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 선생님께

아이티에서 보낸 메일은 잘 받았습니다. 대지진이 일어난 아이티에 잠깐 머물겠다고 가신 지 벌써 1년이 넘었군요. 지구 반대편에서 고국 바로 곁에서 일어난 끔찍한 소식을 들었으니 많이 놀라셨지요? 사실 한국의 사정도 마찬가지랍니다. 지난 3월 11일부터 일본에서 일어난 지진, 지진 해일, 원자력 발전소 사고 때문에 온 국민이 정신을 반쯤 놓고 있습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계속 아이티에서 던진 선생님의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물으셨죠?

"강 기자, 아이티도 아닌 일본에서 어찌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대지진과 잇따른 지진 해일이야 천재지변이라고 치더라도, 원자력 발전소 사고는 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원래 원자력 발전소는 심각한 사고가 10만 년에 한 번꼴로 일어나도록 안전 설계를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일본이 저렇게 엉성하게 안전 대책을 세웠을 줄은…."

일본 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선생님과 똑같은 의문을 떠올린 모양입니다. 이번 사고가 어느 정도 수습되면, 일본 원자력 발전소의 안전장치에 대한 포괄적인 점검이 진행되겠지요. 그 과정에서 이번에 지적된 많은 허점이 보완될 것입니다. 그 와중에 관계자 몇몇은 사고의 책임을 지고 타박도 받겠지요.

그러고 보면, 그 동안 원자력 발전소와 같은 대형 사고가 날 때마다 항상 비슷한 모습이 재연되곤 했던 것 같아요. 늘 사고만 나면 언론에서 '인재(人災)' 타령을 하다가, 희생양을 찾는 게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이번 사고도 일본의 원자력 전문가의 '안전 불감증'이 부른 인재일까요? 안전장치만 좀 더 보강하면 더 이상 이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을까요?

사소한 문제가 낳은 참사


▲ <그 개는 무엇을 보았나>(말콤 글래드웰 지음, 김태훈 옮김, 김영사 펴냄). ⓒ김영사
벌써 30년이 넘었군요. 1979년 3월 28일 미국 스리마일 섬 원자력 발전소에서도 큰 사고가 났습니다. 이 스리마일 섬 사고는 공식적으로 원자력 발전소 노동자의 잘못으로 발생한 인재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이 사고는 인재였을까요? 진실은 훨씬 복잡했던 것 같습니다.

먼저 스리마일 섬에서 그날 진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찰스 페로의 <Normal Accidents : Living with High Risk Technology)>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책은 아직 번역이 안 되어 있습니다만, 핵심 내용은 <아웃라이어>(노정태 옮김, 김영사 펴냄)로 유명한 미국 기자 말콤 글래드웰의 <그 개는 무엇을 보았나>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①스리마일 섬 사고는 냉각수를 거르는 거대한 필터가 막히면서 시작됐다. 사실 이 문제는 드물게 발생하는 것도, 심각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②필터가 막히면서 습기가 공조 시스템으로 새어 들어가 2개의 밸브를 작동시키는 바람에 냉각수가 차단되면서 문제가 커지고 말았다.

당시 스리마일 섬 발전소에는 이러한 상황에 대비한 비상 냉각 시스템이 있었지만 ③그날은 웬일인지 비상 냉각 시스템을 작동시키는 밸브가 열리지 않았다. 더구나 ④밸브가 닫혔음을 알리는 표시등이 그 위에 있던 스위치에 달린 수리 기록표에 가려져 있었다. 그래도 세 번째 안전장치인 압력 조절 밸브가 작동했다면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⑤공교롭게도 압력 조절 밸브는 고장이 나 있었다. 닫혔어야 할 압력 조절 밸브는 계속 열려 있었고 그 사실을 알리는 계기마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엔지니어들이 상황을 파악했을 때는 이미 원자로의 (노심이) 용융되기 일보직전이었다. 이처럼 스리마일 섬 사고는 다섯 가지 이상의 문제가 겹치면서 일어났다. (<그 개는 무엇을 보았나>, 301쪽)

자, 어떻습니까? 그렇습니다. 그 날 스리마일 섬 원자력 발전소는 지독히 운이 없었습니다. 하나씩 일어났으면 대수롭지 않게 대응했을 일들이 '우연히' 여러 개가 겹치면서 예상치 못한 상호작용을 통해 거대한 문제를 일으킨 것입니다. 사실 이런 일은 일상생활에서도 아주 많습니다.

저만 해도 그렇습니다. 어느 날, 정오까지 보내야할 중요한 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①문서를 집 컴퓨터에 저장만 해두고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②오전에는 대개 집에 있던 동생도 그날은 일찍 학교로 나갔습니다. ③급한 마음에 택시를 탔는데 길이 막혀서 도로에서 시간을 허비해야 했습니다.

④얼른 집에 달려갔더니 주머니에 열쇠가 없습니다. 아침에 열쇠를 챙기지 않고 나온 것입니다. ⑤집을 잠그고 나간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수업 중인지 휴대전화를 꺼놓은 상태입니다. 결국 저는 강제로 문을 따고 집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간은 이미 오후 1시였습니다.

사실 이런 비슷한 경험은 누구나 한 번쯤 있을 것입니다. 자, 어떻습니까? 일상생활에서도 서너 개의 불운이 겹쳐서 때로는 심각한 결과를 낳는 일이 많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인간이 만든 가장 복잡한 인공물 중 하나인 원자력 발전소에서 스리마일 섬 사고와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페로는 앞에서 언급한 책에서 스리마일 섬 사고와 같은 재난을 '정상 사고(Normal Accident)'라고 부릅니다. 페로가 보기에, 원자력 발전소와 같은 복잡한 인공물이 작동하는 과정 속에서는 항상 사소한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고 그런 문제들이 겹쳐서 발생하는 사고는 피할 수 없습니다.

일본의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는 어떻습니까?

귀찮은 문제가 낳은 참사


▲ <불확실한 세상>(김명진 외 지음, 사이언스북스 펴냄). ⓒ사이언스북스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의 정체를 파악하는데 참고가 될 만한 책이 한 권 더 있습니다.

다이앤 본의 <챌린저 호 발사 결정(The Challenger Launch Decision : Risky Technology, Culture and Deviance at NASA)>. 이 책 역시 번역은 되지 않았습니다만, 글래드웰의 같은 책과 <불확실한 세상>에 실린 김명진의 글에서 그 핵심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챌린저 호 폭발 사고를 기억하시죠? 1986년 1월 28일 발사 후 73초 만에 산산조각나면서 승무원 7명이 전원 사망한 그 비극적인 사건 말입니다. 우주 비행사가 아닌 서른일곱 살의 여교사 크리스타 맥컬리프도 이 사고로 사망해 큰 충격을 주었지요. 저도 텔레비전에서 활짝 웃고 있는 맥컬리프의 사진을 보면서 가슴이 아팠던 기억이 납니다.

이 챌린저 호 사고의 원인은 명확히 밝혀져 있습니다. 우주 왕복선을 발사할 때 추진력을 더해주는 로켓 부스터의 틈새를 막는 고무 부품인 오링(O-ring)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당일 아침의 추운 날씨 때문에 고무로 만들어진 오링이 탄성을 잃었고, 이 때문에 연결 부위로 뜨거운 분사 가스가 새어 나오면서 대형 사고로 이어진 것이지요.

여기까지만 보면, 챌린저 호 사고는 전형적인 '인재' 같습니다. 그러나 다이앤 본은 <챌린저 호 발사 결정>에서 또 다른 진실을 보여줍니다.

