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을 열광시켰던 애니메이션은 단연 <미래 소년 코난>이다. "서기 2008년(이미 지나갔군!) 지구는 핵전쟁 위기에 처해있었다"는 멘트와 함께 전국의 아이들은 학교 담벼락을 넘어서라도 텔레비전 앞에 모여들었다. 이들에게 <미래 소년 코난>은 생태 문제에 눈을 뜨게 한, 핵전쟁의 위험을 깨닫게 한, 기계 문명과 발전 혹은 개발에 질문을 던지게 한, 최초의 교과서였다.

다른 한편, <코난>은 건국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라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근대적 대서사시이다.

<코난>이 대서사시인 것은 잘 짜인 이야기 구조 때문이다. '홀로 남은 섬'에서 출발한 코난은 포비와의 '우정'을 쌓아 자신의 '사랑' 나나를 구출하고 하이하바와 인더스트리아에서 억압과 착취에 시달리던 사람과 '봉기'해 낡은 질서를 무너뜨리고 대륙으로 융기한 '(이제는 대륙이 된) 홀로 남은 섬'으로 귀환한다. 하나가 둘을 만나고, 다시 그것이 셋이 돼 압제를 무너뜨리고 마침내 '공동체', 즉 '나라'가 된다.

그렇다면, 이 나라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가? 인류학자 클리퍼드 거츠가 사용한 개념을 좀 더 확장해서 생각해보자. 나라는 동시대인을 동료로 끌어 모아서 만들어진다. 동시대인은 시간은 공유하지만 공간은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더 나아가 동시대인은 같은 시대를 살아가지만 그 시대에 대한 인식은 '아직' 의식적으로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에 반해 동료는 공간을 공유한 사람들이다. 우리가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감각을 공유한 것이 동료이다. 또 동료는 시대에 대한 인식을 공유한다. 동시대인 전부를 끌어 모아 동료로 만드는 것, 그것이 어찌 보면 인류 공동체라는 근대의 이상이었다. 그러나 이 근대의 이상은 현실적으로 '국가'라는 형태로 나타났으며, 국가를 통해 맺어진 동료, 그들이 '국민'이다.

그러나 이 국가는 그렇게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누군가의 말처럼 국가란 무덤 위에 만들어진다. 대부분의 건국 신화가 죽음에서 시작하는 것이 증거이다. 국가는 일종의 '애도 공동체'이다. 지금 서남아시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바로 나라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낡은 질서에 의해서 누군가가 죽는다. 그 죽음을 통해 동시대인들은 자신들이 어떤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시대 인식이 공유되면서 동시대인들은 '혁명의 동료/형제자매'로 일어난다. 마침내 이미 우리 것이 아닌 저들의 낡은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탄생시킨다. 나라가 만들어진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파괴한 '나라'


▲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토니 주트 지음, 김일년 옮김, 플래닛 펴냄). ⓒ플래닛
토니 주트의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김일년 옮김, 플래닛 펴냄)에 대한 서평의 서두에서 뜬금없이 <미래 소년 코난>과 건국의 이야기를 한 것은 이 책이 다름 아니라 '나라'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꼬장꼬장한 사회민주주의자/공동체주의자인 주트가 보기에 신자유주의에 의해 파괴된 것은 다름 아니라 '나라'이다.

이때의 나라란 단지 시장을 통제하고 불평등을 조정하는 기구로서의 '국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마거릿 대처가 "사회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 개인만이 있을 뿐이다"고 선언했을 때 사망 신고를 받은 것은 바로 이 시대 인식과 공간을 공유한 동시대인 동료들의 정치 공동체인 '나라'다.

'나라'가 붕괴되고 그 여파가 어떻게 인간의 삶을 집어 삼켰는가에 대해 주트는 지금까지 그 어느 신자유주의 비판서보다 더 격양되고 울분에 찬 목소리로 가차 없이 폭로하고 비판한다. 사회는 더욱 불평등해졌다. 불평등은 인간 삶의 어쩔 수 없는 조건이라고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저자가 보기에 불평등해진 사회보다 더 큰 문제는 사람들이 불평등이라는 병리학적 현상을 그저 살아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탐닉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 결과 '강하다는 것'은 과거에는 고통을 인내하는 능력으로 이해가 되었지만 이제는 '남을 괴롭히는 능력'으로 전환되었다. 가난한 이가 괴롭힘을 당한다면, 모욕을 당한다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사회에는 사람들 사이의 상호신뢰, 절제, 정직, 공공선처럼 공동체를 존속시킬 수 있는 가치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부를 거머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 체제로부터 얻을 것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사람들 역시 이 '라이프스타일'에 빠져있다. 그 결과 사회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꿈을 꾸지도, 꿀 수도 없게 되었다.

불평등을 조정하고 탈락한 사람들을 세심하게 보살피면서 실패한 사람들의 자존심을 되살리는 것, 그것이 20세기의 진보를 규정짓는 사회 개혁의 핵심이었으며, 그 결과가 복지 국가다. 보편주의에 기초한 복지 국가는 소득과 관계없이 모두 똑같이 사회 부조와 공공 서비스의 혜택을 누렸다. 책에 나온 말을 그대로 인용하면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많은 부분들이 자신들이 낸 세금으로 충당된 결과, 1960년대에 이르면 유럽의 중산층들은 자신들의 가처분 소득 수준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바로 국가가 나라, 즉 정치 공동체였기 때문이다. 공동체로서의 국가는 공동의 과업을 수행한다. 그리고 이 공동의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신뢰와 협동이 필요하다. 세금이 바로 이런 협동과 신뢰의 상징이다. 세금은 당대에 세금을 내는 사람들 사이에 신뢰가 있을 때에만, 그리고 그 세금을 국가가 올바르게 사용할 것이라는 점에 대해 신뢰가 있을 때에만, 마지막으로 미래를 위한 투자라는 인식이 있을 때에만 가능해진다. 이렇게 신뢰가 바탕이 되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시민 공동체의 일부'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 '우리'의 근대적 최대치가 바로 '국가'이다. 국가를 통해서 그 공간 안에 있는 우리 동시대인들은 동료라는 감각을 확보하고 서로 신뢰하게 된다.

68 세대 탓에 '나라'가 망했다?

주트가 지적하듯이 이 정치 공동체인 국가는 1970년을 시작으로 해서 무너지기 시작한다. 모든 신자유주의 비판서들이 다 거론하고 있는 것을 여기서 다시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특이한 것은 저자가 1970년에 들어와 복지국가가 해체되는 것에 큰 공헌을 세운 것으로 '세대'를 거론하고 있다는 점이다.

복지 국가의 혜택을 받으며 성장한 복지의 자식들이 정치 공동체의 일원으로 참여하기보다는 오히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구호를 들고 공적 담론을 잠식했다. 개인과 개인의 권리를 강조하는 신좌파의 흐름은 나름의 정당성이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목표를 공유한다는 의식, 즉 공동의 것에 대한 의식을 명백히 퇴조시켰다. 여기에는 오로지 개인적 주관주의, 즉 순전히 자기 기준에서만 측정한 이해관계와 욕망뿐이었다고 주트는 혹독하게 비판한다. '사적 자유에 대한 열광'과 '공적 구속에 대한 짜증'에 빠진 복지의 자식들이 하이에크와 같은 보수주의, 즉 신자유주의의 귀환을 부채질한 것이다. 젊은 세대에 대한 그의 입장은 대단히 가혹하다.

문제는 오늘날 그들(노인들을 의미함)이 받는 혜택의 비용을 지불하는 자들이 대공황과 전쟁을 직접 체험해 보지 못한, 즉 복지 국가가 탄생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이유를 알지 못하는 젊은 세대라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부담해야하는 비용에 분노했다. (151쪽)

그 결과가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신자유주의가 망쳐놓은 세계이다. 무엇보다 공동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신자유주의에 따른 공공 부문의 민영화와 같은 정책의 가장 두드러진 결과는 '우리가 다른 시민들과 무엇인가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동시대인을 동료로 끌어 모으는 것이 아니라 동료들이 그저 동시대인으로 해체되고 있다.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동시대인은 시간은 공유하지만 공간을 공유하지 않는다. 세계화는 이 흐름을 가속화시켰다. 이제 나의 '동료'는 지구 저편에서 나와 채팅하는 사람이지 우리 동네에 사는 김 씨 아저씨가 아니다. 그러나 정치는 김 씨 아저씨와 하는 것이지 지구 저편의 페르난도와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구화된 동시대인들 사이에는 '정치'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저자에 따르면 정치는 특정 공간에서만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는 정치 운동이 없는 시대에 들어섰다. 물론 여기에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시애틀에서부터 시작된 저 거대한 반지구화 운동이 있지 않은가? 2년에 한 번씩 전 세계의 사회운동이 모여서 세계사회포럼을 개최하지 않는가. 지금도 지구 어디선가는 세계화에 대항하고 지구 온난화에 대항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이것에 대해서도 주트는 지극히 비판적이다. 그가 보기에 이것은 "여럿이 모여 감정을 표출하는 것 이상"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목표들을 하나로 아우르지 못하는 한 이것은 정치 운동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삶에서 그저 소비자로 살아가는 것에 불과하다. 저자는 이에 대한 한 마디로 응수한다. "이보다는 잘해야 한다."

자, 여기까지다. 그는 '이보다는 잘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 첫 단추는 공적 대화를 재구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더 잘해서 만들어야 하는 그 공적 대화의 공간이자, 결과는 '도로' 복지 국가이다. 그는 책의 맨 마지막에서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마르크스의 말을 인용하였지만, 그 변혁을 통해 복귀해야하는 것은 사회민주주의/복지 국가이다.

