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책이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여럿이 함께 공유한 적이 있었다. 이른바 '금서' 목록에 올린 책을 몰래 구해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읽었던 적도 있었다. 출판사가 정식으로 찍지 못한 책을 제본해서 돌려 읽으면서 희열을 느끼던 적도 있었다. 그 때의 책은 '해방의 도구'였다.

시집 한 권, 소설 한 편이 세상을 들썩거리게 하던 때가 있었다. 서정시를 암송하는 일은 젊은이의 특권이었다. 짧은 단편소설 혹은 긴 대하소설은 늘 화제의 중심에 놓였다. 설사 책을 읽지 않는 이라도 신문에 나오는 책 기사에는 잠시 눈을 뒀었다. 그 때의 책은 '교양의 척도'였다.

오늘날 책에 '해방의 도구', '교양의 척도'와 같은 권위를 부여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사람들은 한때 해방의 도구였던 인문·사회과학 책을 더 이상 찾지 않는다. 한때 교양의 척도였던 문학 책도 '위기'와 '몰락'이 얘기된 지 10년도 넘었다. 대화에서 책이 차지했던 자리를 드라마, 영화 그리고 연예인의 가십이 대체한 지도 꽤 되었다.

자연스럽게 책에 대한 이야기, 특히 '서평'을 찾아볼 수 있는 공간도 크게 줄었다. 언론은 더 이상 예전처럼 서평에 신경을 쓰지 않고, 독자도 굳이 서평을 찾지 않는다. 인터넷 공간에 서평은 넘치지만 그것의 옥석을 가리는 일은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프레시안>이 다시 '책'을 얘기한다.

오는 7월 31일 <프레시안>이 수개월에 걸쳐 준비한 서평 웹진 '프레시안 books'가 독자를 찾아간다. 좋은 책에 딱 맞춤한 최고의 필자들이 공들여 쓴 신간, 구간을 다룬 권위 있는 서평을 중심으로, 독자·필자·출판사·도서관 등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말 그대로 열린 '책 세상'을 꿈꾸는 공간이다.

'프레시안 books'는 책이 뒷전으로 밀려난 것처럼 보이는 지금이야말로 '책으로 세상 보기'가 필요할 때라고 믿는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오늘날이야말로 책이 온전하게 힘을 발휘할 것이기 때문이다. '프레시안 books'는 미처 이런 책의 힘에 압도당하는 경험을 못했던 독자까지도 책 세상으로 끌어들이고자 최선을 다할 예정이다.

이런 '프레시안 books'의 계획을 미리 듣고서 세 사람의 책 동네 인사가 모였다. 강맑실 사계절 대표,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 한승동 한겨레신문사 기자가 출판사 대표, 언론사 기자 등의 경험을 염두에 두고 바람직한 서평의 본보기를 놓고 두 시간에 걸쳐서 의견을 나눴다. 사회는 '프레시안 books'의 상임서평위원인 도서평론가 이권우 씨가 맡았다.

다음은 지난 7월 19일 오후 종로구 청운동 근처 카페에서 두 시간에 걸쳐 진행된 좌담 전문.


▲ 왼쪽부터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 이권우 '프레시안 books' 상임서평위원, 강맑실 사계절 대표, 한승동 한겨레신문사 기자. ⓒ프레시안(손문상)

서평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권우 : 오는 7월 31일 새로운 서평 웹진 '프레시안 books'가 선을 보인다. 기존의 언론 서평 섹션과 다른 점을 여럿 내세우고 있지만, 그동안 '실종'되었던 서평을 통한 다양한 담론 제기라는 점에 특별히 비중을 두고 있다. 이런 정신을 내세운 '프레시안 books'를 준비하면서 서평이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았다.

이 질문부터 얘기를 시작해보자.

한승동 : 서평은 무엇보다 우선 독자를 위한 것이다. 일단 내가 <한겨레>에 쓰는 기사를 서평으로 간주할 수 있다면, 그것을 쓰면서 염두에 두는 원칙부터 얘기해 보겠다. 내가 서평을 쓰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은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게 하자', 바로 이것이다.

즉, 내가 쓴 서평을 보고 한 사람이라도 더 책을 찾게 된다면, 그것은 성공한 서평이다. 물론 가능한 한 좋은 책이어야 한다는 건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쓴 서평을 지면에 배치하는 편집을 할 때도 무엇보다 그런 생각을 염두에 두고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강맑실 : 서평이 독자를 위한 것이라는 데는 다들 동의한다. 그런데 그 독자는 누구인가? 매체의 성격에 따라서 독자의 상이 다를 수 있다. 오늘은 주로 언론 서평을 얘기하겠지만, 실제로 서평이 실리는 매체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프레시안>에 실리는 서평과 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 펴내는 <서평문화>의 그것은 상정하는 독자가 다르지 않을까?

어떤 독자를 위한 서평인가, 이것이 명확하지 않으면 서평의 영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또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책의 생산자와 소비자, 그리고 그 사이를 매개해주는 전달자, 좀 더 풀어서 얘기를 해보면 저자와 출판사, 독자, 또 서점과 도서관 등 독서를 운동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주체에 두루 영향을 줄 수 있는 권위 있는 서평이 있었으면 좋겠다.

강성민 : 서평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제대로 찾으면 자연스럽게 해당 서평뿐만 아니라, 그 서평이 실리는 매체의 성격도 생각해볼 수 있다. <프레시안>에서 서평 웹진을 새로 만든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좀 더 도발적인 서평을 많이 볼 수 있겠구나, 이런 기대를 했었다. 서평의 비평으로서의 성격을 강화하는 것처럼 말이다.

비평의 성격이 강한 서평의 1차 독자는 저자와 출판사 그리고 책이라는 매체를 우선순위에 놓는 사람일 것이다. 이런 사람의 눈길을 잡는 서평이 많이 실린다면 '프레시안 books'가 짧은 시간에 강한 반향을 일으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런 게 <프레시안>의 기존의 정체성에도 맞고.

책 소개에만 머무르는 서평, 곤란하다

이권우 : 방금 강성민 대표가 '프레시안 books'에 실릴 서평이 타깃으로 삼아야 할 독자의 상을 구체적으로 제안했다. 다른 분들의 의견은 어떠한지?

한승동 : 강맑실, 강성민 대표의 얘기를 들으면서 <한겨레>에 실리는 서평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나, 이런 생각을 했다. 일단 누구를 위한 것이면 안 되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있다. 먼저 서평이 출판사, 출판 산업 자체의 이해를 먼저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 매체의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어서도 곤란하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다 보면 역시 남는 게 아까 말한 바로 그 독자다. 서평이 생산자 쪽인 작가나 출판사, 출판 산업 또 매체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우선이라는 얘기고, 좀 다른 맥락이지만, 서평의 효과로 독자층이 넓어지면 결과적으로 작가, 출판사, 출판 산업, 작가 등 생산자 쪽도 발전시킬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독자 우선이다.

그런데 문제는 독자에는 정말로 다양한 성격, 다양한 계층, 다양한 연령의 사람들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이 중에서 누구를 주독자로 상정할 것인가? 쉽지 않은 문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일주일에 수백 권이 나오는 책 중에서 몇 권을 골라낼 때는 분명히 어떤 공감대가 있다는 것이다.

책을 고를 때는 당연히 책 자체의 가치를 먼저 보고 객관적이고 공정한 자세를 지키려고 노력하지만, 개인의 가치 지향이나 선호가 자연스레 영향을 끼친다. 말하자면 개인 주관을 완전히 배제한다는 건 사람인 이상 애초에 불가능하다. 마치 역사책이 역사가의 사료 선택 단계에서부터 주관에서 자유로울 수 없듯이. 책 선정에서의 주관성이나 가치 지향의 개입이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면 차라리 그 바탕 위에서 자기 정체성에 맞게 솔직하고, 그리고 성실하게 임할 수밖에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한겨레>다운 책이라고나 할까? 좀 거칠게 얘기하자면 예컨대 유한 계층에게나 호소력이 있을 법한 책보다는 어떤 식으로든 세상을 사회를 좀 더 나은 쪽으로 바꾸려는 의지, 고민 등이 배어 있는 책에 자연스럽게 손이 더 간다. 그런 책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동력이 되리라는 바람이 들어 있다고나 할까?

이권우 : 한승동 기자가 서평의 주된 독자로 책을 소비하는 사람에게 방점을 찍는다면, 강맑실 대표나 강성민 대표는 서평이 책을 생산하는 사람에게도 영향을 줘야 한다고 여기는 듯하다. 그 얘기를 좀 더 해보자.

강맑실 : 물론 서평이 실리는 매체가 어떤 독자를 염두에 두느냐에 따라서 서평의 성격이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학술 잡지에 실리는 서평의 독자는 일반 독자가 아니다. 저자나 학문 공동체의 구성원이 자극을 받도록, 그래서 학술 활동에 도움이 되는 서평이어야 한다.

그러나 <프레시안>이나 <한겨레>와 같은 언론의 서평은 불특정 독자를 대상으로 하면서도 방금 한승동 기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암묵적으로 특정한 성향의 독자를 염두에 둔다. 이처럼 언론마다 최소한의 서평 독자에 대한 범주는 정해져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고 그 독자 범주에 따라 책의 선정도 확연히 달라질 것이라 생각한다.

또 서평의 역할과도 관계되는 것인데 다분히 서평이 책 소개에 머물러서 독자 확산에만 목적을 두는 것에서 더 나아가 바람직한 출판문화를 목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와 출판사에 대한 자극제와 각성제로서의 역할을 이야기했던 것이다.

또 책을 생산하는 사람과 소비하는 사람이 상호 소통하는 기회가 많아질 때, 저자나 출판사와 독자가 서로 활발히 교류할 때, 비로소 책을 둘러싼 바람직한 문화가 형성될 수 있다. 서평은 바로 이런 문화를 고무하는 것이어야 하고, 그렇게 되려면 아까 얘기한 것처럼 양쪽에 두루 정신이 바짝 들 수 있는 자극을 줄 수 있는 서평이 나와야 한다.


▲ 강맑실 사계절 대표. ⓒ프레시안(손문상)

'블로거 마케팅' 과연 바람직한가?

강성민 : 아까 비평으로서의 성격이 강한 서평을 주문하긴 했는데…. 출판사를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어떤 성격이든 간에 책을 소개하는 공간이 많아지면 좋겠다. 지난 2년 새 신문에서 책을 소개하는 지면이 대폭 줄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프레시안 books'의 시작은 대환영이다. (웃음)

이권우 : 강성민 대표의 얘기를 받아서 그간 서평이 출판문화에 얼마나 기여를 했는지 살펴보자. 시장에 미친 영향을 빼놓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이상을 해냈는지 현장에 계신 분들의 평가가 궁금하다.

강맑실 : 시대별로 달랐다. 2000년대 초까지 언론 서평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웃음) 종합 일간지 서평 섹션의 머리기사로 실리면 한 달 만에 2쇄에 들어가는 책이 많았을 정도니까. 그때는 언론 서평 외에는 책에 대한 정보를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독자도 언론 서평을 통해서 책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는 욕구가 강했다.

또 언론도 서평에 그만큼 신경을 썼다. 일본과 같은 나라와 비교하면 우리나라는 종합 일간지에서 서평에 상당히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활자 문화의 두 축이라고 할 수 있는 신문과 책이 서로를 끌어안아야 한다는 인식 때문이기도 했고, 또한 한 신문이 독서 문화에 기여하는 정도에 따라 한 사회에서 그 신문이 담당하는 문화 인프라로서의 역할을 가늠하는 독자들의 인식도 한몫했다고 생각한다. 또 그 때는 <출판저널>이라고 하는 여론 주도층에게 영향력이 컸던 서평 전문 잡지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신문 서평의 영향력은 어떤가?

한승동 : 사실 언론의 서평 기사야말로 한국의 출판문화가 이 정도까지 성장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분위기가 달라졌다. 한국 사회의 변화, 인터넷의 등장 등 매체 환경의 변화가 맞물리면서 언론 특히 신문의 영향력이 예전에 비해 급속히 줄어들고 있다. 서평 매체가 다양해지다 보니, 독자도 더 이상 책에 대한 정보를 언론 서평에만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 수요 변화는 서평의 영향도 있겠지만 한국 사회의 변화를 강하게 반영하는 면도 있다. 1980년대에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책이 폭발적으로 읽혔던 것은 그 시대의 대중적 욕구, 곧 군사 정권의 억압 체제에 저항하면서 한국 사회의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변화를 희구했던 사람들의 갈망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특히 지금의 20~30대는 한 세대 전의 그들 연령대만큼 책을 읽지 않는 것 같다. 한국 사회에서 지난 시절 책은 세상을 바꾸는 수단이라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의미를 부여하기도 어려워졌다.

강맑실 : 20대는 책뿐만 아니라 신문도 읽지 않기 때문에 신문 서평의 영향력이 더욱 축소되고 있는 게 아닐까. 또 언론이 변화하는 출판 환경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데도 원인이 있다. 2000년대 들어서 어린이, 청소년 책에 대한 수요가 늘었다. 그런데 언론에서 이런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어린이, 청소년 책은 쏟아지는데 언론이 그것을 외면하니 독자나 출판사는 다른 수단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어린이, 청소년 책을 추천하는 전문가의 네트워크가 등장하고 독자의 큰 호응을 얻은 것도 이 때부터다. 또 출판사에서 자체적으로 서평 매체를 창간하는 등 언론과 통하지 않고 독자와 만나려고 노력을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고. 여기에다 다양한 정보 전달자로서의 인터넷 환경이 덧붙여지면서 신문 서평의 영향력도 축소되어간 게 아닐까.

이권우 : 인터넷 공간에서 독자들이 자발적으로 올린 서평의 영향력도 무시 못 할 정도로 커졌다. 강성민 대표가 아무래도 이 부분에 대해 능동적으로 대처해왔을 터니, 먼저 말해주면 좋겠다.

강성민 : 그런 서평은 영향력이 클 뿐만 아니라 지난 1, 2년 사이에 출판 시장에서 사실상 제도화되었다. 예를 들면, 이른바 '파워 블로거'라고 불리는 이들 중 몇몇은 출판 홍보 대행 회사의 홍보 목록에 이름을 올릴 정도다. 출판사가 언론과 대등한 자격으로 놓고 신경을 쓸 정도로 영향력이 커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과연 바람직한가, 이런 질문을 해본다면 아직은 유보적이다. 인터넷 공간의 서평이라는 게 수준차가 천차만별일 뿐만 아니라, 요즘에는 출판사 마케팅의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하는데…. 인터넷에서 그런 서평이 대세가 되면 오히려 순기능보다는 역기능이 더 많아질 것 같아서 걱정이다.

독자들이 언론에서 주목을 받지 못한 좋은 책을 발굴해서 인터넷을 통해서 더 많은 사람이 읽도록 퍼뜨리는 일, 이런 긍정적인 일보다는 내용이 부실한 책인데 출판사의 이른바 '블로거 마케팅' 때문에 살아남는 일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금도 이런 일이 없다고는 말 못하고….

이권우 : 기자 처지에서 이런 인터넷의 서평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한승동 : 내가 하는 일만으로도 버거워선지 사실 다른 매체들 서평을 찬찬히 살필 여유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한다. 최근에 인터넷 커뮤니티 '비평고원'의 온라인에서의 작업을 묶은 책(<비평고원 10>)을 소개했다. 대단하더라. 나름의 힘과 활기를 느꼈다. 일부 코너의 고담준론들 중엔 내 식견 정도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도 많더라. (웃음)

비평고원은 상당한 깊이의 지식인이 교류하는 일종의 공동체로 자리를 잡은 느낌이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들만 좀 외따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게 잘못되었다는 건 아니다. 그런 것도 필요하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라캉이나 들뢰즈, 하버마스나 아도르노 등 유럽 지식인의 책이나 담론에 관한 수준 높은 의견을 주고받는 것은 그것대로 필요하겠고 우리의 사유 수준 향상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면이 있다. 하지만 때로는, 아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서로 겉돌기만 하는 자기과시적인 독백에 그칠 가능성은 없겠는가, 하는 걱정이 들 때도 있다.

여기 우리 현실이나 생활과의 연관 관계 또는 우리 전통의 사유에 대한 수준 높은 천착 쪽으로도 눈을 돌려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앞으로 이 공간이 어떻게 지금의 한계를 극복하는지 지켜봐야 할 듯하다.


▲ 한승동 한겨레신문사 기자. ⓒ프레시안(손문상)

전문가의 함량미달 서평, 대안은?

이권우 : 비평고원에서 활동하는 이들은 누리꾼이지만 사실상 전문가로 봐야 한다. 방금 한승동 기자가 언급했으니, 자연스럽게 전문가 서평의 문제점을 짚어보자. '프레시안 books'는 가능하면 해당 책을 가장 잘 소화해서 독자에게 평해 줄 수 있는 맞춤한 필자에게 서평을 맡겨볼 예정이다. 사실 이런 서평 문화는 한국에서는 낯설다. 왜 그럴까?

강성민 : '프레시안 books'의 그런 계획이 성공하려면 우선 글을 잘 쓰는 전문가를 발굴해야 할 텐데,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소통의 문제가 제일 클 듯하다. 전문가, 보통 교수들이 쓴 서평은 재미가 없는 경우가 많고 도저히 읽을 수 없을 때도 있다. 전문가답지 않게 책의 주장에 휘말려들거나 단순히 요약 제시하는 글도 상당히 많아 실망할 때도 있다.

책의 특정 개념이나 오류를 물고 늘어지는 공격적인 글은 객관적인 평을 원하는 독자들을 배반한다. 이것은 가장 먼저 글쓰기의 문제일 수 있다. 두꺼운 책을 읽고 그 '소감'과 '평가'와 '가이드'를 원고지 10매 내외로 써내려면 말의 경제성에 대한 예민한 감각과, 글의 구조에 대한 명확한 설계도가 필요한데 그런 것에 능숙한 필자들이 많지 않다. 특히 논문처럼 긴 호흡의 글에 익숙한 사람들일수록 말이다.

더구나 서평은 글을 잘 쓰는 것으로도 부족하다. 르네상스형 지식인만이 제대로 된 서평을 쓸 수 있다. 책이 다루는 주제에 대한 폭넓은 식견이 있어야 책에서 서평자 자신의 개성적인 논점을 추려낼 수 있고, 이를 통해 명확한 사고와 표현으로 독자에게 다가갈 수 있다. 보통 내공이 아니고서는 이런 좋은 서평을 쓸 수 없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 어떤 책에 대한 가장 맞춤한 평자가 꼭 그 책이 다루는 분야의 전문가는 아니다. 오히려 폭넓은 교양을 갖춘 이가 더 자격이 있을 수도 있다. 일본의 <아사히신문>만 해도 그렇다. 우리나라로 치면 '철도공사 직원'이 독일의 철학자 아도르노를 읽고 평한다든지, 각계에서 전문서적을 읽고 자유롭게 논하는 문화가 있다. 그런 서평 문화가 한국에서도 등장해야 한다.

강맑실 : 일단 언론에 실린 서평만 놓고 본다면, 전문가의 글이 만족스럽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기자가 소화하기 어려운 책을 전문가에게 맡길 때는 크게 두 가지를 기대할 것이다. 나는 이것을 십자형 서평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은데, 수직적으로는 그 책이 해당 분야에서 놓인 학문적 맥락을 설명해줘야 하고 수평적으로는 책의 내용을 소개하면서 자신의 견해나 비판이 곁들여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거기에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글쓰기가 뒷받침돼야 하는데 이 세 가지 점을 다 소화할 수 있는 전문가가 과연 우리나라에 얼마나 될까, 따져보면 생각만큼 많지 않은 게 현실이다.

한승동 : 전문가 서평, 언론에서 담당하다 보면 정말 고민이 되는 부분이다. 사실 전문적인 내용을 담은 서적들 중엔 기자들이 소화하기에 벅찬 것들도 적지 않고 또 그럴 만한 여유도 없다. 그래서 외부의 전문가, 즉 주로 대학 교수들을 찾게 되는데…. 내 경험만 보면 만족스러운 경우도 있지만, 만족스럽지 못한 경우가 더 많았다.

물론 앞에서 강맑실, 강성민 대표가 얘기하는 것처럼 전문가들이 대중을 상대로 한 글쓰기 훈련이 제대로 돼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건 사실이다. 그런데 언론사의 시스템도 문제다. 전문가가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발휘해서 글을 쓸 수 있도록 해줘야 하는데, 지금의 언론사 시스템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는 시간이다. 예를 들어서 수백 쪽 되는 책을 내일, 모레까지 몇 매 정도 써 달라, 전문가에게 이런 요구를 해야 하는 게 현실이다. 각 매체가 경쟁 관계에 있다 보니까, 이런 무리한 요구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상황이 이러니, 전문가들이 자신의 전문적인 식견이 뒷받침된 대중과 소통하는 좋은 글을 고심해서 쓰기 어렵다.

사실 이것은 전문가만의 문제가 아니다. 나조차도 불과 이틀, 사흘 만에 책을 소화해서 읽고서 서평을 써내는 게 결코 쉬운 노릇이 아니다. 제대로 정리가 안 된 상태에서 서평을 써서 내보낸 적이 있다. 당연히 그런 서평이 독자에게 좋은 평가를 받을 리 없다.

출판 예고제, 왜 한국은 안 되나?

