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길이라 부르는 망설임 - 카프카 드로잉 시전집 민음사 세계시인선 리뉴얼판 58
프란츠 카프카 지음, 편영수 옮김 / 민음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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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라는 이름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의미가 깊은 이름입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소설 <변신>으로 그를 떠올릴 거예요. 어느 날 갑자기 벌레로 변해버렸다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그 소설 말이지요. <변신>은 비교적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지만, 그 외에 남긴 작품들은 쉽지만은 않습니다. 아직도 먼 거리에 있지만 너무나도 알고 싶은 그 이름, 카프카입니다.


세계시인선 시리즈는 이렇게 원문과 함께 페이지가 구성되어 있다는 게 특징입니다. 독일어 원문과 함께 만나보는 프란츠 카프카의 시전집 <우리가 길이라 부르는 망설임>은 국내 최초로 출간된 시집인데요. 한독문학번역상 수상과 한국카프카협회 회장을 역임하신 편영수 명예교수의 번역으로, 무한 신뢰를 갖게 하는 신간도서입니다.

문학 쪽에선 카프카의 이름은 여기저기서 인용되며 불리는, 범접할 수 없는 고유명사와도 같다고 느껴집니다. 저는 카프카의 소설을 몇 권 읽어보긴 했으나 잘 알지 못하는 축에 속하는데요. 이번에 처음 만나게 된 시전집은 정말 새로웠습니다.




책의 중간중간 프란츠 카프카의 드로잉이 수록되어 있고요. 개수를 세보자면 60점 정도로, 그야말로 소장 가치 넘치는 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림 자체도 왠지 묘한 인상을 주거든요. 쓱쓱 그린 드로잉은 얼핏 보면 완성되지 않은 것 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느낌 있고 감각적이어서 자꾸만 펼쳐보게 됩니다.


카프카의 시를 처음으로 만나보았습니다. 민음사 세계시인선이나 다른 시인선 등을 통해 외국시를 만나보면, 한국시랑은 조금 다른 느낌이 있는데요. 그런 차이를 두고 봐도 카프카의 시는 독특하며 뭐라 표방할 수 없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길이라 부르는 망설임>을 읽어보면 그의 시는 마치 아포리즘처럼 짧게 짧게 구성이 되어 있는 모습인데요. 은유적 표현이 정말 많아서 쉽게 읽히지는 않지만, 왠지 모르게 끌리는 구절들이 등장합니다.


이 책을 번역하신 교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카프카의 시는 산문과 시의 경계가 무의미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 시전집은 마치 시나 아포리즘처럼 운율이 느껴지는 한 편의 시 같기도 하면서도, 행갈이가 없다면 마치 산문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일부만 발췌를 하긴 했지만 인생에 대한 어떤 물음과 카프카의 내면이 만나 특별한 이미지를 형성하는 것 같습니다. 고독과 권태, 실존, 그리고 이 세계에 대한 허무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는 시들이 많았습니다.





사후 100주년 기념 시전집이기에 작가에 대한 애정이 듬뿍 느껴지는 구성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원래 세계시인선 시리즈 속에 작가의 소개와 사진이 수록되어 있긴 하지만, 특히나 이번 책 속에서는 풍성한 부록이 있었어요. 작가 연보와 각종 사진들을 통해 완독을 한 후에도 진한 여운을 이어갈 수 있었어요.


특히나 해설이 꼼꼼하게 잘 되어 있어서 카프카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카프카의 시는 의외로 주목을 많이 받지 못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는데요. 호평과 혹평을 번갈아 받기도 했다는 사실. '여기에서 떠나는 것'이라는 구절이 인상 깊어서 계속 궁금했는데, 교수님의 해설 속에서 '지금 여기'란 '이름 붙일 수 있는 모든 것(특정한 장소, 모든 장소, 외견상 정상적인 인간 집단) (238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네요. 카프카의 시는 '파편의 시'라는 번역가님의 표현이 제대로라고 느껴집니다. 약간 어렵기는 했으나 값진 경험을 하게 해준 책이었어요.