NASA의 엔지니어들은 우주 왕복선이 처음 발사되기 훨씬 전인 1977년부터 오링의 틈새 문제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우주 왕복선 발사시 생기는 오링 틈새의 크기를 알아내기 위해 지속적인 실험을 진행했고, 실험 결과의 불확실성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놓고 힘든 협상을 거쳤다.

그 결과 그들은 오링의 틈새와 그로부터 빚어질 수 있는 손상이 '수용 가능한 위험(Acceptable Risk)'이라고 보고 우주 왕복선의 발사를 추진했다. 그리고 1981년부터 10여 차례에 걸쳐 우주 왕복선을 성공적으로 발사하는 과정에서 오링이 손상된 사례가 때때로 발견되기는 했지만, 그러한 오링의 손상은 우주 왕복선의 실패로 이어지지 않았다." (<불확실한 세상>, 302쪽)

심지어 발사 당일 아침에는 엔지니어들 사이에 토론도 있었습니다. 몇몇 엔지니어들이 오링 손상의 문제를 강하게 제기했지만, 그 전에 훨씬 더 손상이 심했을 때도 우주 왕복선을 성공적으로 발사시켰던 다수의 관리자, 엔지니어들은 그런 의견을 묵살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지극히 정상적이었습니다. 다이앤 본은 이렇게 말합니다.

"챌린저 호 발사에 이르는 결정은 규칙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그런데 과거에 단 한 번도 잘못된 적 없던 문화, 규칙, 절차, 규범이 이번에 문제를 일으키고 말았다. 챌린저 호 폭발 사고는 간부들이 비도덕적인 계산을 하기 위해 규칙을 어겨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규칙을 따른 끝에 일어난 것이었다." (<그 개는 무엇을 보았나>, 305쪽)

선생님, 생각해 보십시오. 1987년에 챌린저 호는 이미 세 차례나 성공적으로 발사에 성공했었습니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낳아야 하는 엔지니어들 입장에서는 이렇게 성공이 반복될수록 '수용 가능한 위험'의 대상을 더욱더 늘렸을 것입니다. '직접 해봤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잖아!'

어디 오링뿐이겠습니까? 우주 왕복선을 구성하는 크고 작은 부품 중에는 오링처럼 '수용 가능한 위험'을 안고 있는 것들이 수없이 많았겠지요. 설사 오링의 틈새 문제를 많은 비용(!)을 들여서 해결했다고 하더라도, 제2, 제3의 문제가 곳곳에 똬리를 틀고 있다가 운이 안 좋았을 때 사고의 원인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요?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에 사고가 난 발전소는 1971년부터 무려 40년간 가동 중이었습니다. 물론 그 동안에 크고 작은 사고가 많았습니다만, 결정적인 사고는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당연히 지난 40년간 원자력 전문가, 노동자는 알게 모르게 '수용 가능한 위험'의 숫자를 늘렸겠지요.

이런 상황에서 이번 후쿠시마 사고를 미리 막을 수 있었을까요?

잠재적 문제가 낳은 참사


▲ <인간과 공학 이야기>(헨리 페트로스키 지음, 최용준 옮김, 지호 펴냄). ⓒ지호
선생님,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가 지진 해일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뜬금없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를 떠올렸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 중 하나로 꼽히는 이 금문교는 1937년에 세상에 등장했습니다. 거센 조류, 짙은 안개, 험한 지형 등 온갖 난관을 뚫고 건설한 이 다리를 미국 토목학계에서는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지요.

1937년 5월 27일, 20만 명의 시민이 모여서 진행한 개통식을 보면서 엔지니어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뿌듯함을 느꼈다데요. 20만 명이 다리 위에서 자유롭게 거니는데도 전혀 문제가 없었으니까요. 그 엔지니어들은 50년이 지나고 나서야 자기들이 미처 포착하지 못했던 위험을 알게 됩니다.

1987년 금문교 개통 50주년을 맞아서 샌프란시스코 시는 다리를 오가는 차량을 통제하고 50년 전과 마찬가지로 시민에게 다리를 완전 개방합니다. 새벽부터 10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구름처럼 다리로 몰려들었습니다. 다리의 양쪽에서 출발한 시민들이 다리 가운데서 만났을 때는 다리 위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모두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약 25만 명의 시민이 다리 위에 서 있었고, 금문교는 지난 50년 동안 버텨 왔던 어떤 무게보다 훨씬 많은 무게를 버텨야만 했습니다. 네, 정말로 아찔한 순간이었습니다. 다리 중간 부분이 3m나 아래로 축 쳐졌고, 다리를 매단 케이블 몇 가닥이 이미 느슨해진 상태였으니까요.

만약 그 때 누군가가 "다리가 무너진다!" 하고 외마디 외침이라도 질렀다면, 수십만 명이 그대로 수장되는 대참사가 일어났을 것입니다. 다행히 그런 공포 분위기를 조장하는 사람은 없었고(다리 위에 있는 사람은 사실 위험을 몰랐습니다!), 사람들이 우왕좌왕 움직일 수 있는 공간도 없어서 사고는 피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의 엔지니어들은 금문교가 개통된 지 50년이 지나서야, 설계를 할 때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문제가 이 다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수십 만 명의 시민이 수장 직전까지 가는 상황을 감수하고서야, 대형 사고를 일으킬 수 있었던 금문교의 숨은 결함을 밝혀낸 것입니다.

사실 현대의 인공물을 둘러싼 온갖 사연을 살펴보면, 이런 일은 부지기수입니다. 헨리 페트로스키가 <인간과 공학 이야기>에서 강조했듯이, 안타깝게도 대다수 엔지니어들은 성공보다 실패에서 배웁니다. 그래서 마이크 마틴과 롤랜드 신진저는 아예 이런 과정을 '사회적 실험'이라고 부릅니다. (<불확실한 세상>, 299~300쪽)

원자력 발전소, 우주 왕복선, 다리가 안전하게 제 역할을 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실제로 그것을 사용하는 것뿐입니다(사회적 실험). 아무리 사전에 검사를 많이 하더라도 최종 검사는 그것이 사회 속에 던졌을 때야 비로소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최종 검사는 금문교의 예처럼 긴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때로는 대참사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지금 일본의 원자력 전문가들은 땅을 치며 후회하고 있을 것입니다. '지진 해일이 원자력 발전소를 덮쳐서 발전소의 모든 전기가 끊어지는 상황에 대비했어야 했는데…' 하고요.

글쎄요. 어떤 방법이 있었을까요? 바닷가의 원자력 발전소를 다 폐쇄해야 했을까요? 만약의(?) 위험을 대비해 엄청난(!) 비용을 들여서 해일이 덮쳐 정전이 생겨도 냉각 기능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원자력 발전소를 개조라도 했어야 했나요? (물론 불가능합니다!) 이런 식으로 따지기 시작하면, 지금 원자력 발전소 중에서 걱정없이 가동할 수 있는 게 남아 있을까요?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일어나자마자 청와대까지 나서서 "국내의 원자력 발전소는 안전하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국내의 원자력 발전소는 일본보다 안전장치를 훨씬 더 많이 해놓았기 때문이랍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입니다. "원자력 발전소 바로 밑에서 진도 6.5의 지진이 나도 끄떡없다." 진도 7.0 이상의 지진이 나면 어쩌려고요?