주트는 신자유주의가 유럽을 18세기로 돌려놓았다고 흥분하였지만, 그가 변혁을 통해 이루고자하는 것도 짧게 보면 1945년에서 1970년 사이에'만' 존재하던 바로 그 '복지 국가'이다. 그래서 그는 갑자기 신중함을 요구하며 우리는 20세기의 업적들을 다시 상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계화에 맞선 최선의 중재 기구는 다시 '국가'이며, 국가만이 시민에게 응답할 수 있고, 시민만이 국가에 응답할 수 있다고 한다. 철도나 운동장과 같은 공공시설을 만드는 것, 즉 개인의 욕망을 전체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한데 모을 수 있는 것으로 세금보다 더 나은 제도는 아직까지 없다.

사회주의는 실패했다. 사회주의는 그 어떤 외형도, 그 어떤 아류도 실패했다. 반면 사회민주주의는 이미 많은 국가에서 권력을 잡는데 성공했을 뿐 아니라, 최초에 사회민주주의의 기틀을 닦은 사람들이 가졌던 소박한 꿈을 훨씬 뛰어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19세기 중반에는 그저 이상에 불과해 보였던 것들이, 그리고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지나치게 급진적으로 보였던 것들이 많은 자유주의 국가들에서 일상적인 정치가 되었다. (229쪽)

'68 혁명', 자본주의의 구세주

사회주의는 실패했지만 사회민주주의는 성공을 거두었다고 하는 주트의 단언에 조소하는 '사회주의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들이 보기에 신자유주의야말로 사회민주주의가 실패한 결과가 아닌가? 신자유주의와 대결하였다가 굴욕적으로 패배하고 무릎을 꿇은 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사회민주주의가 아니냐는 사회주의자들이 조소가 들려오는 듯하다.

사회주의자들뿐만이 아니다. 토니 주트는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를 젊은이들을 위해서 썼다고 한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주트는 한국어판 제목으로 말하자면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고 촉구하였지만, 젊은이들이 결국 '도로' 사회민주주의에 불과한 그의 당부에 그리 귀를 기울일 것 같지는 않다.

1960~70년대 청년들의 문화 운동과 신좌파 운동에 대한 주트의 이야기를 돌아보자.

사실 <신자유주의 : 간략한 역사>(한울 펴냄)를 쓴 데이비드 하비도 신자유주의가 출현할 수 있었던 문화적, 사회운동적 배경으로 68 혁명을 거론하고 있다는 점에서 토니 주트와 의견을 같이 한다. 요컨대 앞에서 주트가 말한 '사적 자유에 대한 갈망'과 '공적 간섭에 대한 짜증'이 '자유'를 전면에 내세운 신자유주의와 친화력이 상당하였다는 점이다.

68 혁명은 이미 모순에 처해있던 자본주의가 울고 싶은데 뺨때려준 것과 같은, 자본주의의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준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단순하게 정리하면 포디즘 체제의 축적 양식이 위기에 처했으며, 그 위기에 따라 노동을 더욱 심하게 통제하는 방식이 아니라 '더 많은 자유'를 통하여 새로운 축적 양식이 출현해야 하는 때에 자본주의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 오히려 68 혁명이라는 이야기이다.

대표적인 것으로 대학을 들 수 있다. 미셸 푸코도 1968년의 혁명은 19세기에 시작된 고등 교육 형태, 즉 소수의 젊은이를 사회적 엘리트로 변환시키는 신기한 제도로서의 대학을 효과적으로 종결시켰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사회가 자신의 지식을 전달하고 지식이란 가면 아래 자신을 전달하는 거대한 메커니즘은 그대로 남아있다. 대표적인 것이 고등학교이다. 이에 반해 오히려 대학은 자신의 낡은 구조를 제거하고 신자본주의의 요구에 실질적으로 적응하였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 68 혁명의 교과서라고 불리는 <일상생활의 혁명>(주형일 옮김, 이후 펴냄)을 쓴 라울 바네겜 역시 다른 혁명과는 달리 수천 년간의 비인간적 행위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볼 수 있는 유일한 혁명인 68 혁명은 억압적 폭력의 회오리 속에서 완성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오히려 1968년에 경제는 자신의 '전성기와 전멸기의 매듭'을 지었다.

자본주의는 생산보다 일반화된 소비에서 더 많은 이익을 얻는 상품 체계로 전환되었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역시 스펙터클로 전환하였다. 사회는 권위주의에서 시장의 유혹으로, 저축에서 낭비로, 청교도주의에서 쾌락으로 땅과 인간을 볼모로 만드는 착취에서 환경의 영리적 재구성으로 바뀌었다.

무엇보다 사람에 대한 관점이 바뀌었다. 자본은 이제 사람과 사람의 창조력이 더 중요한 자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68 혁명 이후의 자본주의는 '개인보다 소중한 자본'에서 '가장 소중한 자본으로서의 인간'으로 서둘러 넘어갔다. 살아있는 자의 수익성은 더 이상 그의 소진에 기대를 거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재구성에 기대를 걸게 된다.

그 결과는 다품종 소량 생산, 유연 생산 방식의 포스트포디즘이다. '더 많은 자유'와 '더 많은 상상력'이라는 68 혁명의 구호는 자본주의의 구세주가 된 셈이다.

성공한 '복지 국가'가 '삶의 감옥'이 된다면…

그러나 이것이 증명하는 것은 68 혁명의 의도가 아니라 오히려 자본의 괴물과 같은 적응력, 탈영토화하고 재영토화하는 능력이다. 따라서 뒤집어 생각해보면 자본이 젊은 세대의 문화 운동과 신좌파들의 주장을 포섭하는 동안, 구좌파들이 이것을 사적인 것으로 폄훼하면서 적극적으로 포용하지 못한 철저한 무능과 무지의 결과이지 68 혁명 자체의 귀결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들 구좌파는 자본이 이들이 요구하는 것의 자본주의적 의미를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포섭하는 동안 젊은이들의 주장이 무엇인지 파악조차 못했다. 그래서 그것이 사적인 욕망을 분출하는 징징거림 혹은 조직적 당을 파괴하려는 짓거리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하려고 한 것은 바로 이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사이의 이분법, 이미 정치적으로 구획된 그 정치를 해체하려는 가장 '정치적인 시도'였다.

이것을 위에서 이야기한 바네겜의 <일상생활의 혁명>을 통해서 살펴보자. 68 혁명이 일어나기 1년 전에 써진 이 책에서 그는 "일상생활을 지배하던 권태와 그 원인을 고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비주의의 확산과 사회의 스펙터클화에 따라 세상이 안온한 무덤이 되어가는 것 같은 그 순간에 사실 '삶에 대한 열정'이 소비에 대한 자유로 완전히 대체되고, 박탈된 자유에 대한 불만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삶의 열정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더 증가하였다.

그래서 나온 68 혁명의 언어는 "착취자에게 죽음을!"이 아니라 "무엇보다 우선 삶을!"이다. 이것이야말로 68 혁명이 어디에서 출발하여 무엇을 지향하였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이들은 생존이 아니라 삶을 위하여 "사회 밖으로!"를 외쳤다.

바네겜은 "우리는 '굶어죽지 않는다는 보장'이 '지겨워 죽을 위험'과 교환되는 세계를 원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일상생활이 주된 걱정거리가 되었다고 말한다. 생존의 풍요로움이 곧 삶의 빈곤으로 이어졌다는 이야기이다. 집단적 생존의 문명은 개인적 삶의 죽은 시간들을 증가시키기만 하였다. 따라서 아무리 스펙터클과 소비 상품들이 넘쳐난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환상은 '신성한 것이든 통속화된 것이든, 집단적인 것이든 개인적인 것이든' 어떤 환상도 일상적 행위들의 빈곤함을 숨길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사람들은 소비를 통하여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으며 모든 욕망을 해방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소비 사회는 소비와 스펙터클에 갇힌, 자유의 이름으로 자유를 감금하는 시스템이라고 고발한다. 따라서 이들의 무기는 화염병만이 아니라 언어였다. 이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창조성이며, 창조성의 존재 양식인 자발성이었다. 따라서 68 혁명이 말과 구호, 아니 시(詩)의 축제인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68 혁명 당시 프랑스가 아니라 알제리에 있었던 푸코조차도 68 혁명이 없었다면 감옥과 섹슈얼리티 등의 것들에 대한 자신의 연구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인정한다. 그는 "5월의 운동은 교육 체제에 종속되었던 반복적인 상황과 보수주의의 가장 구속적인 형태에 종속되었던 개인들이 혁명적 전투를 전개"한 것이며 이로 인해 촉발된 "사유의 위기'는 뿌리가 깊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회민주주의가 안정화되어 있던 스웨덴이나 인민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던 폴란드 그리고 식민주의에 대한 항거가 증폭되고 있던 튀니지에 이르기까지 국가나 다른 제도들 혹은 억압적 집단들이 행했던 일상생활에 대한 계속적 억압, 그리고 이런 불편함을 생산한 권력에 대한 항거가 68 혁명이다.

푸코가 간파했듯이, 68 혁명의 주역들은 국가 권력뿐만이 아니라 대학 당국에서 텔레비전 그리고 길거리 등 사회 속에서 다양한 경로와 제도들을 통해 작동하는 권력을 문제 삼았다. 그들은 사람들이 더 이상 통제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들은 특정한 제도들이 이성이나 정상성의 이름으로 행위, 존재, 실천, 발언의 방식을 확립하고 개인들을 비정상, 광인으로 낙인찍음으로 개인들의 집단에 권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나아갔던 방식을 추적하였다. 68 혁명은 사회의 특정한 계층과 청년 문화에 영향을 발휘하던 권력 형태의 전체 연결망에 대한 반란이었다.