이권우 : 그런 문제 때문에 '프레시안 books'에서는 아예 속보 경쟁은 지양하기로 했다. 다른 언론에서 소개한 지 두세 주가 된 책이라도 좋은 책이라면 독자에게 좋은 서평으로 소개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런 원칙을 정하면서 왜 우리나라는 이른바 '출판 예고제'가 정착되지 못할까, 이런 아쉬움이 들었다.

미국, 일본에서는 출판을 미리 예고하는 시스템이 정착해 있다. 미국의 <뉴욕타임스>와 같은 언론은 최소한 출간 두 달 전에 원고를 출판사로부터 미리 확보해서, 평자가 충분히 책을 검토하고 숙고할 시간을 준다. 일본의 언론도 한 달 정도 미리 검토할 시간을 확보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도대체 우리나라는 왜 그런 시스템이 정착이 안 되는 것일까?

강맑실 : 시도를 안 해 본 것은 아니다. 예전에 한 언론에서 출판 예고제를 하겠다, 이렇게 공언을 한 적이 있다. 몇 군데 출판사에서는 자발적으로 협조도 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언론 간의 속보 경쟁이 문제였다. 해당 언론을 믿고서 중요한 책의 원고를 미리 공유하면, 어떤 식으로든 다른 언론에서 소개하기 전에 기사가 나갔다.

그 언론에서 그렇게 써버리면 다른 언론에서는 책의 중요성과 상관없이 무시하고…. 언론이 책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시간을 주자, 이런 선의가 오히려 피해로 돌아온 것이다. 이런 과정이 몇 차례 반복되면서 자연스럽게 해당 언론에 대한 신뢰가 깨지고, 결국 출판 예고제가 정착하지 못하고 흐지부지되었다.

또 다른 예도 있다. 사실 사계절은 자체적으로 출판 예고제를 한 적도 있다. 한 때 출간 예정인 책의 원고를 미리 보낼 수 있으니 요청하라, 이렇게 언론에 협조를 구했다. 그랬는데 원고를 미리 보고 싶다고 하는 기자도 별로 없더라. (웃음) 당연히 그 시도도 결국 정착하지 못하고 흐지부지되었다.

한승동 : 방금 강맑실 대표가 얘기한 한국 언론의 보도 관행은 정말로 큰 문제다. 특종 개념 자체가 잘못돼 있다. 아무리 함량 미달이라도 남보다 먼저 기사만 내면 특종이라는 생각이 지배하다 보니 그런 일이 생긴 것이다. 동시에 내더라도 혹은 한걸음 늦더라도 다른 기사가 담지 못한 정보와 시각을 담았다면 그것이야말로 특종 대접을 받아야 하는데….

그러다 보니 정말 중요한 문제도 누군가 먼저 써버리면 다른 데서는 안 쓰거나 아예 문제 자체를 사장시킨다. 방금 강맑실 대표가 얘기한 사례는 그런 한국 언론의 고질적인 보도 관행이 서평에서 드러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관행이 바로잡히지 않으면, 출판 예고제는 결국 선의의 피해자만 낳을 가능성이 크다.

이권우 : 그렇다면, 출판계는 출판 예고제를 할 준비가 돼 있는가? 개인적으로는 회의적인데 말이다.

강맑실 : 출판사는 어느 정도 준비가 돼 있다. 예를 들면, 사계절의 경우에는 내부 인트라넷에 각 팀이 모든 원고를 공개한다. 언론과의 신뢰 관계만 마련된다면 그런 내부 인트라넷에 실린 원고 중 일부를 책이 나오기 한 달 전쯤에 언론에서 미리 검토할 수 있도록 보내줄 수 있다. 강조하지만, 출판 예고제의 가장 큰 전제는 출판계와 언론계의 상호 신뢰다.

물론 책만큼 마지막까지 여러 변수가 많은 문화 상품도 없다. 예를 들어서, 책을 낼 모든 준비가 돼 있는데 저자가 제목을 거부해서 또는 특정한 표기법이나 개념을 놓고 이견이 있어서 발행을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이런 시행착오를 염두에 두더라도 조금만 노력한다면 한 달 전쯤에 출판 예고를 하는 것은 가능하다.

강성민 : 동감한다. 만약 언론에서 적극적인 의지를 보인다면, 출판사는 충분히 출판 예고제를 할 만한 준비가 돼 있다. 한 달 전쯤에는 출간 일정이 어느 정도 구체적으로 윤곽이 잡히기 때문에 가제본한 원고를 모든 언론에 보내서 검토를 요청하는 일도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강맑실 : 솔직히 출판사 입장에서도 출판 예고제가 정착되면 긍정적인 점이 많다. 책마다 궁합이 맞는 언론이 있다. 요즘엔 언론 서평이 다양화되면서 이런 현상이 더욱더 두드러진다. <한겨레>가 좋아하는 책 또 다른 언론이 선호하는 책 등…. 만약 출판 예고제가 정착되면, 보도는 같은 시점에 되더라도 관심 있는 언론에서 훨씬 짜임새 있고 심도 깊은 서평을 낼 수 있을 것이다.

언론 입장에서도 책의 내용을 미리 검토할 수 있다면, 꼭 서평이 아니더라도 그 책을 다른 식으로 활용할 수 있다. 사회적 의제를 던지거나 시사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책은 언론에서 굳이 서평이 아닌 다른 형식으로 다룰 수 있다. 새로운 시각, 새로운 정보가 곧바로 취재에 도움이 될 테니까.

한승동 : 언론에서는 거의 신간만 서평으로 다룬다, 이런 편견도 깰 필요가 있다. 구간 중에서도 좋은 책이 얼마나 많나. 주목받지 못한 좋은 구간을 적극적으로 발굴해서 독자에게 알리는 일도 언론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게 말처럼 쉽지는 않다. 구조적인 문제가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출판계가 취약하다 보니 새로 나온 책이 언론에 더 많이 노출되기를 바란다. 이런 요구에 맞서서 언론이 뚝심 있게 중심을 잡아야 하는데, 언론계도 출판계만큼이나 취약하다 보니 자기 원칙을 가지고 밀어붙이는데 한계가 있다. '프레시안 books'는 애초에 속보 경쟁을 하지 않기로 했다고 하니, 이런 구간을 적극적으로 발굴해서 소개하는 데도 신경을 쓰면 좋겠다.


▲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 ⓒ프레시안(손문상)

생산적인 논쟁이 부재한 이유는…

이권우 : 앞에서도 잠시 얘기가 나왔지만, 좋은 서평은 세상에 긍정적인 자극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서평이 '압박'이 되어야, 사회적 기능을 제대로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비평 서평이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데, 역시 현실에서는 이것이 쉽지 않다. 강성민 대표는 <교수신문>에 있으면서 비평 서평을 시도했는데, 결과는 어땠나?

강성민 : <교수신문>은 독자 자체가 일단 대학의 구성원, 즉 학문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서평의 비평으로서의 기능을 강화한다, 이런 계획을 실행에 옮겼을 때 안팎으로 호응이 많았다. 평자에게 의도적으로 비판적인 서평을 주문했고, 그런 서평이 생산적인 논란으로 이어지도록 노력했다.

서평에 의한 담론 창출, 이런 목적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 예를 들면, 고종 시대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이런 질문을 둘러싸고 비교적 생산적인 논의가 서평을 통해서 가능했다. 그런데 여전히 종합적으로 평가를 해보면 아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고,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이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권우 : 서평지를 꾸려가는 사람이라면 심혈을 기울이는 부분이 비판적인 서평이다. 우리의 논쟁 문화가 한 단계 성숙하는 데 큰 이바지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무시할 수 없는 현실적 장애 때문에 의지대로 진행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어떤 점이 가장 어려웠나?

강성민 : 서평을 통한 담론 창출, 이게 제대로 되려면 우선 비평의 기본이 담보되어야 한다. 우선 평자가 필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필자의 의도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평자의 비판을 수용할 필자는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런 비평에 대한 반응이 가장 격렬했다.

한승동 : 참 어렵다. 논쟁이 제대로 되려면 당사자뿐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상당한 지적 훈련이 된 상태여야 한다. 이런 훈련이 제대로 안 돼 있어서인지 대개 비평을 통한 논쟁은 말싸움, 감정싸움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이런 풍토 속에서 비평 서평이 제대로 안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그냥 좋은 말을 해주거나, 침묵하는 게 서로 속 편하니까.

강성민 : 더군다나 서평을 계기로 언론에서 논쟁을 하기는 더욱더 쉽지 않다. 사실상 불특정다수 앞에서 자신의 밑바닥을 드러낼지 모르는 논쟁에 뛰어들 용기가 있는 지식인을 찾기는 쉽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교수신문>에서 상당히 도발적인 주장을 담은 책의 서평을 쓸 필자를 찾느라 스무 명에게 청탁을 했는데 다 거절하더라.

그나마 거절의 이유를 밝힌 몇몇의 얘기를 종합해 보면 이랬다. 그 책의 주장을 염두에 두면 논쟁적인 서평을 쓸 수밖에 없는데, 그 이후의 상황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 논쟁을 하다 보면, 감정이 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진면목이 들어날 수도 있는데, 그걸 두려워하는 것이다.

한승동 : 한국의 논쟁 문화를 보면 그럴 만하다. 논쟁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양측의 장점과 단점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런 논쟁을 성찰의 기회로 삼으면 족하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마치 논쟁으로 승패를 갈라서, 승자는 칭송하고 패자는 죽인다. 이런 것도 1등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세상이란 말이 유행어가 되는 풍토와 상관관계가 있지 않을까.

이런 풍토 속에서 누가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낼 논쟁에 뛰어들겠는가? 논쟁을 반드시 이기고 지는 게임이 아니라 서로 한 수 배우는 과정으로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자신의 수가 모자라면 솔직하게 인정하고 상대의 강점을 인정하는 것은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도 좋고 전체를 위해서도 좋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이기면 독식하고 지면 죽는다는 유아적 발상이 만연한 우승열패의 사회 풍조를 환골탈태해야 한다.

강맑실 : 그런 풍토를 개선하기 위해서라도 논쟁의 장과 경험을 늘여야 한다. 바로 이 점에서 편집자의 역량이 중요하다. 논쟁의 주제 설정과 발굴이야말로 편집자의 역할 아닐까. 편집자는 논쟁에 성냥을 긋는 자이다. 이렇게 말하면 좀 뭐하지만 사실 논쟁은 성질이 나야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야 또 불같은 논쟁으로 이어지고. 다만 이것이 소모적인 말싸움, 감정싸움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또한 편집자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프레시안 books'에서 우리 시대 기억에 남을 빛나는 논쟁들을 자주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이권우 '프레시안 books' 상임서평위원. ⓒ프레시안(손문상)

'권위' 있는 책 세상의 등장을 기대하며…

이권우 : 앞에서 예고했던 대로 오는 7월 31일 '프레시안 books'가 시작한다. 앞에서도 몇 가지 바람이 나왔는데, 의례적인 이야기라 거부감이 들 수도 있겠지만 한 번 더 당부의 얘기를 한다면….

한승동 : 지금까지 얘기한 언론 서평의 여러 문제만 피해가면 잘 될 것 같다. (웃음) 사실 나는 굉장히 반갑다. 온라인 매체든, 오프라인 매체든 <한겨레>가 추구하는 가치를 큰 맥락에서 공유하면서도 그간 <한겨레>가 시도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일을 성공적으로 해내는 언론이 등장하면 나로서는 대환영이다.

그런 시도가 <한겨레>를 비롯한 기존의 언론을 자극할 수도 있을 테고, 서로 선의의 경쟁을 하다 보면 전반적으로 언론 서평 전체가 나아지는 계기가 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프레시안 books'가 계획한 여러 가지 일을 성공적으로 해내서 이런 역할을 제대로 하기를 바란다.

한 가지 더 얘기하자면, <한겨레>와 같은 오프라인 매체는 지면의 제한 때문에 서평의 길이가 200자 원고지 8~12매, 한 면을 다 채워도 20매를 넘지 못한다. 긴장감 없이 늘어지는 위험만 피한다면, 독자가 읽는 맛이 있는 서평을 선보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기대해보겠다.

강맑실 : 앞에서 이런 얘기를 나눴다. 서평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렇다면, '프레시안 books'에 실리는 서평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프레시안> 독자부터 출발하자. <프레시안> 독자에게 권하고 싶은 책을 질 좋고 권위 있는 서평으로 알리고, 또 그들이 책을 매개로 다양하게 소통하는 놀이터로 '프레시안 books'가 자리를 잡는다면 일단 대성공이다.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온라인 매체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서 저자, 독자, 출판사가 자유롭게 소통하는 공간으로 발전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한승동 기자가 형식의 변화를 얘기했는데, 온라인 매체의 장점을 살려서 실시간 영상과 같은 다양한 형식까지 소화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강성민 : 강맑실 대표, 한승동 기자는 소통에 방점을 찍었다. 소통도 중요하지만 서평은 권위가 있어야 한다. 정말 제대로 된 서평을 꾸준히 축적하는 공간을 만드는 것은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의미에서 영향력이 커져야 많은 이들이 스스로 찾아와 자연스럽게 소통이 이뤄질 수 있다고 본다.

'프레시안 books'는 <프레시안>이라는 언론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좀 다른 얘기가 될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중국의 왕후이가 세계적인 잡지로 키워놓은 <독서(讀書)>의 사례를 보면 정말 부럽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이 잡지 30년치를 모두 소장하고 있다. 서평지를 소장하는 이유는 그것에 책의 가이드를 넘는 특별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프레시안 books'는 '지면과 시간의 제약'에서는 비교적 자유로우니, '자본과 필자의 제약'을 극복하고 한 편의 글이 실리더라도 영향력이 큰 그런 공간으로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이권우 : 긴 시간, 함께 해줘 고맙다. 현장 경험에서 비롯된 도움말이 이제 고고성을 울릴 '프레시안 books'에 큰 힘이 될 것으로 보인다. 다른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하나 더 있는 서평지가 아니라, 자기만의 색깔을 강하게 드러내는 하나만 있는 서평지가 되도록 노력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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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책의 몰락'을 얘기하는 시대에 책을 전면에 내세우는 모험을 시도한다고? 오는 31일 시작하는 '프레시안 books'를 기획하면서 자문을 구한 이들 중에는 '영상'이 대세인 시대에 '문자'를, '속도'가 대세인 시대에 '느림'을 얘기하는 <프레시안>의 기획에 걱정을 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젊은 세대가 책과 멀어진 시대에 책을 화두로 내세우는 '프레시안 books'와 같은 시도는 <프레시안>의 잠재적 독자를 잃는 어리석은 일이 아닌가? 안팎에서 이런 걱정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현상만 놓고 본다면 모두가 다 그럴듯한 걱정이고 우려였다.

그렇다면, 지금 책을 얘기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까? <프레시안>은 이 질문에 답을 찾고자 먼저 도정일 경희대학교 명예교수(책읽는사회문화재단 이사장)를 찾았다. 그는 한국 사회 민주주의의 위기를 경고해온 비판적 지식인이자, 수년째 책읽기 운동의 맨 앞에서 고군분투 중이다.

다음은 지난 16일 서울 종로구 동숭동 책읽는사회문화재단 사무실에서 도정일 교수와 두 시간에 걸쳐 진행된 인터뷰 전문이다.


▲ 도정일 경희대학교 명예교수(책읽는사회문화재단 이사장). ⓒ프레시안(손문상)

시민 역량 없이는 민주주의도 없다

프레시안 : 지난 2007년 <프레시안>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공동으로 진행한 강연에서 선생님께서는 '민주주의 문화' 없이는 민주주의는 취약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 뒤로 3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선생님의 경고가 현실이 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무겁습니다. 최근의 한국 사회, 어떻게 평가하고 계십니까?

도정일 : 3년 전 강연에서 제가 강조했던 것은 민주주의를 지키고 발전시킬 시민의 역량이 성숙하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언제든지 자빠지고 엎어지고 뒷걸음 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민주주의의 문화는 '문화'라는 영역에 한정되지 않아요.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부분에서, 일상적 삶과 행동과 정신 상태의 모든 층위에서 '민주 사회를 유지할 시민적 역량'이 필요합니다. 그 역량은 일반 시민만이 아니라 정치인, 공무원, 기업인, 언론인, 교육자에게도 필요합니다. 이들도 모두 '시민'이니까요.

요즘 보면 민주주의의 '민'자도 모르는 듯한 공무원과 관료들이 저지르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너무 많아요. 기본적으로 민주주의 훈련이 되어 있질 않습니다. 문화는 자연이 아니므로 사람이 키우고 사회가 만들어가야 합니다. 민주주의 원칙의 바탕 위에서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힘, 틀린 정보를 가려내는 판단력과 온당한 해석력, 이성의 사회적 공적 사용력, 시민의 자유와 시민의 책임에 대한 인식-민주주의 문화의 골자를 이루는 이런 능력들은 자기 교육과 훈련을 통해 길러져야 합니다.

시민의 자유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시민의 책임입니다. 이 관점에서 평가한다면 지금 우리 사회는, 지금만이 아니라 오랫동안, 민주 사회를 만들고 지킬 시민적 역량의 결핍이라는 질병을 속속들이 앓고 있습니다. 이건 정치 민주주의에 한정된 문제가 아닙니다. 경제 민주주의도 그렇지요. 경제 평등, 경제 정의, 취업난 같은 문제를 풀어나갈 궁극적 힘은 시민에게서 나옵니다.

두 개의 대한민국…보수가 앞장서 해결책 마련해야

프레시안 : '두 국민'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온갖 문제를 둘러싸고 격렬한 사회 갈등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갈등이 생산적인 토론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뭅니다. 결국은 '민주주의 문화'의 결핍이 그 이유라는 생각이 듭니다만…

도정일 : 갈등 없는 사회는 없습니다. 갈등의 긍정적 측면은 그것이 사회 발전의 창조적 동력원이 된다는 것이고, 부정적 측면은 그게 사회를 풍비박산으로 쪼개놓는 파괴적 혼돈의 진원도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문제는 갈등의 부정적 파괴력을 제어할 능력이 있는가, 혼돈으로부터 생산적 질서를 만들어낼 능력이 있는가라는 거죠.

민주주의 문화로 사회적 문제들을 다 해결할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제의 원인을 합리적으로 분석하고 해결책을 찾아내는 힘은 민주적 사고의 역량에서 나옵니다. 대학 교육에서는 '비판적 사고력'를 길러주는 일이 매우 중요한데, 이유는 그런 사고 능력 없이는 문제를 풀 '솔루션'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판적 사고 그러면 그런 건 소위 '진보' 쪽에서나 강조하는 것 아니냐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천만의 말씀, 비판적 사고는 진보-보수 어느 쪽에나 필수적입니다. 그게 모자라면 진보건 보수건 모두 비정상적 정신 상태에 빠집니다.

한 예로, 지금 우리 사회는 말씀처럼 극단적인 빈부 양극화로 인한 '두 국민' 현상을 보이고 있지요. 미안하지만 이른바 보수-우파 얘기부터 먼저 해볼까요?

경제 평등은 왜 중요한가, 빈곤의 항구화와 제도화는 왜 정의롭지 못한가, 승자독식, 폭력적 경쟁주의, 시장원리주의 같은 것은 왜 제어되어야 하는가 같은 문제들을 '문제로서' 파악하고 제어와 해결을 모색하는 일에 먼저 나서야 하는 것은 사실은 부유층과 재벌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보수-우파의 정책 진영입니다. 그러자면 그 진영의 정신 상태가 정상적이어야 하고 "각자 자기돈 자기가 벌어서 쓰는데" 어쩌고저쩌고 하는 수준을 넘어 공존의 정의를 생각할 줄 아는 비판적 차원에 올라 있어야 합니다.

'사유 정지' 상태 조장하는 세 가지 바이러스

프레시안 : 선생님께서는 여러 차례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런 강조에도 불구하고, 정작 한국 사회의 생각하는 힘은 갈수록 떨어진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무엇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도정일 : 막 털어놓고 얘기해도 될까요? 지금 우리 사회는 '사유의 정지'라고 부를 만한 일종의 마비 상태에 빠져 있는 것 같아요. 생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생각하기를 거부하고 기피하고 혐오하는 것이 사유의 정지입니다. 생각한다는 행위에 모라토리엄을 걸어버리는 거지요. '생각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것부터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각을 안 한다고? 무슨 소리, 우린 열심히 생각하고 있어, 라고 반박할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생각에도 여러 종류가 있겠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사회적 사유'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막 살아도 되는가, 우리는 도대체 어떤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가, 좋은 삶이란 어떤 것인가, 아이들을 이렇게 키워도 되는가-개인의 삶과 집단의 삶을 연결해서 성찰하고 잘못된 것들을 찾아내고, 그래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의 방식을 생각하는 것이 사회적 사유입니다.

우리가 사회적 사유를 정지 당하는 이유는 뭐냐? 우리는 지금 너나 할 것 없이 사람들을 극단적인 공포, 흥분, 과민 상태로 몰아넣는 몇몇 '바이러스' 군단의 공격에 속절없이 노출되어 있어요.

첫째는 '밀림(密林)주의' 바이러스입니다. 약자도태-승자독식이라는, 허버트 스펜서식 사회다윈주의의 부활이죠. 이 바이러스는 극단적인 '도태의 공포'를 퍼뜨려 사람들을 항구한 불안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생각 좋아하시네, 죽게 생겼는데 생각할 틈이 어디 있어, 생각이 밥 먹여주나"라는 것이 이 바이러스에 공격당한 사람들의 절박하고 절망적인 정신 상태입니다.