쳇바퀴에 갇힌 다람쥐처럼,
움직임의 행복,
협소함의 절망. - P53

악이 놀라게 하는 경우들이 있다.
악은 갑자기 몸을 돌려서
이렇게 말한다.
"너는 나를 오해했어."
그런데 이 말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 P61

꿈들이 도착했다, /꿈들은 강을 따라서 내려왔다, /꿈들은 사다리를 타고 /부두의 벽을 오른다. /사람들은 서 있다, /꿈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꿈들은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오직, /어디에서 왔는지를 / 모른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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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찬란하고 자주 우울한 - 경조증과 우울 사이에서, 의사가 직접 겪은 조울증의 세계
경조울 지음 / 북하우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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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 혹은 불안에서 완벽히 자유로운 사람이 과연 있을까, 하는 요즘의 생각. 마냥 행복해 보이는 사람도 감추고 있는 이면이 있고, 겉모습과는 다르게 곪아가는 마음을 안고 살아가기도 한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정신질환에 대해 언급하기를 기피하고 쉬쉬하던 예전보다 자유로워진 현재의 상황이다. 정신질환을 겪은 에피소드나 경험담을 꺼내놓은 에세이 책도 많이 늘었고, 정신의학과를 주기적으로 찾는 사람들도 늘었으니.

 에세이 <가끔 찬란하고 자주 우울한>은 그중에서도 조금 특별한 책이다.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하고 많이 들어본 질환인 우울증, ADHD, 조현병 등을 제외하고, 흔히 그 경험담을 많이 듣지 못했던 '2형 양극성 장애'를 겪은 실제 의사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심리학, 정신의학 관련 도서가 아닌 개인의 에세이에 국한해선 흔히 볼 수 없던 책이다)


 정신의학이나 심리학에 관심이 많은 나도 '2형 양극성 장애'라 하니 뚜렷하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양극성 장애나 조울증에 대해선 들어봤지만 '2형'이란 무엇인가? 저자는 '우울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어쩌면 양극성 장애를 앓고 있을 수도 있다'라고 설명한다. 기분장애의 일종인 양극성 장애에선 우울증과 다르게 조증이나 (정도가 더 약한) 경조증이 나타난다는 특징이 있었다.



1형 양극성 장애 : 조증이 더 심한 경우

2형 양극성 장애 : 경조증과 우울 삽화가 두드러짐



주로 우울한 기간이 더욱 강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초기엔 우울증으로 진단을 받는다고 한다. 이후 오랜 시간이 걸려 2형 양극성 장애로 판단이 된다고 한다. 책의 초반, 증상의 정의부터 무척 흥미로웠다.



 에세이 <가끔 찬란하고 자주 우울한>은 저자가 2형 양극성 장애를 경험했던 이야기를 진솔하게 써낸 책이다. 평소보다 기분이 지나치게 들뜨며 충동적 행동을 하는 경조증 상태와, 심각한 우울 삽화의 기간을 오갔던 기록을 전한다. 정신질환을 겪은 사람들 중에선 자신의 상태를 부정하며 치료를 소홀히 하거나 거부를 하는 경우도 많을 것 같은데, 저자는 특히 의사이기 때문에 자신의 증상을 믿고 싶은 대로 판단하는 때도 많았던 것 같다.

경조증 상태가 돌아오는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스스로 '좋아졌다'고 판단하기도 했다. 약을 먹지 않고 버티기도 했고, 가짜 자존감을 높이는데 매달리기도 했다. 제대로 치료가 되지 않은 채로 증상은 반복되었고, 비로소 자신의 병을 수용하기까지의 시간들이 책 속에 모두 담겨 있다.


 자신의 병을 제대로 자각하고 꾸준히 약을 먹고, 심리적으로 불안정했던 과거에서 벗어나 조금은 편안한 일상을 살고 있다는 저자.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중요한 만성질환에 해당되기에, 에세이 책 <가끔 찬란하고 자주 우울한>은 완치의 기록이라고 하기엔 어렵다. 하지만 그가 직접 겪은 신랄한 경험들 속에서 부딪혔던 수용과 용기의 과정은 누군가에게 위로와 공감이 되겠다.




나는 도대체 왜 우울한 걸까.