이처럼 푸코는 68 혁명의 독특성은 전통적으로 정치의 공식 영역이 아니던 부분들 전반에 걸쳐 정치를 향해 문제를 제기한 것이라고 본다. 당시에는 마르크스주의와 마오쩌둥주의 언어가 혼재하여 존재하는 모든 문제들을 이들 언어로 적어보려고 하였지만 그 결과는 오히려 마르크스주의가 이런 문제와 직면하는 것에 무기력하다는 것만 입증하였다.

이것으로 정치적 교의의 틀 안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행위는 종언을 고하고 정치 자체에 대해 다양한 질문들이 던져졌다. 68 혁명이 언어의 혁명일 수 있었던 것은 이 혁명이 그동안 갇혀있던, 혹은 제기되지 않던 질문을 제기하는 행위를 해방시켰다는 점이다. 더 이상 진리와 권위, 그리고 당의 이름으로 의문에 붙여지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이것은 전혀 사적인 징징거림이 아니다. 또 주트가 말하는 것처럼 공동의 것을 추구하지 않고 오로지 욕망에만 충실한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정치의 재구성이다. 사회민주주의/복지 국가가 만개해 있던 상태에서 이런 주장이 나왔다는 것에 대해 지금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더욱 깊게 생각해봐야한다.

주트는 젊은이들이 역사를 다시 돌아보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확히 같은 이유에서 1968~70년대를 다시 돌아봐야하는 것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현실적으로 가장 이상적인 사회민주주의가 왜 청년에게 감옥으로 느껴졌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들이 왜 생존이 아니라 삶을 이야기했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그 삶에 대한 요구에 당시의 사회민주주의가, 아니 지금의 사회민주주의 역시 마찬가지로 얼마나 무지했는지, 그리고 무관심했는지를 돌아보아야한다.

신자유주의/사회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정치적 상상력

다시 <코난>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인더스트리아에서 나나를 구출하고 구질서를 무너뜨린 코난은 하이하바로 돌아가지 않는다. 코난이 봤던 가장 이상적인 정치 공동체는 하이하바였지만 코난은 동료들과 함께 '홀로 남은 섬'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 '홀로 남은 섬'은 더 이상 '홀로 남은 섬'이 아니다.

코난이 떠나 있는 동안 섬은 융기하여 대륙이 되어 있다. 그 대륙에 코난은 새로운 나라를 건설한다. 왜냐하면 모든 건국은 파스카, 즉 출애굽이다. 출애굽은 모든 옛 것과의 단절과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의 이행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이하바를 품은, 그러나 하이하바보다 더 큰, 그런 정치 공동체이다.

내가 이 서평에서 사회민주주의가 낡은 흘러간 옛 노래라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회주의이건, 사회민주주의건 그것을 재생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돌아보아야한다는 것이다. 보라. 지금 신자유주의가 몰락하고 있는 시점에서 박근혜부터 진보신당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는 '복지주의자'가 되었다.

동구 몰락 이후 모두가 민주주의자가 되었을 때 자신만 민주주의자인 척하다 망해버린 좌파의 전철을 또 밟을 것인가?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만으로, 복지에 대한 주장만으로는 아무런 현실적 차별성을 주장할 수 없다. 복지에 대한 진짜/가짜 논쟁은 장충동 족발 집에 붙어 있는 '진짜 원조', '원조 중의 원조'만큼이나 무의미하다. 어쨌든 모두가 복지주의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가 지금까지 인류가 실험해왔던 체제 중에서 가장 현실적으로 나은 것이었으니 그리로 돌아가자는 주장만으로는 사람을 움직일 수 없다. 왜냐하면 해방에 대한 요구는 그 때보다 더 많아지고 더 커졌기 때문이다. 사회민주주의는 그 해방의 요구에 무관심하거나 무지하거나 무능해서 신자유주의에 패배한 것이다.

지금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고민해야하는 것은 저 주장들이 신자유주의를 불렀다는 타박이 아니다. '더 나은 삶'은 지금의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것만큼이나 그때의 사회민주주의도 넘어서는, 그런 정치적 상상력을 필요로 하며 그것은 현존하는 모든 해방에 대한 욕구들에 더 선도적으로 응답할 때 출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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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한테는 이 책의 저자가 달려든 실험을 일컫는 적절한 표현이 아직 없지만, 영어로는 '에코 어드벤처(Eco Adventure)'라고 하는 모양이다. <뉴욕매거진>이 요리 평론가 매니 하워드에게 뉴욕 브루클린 도심 한복판에서 '6개월간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워 1달간 오로지 자신이 키운 먹을거리로만 먹고 살기' 실험을 제안한 것은 1999년 어느 날이었다.

표면적으로는 '로커보어(Locavore) 운동'을 알리고 평가할 목적이었다. 로커보어는 '지역'을 뜻하는 'local'과 라틴어의 '먹다'라는 뜻을 가진 'voer'를 합쳐 만든 말로서, '자신이 사는 주변 지역에서 난 먹을거리를 섭취하고자 애쓰는 사람'이다. 그런 이들의 사회운동을 '로커브리즘(Locavorism)'이라 통칭한다.

이 말의 탄생 배경에는 미국 사회에 닥친 유기 농업 실험의 실패가 깔려 있었다. 우리와 다소 시간차가 있지만 미국 역시 1990년대 초반 유기농 광풍이 몰아쳤다. 언론은 연일 식품 산업의 위기를 강조했고, 마치 식량 전쟁이 잠시 후에 일어날 것처럼 법석을 떨었다. 언론이 닥칠 위기를 미리 예견하는 일은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닐 것이다.


▲ <내 뒷마당의 제국>(매디 하워드 지음, 남명성 옮김, 시작 펴냄). ⓒ시작
문제는 유기농 먹을거리가 마치 하늘이 주신 특별한 양식처럼 떠받들어지면서 거대 식품 기업이 재빨리 이 용어를 흡수했다는 데 있었다. 거의 모든 먹을거리에 '유기농'이라는 딱지가 붙여져 그런 딱지가 붙여지지 않은 식품보다 비싸게 팔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미국 사회가 거의 유일한 모델인 한국 사회에서 벌어진 유기농 현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리 또한 조금만 제정신을 가진 이라면, 농촌은 갈수록 공동화되고 있는데, 그나마 '있던 농업'마저 죽이려드는 게 유일하고도 확고한 농업 정책인데, 시중에 차고 넘치는 상품으로서의 유기농 식품이 우선 질보다 그 양에서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뉴욕매거진>이 로커보어 운동을 알리고 평가할 목적으로 '특별한 모험가'를 물색한 데에는 유기농 먹을거리 운동이 거대 식품 기업의 발 빠른 선점으로 운동 자체가 붕괴된 아픔과 관련이 있었다. 그때 등장한 것이 바로 로커보어 운동이었다. 공장에서 생산한 먹을거리는 비록 유기농 식품이라 하더라도 평균 2400킬로미터를 이동해 식탁에 오르기 때문에 결국은 소비자를 망칠 것이라는 믿음이 로커보어 정신이었다.

그러나 로커보어들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로커보어들이 아무리 먹을거리와 관련된 확고한 개인적인 철학으로 무장한 '책임감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가까운 곳에서 생산된 먹을거리를 '취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지, 생산하는 사람들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저자 매니 하워드는 요리 평론가라곤 하지만 사실, 오랫동안 안정된 직업을 찾지 못한 백수건달이었다. 매니 하워드는 지은 지 106년이나 되는 브루클린 프로스펙트 공원 뒤쪽에 살고 있었는데, <뉴욕매거진>의 제안을 받기 전에는 요리 잡지에 부정기적으로 기고했으며, '마구잡이에 가까울 정도'로 세계를 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렇게 보낸 세월이 10여 년, 아내 리사는 기사가 딸린 자동차로 맨해튼으로 출퇴근하는 고임금의 편집자였다. 이런 아내를 출근시키고 하워드가 집에서 하는 일은 컴퓨터 앞에 앉아 습관적으로 2류 포르노를 다운 받아 보면서 "그 짓이 습관일 뿐이지 결코 동물적 충동 때문이 아니다"라고 항변하는 게 전부였다.

요컨대, 하워드는 몸은 건강했지만 자신이 살아오던 방식에 지칠 대로 지친 백수였다. 그런데 이 백수가 20분간의 협상 끝에 이 프로젝트에 달려들기로 결심한다. 달려든 이유는 우선 그 프로젝트를 받아들이면, "허리가 부러질 정도로 고된 노동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매우 매력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세련된 뉴요커로 그려진 아내 리사는 하워드가 그 엉뚱한 일로 인해 '새로운 열정'을 되찾은 것 같은 모습이 보기 좋아서 반신반의하면서도 뒷마당이 농장이 되는 것을 허락한다. 이후에 벌어진 일은 가히 전쟁이라 할 만한 좌충우돌의 연속이었다.

잡지사에서는 매니 하워드 같은 사람을 물색하면서 언필칭 '로커보어 운동을 알리고 평가할 목적'이라 내걸었지만, 매니를 꼬시는 과정에서 편집자가 한 말을 보면 로커보어들에 대한 비판과 은근한 경멸도 담겨 있었다. "그녀(<뉴욕매거진>의 편집자)는 부족할 것 없는, 자기만족에 빠져 도시 농산물 직판장을 돌아다니는 로컬보어와 맞서기를 바랐다"는 구절이 그런 대목이다.