스리마일 섬 사고, 챌린저호 사고 또 후쿠시마 사고를 살펴보면, 이런 호언장담이 얼마나 의미 없는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대형 사고는 평소에는 통제가 가능했던 사소한 문제들(스리마일 섬 사고), 평소에는 위협이 아니었던 귀찮은 문제들(챌린저 호 사고), 평소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잠재적 문제들(후쿠시마 사고)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후쿠시마 사고, 문명사적 전환의 기회다!

K 선생님이 이렇게 푸념하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강 기자, 그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위험을 안고 사는 방법뿐이잖소?"

글쎄요. 스리마일 섬 사고, 챌린저 호 사고 또 후쿠시마 사고는 분명히 우리가 만든 세상은 첨단 기술의 실패가 낳은 재난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그것을 분명히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 곁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위험을 인정한다고 해서,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찰스 페로는 <정상 사고>에서 위험을 세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첫째 대단치 않은 조치만으로도 감소시킬 수 있는 위험, 둘째 대응하는 데 중대한 노력을 요구하는 위험, 셋째 어떤 편익도 훨씬 능가하는 위험이 그것입니다. 일단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마주치는 여러 가지 인공물을 놓고서 이것이 어떤 위험을 초래할지 따져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첫 번째, 두 번째의 경우에는 헨리 페트로스키가 지적했듯이 실패로부터 배우는 과정을 통해서 위험을 줄여나가도록 노력해야겠지요. 그리고 세 번째 위험의 경우에는 그것을 폐기하고, 대신할 대안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서로 다른 가치와 이해를 가진 시민들 사이의 논쟁도 불가피할 테고요.

이런 사정을 염두에 두면 현대 과학기술이 낳은 인공물의 위험은 우리에게 또 다른 민주주의를 요구합니다. 이제 전 세계에서 또 한국에서 원자력 에너지를 둘러싼 대논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원자력 에너지는 페로가 말은 세 가지 위험 중 어디에 속할까요?) 이런 논쟁은 그 자체만으로도 소중합니다. 소수의 에너지 전문가와 정책 관료가 독점해왔던 에너지 권력에 균열을 낼 테니까요.

더 나아가서 우리는 조만간 선택을 해야할 것입니다. '원자력 발전소와 핵무기로 상징되는 원자력 에너지와 그 위험을 계속 안고 갈 것인가?' 후쿠시마 사고는 어쩌면 문명사적 전환점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전환을 만드는 것 역시 바로 우리의 역량에 달렸을 테고요.

다음 편지에서는 문명사적 전환을 둘러싼 갑론을박을 유쾌하게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부디 후쿠시마 사고가 지금보다 더 최악의 상태로 번지지 않기를 기대합니다. 특히 지금 후쿠시마에서 핵 재앙을 막고자 마지막까지 사투를 벌이는 수십 명의 원자력 발전소 노동자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선생님께서도 아이티에서 기도를 부탁합니다.

2011년 3월 18일

강양구 드림.


이 글에 등장하는 'K 선생님'은 가공의 인물입니다.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가슴 조리며 지켜보는 독자 여러분이 바로 'K 선생님'입니다. 이 글에 나오는 여러 가지 내용은 다음 책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후쿠시마 사고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위험의 총량 : 챌린저 호 폭발 사고의 또 다른 진실', <그 개는 무엇을 보았나>(말콤 글래드웰 지음, 김태훈 옮김, 김영사 펴냄).

'실험실을 벗어난 과학 기술, 확대된 불확실성', <불확실한 세상>(김명진 외 지음, 사이언스북스 펴냄).

<인간과 공학 이야기>(헨리 페트로스키 지음, 최용준 옮김, 지호 펴냄).

안타깝게도 이 책에서 중요하게 언급되는 찰스 페로의 <정상 사고(Normal Accidents : Living with High Risk Technology)>와 다이앤 본의 <챌린저 호 발사 결정(The Challenger Launch Decision : Risky Technology, Culture and Deviance at NASA)>은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습니다. 눈 밝은 편집자들의 관심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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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 현장에서 노래도 하고 이곳저곳에 글도 기고하는 음악가인 D와는 대학을 함께 다닌 친구다. 언젠가 친구들 여럿이 함께 학교 매점에서 컵라면에 만두 따위를 늘어놓고 식사를 때우고 있었는데, 라면 면발을 거의 다 먹었을 무렵 D가 외쳤다. "싫어! 이건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한테도 안 주던 거야!" 그러면서 날름, 뭔가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누가 뭘 뺏어먹으려 했나 보다. 정색하는 그의 나무젓가락이 닿은 곳을 쳐다보니 하얀 바탕에 분홍색 회오리무늬가 들어간 '소용돌이 맛살'이 있었다. 별 맛도 없고 식감도 뚜렷하지 않은 그 건더기에 어머니까지 들어가며 집착하다니, 황당하면서도 회가 동했다. 늘 헤헤거리는 성격에 돌아가신 어머니 얘기를 거의 꺼내지 않는 그였기에, 이런 황당한 시점에 슬쩍 끼워 얘기하는 게 괜히 짠하기도 했다. 남은 국물과 함께 음식물 버리는 곳 위로 흘려보내던 그 맛살이 그날부터 '뺏기면 안 되는 것'으로 승격한 것이다.

졸업 직후 잠시, 국내 굴지의 대기업…과 같은 사옥을 쓰던 잡지사에서 일했다. 당시 점심시간이면 동료·선배들은 모두 사옥 11층의 대기업이 운영하는 '짬밥' 식당으로 이동했지만, 나는 늘 1층 입구의 카페로 갔다. 11층 식당이 워낙 복잡하고, 짬밥이 싫기도 했지만 그 카페에서 파는 당근 머핀이 기막히게 맛있었기 때문이다. 직원 카드로 1000원이면 먹을 수 있는 대기업 백반을 포기하고 2.5배나 되는 값을 주고 머핀으로 식사를 하면서도, "이렇게 맛있는 머핀을 멀리 가지 않고 매일 먹을 수 있다니"라며 감동하곤 했다.

그 머핀과 재회한 곳은 한때 출입처였던 통일부 기자실 냉장고 앞에서였다. 'OO건물 1층에서만 팔아요'라고 트위터에서 자랑이라도 할까 했던 '나만의 머핀'이, 똑같이 생긴 치즈, 과일, 초콜릿 머핀 등과 함께 4행 3열로 맞춰져 대형 할인점 '코스트코' 박스 안에 가지런히 포장되어 있는 것이었다. 순간 신설동 풍물시장에서 파는 전투식량이 떠올랐다. 가격도 1000원 백반보다 100원 싼 900원이라 했다. 평소 대량 생산되는 프랜차이즈 빵집 빵을 '개무시'하고 작은 빵집을 전전하던 자칭 '빵 덕후'로서, 멋쩍은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 <오무라이스 잼잼>(조경규 지음, 씨네21북스 펴냄). ⓒ씨네21북스
이상의 사례에서 본 바대로 우리 주변에 흔해빠진 '일상 음식'들은 각자의 경험이나 시점에 따라 잠시나마 소중한 것, 특별한 것이 되곤 한다. 소용돌이 맛살이건 코스트코 머핀이건 전국 어딜 가나 똑같은 맛을 내며 도시 어디에 표류되어도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지만, 기억과 맞물리면서 한 명의 친구, 한 때의 착각이라는 고유한 포장지에 담기는 것이다.