(...) 나는 우울할 자격이 있을까? - P45

핑계는 다양했다. 사실은 그들에게

정신질환자로 각인되고 싶지 않았다.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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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의 연인들 채석장 그라운드 시리즈
이광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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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연인이기만 했던 사람은 이제 배우자가 되어 나의 공간 대부분을 함께하고 있다. 우리는 연애를 하는 오랜 시간 동안 다채롭고 많은 장소를 거쳐 왔고, 이제는 가장 중요한 장소이자 여러 목적을 가진 집을 공유한다. 우리 둘 다의 소유이자 모든 욕구가 충족된 장소에서 편안한 시간을 보내면서, 가끔은 우리가 나다닌 장소를 생각하곤 한다. 주말에 다시 그곳을 거닐며 기억을 회상하기도 하고, 그저 사랑뿐인 젊은 연인들처럼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시금 느끼기도 한다.

 

연애 초기, 일이 너무 바빠 개인 시간이 많지 않았던 나는 연인과 자동차 안에서 무한하고 끈질긴 대화로 사랑을 키워나갔다. 주말엔 시끌벅적한 거리로 나가기도 하고, 우리만의 장소를 찾아 끝없이 헤매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던 정류장은 가림막도 비를 피할만한 지붕도 없었고, 사람에 둘러싸여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우리를 둘러싼 막이 존재했다고 여긴다. 사랑의 작동으로 이루어진, 우리만 아는 다른 차원의 공간이 되었다.

「장소의 연인들」을 읽으면서 내가 사랑을 '수행했던' 모든 장소들을 하나씩 떠올리게 되었다. 책 속에서 저자는 "장소가 연인들의 장소가 된다는 것은 사랑의 수행성의 문제이다 (169쪽)"라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연인들에게 장소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다. 연인들의 장소는 일반적인 사회적 규정과 분류, 장소들의 위계를 무의미하게 한다. 연인들은 장소를 탄생시키고 발명한다. 연인들은 그들만의 장소를 찾아내기 위해 분투한다고.

 

저자는 다양한 장소와 예시가 될만한 문헌들을 통해 연인들의 사랑과 장소의 속성을 발견한다. (픽션인지 모를) 저자와 그의 연인이 만들어낸 특별한 장소도 계속적으로 등장한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연인이었던 우리의 장소와 경로를 되짚어보게 되었다. 어쩌면 사랑의 장소들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는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자는 인문학적 시선으로 장소의 속성을 꿰뚫어보기도, 뒤집어보기도, 다시 낯설게 보기도 한다. 이 특별한 시선과 사유가 시적으로 느껴지는 부분들이 있어서 정말 좋았다. + 중간중간 책과 글에 대한 사유의 문장도 근사했다.


연인들이 몸을 담는 순간 이륙하는 우주선이 된다는 욕조 (57쪽), 두 사람의 최소 공간이 만들어지는 우산 속 (69쪽), 누군가와 함께 있기 위해 정차한다면 방이 되기를 바라게 되는 자동차 (92쪽) 등, 연인들의 매력적인 장소는 저자의 인문학적 통찰로 더욱 남다른 장소가 된다. 저자의 경험을 통한 장소와 그가 관찰한 연인들의 장소들, 그리고 나와 연인의 장소가 비슷하다 할지라도 이는 같으면서도 다를 것이다. 사랑하다-의 감각 또한 다를 것이니까.


인문 에세이, 라고 되어 있지만 인문학을 어려워하는 사람들도 충분히 읽을 수 있도록 친절한 책이다. 연인과 사랑에 관한 특별한 사유를 만나보고 색다른 시선을 살펴보고 싶다면 도움이 될 만한 책.

 

 

책을 찾거나 고른다는 것은 자기만의 종교를 찾기 위한 영혼의 편력이기도 하다. 자기만을 위한 일생일대의 단 한 권의 책 같은 것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의 갈증을 이곳에서 채울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는 사라지지 않는다. 서점은 바깥 세계의 번잡함과 계산들을 피해 숨어드는 동굴과 같다. 그 동굴에서 연인을 만난다면 서점의 영적인 뉘앙스는 한껏 부풀어 오른다.
- P81

기차역의 시간성은 가독성이 없다. 하나의 장소에는 하나의 시간이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장소는 무수한 시간의 주름을 품고 있다. 기억 너머의 형언할 수 없는 시간은 캄캄한 침묵에 둘러싸여 있다. 기차역의 시간들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현기증 나는 개발의 속도감은 시간의 입을 다물게 한다. - P112