둘째는 내가 시장전체주의라고 부르기도 하는 '시장만능주의' 바이러스입니다. 이제는 시장이 세계를 접수하고 사회를 접수했다, 시장의 논리를 따르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생각은 무슨 생각, 그저 시장이 요구하는 대로 따르고 시장의 신 앞에 부복하자-이런 것이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의 정신 상태입니다.

셋째, '쾌락지상주의' 바이러스입니다. 힘든 일이여 안녕, 고통이여 안녕, 슬픔이여 안녕, 이렇게 노래하는 것이 쾌락지상주의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사실은 고통이 심한 사회일수록 이런 불가능한 무통증의 쾌락 사회를 그리워하는 바이러스가 창궐합니다.

한국 사회 병들게 하는 지식만능주의

프레시안 : 한 사회의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바로 책읽기입니다. 선생님께서 수년째 책읽기 운동을 전개하는 것도 그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책에 대한 한국 사회의 거부감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선생님께서 특별히 그 원인이라고 지목하시는 게 있습니까? 한국 사회가 책과 멀다면, 그 원인은 단순히 개인의 심리적 원인에서 이유를 찾기보다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가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는 그 구조적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도정일 : 구조적 문제라? 또 막 털어놓고 얘기하도록 유도하는 질문이네요. 앞의 답변에 나온 세 가지 바이러스가 사실은 구조적 문제들과 연결된 건데, 여기서는 하나만 더 보태어 '착각 바이러스'를 말하고 싶어요. 지식사회, 지식경제, 정보지식 같은 '지식 타령'에서 보듯이 지금 우리 사회를 휘어잡고 있는 지식정보주의 사고구조입니다.

정보도 중요하고 지식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정보만 있으면 된다, 지식만 있으면 된다는 건 아니거든요. 정말이지 천만의 말씀입니다. 정보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정보를 판단하는 비판적 능력, 지식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지식을 생산하는 '생각의 능력'입니다. 사물과 현상을 새로운 눈으로 보고 해석하는 힘, 기존 지식의 틀을 넘어 엉뚱한 생각을 해보는 상상력, 남들이 던지지 않는 질문을 던지고 답을 모색하는 지적 모험, 인간과 세계의 복잡성을 이해하는 능력-이런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식을 넘어선 곳에서 작용하는 생각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지식만능주의는 지식이란 것이 기성품으로 만들어져 어딘가에 주어져 있다, 인터넷에 있고 위키에 있다, 그것을 사냥하고 검색해서 찾아내기만 하면 된다라고 믿게 합니다. 이건 착각이고 환상이죠. 쉬운 예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답이 지식의 형태로 어디에 주어져 있나요? 정답이 있나요? 아니죠.

지식만능주의는 지식이란 것이 사과나무에 사과 달리듯 거기 어딘가에 달려 있을 것이므로 내가 가서 따기만 하면 된다는 착각과 함께 무슨 수학 문제 풀듯 '정답 찾기'의 환상 속으로 사람들을 몰아갑니다. 우리 아이들은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정답 찾는 훈련에 몰두하도록 훈육됩니다. 그래서 정답이 없는 문제, 판단과 해석과 의미를 요구하는 문제를 만나면 망연자실 기절하지요.

지식만능주의 풍조가 지금 대학을 장악하고 있어요. 사회는 대학에 대고 지식을 생산해라, 차세대 경제 성장의 동력이 될 새로운 지식을 내놔라고 요구합니다. 지금 같은 지식경제 시대에는 불가피한 요구 같아 보이지요. 그런데 뭐가 문제냐?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는 데는 지식만이 아니라 새로운 눈, 상상력, 모험심, 넓은 이해력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지식 생산의 기본 조건이지요.

이 기본 조건은 돌보지 않고 새로운 지식만 요구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기본기도 안 돼 있고 체력도 없는 축구팀더러 "우승해 와라"고 요구하는 꼴이지요. 지식정보만능주의 같은 집단적 사고가 계량주의 사고와 뭉쳐서 사회 구석구석에 수많은 구조적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손문상)

학교를 저주하는, 책을 증오하는 아이들

프레시안 : 지난 수년간의 책읽기 운동의 경험을 통해서 특별히 이것이야말로 문제다, 이렇게 인식하신 게 있으십니까?

도정일 : 그 보따리를 풀라 하면 열두 가마니 보태기 네 가마니쯤 될 겁니다. <프레시안>의 귀한 지면을 독점할 수 없으니까 하나만 얘기 하지요. 대한민국에서 아이들은 어떻게 크는가라는 문제입니다.

중·고등학생들, 말하자면 청소년층의 '욕설 문화'를 아십니까? 욕을 내뱉지 않고는 아예 말이란 것이 성립하지 않을 정도로 지금 우리 청소년들은 욕설 문화에 빠져 있습니다. "이 년이 이걸 반찬이라고 쌌어?" 한 중학생이 도시락을 열어보다가 내뱉은 말입니다.

그 '이 년'이 누군지 아세요? 자기 엄마입니다. 또 어떤 아이는 손전화에 '열여덟 년'이라는 번호를 찍어놓고 다니는데, 그 '열여덟 년'이 누군지 아세요? 자기 엄마입니다. 선생님들도 흔히 년/놈으로 불립니다. 이런 아이들에게는 학교가 체벌을 가해야 한다고요? 아서라, 아서지요.

체벌에 앞서 학교가 생각하고 어른 사회가 생각할 것은 아이들을 욕설 문화 속으로 밀어 넣는 학교 교육의 폭력 구조입니다. 왕따, 성폭행, 갈취 같은 학교 폭력처럼 욕설도 폭력입니다. 그런데 이런 폭력 문화는 벌주기만으로는 결코 해결되지 않습니다.

아이들을 무자비한 '오로지 성적' 경쟁으로 내몰아 서열화하고 줄 세우는 것은 아이들을 파괴하고 교육을 멍들이는 거대한 폭력입니다. 성적이 못한 아이들은 인간 이하로 분류되고 무시당합니다. 아이들에게는 그들의 인권, 그들의 품위, 그들의 자긍심이 있어요. 그게 무시되면 아이들은 상처 받고, 속으로 울고, 자기도 모르게 망가집니다. 자신감과 자존감을 길러주는 것은 교육이 해야 할 일의 하납니다.

그런데 학교에 가면 '병신된다'일 때 누가 그 학교에 가고 싶을까요? 학교가 우범지대가 되었다고 말하는 학부모가 한둘입니까? 욕설을 포함한 청소년 폭력은 감히 자기네 손으로는 고칠 길 없어 보이는 거대한 폭력 앞에서 힘없는 아이들이 빠져드는 무의식적이고 절망적인 보복의 방식,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고 힘센 폭력을 작은 폭력으로 모방해서 역공을 가하는 거울 반응의 한 형태입니다.

그런데 책 읽기 운동과 이 문제는 무슨 관계인가? 깊은 관계가 있어요. 학교가 기피, 혐오, 저주의 공간이 될 때에는 선생님이 읽으라고 주는 책도 기피와 증오의 대상이 됩니다. 더구나 학교에서의 독서 교육이란 것이 또 정답 찾기나 성적 올리기 위한 시험 과목의 하나처럼 부과되면 아이들의 눈에 책은 백리 밖으로 내던지고 싶은 '웬수'가 됩니다.

거기서 무슨 즐거운 독서가 가능하고 상상력을 기르는 자유로운 독서 행위가 가능하겠어요? 수학 문제 풀 때는 꼭 상상력이 가동될 필요가 없어요. 그러나 책 읽기는 다릅니다.

책 읽기야말로 '행복'을 찾는 지름길

프레시안 : 책 읽기를 강조하면 이 시대에 무슨 책 읽기냐, 이렇게 비아냥거리는 분위기가 있는 게 사실입니다. 책으로 상징되는 문자 권력의 쇠퇴를 얘기하는 목소리도 들리고요. 쌍방향 소통을 얘기하는 인터넷의 확산도 이런 문화를 부추기고 있습니다만….

도정일 : 문자 권력 운운하는 얘기는 문자로 된 책을 읽고 쓴다는 것이 정치 권력과 권위의 한 기초가 되었던 시대에 대한 비판 맥락에서 나왔습니다. 서양의 경우, 경전을 읽고 해석하는 권리-권위가 정치적 지배권과 뗄 수 없는 관계로 엮여 있었던 중세 체제에 대한 비판의 문맥에서, 그리고 뒤이어 나온 계몽주의 운동에서도 이성중심주의가 중세 체제의 문자 권력에 대항했다는 데 대한 비판적 관점에서 나왔지요. 서양까지 안 가더라도, 우리 역사에서는 조선 시대가 문자 권력 시대를 대표합니다.

그런데 지금이 문자 권력 시대입니까? 지금 권력이 책에서 나오나요? 책 읽고 쓰는 것이 무슨 해석의 독점, 권위의 독점, 권력의 독점입니까? 권위의 경우는, 책이 권위주의 아닌 권위의 한 소스가 될 수도 있지요. 그런데 권위와 권위주의는 전혀 다른 문제죠. 과학 공동체에서 아인슈타인이 누리는 권위는 아인슈타인의 권위주의가 아닙니다.

누가 좋은 책 써서 어떤 권위를 얻었다면 우리가 그를 향해 "당신, 권위주의자야"라고 말하나요? 당신도 권력자가 되었다고 말하나요? 권력을 놓고 말하면, 지금 권력은 책을 떠나 다른 매체로 간 지 오랩니다. "아직도 책이야? 어느 시댄데?"라는 비아냥거림에는 문자 권력에 대한 비판보다는 책이란 것이 이제 아무 권력도 실용성도 실리도 없는 것이라는 생각, 더 정확히는 하찮은 것에 대한 멸시가 더 많이 담겨 있지 않을까요?

만약 문자 권력을 말해야 할 정도로 책이 권력을 가졌다면, 아무도 감히 "아직도 책이야?"라고 말하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모두가, 이선달, 박선달, 김선달 할것없이 동네 건달족 모두가 다투어 책으로 달려들지 않겠어요?

그런데 권력과 유행과 시류, 공리적 이해타산이나 저급한 실용주의 같은 것과는 별 관계가 없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동네 건달들은 달려들지 않는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책은 되레 우리 시대의 소중한 문화 자산이 되었고 책 읽는 행위는 우리 시대의 고귀한 문화적 활동이 되었습니다. 이 문화 자산과 문화 행위의 특징은 그것들이 돈이나 권력보다는 '가치의 추구 행위'를 대표하고 '의미를 만드는 행위'를 대표한다는 점입니다.

가치와 의미? 그래요. 지금은 돈이 가치의 전부를 표현하고 의미의 전부를 만드는 시대처럼 보이지만 사실 속내를 들여다보면 지금도 중요한 본질적 가치는 돈으로 환산되지 않고 소중한 의미는 돈으로 생산되지 않습니다. 한 예로, 사회봉사 활동 하는 사람들을 보세요. 그들은 돈을 받지 않고, 돈을 주면 버럭 화를 냅니다. 봉사활동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라는 직관을 그들은 갖고 있어요.

이런 가치 추구가 사실은 행복의 지름길입니다. 행복은 "내가 행복을 찾아야 하는데" 하고 쫒아 다니는 사람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선물처럼 찾아오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학생들에게 행복을 추구하지 말고 가치를 추구하자, 그러면 행복이란 녀석이 웃으며 따라오지 않겠는가고 말합니다. 자기 존재의 의미, 자기 삶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할 때는 자살을 생각하는 동물이 인간입니다. 무가치와 무의미 상태에서는 그가 전혀 행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프레시안(손문상)

누가 계몽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나?

프레시안 : 선생님께서는 여전히 계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쪽에 속합니다. 대중은 물론이고 지식인조차도 계몽에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도정일 : 제가 계몽주의자인가요? 어떤 점에서는 그럴지 몰라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첫째, 인간은 누구나 배워야 하고 노상 깨쳐야 하는 존재지요. 누굴 가르치려 드느냐고 호통 치는 사람은 호통 치다가도 속으로는 "하긴 나도 배워야 하는 존재지"라고 잠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인간은 죽을 때까지 계몽의 대상입니다. 이 부분에는 누구도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시도 때도 없이 남을 가르치려 들고 '지도'하겠다고 달려드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독재, 전체주의, 망종의 사회주의, 권위주의는 이런 종류의 덜 떨어진 계몽 집단을 대표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늘 배우고 깨치려는 열린 자세, 겸허한 자세도 필요하죠. "이 책 너무 어렵게 썼군. 대학 나온 나도 읽기 어렵다면 이건 잘못된 책이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책이 쓸데없이 난삽할 때도 있지만 읽는 이의 이해력이 책의 수준을 못 따라 갈 때도 있지요. 좀 어려운 책을 읽는 것이 누워 떡먹기 같은 책 읽기보다는 더 즐거운 도전이지요. 사실, 대학생에게라면 전혀 어려울 수 없는 책도 어렵다고 비명 올리는 학생들이 있어요. 독서 빈곤에서 오는 능력 결핍의 경우지요. 그런 비명이야말로 빈곤이 일으키는 알레르기 반응입니다.

둘째, 저는 계몽주의 철학으로 대표되는 근대성의 정신적 유산을 높이 평가합니다. 근대성에 비판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소중하게 계승해야 할 부분도 있습니다. 영어 속담에 "목욕물 버리면서 아이까지 버린다"는 게 있지요?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 태운다"고 우리 속담은 말합니다.

버릴 수 없는 유산을 과거 유산이라는 이유만으로 내던지는 것은 바보의 특별한 능력입니다. 보편 인권, 자유, 평등, 민주주의, 비판 정신, 정교 분리, 법치 같은 근대성의 유산은 여전히 우리에게 소중한 자산입니다. 왜 소중하냐고요? 그런 걸 버리면 우리는 인류가 애써 도망쳐 나온 야만의 체제 속으로 다시 뒷걸음쳐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재갈 물린 20대…스스로 벗어던져라

프레시안 : 그나마 30대 이상은 책 읽기에 익숙한 세대입니다. 20대 이하의 세대는 더욱더 책과 멀어지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그들이 처한 '재갈을 물린 듯한' 상황이 이런 분위기를 더욱더 부추깁니다. 오랫동안 대학에서 20대를 만나오셨을 터인데 이런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도정일 : 지금의 20대 청춘들을 두고 제가 어디선가 '재갈물린 세대'라고 말했던 것 같아요. 제가 말한 '재갈'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지금의 젊은 세대가 처한 곤경(사회 진입 장벽, 88만 원, 고용 불안)이라는 재갈인데 이 재갈은 선택된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안겨진 난국, 말하자면 '물려진 재갈'이지요. 선택된 것이 아니지만 벗어던지기도 어려운 재갈입니다.

기성세대는 왜 이런 재갈이 젊은 세대에 물려졌는가, 그걸 제거할 방법은 무엇인가, 사회 전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책임 있게 연구해야 합니다. 정책적으로 책임지는 사람이 없어요. 취업난, 고용불안, 비정규직만 해도 그렇죠. 입으로만 떠들고 통계 보여주고, 그리고 그냥 넘어 갑니다. 마치 그게 불가항력의 자연재해 같은 것이기라도 하듯이 말이죠.

또 다른 재갈도 있습니다. 지금의 20대 세대가 의식적이건 아니건 스스로 빠져들고 동의하고 즐기는 어떤 문화, 습관, 이데올로기, 정신 상태로서의 재갈입니다. 그게 뭐냐고요? 몇 가지만 말하죠. 쉽고 힘 안 드는 일만 찾아다니고자 하는 안이성, 의존주의("엄마, 어떻게 좀 해봐"), 디지털 기술 환경에서 길든 속도주의와 편이성에의 정신없는 탐닉, 집중력 결핍, 비판적 사고력과 자율적 판단력의 약화, 시장만능주의에의 좀비적 순응, 세대 단절의 충동(자기 세대의 유행에는 병적으로 민감하고 수평 소통은 잘 하면서 중요한 역사 맥락에는 등 돌리고 과거와의 소통은 거부하기) 등입니다.

이런 정신 상태와 능력 결손은 한 세대를 멍들게 하는 치명적인 약점들이죠. 이런 약점들은 20대 세대가 벗어던지자면 벗어던질 수도 있는 재갈입니다. 어떻게? 벗어던지자면 우선 약점을 알고 성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성세대는 20대 세대에 이런 문제점들을 기탄없이 말해주어야 합니다. 잘 나서 그런 게 아니죠. 기성세대는 결코 잘난 세대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어느 세대이건 간에 모든 세대는 자기 세대의 성장방식을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지금의 20대들 가운데 상당수는 책을 멀리할 뿐 아니라 책을 구닥다리로 알고 책읽기를 경멸합니다. 책을 읽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읽지 않는 것을 되레 자랑하지요. 이 디지털 시대에 책을 들고 다닌다는 것은 자기네 세대의 정체성에 반하는 구세대적 행위라고 여깁니다. 모든 필요한 지식 정보는 인터넷에 다 있다, 그 지식정보는 디지털 기기로 언제든 쉽게 빠르게 공짜로 접근할 수 있다, 왜 책이 필요하냐-이런 식의 디지털 기술만능주의가 상당수 젊은이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게 얼마나 큰 착각인가를 알고 그 착각을 벗어던지는 일이 시급합니다. 그런데 그게 어려운 문젭니다. 디지털 매체의 편이성에 한번 중독되면 거기서 헤어나기가 쉽지 않아요. 책은 느린 매체이고 모든 독서는 '느린 독서'인데 지금의 청소년 세대는 그들의 속도감에 반하는 이 느림을 견딜 수 없어 합니다. 그들은 '3초 문화'에 흠뻑 젖어 있고 집중력은 5분을 넘기기 어렵습니다. 인터넷으로 이 주소 저 주소 옮겨 다니며 읽을 만한 기사가 있는지 검색하는 데는 3초면 되고 쪼가리 글 읽는 데는 5분이면 됩니다.

좀 긴 호흡의 글, 집중해야 할 글, 15분 이상의 체류시간이 걸리는 글은 인터넷 문화에서는 '시체'에 해당합니다. 이 '3초5분' 세대에게 책읽기란 지루한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 이상의 고통스런 일입니다. 지금 이 인터뷰를 그들이 읽어낼 수 있을까요? 기대하지 마세요.

프레시안 : 그들을 책과 가깝게 할 수 있는 방안이 있을까요? 대학, 언론 등 기존의 제도들이 거기 기여하는 역할이 있습니까?

도정일 : 책을 가까이 하는 데는 독서의 일상화, 생활화, 습관화가 중요하고, 즐거움의 경험이 결정적입니다. 독서의 즐거움을 직접 경험하는 일, 그 이상의 길은 없는 것 같아요. 책을 싫어하고 책을 못 읽는 대학 신입생들은 중·고등학교 시절 책 읽기의 즐거움을 경험한 적이 없거나 독서 습관화의 과정을 거치지 못했다는 중대한 결손을 안고 있습니다. 늦었지만 대학 들어와서부터라도 그 습관을 몸에 붙일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지금 전국의 대학들은 교양 과정에서 '독서와 토론'이니 '사고와 표현'이니 하는 공통 과목들을 두고 학생들에게 책을 읽힙니다. 지식 전달 이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 대학 교육의 핵심 기능이라면, 독서 토론 과목을 두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요. 거듭거듭 강조하는 바이지만, 생각하는 힘을 키우는 데는 책 이상의 매체가 없습니다. 학내 독서클럽, 독서토론대회 같은 것을 활성화하기 위해 애쓰는 대학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학에서의 독서가 교양 과정에만 머물러 있으면 안 되죠. 인문·사회과학의 경우 교양과 전공을 통틀어 책 읽고 생각하고 해석하고 토론하는 것이 대학 교육의 정수입니다.

언론 매체들의 기여도 상당합니다. 지금 신문들은 거의 모두 '북섹션'을 두고 있습니다. 티브이, 라디오, 인터넷 매체들도 그 나름의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책 안 읽는 사회라고들 하지만, 사실 "책을 읽어야 한다"는 데만은 공통의 관심을 보이는 것이 또 우리 사회에요. 덕분에 우리가 아주 깡통 사회로 굴러 떨어질 위험을 비켜가고 있는지도 몰라요.


ⓒ프레시안(손문상)

책 읽기, 중요한 '사회 안전망'

프레시안 : 책 읽는 문화의 확산을 위해서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도정일 : 독서는 단순한 교양 쌓기를 넘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중요한 행위라는 생각, 이 행위가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삶을 의미 있게 하는 가장 확실하고 돈 적게 드는 길의 하나라는 자신감, 자기 변화와 도덕적 상승이 독서를 통해 가장 잘 이루어진다는 경험-이런 자신감과 경험이 사회적 지혜가 되어 널리 퍼졌으면 합니다.

물론 이런 지혜는 당장 시급한 일 같아 보이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렇지 않아요. 사회 안전망의 구축은 우리 사회의 긴요한 일의 하나입니다. 독서는 그 자체로 사회 안전망입니다. 이 부분 생각해본 일 있으세요? 사회에 물질적 제도적 안전망이 필요하다면, 사람들의 정신적 심리적 안전망을 구축하는 일도 그에 못지않게 필요합니다.

독서는 그런 심리적 안전망 구축의 한 방법입니다. 독서를 통해 느티나무처럼 내부가 튼튼해진 사람은 웬만한 일에 허둥대지 않고 바람 앞에 우왕좌왕 하지 않아요. 위기를 관리할 내공이 생겨있는 겁니다. 개인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죠. 독서를 통해 만들어진 모임, 도서관, 친목 클럽은 사람들 사이의 신뢰, 친밀감, 배려, 돌봄, 소통의 기회를 증진시켜 소통의 공동체를 만듭니다.

