche 2019-01-10 22:57   좋아요 1 | URL
아주 얇은 책인데 페이지마다 여백도 엄청 많고요. 이걸 굳이 양장본을 만들었더라고요. 내용은 좋은데 책을 그렇게 만니 화가 났어요. 이제 서니데이님은 밤이죠? 저는 아침이 시작되었어요. 좋은 밤 되세요~

페크pek0501 2019-01-13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었지만 다른 사람에게 추천은 안 합니다. 책값에 비해 너무 얇아 손해 보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ㅋ

psyche 2019-01-13 23:38   좋아요 1 | URL
그죠. 얇은 책을 페이지당 글자수를 적게 넣어 페이지수를 늘리고( 그런데도 엄청 얇고) 그걸 또 양장본으로 만들어서 그값을 받다니! 정말 너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