떠나기 위해서만 잠깐 머무르는 환승 공항의 이미지는 연인들의 시간에 대한 은유가 될 수 있다. 스크린에 명멸하는 비행기의 출발 시간은 공항 내부의 시간을 추상적으로 분절한다. (…) 공항에서는 모든 국적의 사람들이 몰려다니고 아무도 정체성에 대해 의식하지 않는다. 이 기묘한 익명성이 공항을 무중력의 공간으로 만든다. - P115

어떤 슬픔은 수영장의 물처럼 귓속으로 들어가 아무리 노력해도 다시 흘러나오지 않고 온몸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다. 가끔은 그 물들이 몸 안에서 출렁거리는 소리를 듣게 된다. 내가 지금 사는 방에 내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검은 방 하나가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그 방의 존재를 느끼지만 그 입구를 영원히 찾지 못한다.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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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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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존재가 갑자기 큰 폭풍처럼 밀려오는 순간이 있다.

물론 모든 사람의 존재가 그렇게 변하긴 하지만 - 엄마에 대한 마음은 조금 더 각별하다. 엄마는 항상 내 옆에 있다. 작아졌다가 조금 커졌다가 몽글몽글하기도 하면서 옆에 서 있다. 스스로 밥벌이를 하고 온갖 세상 살이를 견뎌낼 수 있는 어른이 되어도 엄마 앞에선 한순간 어린아이로 머무르고 싶다. 엄마 앞에서라도,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려 보고 싶어진다.

최근에 엄마가 아팠다. 웬만한 일도 고통도 꾹 참던 엄마가 진심으로 아프다고 얼굴을 찡그리고 짜증을 내는 모습을 보았다. 처음 드는 감정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엄마를 생각하기만 해도 눈물이 훅, 시작되었고, 한편으로는 솔직해진 엄마가 사랑스러웠다. 아픈 걸 어떻게 위로해야 하는지 몰라서 답답했다. 엄마가 나보다 더 약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아주 가깝게 인식하게 되었다.

202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아니 에르노의 소설

작가 '아니 에르노'는 '경험하지 않은 건 쓰지 않는다'라는 철칙으로 자전적 소설을 꾸준히 써냈다. 생생하게 경험한 글감이 상상을 해서 만든 것보다 더욱 풍부한 사유를 만들어낼 수 있는 건 분명하지만, '자전적' 요소가 들어간 글은 자신의 내부와 치부를 모두 드러내며 감수한다는 뜻이다. 솔직함, 용감함, 과감함. 작가 '아니 에르노'에게 붙여지는 수식어에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 이 작가의 강점은 이것뿐만은 아니다.

내가 만난 그의 첫 책은 「부끄러움」이었고 이번에 읽은 「한 여자」는 두 번째 책이다. 분량이 꽤 짧은데도 나는 밑줄을 정말 많이 그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소설 속에서 화자는 어머니에 대한 진실을 찾기 위하여, 그에게 남은 어머니에 대한 흔적 - 사진, 혹은 기억 - 을 통하여 어머니의 자서전을 써 내려간다. 어머니의 삶 속에서 다른 모습의 실루엣들이 겹쳐진다. 때로는 아름답고, 때로는 거칠고, 때로는 이해할 수 없으며, 때로는 증오하며, 아름답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

내 마음과 겹쳐지는 순간

"처음에는 내가 글을 빨리 쓰리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는, 무슨 말을 어떤 순서로 해야 할지, 마치 어머니에 관한 진실 - 그 진실을 이루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 을 유일하게 보여줄 수 있는 어떤 이상적인 순서가 존재하기라도 하는 양 단어들을 고르고, 그것들을 어떻게 배열할지에 대해 궁리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고,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내게는 그러한 순서의 발견 말고는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 (50쪽)