사회과학이 '사회자본'이라 부르는 무형의 자본을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책읽는사회문화재단'은 도서관 운동 하면서 도서관이 사회 안전망의 하나라는 주장을 끊임없이 폈어요. 도서관이라는 인프라만이 아니라 그 토대 위에서 만들어지는 '마음의 공동체'도 안전망이라는 뜻이지요.

중등 교육 개혁은 시급한 일 중에서도 시급한 일입니다. 아이들을 오로지 성적 경쟁으로만 내몰지 않고 스트레스 없이 자유롭게 숨 쉴 시간, 꿈꾸고 몽상할 시간, 여러 재능의 분출을 가능하게 하는 교육 체제의 실현이 너무도 시급합니다. 줄을 세우더라도 꼭 학과 성적이라는 하나의 줄만 있어야 합니까? 줄은 여러 개여야 하고 이 줄에서 꼴찌인 아이가 저 줄에 가면 첫째다, 사람의 능력은 한 가지 잣대만으로 평가할 수 없다, 아이들이 모두 제 각각 잘 하는 부분을 인정받아 불만과 폭력으로 빠지지 않아도 되는 명랑 학교, 행복 학교 만들기-이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입니까?

시골 가 보세요. 그런 행복한 초등학교들이 여기저기 있습니다. 중·고등학교라 해서 불가능한 일이 아니죠. 물론 작년부터는 시골 초등학교들도 학교 성적 줄 세우기 때문에 교장들이 전전긍긍하면서 "책 읽힐 틈이 없어요"라거나 과목 성적 올리기라는 실적주의에 매달려 교육을 팽개치는 일이 많아졌지만.

젊은 세대 좀비로 만드는데 동참하는 언론

프레시안 : 지식인, 출판계, 언론계에도 쓴 소리를 하시고 싶으신 게 있을 것 같습니다.

도정일 : 나는 본디 쓴 소리 전문가인데 오늘은 이미 쓴 소리를 많이 했으니까 좀 아껴두면 안 될까요? 꼭 세 마디만 하지요. 대중 언론은 젊은 세대를 영혼 없는 좀비형 소비자 군단으로 만들려는 시장의 기획에 편승해서 "너희들 잘 한다, 잘 한다"며 그 세대를 향한 아첨떨기를 열심히 계속하고 있습니다.

출판계는 독서 인구의 지속적 성장 여부에 그 미래가 달려 있는데, 업계 사람들은 그 인구 키우는 일에 대체로 무관심합니다. 지식인들은 어떤 삶이 좋은 삶이고 어떤 사회가 사람 살만한 사회인가라는 큰 질문을 머리에 좀 넣고 다녔으면 좋겠습니다.

프레시안 : 지금 책읽기 운동과 관련해 새롭게 계획하시는 일이 있습니까?

도정일 : 몇 가지 있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에 그림책을 보내고 그 그림책의 작가가 가서 아이들과 즐겁게 만나는 '책날개' 사업, 한 권의 책을 놓고 토론하는 시민 독서 토론의 정례화, 대학 교양 과정에서의 독서의 문제를 연구하는 일, 벽지 이주여성 가정을 찾아가 시무룩한 침묵의 아이들을 활기찬 아이로 바꿔내 보려는 다문화 북스타트-이런 일들이 기획되거나 새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제대로 된 서평 매체…그 사회의 수준을 말한다

프레시안 : 정년을 하신 후에도 정력적인 활동을 전개 중이십니다. 사회운동과는 별개로 정리하시는 지적인 작업이 있으십니까?

도정일 : 몇 년간 계속 공수표로 끝나기만 하는 작업이 다수 있어요. 곧 낸다 낸다 큰 소리 쳐놓고 아직 마무리 짓지 못한 책들을 어떻게 '탄생'시킬 수 있을까, 요즘 그 문제로 고민이 많습니다. 주로 인문학 분야의 책들입니다. 아는 사람은 아는 얘긴데, 우리 집 컴퓨터에는 제목과 자료 노트만 있고 원고는 없는 책 저술 계획이 스무 개 넘게 있습니다. 다 쓰자면 100년은 걸릴 겁니다. 지난 10년간 '책읽는사회' 일에 많은 시간을 뺏겼는데 그걸 어디서 벌충하지요? 전 제가 한 200년은 사는 줄 알았어요. 바보 이반 이상의 '바보 도반'입니다.

프레시안 : <프레시안>에서 새로운 서평 매체를 준비 중입니다. 이런 서평 매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일까? 특별히 기대하는 역할이 있습니까?

도정일 : 용기 있고 의미 있는 결정입니다. 저는 우리 사회에 대중적 서평 문화가 자리 잡기를 고대해온 사람입니다. 신뢰할 만한 서평 매체가 있는가 없는가, 이것이 한 사회의 문화적 역량과 정신적 활력의 수준을 보여줍니다. 지난 40년의 우리 문화사를 돌아보면, 이런저런 오프라인 서평지들이 떴다 지고 떴다 지곤 했는데 지금의 매체 환경은 온라인 서평 매체의 '기술적' 가능성을 크게 높여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술적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만으로 낙관의 근거를 삼을 수는 없습니다. 매체기술은 기술이고 콘텐츠는 콘텐츠지요. 양자는 거의 완전히 별개 차원의 문젭니다. 우리 사회는 기술만 있으면 된다, 기술 있으면 콘텐츠는 자동으로 따라온다고 믿는 황당한 기술주의적 사고에 아직도 깊이 빠져 있습니다. 큰 착각이죠. 그래서 콘텐츠 만드는 일을 아주 우습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서평은 처음부터 끝까지 해석-사유-판단의 콘텐츠 생산 작업입니다. 지금처럼 정보 홍수에 사람들이 떠밀려 가는 시대에는 정보 지식의 신뢰도와 품질을 평가하고 "똥이냐 된장이냐"(이런 용어, 미안합니다)를 가리는 2차적 판단 정보, 곧 '메타 정보'가 너무도 필요합니다. 그 메타 정보에서부터 콘텐츠라 부를만한 것이 생산되지요.

서평의 메타 정보에는 해석과 사유가 포함됩니다. 해석은 '의미'를 생산하고, 사유는 질문, 대화, 토론이라는 정신 작업을 통해 '생각'이라는 콘텐츠를 생산합니다. 제대로 된 사회라면 절대로 소홀히 할 수 없는 보석 같은 콘텐츠들이지요. 프레시안 서평 매체가 이런 콘텐츠 생산을 통해 생각과 대화와 토론이 왕성한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기를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대화, 토론, 생각을 촉발하는 데는 사실 책을 능가할 매체가 없습니다. 프레시안 서평이 저자의 생각, 서평자의 생각, 독자의 생각이 만나는 소통과 토론의 공동체를 일굴 수 있다면 이건 해방 이후 가장 의미 있는 정신사적 사회사적 사건이 될 겁니다.

한 가지 귀띔할 것이 있어요. 서평은 기성 매체에서 열독률이 낮은 비인기 지면으로 알려져 있어요. 서평의 인상을 바꾸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그냥 책 얘기를 하는 곳이 아니라 흥미진진한 '아이디어'를 내놓고 얘기하는 것이 서평이라는 느낌을 주어야 합니다. 실제로 서평은 그런 것이고요. 책은 지루하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아이디어'라면 눈이 반짝 합니다. 아이디어는 돈이라는 말을 하도 많이 들어서 그런가?

어쨌건 서평에는 아이디어의 사건화, 다시 말해 생각-느낌-주장의 드라마틱한 제시가 필요합니다. 생각의 맥락을 보여주고 다른 생각들과 비교대조하고 재미난 일화를 넣어주고, 그리고 그 아이디어나 생각이 지금 우리의 삶, 사회, 관심사에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짚어주는 거지요. 적실성의 제시입니다. 서평 한 꼭지에서 독자가 얻어가는 것이 많을수록 좋습니다.

또 한 가지, 대학생들을 서평 독자로 끌어들이십시오. 이건 좀 어려운 일이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20대 청년기 사람들은 생각하고 판단할 줄 아는 시민으로 자랄 책임이 있습니다. 대학 교육, 강의, 계획서가 프레시안 서평과 연결되게 하고, 교양과정의 '글쓰기'를 서평 훈련으로 시작하게 하는 기획 등을 생각해볼 만합니다.

대학마다 신입생들 글쓰기 훈련을 시키느라 진땀 흘리는데, 학부생 글쓰기 훈련은 북리포트 형식의 글쓰기를 통해 효과적으로 진행될 수 있습니다. 학생들도 뭘 쓸까 글감 찾느라 절절 맬 필요가 없지요. 책 한 권에는 글감이 넘쳐납니다. 일석삼조에요. 북리포트 쓰자면 책을 읽게 되고, 쓰다보면 글 솜씨 늘어나고, 논지를 요약하고 재조직하는 사이에 생각하는 힘도 불쑥불쑥 자랍니다.


ⓒ프레시안(손문상)

"희망은 산타클로스의 선물이 아니다"

프레시안 : 갈수록 한국 사회에서 희망의 동력을 찾기 어렵다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어떠십니까?

도정일 : 민주주의가 왜 중요하냐면, 그게 어떤 체제보다도 희망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체제이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는 절망을 제어합니다. '희망 없다'가 절망이고 절망은 지옥의 조건이지요. 지옥의 조건을 거부하는 것이 민주주의입니다. 왜 그런가? 틀린 것, 잘못된 것,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들을 바꿔내고 고쳐낼 가능성이 없어 보일 때 사회는 절망에 빠집니다. 그런데 그 틀린 것들을 바꾸고 고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 민주주의입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라는 간판만으로는 일이 안됩니다. 문제적 사회 현실이 있을 때 그것을 지적하고 비판하고 바꾸어낼 것을 요구하는 시민이 있어야 변화가 가능합니다. 시민의 민주적 역량, 앞에서 우리가 민주주의 문화라고 부른 것이 그래서 결정적으로 중요하지요. 변화의 가능성이 희망인데, 이 희망은 산타클로스의 선물이 아닙니다. 시민이, 시민 자신이 만들어 내야 하는 것, 그가 열어야 하는 것이 희망입니다. 말하자면 깨어 있는 시민이 희망의 동력이지요. 저는 우리에게 이 동력이 있다고 믿습니다.

프레시안 : 한국 사회의 미래를 좀 더 밝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지금 가장 신경을 써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도정일 : 사람 잘 키우는 일, 좋은 삶의 비전을 세우고 실천하는 일, 사람이 살만한 사회의 토대를 부단히 닦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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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세이건이 1985년 10월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에서 보름 동안 했던 강연을 엮은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칼 세이건 강연, 앤 드루얀 편집, 박중서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이 최근 나왔다. 세이건은 이 강연에서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상세히 밝힌다.

특히 세이건은 종교의 긍정적, 부정적 역할을 논하면서 그 동안 자연, 우주 속에서 신의 존재 증거를 찾으려는 시도를 강하게 비판한다. 특히 세이건이 수천 년 동안 제시된 신 존재 증명을 하나하나 논파하는 내용은 마치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한음 옮김, 김영사 펴냄)의 전주곡을 보는 듯하다.

이런 세이건의 입장을 염두에 두고 한국을 대표하는 천문학자 홍승수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와 종교학자 김윤성 한신대학교 교수가 비판적 서평을 <프레시안>에 보내왔다.

홍승수 교수는 세이건의 명저인 <코스모스>(사이언스북스 펴냄)를 완역해 국내에 소개하는 등 그와 각별한 인연을 맺어온 과학자다. 홍 교수는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을 각 장별로 꼼꼼하게 해설하면서, 세이건의 입장을 비판한다. 세이건의 책과 홍 교수의 서평을 통해서 과학과 종교를 바라보는 과학자의 다양한 관점을 살피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종교학자인 김윤성 교수가 홍승수 교수에 비해서 세이건에 호의적인 것도 흥미롭다. 김 교수는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거론하는 과학자 사이에서 세이건이 차지하는 위상을 소개하고 나서, 역시 책의 흐름을 따라가며 그의 주장에서 음미해볼 만한 지점을 짚었다. 김 교수는 세이건에 대한 논평을 통해서 종교에 대한 '맹신'과 '부정' 사이의 제3의 길을 제시한다.

세이건의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에 대한 이해를 높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과학과 종교에 대한 또렷한 관점을 제시하는 홍승수, 김윤성 교수의 서평을 전제한다. <편집자>


ⓒ사이언스북스

캐나다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의 삶과 음악을 다룬 영화 <글렌 굴드에 관한 32개의 짧은 필름>에서 마지막 에피소드 두 편의 소재는 보이저 탐사선이다. 바흐의 짧고도 강렬한 '작은 푸가 라단조'를 배경으로 보이저 탐사선의 이륙 장면이 보인다. 이어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잔잔한 주제인 '아리아'가 흐르는 가운데 새하얀 눈밭 위에 서 있는 굴드가 보인다.

음악이 <평균율> 1권의 1번 '다장조 프렐류드'로 바뀌고 굴드는 뒤를 돌아 멀리 걸어가기 시작한다. 내레이터가 보이저 탐사선 이야기를 들려준다. 탐사선에 탑재된 골든 레코드에는 굴드가 연주한 이 프렐류드도 담겼다는 설명과 함께. 내레이션이 끝난 후 굴드의 뒷모습은 지평선 너머 아득한 소실점을 향해 더욱 멀어지고 프렐류드 선율도 끝난다.

이제 곧 태양계를 벗어나 더 먼 우주로 나아가게 될 보이저 탐사선, 피아노라는 기계적 악기와 집요하게 씨름하며 오롯이 외길을 걸은 굴드, 그리고 음악에 무한한 깊이를 부여한 바흐. 확실히 이들 사이에는 겹치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은 바로 넓고 어두운 우주에서 인간이란 얼마나 고독한 존재인가 하는 주제다.


▲ 칼 세이건. ⓒ사이언스북스
칼 세이건은 보이저와 굴드 그리고 바흐를 엮는 끈이다. 긴 세월이 지나 언젠가 (아무리 빨라야 수만 년 뒤이고, 가능성 자체가 거의 없긴 하지만, 어쨌든) 혹시 보이저 호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를 외계의 지적 존재를 위한 지구 안내 종합 정보세트인 골든 레코드의 제작을 세이건이 주도했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과학자로서 그의 삶을 지배한 근본 화두가 바로 고독이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우주를 탐구해 온 과학자는 많지만, 세이건만큼 일반 대중이 우주의 경이를 그토록 생생한 전율 속에 느끼게 해 준 과학자는 그리 많지 않다. 그의 책을 읽다보면 광대하고 어두운 우주에서 '창백한 푸른 점'에 불과한 이 지구란 얼마나 작고 이례적인 별인지, 또 그 별의 표면에서 사는 우리 인간이란 얼마나 작고 고독한 존재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물론 이 느낌은 열패감이나 우월감, 그리고 고립감이나 절망감과는 거리가 멀다. 우주 저 멀리 어딘가에 또 다른 지적 존재가 있든 없든, 생명의 기미를 지닌 또 다른 별이 있든 없든, 지구의 형성이 우주의 기나긴 역사에서 벌어진 기적적인 사건이고, 생명의 출현과 인간의 진화가 사실상 불가능이나 다름없던 확률이 현실화된 또 다른 기적적 사건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지구는 비록 작지만 우주가 무의미한 사건의 연속에 그치지 않게 해주는 중요한 별이며, 인간은 비록 외롭지만 텅 빈 우주에서 어쩌다 우연히 나타났다 사라질 부산물 이상의 의미를 지닌 존재다. 넓고 어두운 우주의 경이를 대면하며 느끼게 되는 짧은 감탄과 긴 고독은 인간과 지구에 더욱 깊은 존재의 근거를 선사한다.

인간이 존재의 근거를 이해해 온 가장 오래되고 가장 주요한 원천은 종교였고, 과거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렇다. 하늘 너머의 신적 존재나 삼라만상에 가득한 우주적 법칙에서 존재의 근거를 찾는 종교적 상상력은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적어도 근대 이후로는 과학이 단순히 자연을 파악하고 조작하는 지식과 기술의 차원을 넘어 존재의 근거를 성찰하는 새롭고 강력한 원천으로 떠올랐다. 이후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놓고 다양한 견해들이 각축을 벌여 왔다. 종교계의 견해나 신앙과 과학을 조화시키려는 종교인 과학자들의 견해는 일단 접고 무신론 과학자들의 견해만 보면, 과학과 종교는 같은 진리를 놓고 다투기에 양립 불가능하며 결국은 과학이 종교를 밀어낼 것이라고 보는 반종교주의, 과학과 종교란 서로 다른 영역에 관여하기에 구태여 싸울 필요도 애써 접붙일 필요도 없다고 보는 분리주의, 생태계 보전 같은 절박한 과제를 위해 과학과 종교가 손을 잡아야 한다고 보는 협력주의 등 다양한 견해가 있다. 각 진영을 대변하는 기라성 같은 과학자들이 있지만, 대표적 인물을 들자면, 위의 순서대로 리처드 도킨스, 스티븐 제이 굴드, 그리고 에드워드 윌슨을 꼽을 수 있겠다.

그런데 이 세 진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과학자가 있다. 흔히 무신론자로 간주되지만 정작 본인은 스스로를 불가지론자로 여긴 사람, 우주를 탐구하고 우주에 대한 대중의 이해를 증진시키는 일에 평생을 바친 사람, 인류가 종교라 불리는 것을 통해 묻고 답해온 궁극적 물음을 판에 박힌 종교적 언어가 아닌 과학과 상식의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새로운 언어로 바꾸어 제기한 사람. 바로 칼 세이건이다. 우주 탐구를 향한 그의 헌신과 열정은 우리로 하여금 우주를 바라보는 인간-지구 중심적 관점을 벗어나게 해 준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을 역사책 속의 죽은 지식이 아닌 생생한 경험으로 실감하게 해 주었으며, 광대한 우주 안에서 지구와 인간의 고독이라는 근원적 존재 조건과 대면하게 해 주었고, 이로써 종교가 주도해 온 궁극적 물음의 향연에 과학이라는 막강한 레퍼토리를 추가하여 존재의 근거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더욱 풍성하게 해 주었다.

세이건의 입장은 과학과 종교의 협력을 말한다는 점에서 윌슨의 협력주의와도 상통한다. 하지만 무신론자인 윌슨이 당장의 급선무를 위해서라면 신념의 차이는 잠시 접어두자며 유신론자들에게 전략적 타협을 제안하는 것과 달리, 불가지론자인 세이건은 이런 전략적 타협을 넘어서서 과학과 종교, 특히 유신론보다 더 넓은 맥락의 종교가 좀 더 진지한 대화와 협력을 도모하자고 제안한다. 그는 종교가 우주와 생명과 인간에 대한 이해와 성찰에 기여해온 바를 인정하면서, 비록 과학이 종교가 수행했던 많은 부분을 대체해 왔고 앞으로 더 많은 부분을 대체하게 될 것이기는 해도, 또 종교가 과학적 오류나 윤리적 죄악을 저지른 경우가 많기는 해도, 종교에는 (물론 그는 바람직한 종교와 그렇지 않은 맹신을 구분한다) 앞으로도 계속 우주와 생명과 인간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고 인간을 포함한 뭇 생명과 그 터전인 지구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담당하는 역할을 할 것이며, 바로 이러한 공동의 목표 안에서 종교와 과학이 얼마든지 대화하고 협력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앤 드루얀이 남편 세이건의 유작인 1985년 기퍼드 강연 녹음을 정리하고 편집해 2006년에 간행한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은 그야말로 보석 같은 책이다. 세이건 필생의 과학적 성취와 주요 저작의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무엇보다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1995년)이나 <에필로그>(1997년, 유작) 같은 책에서 감질나게만 다루었던 종교 이야기가 '자연 신학', 즉 신이라 불려온 궁극적인 무엇에 관한 생각을 계시나 경전이 아닌 자연에 대한 경험적 관찰과 합리적 추론을 통해 풀어내는 작업으로 본격적으로 시도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드루얀이 편집자 서문에서 밝혔듯이,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이라는 제목은 본래의 세이건의 본래 강연 제목이 아니라 그가 애독했던 윌리엄 제임스의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1902년)을 차용해 그녀가 붙인 것이다. 세이건이 좋아했다는 제임스의 종교 정의, 즉 "(종교란) 우주 속에서 도리어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이라는 명제는 세이건의 지향과 이 책의 성격을 잘 말해 준다.

세이건이나 드루얀이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제임스의 책에 있는 좀 더 긴 종교 정의를 읽어보자. "(종교는) 보이지 않는 질서가 존재한다는 믿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의 지고선은 그 질서에 우리 자신을 조화롭게 맞추는 데 있다." 제임스는 특정 종교의 은어는 물론 그 어떤 종교적 색채의 어휘도 일체 배제한 채 지극히 일반적인 언어로 종교를 정의하는데, 세이건이 생각한 종교 정의도 바로 이런 것이다.

저토록 넓고 어두운 우주에는 보이지 않는 분명한 질서가 있으며, 우리 인간은 합리적 사고와 경험적 지식으로 그 질서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고, 우주적 질서의 일부이자 (적어도 지구에서는 유일하게) 그 질서를 이해하게 된 존재로서 우리 인간은 지구와 생명에 대한 책임을 감당해야 하고 감당할 수 있다는 것. 이런 세이건의 생각은 서양의 유신론 주류 종교 전통들을 기준으로 한 인격적 신 중심의 종교 이해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그의 종교 이해는 오히려 궁극적 실재를 비인격적인 우주적 법칙으로 이해하는 대부분의 동양 종교들 및 서양의 비주류 유신론 종교 전통들의 신비주의와 상통하며, 현대 유신론 종교들이 범신론과 고전적 유신론이라는 두 뿌리로부터 새롭게 발견해낸 유력한 신 개념인 만유재신론과 일맥상통한다.