사실 <잡식동물의 딜레마>(조윤정 옮김, 다른세상 펴냄)의 마이클 폴란 같은 이들이 "제발 먹으려거든 '음식(food)'을 먹어라"라고 당부하는 것처럼, 도시에 진열된 먹을거리들은 대부분 공장에서 찍어낸 '먹을 수 있는 공산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컵라면 소용돌이 맛살이나 대형 할인점 머핀 같은 것 자체만이 아니라 심지어 원재료라는 밀가루마저, 엄밀히 따지면 플레이도우(컬러 점토) 같은 장난감과 별 차이가 없다. 삼켜서 소화를 시킬 수 있다는 것, 영양소 표기를 달고 나온다는 것만 빼면 말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점이 역설적으로 식도락 만화 <오무라이스 잼잼>(조경규 지음, 씨네21북스 펴냄)의 탄생과 이 책의 부제에 나오는 '경이로운 일상 음식'이란 수사를 가능하게 한 특징이 아닌가 싶다. 포털사이트 '다음'에 지난해 4월부터 7월까지 27회에 걸쳐 연재된 동명의 웹툰을 예쁘게 묶은 이 책은 '음식 같은 물질', 흔해빠진 음식 이야기들로 그득하다.


ⓒ조경규
저자와 아내, 딸 은영이와 아들 준영이 등 네 가족이 먹고 소개하는 음식들은 자장면이나 피자, 뼈다귀 해장국처럼 비교적 '요리'에 속하는 것도 있지만 포테이토칩과 맛동산, 컵라면과 스팸처럼 그야말로 공산품에 속하는 유사 음식들이 대다수다. (소개된 음식 중 경험하기 어려운 건 '스님이 담을 넘는다'는 뜻의 중국요리 불도장(佛跳墻), 홍콩의 '거북 젤리' 정도다.)

<오무라이스 잼잼>에 <신의 물방울>의 와인이나 <미스터 초밥왕>의 스시처럼 특정 장소에서만 맛볼 수 있는 '귀한' 요리가 등장하지 않음에도 '경이로운' 음식 이야기가 가능한 이유는 대략 이렇다. 언제 어디서나 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수백 수천만의 다른 경험들로 먹혀질 수 있고, 장난감처럼 출시 비화나 포장지의 발전 과정 등 산업 제품으로서의 매력을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코카콜라 음료는 거들떠 안 봐도 그 병은 수집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면 된다.)

무엇보다 '대중'의 입맛을 길들이기 위해 고안되는 제품인 만큼, 맛과 포장 마케팅에 걸쳐 필연적으로 여러 사람이 공통적으로 반응하는 감각을 녹여내게 된다는 점. (내가 머리털 난 뒤 여태껏 라면 맛없다는 놈은 한 놈도 못 봤다!) 그건 궁핍과 무료, 허기와 우울 등 지금 여기를 사는 우리 모두가 느껴봤을 감정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작가와 가족이 2년째 중국 베이징에 머무르는 중이니 이 음식들의 공산품적 성격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하오요우취'(좋은 친구 칩)란 이름으로 팔리는 '포카칩', '하오리요우파이'(좋은 친구 파이)란 이름의 초코파이, '하오위뚜이'(아주 많은 물고기)로 둔갑한 고래밥 등 중국 마트에서도 한국의 그것과 똑같은 맛의 과자들을 만날 수 있다. (4화 부록, '중국에서 만나는 한국 과자')


ⓒ조경규
부부끼리 울릉도를 여행하던 중 만난 어느 민가의 할아버지는 "내가 일하다가 힘들 때마다 조금씩 마시는 것"이라며 황토색 즙을 사발에 건네는데, 다름 아닌 믹스 냉커피였다. (8화 '울릉도 냉커피') 울릉도 특산 자양강장제가 아닐까 하는 예상은 믹스커피의 위력 앞에 무릎을 꿇는다.

이 장난감 음식들이 울릉도부터 베이징까지 징그럽게도 퍼져 있다며 세계화나 입맛 평준화에 혀를 찰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이 그 전에 입맛을 다시고 있을 거다. 포카칩보다는 '프링글스'가 맛있지, 프링글스 중에는 치즈나 양파 향을 첨가한 것보단 오리지널이 짱이지, 하면서 공산품 안에서도 분명히 취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이제는 "OO 카페의 OO산 원두로 내린 커피가 맛있더라"고 말하는 기자도 학생 시절 도서관 앞 자판기에서 뽑아 먹곤 하던 300원짜리 냉커피를 떠올리며 그때만 누릴 수 있었던 여유와 풍경을 추억했다. 언젠가 커피 믹스가 온 국민의 커피 취향을 통일시키고 있는 게 무섭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게 그리 큰일은 아닌 것 같았다. 어딜 가나 똑같은 맛이기에 '싸구려 커피'라는 정서 또한 공감을 살 수 있는 것 아니겠나.

만화가·그래픽 디자이너인 저자 조경규는 중화요리 식도락 만화인 <차이니즈 봉봉클럽>, 동물 캐릭터 둘의 만담형 상황극 <내 이름은 팬더댄스> 등 다른 만화에서도 뛰어난 음식 묘사 능력을 보인 바 있다. 그러나 전작들을 보면서는 큰 재미를 느끼진 못했다. 내용은 훌훌 넘기면서, 소개된 음식점에 한 번 가보고 싶다거나 '이렇게 만들어 먹으면 맛있지 않을까'하는 느낌을 받은 정도였다. 그런데 <오무라이스 잼잼>은 받아들자마자 단숨에 읽고, 대부분의 식사를 함께 하는 남자친구에게도 추천한다며 손에 쥐어주었다.


ⓒ조경규
왜일까. 이 만화 속 맛 공동체로 등장한 게 다름 아닌 저자와 저자의 가족이어서가 아닐까. 식구(食口)는 그리스 신화부터 일일 연속극까지 동서고금 비극적 서사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오무라이스 잼잼>의 사각 틀 안에서처럼 가장 친밀하고 밥맛 오르게 하는 존재다.

사이좋고 먹성이 좋은 것 뿐 아니라 이 가족은 만화 주인공으로 등장하기에 아주 적절한 요소를 갖췄으니, 바로 귀여운 아이들 은영이와 준영이다. 누나 은영이는 실수로 연못에 도끼를 빠트린 나무꾼은 흥하고, 일부러 빠트린 나무꾼은 망한다는 '금도끼와 은도끼'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부터 '실수로'는 착한 것, '일부러'는 나쁜 것을 이르는 줄 착각하고 모든 행동에 '실수로'를 갖다 붙인다. 동생 준영이는 자석낚시 놀이용 열대어를 접시에 담아 아빠에게 내밀며 "이건 굴비야. 굴비는 딸기 맛이랑 사과 맛 두 가지야"라고 주장한다. 가족에게 실례되는 표현일지 모르겠지만, 이들은 직접 낳고 기르고 관찰하지 않으면 만날 수 없는 훌륭한 만화 '소재'다.

오므라이스도 잼도 메인 메뉴로 등장하지 않지만, 제목이 <오무라이스 잼잼>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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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이 "제3의 경제학"이기 때문에 과연 그것이 어떤 경제학일까가 가장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이 책에서 말하는 제3의 경제학은 '생태 경제학'과 '행복 경제학'을 '짬뽕'한 경제학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준다.

우선, 이 책은 정통 경제학(이른바 주류 경제학)이 우리의 현실을 호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시장을 무작정 옹호함으로써 우리 인류를 파멸의 길로 몰아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 대량 생산과 소비의 증가로 인한 환경 악영향이 지구의 수용 능력(자연의 한계)을 크게 초과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류 경제학은 이를 너무 과소평가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다.