작가 '아니 에르노'가 책 속에서 여러 번 언급했듯,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문장을 쓸 때 꽤 오랜 시간이 들었을 것 같았다. 또한 독자인 나도 글을 읽는 내내 크게 다가오는 문장들에서 엄마를 향한 생각과 마음이 겹쳐지는 순간 조금 멈칫하곤 했다.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서 다시 첫 문장으로 되돌아가 둘을 이어 보았다. 다시 한번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책을 읽고 이 글을 쓰면서 나도 모르게 살짝 훌쩍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러한 상태가 차츰차츰 사라져 가고 있다. 어머니가 아직 살아 계실 때인 이달 초에 그랬듯, 날이 춥고 비가 오면 여전히 만족스러움. 그리고, <이젠 더 이상 그래 봐야 소용없구나> 혹은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구나>(어머니를 위한 이런저런 일)를 확인할 때마다 밀려드는 공허한 순간들. 어머니가 보지 못할 첫 번째 봄이라는 생각이 자아내는 빈틈. (이제는 평범한 문장들, 심지어 진부한 표현들에 담긴 힘이 느껴짐.) - P20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여는 첫 행위는 시간의 관념에서 벗어난 이미지들 속에 어머니를 고정시키는 것 ─ <어머니는 난폭했다>, <어머니는 전부를 다 불사른 여자였다>. 그리고, 어머니가 등장하는 장면들을 뒤죽박죽 떠올리는 것. 그렇게 해서 내가 되찾게 되는 것은 내 상상이 만들어 낸 여자, 며칠 전부터 내 꿈속에 나타나, 스릴러 영화에서처럼 팽팽한 긴장 속에서 다시 한 번 삶을 사는 나이 불명의 여자와 동일한 그 여자일 뿐이다. - P22

보다 정확히는, 내가 쓰려고 하는 것은 가족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접점에, 신화와 역사의 접점에 위치하리라. 나의 계획은 문학적인 성격을 띤다. 말들을 통해서만 가닿을 수 있는 내 어머니에 대한 진실을 찾아 나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진들도, 나의 기억도, 가족들의 증언도, 내게 진실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문학보다 아래 층위에 머무르길 바란다. - P23

사진 속 얼굴들이 움직인다는 착각이 일 정도로 아무리 오랜 시간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어 봤자, 내 눈에 보이는 건 그저 1920년대 영화 속 의상을 빌려 입은 듯한, 반짝반짝 윤이 나는 웬 아가씨뿐이다. 장갑을 쥐고 있는 넓적한 손과 고개를 꼿꼿하게 쳐들고 있는 자세만이 그것이 내 어머니라고 말해 준다. - P42

두 달 전, 종이 위에 <어머니가 4월 7일 월요일에 돌아가셨다>라고 쓰면서 이 글을 시작했다. 그 뒤로, 그것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문장이고, 심지어 만약 그 문장이 누군가 다른 사람이 쓴 것이라면 내가 그 문장을 읽으면서 느낄 감정과 전혀 다르지 않은 감정을 품고서 읽어 낼 수 있는 문장이다. 하지만 병원과 노인 요양원이 위치한 구역으로 가는 것이나, 어머니가 살아 있었던 마지막 날에 대한 기억들이 잊고 있는 줄 알았는데 불쑥 솟아오르는 것은 견디지 못한다.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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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힌트 없음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30
안미옥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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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을 추천하는 마음

책 추천이란 조금 난감하고 어렵습니다. 다소 예민하고 민감한 사람으로서 무언가 추천한다는 것은 다소 일방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항상 들곤 하거든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려워하는 '시'라는 장르는 조금 일방적이더라도 열심히 추천하고 싶어집니다. 같이 읽고 싶고요. 보다 많은 사람들이 많이 많이 읽어주었으면 좋겠어서요.

아직 시를 잘 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제는 시를 즐겨 읽는 사람이 되었어요. 그래서 신간이 나오면 꼭 읽게 되는 시인의 이름들이 하나 둘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안미옥 시인인데요. 시인님의 시집은 제가 시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할 때쯤에 처음 읽게 되었어요. 창비 시선 408번인 「온」이라는 시집을 읽었을 때 다른 시집을 읽었을 때와 다르게 저에게 너무나 편안하게 들어오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온」에 수록된 시 한 편은 휴대폰 메모장에 적어놓고 생각날 때마다 한 번씩 보기도 합니다.