세이건의 종교 이해 자체는 종교사의 다채로운 견해들 중 특정한 견해와 맞닿아 있기에 그 자체로 그리 새로울 것이 없다. 하지만 세이건은 적어도 서양이라는 맥락에서 (심지어 서양 바깥에서조차 지배적이 되어 버린) 유신론 종교, 특히 유일신교 중심주의를 벗어난 폭넓은 종교 이해를 견지했고, 무엇보다 여기에 자신과 선후배 과학자들의 엄밀한 과학적 지식과 논증을 결합했다는 점에서 새롭다. 그가 우주의 광대한 깊이와 그 이면의 질서가 선사하는 경이로움에 전율하면서 그 깊이를 헤아리고 질서를 탐구하는 과학이 일종의 "지적 예배"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

세이건은 과학 이전 시대에 종교들이 약간의 경험적 관찰에 감정과 직관을 섞어 각자 나름대로 (물론 파편적으로) 제시했던 우주와 생명과 인간에 대한 이해가 과학을 통해 더욱 깊어졌고 앞으로도 더욱 깊어질 것이라고 보았으며, 이 점에서 그는 특정한 역사적 맥락에 국한된 좁은 의미의 '종교를 추구'하지는 않았지만 좀 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넓은 의미에서 '종교적 추구'에 전념했다고도 할 수 있다. 아니, 이런 표현이 맘에 들지 않는다면 좀 바꿔서, 이렇게 말해 보자. 우주와 생명과 인간에 대한 단순한 과학적 지식을 획득하는 차원을 넘어 이 모든 존재의 궁극적 기원과 미래 그리고 근원적 의미를 추구한 세이건의 진지한 모색에는 상당한 심오함이 깃들어 있다고.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어쩔 수 없이, 역사적 태생과 변화를 겪어 온 우리의 언어에서 이런 심오한 추구를 지칭하는 데 가장 유용하게 또 가장 널리 사용되어 온 어휘 중의 하나가 바로 '릴리지온' 아니던가!

강연의 첫마디는 세이건을 20세기의 지도적 무신론자로 떠받들어 온 이들을 당혹케 만든다. 그는 플루타르코스를 인용한다. "진정으로 경건한 사람이라면 무신론의 낭떠러지와 미신의 늪 사이에서 아주 힘든 길을 나아가게 마련이다." 강연의 방향은 정해졌다. 불가지론자이자 회의론자이며 자연주의자인 이 과학자는 증거 없는 맹신에 불과한 미신도 피해야 하지만 과학으로 무장한 무신론도 피하는 게 좋겠다고 말하고 있는 중이다.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합리적인 건 분명하고, 또 세이건이 동료 과학자들의 무신론적 신념을 비난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하지만 어쨌든 그가 우주의 광대함과 질서에서 형언할 수 없는 압도적인 경이를 느꼈고, 그 경이로운 우주를 진지하게 탐구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자신의 과학적 추구가 종교적 경건과 어딘지 상통한다고 여겼으며, 비록 진리에 접근하는 방식과 진리라고 주장된 것의 신빙성을 입증하는 방식은 달라도 "과학과 종교의 목표는 결국 동일하다"고 생각했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사이언스북스

플루타르코스로 운을 떼며 시작한 첫 강의와 계속 이어지는 나머지 여덟 편의 강의는 세이건의 다른 책들을 읽은 적이 있는 독자에게 묘한 데자뷔를 일으킨다. 이 강연이 종교와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추가하고 있기는 해도 대개 강연 이전과 이후의 다른 저작들에서 펼쳤던 과학적 논의들을 압축적으로 요약하고 있기에 드는 느낌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감각이 뇌 속에서 일순간 뒤엉키며 벌어지는 데자뷔는 무어라 말로 형언하기 힘든 묘한 감정을 유발한다. (묘하기는 해도 그것은 종교적 경험은 아니다. 나는 데자뷔가 얼마나 쉽게 종교적 경험으로 착각되는지에 관한 회의주의자들의 견해에 동의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지구에서 시작해, 우리 태양계를 거치고, 그 태양계를 회전 원판 날개 한쪽 끝에 거느린 우리 은하를 거쳐, 우리 은하를 포함한 무수한 은하들이 가득한 거대한 우주로 차츰 확장해 가면서 광대한 우주의 경이와 그 안의 작디작은 거주민인 우리 자신에 대한 겸손을 느끼게 해주는 첫 강의(1강 자연과 경이)의 내러티브는 내 기억 속의 온갖 경험과 겹친다.

가깝게는 <콘택트>의 영화 판본에서 어린 앨리의 까만 눈동자 속으로 온 우주가 한순간에 녹아들던 첫 장면과 소설 원작에서 어린 앨리가 밤하늘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아찔한 경험을 하던 장면, 그리고 SETI 과학자가 된 앨리가 웜홀을 지나며 목격한 아름답고 경이로운 은하의 모습에 경탄하여 "(과학자가 아니라) 시인이 왔어야 했어!" 하며 울먹이듯 탄식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좀 더 멀게는 대학 시절 <코스모스> 읽기에 처음 도전하던 때가 생각나고 (과감히 도전은 했지만 이내 포기했고, 비로소 일독에 성공한 건 10년도 더 지나서의 일이다), 더 멀게는 30년 전인 중학생 시절 흑백 TV로 방영된 <코스모스> 다큐멘터리 시간을 알지 못할 흥분과 호기심에 매주 기다렸던 때 (1980년 12월 KBS에서 방영했다. 미국에서의 첫 방영과 같은 해 불과 몇 달 후의 일이니 지금 생각해도 참 빠른 수입 방영이었던 셈이다.

여담이지만, 몇 년 전 총천연색 DVD로 이 다큐멘터리를 비로소 다시 볼 기회가 있었으니, 사실 이게 가장 최근의 기억이기는 하다. 안타깝게도 이 고전적 다큐멘터리는 우리나라에서 VHS로만 출시되었을 뿐 DVD로는 출시되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멀게는 굳이 시골에 가지 않아도 등화관제 훈련 때면 마당의 평상에 누워 짙은 밤하늘의 빼곡한 별들과 뽀얗게 흐르는 은하수의 장관에 넋을 잃곤 하던 때가 떠오른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데자뷔가 계속되지만, 그리 오래 가지는 않는다. 데자뷔의 감흥에만 젖어 있기에는 세이건이 펼치는 이야기가 무척이나 새롭고 흥미진진하기 때문이다. 과학적 지식의 축적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주와 생명을 대하면서 왜 대상을 인격화하는 사고 습성을 버리지 못하며, 이는 종교의 본질에 관해 무얼 말해주는지(2강 코페르니쿠스로부터의 후퇴), 우주가 온통 유기 물질로 가득한데도 우리 태양계의 다른 행성들에 생명의 흔적이 전혀 없다는 현재의 관찰 결과와 다른 천체의 생명 존재 가능성을 추론할 수는 있어도 당분간은 그 증거를 발견하지는 못하리라는 전망이 말해주는 바는 무엇인지(3강 유기 우주),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전한 과학적 추론에 따라 우리보다 발전된 문명을 지닌 지적 존재를 상정하고 그들이 보냈을지도 모를 전파를 수신하려는 SETI 프로젝트가 어떤 과학적 가치와 인간학적 의미를 지니는지(4강 외계의 지적 생명체), UFO와 외계인에 대한 대중적 증거와 신념이 왜 단 하나의 경험적 증거도 없는 한낱 망상일 뿐이고, 이런 망상이 기적이나 유물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과거(와 현재)의 사기 행각이나 종교 산업과 얼마나 많이 닮아있는지(5강 외계인 민간전승)에 관해 과학과 종교의 온갖 역사적, 현재적 지식을 엮어 이야기를 풀어내는 세이건의 말재주는 실로 감탄스럽다.

신 존재 증명의 시도들을 반박하면서 이런 논증들은 단지 "우리가 사실이기를 바라는 것을 정당화하고, (…) 감정을 추스르는 것에 불과하며, (…) 설득력이 전혀 없다"고 논박하는 대목은 좀 밋밋한데, 이는 이 논박이 대개 이미 오래전에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이 충분히 반론을 완수했던 낡은 논쟁을 약간의 과학적 자료를 곁들여 재연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6강 하느님에 대한 가설들).

하지만 동양의 서양과는 사뭇 다른 신 관념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신 존재 증명을 소개하고, 신을 '큰 덩치에 흰 수염을 하고 하늘 위 보좌에 앉아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까지 일일이 세고 있는 백인 할아버지'로 간주해 온 서양적 신 이미지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를 지적하며(이 표현은 '한낱 참새가 떨어지는 것도 일일이 아시는 하느님이 하물며 소중히 여기시는 인간을 나 몰라라 하시겠느냐'고 한 성경 속 예수의 말을 패러디한 것이다. 마태복음 10:31~32; 누가복음 12:6-8), 스피노자와 아인슈타인처럼 "우주의 물리 법칙의 총합으로서 (비인격적인) 신"을 생각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소개하는 대목은 그야말로 혜안으로 번득인다.

특히 이 마지막 대목은 인격적 신 개념을 넘어서고자 하는 세이건의 종교관을 선명하게 보여 준다.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과 세이건의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은 같은 해인 2006년에 약간의 시차를 두고 출간되었다. 먼저 책을 낸 도킨스가 대서양 건너에서 드루얀이 세이건의 21년 전 기퍼드 강연록을 출간하려는 중이라는 소식을 알았는지, 또 이 강연 자체를 알고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본래 순서에 따라 세이건의 강연을 먼저 듣고 도킨스의 책을 나중에 읽었더라면 가뜩이나 진부한 도킨스의 신 존재 증명 반박은 세이건의 아류처럼 보여 더욱 맥이 빠졌을지도 모르겠다.)

잠시 쉰 셈 치고 (중반을 넘었으니 쉴 만하긴 했다) 책장을 계속 넘겨보자. 문화인류학과 신경생리학을 통해 종교적 심성이나 경험의 기원을 추론한 성과들이 소개된다. 많은 이들이 수긍하듯, 이런 성과들이 종교의 기원에 관한 결정적 증거를 제시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종교의 핵심에 관해 중요한 무엇인가를 알려준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 핵심이란, 인간은 권위에 굴복하는 성향과 평등을 지향하는 성향, 그리고 폭력 지향성과 평화 지향성의 상반된 기질을 동시에 타고났으며, 어느 쪽 기질이 발휘되느냐는 전적으로 사회적 조건과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종교 역시 인간의 이 부정적 성향과 긍정적 성향이 동시에 발현되어 온 사회 문화적 산물이며, 따라서 온갖 병폐에도 불구하고 인류 사회에 일정한 기여도 해 왔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세이건의 결론이다(7강 종교적 경험).

마지막 두 편의 강연은 모든 생물 종의 불가피한 운명인 멸종이 오직 인간에 의해서만큼은 자연적 과정이 아닌 인간 자신의 선택에 의해 초래되어 급기야 인류라는 종의 멸종은 물론 대다수의 생물 종마저 덩달아 멸종시킬 암울하고도 명백한 가능성, 즉 "창조에 반하는 범죄"인 핵전쟁이 야기하는 일련의 성찰적 과제와 윤리적 결단 문제를 다룬다. 여기서도 세이건의 생각은 명확하다. 종교들이 비록 파괴적 권력 앞에서 비겁한 침묵을 지키거나 심지어 그러한 권력에 신성한 후광을 덧씌우는 질을 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들은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지혜와 덕목을 통해 핵전쟁으로 인한 궁극적 파괴를 막아낼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종교란 인류가 겪어 온 기나긴 생물학적, 사회문화적 진화 과정에서 생겨나고 펼쳐져 온 유산으로서, 과학과 마찬가지로, 지구의 미래에 드리워진 불확실성의 그림자 걷어내고 인류와 뭇 생명의 생존을 지켜내기 위해 동원해야 하는 능력과 지식의 값진 보고다. 물론 어디까지나 종교들이 인습적 신념에 얽매이거나 과학을 거부하지 않고, 신념의 혁신을 도모하고 과학과 기꺼이 소통하는 한에서 말이다(8장 창조에 반하는 범죄; 9강 탐색).

도킨스 이후 반종교적 무신론 과학자, 철학자, 저술가들의 종교 관련 저술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져 나오고, 이에 질세라 무신론과 반종교주의의 도전에 대응하는 종교계의 저술도 홍수를 이루고 있다. 이런 와중에 무신론과 맹신의 양극단을 피하면서 우주의 경이로움에 대한 심오하고 경건한 감각을 견지하는 가운데 자신과 선후배 과학자들의 과학적 탐구를 종교를 포함한 인류 문화에 대한 성찰과 결합한 세이건의 강연록이 출간된 것은 매우 뜻 깊다.

특정 종교와 무관한 불가지론자이자 회의주의자이자 자연주의자인 한 과학자가 좁은 의미의 종교를 넘어서서 보여 준 훨씬 더 깊은 차원의 경건한 추구, 그리고 우주와 생명과 인간의 궁극적인 존재 근거를 성찰하고 그 토대 위에서 정해지지 않은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갖고 인류가 쌓아 온 모든 지식과 실천을 끌어안고자 한 진지한 모색은, 과학과 종교는 물론 인류 역사와 문화의 과거와 현재를 생각하며 또 다른 미래를 꿈꾸는 이들에게 선명한 한 줄기 빛을 선사해 줄 것이다.

글을 마치기 전에 몇 가지 아쉬운 점을 적어 본다. 세이건의 논지에 관해서는 그다지 토를 달고 싶지 않다. 그러기에는 독서의 여운이 여전히 강렬해서다. 한 걸음 물러서서 이 책을 다시 읽을 수 있으려면 좀 더 시간이 흘러야 할 것 같다. 다만 세이건이 사고와 신념의 특정한 양태인 '애니미즘'을 좀 더 포괄적인 사고 경향인 '인격화(또는 신인동형화 : anthropomorphism)'와 혼동한 것이나 애니미즘을 말하기 위해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를 끌어들인 것은 좀 문제가 있다. '애니미즘'에 관한 최초의 본격적인 이론화를 시도한 사람은 프레이저가 아니라 에드워드 버넷 타일러로서, 타일러의 <원시문화론>(1871년)은 프레이저의 <황금가지>(2권짜리 초판본은 1890년에 간행되었고, 13권짜리 최종판은 1915년에 완간되었다)보다 한참 앞서 나왔다. 게다가 프레이저가 애니미즘을 단지 자연의 가공할 힘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두려움과 관련짓는 단순한 이해에 그친 것과 달리 타일러의 애니미즘 이론은 '원시인'이 현대인 못지않은 복잡한 사고 능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왜 자연에 대한 오인된 추론에 이르게 되는지에 관한 길고도 정교하게 논의를 제시한다('원시인'에 작은따옴표를 친 것은 '프리미티브'를 '원시'나 '미개'로 번역해 온 관행이 뜨거운 논쟁의 도마에 올라 있기 때문이다). '애니미즘'을 말하려 했다면, 당연히 프레이저가 아닌 타일러를 끌어왔어야 한다. 하긴 지금도 프레이저의 명성이 타일러를 압도하고 있고, 인류학자나 종교학자들조차도 거의 읽지 않는 <원시문화론>에 비해 <황금가지>가 여전히 꽤 중요한 교양 필독서로 널리 읽히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세이건이 프레이저를 과신한 것이 꼭 세이건 자신 탓만은 아닐 수도 있기는 하겠다.


▲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칼 세이건 강연, 앤 드루얀 편집, 박중서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 ⓒ프레시안
번역에 관해서도 한두 마디 적고 싶다. 우선, 역자의 의도인지 출판사의 권유인지 모르겠지만, '신을 찾는 것에 관한 개인적 견해(A Personal View of the Search for God)'라는 본래의 부제를 '신의 존재에 관한 한 과학자의 견해'로 옮긴 것은 좀 아쉽다. 완전히 빗나간 번역은 아니지만, 이 책의 목적이 '신의 존재 자체'를 '직접' 다루기보다는 '신의 존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생각'을 '메타적으로' 성찰하는 데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썩 좋은 번역은 아닌 것 같다.

또한, 'God'을 대개 '하느님'으로 번역했는데, 영어와 한국어의 뉘앙스 차이를 생각하면, 차라리 '신'으로 번역하는 것이 나았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일단 '하느님'('하나님'도 같이, 아니 더 많이 쓰이고 있으니 번역의 곤란함은 더욱 가중된다)은 신의 인격성이 부각된 용어다. '님'이라는 어휘소 자체가 인격적 대상을 지칭하거나 사물을 인격화하는 데 쓰이기 때문이다. 반면 'God'은 주로 인격적 신을 지칭하는 데 쓰이기는 해도, 역사적으로 엄연히 신의 비인격적(법칙적) 측면도 포괄해 온 용어다. 서양의 신비주의 전통들은 궁극적 실재를 인격적 존재뿐 아니라 비인격적 법칙으로도 이해하는데, 이러한 종교사적 함의를 내포한 복합적 용어인 'God'의 번역어로는 인격성에 경도된 '하느님/하나님'보다는 인격성과 비인격성을 아우르는 면이 강한 '신(神)', 또는 문맥에 따라 적절하게 '신격(神格)'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큰 무리 없이 잘 읽히는 편이다. 세이건의 귀한 강연을 우리말로 읽을 수 있게 해 준 역자의 노고에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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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세이건이 1985년 10월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에서 보름 동안 했던 강연을 엮은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칼 세이건 강연, 앤 드루얀 편집, 박중서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이 최근 나왔다. 세이건은 이 강연에서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상세히 밝힌다.

특히 세이건은 종교의 긍정적, 부정적 역할을 논하면서 그 동안 자연, 우주 속에서 신의 존재 증거를 찾으려는 시도를 강하게 비판한다. 특히 세이건이 수천 년 동안 제시된 신 존재 증명을 하나하나 논파하는 내용은 마치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한음 옮김, 김영사 펴냄)의 전주곡을 보는 듯하다.

이런 세이건의 입장을 염두에 두고 한국을 대표하는 천문학자 홍승수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와 종교학자 김윤성 한신대학교 교수가 비판적 서평을 <프레시안>에 보내왔다.

홍승수 교수는 세이건의 명저인 <코스모스>(사이언스북스 펴냄)를 완역해 국내에 소개하는 등 그와 각별한 인연을 맺어온 과학자다. 홍 교수는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을 각 장별로 꼼꼼하게 해설하면서, 세이건의 입장을 비판한다. 세이건의 책과 홍 교수의 서평을 통해서 과학과 종교를 바라보는 과학자의 다양한 관점을 살피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종교학자인 김윤성 교수가 홍승수 교수에 비해서 세이건에 호의적인 것도 흥미롭다. 김 교수는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거론하는 과학자 사이에서 세이건이 차지하는 위상을 소개하고 나서, 역시 책의 흐름을 따라가며 그의 주장에서 음미해볼 만한 지점을 짚었다. 김 교수는 세이건에 대한 논평을 통해서 종교에 대한 '맹신'과 '부정' 사이의 제3의 길을 제시한다.

세이건의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에 대한 이해를 높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과학과 종교에 대한 또렷한 관점을 제시하는 홍승수, 김윤성 교수의 서평을 전제한다. <편집자>


▲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칼 세이건 강연, 앤 드루얀 편집, 박중서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 ⓒ사이언스북스
인류 문화의 위대한 유산인 종교와 과학은 늘 묘한 길항의 관계를 유지해 왔다. 칼 세이건이 1985년에 한 기퍼드 강연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은, 이 길항의 균형이 과학에 의하여 이미 깨뜨려졌음을 독자에게 널리 알리려는 목적으로 쓰인 듯하다. 이 책에서 세이건은 '신을 탐구하는 행위'는 아무리 과학적 경험에 기초하려 한들 결국 종교 행위일 뿐임을 지적하고, 과학적 입장에서 봤을 때 기존 종교의 한계를 비판한다.

현대를 과학 기술의 시대라 일컫는 걸 보면, 과학과 종교가 벌이는 길항의 균형추가 과학 쪽으로 이미 기울어진 듯하다. 그런데 정말로 그러한가? 꼭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비록 힘의 균형이 과학 쪽으로 기울어진 것처럼 보이더라도, 아직 종교는 과학과의 겨루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해서도 안 된다. 과학 기술이 지배하는 시대라고 해도 종교가 해야 할 몫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아니, 둘은 애초부터 겨루기의 상대가 아니었다. 어느 한쪽이 다른 쪽에 비해 '힘'이 월등하게 우세하기 때문에 상대가 못 된다는 뜻이 아니라, 종교와 과학의 소관 사안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란 말이다.

그럼에도 과학은 종교적 교의가 허구라고 판단하고 간섭하고, 종교는 과학의 내용이 교의에 어긋난다고 문제 삼는다. 소관 사안이 다를지라도 어떤 답에 이르려면 과학과 종교가 같은 길을 밟아야 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보자. 과학은 자연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바라보면서 그 현상을 굴러가게 하는 이면의 기본 얼개를 찾으려 노력한다. 한편, 종교는 동일한 자연 현상에서 절대적 초월자의 뜻을 읽어 내려고 애를 쓴다. 소관 사안은 이렇게 다르지만 거기에 이르게 하는 매체는 동일한 자연 현상이었다. 여기서 길항의 관계가 비롯한다.