▲ <제3의 경제학>(줄리엣 쇼어 지음, 구계원 옮김, 위즈덤하우스 펴냄). ⓒ위즈덤하우스
주류 경제학은 시장에서 가격이 어떻게 형성되고 그 가격이 어떤 역할을 하는가를 중점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다. 바로 이 가격은 자본주의 시장에서 생산 활동과 소비 활동을 주도하는 막중한 지표다. 지난 수십 년간 대량 생산 덕분에 상품의 가격이 전반적으로 꾸준히 낮아졌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상품의 소비가 크게 증가하였다.

상품 생산의 증가와 소비 증가가 자원 고갈과 생태계 파괴의 주된 원인임에도 불구하고 시장의 가격에는 이것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다. 따라서 생산자나 소비자는 자원 고갈 및 생태계 파괴를 무시한 활동을 영위하게 된다. 예를 들면, 햄버거와 삼겹살의 소비가 수질오염의 주된 원인임에도 불구하고 소비자들은 이런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햄버거와 삼겹살을 마구 소비한다.

물론 주류 경제학 학자들도 이런 사실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 이들은 자원 고갈과 생태계 파괴가 상품의 가격에 반영되도록 정부가 세금을 올린다든가 기타 적절한 경제적 인센티브방법을 이용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성향이 강한 경제학자들은 자원 고갈 문제가 상당한 정도로 시장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서 석유가 점차 고갈되고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지만, 정말 그렇다면 석유 가격이 크게 오르면서 사람들이 석유를 아껴 쓰게 될 뿐만 아니라 석유를 절약하는 기술과 석유를 대체하는 기술이 재빨리 개발된다. 따라서 시장에서 문제가 스스로 해결된다. 1970년대 초반 세계적 석유 파동 때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주류 경제학이 주장하는 방법들이 미봉책에 불과하다고 본다. 환경오염과 환경 파괴의 정도를 직접적으로 좌우하는 주된 요인은 상품의 무게나 부피 등 물량이지, 그 가격이 아니다. 자본주의 시장에는 상품의 물량을 직접적으로 통제하는 장치가 내재되어 있지 않다.

상품의 물량에 대한 통계 자료조차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를 들면, 가격의 저렴화로 의류의 소비는 크게 늘었지만, 작년에 우리나라에서 팔린 그 많은 옷들 각각의 무게나 부피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 알아내기도 매우 어렵다. 생산자나 소비자 모두 의류의 가격과 디자인에만 신경을 쓸 뿐 그것의 무게나 부피에는 아랑곳도 하지 않는다.

주류 경제학 학자들은 앞으로 눈부신 과학의 발달과 기술 진보가 자원 고갈 문제와 생태계 파괴 문제를 해결해준다고 장담하고 있다. 그러나 과학의 발달이나 기술 진보 그 자체도 에너지를 소모하는 활동임을 간과하고 있다. 과거와 같이 에너지 가격이 저렴할 때는 기술 진보가 빠른 속도로 이루어질 수 있었지만, 앞으로 에너지 가격의 지속적 상승으로 에너지가 비싸지면 기술 진보 역시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이다.

설령, 기술 진보가 잘 이루어진다고 해도 이것에 우리 인류의 미래를 걸 수는 없다. 기술 진보 덕분에 에너지 및 자연 자원 이용에 있어서 효율이 크게 높아졌으면 결과적으로 에너지 이용량이나 자연 자원 이용량도 감소해야 옳다. 허나, 지금까지의 추세에 비추어보면, 현실은 정반대로 움직이고 있다.

에너지 이용량 및 자연 자원 이용량은 계속 증가일로에 있다. 예를 들어서 자동차의 연비가 크게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이 때문에 사람들이 자동차를 더 자주, 더 많이 운행하며 자동차를 더 많이 사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에너지 이용량은 오히려 늘어났다. 각종 가전제품의 에너지 효율이 크게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전력 사용량은 크게 늘었다. 즉, 기술 진보로 인한 에너지 효율의 상승효과가 에너지 소비의 증가로 압도되어 버렸다. 이것이 이 책이 강조하는 '반동 효과'인데, 요컨대 반동 효과 때문에 기술 진보의 위력은 그리 믿을 바가 못 된다는 것이다.

주류 경제학의 가장 치명적 약점은 생태계를 경제 이론 내부로 끌어들이지 않고 마치 먼 산 바라보듯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1970년대 초반 <성장의 한계>라는 책이 나와서 인류의 위기를 역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대하여 가장 격렬한 비판을 가한 학자들은 바로 주류 경제학 학자들이었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 특히 자연과학자들이 지구 온난화 문제를 걱정하고 있지만, 윌리엄 노드하우스와 같은 저명한 주류 경제학 학자는 지구 온난화가 인류에게 손실보다는 오히려 이익을 더 많이 가져올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지구 온난화를 비롯한 환경 파괴와 자원 고갈이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전반적으로 기업의 수익률을 떨어뜨림으로써 앞으로 경제가 더욱 더 나빠질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실제로 수요 증가 및 자원 고갈 탓으로 지난 수년 간 원자재 가격이 꾸준히 오르면서 세계 경제에 큰 부담이 되고 있다.

더욱이 미래의 세계는 과거보다 불확실성으로 인한 변덕이 더욱 더 심해질 것이다. 예를 들자면, 기후 변화가 어떤 불상사를 어느 정도 심하게 몰고 올지 아무로 점칠 수가 없다. 2008년 미국 발 금융 붕괴로 갑작스레 세계적 불황이 온 것처럼, 경제적으로 보면 미래의 전망은 매우 어둡다. 이제 흥청망청하는 시대는 지났을 뿐만 아니라 설령 세계 경제가 회복된다고 해도 앞으로 흥청망청하던 과거로 돌아가서는 절대 안 된다고 이 책은 힘주어 말한다.

이제는 우리 인류 모두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이 책은 부르짖고 있다. 이 책의 원제목은 "풍요(Plenitude)"이다. 우리는 앞으로 풍요로운 삶은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이 말하는 풍요로운 삶이란 어떤 것인가? 이 책은 풍요로운 삶을 위한 네 가지 원칙을 제시하고 있는데, 우리 모두가 귀담아들을 만한 것들이다.

그 첫째는 앞으로는 시간에 쫓기는 생활을 지양하고 시간적으로 여유 있는 삶을 추구해야 한다. 과거의 삶이 물자는 풍부하지만 시간적 여유가 없는 삶이었다면 미래의 삶은 시간이 풍부한 삶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간을 많이 가지기 위해서는 우선 근로 시간을 줄임으로써 여가를 더 많이 확보하여야 한다. 물론 근로 시간을 줄이면 소득이 감소할 수 있다. 하지만, 늘어난 여가 시간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잘 활용한다면 소득 감소의 손실을 얼마든지 상쇄하고 남는다.

우선, 여기에서 강조해둘 것은 어느 정도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된 다음에는(예컨대 1인당 소득 수준이 대략 2만 달러가 넘으면) 소득 증가의 행복 창출 효과가 크게 감소한다는 점이다. 이미 선진국에서는 지난 반세기 동안 1인당 국민소득이 크게 증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행복지수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이 소득의 증가가 행복에 기여하지 못하는 현상을 "행복의 역설"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근로 시간의 감축으로 소득이 다소 줄더라도 여유 시간을 보람 있게 사용한다면 얼마든지 전보다 더 행복해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사회의 경우 경쟁은 점점 더 치열해지고 근로 시간은 늘어나고 있다. 이제는 주당 50시간을 일하는 전문가도 많다.