그러나 저자 매니 하워드는 도통 잡지사의 의도에 관심이 없었다. 그가 확신한 것은 로커보어들이 아무리 신념에 찬 멋들어진 말을 하고 좋은 먹을거리를 뒤지고 다녀도 그들은 결국 소비자라는 점, 그러나 자신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면 최소한 생산자로서의 체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로커보어들이 '불타는 사명감'에 빠져 장바구니를 들고 좋은 먹을거리를 찾아 돌아다니는 것을 어떻게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저 심사숙고해서 물건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이게 로커브리즘에 대한 하워드의 평가였다. 그는 인세나 책으로 인해 얻을지도 모를 명성에도 관심이 없었다. 다만 요리 평론가였기에 막연하게나마 "우리가 먹을거리와 근본적 관계를 잃었다"는 감수성만은 지니고 있었다. 6개월간의 고된 노동을 통해 그가 소망한 것은 천천히 무너진 자아의 회복이었다.

하워드에게 밭으로 허락된 땅은 약 70㎡(약 21평). 20㎡짜리 차고는 헛간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게 그에게 허락된 농장 면적의 전부였다. 그는 그러나 농장을 자신의 무기이자 전장(戰場)으로 삼는다. 마침 도시 농부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로 한 직후였는데, 딸아이 히스라이언의 두 번째 생일이 다가왔다.

지하에 바 카운터가 설치된 휴게실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키울 요량으로 그는 딸애의 생일 선물로 새를 열 마리나 구입한다. 그러나 열 마리의 새에 1100달러어치나 들였건만, '대개 공격적이고 비현실적이기 그지없던' 성격의 저자는 경험 부족으로 새들을 모두 죽이고 만다.

이것은 앞으로 전개될 그의 눈부신 살육 행진의 첫 신호였다. 아프가니스탄 전쟁터에도 달려가고, 온 세상을 미친 듯이 헤매는 정력가인데다, 비록 섬세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다혈질인 그는 채식주의자를 선택하는 대신 기필코 '다양한 단백질이 필요하다'며 식용 물고기를 어항에 키우기 시작한다.

그러나 어항에서 키운 물고기는 역시 경험 부족으로 다 죽어버렸다. 그러나 매니 하워드라는 이름의 불굴의 돈키호테는 식용 열대어 틸라피아를 키우기 위해 뒷마당의 진흙 구덩이를 파기 시작한다. 책에서 본 대로 지름 3.6m, 깊이 90㎝의 구덩이를 파고, 수온은 섭씨 27도를 유지하면서 틸라피아 한 쌍이면 이윽고 1000마리로 늘어날 것이라고 몽상한다.

그러나 그는 물고기 단백질도 얻지 못한다. 단백질에 미친 그는 이어서 토끼를 구입한다. 그러나 토끼 역시 변변한 먹을거리가 못 된다. 다른 것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인터넷으로 구해 심은 감자는 동전만한 감자알 열 개 정도만 선사한다. 닭장을 만들고 닭을 구해 키우지만, 멍청한 하워드는 닭이 달걀을 낳는다는 생각은 미처 못 한다.

그가 아무리 원예 업자에게 구한 책자나 인터넷에서 구한 자료를 참조했다 해도 그의 농사는 대충 이런 식으로 무지막지하게 진행되었다. 다만, 그는 소망대로 허리가 휘어질 만큼 노동을 한다. 그 사이에 그는 물고기도 죽이고, 토끼도 죽이고, 오리도 죽이고, 온갖 좌충우돌을 다 겪는다.

이 책에 담긴 한 사내의 '1개월 자급자족'을 위한 고군분투는 참으로 처절하고, 안타깝고, 심지어 기이하다. 우여곡절, 기상천외, 무지막지, 자승자박의 일들이 계속 터진다. 그가 도움 받아야 할 진짜 시골 사람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봐주기로 작정했건만 도가 지나치자 아내의 인내심은 결국 극에 달해서 "(집에서) 나가!"라고 외마디 비명으로 이어진다.

육식은 키워서 손수 잡아먹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음에 반해 채식은 뜯어먹거나 캐먹으면 된다. 그럼에도 이 책의 반 이상은 동물성 단백질 확보를 위한 처절한 노력에 할애되고 있다. 그것은 그가 필경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오늘 이 행성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심각하지만 날카로운 모종의 질문을 하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동물성 단백질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하워드의 모습은 미국인의 전형일 뿐만 아니라, 육식 문화를 버리지 않는 이 행성에 사는 모든 인간종의 전형일지도 모른다. 토끼를 잡고 닭을 잡는 시설을 갖추고, 모가지를 찌르고 피를 빼고, 내장을 꺼내는 장면은 마치 읽는 이들이 피비린내 나는 도축작업에 직접 참여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마침내 사고가 난다. 닭장을 만들고자 합판을 자르는데 톱날이 오른쪽 새끼손가락 두 번째 마디를 파고들었다. 경험 많은 의사가 가능한 애를 썼지만 그의 손가락은 영원히 날아갔다. 이후, 그는 손을 다친 사실을 소년처럼 여러 사람에게 자랑해댄다. 사람들은 빙긋이 웃으며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자신들의 상처에 대해 비로소 말한다.

그때서야 그는 알게 된다. 이 세상에 손을 다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그 다음부터는 다시는 손가락 상실을 훈장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 글을 쓰는 필자도 시골에 처음 들어왔던 6년 전, 전기톱으로 장작을 자르다가 왼손 검지가 톱날 속으로 들어가 잘리기 직전의 상처를 입은 적이 있었다.

하워드처럼 대놓고 동네방네 자랑을 하지는 않았지만 지금도 선명한 손의 상처를 얼마간 득의(得意)의 표징으로 여겼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처럼 나 또한 주변에 손을 다친 이웃이 얼마나 많은가를 알게 되었다. 이웃의 상처를 알게 된 이후에야 나는 비로소 내가 선택했고, 내게 허락된 장소의 의미에 대해 새롭게 깨달을 수 있었다. 손의 상처야 보려고 들면 보이지만, 사람들 가슴 속에 꼭꼭 숨겨져 있는 상처들은 오죽 깊을까.

그럴 줄 알았지만, 이 책은 후반부에 이를수록 감동적이다. 그의 계약 기간 도중에 토네이도가 닥친 것이다. 1899년 이래 100년 만에 뉴욕을 강타한 거대한 토네이도였다. 74번가에 상륙한 토네이도는 62번가, 6번가가 만나는 주택가 전체를 휩쓸었다. 100년 된 나무를 서른 그루나 쓰러뜨렸고, 이스트 18번가 주택지를 포함한 15㎞ 반경의 자동차를 부쉈고, 지붕을 날렸다. 토네이도는 매니 하워드의 농장에서 겨우 900m 떨어진 곳에서 소멸했지만, 그의 농장 역시 박살이 났다.

남편의 뒷마당 농장에 시종 삐딱한 시선을 지니던 아내는 태풍으로 잃어버린 농산물과 간신히 건진 농작물을 면밀하게 살피던 남편의 처참한 모습을 바라보고 느꼈던 이야기를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온통 망가진 뒷마당으로 걸어갔어. 엉망진창이 된 농장 한 가운데 멍하니 서 있다 뭐든 건지려는 듯 다시 일을 시작했지. 당신이 죽어라 열심히 가꾼 것을 뽑아내는 모습을 보면서 모든 게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깨달았어. 바로 그런 생각이 들지는 않았지. 한참 동안 창문 앞에 서서 내려다보며 생각했어.

'빌어먹을 토네이도가 휩쓸고 지나갔어. 그런데 저 사람은 뭘 하는 거지? 다른 사람이라면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포기하고 잡지사에 전화해서 모든 게 끝났다고 할 텐데. 토네이도가 농장을 끝장내버렸다면서.' 하지만 아니었어. 당신은 달랐지. 당신을 이해한다는 게 아니야. 지금도 이해는 못하겠어. 하지만 그때는 이해했다고 생각했어.

처음으로 농장이 당신에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말이야. 그리고 당신이 무척 자랑스러워." (302쪽).

세상에 나쁜 일은 없다. 토네이도에 굴하지 않은 그가 결국 인정하는 데 인색하기 짝이 없는 연봉 높은 엘리트 아내를 감동시킨 셈이다. 토네이도가 지나간 뒤 매니 하워드가 꼼꼼하게 작성한 피해 목록을 눈물겹다.

• 토마토 : 농장 전체에서 가장 비옥한 곳에 심은 작물. 4미터 가까운 나뭇가지에 짓눌려 온통 뭉개졌다.
• 가지(여러 종류) : 비참할 정도로 가냘픈 모습, 비에 절반은 쓰러졌다.
• 칼랄루(카리브 지방에서 나는 시금치) : 완전히 못 쓰게 되지는 않았다. 해가 너무 뜨거워지기 전에 막대를 꽂아 세우면 살릴 수 있을 것도 같다.
• 호박 : 물에 잠겼다.
• 허브(여러 종류) : 토마토에 가려 햇볕에 굶주렸다. 가망 없다.
• 콩(여러 종류) : 가망 없다.

필자가 매니 하워드에 대해 가장 깊은 동질감을 느낀 대목은 그가 어느 날 토끼를 잡고 난 뒤에 한 행동이었다. 3번 암컷 토끼는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주인에게 그날 아주 거칠게 굴었다. 그를 물어 그의 몸에 상처가 났다. 처음에는 금속제 쓰레받기로 토끼의 머리통을 가볍게 때렸다. 토끼는 더욱 거칠어졌다. 결국 나중에는 호되게 때렸다.