그러나 매체가 되는 자연 현상이 하나라도 거기서 도출하려는 '작동 얼개'와 '신의 뜻'은 분명히 다른 내용의 진실이다. 하나의 사실에서 단 하나의 진실만이 허락된다면, 그건 '이름 달리 부르기' 놀이에 불과하다. 우리는 하나의 사실이 하나 이상의 진실을 함축하고 있음을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하나의 사실에서 서로 다른 내용의 두 가지 진실이 양립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면, 과학과 종교 사이에 벌어지곤 하는 길항의 관계가 서로를 보듬어 안는 보완의 관계로 승화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세이건은 이 보완의 관계를 '공감'이라고 불렀다. 과학과 종교가 인류의 위대한 유산이라면 둘은 반드시 공감의 길을 모색해야만 한다. 이 책은 과학과 종교의 공감을 희원(希願)한 한 과학자의 고뇌가 담겨 있다. 칼 세이건은 이 책의 원고가 된 기퍼드 강연 원고를 준비하면서 얼만 많은 사색의 시간을 보냈을까? 과학과 종교 사이에 공감과 보완의 관계가 유지되기를 희원하는 필자에게 역시 이 책의 서평을 쓴다는 일은 도전이면서 고역이었음을 미리 밝혀 둔다.

사람들은 대자연의 위용에서 어떤 경외심 같은 것을 느끼게 마련이며 그 경외심의 뿌리에 초월적 절대자가 자리한다고 믿는다. 그러고 그 믿음이 주는 가르침을 삶의 지표로 삼아 매일 실천으로 옮기는 이들을 우리는 신앙인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 칼 세이건은, 인간의 이와 같은 신 탐구 내지 종교 행위가, 자신의 다양한 과학적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저 허구일 수도 있다고 비판한다.

자연과 우주 속에서 하느님 또는 신에 대한 증거를 아직 과학이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판에 사용된 잣대는 물론 과학의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간직되어 있는 신앙에 과학의 잣대를 그대로 들이민 것이다. 그래서 세이건의 논지는, 과학의 눈으로만 보면 매우 명쾌할지 모르겠으나 종교의 가슴에는 멍만 남길 수도 있다. 그 까닭에 필자는, 이 책의 서평은 과학과 종교의 두 가지 다른 시각에서 처리돼야 할 것으로 판단한다.

우리는 이 책의 부제에서 세이건의 시각이 어떤 것인지 예상할 수 있다. 예리한 독자라면 이 책 영어판의 부제가 '신에 대한 나의 탐구(A Personal Search for God)'가 아니라 '신 탐구에 관한 나의 소견(A Personal View of the Search for God)'이라는 점에 주목할 것이다. 그리고 저자의 시각이 신 존재에 결코 긍정적이지만은 않을 것으로 예상할 것이다.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을 지금 손에 든 당신이 신앙인이든 비신앙인이든 간에, 세이건이 이 책에서 택할 관점의 향방을 미리 짚어 보기 바란다.

나는 이 책의 매 장(章)을 먼저 과학의 시각으로 읽으면서 논지의 핵심을 설명하겠다. 그 다음 종교의 시각으로 세이건의 논지를 재조명함으로써, 그가 종교를 과학의 잣대로 재단하는 과정에서 범한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겠다.

필자는 과학의 시각이 일부 편협한 종교인에게 경고의 불빛을 비춰 주기 바란다. 그러고 종교의 시각이 과학의 기계론적 사고에 쐐기로 작용하길 희망한다. 과학의 시각이 저자의 논거에 대한 필자의 해설을 제공할 것이다. 한편,, 종교의 시각은 필자에게 가슴 착한 신앙인을 위한 변호의 길을 열어 줄 것이다.

1강 자연과 경이

세이건은 종교(religion)의 어원적 해석으로 이 책의 첫 장을 연다. 그에 따르면 'religion'이 '함께 묶기'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왔다고 한다. 세이건 주장은, 과학이 별개인 것처럼 보이는 것들 사이의 관계를 규명하고자 하는데, 종교는 자연에서 우러나는 경외감을 절대자와 연결하고자 하므로, 연결의 관점에서 과학과 종교의 목적하는 바는 같다는 것이다.

필자는 'religiion'의 어원적 의미는 물론이고 세이건의 해석인 '함께 묶기'가 단순히 두 개의 사물이나 현상을 하나로 연결한다는 뜻은 아니라고 본다. 과학은 겉으로 드러난 '사실'의 이면에 숨은 입증 가능한 '진실'을 찾아내어, 그 둘의 근원적 관계를 밝히고자 한다. 한편,, 종교는 겉으로 드러난 '사실'이라는 텍스트에서 신의 뜻이라는 '진실'을 읽어 내어 그 진실을 '믿음'으로 간직한다. 그러므로 종교의 경우, 두 연결 대상 중 한쪽에 늘 신이 자리하는데 비하여, 과학은 그 자리에 물질계의 작동 원리가 앉아 있다.

세이건은, 과학과 종교의 목적은 같지만, 진실에 접근하는 방식과 찾아낸 진실의 신빙성을 입증하는 방식에서 과학과 종교가 서로 다른 길을 택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종교는 찾아낸 진실의 신빙성을 입증하는 객관적 방법을 갖고 있지 않다. 가질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에서의 진실은 믿음의 대상이지 입증할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해서 필자는 세이건에게 묻고 싶다. 입증된 진실이라면 믿을 필요가 있겠는가? 입증된 진실은 우리가 그냥 받아들이기만 하면 될 것이다. 믿음이란 공개적 또는 노골적 입증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믿음은 믿는 자의 결단을 요구할 뿐이다. 그러므로 과학이 종교에게 "네가 읽어 낸 믿음의 신빙성을 내게 입증하라."라고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과학은 그 믿음이 가져오거나 가져올 결과만을 문제 삼을 수 있을 뿐이다.

세이건이 과학과 종교의 이질성을 어떻게 '문제 삼고 있는지'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로 하자. 세이건은 천상에서 벌어지는 각종 현상들의 영상을 독자에게 차례로 보여 준 다음, 그 영상들이 품고 있는 진실을 이야기한다. 눈을 들어 밤하늘을 보면 대자연이 연출하는 신비가 펼쳐진다. 밤하늘의 장관과 위용과 신비에서 누구나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이 경외심을 종교적 경험이라고 불렀다. 종교적 감흥을 자아낸 이와 같은 현상에서 과학은 인과의 원리를 밝혀낸다. 종교도 과학과 마찬가지로 밤하늘의 위용에서 우러난 종교적 감흥을 진실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종교는 원리 대신, 그 진실 너머에 또 어떤 초월적 절대자가 자리한다고 믿는다.

세이건은 종교가 주장하는 진실 너머의 진실이 갖는 허구성을 지적하기 위하여 자기 식의 몇 가지 독특한 논거들을 제시했다. 종교적 감흥을 자아내게 하는 별과 은하의 수명이 유한하다는 사실로 독자의 관심을 유도한 다음, 은하 수명의 유한성이 신의 영원성과 화해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초신성과 같은 거대 규모의 폭발이 일어나면, 은하에 존재할지 모르는 아니 확실히 존재할 것으로 예상되는, 생명이 멸절(滅絶)되거나 지적 기술 문명권이 파괴될 것이라고 지적한다. 전선(全善)하신 신이라면 은하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도록 허락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모순을 지적한다. 신은 영원불멸하므로 죽음에서 해방된 존재일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인간을 유한한 수명의 존재로 만들어 인간에게 죽음의 공포를 안겨 준 것을 보면, 신은 결코 전선할 수 없고 오히려 극도로 잔인한 존재일 것이라고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러므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서양 전통 종교의 신은 지극히 지구 중심적이라고 질타한다.

세이건의 결론은, 자연에 대한 우리의 경외감이 결코 초월적 절대자의 존재를 담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록 서양 종교에서 상정하는 '초월자'가 존재하더라도, 그 초월자는 지극히 지구 중심적인 존재임에 틀림이 없다고 강조한다. 우주를 아우르기는커녕 은하조차 보듬지 못하는 '졸렬한' 존재라는 것이다.

나는 세이건이 제시한 이 논거를 읽으면서 내 식으로 그에게 '어깃장'을 놓고 싶어졌다. 은하 도처에 문명권이 자리하고 있지 않는 한, 하나의 문명권이 초신성 폭발로 파괴될 확률은 거의 0이다. 그만큼 문명권들의 평균 거리가 엄청나게 멀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생명이 출현하려면 먼저 성간 물질에 탄소를 비롯한 중원소가 충분히 공급돼야 한다. 그런데 초신성 폭발이야말로 중원소의 주요한 공급 기작이다. 그러므로 인간을 사랑하는 신의 관점에서만 보더라도 성간에 중원소를 부지런히 공급해야 할 필요를 절실하게 느꼈으리라.

인간의 수명이 유한하다는 사실에서도 우리는 신의 무한한 자비를 느껴야 할 것이다. 죽음을 통하여 새로운 위상의 삶으로 진입하게 된다고 종교는 우리에게 가르친다. 일부 종교에서는 부활이란 정화된 언어로 죽음의 허상과 공포를 극복하게 한다. 당신이라면 자신의 육신을 이 세상에서 영원히 유지하고 싶은가? 필자라면 그런 식의 영원한 삶이라면 도대체 지루해서 못 견디고 말 것이다.

나의 '어깃장' 놓기는 계속된다. 어쩌다가 우리 은하의 한 문명권이 폭발하는 초신성의 바로 곁에 자리하게 됐다고 하자. 그 문명권은 자기네의 불운을 단순한 '재수 탓'으로 돌릴지 모른다. 하지만 그 문명권의 지적 생명체가 지구의 신앙인들과 같은 종교적 존재라면, 자신들에게 불어 닥친 불행을 신의 탓으로 돌리기보다 거기에 담긴 신의 뜻이 무엇인지를 먼저 읽어내려 할 것이다. 또 다른 각도에서 이 가상의 사건을 돌아볼 수 있다. 만약 그 문명권이 인접 문명권들을 마구잡이로 공격하는 속성의 것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초신성을 폭발하여 그 문명권을 일찌감치 멸망케 한다면, 은하 전체의 선익(善益)을 위하여 바람직한 선택이 아니겠는가.

세이건은 서양 종교의 전통적인 신을 인간 중심 또는 지구 중심의 편협한 신이라고 질타한다. 지극히 인간 중심적이라고. 필자도 동의한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어깃장 놓기'가 지구 중심적 신은 물론이고 은하 중심적인 신을 위한 '겉보기 변명'의 구실은 했으리라. 필자가 '어깃장'이니 '겉보기 변명'이니 하는 용어를 굳이 사용하는 건, 세이건 식의 논의가 전혀 생산적이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에서이다. 필자는 세이건이 제시하는 논거들 역시 단순한 어깃장 놓기의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고 판단한다. 기독교를 비롯한 서양 종교의 교조적 편협성을 일깨우는 데 세이건이 일조는 했겠지만, 그가 바라는 인간 종의 영원한 안녕을 도모하는 데 그의 논거들은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의 독자들이 세이건이 겨냥하는 편협하고 교조적인 종교인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장의 해설을 마친다.

2강 코페르니쿠스로부터의 후퇴

아폴론 신전에 옴팔로스라는 이름의 돌 제단이 있다. 고대 그리스 인들이 세계와 우주의 중심에 솟는다고 믿었던 돌기를 이 '배꼽 돌'이 대신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천문학의 발달은 옴팔로스의 이전(移轉) 역사였다.

코페르니쿠스가, 최초의 그래서 가장 힘이 들었던 이전의 주역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등에 업은 교회의 권위를 거역하면서까지 그는 옴팔로스를 지구에서 태양으로 옮겨 놓는 데 성공했다. 15세기 중엽에 일어난, 조용했지만 거대한 혁명이었다. 그 결과 우주의 중심이라 자처하던 지구와 지구인의 위상에 회복할 수 없는 흠집이 났다. 알고 보니 지구도 태양의 주위를 도는 여러 행성들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자신의 평범성에 대한 지구인들의 최초 눈뜸이었다.

지구인의 위상이 이렇게 무너지기 시작하더니 20세기 초에 와서는 허구의 '화성인'까지 '출몰'하기에 이른다. 한편,, 우주의 중심을 지켜 줄 줄로만 믿었던 태양마저 우주커녕 우리 은하의 중심도 차지하지 못하는 존재였다. 이 사건 역시 20세기 초에 있었다. 태양도 변방에 던져진 그저 그런 수많은 별들 중의 하나일 뿐이었던 것이다. 우주에는 아예 중심 같은 건 없다. 이제 자신의 평범성을 깊이 인식한 지구인들은 외계 문명권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은 15세기에 이미 완성된 혁명이 아니다. 현재 진행 중이다.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은 지구와 외계 문명과의 교신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평범성에 대한 인식의 뿌리는 옴팔로스보다 더 깊은 곳에 있었다. 상대성 이론이 특권적 지위의 좌표계 따위는 아예 바라지도 말라고 우리를 가르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현대인들은 인간 이성의 자신감을 상실한 채 코페르니쿠스 이전(以前)의 특권적 허상을 그리워한다는 게 세이건의 진단이다. 세이건은 이 장에서, '설계로부터의 논증'을 다시 내세우는 창조론자들의 최근 동향과 인간 원리(Anthropic Principle)로 우주와 인간 세상을 다 설명하려 덤비는 일부 우주론자들의 과도한 주장을 특별히 우려한다.

다윈이 궁극의 '시계 제작자'인 신의 개입 없이도, 자연 선택의 과정을 통하면, 무질서한 자연에서 질서를 이끌어낼 수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세이건은 다윈을 인용하여 설계로부터의 논증을 일단 반박하고, '6강 하느님에 대한 가설들'에서 이 문제를 더 깊이 있게 다룬다.

다윈의 진화를 받아들인다고 해서 신의 창조가 자동적으로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논쟁의 핵심은 설계로부터의 논증이 아니다. 무엇을 두고 '창조'라고 하는지가 핵심이다. 일부 편협한 기독교인들을 제외한다면, 오늘날 아무도 창조를 <창세기> 기록의 축자적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세이건의 반박은 공허하다. 우리가 우려할 대상은 '지적 설계론'으로 재무장한 창조 과학이다. 과학의 이름으로 창세기 식의 '창조'를 '과학'이라 호도할 위험 때문이다.

한편, 세이건은, 인류 원리의 옹호자이며 저술가인 존 배로(John D Barrow)의 "우주가 관찰자들을 산출하고 유지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설계되었다."라는 언급을 하나의 증거로 삼아, 인본 원리의 실제 목적이 '하느님이 우주를 창조했고, 그래서 인간이 결국 나오게 되었음'을 믿게 하려는 데 있다고 갈파한다. 세이건의 논거들을 여기 반복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필자는 인류 원리의 가장 큰 맹점이 결과론적 주장에 있다고 본다.

이 책의 독자들이 특히 유념해야 할 점이 있다. 비록 '설계로부터의 논증'과 '인간 원리'의 비논리적 측면이 세이건에 의해서 밖으로 드러났다고 해서, 신의 존재가 자동적으로 부정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세이건이 신의 부재를 증명할 수 있었던 게 아니라, 창조 과학과 인간 원리에서 동원됐던 신 존재의 논지들이 갖고 있는 비논리적 측면을 지적했을 뿐이다. 신은 아마도 '존재 증명'을 거부하는 '존재'일 것이다.

3강 유기 우주

세이건은 이 장에서 탄소를 함유하는 간단한 분자들이 혜성의 스펙트럼에서 확인됐음을 길게 설명한다. 외계에 유기 화합물의 존재 여부가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그만큼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혜성에 유기 화합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특별할 게 못 된다. 혜성의 핵이 미행성체의 원형일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이어서 세이건은 일부 소행성들을 비롯하여 화성의 위성인 포보스와 데이모스의 반사도가 3퍼센트 수준이라는 사실을 근거로 이들 소형 천체의 표면에 내화성 유기 화합물이 존재할 것으로 추측한다. 토성의 바깥쪽 위성 이아페투스에 대해서도 같은 추측을 한다. 낮은 반사도가 내화성 유기 화합물의 존재를 반드시 시사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이 주장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나 토성과 토성의 위성인 타이탄에는 메탄이 확실히 존재하다. 한때 메탄의 바다가 존재했을 것이란 그의 예측도 사실인 것으로 최근에 밝혀졌다.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등에는 메탄의 존재가 확실할 뿐 아니라, 각종 탄화수소들이 이들 외행성계의 천체들에서 속속 발견됐다.

유기 화합물이 태양계 천체에서만 확인된 것은 아니다. 세이건이 이 강연을 할 당시에 알려진 성간 분자들은 총 50여 종에 불과했지만, 현재 150종 이상의 유기 화합물 분자들이 저온의 고밀 암흑 성간운에서 발견됐다. 전파 천문학의 발달로 매우 복잡한 구조의 성간 분자들이 속속 발견되는 중이다. 이들의 거의 전부가 탄소를 근간으로 하는 유기 화합물 분자다. 그러므로 유기 화합물은 우주에서 예외적인 희귀 성분이 아니라 우주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는 아주 보편적인 물질이다.

한편,, 우리 태양계 역시 저온 고밀의 성간운이 중력적으로 수축하여 태동했을 터이므로, 태양계 천체들이 만들어진 원료 물질에는 유기 화합물이 이미 포함돼 있었던 것이다. 현재 태양계 천체에서 발견되는 유기 분자들이 성간운에 들어 있던 바로 그 분자는 물론 아니다. 성간운 단계에서 원시 태양계 성운 단계를 거쳐 미행성, 혜성, 원시 행성, 소행성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대단히 복잡한 화학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양계의 탄소를 비롯한 모든 종류의 중원소는 그 기원이 성간운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태양계에서의 유기 화합물의 존재는 성간운에서 원시 행성계로 이어지는 진화의 아주 자연스러운 결과인 것이다.

생명의 기원에 절대적 요소인 이 유기 분자들 사이에서 상호 작용이 충분한 빈도로 일어나려면 적정 수준 이상의 농도가 오랫동안 유지돼야 한다. 기체 위상에서는 높은 농도를 유지하기 어려우므로 반응의 효율성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유기 화합물에서 생명으로 이르는 과정에서 액체 위상의 물을 확보하는 일이 급선무다.

원시 태양계 성운에서 지구가 태어난 지역은 물이 존재하기에는 온도가 너무 높았다. 그러나 물 분자는 수화물의 형태로는 광물 암석에 물론 갇혀 있을 수 있었다. 이들 물 분자가 암석이 용융되는 과정에서 밖으로 분출하여 지구의 원시 대기에 수증기를 공급했을 것이다. 수화물 이외의 공급원도 생각할 수 있다. 물의 분수령 바깥에서 형성된 미행성체들에는 얼음이 풍부했을 것이다. 이 점은 혜성의 핵이 온통 얼음이라는 사실만 보아도 확실하다. 얼음을 잔뜩 머금은 미행성체들이 분수령 너머에서 안으로 이주하면서 일부는 원시 지구에 포획된다. 그 결과 원시 지구는 엄청난 양의 물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수증기를 포함한 원시 지구의 대기가 식으면서 수증기는 비가 되어 운석 구덩이가 널린 원시 지구의 표면에 떨어져서 호수를 만들고 거기에 유기 분자가 녹아든다. 호수의 물이 증발하면 유기 분자의 농도가 자동적으로 높아진다. 이리하여 원시 지구의 표면 도처에 '원시 스프(primordial soup)'의 연못들이 자리할 것이다.

원시 스프 성분 분자들의 억겁에 걸친 상호 반응에서 자기 복제의 기능을 갖춘 분자가 일단 만들어지면, 그다음에 일어날 반응은 이 분자가 전적으로 지배할 것이다. 분자들의 무작위 반응이 촉매로 기능할 단백질 분자를 만들어내기도 할 것이다. 이렇게 태동한 분자들이 단세포 생물로 발달하기까지에는 숱하게 많은 난관이 놓여 있을 것이다. 그 난관들이 과연 무엇인지는 현재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

그러나 처음부터 아주 복잡한 분자를 만들어야 하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아미노산 분자 다섯 개가 모여 특정 기능을 발휘할 효소 분자 하나가 만들어질 확률은, 20종의 아미노산 분자들 중에서 다섯 종을 특정 순서로 배열하면 되므로, (1/20)5≃1/(3×106)이다. 다시 말해서 대략 300만 번의 무작위 시도 끝에 원하는 분자가 태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세이건은 이러한 논지를 근거로 생명의 기원을 신의 창조 손길에만 의존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주장한다. 세이건이 배척하려는 창조의 손길이, 아미노산 하나하나를 원하는 순서에 따라 차근차근 신 스스로 꿰맞추는 행위를 의미한다면, 평자도 세이건의 주장에 동의하겠다. 그러나 오늘을 사는 성숙한 신앙인이라면 아무도 이런 식의 창조를 신의 창조라고 믿지는 않을 것이다. 신이 전지전능한 존재라면 자신의 창조 과정을 이런 식으로 '미련하게' 이끌어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럴 필요조차 없지 않았겠는가. 신학도 이런 개념의 창조를 용도 폐기한 지도 꽤나 오래됐다.

그러므로 세이건의 논지는 이미 생명을 잃은 '적(敵)'을 한 차례 더 죽이는 격이다. '왜'를 고민하는 종교에게 과학의 잣대를 일방적으로 들이 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떻게'는 종교에게 물을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건 과학의 몫으로 남겨 둬야 한다.