근로 시간이 늘어남으로써 소득은 늘었지만, 결과적으로 더 행복해지지 못하는 현상이 보편화되고 있다. 왜 그럴까? 많은 사람들이 행복의 조건에 대하여 잘 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돈이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고정관념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풍요의 두 번째 원칙은 필요한 물건이나 서비스를 시장에서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자체 조달'하거나 만들거나 키우거나 직접 처리하라는 것이다. 지난 수년 간 미국에서는 가구나 가정용품을 직접 만들어 사용하는, 이른바 '자체 제작(DIY : Do It Yourself)'이 크게 증가하였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앞으로는 채소도 직접 길러 먹고, 마을 단위로 공동 농사를 지으며, 물물 교환을 많이 하는 방향으로 우리의 생활을 바꾸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각자 더 큰 행복을 위해서 여가를 사용하게 되며 동시에 자원 고갈이나 생태계 파괴를 줄일 수 있다.

풍요의 세 번째 원칙은 '진정한 물질주의'다. 이 책이 말하는 '진정한 물질주의'란 쉽게 말해서 허영심이나 과시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상품의 소비가 아니라 오직 상품의 참된 기능만을 생각하는 소비를 말한다. 멀게는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거나 가깝게는 과거 반세기 선진국을 돌아보면서 얻는 한 가지 교훈은, 어느 정도 먹고 살만큼 소득 수준이 높아진 다음부터는 사치품의 생산이 크게 늘어나면서 사치품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급속도로 높아진다는 것이다.

선진국, 특히 미국의 경우 부자들의 허영심과 과시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상품의 생산과 소비가 자원 고갈과 환경 파괴의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 그런 상품의 소비는 결코 지구를 존중하는 소비가 아니다. 앞으로 선진국부터 지구를 소중히 여기는 소비방식을 추구해야 함을 이 책이 강조하고 있다.

풍요의 마지막 원칙은 사람과 지역 사회에 대한 투자를 앞으로 대폭 활성화하는 것이다. 시장 중심 경제가 몰고 온 폐해 중의 하나는 지역 사회가 유명무실해지고 사람들 사이의 유대가 약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칼 마르크스가 100여 년 전에 이미 예상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는 돈 벌기에 급급하고 노동자는 먹고살기에 급급하다보니 직계 가족 이외의 사회적 교류에 투자할 시간이 부족하다. 이제 지역 사회와 공동체의 활성화를 통해서 인간관계를 복원하며 사회적 자본의 형성에 힘을 쏟아야 한다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오늘날 가정에서 취할 수 있는 현명한 전략은 시장이라고 불리는 조직 및 제도에서 서서히 벗어나는 것이다. 사람들이 여가를 더 많이 가지면 자기 자신을 위해서 투자할 시간도 늘어나고 사회적 교류를 활발히 하며 생태계 복구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여력도 가질 수 있다. 이 결과 우리 모두가 더 행복해지며 지속가능한 발전도 가능해진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느끼는 한 가지 아쉬움은, 소비의 문제를 깊이 다루면서 인간의 탐욕의 문제를 깊이 파고 들이 않았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시장은 우리 인간을 끊임없이 이기적으로 만들고 탐욕스럽게 만든다. 2008년 세계 경제 위기도 결국 미국인의 탐욕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인간의 탐욕이 경제 위기를 초래하고 있고 환경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그러나 경제학이라는 학문은 인간의 욕망을 절대시하고 신성시한다. 제3의 경제학은 필히 인간의 탐욕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다루는 경제학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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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잘사는 집 아이들이 더 공부를 잘하나?>(한울 펴냄)의 저자 신명호가 "왜 잘사는 집 아이들이 더 공부를 잘하나"를 연구하고 있다고 하자 원래 학술 논문이라는 게 누구나 다 아는 뻔한 이야기를 쓰는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잘사는 집 애들이 공부를 잘 하는 것은 해는 동쪽에서 뜨고 서쪽에서 지는 것처럼 당연한 진리로 인식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잘사는 집'은 곧 경제력이 좀 되는 집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사교육에 보다 많은 물량을 투입할 수 있고, 그래서 잘사는 집 애들이 공부를 잘하는 건 보편타당한 진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돈과 시간을 자녀 교육에 투여하는가가 아니라 왜, 그리고 어떻게 투여 혹은 투여하지 않는가를 설명하고자 한다. 저자는 중산층 이상의 환경에서 부모가 명문 대학에 진학할 수 있도록 자녀에게 온갖 정성을 기울여 원하는 대학에 진학시킨 경우, 그러나 아무리 잡도리를 해도 부모의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하는 소위 그저 그런 대학에 진학시킨 경우, 저학력 노동자층 부모의 자녀이고 부모 쪽에서 공부에 대한 잔소리나 관심이 전혀 없었지만 공부에 대한 본인의 승부욕과 노력이 투철해 명문 대학에 진학한 경우, 역시 저학력층 노동자이며 자녀 쪽에서도 공부에 특별한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별다른 잡음 없이 실업계나 전문대에 진학한 경우 등 다양한 경우를 인터뷰해 실었다. 그 중에서 소위 강남 엄마들의 사례는 자식을 '겉 낳지 속 낳냐'는 말을 무색하게 한다. 아이가 공부에 별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 싶을 경우 즉시 철저한 '리모델링' 작업에 들어가는 것이다.


▲ <왜 잘사는 집 아이들이 공부를 더 잘하나?>(신명호 지음, 한울 펴냄). ⓒ한울
물론 중산층이나 저학력 노동자층 모두 남에게 지기를 싫어하고 공부로 인정받는 것을 즐기는 승부욕이 투철한 학생들도 있었지만 이렇게 부모가 공부 작작 하라고 말릴 정도의 효자 효녀는 흔하게 탄생하는 것이 아니다. 애들은 다 놀기 좋아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잘사는 집 엄마들은 이렇게 아이들을 '방치'하지 않는다. 텔레비전 보고 있으면 눈치 주는 것 정도야 당연한 일이고 아예 아이를 책상 앞에 앉혀 놓고 그 앞에 자신도 똑같이 마주 앉아 있는 엄마, 부모가 외출한 사이 컴퓨터에 시간을 낭비할까봐 파워 케이블을 뽑아가지고 외출했다가 만전을 기해 아예 외출할 때 드라이버로 컴퓨터 슬롯을 분해해 비디오 카드를 빼 가지고 나가는 엄마, 학원 스케줄에 맞춰 자가용으로 데려다 주고 데리고 오면서 안전과 효율을 꾀하면서 동시에 친구들을 만나 시간을 허비할 기회를 애초에 차단한 엄마 등 연예인 매니저 저리 가라 할 만큼의 사생활 관리는 기본이고 원하는 대학에 최종 합격하기 위해서는 스포츠 감독이 되어야 한다.

선수, 즉 자녀의 정확한 실력과 강점, 약점을 세밀히 파악해서 무슨 과목 어떤 단원이 약하니 그에 맞는 사교육 강사를 초빙하는 등 그때그때 적절한 학업 전술을 탄력적으로 구사하는 것은 물론, 인문계냐 특수 목적 고등학교냐부터 어떤 대학의 어떤 입시 전형에 응모할 것인가를 세밀히 연구한다. 실제로 이 엄마들 중에는 입시 학원의 상담실장으로 스카우트된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교육 열망'을 의식화시킨다.