토끼는 한참 동안 꼼짝도 안 하더니 이내 긴 소리를 내며 울었다. 그는 서러운 항변과 원망이 섞인 그 기이한 토끼 울음소리를 잊지 못한다. 그런 뒤, 결국 토끼는 마비가 되어버렸다. 그는 결국 3번 암컷을 잡게 되었다. 잡고 난 뒤, 아내가 볼 수 없도록 토끼의 머리 잘린 몸통을 재활용 봉투에 담아 지하실 외딴 곳 환풍기 근처에 매달아두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흐느끼며 운다. 그 울음은 토끼에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애도였다. 토끼는 아니지만, 나 역시 기르던 닭을 잡아보았기 때문에 그의 울음을 조금은 이해한다. 매니 하워드 농장의 짐승에게는 이름이 없다. 그는 닭이든 오리든 토끼든, 모두 번호를 붙였다. 2번 암컷, 3번 암컷, 이런 식이다.

그래서 딸애들은 "우리 오리는 이름이 없어요"라고 말한다. 잡아먹을 것들이기 때문에 관계 맺기를 애당초 봉쇄한 수작이었다. 그가 설정한 최소 무게 2.3㎏이 되면 그의 농장 짐승들은 세상을 떠날 각오를 해야 한다. 잘 준비된 도축 시설에서 닭을 잡은 뒤, 피를 빼고, 조심스럽게 내장을 꺼내고, 털을 잘 뽑기 위해 온도가 44℃인 준비된 물에 담근다.

그런 건조하기 짝이 없는 단백질에 미친 사내가 그날은 3번 암컷 토끼를 잡은 뒤, 남몰래 흐느껴 울었던 것이다.

7개월이 마침내 지났다. 6개월 이후 1개월간 그는 잡지사와의 계약대로 자신이 기르고 키운 것만 먹으며 보냈으므로 프로젝트는 성공한 셈이다. 6개월 동안 그의 생활은 "아침에 일어나 편한 셔츠에 작업복을 입고 하루 온종일 일한다. 부서진 것을 고치고 죽어가는 것을 살린다. 배고파하는 것들에게 먹이를 주고 목말라하는 것들에게 물을 준다"였다. 그 후 1개월은 그가 키운 무엇이든 잘 잡아서 아직도 입에 씹히는 고기 속에 남아 있는 '생명'을 느끼며 먹는 일이었다. 그가 말한다.

"하루하루 지나며 조금씩 목표에 다가갔다. 울타리 너머로 바쁘게 돌아가는 바깥세상이 보였다. 7개월 동안 내 삶은 겉모습뿐 아니라 움직이는 방식 자체도 달라졌다. 이제 꿈꾸는 모든 영역(아프가니스탄이나 모하비 사막 우크라이나까지)으로 인생을 확장하고 채우려 투쟁하는 식으로 살지 않았다. 내 삶은 농장과 감응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내게 농장의 가능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농장의 한계였다." (329쪽)

그의 프로젝트가 끝난 뒤, 그의 농장이었던 뒷마당의 3분의 2가 다시 잔디밭으로 덮힐 때 그는 보도블록 모양의 뗏장이 그의 밭을 덮는 모습을 차마 지켜볼 수 없어 외면한다. 그가 마침내 '거기'까지 간 것이다.

<뉴욕매거진>의 의도는 결국 성공했다. 책은 출간되자 곧 잡지의 표지 기사가 되었고, 2008년에는 그가 쓴 책이 제임스 비어드 재단 상을 수상했고,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 주연으로 그의 경험이 곧 영화로도 만들어질 예정이라니, 우리도 언젠가 이 사내의 이야기를 책뿐 아니라 영화로 만나게 될 것이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빠뜨릴 수 없는 한 인물이 있다. 7개월 동안 그는 수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받았지만, 그의 정신을 지배하던 사상가가 있었으니, 우리나라에서는 <녹색평론>을 통해 자주 소개된 웬델 베리였다. 처음에 매니 하워드가 웬델 베리를 접했을 때, 그는 "이 사람은 나랑은 너무나 다른 인간이구나", 하는 당혹스러운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자신과 웬델 베리가 너무나 다른 사람이지만,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 웬델 베리의 목소리를 겸손한 마음으로 경청한다. 매일같이 허리가 휘어질 정도의 고된 노동을 한 뒤에 그는 어김없이 웬델 베리를 펼쳤다. 그가 펼친 책이 우리나라에도 번역된 <삶은 기적이다>(녹색평론사 펴냄)이거나 <희망의 뿌리>(산해 펴냄) 같은 책일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이 낮에 한 행동과 시행착오를 통해 배운 것을 웬델 베리를 통해 확인했고, 웬델 베리에게서 얻은 에너지로 다음 날의 고된 노동에 몰두할 수 있었다. 급기야 웬델 베리는 그의 방(영혼) 깊숙이 들어왔고, 프로젝트가 끝날 즈음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웬델!", 하고 이름을 부른다.

대학보다 시골을 더 좋아했으며,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고된 노동을 하면서 사는 일이 왜 마땅하고 옳은 일인가를 말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준 사상가 웬델 베리가 말했다.

"노동은 윤리가 아니라 필수다."

뒷마당에서 얻은 달걀도 놀라운 선물이었지만, 격렬한 좌충우돌 끝에 매니 하워드가 얻은 가장 큰 소득이 웬델 베리의 바로, 그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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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이 너무 밝아서 슬픈 곳, 그 어느 곳보다 나의 감정을 사로잡지만 동시에 불안을 안겨주는 곳, 쿠바. 나는 그 황홀함에 사로잡힌 대가를 치러야 한다네."

<또 하나의 혁명, 쿠바의 일차 의료>(린다 화이트포드·로렌스 브랜치 지음, 최영철 외 옮김, 메이데이 펴냄) 저자는 책의 서문부터 피코 아이어의 글을 인용하면서 "쿠바의 모순이 지닌 매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들이 쿠바의 1차 의료의 장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이 '모순덩어리' 쿠바다.

체 게바라의 나라. 쿠바는 많은 사람에게 막연한 동경의 대상이다. 미국이라는 제국의 턱밑에서 "사회주의"를 여전히 국가 운영의 원칙으로 고수하는 나라이고, 수십 년간의 경제 봉쇄 속에서 1인당 소득이 9700달러로 세계 109위에 머물러 있는 중미의 빈국이면서도 미국보다 낮은 영아 사망률(CIA의 발표를 보면, 미국은 10만 명당 6.14 쿠바는 5.72다.)을 자랑하며 한국과 비슷한 평균수명을 가진 나라([표 1] ). 또 생태 지향적인 농업을 운영하는 나라가 쿠바다.


[표 1] 국가 간 기대수명 비교. ⓒ프레시안
그러나 쿠바는 피델 카스트로가 수십 년동안 1인 통치를 해왔고 이제는 그의 동생 라울이 지도자 자리를 이어받은 나라이기도 하다. 언론의 자유가 없는 것은 물론이며 수십만 명의 난민이 미국으로 탈출한 나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나라가 동시에 베네수엘라를 포함해 여러 나라에 의사를 '무상으로' 수출하고 전세계에서 의대 교육을 원하는 학생을 의과대학에 받아 '무상 교육'을 시킨다.

이러한 미스터리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나온 것일까. 이러한 질문을 놓고 저자들은 그 대답을 쿠바 혁명과 동시에 진행된 "쿠바의 1차 의료"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한국어로 나온 쿠바에 대한 책이나 글이 많은 부분 인상기에 머물렀다면 이 책은 상대적으로 많지 않은 분량의 책 치고는 쿠바 의료에 대해 상당히 많은 자료를 근거로 나름 체계적인 설명을 제시한다. 말하자면 교과서적인 내용을 담고 있고 또 순서도 상당히 교과서적이다. 쿠바의 역사와 보건의료의 역사를 설명하고(1장, 2장), 1차 의료 개념을 이야기하며(3장) 모자 보건(4장), 전염병(5장), 만성 질환(6장), 공공 보건의 의미(7장), 쿠바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8장)을 다룬다.

물론 그렇다고 이 책이 쿠바에 대한 일방적 선전물이라는 염려는 안 해도 좋을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쿠바 의료가 가지는 결점이나 모순점에 대해서도 충분히 이야기하고 또 변호한다. 예를 들어 쿠바의 HIV/AIDS 감염인이나 환자에 대한 강제 격리 조치의 문제라든가, 의약품의 부족이라든가, 동구 "사회주의" 블록의 붕괴 시기의 어려움(쿠바에서는 이 시기를 '특별한 시기'라고 부른다고 한다)이라든가 문제를 충분히 다룬다. 매춘 문제등과 같은 쿠바의 치부도 다룬다. 또 개인의 자유 또는 사생활과 국가의 집단적 동원 간의 갈등이나 모순을 지속적으로 다룬다.

오히려 이 책은 저자들이 미국인이라는 또 플로리다를 직업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공공보건이나 지역 참여의 문제를 개인의 프라이버시나 자유와 충돌하는 무엇인가로 '과도하게' 해석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개인의 선택을 제한하고 정부가 개인의 건강에 간섭하는 제도는 미국에서는 매우 낯설겠지만 주치의 제도가 당연하고 무상 의료가 일상화된 유럽에서는 공공성과 개인의 자유라는 것이 충돌하는 개념이라고 생각할지 의문이다.

그러나 저자들의 문제의식이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는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하는 것은 분명하다. "모든 이들에게 기본적인 교육과 건강 서비스를 제공하고 충분한 위생 시설을 공급하는데 드는 비용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224명의 재산의 4%에 불과하다"는 글에서 그들의 문제의식은 충분히 드러난다.