필자는, 세이건의 논지를 신의 창조를 배제하는 데 동원하고 싶지 않다. 지구 생명이 이 장에서 논의된 대로 태동했다면, 생명 현상의 범 은하적 보편성을 우리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 생명이 성간 교신의 능력을 갖춘 기술 문명으로 발전할 것인지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지만, 세이건의 논지가 생명의 보편성을 인정하는 길을 열어 준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외계 문명과의 교신은 시도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바로 이 점에서 나는 세이건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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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강 외계의 지적 생명체

태양계 밖에서 지적 생명체의 존재가 확인될 경우, 이 발견이 우리에게 가져올 철학적, 윤리적, 정치적, 신학적 충격은 가위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일 것이다. 그 까닭에 우리는 외계인의 존재에 지대한 관심을 가져 왔다. 이러한 관심이 20세기에 들어와서, 화성 표면의 운하, 고대 우주인의 지구 방문 흔적, 미확인 비행 물체 등으로 표출됐을 것이다. 세이건은 이 장에서 로웰의 화성 운하 문제를 집중적으로 논한다. 외계인의 지구 방문과 UFO의 문제는 다음 장에서 다룬다.

이탈리아 천문학자 조반니 스키아파렐리가 화성 표면의 줄무늬를 설명하고자 사용했던 '관(管, channel)'이라는 뜻의 이탈리아 어 '카날리(canali)'를 영어권에서 '카날(canals)'로 번역하면서, 지적 존재가 모종의 의도를 갖고 건설한 '운하'라는 개념이 이 단어에 자연스럽게 따라 붙었다.

스키아파렐리가 건강상 이유로 화상 관측을 지속할 수 없게 되자, 구한말 외교관의 자격으로 조선을 방문하기도 했던 미국의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은 애리조나 주 플래그스태프에 자비로 훌륭한 천문대를 건설한다. 오늘날 로웰의 언덕이라 불리는 이곳에서 로웰은 '카날리'를 집중적으로 관측하여 '화성 지도'를 작성하면서 '화성 운하'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굳혀 간다. 이어서 로웰의 '화성 운하' 아이디어는 SF의 형태로 대중 문학으로 깊숙이 들어왔고 라디오 방송까지 타게 되면서, 카날은 화성인들의 지구 습격 가능성으로 확대 재생산되기에 이른다.

지상 망원경의 제한된 분해능으로 얻은 화성의 줄무늬는 로웰만 본 것이 아니었다. 릭 천문대의 대장을 지낸 라이트도 로웰의 줄무늬를 보았을 뿐 아니라, 라이트와 로웰의 화성 지도에 유사성도 발견된다. 문제는 줄무늬가 아니라 줄무늬에 대한 로웰의 해석에 있었다. 과학자로서 로웰이 이런 오류를 범하게 된 저간의 사정을 세이건은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지구에서는 수에즈 은하나 파나나 운하와 같은 거대한 운하 건설 사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여기에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쓰라린 경험이 우주 전쟁의 공포로 연결됐던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요인은 인간의 본성에 있었다.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경향이 있다. 즉 화성인이 지구 문제의 해결사가 되어 주기를 지구인들이 원했던 것이다. 이런 분석을 통하여 세이건은 화성의 운하를 둘러싼 일련의 사태에서도 인간의 신을 향한 염원의 기원과 정체를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단세포에서 시작한 지구 생명의 진화가 인간에 와서 끝날 이유가 없다. 지구 문명이 당장 멸망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지구 문명의 지난 반세기를 돌아보면 그 변화의 속도에 정신을 잃을 지경이다. 지구에서의 기술 문명의 발달이 그럴진대 외계에서의 상황은 또한 어떻겠는가. 지구보다 다만 천 년이라도 먼저 생명이 출현한 외계 행성이 있다면, 그리고 그곳의 생명도 지구에서와 같은 다윈 진화의 과정을 밟아 왔다면, 저들의 지적 수준이 얼마나 높을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진화에 허용된 시간만 생각한다면,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기술 문명을 갖춘 지적 생명체들을 우리는 은하 도처에서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세이건은 드레이크의 방식을 따라서 우리와 교신 가능한 문명권이 은하수 은하 안에 몇이나 있을지 추산해 보인다. 그러나 추산의 관건은 전적으로 기술 문명의 예상 수명에 달려 있음을 알게 된다. 지구 문명의 미래가 희망적일수록 그만큼 많은 수의 외계 문명을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미래가 그렇게 밝지만은 않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현 시점에서 교신 가능한 외계 문명을 찾는 일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발견 자체가 지구 문명의 밝은 미래를 기대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세이건은, 수동적 교신의 방안으로 현재 진행 중인 SETI 계획을 제안하고, 우리의 존재를 알리는 신호를 우주로 내보낼 충분한 능력을 지구 문명이 현재 갖고 있다고 강조한다.

이 책에서 세이건은, 외계 생명의 문제를 과학적 실험의 대상으로 구체화했다. 외계 생명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관측을 제안했다. 여태껏 단순한 믿음을 근거로 한 주장에 불과하던 논의를 실험 과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왔다. 지구에서 발견된 물리 법칙의 범 우주적 보편성을 근거로 외계 문명과의 교신 가능성을 그는 설득력 있게 논증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구 문명에 가져올 엄청난 의미를 바르게 짚어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필자는 세이건의 업적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그의 종교에 대한 거의 '적대감'에 가까운 태도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종교의 기원이 '대리 해결사'에 대한 욕구에서 비롯됐다는 세이건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러한 인식이 인간의 신을 향한 염원을 잠재우지는 못할 것이다. 외계 문명의 도움으로 지구의 문제를 일부 해결할지 모르지만, 외계 문명이 완전한 의미의 '해결사'는 결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교와 과학의 이 뛰어넘을 수 없는 간극을 세이건 자신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5강 외계인 민간 전승

이 장에서 세이건은 구체적 예를 들어가면서, 고대 우주인의 지구 방문 흔적에 대한 주장과 미확인 비행체(UFO)에 관한 수많은 보고가 갖고 있는 논리의 허구성을 하나하나 짚어 간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이스터 섬의 거대 석상, 나스카 사막의 대형 그림 등이 우주인의 지구 방문 흔적이라고 주장하는 에리히 폰 데니켄의 <신들의 전차>는 전 세계적으로 수천만 부가 판매됐다고 한다. '비행 접시'라는 표현이 처음 쓰이기 시작한 1947년 이래 약 100만 건에 달하는 UFO '목격' 사례가 보고됐다. 조금만 생각하면 이러한 주장과 보고의 허술한 구석이 바로 노출되는데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우주인의 지구 방문 흔적과 그 가능성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주인의 지구 방문 증거로 제시된 거대한 패턴, 그리고 UFO의 목격담과 관련 사진 등에는 어떤 의도를 갖고 조작된 사례들도 발견되지만, 대부분은 선량한 필부들의 진솔한 '경험담'이다. 하지만 그 '경험'이 재확인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이 경우 경험이 사실을 보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희망 사항이 '경험'으로 둔갑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주인에게서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세이건의 해석에 따르면, 우리 자신이 저질러놓은 비극적 사고(事故)의 완벽한 해결사의 역할이라고 한다. 전 세계의 핵무기 보유고만 놓고 생각해도 이 비극의 실상이 머리에 쉽게 떠오를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신산한 삶에서의 행복한 탈출은 우리 모두의 꿈이 아닌가.

신들의 전차든 UFO의 목격담이든, 그것은 의식의 저변에 자리하는 인간의 원초적 염원의 굴절된 표출이라고, 세이건은 진단한다. 원시인들은 신을 확장된 아버지로 받아들이면서 신에게서 해결사의 역할을 기대했을 것이다. 언젠가 내게 떨어질지 모르는 '벼락의 비극'을 '천둥의 신'께서 내 대신 미리 막아 주기를 염원했던 것처럼 말이다. 세이건이 이 장에서 내린 결론은, '신들의 전차'나 '비행 접시'에 거는 현대인의 열광도 종교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 심성의 발로라는 것이다.

이 장의 결론에 접하면서 나는 저자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 하나 있다. 그렇다면 종교는 진화 중이란 말인가, 아니면 정체(停滯)가 종교의 버릴 수 없는 한 가지 속성이란 말인가? '천둥의 신'을 외계인으로 동정(同定)하게 될 즈음, 종교가 인류 문화에서 완전히 사리질 것인지, 나는 무척 궁금하다.

세이건이 이 장에서 겨냥하는 바가 무엇인지 확실하지 않다. 우리의 지적 수준이 원시 동굴의 상황에서 한 발자국도 떠나지 못했음을 지적하기 위함인가. 외계인이라면 직접 방문보다 전자기파를 이용하는 교신을 택했을 터이니, 외계로부터 지적 존재의 직접 방문은 기대하지 말자는 제안일까. 종교라는 게 이렇게 무지한 수준이니 종교에 더 이상의 기대를 걸지 말라는 요구일까. 아니면 종교가 인간의 원초적 심성의 발로이니 우리와 영원히 같이 할 것이라는 인식의 토로인가.

이러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 나는 외계와의 교신에 적극 매달리고 싶다. 저들의 신과 우리의 신을 비교한다면, 우주의 창생과 신의 문제에 해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6강 하느님에 대한 가설들

하느님의 관한 논의를 합리적으로 이끌어 가려면, '하느님'이 무엇인지, 적어도 어떤 속성의 존재인지부터 알아야 할 것이다. 즉, 어떤 종류의 신에 관해 이야기 하자는 것인지를 먼저 정해야 한다. 그 다음에 그런 속성의 신이 과연 존재하는지를 따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신의 속성이 문화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는 데 문제의 핵심이 있다. 이 문제를 극복할 한 가지 방안으로 우리는 자연 신학에 큰 기대를 걸었었다. 자연 신학이란, 오로지 이성, 경험, 실험을 통해서만 수립될 수 있는 신학적 지식 체계를 의미한다. 신의 속성을 알아내는 데 계시나 신비 경험 따위는 배제하고 오로지 인간의 이성에만 의존하겠다는 것이다.

자연 신학을 근거로 한다면, 믿음의 세부 사항이 지리적, 역사적, 문화적 영향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하늘에서 벌어지는 관측 가능한 현상들의 실상은 관측자가 누구냐에 따라 다르지 않다. 관측자가 속한 문화가 천상의 현상을 좌우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자연 신학이 인류 공통의 신을 우리에게 알려 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과연 그러할까. 겉을 드러난 현상으로부터 보편타당한 지식을 발굴해 내려면 반드시 해석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해석이란 해석의 틀을 구축하는 작업이다. 해석에는 반드시 모형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가장 근본적인 모형이 언어다. 언어를 생각의 거푸집이라고 하지 않던가. 해석의 결과도 언어로 표현하게 된다. 그러나 언어는 지리, 역사, 문화 등의 영향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러므로 자연 신학도 지리, 역사, 문화에서 완전히 독립적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세상에는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성격의 지식도 많다. 신학이 그런 지식의 대표 격이다. 즉 신비는 종교의 빼놓을 수 없는 속성인 것이다.

신학을 벗어나 우리에게 친숙한 문학으로 가 보자. 언어를 유일한 도구로 삼는 문학에서조차 언어의 한계가 노정된다. 그래서 특히 문학의 한 형식인 시(詩)에서는 '비상의 언어'를 동원하여 '통상의 언어'가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를 일부나마 극복하고자 한다. 언어의 이런 속성 때문에 우리는 음악, 미술, 무용 등을 좋아하며, 수학과 과학에 커다란 기대를 거는 것이다.

그 까닭에 애초에 자연 신학에 걸었던 우리의 기대를 접거나 축소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신학은 자연 신학을 자신의 지배 아래 두려고 함으로써, 신 존재의 증명을 자연 신학에 의뢰하려던 본래의 목적마저 저버렸던 것이다. 신학과 자연 신학의 관계를 마음에 새기면서 칼 세이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로 하자.

칼 세이건은 이 장의 신 논의를 주로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 전통의 유일신에 맞추었다. 하느님은 전지(全知), 전능(全能), 지선(至善)하신 초월적 존재로서 우주를 창조하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며 인간의 삶에 간여 등을 하시는 분이다. 이런 속성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하여 자연 신학이 제시한 여러 가지 논증들이 있다. 그중에서 세이건은 ① 우주론적 논증, ② 설계로부터의 논증, ③ 도덕적 논증, ④ 존재론적 논증, ⑤ 의식으로부터의 논증, ⑥ 경험으로부터의 논증, 하나하나를 차례로 설명하면서 각 논증의 한계를 일일이 지적한다.

여기에 각 논증에 대한 그의 설명과 비판을 반복할 필요는 없다. 어떻든 세이건의 결론은 이렇다. 이 논증들은 하나같이 "우리가 사실이었으면 하고 바라는 어떤 것에 대한 합리적 정당화"를 추구하고 있다. 즉 신 존재의 증명이라기보다 신에 관한 합목적성의 설명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신학과 자연 신학의 관계에서 이미 예상할 수 있었던 결론이다.

이 단원을 닫기 전에 몇 가지 사항만 간략히 언급해 두겠다. 신에 관한 '우주론적 논증'이 현대 우주론의 중심 주제와 아주 자연스럽게 연계돼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하느님과 우주 중에서 누구의 나이가 더 많은가의 질문이 신학과 천문학을 연결하는 하나의 고리가 될 수 있다. 우주론적 논증이 자연 신학의 본령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세이건이 이 책에서 '설계로부터의 논증'에 퍼부었던 비판들은 창조 과학이 최근에 들고 나온 '지적 설계론'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칸트의 '도덕적 논증'도 일종의 '경험으로부터의 논증'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도덕심도 종교적 경험으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덕적 논증'에 대한 세이건의 비판은, 우리가 도덕적인 존재인가부터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이건은 같은 맥락의 비판을 안젤모 성인이 제창한 '존재론적 논증'에도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 즉 존재론적 논증의 단초로 삼았던 안젤모 성인의 '하느님은 완전하다.'는 주장이 도대체 무슨 뜻이냐고 세이건은 되묻는다. 그러고 세이건은, 아직 의식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의식으로부터의 논증'도 신 존재의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비판한다.

'경험으로부터의 논증'에 대한 세이건의 비판에 필자가 가한 비판은 '7장 종교적 경험'을 참고하기 바란다.

이 꼭지의 서두에서 서술한 신의 속성은 하나같이 '무한'을 향한 인간의 '희망과 승복의 외침'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무한'을 주요 속성으로 하는 그 무엇이 자연 신학이 추구하는 이성적 분석에 알맞은 대상이 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신의 속성에 '무한성'을 부여하면서, 인간의 유한한 이성을 도구로 하는 자연 신학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했던 것이다. 신은 존재 증명을 거부한다. 존재가 증명될 수 있는 신을 인간은 믿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언어로 존재가 증명될 수 있는 신이라면 믿을 필요가 없다. 이해하면 그만이다. 그러므로 이 단원에서 시도한 신 존재의 증명 노력은 애초부터 부정적 결과를 안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신 존재의 증명 실패가 신의 부재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7강 종교적 경험

현대 문명 세계와 완전히 고립된 채 아직도 수렵과 채집만으로 살아가는 원시인의 집단들이 지구상에 존재한다. 이들을 오랫동안 관찰한 문화 인류학적 연구 결과에 따르면, 구성원들이 서로 평등한 관계를 유지하는 민주적 집단과 강력한 위계 질서로 묶인 독재 체제의 집단으로 대별될 수 있다고 한다. 식량이 넉넉한 환경에서는 전자가 흔하고, 열악한 환경에서는 후자의 체제를 선호한다. 어떤 상황에서든 개인은 늘 선택을 해야 하고, 그 선택은 고민과 고통을 동반한다. 그러나 선택을 지도자의 몫으로 일단 돌리면, 개인은 자신의 자유를 일부 잃게 되겠지만 고민과 고통에서 해방되는 편리함이 있다. 즉 인간 정서에는 수평적 민주와 위계적 독재를 향한 두 가지 상반되는 성향이 공존하게 마련이다. 원시 시대로부터 시작한 인간 심리에 공존하던 이 불편한 관계가 오늘까지 유지되어, 현대의 민주 국가에서도 우리는 전쟁을 책임지는 군대라는 위계 조직을 보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세이건은 종교의 기원이 위계적 질서를 향한 인간의 원초적 정서에 있다고 주장한다.

가족 관계에서 위계의 최고 지위는 아버지의 몫이다. 부족 사회에서는 족장이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한다. 가족과 부족의 당면 문제를 무리 없이 잘 해결해 주던 아버지와 족장이라 하더라도 자연 재해 앞에선 무력할 수밖에 없으므로, 위계의 더 높은 자리에 자연 현상을 지배하는 수많은 신(神)들이 자리하게 됐을 것이다. 자녀가 아버지의 기분을 언짢게 하면 그로부터 얻는 게 없으며, 부족원이 족장의 심기를 건드렸다면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따라서 누가 벼락을 맞는 불행을 당했다면 천둥 신의 마음을 건드렸기 때문이라고 저들은 믿었을 것이다. 세이건은 이런 논지를 근거로, 신이 아버지의 확장된 개념이며 신에게 바치는 기도와 희생의 종교 행위는 신을 기쁘게 하려는 인간 측의 노력이라고 설명한다.

수렵-채집 사회의 종교 의식에서는 종교적 감흥(感興)을 고양하기 위하여 종종 환각 물질을 복용한다. 조울증 치료에 쓰이는 리튬만 보더라도, 외부로부터 투여한 화학 물질이 사람의 신경 생리학적 반응을 조정할 수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세이건은 인체에서 자체 생성되는 엔케팔린과 엔도르핀과 같은 두뇌 단백질을 예로 들면서, 종교적 감흥 역시 특정 화합물에 의한 신경 생리학적 반응일 것으로 추측한다. 즉 인간의 종교적 경험이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건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 서평을 쓰고 있는 필자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경관 앞에 서면 자연에 대한 깊은 경외심과 성스러움을 느낀다. 우리는 모성애의 위대함에서 사랑의 지순함을 읽어 낸다. 모성애가 없는 종은 자연 선택의 관문을 넘기 어려웠을 터이므로 종으로서 성공을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다윈 진화가 모성애의 필연성을 담보한다 하더라도, 모성애에서 느꼈던 나의 종교적 경험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오히려 그러한 기작의 성립이 더욱 신비로울 뿐이다. 사람이면 누구나 느끼게 마련인 이와 같은 종교적 경험 역시, 세이건의 주장대로라면, 특정 화학물질이 신경 생리학적 반응에 간여한 결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투여된 약물로 인해 유발된 종교적 감흥과 자연적으로 우러난 종교적 경험이 한 사람의 삶에 가져다 줄 변화는 질적으로 서로 다를 것이다. 사랑 없이 이뤄지는 성행위와 사랑하는 남녀의 육체적 결합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세이건 자신도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자식을 위하여 어머니가 흘린 눈물과 화학 조성이 완전히 일치하는 혼합물을 누군가 조합했다 하더라도, 아무도 그 혼합물을 눈물이라고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바로 여기에 종교에 관한 세이건의 분석적 논지에 함정이 있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신은 증명될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바람직한 신앙인이라면 종교적 경험에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덤비지도 않을 것이다. 자신이 느낀 종교적 경험을 바탕으로 신을 믿는다고 그저 고백할 뿐이다.

세이건은 이 장의 결론을 갈음하기 위하여 버트런드 러셀의 <회의적인 에세이>에서 한 구절을 가져왔다. 그 인용문은 원래 사회 현실과 정치 체제에 관한 언급이었지만, 러셀이 지적한 '정치·사회 현실'의 아이러니를 세이건은 '과학과 종교'에 내재하는 같은 성격의 아이러니로 치환해서 읽고 싶었던 것 같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 인용문을 다시 주의 깊게 읽어 보면, 세이건 자신도 '과학의 증명'과 '믿음의 고백'이 인간 사유의 서로 다른 차원에서의 문제임을 인정한 듯하다. 러셀의 언급은 지극히 역설적이며 비아냥조로까지 들린다. 비아냥의 표적은 정치·사회 현실에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논리의 무력증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왜 세이건은 자신의 결론을 러셀이 지적한 정치·사회 현실의 아이러니로 대신하려 했단 말인가. 신 존재에 관한 증거 부재가 신앙을 부정할 이유가 못 되기 때문이다. 종교의 가치를 가늠하는 데 과학의 잣대는 완전하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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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강 창조에 반하는 범죄

인간의 사유를 지배하는 전통과 관습이란 인류가 수만 또는 수십만 세대를 거듭하면서 알아낸 삶의 농축된 지혜일 것이다. 종교는 이러한 지혜의 보고(寶庫)이다. 그런데 최근세기에 들어오면서 전통과 관습이 전하는 지혜의 한계성이 노정(露呈)되기 시작했다. 현대가 너무 빨리 변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에게 인생의 훌륭한 지침으로 작용하던 전통 가치가 그 아버지의 아들에게는 아무런 소용도 없게 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러므로 현대인의 지혜란 고대 교의에의 단순한 집착에 있지 않고, 오히려 회의(懷疑)를 통한 그 대안의 창출에 있다고 저자는 이 장에서 주장한다.