바로 이것이 중산층과 저소득층 부모들의 차이다. 중산층 엄마들이 아이에게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동기를 심어주면서 계속 주입하는 것은 공포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 부모 자신이 가진 계층 하강에 대한 공포심이기도 하다. '우리 집이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해도 될 만큼 받쳐줄 재벌 가문이 아니니 먹고 살려면 네가 벌어야 되고 그러려면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 정도의 약한 수준으로 시작해서 '가수가 될 만큼 노래를 잘하지도 않고 선수가 될 만큼 운동을 잘하지도 않고 장사를 잘할 것 같지도 않고 공부 말고 네가 잘하는 게 뭐냐'라고 조목조목 짚어 주는 퇴로 끊기 작전, 텔레비전에서 노숙자나 어려운 사람이 나오면 일일이 불러다가 '공부 못하면 저렇게 된다'라는 본격적 협박까지 중산층 부모는 그들이 경험한 대로 예술 등 다른 진로보다 가장 안전성이 높은 '공부'만 바라보도록 자녀를 이끌어 나간다.

"네가 지금 10 중에서 한 5 정도의 수준에서 살고 있는데, 네가 4로 떨어져서 살 수 있겠니? 그건 못사는 거 아니냐? 사람이 레벨 업을 하려고 노력해야지, 그 밑으로 떨어지면 괴로워서 못산다"라고 늘 주입했다는 중산층 엄마와 비교해 볼 때 "자식이 스스로 알아서 공부하면 좋지만, 그렇지 않고 공부를 싫어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싫어하는 걸 부모가 억지로 시켜봐야 무슨 소용인가? 하지만 공부를 안 하더라도 아주 크게 잘못되지는 않는다. 못 배워도 어떻게든 살긴 산다"라는 저소득층 노동자의 아버지의 의견은 언뜻 고상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 '어떻게든 살긴 사는 것'이 아마 중산층 엄마의 눈으로 보기에는 '죽지 못해 사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대체적으로 저소득층 부모들은 자녀에게 공부하라고 닦달을 덜 하는 편인데, 부모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동을 하느라 자녀 교육에 투자할 노동력이 남아나지 않을뿐더러 공부를 해서 상층 계급에 올라갔을 경우를 겪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자녀를 솔깃하게 할 모델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이 책은 말한다.

반면 중산층 부모들은 단물을 실컷 맛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자신 있게 말하고 또 컨트롤하는 것이 가능하다. '경기고-서울대 출신으로 중고등학교 다닐 때 별로 공부도 안 했지만 케이에스 마크 덕에 평생 벌어먹고 살았다'는 아버지의 증언처럼 생생한 모델이 바로 앞에 있으니 솔깃해질 수밖에 없다. 공부하라고 자녀를 모질게 닦달하지 않는 저소득층 부모들이 소박하거나 검소해서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 줄 능력도 없고, 명문 대학을 나왔을 때 어떠한 이점이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라는 이 책의 지적은 가슴이 아프다.

개천의 용은 멸종한 지 오래 되었고, 앞으로도 시험에 나오는 문제를 효율적으로 정확하게 푸는 능력만을 일방적으로 검증하는 입시 제도도 쉽게 바뀔 성 싶지 않다. 게다가 요즘은 잘사는 집 애들이 공부만 잘하는 게 아니다. 다 잘한다. 키도 크고, 얼굴도 잘났고, 옷도 잘 입고, 교양 있고, 심지어 성격까지 좋다. 그런 요즘 애들의 연애에서 최근 많이 성행하는 찔러보기, 간 보기 등등은 어릴 때부터 어쩔 수 없이 생성된 습속일지도 모르겠다. 잘 사는 집 아이고 못 사는 집 아이고 할 것 없이 계층 상승에 대한 선망과 기대보다 몰락에 대한 공포를 동력으로 삼아왔는데, 어디 수준 떨어질까 봐 무서워서 함부로 연애하겠는가. 그리고 그런 애들을 까는 건 참 쉽다.

"요즘 애들은 왜 이렇게 겁이 많나, 영악하게 따지느냐, 손해 안 보려고 하느냐…." 그러게 말이죠, 참 이상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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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학기에 문을 연 고려대학교의 신축 기숙사는 민간 자본으로 시설을 짓고 외부 업체가 운영하며 수익을 가져가는 방식으로 지어졌다. 이 새로운 민자 기숙사의 한 달 입주비는 식비를 제외하고 39만5000원. 학교가 직접 운영하던 기숙사에 비하면 비용이 두 배를 훌쩍 넘는다. 이 학교는 지난 2008년 등록금 인상분으로 총 175억 원을 챙겼으며 그 해에만 적립금으로 412억 원을 쌓아뒀다.

영리 추구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비영리법인인 학교 재단이 그 쓰임새도 불분명한 채로 어마어마한 돈을 해마다 남긴다는 것은 돈을 제 목적에 맞게 제 때에 쓰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곳간에 돈을 쌓아두고 1년이 멀다하고 새 건물을 지어 올리면서도 학생에게, 강사에게, 청소 노동자에게 비용을 떠넘기는 대학을 더 이상 대학이라 불러야 할까?


▲ <대학 주식회사>(제니퍼 위시번 지음, 김주연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 ⓒ후마니타스
<대학 주식회사>(김주연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의 저자 제니퍼 위시번은 원제인 "University Inc."대로 대학을 아예 기업이라 부른다. 저자가 끈질긴 취재로 미국 대학의 추악한 이면을 들춰낸 이 책을 들여다보면 대학을 왜 기업이라 하는지 고개가 절로 끄덕인다.

브라운 대학 교수 데이비드 컨은 나일론 방직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폐질환 집단 발병 사건을 조사해, 발병 원인에 대한 충분한 증거를 수집하고 이를 학회에 발표하려고 했다. 그러자 해당 기업은 컨이 현장 조사 때 서명한 비밀 유지 협약을 근거로 그를 고소하겠다고 위협했다. 기업은 위협에 그쳤으나 대학은 카운터펀치를 날렸다.

컨이 몸담고 있던 의과대학은 그에게 발표를 취소하라고 지시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강의를 빼앗고 결국엔 대학에서 내쫓았다. 내막에는 나일론 기업과 브라운 대학의 긴밀한 관계가 있었다. 기업의 오너와 가족은 브라운 대학병원의 이사회 임원이었으며, 병원의 실험실과 진료 센터를 건립하는데 막대한 돈을 댔다. 교수 하나 때문에 기업과 대학의 밀월관계를 망칠 수 없었던 것.

대학도 대학이지만 교수들, 특히 의과대학 교수들이 제약 회사와 금전적인 유착관계를 맺고 있음이 드러났다. 특정 의약품에 대한 특허권을 보유한다든지, 제약 회사의 자문 역할을 맡는다든지, 주식을 보유하는 등 제약 회사와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교수들이 해당 업체의 신약에 대한 임상 시험을 직접 수행하는데 그 결과를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논문 대필도 심심찮게 벌어진다. 제약 회사가 저명한 교수의 이름만 빌려 임상 시험에 관한 논문을 직접 쓰고 이를 학술 잡지에 버젓이 게재한다. 교수는 이름을 빌려주는 대가로 수천 달러를 챙기면 그만이다. 미국 대학에서 수행하는 임상 연구비의 80%를 기업이 댄다는데, 이렇게 기업의 돈이 밀려들수록 대학의 신뢰도 망가질뿐더러 국민의 생명마저 위태로워졌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이 있다. 다른 전문직은 (형식적으로라도) 공정한 판단을 해칠지 모르는 위험성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시늉을 하는 데 반해 대학은 교수들한테 금전적 이해관계를 공개하라고 그저 '권고'할 뿐이다. 그렇다고 연방정부의 관리 감독이 잘 이뤄지지도 않는다. 그야말로 고양이한테 생선가게를 맡긴 격이다.