이들은 1993년 세계은행이 <세계개발보고서 : 건강에 대한 투자>를 펴낸 후 세계은행과 IMF 등은 "사회 불평등을 줄이고 건강을 증진시킨다는 관점으로부터 멀어져 질병으로 인한 사회적 부담을 줄이기 위해 값싸고 효과적인 최소한의 개입만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인간의 고통으로부터 질병으로 관심이 옮겨가고, 따라서 사회의 포괄적인 건강 형평성이라는 관점보다는 특정 질병에 대한 의료 서비스의 제공이라는 관점으로 변화한 것이 세계의 불평등을 증대시키고 인간의 건강을 퇴보시켰다는 지적이다.

쿠바는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보건의료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저자들의 답은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쿠바를 베낄 수는 없지만 훌륭한 참고서는 된다는 것이 이들의 결론이다. 사실 소아마비, 말라리아, 뎅기열 등을 사실상 퇴치한 것은 다른 중남미 국가에 비교해 볼 때 월등한 것이며 HIV/AIDS 감염에 대한 예방은 미국보다도 낫다. 어머니와 아이들의 건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혁명수호위원회, 여성연맹, 전국소농연합 등의 '운동권' 이름의 단체들이 지역 주민들의 참여와 역능화(dmpowerment)라는 지점에서 다루어진다는 점이 한국의 시민사회에서는 생소할 수 있고 또 정부가 이를 수십 년 동안 지속적으로 지원하고 있다는 점은 더욱 생소하지만 실제로 이러한 적극적 주민 참여를 통해 쿠바가 실제로 보건의료 분야에서 높은 '성적표'를 올린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인구의 15%나 되는 고혈압 환자를 주로 식이요법이나 운동으로 치료한다는 방침이나 암에 대해서도 예방이나 건강 증진이 기본 방침이라는 것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혹시 이 나라는 약도 없는 것 아닌가? <열한 번째 테제로 살아가기>(박미영·신영전·전혜진 옮김, 한울 펴냄)이라는 책의 저자로 한국에서 알려진 리처드 레빈스는 이렇게 얘기한다. 쿠바는 천국이 아니다.

"어디에나 문제는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과에 대한 통계들을 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보건의료 체계는 실제로 작동하고 있고 현재도 문제 개선을 통해 꾸준히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의약품 부족 같은 문제는 분명한 사실이다. 무역 봉쇄 조치 때문에 심각한 물자 부족 현상을 경험하고 있으며, 필요한 의약품이 1000이라면 국내에서 조달 가능한 것은 겨우 5~600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쿠바가 의료 기술이 뒤지거나 약이 없는 나라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쿠바는 의료 관광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나라다. 아바나의 많은 병원들이 10%의 병상을 의료 관광을 위해 내놓고 이 재원으로 무상 의료를 시행한다. 또 중남미의 많은 의사들이 암 수술을 위해 환자를 쿠바로 보낸다. 쿠바의 병원(이른바 2, 3차 의료)은 상당한 의료 수준을 갖추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의료 관광은 있을 수 없다. 또 모든 의약품을 자체 생산하지는 않지만 쿠바가 당뇨병 환자나 고혈압 환자를 약도 없이 운동이나 식이요법만 시키는 나라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쿠바가 교조적일 정도로 예방과 건강 증진이라는 원칙적인 방침을 밀고나갈 수 있는 것은 저자들이 잘 지적하듯이 1차 의료가 견고하기 때문이다. 1차 의료를 한국에서처럼 동네의원 정도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쿠바의 의사 숫자는 1000명당 5.8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의 2배 정도다. 그리고 더 많은 숫자의 간호사와 사회복지사들이 주민들과 함께 산다.

의사 한 사람당 120~150가구가 맡겨지고 1층에는 병원, 2층에는 의사의 집이 있다. 오전에는 진료를 하고 오후에는 방문 진료를 한다. 필자처럼 엉터리 의사라도 한 동네에서 5년 정도만 진료를 하게 되면 단골 환자 집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어떤 생활 습관이 문제인지를 알게 되기 마련인데 아예 한동네에서 살고 왕진을 이렇게 자주 간다?

고혈압, 당뇨는 물론, 암이라도 예방이나 건강 증진을 기본 방침으로 삼는 것은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지역 주민단체들(혹은 지역의 '완장'? 혹은 마당발들? 무어라 부르던)이 돕고 정부 지원까지 꾸준하다면 말이다. 하여튼 이러한 만성 질환 관리에서도 쿠바는 결과를 놓고 볼 때는 선진국에 뒤지지 않는다. 평균 수명이 이를 보여준다.

물론 관료주의의 문제가 있을 것이고 개인의 자유 문제가 당연히 있다. 쿠바의 1차 의료는 많은 사람들이 한 동네에서 수십 년을 사는 쿠바의 봉쇄 경제 하에서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다는 점을 이 책의 저자도 밝히고 있다. 폴 파머의 <권력의 병리학>(김주연·리병도 옮김, 건강과대안 기획, 후마니타스 펴냄)에서도 쿠바의 이런 문제를 다룬다. 쿠바는 HIV/에이즈 환자들을 강제 격리 조치 시켰다. 이는 당연히 상당한 비판을 불러왔다.

그러나 군사 시설에 환자들을 가두었다는 미국 측의 비판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는 점을 폴 파머가 밝히는데 이는 초기 몇 년간의 일이었고 (초기의 환자들은 주로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쿠바 병사들이었다는 점은 <또 하나의 혁명, 쿠바의 일차 의료> 이 책에서 밝혀진다) 1994년 이후에는 환자들이 격리된 마을에서 살지 말지를 본인이 결정하도록 했다는 것이 폴 파머가 직접 격리 마을을 찾아가 본 다음의 결론이다.

더욱이 폴 파머는 미국 측의 비판이 얼마나 위선적인지를, 쿠바의 '자유스러운' 격리 마을과 미국으로 피난 온 아이티 난민을 격리 조치한 미국의 관타나모 수용소를 비교함으로서 그 차이점을 역겨울 정도로 생생히 드러낸다. 여기까지 오면 쿠바의 '관료주의'와 '개인의 자유의 억압'이라는 것이 어디까지가 미국과 서방 측의 악선전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를 다시 물어야 할 것이다.


▲ <또 하나의 혁명 쿠바 일차 의료>(린다 화이트포드 로렌스·브랜치 지음, 최영철·김승섭·김재영·오주환 옮김, 메이데이 펴냄). ⓒ메이데이
아마도 이 책에서 가장 시사적인 부분은 "공공보건의 공공성을 다시 생각해 보다"라는 7장일 것이다. 저자들은 두 가지 모델을 제시한다. 그 하나는 "빌 앤드 멜린다 게이츠 재단 등이 신봉하는 것"으로 "특정 질환이나 특정 인구 집단을 대상으로 하고 생명공학의 역할을 중시하는 모델"이다.

다른 하나는 쿠바와 같은 모델이고 "포괄적 서비스를 특징"으로 하고 "형평성을 목표로 하고 낮은 기술에 의존하며 인적 자원을 중시하는 모델"이다. 저자들은 이 게이츠 모델이 현재 세계적이거나 지역적인 "공공보건 프로그램의 정책을 결정하거나 재원을 분배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세계은행, 록펠러그룹, 게이츠재단 및 몇몇 제약회사들이 결정정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말한다.

한국은 어떤가? 또 어떤 모델을 좇아가야 할 것인가? 이것이 이 책이 한국 사회에 던지는 의미일 것이다. 한국의 현재 상황은 시장 지향적인 의료가 횡행하는 가운데 국민건강보험이 그나마 형평성을 겨우 최소한으로 지켜주는 상황이고 이것조차 무너뜨리기 위한 여러 의료 민영화 조처가 광풍처럼 들이닥칠 태세다.

한국은 도시의 경우 연간 거주 이동이 인구의 30%에 가깝다. 한국의 의사는 1000명당 1.7명에 불과하여 OECD의 반 정도이고 쿠바에 비하면 30%도 안된다. 그리고 의대를 졸업하려면 연 1000~2000만 원의 등록금이 든다. 웬만한 집이 아니면 마이너스 통장을 가져야만 한다. 한국의 대안이 쿠바일 수 있을까? 당연히 쿠바는 우리의 대안이 아니라고 말하기는 쉬울 것이다. 또 한국에서의 쿠바는 여러모로 북한과 겹쳐 보인다.

그러나 나는 감히 말하건대 한국 의료의 상황은 상상력을 가지지 않으면 문제를 풀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 한국과 같이 쿠바보다 3~4배는 잘 사는 나라가 쿠바만큼의 평등한 보건의료도 가지지 못하는 것일까? 쿠바보다 민주적이면서도 쿠바보다 훨씬 첨단 의료기술을 잘 활용하는 의료 체계를 우리는 가질 자격이 없는 국민일까?

왜 정부는 국립의과대학만이라도 학생들을 무상 교육을 시키고 의무적으로 공립의료기관에 배치할 수 없는 것일까? 왜 우리보다 국민 소득이 낮았을 때 유럽 국가들이 이루어 낸 무상 의료 체계를 우리는 아직 못 만들어 낸 것일까? 왜 모든 유럽에 있는 주치의제도가 한국에는 없는 것일까?

쿠바는 우리의 대안이 물론 아니다. 그러나 쿠바의 의료 체계는 우리에게 '심지어' 쿠바처럼 가난한 나라에서조차도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조직되면 놀라운 일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책의 첫 페이지는 "쿠바에서는 모든 것이 정치적이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쿠바의 보건의료 체계는 우리에게 한국 사회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보건의료 체계와 사회 체제가 지금과 같은 모든 것이 상품이고 돈인 세상이 아니라, 다른 세상일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다른 의료 체계는 가능했고 지금도 가능하다는 것이 이 책이 보여주는 미덕일 것이다.