더욱 명징해진 시들

문학이든 다른 예술이든 결론 지어지지 않고 더 많이 열려 있을수록 독자의 상황과 기분에 따라 다양한 해석과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해요. 열리면서 확장되는 것이 시의 매력인 듯합니다. 「온」을 읽었던 좋은 감정과 기대로 읽게 된 「힌트 없음」은 이전의 시집보다 더 명확하고 뚜렷한 이미지와 언어들이 가득했어요. 핀 시리즈 시인선이 대체적으로 분량이 적은 편인데, 수록된 시가 적어서 감각적이고 독특한 표현들이 가득한 시들도 분명 멋있지만, 평범해 보이는 언어들이 조합되고 반전되고 새로운 의미를 뿜어내게 되는 것이 저는 더 아름답게 느껴져요. 안미옥 시인의 시가 처음부터 끝까지 편안하게 읽혔던 이유는 어떤 시어들이 과장되거나 툭 튀어나오지 않고, 설정한 온도에 맞추어 명확한 이미지를 그려내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슬픔과 다른 모호한 감정들이 찬찬히 가라앉듯 펼쳐진 시들은 복잡한 세상 속에서 살면서 가끔 이해되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위로를 받는 것 같았어요. 현실과 일상 속에서 건진 시인의 의문에 동조하기도 했고, 시인이 풀어낸 문장이 내 마음과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마지막에 수록된 시인의 <후추>에세이를 읽으면서 다시금 감동했고요. "그러니 어떤 정당화와 뒤덮음 없이, 이해하려고 애쓰는 시간은 귀하다" (에세이 <후추> 중에서). 시집을 읽는 데에도, 문학을 읽는 데에도, 무언가를 쓰는 데에도,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도 적용되는 시인의 말은 큰 용기와 힘을 주는 것 같아요. 아쉬운 마음과 동시에, 시의 온도와 분위기가 비슷해서 하나의 작품으로 단단히 묶이는 느낌도 들었어요.


감각적이고 독특한 표현들이 가득한 시들도 분명 멋있지만, 평범해 보이는 언어들이 조합되고 반전되고 새로운 의미를 뿜어내게 되는 것이 저는 더 아름답게 느껴져요. 안미옥 시인의 시가 처음부터 끝까지 편안하게 읽혔던 이유는 어떤 시어들이 과장되거나 툭 튀어나오지 않고, 설정한 온도에 맞추어 명확한 이미지를 그려내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슬픔과 다른 모호한 감정들이 찬찬히 가라앉듯 펼쳐진 시들은 복잡한 세상 속에서 살면서 가끔 이해되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위로를 받는 것 같았어요. 현실과 일상 속에서 건진 시인의 의문에 동조하기도 했고, 시인이 풀어낸 문장이 내 마음과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마지막에 수록된 시인의 <후추>에세이를 읽으면서 다시금 감동했고요. "그러니 어떤 정당화와 뒤덮음 없이, 이해하려고 애쓰는 시간은 귀하다" (에세이 <후추> 중에서). 시집을 읽는 데에도, 문학을 읽는 데에도, 무언가를 쓰는 데에도,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도 적용되는 시인의 말은 큰 용기와 힘을 주는 것 같아요.





-<애프터>

솟아오르는 일과 / 가라앉는 일의 깊이를 알게 될 때

빛은 제 몸을 비틀어 / 직선의 몸을 갖게 되었다 / 직선으로 깨지게 되었다 - P15

<렌탈 테이블>

이상하게 // 손을 겹칠 수 있다는 것 / 말이 번진다는 것 / 문 뒤에 다른 문은 없다는 것

믿고 싶은 것의 목록을 말하는 입이 부서진다. 꼭 본 적 있는 사람처럼 말하지. 내가 하는 핀잔들이 컵에 담긴다면. 한꺼번에 전부 마셔볼 수도 있을 것이다. 불투명한 물. 쌀알들. 휘휘 저으며. - P35

<공 던지는 사람들>

나는 미래라는 말을 자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내가 쓰는 미래는 언제나 과거에 있었다 마치 태어나는 일처럼 //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해서

- P49

<힌트 없음 - 질문과 대답>

다정은 약한 부분을 깨뜨린다. 찌르는 것과 비슷한 맥락을 가졌다. 다정을 잘 아는 사람들이 있다. 깨뜨리는 것인데 안아준다고 착각하면서.

다정의 방향에 / 다정의 다음을 두고 있나 -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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