물론 미국 대학은 과거부터 기업과 꾸준히 협력했다. 19세기 말 주정부가 토지를 무상으로 불하하여 설립된 주립 대학은 초기부터 공학과 농업 등 실용적인 목적의 교육을 실시해왔으며 기업이 필요로 하는 연구를 수행했다. 하지만 20세기 후반 들어 생명공학의 발전, 생명체에 대한 특허 부여, 연방정부의 대학 지원액 감소, 1980년 베이-돌 법 제정 등 연이은 사건을 거치며 대학은 급격한 변화를 경험했다. 이제 "대학과 기업 간의 경계가 없어져 버렸다." "문제는 기업의 돈이 대학으로 흘러 들어간다는 사실이 아니라 대학이 기업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이제 대학은 명실상부한 기업이 되었다.

기업이 된 대학은 대학에서 생산된 교육과 연구를 시장에 내다팔아 돈을 번다. 대학들이 돈을 벌 욕심에 정보기술(IT) 호황에 기대어 너도나도 온라인 교육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정작 교육은 부실해지고 문을 닫는 가상 대학만 속속 생겨났다. 일부 대학에선 특허와 라이선스를 통해 연구 성과를 상업화하여 '대박'을 치기도 했으나 그런 성공 사례는 극히 드물 뿐 대부분 대학에선 지적 재산권을 관리 유지하는데 오히려 돈이 더 들어가는 게 현실이다. 컬럼비아 대학은 자신이 보유한 형질 전환 관련 특허를 연장하기 위해 의회에 로비를 벌이고 생명공학 기업과 법적 소송을 벌이는데 학생들이 낸 등록금으로 비용을 충당하기도 했다.

문제는 이처럼 공격적으로 지적 재산권을 확보하려는 치열한 경쟁 탓에 연구 결과로 만들어 낸 특정 물질뿐만 아니라 연구 과정에 쓰이는 도구나 기법까지 특허를 내자 후속 연구가 방해를 받기 일쑤였다. 저자의 지적은 의미심장하다.

"새로운 쥐덫에 특허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덫으로 쥐를 잡는다는 생각 자체에 특허를 부여함으로써 더 나은 쥐덫을 개발할 동기를 없앴다."

이런 풍경은 한국에서도 낯설지 않다. 특허나 학교 기업을 통해 연구 결과를 상업화하려는 시도가 근래에 활발히 이뤄지고 있으며, 대학을 기업처럼 '경영'하는 것은 이미 보편적인 관행으로 자리 잡았다. 대학이 회사를 차리고 한약재, 건강 음료, 고추장, 햄 등 상품을 개발하여 시장에 내다판다. 최근엔 학교 기업이 학교 담장 바깥으로까지 진출할 수 있게 되었고 업종도 여관, 노래방, 담배 판매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대폭 확대되었다. 교수들은 특허출원에 열을 올린다. 대학이 자본을 출자해 주식회사(지주회사)를 설립하여 기술을 판매할 수도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적극적인 지적 재산권 확보 노력이 대학에 돈을 안겨다 준 것도 아니다. 대학이 저한테 어울리지도 않은 일을 하니 당연한 결과일 밖에. 전국의 140여 개 대학 산학협력단을 대상으로 한 해 동안 지적 재산권으로 보유한 기술·지식을 타인에게 이전하여 올린 수익을 조사한 결과 학교당 평균 1억4500만 원에 달했다. 그런데 특허를 출원하고 유지하는데 들어간 비용은 평균 1억9200만 원이었다(<2008 산학 협력 백서>).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셈. 학교 기업도 적자를 면키가 어렵다.

어디 상업화뿐이랴. CEO형 총장이랍시고 기부금 유치에 열을 올리지 않나, 비용 절감을 위해 조직을 구조 조정·아웃소싱하고 시간강사한테 학부 교육을 맡기다시피 한다. 그러면서도 학교 홍보를 위해서는 돈을 아끼지 않고 입학생을 한 명이라도 더 끌어 모아 등록금 수입을 올리려 애쓴다. 몇 년 전 미국발 금융 위기가 강타했을 당시 몇몇 사립대학이 주식 투자에 손을 댔다가 수백 억 원을 날려먹은 적도 있었다.

상황이 이쯤 되자 내부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1999년 미국 국립보건원은 세금으로 지원된 연구 도구에 지나친 독점적 라이선스를 부과하지 말라는 지침을 발표했으며, 2003년에는 영국의 왕립학회가 정보의 자유로운 접근을 보장하고 공격적인 특허 출원을 자제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저명한 경제학자, 과학자들이 특허가 아닌 좀 더 개방적인 혁신 모델을 강구하라는 서한을 세계지적재산권기구에 보낸 일도 있었다.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이겠지만 기업마저도 기업이 되어버린 대학에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미국의 유력한 기업들은 단기간에 수익을 내려는 대학의 탐욕을 비난하면서 대학이 자신의 중요한 역할을 외면하고 있음을 우려하였다. 기업 대표들은 대학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교육과 인재 양성이며 그럼으로써 기술 혁신에 크게 기여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상품 개발은 대학에 적합한 역할이 아니며, 대학이 제대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이러한 기업의 우려는 대학과 기업의 상생적 관계를 모색하는 위시번의 입장과 일맥상통한다. 저자는 대학 연구가 갖는 진정한 가치는 특정한 목표가 정해진 응용·개발 연구가 아니라 가능성이 무한히 열려 있는 기초 연구에 있으며, 그것이 궁극적으로 기업에 이익을 가져다주었음을 강조한다.

이 대목에서는 저 유명한 바네바 부시의 보고서 <과학, 끝없는 개척지>가 떠오른다. '순수 과학'의 이상을 꿈꿨던 부시는 기초 과학은 산업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국가가 나서서 지원을 해야 하며 과학자의 독립성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 보고서는 세계 대전 후 미국 과학 정책의 근간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축적된 기초 과학 지식이 종국엔 생명과 환경에 위협을 가하는 전쟁 무기와 생명공학 상품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보면 '순수 과학'을 향한 이상이 얼마나 순수했는지는 의문이다. 부시의 생각과는 달리 기초 과학과 그것의 기술적 응용이 딱 부러지게 구분되지 않으며 오히려 기초 연구 그 자체가 바로 상업적 가치를 지니는 경향이 최근 생명공학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게다가 과학(지식)은 중립적이기에 어떻게 쓰느냐에 달렸다는 주장은 이미 여러 사례들에 의해 반박된 바 있다. 착한 사람의 손에 들어가 유익하게 쓰이기만을 마냥 기다릴 것인가?

캘리포니아 대학(버클리)과 노바티스 간의 연구 계약을 조사한 외부평가단의 지적은 오늘날 기업이 대학에서 수행되는 연구에 눈독을 들이는 이유를 정확히 꼬집었다.

"노바티스가 (대학의) 식물·미생물학과와 제휴한 것은 응용 연구를 더 많이 진행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업적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는 기초과학 연구에 접근하기 위해서였다."

대학의 과학 연구가 지향해야 할 바로서 기초 연구를 주장하기엔 우린 너무 많이 달려왔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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