사족 : 이 책에 실린 정호현 독립영화감독의 추천 글. 쿠바에서 연애하고 결혼하여 쿠바를 삶의 터전으로 살게 된 이의 이 글은 매혹적이다. 이 글만으로라도 책값의 반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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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자녀를 둔 부모라면, 덧셈이라도 가르쳐서 학교에 보낼 요량으로 애를 책상 앞에 앉혀놓고 그림까지 그려가며 이리저리 가르쳐보다가, 결국 아이에게 화를 버럭 내거나, 연필로 책상을 치면서 답답해하거나, 밤에 맥주캔을 따면서 한숨을 쉬어본 경험이 한번쯤 있으리라. 나는 "저 나이 때 안 저랬는데" 푸념까지 해가면서 말이다.

그러나 착각 마시라. 당신도 '자신의 판박이' 아이마냥 저랬다. 세상의 모든 어린이들은 숫자를 따분해하고, 수학을 어려워하며, 연산은 도통 뭔 얘기를 하는지 낯설어 한다. 도대체 아이들은 왜 수학을 어려워하는 걸까? 연산을 하는 동안, 아이들의 뇌에선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그것이 궁금한 독자들에게 반가운 책이 출간됐다.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생리학교실의 안승철 교수가 쓴 <아이들은 왜 수학을 어려워할까?>(궁리 펴냄)가 바로 그 책이다. 그가 번역해 2004년에 나온 <우리 아이 머리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궁리 펴냄)는 아이가 성장하는 동안 뇌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궁금해 하는 세상의 모든 부모가 읽어야할, 발달신경생물학을 체계적으로 알기 쉽게 정리한 책이다 (그런 점에서 <십대들의 뇌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바버라 스트로치 지음, 해나무 펴냄) 역시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아이들은 왜 수학을 어려워할까?>(안승철 지음, 궁리 펴냄). ⓒ궁리
그런, 안승철 교수가 이번엔 직접 집필에 나섰다. 그가 관심을 가진 주제는 아이들의 수학 지능. 아이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 숫자를 이해하고, 사칙연산의 개념을 터득하는지, 사교육 시장의 문제집과 대한민국의 학교 교육은 아이들의 인지 발달 과정에 잘 맞춰져 있는지 집중적으로 검토한 책이다. 우리 아이가 수학을 잘하길 바란다면, 그래서 아이에게 수학을 제대로 가르쳐주고 싶다면, '그들이 어떻게 수를 받아들이고, 연산을 배우는지'를 부모가 잘 알아야하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얼마나 유익할까? 이 책을 한마디로 평가하자면, 글쎄…. '소름끼치게 잘 쓴 책은 아니지만 나름 분명한 성과와 한계를 가진 책, 부모보다는 교사에게 더 유용할 책'이라고 정리하고 싶다. 과연 이 책의 성과는 무엇이고, 한계는 무엇일까?

이 책의 앞부분은 아이들이 수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지를 검토하고 있는데, '초등 수학 교육의 권위자' 이안 톰슨의 편저 <Teaching and Learning Early Number>(Open University Press, 1997)와 이 책에 인용된 참고 문헌에 상당부분 의존하고 있다. 2008년에 개정판이 나오기도 한 이안 톰슨의 편저 <Teaching and Learning Early Number>는 초등학생의 수학 교육을 위한 발달심리학자들의 연구 논문을 모은 책으로, 그 동안 어린이 수학 교육의 이론적 틀을 제공해온 '피아제의 인지발달이론'을 비판하고 수학 교육의 대안을 마련하고자 기획된 책이다. 유아들에게 바람직한 수학 교육의 방향과 실제적인 교수 방법을 제시하기 위해 쓰인 책으로, 우리나라에선 정민사에서 2002년에 <어린이 수학 교육>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바 있으나, 널리 알려지진 않은 책이다.

피아제의 이론에 따르면, 아이들이 수 개념을 갖기 시작하는 것은 7세 이후. 따라서 그 전에 수학을 가르치려 시도한다면, 아이들이 왜곡된 수 개념을 갖게 되거나 흥미를 잃을 수 있어, 7세 이후에 교육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30년간 발달심리학자의 정교한 실험에 따르면, 아이들은 3~4세 무렵 이미 3 이하의 수에 대한 개념을 선험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며, 그 무렵 이미 실생활에서 적용한다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이안 톰슨과 그 동료들은 7세 이전에 수에 대한 개념과 추상적 상징 체계를 적절하게 가르치면, 오히려 유익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 안 교수는 책의 앞부분에서 톰슨 그룹의 주장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마지막 결론 부분에선 이것이 선행 학습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해 조심스럽게 언급하고 있다). 이 책에서 앞부분의 미덕이라면, 저자가 톰슨의 책을 바탕으로 신경심리학 실험 내용을 충실히 소개하고 있어서 '아이들의 수 개념 이해'에 대한 과학적 근거를 배울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교사에게 각별히 유익할 것이다.

이 책에서 아마 학문적으로 가장 논란이 될 만한 부분은 아이들이 사칙연산을 어떻게 하고 받아들이는가를 다룬 3장과, 현재 아이들이 풀고 있는 문제집은 적절하게 구성돼 있는가를 고찰한 5장일 것이다. 앞부분과는 달리, 이 부분은 대개 저자의 개인적인 경험과 학문적 가설에 근거를 두고 있다. 물론 꽤 그럴듯하게 들리며, 자신의 주장을 (아이를 둔 아버지답게) 아주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어 유익함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과학적 근거를 대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로 지적될 수 있다. (독자들이 과학적 사실과 저자의 주장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혼동할 수 있다는 얘기다.)

아이들의 사칙연산 처리 과정을 '작업 기억(working memory)'을 중심으로 설명하는 것은 일견 타당하나 아쉬움이 크다. 실제로 수학 연산을 담당한다고 알려진 뇌의 다양한 영역, 이를테면 앞중심이랑(precentral gyrus)이나 마루엽(parietal lobe), 각이랑(angular gyrus), 그리고 배측전전두엽(dorsolateral prefrontal cortex) 등이 연산 과정에서 어떻게 기여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었더라면 부모나 교사 모두에게 더 유익했을 텐데 말이다.

이 책의 매력은 거스트만증후군(계산 불능(acalculia)을 보이는 손가락실인증 환자)을 포함해 수학적 사고 능력이 떨어지는 장애나, 남녀의 수학 능력의 차이, 동물도 숫자 개념이 있는가 등 수학과 관련된 흥미로운 주제를 폭넓게 탐색하고 있어, 자녀가 없는 일반 독자라도 흥미롭게 읽을 만한 책이다. 물론, '수학 영재들의 사고 과정'에 대한 논의가 없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지만.

또 하나, 이 책에서 아쉬운 대목은 거창하게 '아이들이 수학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말해줄 것처럼 시작했으나, 결국 사칙연산에만 그 논의를 국한해 설명했다는 점이다. 공간 지각 능력을 바탕으로 한 '공간과 도형'(그러니까 말하자면 기하학)이라든가, 패턴 인식, 추론과 문제 해결 등 수학적 사고의 근간을 이루는 다양한 지적 능력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을 해주지 않고 있다는 점이 크게 실망스럽다.

'사고 공간 안에 위치한 도형을 어떻게 인식하는가'의 문제나, '대뇌가 특징적인 수학 패턴을 어떻게 찾아내는가'의 문제, '대뇌가 논리적인 연결고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인과율을 처리하는가'의 문제, '문제 해결을 위한 추론 과정은 어떻게 되는가'의 문제, '그 과정에서 두정엽과 전전두엽의 역할은 각각 무엇인가'의 문제 등은 최근 신경과학 분야에서 가장 주목하고 있는 분야 중 하나인데, 이런 부분들이 논의가 돼 있지 않아 아쉬움이 크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 가장 실망스러운 부분은 정작 이 책은 "아이들이 왜 수학을 어려워할까?"라는 야심찬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왜 아이들이 수학을 어려워하는지, 어떤 아이들은 수학을 잘 하는데 뒤떨어지는 아이는 무엇이 다른 것인지 등 우리가 정말 알고 싶은 문제들에 대해선 해답을 들려주지 않은 채 마지막 책장이 덮힌다.

글쎄…, '연산 개념도 없는 애들 데리고 너무 일찍 가르치려 하지 마라' 정도? 이 책은 부모에게 '서두르지 마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물론 그 말은 백번 옳은 말이다) 기다린다고 해서 애들이 누구나 저절로 수학을 잘하게 되는 것은 아니니까 답답할 노릇이다. <아이들은 어떻게 수를 배우는가?>가 이 책에 합당한 제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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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회사의 대출 고객 가운데 한 명이 아파트 가격이 떨어지고 결국 그 집이 경매에 넘어가 자살했습니다."

얼마 전 트위터 상에서 이뤄진 주택 문제에 관한 집단 간담회를 진행했을 때, 한 금융기관 중견 간부는 상당히 충격적인 증언을 내놓았다. 그는 계속된 증언에서 "주택 담보 대출 연체율이 사상 최저 수준이지만 금리가 오르기 시작하면 아파트 가격의 70% 이상이 대출인 채무자는 극단적인 판단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수도권에는 이미 비참한 '하우스 푸어'들이 많다"며 "이걸 언론에서 숨기고 있을 뿐"이라고 비판했다.