세이건은 자신의 화성 탐사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현대 천문학이 인류의 지구 생명에 관한 인식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고 독자를 설득한다. 화성의 자연 환경이 생명의 출현을 받아들일 만했던 적이 과거에 있었을 것으로 기대되지만 오늘의 화성 표면은 불모의 사막으로 남아 있다. 달은 물론이고 지구와 쌍둥이라는 금성에서조차 우리는 생명의 존재를 기대할 수 없다. 토성의 거대 위성인 타이탄에서 발견된 유기 화합물이 생명의 전조가 될지 모르겠지만 거기에서도 지구 생명과 같은 존재는 찾아볼 수 없으며 앞으로도 그런 생명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태양계에서 오로지 지구에만 생명이 서식한다는 이 사실을 놓고 볼 때, 인류는 행성 지구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서 와서 지금 어디로 가고 있단 말인가.

세이건도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묻고 있다. 그는 고생물학적 증거들을 열거하면서 지구에 있었던 생명의 대량 멸종 사건들에 독자의 특별한 관심을 불러 모은다. 특히 공룡의 멸종을 불러왔던 6500만 년 전 지구 환경의 변화 원인과 변화 과정을 상세히 기술함으로써, 그때의 파국적 상황이 소행성이나 혜성의 충돌의 결과라지만, 오늘날 전 세계의 핵무기 보유고와 거기서 비롯할 가공할 실상이 소행성의 충돌 결과와 다를 바가 없음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지구 생명을 대멸절의 위기로 몰아갈 파국을 지금 우리 자신이 조성 중인 것이다. 사람은 이렇게 창조에 반하는 범죄 행위의 동인(動因)으로 기능한다.

인류를 포함한 지구 생명계의 구원을 위하여 이 대멸절의 위기에서 종교의 역할은 무엇이란 말인가. 지구인이 지구라는 배의 유일한 승무원이므로, 종교의 막중한 임무는 우리들로 하여금 배 전체를 볼 줄 아는 건전한 시야를 갖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면 인종(人種) 차별의 악습에 대한 진지한 자기 반성이 가능할 것이다. 인종 차별에 대한 반성은 우리가 알게 모르게 범하고 있는 종(種) 차별의 횡포에 대한 깊은 각성으로 이어질 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상호 의존도보다 실은 사람이 자연에 훨씬 더 넓고 깊게 의존하기 때문에 이러한 각성이 우리에게 빨리 오면 올수록 인류의 미래가 밝아질 것이다. 신앙인이면서 대량 살상 무기의 개발과 생산에 종사한다면, 그 무기가 인류의 미래에 가져올 끔찍한 결과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의식해야 한다고, 저자는 이 장에서 신앙인들을 다그치고 있다.

종교에 대한 세이건의 통렬한 비판이 이 장 말미에 와서 종교를 향한 탄원성의 호소로 돌변한다. 원수 사랑의 황금률이 무모한 핵 경쟁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도덕적 표준이 된다고 세이건 자신이 믿기 때문이다. 무릇 종교는, "남이 너한테 했으면 하고 바라는 대로, 너도 남에게 똑같이 하라."라고 가르친다. 세이건은 핵 경쟁의 역사를 이 가르침의 계(係, corollary), 즉 "네가 남에게 하는 대로 남도 너에게 똑같이 할 것이다."라는 한마디로 요약하면서, 특히 미국의 정치 지도자들을 향하여 스스로가 가짜 기독교 신앙인이든가 아니면 함량 미달의 신자임을 고백하고 시인하라고 외친다.

이 서평을 쓰고 있는 필자는 이 장에서도 칼 세이건의 주장과 논지의 모순을 보게 된다. 인간이 느끼는 정의와 자유, 지고의 선과 미, 사랑의 감정, 대자연에 대한 경외심, 그리고 성스러움 등과 같은 종교적 경험이 초월적 절대자에 그 뿌리가 있다고 우리가 믿어야만 황금률과 같은 종교적 가르침이 비로소 우리 개개인에게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적 지혜는 반드시 믿음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세이건은, 종교적 경험이 초월적 존재에서 비롯하는 게 아니라, 혈액에 흐르는 특정 분자들로 인한 결과라고 이 책에서 줄기차게 주장해 왔다. 인류 문화의 전통적 지혜로서 기능하던 종교적 가르침이 현대로 오면서 과학에 의하여 그 효력을 점점 상실했다고 역설하던 그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그의 주장대로라면 이미 무기력할 대로 무기력해졌을 종교적 가르침을 지렛대로 삼아, 어떻게 지구 문명과 생명계의 미래를 총체적 위험에서 구하겠다는 것인지 무척 당혹스럽다.

미국 정치 지도자들에게 특정 분자의 약물을 투여하여 그들이 종교적 경험을 느끼게 된다면, 그들이 지구를 핵전쟁의 위기에서 구할 특단의 조치라도 내릴 수 있단 말인가. 약물 투여가 사람을 종교적 경험으로 유도할 수는 있더라도, 그 약물이 초월자를 대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9강 탐색

현대 지구 문명의 비극은, 종교가 갖는 믿음의 차원을 과학의 이름으로 배제하려는 데서부터 그 싹이 텄다. 사용하려던 지렛대가 충분히 길지 않다는 사실을 세이건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종교의 위력에 우리가 다시 손을 내밀더라도, 지구인은 당면한 위기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해결해야 할 오늘의 문제는, 유사 이래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아주 특이한 성격의 난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제의 심각성은, 현대 과학 기술이 인류는 물론이고 지구 생명을 통째로 멸종시킬 수준에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에서 누구나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어려운 문제들을 잘 해결해 왔다. 저자는 이 장에서 그 예를 몇 가지 제시한다. 인류는 시민 혁명을 통하여 왕권신수설의 무거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사물의 자연적 질서에 속하는 것이라 여겼던 노예 제도는 또 얼마나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였던가. 하지만 성서 구절까지 지목하면서 노예 해방이 신의 의도에 반한다고, 헛된 주장을 펼치던 노예주들을 이제는 지구상에서 찾아 볼 수 없게 됐다. 합법적 노예 제도가 근본적으로 폐지된 것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여성의 지위가 급격히 상승한 것도 우리의 지혜와 분별력이 성취한 위대한 업적이었다.

그런데 핵겨울의 공포는 이러한 문제들과 그 성격이 확연하게 다르다. 왕권신수설, 노예제도, 여성 차별 등의 경우에는 이를 옹호했을 때 생기게 마련인 이득을 탐하는 기득권층이 늘 존재했다. 그러나 인류는 물론이고 전 생명을 멸종으로 몰아갈 핵전쟁에서는 그 누가 기득권적 이득을 차지할 수 있단 말인가. 바로 이 점이 현대 지구 문명이 당면한 문제의 심각성이라고 세이건은 강조한다.

변하는 생존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개체는 씨족, 부족, 국가, 제국의 순으로 자신을 동정(同定, identify)할 줄 알았다. 이렇게 개체와 집단의 동정을 통해서 기득권 세력에 효과적으로 항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핵전쟁의 파국을 막으려면 자신이 국가가 아니라 인류의 구성원임을 자각해야 한다. 핵 경쟁이 불러올 파국은 개체가 아니라 종의 생존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지구를 하나의 행성으로 볼 줄 아는 지혜가 쥐고 있다고 하겠다.

우리가 지구를 바깥에서 바라보면 볼수록, 우리가 사는 세상이 비록 절묘하기는 하지만 지극히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그리고 우리 모두가 모두에게 철저하게 의존하고 있음을 더욱 깊이 실감하게 된다. 즉 지구인이 자신의 위치를 우주 진화의 깊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비로소 인류라는 종의 미래가 보장된다. 세이건은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우리가 그러한 벤티지 포인트에 이를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외계 문명권과의 통교에 있다고 설파한다.

칼 세이건이 마지막 장의 서두를 안나 카레니나의 인용으로 장식한 배경이 이제 확실해졌다. "내가 도대체 누구이며 어찌하여 시공의 이 점에 자리하게 됐는지를 알아야 나 자신의 삶이 가능하다." 시대를 앞선 톨스토이의 지성에서 우리는 지구 문명의 난제를 해결할 한 줄기 서광을 본다.

세이건이 넘어야 할 벽

나는 거의 매일 도시락이 들어 있는 배낭을 메고 관악산에 오른다. 계곡과 능선이 갈라지는 저수지에 이르러 나는 잠깐 망설이고는 한다. 오늘은 어느 쪽 길을 걸을까, 하고 말이다. 계곡을 택하면 물소리가 내 귀를 맑게 하지만 동행을 고집하는 날파리 떼의 집요함을 견뎌야 한다. 능선 길에 올라서면 넓은 시야가 내 가슴을 열어 주지만 한여름의 태양과 힘겨운 씨름을 벌이게 된다. 물과 파리가 계곡에 상존하는 선과 악이라면, 한강대교까지 열리는 시야와 땡볕은 능선이 거느린 선과 악이다. 이 세상의 악을 신 부재의 증거로 내세운 세이건의 논지를 따르면 그렇단 말이다. 계곡과 능선엔 선도 악도 없다. 선악은 내 마음의 잣대가 판단한 가상의 가치일 뿐이다. 땡볕이 있다고 해서 내 어찌 능선의 고마움을 잊을 수 있겠는가.

나선 은하에서는 대략 50년에 한 번꼴로 초신성이 폭발한다고 한다. 폭발 현장 가까이 문명의 싹을 틔운 행성이 마침 자리한다면, 그 행성의 모든 생명은 대 멸절의 운명에 놓이게 될 것이다. 신이 지선하신 존재라면 이런 비극은 은하에서 발생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은 은하계 하나도 제대로 보듬지 못하는 유한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이상이 신의 전능을 부정하기 위해 세이건이 내세운 몇 가지 논지 중의 하나다. 과학의 단선적 사고와 저자의 종교에 대한 무지가 빚어낸 이 억지를 읽으면서, 우리네 세상살이의 중층성에 천착하는 종교가 과학의 시각에 곱게 보일 리가 없다고 이해하기로 했다.

초월적 절대자의 존재를 믿는 신앙인이라면 초신성이 불러올 비극을 자신의 선익(善益)이 아니라 범 은하적 '선익'의 관점에서 바라볼 것이다. 절대자의 입장에선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하고 말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가 마음 착한 신앙인이라면 초신성에 희생될 외계 생명의 운명을 동정하면서, 자신이 언젠가 잠결에 때려잡은 모기의 혈흔을 기억할 것이다. 구두에 밟혀 죽는 개미의 운명도 걱정할 것이다. 세이건과 신앙인의 잣대는 이렇게 다르다. 이 책에서 저자는 과학의 잣대로 종교를 재단했다. 그것도 종교의 피상적인 면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다.

과학의 잣대를 종교에 들이밀어야 할 경우가 있다. 과학이 찾아낸 사실의 진위 여부를 종교가 문제 삼는다면, 그건 마땅히 과학의 잣대로 해결돼야 한다. 천동설과 지동설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가톨릭 교회의 갈등이 그런 경우다.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 불러온 창조와 진화의 대결 구도 또한 그러하다. 종교가 과학적 사실의 진위를 놓고 과학을 공격할 때마다 종교가 패배했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다. 종교가 과학의 힘을 빌려 자신의 교의(敎義, dogma)를 입증하려 할 때에도 종교는 엄청난 과오를 범하고는 했다.

신학이 자연 신학의 도움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한 시대가 있었다. 세이건이 이 책 6강에 정리해 놓았듯이, 자연 신학의 존재 증명을 통해 드러나게 된 신 개념의 논리적 모순이 사람들로 하여금 오히려 신의 부재를 믿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증명될 대상이 아닌 신을 과학의 이름으로 증명하겠다고 신학이 무리수를 둔 결과다. 존재 증명의 실패가 반드시 부재의 증명은 아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신의 개념 문제였다. 세이건도 존재 증명의 실패가 부재의 증명이라고 노골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지만, 이 책이 벌이는 논의들의 배경에는 그런 주장이 어렴풋이 깔려 있다. 이 책을 손에 든 독자들은 이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신이란 존재 증명을 거부하는 속성의 존재인지 모른다.

자기 수정의 기능을 갖춘 과학과 계시와 교의에 의존해야 하는 종교의 속성에는 이렇게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엄존한다. 그 까닭에, 천동설은 과학이 저지른 엄청난 실수였는데 불구하고 그 실수가 자아낸 피해는 종교의 몫으로 고스란히 돌아갔다. 종교와 과학의 길항과 갈등의 관계는 문자로 기록된 계시의 축자적 해석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칼 세이건의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이 경전의 축자적 해석을 고집하는 일부 편협하고 교조적인 종교인들에게 하나의 좋은 경종으로 기능할 것으로 기대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필자는 칼 세이건의 용기와 지성에 큰 박수를 보낸다.


▲ 칼 세이건. ⓒ사이언스북스
서평을 마치면서 책장을 덮자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의 제목이 내 눈길을 잡는다. 아인슈타인의 '종교적 경험'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대자연의 위용 앞에 서면 자신의 저 깊은 내면으로부터 치밀어 오르는 어떤 성스럽고 숭고한 감흥을 감지하게 된다. 이 느낌을 아인슈타인은 '종교적 경험'이라고 불렀다. 종교적 경험 너머에 초월적 절대의 세계가 있다고 믿는 이들이 신앙인이다. 세이건은 그 감흥을 종교에서 과학의 영역으로 불러들이고자 했다. 하지만 가두지는 못한 듯하다. 세이건은 초월적 절대 세계의 가능성을 배제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런 세계의 유용성은 인식한 듯하다.

여기까지 읽어 온 독자라면 기억할 것이다. 이 책의 종반부는 현대 문명이 당면한 전 지구적 난제들을 열거하면서 지구 문명의 총체적 파산을 막으려면 과학과 종교가 손을 잡아야 한다는 논지로 일관한다. 아니 종교를 향해 도움의 손길을 달라고 절절하게 요구한다.

필자는 세이건에 묻고 싶다. 종교적 감흥마저 과학에게 내어 준 종교가 어떻게 과학이 저질러 놓은 총체적 파국을 막아 줄 수 있겠는가. 종교적 감흥을 잃은 종교는 칼 세이건이 바라는 도움을 줄 수 있는 그런 종교가 이미 아닐 것이다. 초월적 절대자의 존재를 믿지 않으면 종교로부터의 구원의 손길도 끊어진다. 손을 잘라 놓고 손을 달라고 하니, 과학의 단선적 사고가 빚어낸 아이러니의 백미다.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이 넘어야 할 준엄한 벽이 바로 여기에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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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위기 담론은 더 이상 새롭지 않다. 우리는 꽤 오래 전부터 남성의 위기를 가리키는 숱한 말들을 들어왔다. 거의 엽기적 수준으로까지 진화하고 있는 '간 큰 남자' 시리즈는 흔들리는 남성의 지위에 대한 남성들 자신의 자조 섞인 심리적 반응이다. 이제는 한물간 농담으로 물러났지만 한때 술자리 담화를 주도했던 이 시리즈의 주요 생산자와 소비자는 남자들이다.

나는 회식 자리에서 나이 지긋한 선배 남자 교수가 기억하기조차 힘든 간 큰 남자 유형을 일일이 펼쳐 보이고, 그의 유창한 언변에 모두 실없는 웃음을 터뜨릴 때, 웃음 뒤에 짙은 자조감이 묻어있음을 느낀다. 자조 뒤엔 상실감이 있고, 상실감 뒤엔 회복의 욕망이 숨어있다. 최근 번역된 하비 맨스필드의 <남자다움에 관하여>(이광조 옮김, 이후 펴냄)는 이 회복의 욕망을 과감하게 표현하고 있는 저작이다.

그렇다. 맨스필드는 과감하다. 그러나 몹시 지루하다. 그리 새롭지도 독창적이지도 않은 올드 레퍼토리가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맨스필드 자신은 서문에서 이 책을 "남자다움에 대한 온건한 방어"라 부르고 있지만, 이 책은 2006년 미국에서 출판되자마자 격렬한 반대에 부딪친다.


▲ <남자다움에 관하여>(하비 맨스필드 지음, 이광조 옮김, 이후 펴냄). ⓒ이후
성 중립 사회에서 남성다움을 구출하고자 하는 맨스필드의 프로젝트는 페미니즘에 대한 강한 반발에서 비롯되고 있기 때문이다. 맨스필드가 성 중립적인 사회(gender neutral society)라 부르는 것은 자유주의가 마련한 토대 위에 페미니즘이 강화시킨 것으로, '평등'이라는 이상 아래 '합리적 통제'를 통해 남성과 여성 사이의 '성차'를 지워버리는 사회이다.

맨스필드의 입장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성차는 본성(nature)과 문화(culture)가 어우러진 복합물로서 결코 지울 수 없고 지워서도 안 되는 인간의 본질적 속성인데, 평등을 위해 성차를 지움으로써 남성과 여성 모두를 불구화시키는 담론이자 운동이 바로 페미니즘이라는 것이다.

맨스필드의 직접적 구출 대상은 남성이고, 남자다움이다. 여기서 우리는 맨스필드가 남성다움을 가리키는 영어 단어로 "manliness"를 쓰고 있는 것에 주목하자. 맨스필드는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미국학계에서 남자다움(manliness)을 해체하고 그것을 남성성(masculinity)으로 대체하려는 시도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남성성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남성들이 습득한 문화적, 성격적 특성을 가리키는 기술적 용어이다. 그것은 남자다움에서 규범적 가치를 뺀 것이다. 이 책에서 맨스필드가 시도하는 것은 문화적 구성물로서 남성성을 해부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다움과 상보적으로 존재하지만 여자다움 보다 뛰어난 '미덕'이자 '가치'로서 남자다움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런 만큼 이 책의 저변을 흐르는 감정 구조는 위기감과 적대심, 그리고 잃어버린 것을 되찾으려는 복구 의지이다.

성 중립 사회에서 버려진 덕목으로서 그가 다시 구출하고자 하는 남자다움은 여러 가지 특징을 갖고 있지만 그 핵심은 "위험 앞에서 자기 확신과 단호함"이다. 남자다운 남자는 위험에서 도망치지 않으며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들을 전면에 내세워 그 문제를 공적이고 정치적인 의제로 만든다. 그는 자기 자신을 제쳐두고 타인을 먼저 보호하는 사람, 자기 이익이나 생존보다는 명예를 중시하는 사람, 위험 앞에 움츠러들지 않고 용기를 잃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남자다운 남자의 전형을 찾기 위해 맨스필드는 고대 그리스에서 현대 미국 사회, 서부영화에서 헤밍웨이 소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저작에서 9·11 폭격현장에 이르기까지 시간과 공간, 문화적 경계를 넘나든다. 그리고 호메로스의 영웅 아킬레우스, 서부 영화의 존 웨인, 헤밍웨이의 소설의 노인,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마거릿 대처 영국 수상에게서 가장 탁월한 예를 발견한다. 그는 여성적 부드러움이나 배려의 윤리와 대립되는 이 강한 남성의 단호함, 용기, 결단력이야말로 많은 여성들이 은밀히 끌리는 매력이자 성 중립의 수렁에 빠진 현대 사회를 구출하는 덕목이라고 확신한다.

이 정도면 오판을 넘어 거의 망상 수준인가? 70대에 이른 이 네오콘의 핵심 이론가도 이성을 잃었는가? <뉴욕 타임스>가 "감을 잃었다"는 한마디로 이 책의 정신 상태를 감정한 것이 이해가 간다. 그나마 그의 "감"을 지켜준 것이 있다면 남자다움의 덕목을 배타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올려 세우는 그의 논의가 공적 영역에서 평등의 기조를 무너뜨리는 선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공/사 영역을 분리한 후 최소한 공적 영역에서는 성차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고, 대신 사적 영역에서 성차를 유지하자고 주장한다. 이것이 그나마 인간의 본성에 어울리는 사회를 만드는 길이자 "버려진 남자다움"을 회복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공적 평등, 사적 불평등'이라는 이 구도는 과연 유지될 수 있는가? 사적 영역에서 여성이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남자가 공적 영역에서 평등의 원칙을 견지할 수 있을까? 이것은 모순이고 자가당착이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나는 페미니즘을 일괄적으로 성 중립적 기획이라 보는 맨스필드의 단순화가 그릇된 출발점이었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즘 논의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평등과 차이'의 문제가 페미니즘을 괴롭혀온 문제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이른바 평등을 주장해온 다수의 페미니스트도 성차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 혹은 성차를 지우는 성 중립적 사회를 추구했던 것은 아니다.

평등의 주장은 여성의 자유를 가로막는 강요된 성 규범과 성 차별적 관행의 철폐를 요구하는 것이지 젠더 구분을 무화시키거나 젠더를 초월하는 것이 아니다. 차별 없는 세상이 모두를 똑같이 만드는 것은 아니다. 아니 그 반대의 방향이 옳다. 차별 철폐와 기회 균등은 다양한 차이들이 가능하게 만드는 전제 조건이다. 나는 페미니즘이 이 전제 조건을 얻기 위한 싸움이었고, 이 싸움을 통해 여성 뿐 아니라 많은 사회적 소수자들의 인간적 가능성을 확대시켰다고 생각한다.

젠더로부터의 자유는 환상이다. 그러나 강요된 젠더 규범과 정체성에 도전할 수 있는 자유는 환상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잠재력의 실현이다. 자신이 누구이고, 자신의 능력이 무엇인지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의 의미를 구성한다. 하지만 이 의미 구성 작업은 결코 완결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남녀 두 개의 젠더만이 아닌 다양한 젠더들을, 그리고 고착된 젠더 규범에 트러블을 일으킬 수 있는 자유를 보호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차이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지의 가능성이고, 인간은 이 가능성을 실현할 자유를 보장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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