이 같은 그의 발언은 이미 하우스 푸어(house poor) 문제가 이미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런 가운데 이미 하우스 푸어들이 넘쳐나는 실태를 적나라하게 소개한 책이 출간됐다. 바로 문화방송(MBC) <PD수첩>의 김재영 PD가 최근 출간한 책 <하우스 푸어 : 비싼 집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더팩트 펴냄)이다.

김재영 PD는 지난해 '판교, 그 욕망의 땅', '강남 재건축의 그늘', '재건축 늪에 빠진 사람들', '2010, 아파트의 그늘', '인천은 세일 중' 등 주택 시장의 적나라한 실태와 사회경제적 문제점을 심층 취재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이 같은 심층 취재를 통해 부동산 문제에 대해 상당한 전문 역량을 축적한 PD이기도 하다. 김 PD의 공력 덕분인지 <하우스 푸어>는 출간 직후부터 단기간에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이들의 실태를 다룬 언론 보도가 잇따르는 등 세간의 화제를 낳고 있다.


▲ <하우스 푸어 : 비싼 집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김재영 지음, 더팩트 펴냄). ⓒ더팩트
사실 김재영 PD의 고발이 아니더라도 이미 수도권 곳곳에는 '집 가진 빈자'들인 이른바 하우스 푸어들이 매우 빠른 속도로 양산되고 있다. 다들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을 뿐 속을 끙끙 앓고 있는 이들이 곳곳에 널려 있다.

사실 하우스 푸어라는 말은 우리에게 낯설다. 결혼할 때 집 장만하는 것이 '능력'의 표상이고, '돈 생기면 집부터 사라'는 것이 한국 재테크의 불문율 1조 1항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일 수도 있다. 그만큼 국내에서 집을 소유한다는 것은 중산층이 된다는 표상이었고, 경제적 안정의 징표였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떤 집을 어느 곳에 소유하고 있느냐에 따라 신분이 구분되는 2000년대를 통과해왔다. 이런 사회에서 '집 가진 빈자'는 형용모순처럼 느껴지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하우스 푸어는 점점 냉엄한 현실이 돼가고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분당, 용인, 평촌, 일산, 파주, 김포, 인천 청라와 송도뿐만 아니라 서울 강남 3구를 비롯한 각종 뉴타운 및 재개발 재건축 단지 곳곳에서 비슷한 사례를 접할 수 있다.

필자가 김재영 PD의 요청으로 하우스 푸어의 숫자를 추정해본 결과 기존 주택과 신규 분양물량 매입을 통해 발생한 하우스 푸어만 수도권에서 95만 가구, 전국적으로는 198만 가구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런 수치는 매우 보수적으로 잡은 것이다.

왜 그럴까. 우선 앞의 수치에는 수도권 고점 가격인 2006년 이후 주택 매입자만 포함돼 있다. 지방의 경우 이미 2004~2005년경에 주택 가격 상승을 멈춘 지역이 많아 실제로는 하우스 푸어 상태에 들어가 있는 가구 비율이 수도권보다 더 많을 것이다. 또 이 수치에는 아파트가 아닌 단독과 연립주택 매매 거래를 통해 하우스 푸어 상태가 된 사람들도 제외돼 있다.

더구나 향후 하우스 푸어는 더욱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주택 시장을 둘러싼 거시경제 흐름상 주택 가격이 대세 하락 흐름으로 가게 될 것임은 이제 부인하기 어려운 현실이 되고 있다. 이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주택 가격 하락으로 하우스 푸어들이 점점 더 많아질 것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특히 주택의 자산 가치가 떨어지는 가운데 주택 담보 대출 거치 기간이 돌아오면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 있다. 한국은행 보고서를 보면, 원금 상환이 시작될 경우 추가 대출 없이 첫해에 즉시 부동산을 처분해야 하는 가구가 전체 부채 가구의 14.9%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사실 주택 담보 대출의 거치 기간 만기가 2008~2009년에 도래하게 돼 있었으나 정부의 조치로 만기가 연장됐다.

하지만 필자가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2012년 하반기에 이르면 분기별로 25조 원 이상의 만기 상환 연장 물량이 쏟아지게 된다. 주택 가격이 하락하는 가운데 그 정도 만기 물량이 도래할 경우 금융권이 계속 만기를 연장해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만기를 더 이상 연기해줄 수 없을 때 이들 하우스 푸어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소유한 집을 처분하고 빚을 갚아야 하는 상황에 몰릴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애초부터 그들이 모두 소득이 적은 사람도 아니었다. 무리하게 집을 사지 않았으면, 저축을 하며 충분히 중산층 수준의 삶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집 없는 중산층에서 집 가진 하류층으로 전락한 것이다. 돈 덩이인 줄 알았던 집은 이제 빚 덩이였고, 자신들의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족쇄가 돼버린 것이다.

지금까지 본 것처럼 하우스 푸어 문제는 앞으로 갈수록 심각해질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2000년대 부동산 거품기의 후반에, 그리고 지난해 막차에 올라탄 사람들 대다수는 소득 여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사람들이 무리하게 빚내서 집을 산 경우들이어서 집값 하락에 따른 충격이 더욱 클 것이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하우스 푸어로 전락할 것을 생각하면 큰 걱정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필자는 지난해 내내 '부동산 막차에 올라타지 말라'고 그토록 경고했던 것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 김재영 PD의 책 <하우스 푸어>는 한국 사회가 앞으로 직면하게 될 문제를 예리한 감각으로 포착해낸 '발로 뛴 저널리즘'의 훌륭한 성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로서는 뾰족한 방법이 없다. 시장경제에서 모든 투자는 자기 책임 하에 이뤄지는 것이다. 집값이 오를 때는 투기 차익을 몽땅 차지하고, 집값이 내릴 때는 손실을 사회에 전가하는 것을 무작정 용납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한동안은 하우스 푸어 문제에 대해서도 다소 냉정한 자세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는 광기의 투기 거품 시대를 지나 정상으로 돌아가야 할 때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보다 부동산 투기 잘 하는 사람이 더 인정받고, 집 있는 사람이 집 없는 사람을 괄시하고, '집값 떨어진다'고 주장하면 집 없어서 배 아파하는 사람 취급하고, 아이에게 아이 친구 부모가 어느 아파트에 사는지 물어봐야 하고, 집값 올리려고 외국어고등학교와 같은 특수 목적 고등학교 유치에 목숨을 걸고, 집값 떨어진다고 임대 주택이나 장애인 시설 들어서는 것을 반대하고,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도 임대 주택 아파트는 담장으로 막고, 아파트 부녀회에서 집 있는 아줌마만 모여 집값 담합 반상회를 하고, 우리 동네 집값이 저평가돼 있으니 더 올려 받아야 한다고 악다구니를 쓰고, 집값이 올라야 하기 때문에 불필요한 토건 개발 사업에 찬성하고, 집값이 올라야 하기에 집값 올려줄 것 같은 저질 정치인을 국민의 대표로 뽑고…이제는 이런 비정상을 끝내야 하는 시기가 됐다.

그렇다 하더라도 하우스 푸어 한 사람 한 사람은 결국 우리의 이웃이요, 가족이다. 2000년대 부동산 투기 광풍 시대를 살아온 우리 사회의 어느 누가 이 부동산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결국 하우스 푸어는 부동산 투기 광풍 시대가 남긴 상흔이자, 우울한 자화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런 우울한 풍경을 만들어낸 책임은 부동산 기득권 세력들에게 있다. 정부와 정치권의 거듭된 정책 실패, 건설 업체와 부동산 광고에 목을 매 선동 보도에 열을 올렸던 언론, 그리고 부동산 투기 선동에 열을 올렸던 부동산 정보 업체와 엉터리 전문가들이 바로 그들이다. 하우스 푸어는 이들 부동산 기득권 세력이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만든 부동산 거품이라는 덫에 걸려든 사람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현재로서는 그런 잠재적 하우스 푸어들이 더 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제라도 정부가 적극적으로 가계 부채 다이어트를 유도해야 한다. 그런데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내에는 부동산 버블이 없다'며 일반 가계를 현혹하기 바빴던 부동산 광고에 목을 맨 상당수 신문들이 다급해지자 이제는 부동산 거품 붕괴로 당장이라도 한국 경제가 무너질 것처럼 과장하며 DTI규제를 풀어서라도 부동산 거품을 떠받치라고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지금도 가계 가처분 소득 대비 가계 부채 규모가 140%를 상회해 세계 최고 수준인 상태에서 부동산 거품을 유지하기 위해 가계 대출을 더 늘리라고 촉구하는 행태는 어처구니가 없다.

부동산 광고에 목 맨 상당수 언론은 "집값 떨어진 지금이 집을 살 타이밍"이라며 물귀신처럼 멀쩡한 가계를 하우스 푸어의 행렬로 끌어들이는 선동 보도에 여념이 없다. 정부 또한 부동산 거래 활성화라는 명목 아래 거품 잔뜩 묻은 아파트 폭탄을 받아줄 '잠재적 하우스 푸어'를 계속 양산하려 하고 있다.

일반 가계는 이들 부동산 기득권 세력의 마지막 선동에 넘어가지 말기를 바란다. 이들의 선동에 넘어가는 순간 '잠재적 하우스 푸어'가 될 초청장을 받아든 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김재영 PD의 책 <하우스 푸어>는 국민에게 빚을 권하는 부동산 기득권 세력의 덫에 걸려들어 선량한 국민들이 '하우스 푸어'로 전락하지 않도록 하는 훌륭한 백신 역할을 하는 책이다. 부동산 시장이 대세 하락기에 접어든 지금도 '부동산 불패 신화'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부동산 시장 주변을 맴돌고 있는 분들께 <하우스 푸어>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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